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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유학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군자목(장세완)
문운(文運)의 고장 봉화지역 유교문화 답사계획
1. 제6강(답사)학습계획
- 일자 : 2014년 2월 15일(토)
- 강좌명 : 봉화지역 유교문화
2. 답사일정
07 : 30 1차 집결지인 - 법원(1호차), 성서 홈플러스(2호차)출발하여 경대 집결
08 : 00 출발점검 및 반별 탑승(대학원동 서편 네거리)
10 : 00 - 10 : 30 해저마을
10 : 30 - 11 : 30 계서당. 오록마을(망와, 학사 종택), 장암정, 정간당
11 : 30 - 12 : 00 삼계서원
12 : 00 - 12 : 40 점심
12 : 40 - 14 : 00 달실마을(청암정, 충재박물관)
14 : 00 - 15 : 00 거촌마을, 쌍벽당. 황전마을, 도암정
15 : 00 - 16 : 00 법전강씨 마을, 이오당, 경체정
16 : 00 - 17 : 00 창애정, 사미정
17 : 00 - 18 : 00 만산고택, 한수정
18 : 00 - 18 : 30 저녁
20 : 30 1호차 법원 / 2호차 경북대 경유 성서 홈플러스 해산 종료
* 고속도로 상.하행 군위 휴게소 각 10분 정차
3. 참배 및 알묘
- 알묘 : 삼계서원(충재 주벽)
- 묘우참배 : 망와(김영조), 학사(김응조)
● 봉화의 유교문화 개황
봉화의 유교문화재 및 정자로는 봉화읍의 거촌리 쌍벽당(巨村里雙壁堂, 중요민속자료), 화천리의 구만서원(龜灣書院,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몽화각(夢華閣,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유곡리의 서설당(瑞雪堂, 경상북도 민속자료), 물야면의 가평리계서당(佳坪里溪西堂, 중요민속자료), 봉성면 봉성리의 봉화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등이 있다.
또한, 물야면 오록리의 장암정(藏庵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청간당(淸澗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상운면 문촌리의 무진장재(無盡藏齋,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구천리의 야옹정(野翁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법전리의 이오당(二吾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그 밖에 춘양면 의양리의 봉화한수정(奉化寒水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봉화읍 거촌리의 도암정(陶巖亭, 경상북도 민속자료), 상운면 문촌리의 종선정(種善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명호면 북곡리의 청량정사(淸凉精舍,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봉화읍 적덕리의 두릉서당(杜稜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등의 문화재가 많다.
한편 고가옥으로는, 법전면 척곡리에 봉화법전강씨종택(奉化法田姜氏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봉성면 원둔리의 오고당구택(五高堂舊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봉화읍 거촌리의 경암헌고택(畊菴軒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해저리의 해저만회고택(海底晩悔故宅, 중요민속자료) 등이 있다.
봉화읍에는 석평리의 송석헌(松石軒, 경상북도 민속자료), 문단리의 빈동재사(賓洞齋舍, 경상북도 민속자료), 의양리의 권진사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등이 있다,
이 밖에 명호면 풍호리의 감고당문적(感顧堂文籍,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물야면 오전리의 봉화초고장(奉化草藁匠,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봉화읍 삼계리의 봉화유기장(奉化鍮器匠,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봉화의 원사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세종때 봉성면 봉성리에 봉화향교가 창건되었다가 1579년 현감 조목(趙穆)에 의해 중건되었다. 1588년(선조 21)에는 봉화읍 삼계리에 삼계서원(三溪書院)이 설립되어 권벌의 위패를 봉안했고 1660년(현종 1)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1596년(선조 29) 봉화읍 화천리에 구만서원(龜灣書院)이 설립되어 금인(琴靭)·남몽오(南夢鰲)·박선장(朴善長)·권호신(權虎臣) 등을 배향하다가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고, 1967년에 복건되었다.
1804년(순조 4)물야면 수식리에 건립된 행계서원(杏溪書院)은 김강(金鋼)·김홍제(金弘濟)를 배향하다가 1868년에 철폐되었으며, 1931년에 복건되어 김용(金湧)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 밖에 도계서원(道溪書院)·단계서원(丹溪書院)·문산서원(文山書院)·오천서원(梧川書院)·동명서원(東溟書院)·문암서원(文巖書院)·인계서원(仁溪書院)·도연서원(道淵書院)·문계서원(文溪書院) 등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으나 모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삼계서원 -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174 문화재자료
1588년에 충정공사(忠定公祠)를 건립하여 충재 권벌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여 오다가 1660년에 삼계서원(三溪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고, 1871년에 훼철(毁撤)되었던 것을 1960년에 복설(復設)하여 춘추(春秋)로 제향(祭享)하고 있다.
서원의 배치는 전면에 세운 콘크리트조의 2층 누각인 관물루(觀物樓)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강당(講堂)인 정일당(精一堂)이 자리잡고 있으며 강당의 좌우에는 동(東)·서재(西齋)를 배치하였다.강당의 우후측(右後側)에는 사당(祠堂)인 충정공사(忠定公祠)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으며 관물루 우측에는 충재선생묘허비각이 자리잡고 있다.
▮구만서원 -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 436 문화재자료
금인(琴靭)·, 남몽오(南夢鰲), 박선장(朴善長), 권호신(權虎臣)을 추모하기 위해 1676년에 사림(士林)에서 기영사(耆英祠)를 건립하였다가 1766년에 서원으로 승격하였는데, 고종 때 훼철되었던 것을 1967년에 복설하여 제향하고 있다.전체적인 배치는 사당(祠堂)인 상현사(象賢祠)와 강당(講堂)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는데, 주위에는 방형의 판축담장을 두른 후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웠으며 두 공간 사이에는 일각문을 세웠다.
▮행계서원(杏溪書院)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에 있는 서원.
1804년(순조 4)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강(金鋼)과 김홍제(金弘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그 뒤 1925년에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모현사(慕賢祠), 6칸으로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신문(神門), 주소(厨所) 등이 있다. 사우(祠宇)인 모현사에는 김강과 김홍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도연서원(道淵書院)
1693년(숙종 19)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구(鄭逑)와 허목(許穆)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채제공(蔡濟恭)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현재는 강당인 8칸의 명륜당(明倫堂)만 남아 있으며, 서원의 유지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문계서원(文溪書院)
1772년(영조 48) 지방유림의 공의로 금의(琴儀)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32년(순조 32) 정운경(鄭云敬)·금휘(琴徽)·금원정(琴元貞)·금축(琴軸)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그 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으며, 현재는 8칸으로된 강당인 문계정사(文溪精舍)만 남아 있다.
▮청량정사 -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245 문화재자료
경일봉(擎日峯) 아래 김생굴(金生窟) 밑, 유리보전(琉璃寶殿)에서 응진전(應眞殿)으로 가는 도중에 자리하고 있다. 송재 이우(1469∼1517)가 조카인 온계와 퇴계, 조효연 등을 가르치던 건물이었으며 이후로 이곳은 퇴계 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후학들의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되었다.
1896년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896년 일본군의 방화(放火)로 소실되었던 것을 1900년에 중건한 것이다. 강당 10칸, 부속건물 6칸으로 되어 있고 당은 오산당(吾山堂), 헌은 운서헌(雲棲軒), 요는 지숙요(止宿寮), 문은 유정문(幽貞門)이다.
▮두릉서당 -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748 문화재자료
물암(勿巖) 김융(金隆)(1549-1594)이 1569년에 건립한 서당으로, 두릉골 안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서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동암서당 -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 332 문화재자료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있던 중, 유배 3년째인 그해 육월(六月) 이십이일(二十二日) 미시(未時)가 마침 정미년(丁未年) 정미월(丁未月) 정미일(丁未日) 정미시(丁未時)로 사미(四未)가 합치는 날이니, 이 때 모든 경영을 하면 거리낌이 없다고 하여 삼천리 밖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집을 짓게 하고 ‘사미정(四未亭)’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사미정(四未亭)’이란 현판(懸板)과 ‘마암(磨巖)’이란 내현판(內懸板)은 정조 때의 명상인 채제공(蔡濟恭)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수온당 - 봉화군 봉화읍 거수2길 12 문화재자료
정침은 인종(1545년) 때부터 봉화읍 거촌리에 세거한 晩翠堂 邊永淳(1523~?)의 4대손 通德郞 邊洙(1631~1698)가 1653년에 건립한 후 1854년에 중수하고 그 뒤 1984년에는 신응수 대목장(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이 중건하였다.
사당은 만취당 변영순의 3대손 邊有藩(1605~1671)이 숭조 정신을 함양 계승하기 위하여 1653년에 건립하고 1930년경 수리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원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정자(수온당)는 만취당의 6대손 睡穩堂 邊尙勳(1678~1737)이 1713년에 후학교육과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서당을 겸한 정자 건물로 건립하였으며, 1898년에 한 번의 중수가 있었다.
● 봉화의 누정
▮쌍벽당 - 봉화군 봉화읍 거수1길(거촌리) 17 중요민속자료 제170호
쌍벽당(雙碧堂)은 연산군 때의 성리학자인 쌍벽당(雙碧堂) 김언구(金彦球)를 기리기 위해 1566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안채는 김언구(金彦球)의 부친인 죽헌(竹軒) 김균(金筠)이 1450년에 건립하였다 한다.7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하여 口자형(字形)의 정침(正寢)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측에는 2칸 규모의 아래채를 두었다.
정자인 쌍벽당은 사랑채의 우후측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쌍벽당 뒤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며 자리잡고 있다.
▮도암정 -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502 민속자료 제54호
황파(黃坡) 김종걸(金宗傑)(1628-1708)의 후손이 1650년에 건립한 정자로, ‘황전’마을의 전면(前面)에 위치하고 있다.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전면에는 방지를 조성하였으며 연못을 향한 전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후 좌우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어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인데, 전면의 퇴칸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퇴칸은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다.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의 소로수장집이며 법계서실 뒤편 바위에 성격불명의 암각도 보인다.
▮종선정 -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722 (상운로 476) 유형문화재 제264호
금응석 선생(1508∼1583)의 선행을 감사하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세운 정자이다. 당시는 오랫동안 가뭄과 흉년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땅에 뿌릴 씨 조차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 때 금응석 선생은 굶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농민에게는 무료로 씨를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그것을 알게 된 퇴계 이황 선생은 이 정자를 ‘종선정’이라 부르고 직접 쓴 현판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경사진 대지위에 건립한 까닭에 출입은 배면에서 하게 되어 있다.
평면은 우측칸을 통칸 온돌방으로 꾸민 후 좌측에는 6칸 대청을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계자각을 두른 헌함을, 후면에는 쪽마루를 각각 설치하였다. 가구(架構)는 대량(大樑)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오량가(五樑架)의 견실한 구조(構造)이다.
▮한수정 -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134 유형문화재 제147호
충재 권벌이 세운 거연헌(居然軒)이라는 모막(茅幕)이 있던 자리에 손자인 권래(權來)가 건립한 정자인데,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 하여 ‘한수정(寒水亭)’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정자는 T자형(字形)의 평면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정자의 주위에는 ‘와룡연(臥龍淵)’이라 불리우는 연못이 삼면(三面)에 조성되어 있으며 서쪽 연못과 정자 사이에는 ‘초연대(超然臺)’라 불리우는 넓은 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사미정 -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554 유형문화재 제477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있던 중, 유배 3년째인 그해 육월(六月) 이십이일(二十二日) 미시(未時)가 마침 정미년(丁未年) 정미월(丁未月) 정미일(丁未日) 정미시(丁未時)로 사미(四未)가 합치는 날이니, 이 때 모든 경영을 하면 거리낌이 없다고 하여 삼천리 밖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집을 짓게 하고 ‘사미정(四未亭)’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정자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의 평면을 가진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며, ‘사미정(四未亭)’이란 현판(懸板)과 ‘마암(磨巖)’이란 내현판(內懸板)은 정조 때의 명상인 채제공(蔡濟恭)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야옹정 -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348 민속자료 제180호
옥천인(沃川人)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1491-1554)이 건립한 정자로 야옹정종택(野翁亭宗宅) 내(內)에 위치하고 있다.
조부의 유언에 따라 관직에 뜻을 버린 전응방은 산수 좋은 곳을 찾아 맑은 냇가 뒷면에 터를 마련하고 정자를 건립하여 도덕과 학문을 강론하며,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이황과 교유하였다.
또 매년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永興里)에 있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찾아가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 능 위에 올리고 읍배(泣排)하였다고 한다. 그의 충성심과 높은 학덕은 사림(士林)에서 높이 추앙받았다.
전응방은 중종 때 진사(進士)에 급제하였으나 조부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의 뜻에 따라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평생을 야인으로 지냈다.
▮와선정 -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244 문화재자료 제532호
병자호란 이후로 벼슬을 버리고 이 곳에 은거하여 대명절의를 지킨 선비들로 세칭 태백오현(太白五賢)인 강흡姜恰, 홍자정(洪字定), 심장세(沈長世), 정양(鄭瀁), 홍석(洪錫))이 교유지처로 건립한 정자이며 지금도 이들의 후손들은 년 1회씩 회동하고 있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배면과 좌측면에는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배면 담장 사이에는 협문을 내어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평면은 통간(通間)으로 처리하여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주위에는 쪽마루를 둘렀으며 배면을 제외한 삼면(三面)에는 평난간(平欄干)을 설치하였다.
▮장암정 -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572 문화재자료 제150호
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1581-1637)를 추모하기 위해 1724년에 풍산김씨(豊山金氏) 문중(門中)에서 건립한 정자로, ‘창마’마을의 좌측 전면부에 위치하고 있다.
김창조는 선조 38년(1605)에 과거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1635년 여씨향약을 실시할 때 도약정(都約正)이 되어 솔선하였으며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에는 안방준이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할 때 쌀을 내어 군량을 도왔으며, 왕이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들 시성에게 태백산에 들어가서 살라고 이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방형의 토석담장 사이로 난 사주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정자가 자리잡고 있으며, 정자의 전면에는 방형의 연지를 조성하였다.평면은 좌측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우측에 대청을 연접시켰는데, 어칸은 좌측칸보다 조금 뒤로 물려 설치하였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창애정 -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285 문화재자료 제237호
창애(滄厓) 이중광(李重光)(1708-1778)이 건립한 정자로, 운곡천(雲谷川)이 내려다 보이는 들판위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 학자인 이중광의 본관 진보(眞寶) 초명은 탄(坦), 자는 평중(平仲), 호는 창애(槍厓). . 승지(承旨) 동표(東標)의 손자이자 회겸(悔兼)의 아들이다. 1742년(영조 18)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參奉)ㆍ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을 닦았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ㄱ자형(字形) 건물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좌측 담장 사이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후 우측 온돌방의 전면에는 누마루 1칸을 돌출시켜 전체적으로 ㄱ자형(字形)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의 장혀수장집이다.
▮청간당 -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1154 문화재자료 제151호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청간당(淸澗堂) 김정원(金鼎元)을 추모하기 위해 김탁연(金卓然)이 건립한 정자인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전면에는 일각문을 내어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좌측 2칸을 통칸으로 처리하여 우물마루를 깐 후 우측칸에는 통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전면(前面)에는 계자각(鷄子脚)을 세운 헌함(軒檻)을 설치하였다.가구(架構)는 대량(大樑)위에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량(宗樑)을 받게 하고, 종량(宗樑)위에는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을 세운 오량가(五樑架)의 구조(構造)이다.
경체정(景棣亭) -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37
경체정은 예조좌랑과 승지를 지낸 강윤과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강완, 그리고 가의대부를 지낸 강한 3형제의 우애와 덕행을 기리기 위해 강윤의 증손자인 강태중이 철종 9년(1858)에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의 정사각형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뇌풍정 -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68 문화재자료 제606호
뇌풍정은 영남지역에서 재지사족으로 자리 잡고 있는 기호학파의 노론계열인 봉화 법전의 진주강씨 강재항을 기리는 정자이다. 봉화 법전의 진주강씨는 입향 이래 영남지방의 재지사족과 유대를 강화하면서 중앙정계를 출입하였다.
특히 강재항은 관직에서 은퇴한 이후 향리에서 강학 활동을 하며 삼계서원의 향음주례에 참여하는 등 영남학파의 선비들과 활발하게 교유하고 있어 주목된다. 뇌풍정은 구릉지의 암반 위에 건축된 특이한 정자이며, 소장되어 있는 책판과 현판도 매우 주목되는 문화유산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의 독특한 정자 건물로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나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노론계열 가문의 정자라는 의미에서 볼 때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오당 -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253-1 문화재자료 제156호
잠은(潛隱) 강흡(姜恰)(1602-1671)을 추모하기 위해 1679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1938년에 중수하였다.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이오(二吾)라는 당호(堂號)는 낙오천(樂吾天)하여 종오년(終吾年)한다는 의미로 붙여 진 이름이다.
평면은 정방형(正方形)을 이루고 있는데, 전면칸에는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으로 구성한 후 후면칸에는 통칸의 온돌방을 설치하였으며 배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둘렀다.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의 장혀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무진장재 -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505
신라시대 절이었으나 조선 전기 문신인 금원정(1472∼1557)선생이 성종 11년(1480) 이 건물을 인수하면서 ‘무진장재’라고 개명하였고 용도도 재실로 바뀌었으며 건물은 앞면 5칸·옆면 6칸 규모로 전체적으로 ㅁ자형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는 연산군 때 진사가 되었고, 중종 10년(1515) 장사랑 영해 훈도를 역임하고 현량이 되었다. 그러나 중종 14년(1519) 훈구세력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세력이 화를 당했던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벼슬을 버리고 자연에 묻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힘쓰며 살았다.
● 봉화의 전통마을
▮해저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바래미-海底)
신라시대에는 波羅尾(파라미)라 칭하였다고하며, 마을이 河上(하상)보다 낮아 바다였다는 뜻으로 바래미 혹은 바다 밑이라고해서 海底(해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 전만해도 마을의 논과 웅덩이에서 조개들이 나왔다 하며,원래 宜寧余氏(의령여씨)들이 일부 살았으나 조선말기 숙종때 관찰사를 지낸 八吾軒(팔오현) 金聲久(김성구)선생이 건너마을龍潭(용담)에서 전거해 마을의 우물과 농토를 개척하고 정착한데서 마을이 번창하고 의성김씨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중앙에는 후학 양성을 위해 實學思想(실학사상)을 가르치던 學麓書堂(학록서당)과 원근까지 명천으로 소문난 큰샘이 있으며, 서쪽(아랫마)으로는 학이 날라와 앉았다고 하는 학정봉과 감태봉 아래 독립운동가 南湖(남호) 金賚植(김뢰식)선생이 살던 南湖舊宅(남호구택)과 映奎軒(영규헌), 김씨 종택이 자리잡고있고, 동쪽(윗마을)으로는 3.1운동 직후 心山(심산) 金昌淑(김창숙)선생을 중심으로 독립 청원서를 작성했던 晩悔古宅(만회고택)과 明月樓(명월루)를 비롯 마을 전체가 口(구)자 전통 와가로 형성된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의성김씨와 타성씨를 합하여 100여 가구가 살고 있으나 조선말기 전성기에는 의성김씨만 100여호가 넘었다 하며, 과거의 급제자와 벼슬에 오른 선비들이 많아 영남일대 선비들의 교류가 잦았다고 하며, 1992년 도지정 전통문화 마을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오록마을(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창말 倉村(창촌)이라고 부르며 처음에는 梧麓(오록)이라고 부르다가 마을 앞에 큰 창고(倉庫)가 생기면서부터 창촌(倉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위쪽으로는 갈봉산(葛峰山)이 우뚝 솟아있고 앞쪽으로는 만석산(萬石山),천석산(干石山)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마을앞 현재 물야중학교 입구에서부터 마을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약120m정도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1688년경 제주목사를 지낸 선조 김정께서 이 마을의 터를잡을 때 左靑龍(좌청룡)의 꼬리가 짧아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제주솔씨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오록마을의 풍산김문(豊山金門)은 지금까지 자손이 크게 번성하지는 않았으나 대대로 도의(道義)와 문장(文章)으로 일가를 이룬 대표적 마을로 학식과 덕망 있는 관리와 어질고 현명한 선비가 많았으며 뛰어나고 빛나는 이름으로 청렴세전(淸廉世傳)하여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마을 입구에 도지정문화재자료 제150호인 藏庵亭(장암정)이 있다.
▮달실마을(봉화군 봉화읍 유곡1리)
1380년 충재 권벌(1478~1548)선생의 선조가 처음 개척한 곳으로 풍수지리에 의하면 금닭이 계란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마을이라고 하여 닭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조선 중종 때 대신(大臣) 충재 권벌선생의 유적이 있다. 선생은 안동인(安東人)으로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있던중 중종 15년(1520) 기묘사화에 연류, 파직되어 이곳에 와서 농토를 마련하고 14년간 후진을 양성하며 經學(경학)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중종 28년(1533)에 복직되었으나, 을사사화로 인하여 다시 파직되고, 그후 전라도 구례,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명종3년 (1548)에 71세의 일기로 서거(逝去)하였다.
이곳에는 충재 선생의 유적지인 청암정(靑岩亭)과 석천정(石泉亭), 선생의 종가가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경관과 빼어난 지형을 자랑하며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지역을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경승지로 지적하였다. 충재 권벌 선생의 후손이 5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본터이며 많은 인재를 배출한 마을이다.
▮황전마을 봉화읍
연못과 바위와 고목이 정자와 잘 어울려져 있는 동네이다. 마을 입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300년 정도의 느티나무가 바위 사이에 자라고 있다.이 곳 황전은 ‘누른 밭’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옛날 이 동네 앞산에 황학이 떼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그 황학들이 마을 밭에 내려와 앉아있으면 온 들이 누렇게 보여 자주 장관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모습을 보고 황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곳 황전은 지금은 의성김씨 집성촌이지만, 본래는 영양남씨가 살던 마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백년전 어느 날 의성김씨 중시조 되는 무과급제 훈련원 삼사 관실부호군인 ‘김흠’이라는 사람이 시종을 데리고 구봉산에 올라 매를 날리며 꿩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산에서 가만히 바라보니 매에게 쫓긴 꿩이 진사 남구수네 집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의 딸이 꿩을 감추어두었다가 매가 날아가고 난 뒤에 그 꿩을 살려 보내는 것을 바라보고 아주 후덕한 규수라 여기고 청혼을 했다.
그리하여 남씨가문에 장가를 든 김흠은 황전에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 로 남씨는 한집 두집 이곳을 떠나 20여년이 채 못가서 한집도 남지 않고 떠나 의성김씨가 자리를 잡아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전에서는 지금도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다고 해서 외손은 물론 타성도 큰 마을에 살지 못하고 바깥마을로 옮겨 산다고 한다.
입향조 김흠선생의 손자로 효종대왕 시절 문신이었던 황파 김종걸 선생은 당대에 학식과 덕망이 아주 뛰어나서 이조참판에 추증이 되고 이곳에 있는 ‘봉산리사’에 배향이 되었다. 황파선생이 1650년에 세운 정자가 바로 이 동네 입구에 있는 도암정이다.
정자 옆에는 도자기 모양의 큰 바위와 300년이 넘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고, 정자 앞에는 연꽃이 자라고 있는 연못이 있으며, 그 연못 속에 인공섬인 당주를 만들어 소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그 세 그루 노송과 연못에 가득한 연꽃이 피면 장관을 이룬다.
● 봉화의 고택
▮해저만화고택 -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51 중요민속자료 제169호
조선 말기의 문신인 김건수(金建銖)(1790-1854)가 살던 집으로 ‘바래미’마을의 우측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가 이 곳에 정착한 후 先住하던 余氏에게서 매입하였다 한다.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는 김건수가 건립하였으며, 중문칸채는 퇴락하여 1981년에 철거되었던 것을 근년에 다시 복원하였다.고택의 배치는 전면에 일자형(一字形)의 중문칸채와 T자형(字形)의 사랑채를 배치한 후 뒤에는 ∩자형(字形)의 안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 口자형(字形)의 배치형태를 이루게 하였다
▮계서당 - 봉화군 물야면 계서당길(가평리) 34-1 중요민속자료 제171호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된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1595-1664)
이 1613년에 건립한 가옥이다.6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중문칸채와 연결된 사랑채가 정면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사랑채 뒤에는 Π자형(字形)의 안채를 배치하여 정침(正寢)은 전체적으로 튼 口자형(字形)의 배치형태를 취하게 하였다.
정침(正寢)의 우측에는 사당(祠堂)이 자리잡고 있는데, 사당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이루게 하였으며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사당으로 출입케 하였다.
▮송석헌 - 봉화군 봉화읍 선돌안길 10 중요민속자료 제249호
동암(東巖) 권이번(權以番)이 아들인 선암(仙巖) 권명신(權命申)에게 지어준 살림집이다.7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높은 축대위에 口자형(字形)의 정침(正寢)이 자리잡고 있는데, 중문칸의 우측에는 팔작지붕의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2층 건물인 영풍루(迎風樓)를 두었는데 영풍루와 사랑채는 계단으로 연결시켰으며, 정침(正寢)의 좌측에는 못채와 방앗간채를 배치하였다.사랑채의 우측에는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선암재(仙巖齋)를 두었으며, 정침(正寢)의 우후측에는 사당(祠堂)을 배치하였다.
▮경암헌 고택 -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698 민속자료 제53호
10대조인 김종걸(金宗傑)의 조부가 장인인 남구수(南龜壽)로 부터 가옥을 이어 받아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종택(宗宅)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정침(正寢)의 우후측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정침(正寢)은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口자형(字形) 건물이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외양간과 못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 1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를 배치하였다.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고 건너방의 전면에는 통래칸과 고방이 우익사를 이루고 있다.
▮개암종택 -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709-1 기념물 제138호
의성김씨(義城金氏) 개암공파종택(開巖公派宗宅)으로, ‘바래미’마을의 후면에 위치하고 있다.종택은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의 10세손인 김연대(金鍊大)가 매입하여 정착하였으며 11세손인 김우영(金佑永)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3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一자형(字形)의 사랑채와 Π자형(字形)의 안채가 튼 口자형(字形)의 배치를 이루며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正寢)의 우측에는 사당(祠堂)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사당은 전면에 개방된 퇴칸을 둔 3칸 규모의 건물인데, 지붕은 사당으로서는 특이하게 팔작으로 구성하였다.
▮오고당 구택 - 봉화군 봉성면 봉양리 598 민속자료 제52호
조선 후기의 명의(名醫)인 오고당(五高堂) 박한진(朴翰鎭)의 생가(生家)인데, 박한진(朴翰鎭)은 조대비(趙大妃-현종모후)의 병환(病患)을 고친 후 고종(高宗)으로부터 ‘오고당(五高堂)’이란 호(號)를 받았다 한다.구택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와가 까치구멍집으로 ‘현선’이란 목수가 건립하였다 한다.
평면은 전면칸은 봉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정지와 고방을 두었으며, 후면칸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1칸 반 규모의 안방과 반 칸 규모의 고방이 전후(前後)로 연접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마루방과 상방이 전후(前後)로 배치되어 있다.
▮김건영 가옥 -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739-1 기념물 제117호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 때 유림(儒林)들의 연명(聯名)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수여받은 김건영(金建永)의 살림집이다.정침(正寢)은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口자형(字形) 건물이다.안채로의 출입은 우익사에 난 중문을 통하도록 한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인데, 평면이 측면출입형인 관계로 사랑채도 특색 있는 평면을 취하게 되었다.일반적으로 중문이 있어야 할 부분에 책방을 두었는데, 책방은 퇴칸까지 돌출되어 동쪽의 큰사랑과 서쪽의 작은사랑은 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되게 하였다.
▮법전강씨 도은종택 -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 1165 민속자료 제40호
병자호란 후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친형인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함께 낙향하여 은거하던 곳이라 하는데, 1798년에 후손인 강명규(姜命奎)가 중수하였다 한다.정침(正寢)은 口자형(字形)의 건물인데, 정침(正寢)의 우측에는 도은의 아들인 강찬이 학문 증진과 후학 계몽을 위해 1710년에 건립한 재청인 성건재(省愆齋)가 자리잡고 있으며 재청의 후면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정침(正寢)은 一자형(字形)의 사랑채와 Π자형(字形)의 안채가 튼 口자형(字形)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안채의 우익사(右翼舍) 부분에는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봉화금씨 군위공 종택 -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 1168 문화재자료 제495호
군위공(軍威公) 금계(琴啓)의 종택(宗宅)이다.종택(宗宅)은 ㄷ자형(字形)의 정침(正寢)과 일자형(一字形)의 작은사랑채가 튼 口자형(字形)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정침(正寢)의 우측에는 5칸 규모의 아래채가 배치되어 있다.
평면은 중문칸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사랑채를 두고 우측에는 작은방과 고방을 배치하였다.고방의 뒤로는 통래칸과 부엌, 안방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으며 안방의 좌측에는 안대청 2칸과 건너방을 두어 전체적으로 ㄷ자형(字形)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송월재 종택 -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34외 1 문화재자료 제496호
송월재(松月齋) 이시선(李時善)의 7대손인 이하필(李夏弼)이 건립한 주택이다.종택은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口字形 건물인데, 전면에 있었던 대문채는 1960년경에 철거하였으며 정침(正寢)의 우측에는 최근에 건립한 사당(祠堂)이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 안에 자리잡고 있다.
정침(正寢)의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 2칸으로 구성된 사랑공간을 두었으며, 중문을 들어서면 내정을 사이에 두고 2통칸의 안방과 2칸 대청이 내정 폭을 가득히 메우며 자리잡고 있다.
▮팔호헌 종택 -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734 문화재자료 제445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의 종택으로, 口자형(字形)의 정침(正寢)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좌측에는 중문칸과 아랫방을 연접시켰으며 작은 사랑방 뒤로는 통래칸과 고방을 두어 전체적으로 ㄱ字形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상방을 두고 좌측에는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켰다.
▮해와고택 -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751 문화재자료 제338호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해와(海窩) 김희택(金熙澤)의 손자인 김중수(金中銖)가 조부의 유지에 따라 건립한 주택이다.정침(正寢)은 ㄱ자형(字形)의 사랑채와 안채가 튼 口자형(字形)을 이루며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다.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좌측에는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 문간채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건너방을 두고 좌측에는 2통칸의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이 연접되어 전체적으로 ㄱ字形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남호구택 -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723 문화재자료 제385호
농산(聾山) 김난영(金蘭永)이 1876년에 건립한 주택이다.솟을대문을 한 7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의 口자형(字形) 정침(正寢)이 동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안채로의 출입은 우익사에 난 중문을 통하도록 한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인데, 평면이 측면출입형인 관계로 사랑채도 특색있는 평면을 취하게 되었다.일반적으로 중문이 있어야 할 부분에 도장방을 두어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공간적으로 분리되게 하였으며, 도장방의 주위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돌출시켜 두 공간을 연결시켰다.
▮해은구택 -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 1162 문화재자료 제560호
해은구택은 법천문집(강윤,1711~1782)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영조 25년(1750)경 창건된 건물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후 1900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한 건물이다.해은 강필효(1764 ~1848)는 조선후기의 성리학자로 명재 윤증의 학문을 계승한 소곡 윤광소의 문인으로, 조선 순조3년(1803) 유일로 천거되어 순릉참봉, 충청도 도사, 통정대부를 역임하고 돈녕부 도정에 올랐다. 사서와 육경 등 여러 성리서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후학 지도와 학문 연구에 매진하면서 해은문집, 경설도, 사유록 등을 저술하였다.
그 중 해은문집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해은집과 농노집의 목판은 문화재자료 제352호로 지정된 법계서실에 보관되어 있다.해은구택 정침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ㅁ자형 집으로, 구조 양식이나 수법 등에서 두드러진 건축적 가치는 없으나, 초창기 당시의 모습에서부터 사랑채 재축(再築) 및 안채의 변화를 통해 시공간적 추이를 나타냄과 동시에, 나아간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다양한 건축적 특성을 파악하는데 자료적 가치가 있다.
▮만산고택
조선말기 문신인 만산 강용(1846-1934)이 지은 집이다. 중추원 의관과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으며 1910년 이후에는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면서 마을 뒷산에 망미대를 쌓고 그 곳에 올라 국운이 회복되기를 시로 읊기도 하였다.가옥구조는 앞면에 11칸의 긴 사랑채가 있고 가운데는 솟을대문이 있다. 사랑채와 만채가 ㅁ자형으로 되어있으며 왼쪽에 서당을 두고 오른쪽에 별도의 담장을 둘러 별당을 배치하였다.
사랑채에는 만산이라는 대원군이 쓴 현판이 걸려있고 서당의 한묵청연(翰墨淸緣) 이라는 편액은 영친왕이 8세때 쓴 글씨라고 한다.
● 봉화의 선현(가.나.다 순)
▮강재항(姜再恒) 1689(숙종14-1756(영조32)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구지(久之), 호는 입재(立齋). 아버지는 강우(姜鄅),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이세준(李世俊)의 딸이다.강재항은 안동부(安東府) 춘양현(春陽縣) 법전리(法田里: 현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우는데, 10여 장만을 보고도 그 뜻을 알았다 한다.
처음에는 큰아버지 성건재(省愆齋) 강찬(姜酇)의 밑에서 배웠고 다음에는 윤증(尹拯)의 문인이 되었으며, 윤동원(尹東源), 권구(權絿), 신익황(申益愰)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1735년(영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장작감감역(將作監監役)에 임명되었고, 이어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경조부주부(京兆府主簿), 회인현감(懷仁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회인현감으로 있을 때 청(淸)·신(愼)·근(勤) 세 글자를 지침으로 삼고 선정을 베풀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윤증의「획일도(畫一圖)」와 이이(李珥)의「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를 강론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경전, 제자백가, 천문, 지리, 술수 등에 모두 통하였으며, 이기(理氣), 성명(性命), 음양, 사생, 합산(合散), 치란(治亂) 등에 관하여 많은 잡저를 남겼다.문집으로 『입재유고(立齋遺稿)』 20권이 있다. 문집 중「산거부(山居賦)」는 청량산(淸凉山) 일대의 산세를 찬탄하면서 선비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산에 거처하여 살아가야 한다고 노래하였다.
「장작감변통사의(將作監變通事宜)」는 1737년(영조 13) 장작감감역으로 있으면서 현지의 네 가지 폐단을 논한 글이다. 「회인현보민청간상절목(懷仁縣補民廳看詳節目)」은 회인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보민청의 운영, 관리 절목을 여덟 가지로 정한 것이다. 「동사평증(東史評証)」은 1748년 우리나라 역사에 관해 숙신(肅愼)으로부터 고려까지 선유들의 논을 평한 것이다.
▮강진규(姜晉奎) 1817(순조 17)∼?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진오(晉五), 호는 역암(櫟庵). 경상북도 봉화출생. 아버지는 필응(必應)이다. 이황(李滉)을 사숙하였다.
1845년(헌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박사와 전적(典籍)을 지냈고, 1864년(고종 1) 사헌부장령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에도 금산사(金山寺)·태고사(太古寺) 등 사찰에 관한 내용이 많다.
당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천주학에 대하여는 강력하게 반대하여 1881년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지어 사학(邪學)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영남유생들에게 통문을 보내 연합전선을 펴면서 개화정책을 반대하다가 이만손(李晩孫)과 함께 유배되었다. 저서로는 『역암문집』 12권이 있다.
▮강필효(姜必孝)1764(영조 40)∼1848(헌종 14)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세환(世煥). 자는 중순(仲順), 호는 해은(海隱) 또는 법은(法隱). 봉화 법전(法田)출신. 아버지는 식(植)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중연(重延)의 딸이다. 소론(少論)의 영수인 윤증(尹拯)의 제자 강찬(姜酇)의 후손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스승으로 섬겼다.
1800년(정조 24) 집 동쪽에 중국 창주(滄洲)에 있는 주희(朱熹)의 경의재(敬義齋)를 모방하여 서실(書室)을 짓고, 주자의「백록동규(白鹿洞規)」와 성혼(成渾)의 「우계서실의(牛溪書室儀)」를 써서 걸고, 윤증의 획일도(畵一圖)를 준칙(準則)으로 삼았는데, 사방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803년(순조 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 1814년(순조 14)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842년(헌종 8)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임명되었다가 곧 충청도도사로 옮겼으며, 이듬해 통정대부에 승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여러 성리서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천명(天命)은 이(理)로 말하는 경우도 있고, 기(氣)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논하였다. 또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에 있어서 이선기후(理先氣後)·기선이후(氣先理後)가 모두 가능하며, 이기는 서로 체용(體用)이 된다는 이기론을 전개하였다. 저술로는 『고성현고경록(古聖賢考經錄)』·『근사속록(近思續錄)』·『소계회화록(素溪會話錄)』·『석척록(夕惕錄)』·『사유록(四遊錄)』·『경서고이(經書考異)』 등이 있으며, 문집인 『해은유고』가 있다.
▮강흠(姜洽)
본관은 진주(晋州), 자 정오(正吾), 호 잠은(潛隱), 시호 정민(貞敏)이다.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시직(侍直) ·부솔(副率) 등을 지냈고, 효행으로 남구만(南九萬)의 천거를 받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산음현감 등에 임명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을 길이 없어 심장세(沈長世) ·홍석(洪錫) ·정양(鄭瀁) ·홍우정(洪宇定) 등과 함께 태백산의 춘양동(春陽洞)에서 숨어 살며 절개를 지켜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하였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권만(權萬)1688(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일보(一甫), 호는 강좌(江左). 석충(碩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濡)이고, 아버지는 두굉(斗紘)이며, 어머니는 조계윤(趙啓胤)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8년 정자로 재직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장 유승현(柳升鉉)을 도와서 반역을 꾀한 무리들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746년 병조좌랑으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병조정랑이 되었다. 정조 때 창의의 공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강좌집』이 있다.
▮권벌 1478(성종9년)-1548(명종3년)
본관은 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萱亭(훤정), 송정(松亭)이며 할아버지는 부호조 권곤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 영의정 권사빈이며 어머니는 주부 윤당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서 예문관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다.
1514년이조정랑에 임명되고, 이어서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영천군수로 부임하였다. 1517년장령을 역임하고, 1518년승정원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예조참판에 임용되었다. 이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 뒤 아버지가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다는 이유로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1519년 11월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15년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임명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한성부좌윤, 이듬해 2월에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39년 3월병조참판에 임용되고, 6월에는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7월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가계를 고쳐 달라고 사신을 보내 주청하던 일)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540년병조판서·한성부판윤에 임용되었으며, 1541년 5월예조판서, 11월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2년 5월장령이 되었으며, 1544년 정월 다시 의정부좌참찬에 임명되었다. 1545년(인종 1년) 5월의정부우찬성이 되었고, 7월에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1545년 8월 소윤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의 세력을 배척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유인숙(柳仁淑)·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다.
곧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9월 우의정이기와 우찬성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削勳)되었고, 10월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547년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이어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移配)되었으며, 이듬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직기간 동안 그는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참찬관(參贊官) 등을 역임하며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중종 대에는 조광조·김정국(金正國) 등의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개혁 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독서를 좋아하여『자경편(自警篇)』과『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으며, 저서로는 『충재문집』이 있다.
▮김건수 1790-1854(정조14-철종5)
1790(정조 14)∼1854(철종 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공립, 호는 만회이며 아버지는 호군 재인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종해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았다.
1830년(순조 30)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2년 뒤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고, 1834년 명릉별검에 제수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2월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이때 왕명을 받들어 칙사를 영접하였다.
그뒤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장악원판사·현풍현감 등을 지냈다. 현풍현감에 재직하면서 아울러 창녕·청도·양산·영산의 4군을 다스릴 때, 밀양포에 육로로 수송해온 세미를 둘러싸고 밀양의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자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847년(헌종 13)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고, 홍문관응교·김해부사·승정원우부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한때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치의 요체와 중농정책·교육의 진흥 등에 관해 상주하기도 하였다.
▮김담 1416(태종 16)~1464(세조 10).
세종대의 천문학자로 이순지와 함께 천문·역법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본관은 예안. 자는 거원, 호는 무송헌. 할아버지는 고려 때 중랑장 노이고, 아버지는 현감 효량이다. 1435년(세종 1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436년 간의대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일을 맡았다. 1439년 집현전박사가 되어, 이순지와 함께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최초의 역법서인〈칠정산 외편〉을 편찬했다. 또한 왕명으로 원나라 수시력법과 명나라 대통력태양태음통궤를 참작하여 〈칠정산 내편〉도 만들었다.
1444년 경기도 안산지방의 양전을 실시하고, 이어 제언종사관으로 언제공사의 계산을 담당했다. 1447년 왕명으로〈전부구등지법〉을 지었다. 같은 해 문과 중시에 급제하고, 1448년 서운관부정으로 있으면서, 역법과 관측의 일을 계속했다.
그뒤 충주목사·안동부사·경주부윤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다. 〈칠정산 내편〉·〈칠정산 외편〉·〈대통력일통궤〉·〈태양통궤〉·〈태음통궤〉 등 많은 천문·역서를 정인지·정초·정흠지·이순지 등과 함께 교정, 편찬했다. 저서로 〈김문절공일고〉·〈제가역상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김성구(金聲久) 1641년(인조 19) ~ 1707년(숙종 33)
조선후기 문신으로자 덕휴(德休), 호 팔오헌(八吾軒), 해촌(海村)이다.
1662년(현종 3) 사마시를 거쳐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典籍)·무안현감·직강(直講)·지평(持平)·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수찬 재직시 국가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언의 소를 올렸고, 정언 재직시에는 당시 형조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였다.
1679년(숙종 5) 장령(掌令) 재직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논핵(論劾)되어 정의(旌義 : 지금의 제주도) 등의 벽지로 쫓겨났다.
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복관되어 대사성·집의(執義)·헌납(獻納)·좌승지·강원도관찰사·병조참지 등을 거쳐,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뒤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득세하자 향촌에 물러나서 서사(書史)를 즐기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관직생활에 있어서 공사를 분명히 하였다. 안동의 백록사(柏麓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팔오헌집』이 있다.
▮김영조(金榮祖) 1577년(선조 10) ~ 1648년(인조 26)
본관은 풍산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 아버지는 산음현감 대현(大賢)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전적(典籍)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 년 동안 은거 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正言)·지평(持平)·부수찬(副修撰)·장령(掌令)·대사헌·대사성·대사간·부제학(副提學)·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24년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정엽(鄭曄), 대사간 이현영(李顯英) 등과 함께 인성군 공(仁城君珙)이 이괄(李适)의 난에 간여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25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목성선(睦性善)의 상소 내용이 경망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주장하고, “인성군 공은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할 때 동조했고, 또 이괄의 난에 내응해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벗어났으니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또다시 주장하였다.
1633년에는 세자 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 한인급(韓仁及)과 함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노비 3구와 토지 10결을 받았다. 1642년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 때 인사 부정의 혐의가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모나지 않았고 체구가 작았으며 단정하였다. 영천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망와집』이 있다.
▮김우굉 金宇宏 1524(중종 19)∼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岩). 경상북도 성주 출신. 종혁(從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도승지 치정(致精)이고, 아버지는 부사 희삼(希參)이며, 어머니는 청주 곽씨(淸州郭氏)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해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이듬 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 주서(注書)·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典籍), 예조와 병조의 좌랑·정랑, 지제교(知製敎)·정언(正言)·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 6)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7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 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김융(金隆) 1525(추정) (중종 20(추정)) ~ 1594 (선조 27)
조선의 학자로 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巖). 본관은 함창(咸昌). 이황의 제자로서 《중용》ㆍ《대학》을 연구. 산법(算法)에도 통달하여 이황으로부터 격찬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 격문을 각지에 돌려 애국심을 북돋았다. 그 후 학문과 행실로 참봉을 받았고 사망 후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저서 삼서강록(三書講錄)와 소학전집석의(小學前集釋議)가 있다.
▮김응조(金應祖) 1587(선조20)-1667(헌종8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아헌(啞軒). 할아버지는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 김농중(金農中)이고, 아버지는 산음현감 김대현(金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수의부위(守義副尉) 이찬금(李纘金)의 딸이다
김응조(金應祖)는 1587년 안동(현 영주시)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어지러운 정치 상황을 목도하고는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응조의 형제 8명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 등을 역임한 뒤 1634년(인조 12)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인조와 효종 및 현종 3대에 걸쳐 사헌부지평·사헌부장령·사간원헌납·홍문관수찬·교리·홍문관부수찬·사헌부집의·사간원사간·응교·승지·오위호군·공조참의·사간원대사간·한성부우윤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1637년(인조 15)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하여 시행했다가, 필요 없게 되자 1658년(효종 9)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인조 16) 사헌부장령으로 있으면서 8조를 건의했는데, 그중 하나가 ‘명대의(明大義)’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하였다. 1651년(효종 2)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치고, 근래에 문교(文敎)가 전폐됨을 개탄하면서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1656년(효종 7) 예조참의로 있으면서 “마음을 닦아 본성을 기를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할 것, 문(文)을 숭상해 학문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고, 1659년(효종 10)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행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년(현종 5) 금성산성의 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洪重普)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현종은 삼조(三朝)를 시종한 신하이자 나이가 80세이며 먼 영남의 집에 있는 점을 고려해 사면하였다. 1667년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만년에 영주와 예천 지역의 선비들과 어울리며 노경의 한가로운 삶을 즐겼다. 1660년(현종 1) 10월 학사정(鶴沙亭)에서 회합을 한 뒤 「제명록」을 남겼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예천 지역의 수락대(水落臺)에서 인근 선비들과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1662년(현종 3)에는 도산서원 성덕사를 배알한 뒤 이웃 마을 분천(汾川)에 있는 애일당(愛日堂)에서 예안 선비들과 만나서 우의를 다지는 한편 유학 문화를 진작시키고자 노력하였다.저서로는『학사집(鶴沙集)』·『사례문답(四禮問答)』·『산중록(山中錄)』·『변무록(辨誣錄)』등이 있으며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암랑동(巖廊洞)에 있고 안동시에 있는 물계서원과 영천시에 있는 의산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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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金亻政 1670-1737
조선중기 문신으로 자는 사달(士達)이고 호는 노봉(蘆峯)이며 현종 11년(1670년) 학사공의 손자인 휘봉(輝鳳)의 셋째로 태어났다. 7, 8세에 문리(文理)에 통달하여 고시문(古詩文)을 섭렵하고 경사(經史)를 익혀 9세에 군 백일장에서 수석을 하였다.
숙종 2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이어서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내섬시(內贍寺) 직장(直長)을 시작으로 환로(宦路)에 나서 별제, 감찰, 경성판관을 거처 함경도(咸鏡道) 도사(都事), 병조정랑(兵曹正郞)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 옥천(沃川)군수에 제수되었다.
영조 원년(1725)에는 강릉(江陵) 도호부사(都護府使)시에 큰 흉년이 들자 곡식 300곡(斛)과 공의 봉록을 털어 생활이 어려워 굶주린 자들을 구휼(救恤)했다. 또 퇴락한 충효렬사의 정려각(旌閭閣)을 모두 수리하고, 칠사당(七事堂)을 창건하여 흥학(興學) 돈속(敦俗)에 힘썼기에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영조 4년(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나학천(羅學川), 장후상(張后相), 정옥(鄭玉) 등과 창의(倡義)하여 세 고을〔榮川 豊基 順興〕 병사를 모아, 안동 의병과 구역을 나누어 맡고, 서로 응하여 부장(副將)에 추대되어 활약하였던 공으로 양무원종훈(揚武原從勳) 일등에 책록 되었다.
후에 다시 사간원 정언(正言), 강게부사(江界府使)겸 관서우방어사(關西右防禦使)에 제수되어 낙후된 문교(文敎)를 진흥시켰으며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고, 이인좌(李麟佐) 난에 허위로 공훈을 받았다는 모함으로 파직되었으나 장령 권상일(權相一) 유경시(柳敬時)의 상소로 무고함이 밝혀져 풀려나 귀향하여 노봉정사(蘆峯精舍)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업에 심혈을 기우렸다.
영조 10년(1734) 복관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다음 해 영조 11년 1월 65세의 나이로 제주목사(濟州牧師)겸 호남방어사(湖南防禦使)로 임명되었다.
제주도에 먼저 존현당(尊賢堂)을 세우고, 강당(講堂)과 장랑(長廊)을 세워 재(齋)를 들여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설립하고, 선비와 스승을 초빙하여 학규(學規)를 엄히 하여 학생을 지도하도록 하고 스스로 가르쳤다. 또 유식한 자를 뽐아 경민장(警敏長)으로 정하여 경민편(警敏編)과 훈민가(訓民歌)를 가르치어 백성을 교화하도록 하였다.
영조 13년(1737) 8월 과만(瓜滿)으로 돌아올 때 도민(島民)들이 말머리를 막고 눈물을 흘리며 전별하는 사람이 몇 백 명인지 헤아릴 수 없었으며 풍랑이 심하여 후풍관(候風館)에서 기다리다 졸하니 섬 안 선비와 이속과 백성들이 모두 친척같이 분주호곡(奔走號哭)하였다.
제주(濟州) 백성들이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삼천서당(三泉書堂) 앞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시자고 의논하고, 나라에 여러 번 진정을 올려도 허락이 없어 노봉김정흥학비(蘆峯金政興學碑)를 세우고 매년 기일에 지패紙牌)로 제사지냈으며, 이어서 선정공덕비(善政功德碑)도 세웠다.
지금도 제주도에서 공의 치적이 신화(神話)처럼 전해오고 있으며 흥학비(興學碑)와 봉공비(奉公碑)가 있으며 오천서원(梧川書院)과 제주 상현사(象賢祠)에 봉안(奉安) 되었다.
저서로 농봉집(蘆峯集)4권이 전 한다.
▮김준청(金中淸) 1567(명종 22)∼1629(인조 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또는 구전(苟全). 할아버지는 정헌(廷憲)이고, 아버지는 절충첨지중추부사(折衝僉知中樞府事) 몽호(夢虎)이며, 어머니는 박승인(朴承仁)의 딸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 전적(典籍)·예조좌랑·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에 이어 1621년 승정원승지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이 후 산직(散職 : 권력이나 직무의 중요성과는 거리가 있는 관직)에 머물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창조(金昌祖)1581–1637)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字)는 효언(孝彦), 호(號)는 장암(藏庵) 혹은 만축(晩築)으로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의 셋째 아들로 서울 장의동(壯義洞)에서 출생하였다.
약관(弱冠)에 문예(文譽)가 크게 진전되어 학문을 이루고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나 명성을 얻었으며 2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그 후 맏형 학호(鶴湖)와 망와(忘窩) 형제가 대과에 올라 중앙 관료를 역임하였으나, 파당이 심하여 대북파 권신들과 뜻이 달라 향리에서 은거할 때 함께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다음 해(1624년) 창릉참봉(昌陵參奉)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인조12년에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 등에 벼슬이 내려도 숙배(肅拜)만 드리거나 불부(不赴)하였다.
인조(仁祖) 13년(1635) 조정에서 각 고을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할 것을 명하자, 고을 사람들이 공을 도약정(都約正)로 추대하였는데, 공은 불선(不善)한 자들을 규찰(糾察)함에 조금도 봐주는 법이 없어서 온 고을이 숙연(肅然)하였다.
인조 13년( 1635)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승품(陞品)되고 행직(行職)으로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에 제수 되어 매사를 깨끗하게 처리하니 성적이 항상 으뜸이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다음해 인조 15년(丁丑1637) 1월 30일 왕이 부득이 하여 화의를 하자 관직을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광주(光州) 완동(莞洞)에 이르러 병을 얻어 4월 6일에 서세하였다.
이산서원(伊山書院) 선비들이 지은 제문(祭文)에 “천성은 생강이나 계피〔薑桂〕처럼 강직(剛直)하였고 기국(器局)은 옥으로 만든 그릇〔奎璧〕처럼 투명하였으며, 선(善)한 일은 권면하였고 악(惡)한 일은 엄하게 징계하였다.”고 하였다.
도림추원사(道林追遠祠)에 유연당(悠然堂)공과 구부자(九父子) 동당혈식(同堂血食)으로 매년 음력 중정에 제향하고 있다. 저서에 『藏庵集』이 전한다.
▮김희주(金熙周) (1760(영조 36)∼1830(순조 30)
처음에는 권사민(權思敏)에게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마시를 거쳐, 1795년 단풍정친시(丹楓亭親試)에 합격한 뒤 성균관전적으로부터 병조와 예조의 좌랑과 정랑 등을 지냈다. 또한 영해부사·안주목사·우승지·형조참판·한성좌윤·사간원대사간·함길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98년 홍문관교리 때에는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왕의 흔쾌한 찬성을 얻었고, 1800년에는 교리에 실록편수관(實錄編修官)을 겸하여 『영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06년(순조 6)에는 안악군수(安岳郡守)로서 교육제도가 부실하여 정교(政敎)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여, 사재(私財) 수백냥을 투자하여 강소(講所)를 신축, 군내의 영재들을 교육하였다.
만년에 재산(才山)의 갈산리(葛山里)에 갈천정(葛川亭)을 짓고, 덕봉(德峰) 아래에는 덕봉정사(德峰精舍)를 지어서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갈천집』 10권이 있다.
▮류승조(柳崇祖) 1452(문종 2)∼1512(중종 7) 류승조의 자는 종효(宗孝), 호(號)는 진일재(眞一齋), 시호(諡號)는 문목(文穆)으로 지성(之盛)의 아들이다.
세조 때 진사(進士)가 되고,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사유(師儒) 에 선임(選任)되었다. 검열(檢閱)을 거쳐 봉교, 정언(正言)을 역임, 1501년(연산군 7) 부교리(副校理)로서 공안 상정청(貢案詳定廳)의 낭청(郎廳)이 되었다.
그후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실정(實情)을 극간하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원주(原州)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판결사(判決事)에 특진되었다.
이 해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어 경연 참찬관을 겸임, 뒤에 대사성(大司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려고 한 최초의 학자로써 18년간 성균관(成均館)에 재직하는 동안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했다. 경사(經史)에도 통달하여 조광조(趙光祖) 등의 대학자를 양성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배상열(裵相說) 1759(영조 35)∼1789(정조 1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군필(君弼), 호는 괴담(槐潭). 봉화 출생. 집(緝)의 아들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처음에 특별한 스승의 교도(敎導) 없이 독학으로『주역』과『율려신서(律呂新書)』 등을 공부하였다.
상수학(象數學)에 뛰어났고, 천문·지리·주수(籌數) 등에 정통하였으며, 일찍이 산천을 측량하고 일경대(日景臺)를 지어 천상(天象)을 관측하고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1780년 이후에는 이상정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에 뜻을 두고 경전 및 사서(四書) 연구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으나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중요한 저서로는 『괴담유고』가 있으며, 그밖에 『성리찬요(性理纂要)』·『사서찬요(四書纂要)』·『계몽도해(啓蒙圖解)』 등이 있다.
▮성이성(1595-1664)
字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본관은 창녕으로 부용당 안의(安義)의 아들이다.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문하에서 배우고 1616년에 생원을 거쳐 인조5년(1627)에 문과에 급제 주서(注書)를 시작으로 응교, 지제교, 통정대부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원종(인조의 생부(生父))의 추승(追崇)을 논하고 인성군 공(珙)의 아들이 모역을 범했을 때 용서하기를 주청하여 죽음을 면케 했다.영호남어사(嶺湖南御使)로 네 번이나 암행하여 권선징악의 본을 모두 시행하였고 헌납으로 있을 때는 윤방, 심기원, 이민구 등의 불충함을 탄핵하였고 각 고을 수령으로 재직 시에는 청렴 정직하여 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인평대군(麟坪大君)이 빈번히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하고 김자점(金自點)이 여러 번 천거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숙종 임금께서 두차례 쌀과 콩을 내렸다. 부제학(副提學)에 증직되고 오천(梧川)서원에 배향 되었으며 저서에 계서집(溪西集)이 있다.
▮이시선(李時善) 1625년(인조 3)∼1715년(숙종 41)
이시선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수(子修), 호는 송월재(松月齋)로 태종의 제3 서자(庶子)이며 신빈신씨(信嬪辛氏) 소생인 온녕군(溫寧君) 정(䄇)의 후손이다.이시선은 과거(科擧) 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고, 장사(壯士)가 어찌 사방(四方)을 주류(周流)하지 않겠는가 하며, 명산(名山)과 대천(大川), 온 고을과 도회(都會)를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돌아와서는 상안(床案)이 겨우 들어갈 만한 송월재(松月齋)를 짓고 기욕(嗜慾)을 물리치고 진정(眞精)한 내면을 닦았다.
언제나 독서하고 사색하여 『육경사자(六經四子)』와 성리(性理)는 물론 역사와 노장(老莊)을 비롯한 제자(諸子)‧병가(兵家)‧지리(地理)‧복서(卜筮) 등의 서적을 관통하여 그가 지은 문장에 왕성하게 발현되었다. 늙어서는 안동의 춘양(春陽)에 은거하여 세상일에 초연하였다. 80세에 호군(護軍)에 제수되었고, 91세로 세상을 마쳤다.
▮이이순(李頤淳) (1754(영조 30)∼1832(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치양(穉養), 초자는 비언(斐彦), 호는 후계(後溪)· 만와(晩窩)· 긍재(兢齋)· 육우당(六友堂)· 육우헌(六友軒)· 기은(杞隱)경상북도 봉화 출신이다.
이황(李滉)의 9세손으로, 구몽(龜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택동(金宅東)의 딸이다. 6남 2녀 가운데 차남으로 6형제 중 유일하게 현감벼슬을 했으며, 형제 중 문장이 가장 뛰어났다.
8세 때 팔촌 형 세윤(世胤)으로부터 ≪소학≫을 배웠고, 18세에 이한우(李漢佑)의 딸과 혼인하였다. 1779년(정조 3) 생원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태학에 들어갔다. 1786년 만촌(晩村)으로 이사해 그 집을 만와(晩窩)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1790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옛집으로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799년 효릉재관(참봉)에 제수되었고, 1802년(순조 2)에는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에 올라 대조전을 수리하였다. 일이 끝나자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이 되고 그 해 가을에는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805년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어 재정을 윤택하게 관리했고, 이듬해인 1806년에는 은진현감이 되어 단옥(斷獄)을 공평히 하고 상벌을 엄격히 하였다. 그러나 죽림서원(竹林書院)의 유생 가운데 군역을 기피하던 많은 양민 장정을 정리하려다가 감영의 힘을 빌어 이를 저지하던 유생들과 충돌을 빚고 이 일로 감영의 뜻을 거슬렸기 때문에 그 해 겨울 부임 9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 뒤 1811년 가을, 후계서당(後溪書堂)을 짓고 독서와 예서에 잠심(潛心)하였다. 음양서와 농공 기술에 두루 통달했으며 절약하는 생활을 하였다. 후세손에게 규범으로 하고자 <무첨가 無胤歌>를 지었다. 이황의 문집을 교검(校檢), 개간(改刊)하고 몽재(蒙齋)·청벽(淸壁)·만호(晩湖) 등의 유문을 수습해 ≪계산세고 溪山世稿≫ 3책을 만들었다. 문집으로 ≪후계집 後溪集≫이 현전하며, 작품으로는 <화왕전 花王傳>과 <일락정기 一樂亭記>가 있다.
▮조덕린(趙德鄰) 1658(효종 9)∼1737(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군(頵)이다.
1678년(숙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적거(謫居) 끝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숙사(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사마방목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뒤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에의 뜻을 버린 채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저서로 『옥천문집(玉川文集)』 18권이 있다.
▮홍익환(1586-1636)
처음 휘는 습(霫), 자(字)는 백승(伯昇), 호는 화포(花浦) 또는 운옹(雲翁), 시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남양으로 진사 이성(以成)의 아들로 문단2리(阮邱)에서 태어났다.월사 이정귀(李廷龜)의 문인으로 광해 7년(1615)에 사마시를 거쳐 인조 2년(1624)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사서(司書)를 거쳐 인조 13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듬해 청나라가 굴욕적인 조건을 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상소하여 그를 죽일 것을 주장했고 이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을 적극 반대했다. 다음해 화의가 성립되자 조정의 권유로 청군의 화를 피하고자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으로 나갔으나 끝내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가서 순절한 삼학사(三學士)의 한분이다.경기도 광주 「현절사」, 평택 「포의사」 평양 「서산서원」 부안 「동도서원」 영주 「장암서원」, 고령 「운천서원」 등에 제향되고 출생지인 봉화문단에 충렬신도비와 정충각(㫌忠閣)이 있고 저서로는 화보집(花浦集), 이행록(以行錄), 서종록(西從錄)이 있으며 효종 4년에 증 도승지, 숙종 12년 증 이조판서 숙종 31년에 영의정에 증직하고 영조 33년에는 부조위(不祧位)가 내렸다
● 참고자료
▮ 태백오현
은둔의 삶을 산 조선조의 지성 다섯명,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평소 오랑캐라 부르던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지성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래서 후일 태백오현이라 불리는 한양 태생 지성 다섯명이 봉화 문수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은둔의 삶을 살았다.
영의정 인재 홍섬의 증손 손우당 홍석, 송강 정철의 손자 포옹 정양,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 각금당 심장세, 참판 강징의 현손 잠은 감흡,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 두곡 홍우정, 이 다섯사람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로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잡고 정착 해 살면서 자연을 벗삼아 빈번하게 교류 했는데 그 주된 장소가 사덕암과 이곳 와선대이다.
이 다섯분의 후손들은 "와선정계"를 만들어 끈끈한 정을 이어오고 있다 한다.
▮淸凉山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예안면과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재산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렸으며 높이는 870.4m이다.
청량산은 고대 이래로 ‘수산(水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금탑봉에 자리 잡은 상청량암(上淸凉庵)과 하청량암(下淸凉庵)이 널리 알려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청량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청량산은 주세붕(周世鵬)이 명명한 12봉우리(일명 6·6봉)가 주축을 이루며,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6개의 봉우리가 제각각 솟아 있는 모양이다.
동쪽 비탈면인 봉화군 재산면에는 약간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고 평지 가운데로 하천이 흐른다. 서쪽 비탈면으로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능선은 북쪽으로 문명산·미림산·화장산을 거쳐 태백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도촌리 607고지·영등산·아기산으로 이어진다.수려한 외형과 역사적 기념물들이 많아 1982년 8월 52.8㎢가 청량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인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 683년 의상이 창건했다는 응진전(應眞殿)을 비롯한 20여 개의 절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4호로 퇴계 이황(李滉)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 서성(書聖) 김생(金生)이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생굴,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수도한 풍혈대(風穴臺),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와서 쌓았다는 산성 등 수많은 유적과 선현들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봉화((봉성鳳城)금씨
금씨(琴氏) 선계(先系)는 고대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올 때 함께 건너온 금응(琴應)이 가문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고증할 자료가 없다.
금응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한 금용식(琴容式)도 시조로 전하는데, 금용식의 6세손까지 기록이 유실되어 유래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금씨 성을 쓰는 인물로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인물 금의(琴儀)를 시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고려 명종과 고종사이의 명신이었는데, 1184년(명종 14) 문과에 급제한 뒤, 1217년(고종 4)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판리부사(判吏部事)를 거쳐 태보(太保)에 올랐다.
또한 당대의 명신으로 지공거(知貢擧)로 있을 때 많은 인재를 등용했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금학사(琴學士)라 하였다.봉화금씨가 봉화에 세거한 시기는 10세 금우공(琴遇工) 이후부터라고 한다. 금우공대 이전까지 금씨는 강화, 용인, 옥천, 담양, 영암 등지에 세거하였다가 금우공이 경상북도 봉화에 입거한 이후로 봉화를 관향으로 정하였다.
▮봉화정씨
고려 때 정의대부(正議大夫) 호부령(戶部令)을 지낸 정공미(鄭公美)이다.
정공미(鄭公美)의 5세손 정도전(鄭道傳)은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봉해졌다. 1391년에 정도전은 우군도총제가 되었고,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어 군대를 장악하였다.
1392년(공양왕 4) 4월 이방원이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제거하자, 정도전은 7월17일에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개국 공신이 되었다. 정도전은 신덕왕후의 소생의 이방석을 세자로 추대하려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피살되었다.
敬이란 “사물을 공경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지극히 섬기는 것”을 의미하며 性理學은 理를 깨닫는 것이고 理를 깨닫기 위해서는“마음이 한 가지 일에 집중되어 흩어지지 않는 主一無適이 되어야 한다” 敬이야 말로 一心의 주재자이자 萬事의 근본으로‘지극히 섬김’즉 持敬을 통하여 仁을 구함으로 성인에 도달 할 수 있으므로 경이야 말로 聖學의 처음이자 끝이다. |
문운(文運)의 고장!!
봉화지역 유교문화 답사에 참여하신 진유(眞儒) 제현(諸賢)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 편집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