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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은 끝났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다. 좋든 싫든 침실로 들어가야 한다. 침대에서는 절대 책을 들지 않는다. 핸드폰도 보지 않는다. 좋은 수면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침실은 오직 잠을 자는 곳이어야 한다. 강박이다. 그만큼 수면에 자신이 없어서다. 침대에 누워서도 ‘과연 잠을 잘 수 있을까?’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 겨우 잠이 들어도 한 시간 만에 눈을 뜬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혹시 일어났다가 잠이 완전히 깨면 어쩌나? 망설이다가 결국 화장실에 다녀온다. 다행히도 다시 잠이 든다. 같은 일이 두세 시간 간격으로 반복된다. 이건 내 이야기인 동시에 내 또래 많은 이들의 이야기다. 또래 대다수가 수면장애를 겪고 있다.
핸드폰 시계를 본다. 새벽 5시. 잠은 깼지만 그대로 침대에 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는 생각만 해도 힘들다. 6시를 넘기고서야 겨우 일어난다. 허리와 무릎, 정강이가 시큰거린다. 실금이라도 간 걸까? 아닐 것이다. 커피 중 가장 맛있는 새벽의 공복 커피를 포기했다. 공복 커피가 건강을 해친다는 말을 들었다. 대신 따끈한 차를 타들고 서재로 들어와 책상에 앉는다.
이제 캄캄한 새벽은 아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창 앞에 펼쳐진 깜깜함을 응시하며 신께 말을 걸곤 했던 내 오래된 습관은 이제 먼 과거다. 이미 너무 밝아서일까? 그래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건강을 잃은 후 나이까지 늘어난 내 몸이 책상에 앉아있기에 적합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오후 2시다. 점심을 끝내고 걸으러 나간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일과다. 겨울이 가기도 전 이미 봄옷을 꺼내 입는 성격이었다. ‘아직은 겨울이 아닌’ 가을이 후반으로 접어들 때 이미 내복을 꺼내 입었다. 완전한 겨울로 접어들 때 조금 더 두꺼운 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뿐 아니라 그 속에 러닝셔츠까지 입은 상태다. 10년 전만 해도 하의 내복은 입지 않았다. 추운 것보다 둔한 것이 더 싫었고 따뜻한 것보다는 맵시가 더 중했다. 맨발에 모카신을 신기도 하고 스커트와 검정 스타킹, 구두를 즐겼다. 지금은 발목으로 숭숭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목이 긴 양말을 신는다. 내복 위로 양말목을 끌어 올린다. 4월이나 되어야 내복을 벗을 것 같다. 바닥이 두툼하고 쿠션이 좋은 (그러나 모양내기엔 젬병인) 투박한 운동화를 신는다. 나름 패션 감각을 중히 여기는 나지만 별수 없다. 넘어지면 안 된다. 발이 편해야 한다. 의사로부터도 ‘절대 다치시면 안 됩니다’라는 주의를 받았다.
“다녀올게.” “응.” “조심조심 또 조심해. 넘어지면 큰일 나.” 외출할 때마다 나와 남편이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허리와 가슴을 펴려고 나름 노력한다. 혹 발에 걸릴 물체가 있을지 신경 쓰며 걷는다. 그런데도 넘어졌다. 잔디 위에서 살짝 넘어졌을 뿐인데 갈비뼈가 부러졌다. 한두 달이면 붙는다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4개월이 지나서야 붙었다. 체온, 순발력, 회복력 모든 것이 하강!
일흔다섯 가화 언니의 하루
밤이다. 거실은 아침부터 종일 퀭하다. 계절도 기온도 상관없이 늘 썰렁하다. 자기 전 진통제와 우울증 약을 찾아 먹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로 수면에 방해가 되어 남편과 각방을 쓴 지 오래였다. 함께 쓰던 퀸사이즈 침대를 남편이 사용하고 가화(가명) 언니는 출가한 아들 방에서, 아들이 사용하던 침대를 써왔다. 지금은 남편이 사용했던 퀸사이즈 침대에 가화 언니 홀로 눕는다. 남편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얼마 전 치매 증상이 심해진 남편을 요양원에 보냈고, 입원 7일 만에 사고로 명을 달리하였다. 가화 언니는 심한 우울 중세로 인해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4남매를 두었지만 서로 불편할 것을 알기에 혼자 지내고 있다. 웬만하면 전화도 걸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엄마라는 존재가 자식들에게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다. 밖에서 남편이 부르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현관문을 열어본다. 아무도 없다.
아직은 컴컴한 아침에 눈을 뜬다. 남편의 아침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왠지 무섭다. 그래도 나간다. 덩그러니 혼자인 식탁에 앉아 공복 혈당을 체크한다. 오래전 당뇨가 찾아왔다. 배에 인슐린 주사를 놓는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빈속에 십여 개의 알약들을 입에 털어 넣는다. 신장, 간, 심장, 고혈압과 당뇨에 관련된 약들이다. 젊은 시절, 시부모를 비롯해 시누이 시동생 뒷바라지에 손이 마를 날이 없었다. 시어른들이 명을 달리하고 시동생과 시누들이 출가하고 4남매까지 독립하자 몸이 좀 편해지려나 했을 때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온갖 병이 줄줄이 찾아왔다.
외롭다. 사람 소리를 듣기 위해 라디오를 켠다.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이라면 집에서 멀지 않은 수영장(그곳에서 풀 안에 쳐진 레인을 붙잡고 걷기 운동을 해왔다)으로 걸어갈 시간이다. 이제 그럴 수 없다. 세상 모든 게 정지한 것만 같은데, 이곳저곳 몸의 통증은 결코 쉼이 없다. 매일 침을 맞으러 간다. 수영장에 가서 친구가 된 사람들도 이제는 만날 수 없다. 그야말로 고독하기만 한 지금, 침을 맞으러 다니는 것이 주요 일과다.
침을 맞고 오면 하루의 반이 지나간다. 아직 바깥 빛은 환한데 종일 혼자인 가화 언니의 마음은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이다.
아흔 엄마, 아기가 되다
언젠가부터 엄마는 드라마 보기가 힘들다 하셨다. 드라마의 대사가 너무 빠르다, 등장인물들이 입고 나오는 옷들도 그렇고 남녀노소 서로를 향한 태도나 짓거리들이 도무지 법도라는 게 없어 보인다, 못마땅하다 하셨다. 엄마가 열심히 살던 시대에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일들이 드라마의 세상에 난무한다. 채널을 돌려가며 뉴스를 본다. 듣지 못하고 그야말로 본다. 자막을 본다. 그래도 소리를 키운다. 소리를 너무 키워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 같다. 어차피 들리지 않는 거, 아예 소리를 죽인다. 습관이 되니 무음도 상관없다. 아들 집도 딸 집도 책이 많다. 아들이 권하는 책과 딸이 권하는 책을 읽는다. 독서는 엄마의 취미다. 권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읽는다. 아들과 딸의 생각도, 권하는 책 내용도 사뭇 다르다. 아들과 딸이 하는 말을 따라, 손에 드는 책을 따라 생각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엄마가 살던 세상은 온데간데없다. 뭐가 옳은 건지 모르겠다.
엄마는 작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잃은 후 12년 만이다. 요양원으로 들어가기 전 막내딸인 나와 1년 2개월을 지냈다. 그때 엄마는 아흔이었다. 실내에서는 워커(보행 보조기)를, 밖에서는 휠체어를 사용했다. 워커를 잡고 걷다가 어느새 스르르 주저앉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양손으로 워커 아랫단을 힘겹게 붙잡고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일어나야만 했다. 엄마의 두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넘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꼼짝하고 싶지 않아도 애써 움직이려 하셨다. 자식들 힘들지 않게 하려고. 요양원으로 가시겠다고 했지만 보내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틀림없이 엄마가 넘어진 소리였다. 문을 열면 엄마는 주저앉아 있거나, 뒤로 넘어져 세면대 아래쪽에 엄마 머리가 놓여있었다. 엄마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엄마를 일으켜 방으로 모신 후 냄새나는 엄마의 속옷을 벗겨 물휴지로 항문 주위를 닦아내고 팬티를 갈아입힌다. 엄마는 아기가 되었다. 변을 묻히고도 당당하게 웃는 손주와는 달리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가득 머금은 아기. 청각에 이어 이제는 근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내가 아기 때 엄마에게 절대 의존해서 생존할 수 있었듯, 이제 엄마는 자기 자식에게 절대 의존해야 생존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역할이 바뀌었어’라고 가슴 아파하던 엄마는 결국 요양원으로 갔다. 가기 전날 엄마는 잠 대신 손수건 한 장을 완전히 적셨다. 물에 담갔던 것처럼 눈물로 흥건히 젖은 옅은 꽃무늬 수건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요양원에서 3년을 더 지내고 어딘지 모를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
예순을 넘기면 일흔이 되고 곧 아흔이 된다. 빠르게 변해가는 문명의 세계에서 서서히 도태되는 것을 느낀다. 예순이 되기 전에 직장에서 물러나기 시작한다. 안식처이기를 기대하며 돌아온 집은 결코 안식의 장소가 아님을 알게 된다. 부부가, 또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자녀들과 즐겨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모처럼 함께 모이고 보니 마당 없는 집, 아파트 좁은 공간에서 서로가 불편한 존재로 만난다. 그동안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면서 분쟁이 시작되거나 아예 담벼락을 친 듯 서로를 차단한다. 수입이 끊기니 경제생활이 이전 같지 않다. 경조사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부모들을 여의는 시기가 딱 이맘때인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 회포도 풀고 싶은데 지출이 걱정이니 좋기만 할 수 없다. 알고 있던 지식과 기술들은 낡은 것이 되고,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속마음을 터놓고 나눌 수 있는 이들도 점점 적어진다.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은 깊은 고독이 찾아온다. 퇴물이 된 것만 같다. 상실의 시대다.
그동안 해왔던 수고들은 과연 무엇인가? 회의가 밀려온다. 곧 근육이 빠져나가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 동료, 친족들도 남지 않는 시기가 온다. 완전한 무력감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그 끝은 이렇게 절망스러운가?
어느 날엔가 시인 박노해의 시 ‘길이 끝나면’이 희망을 전해주었다.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젊음의 끝, 새로운 날이 남아있다
잘 살았다는 자신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살았다. 누구나 다 가는 어떤 길도 본인에게는 별수 없이 처음 가는 길이다. 어려운 길을 나도 열심히 걸어왔다. 나이 예순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아이들은 다 자랐고 집도 있었고 성실과 검소한 삶으로 밥 굶을 걱정은 없었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세대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우리 세대는(다는 아니지만) 지금과는 달랐다. 노력하면 부모 세대보다 부유해질 수 있는 시대를 살았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는 세상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직은 늙지 않았다. ‘몸으로 사는 삶’을 살아보려 했다.
집안 살림 외에 몸으로 해본 것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서 늦게 시작한 신학 공부, 학교와 교회와 또 학교에서 마치 몸은 없는 것 같이 머리로만 살았다. 읽고 쓰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몸과 정신이 하나인데 정신만을 사용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이 몸으로 사는 삶에 대한 욕구를 불러왔다. 몸과 정신을 통합하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교회나 학교나 사무실 아닌 진짜 현장에서 살고 싶었다. 목공예를 하고 싶었고, 바리스타도 되고 싶었다. 설거지 아르바이트로 돈도 벌고 싶었다. 공방, 카페, 식당에서 사람들을 사귀며 질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다. 그곳에서 만난 이야기들을 소재로 글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야무진 꿈은 시작해보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었다. 새로운 시작은 첫발을 떼보지도 못했다.
급작스러운 노화! 일을 관두자 곧바로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대체의료기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버티던 몸이 2014년에 일을 그만두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그동안 참아왔던 몸이 일제히 항거한 것이다. 시술을 받았으나 실패했다. 신경 오염에 의한 것인지 견딜 수 없는 극심한 통증(나와 같은 경우로 죽은 지인도 있었다)이 24시간 쉬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끈질긴 치료로 신경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또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졸피뎀과 아졸락 없이는 잠들 수가 없었다. 신경과 약을 다시 먹었고 부작용으로 눈이 나빠졌다.
약을 끊고 2016년 척추 수술을 했다. 회복되기는커녕 더 고통스러웠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었다. 수술 1년 후에는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졸피뎀과 아졸락조차 더 이상은 1초도 나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3년간의 사투였다. 끝내고 싶었다. 나쁜 생각들이 머리를 채웠다. 실행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정신과를 찾아 우울증 치료를 시작했다.
남편은 그때부터 매일 새벽 나의 온열치료를 시작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정신과를 함께 다녔으며 외출을 끊었다. 밤이면 신음하는 나를 안고 함께 울었다. 적극적이고 끈질긴 노력과 남편의 사랑, 정신과의 도움으로 지금은 ‘거의 회복’됐다. 정신과 치료로 복용해왔던 약들을 한 달 전 완전히 끊었다.
절망의 시간이 나를 멈춘 동안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7년이 흘렀다. 나는 젊지 않다. ‘거의 회복’되었지만 아프지 않은 완전한 상태를 내 몸은 기억하지 못한다. 내 젊은 날은 확실하게 끝났다.
그런데 여전히 새로운 날이 남아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지금의 새로운 날에 감사하고 있다.
남은 반원을 그린다
인생은 직선도 포물선도 아니다. 원과 같다. 원을 그리려면 한 점에서 시작해 한 방향으로 선을 그려나간다. 반원 지점에서부터는 더 멀리 뻗어 나가는 대신 반대 방향으로 선을 그려 원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원은 완성된다.
우리 모두 탄생이라는 원점에서 삶을 시작한다. 아기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장과 성숙을 향해 멀리 뻗어 나간다. 원점과 거리를 점점 벌리며 큰 원을 그리며 기술과 지식을 습득한다. 몸과 지혜가 자란다. 원점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며 멀리 나가 장년이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멀리 나가기를 그친다. 그 방향을 원점으로 돌린다.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의 인생을 완성한다. 물론 중심이 있어야 원이 그려진다. 그 중심은 신일 수도 있고 무의식의 원형일 수도 있다. 그때 비로소 삶이 완성된다. 그리고 마침내 한 줌 흙이 되어 그곳으로부터 왔지만, 알 수 없었던 바로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어쩌면 원의 중심일지 모르는 곳으로.
젊은 날 동안 최선의 반원을 그린다면 젊은 날이 끝나면 최선을 다해 나머지 반원을 그려야 한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반대 방향으로 그려야 한다. 원을 그리다가 어느 지점에서라도 멈추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할 수 있듯이, 우리 또한 인생이라는 원을 그리며 쉴 수 있고 멈출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머지 반원을 그리기 전에 멈출 수도 있다. 잠깐을 멈출 수도 있고, 한참을 멈출 수도 있다. 멈춘 동안 행복할 수도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처음 반원을 그리는 동안에는 반대편 반원이 없었고 그래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남은 반원을 그릴 때는 이미 그려놓았던 반원을 보면서 그리게 된다. 이미 그린 반원을 앞에 놓고 보면 그동안 걸어온 길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그동안의 삶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고통의 7년은 미리 그려놓은 길을 바라보느라 멈춰선 시간이었다. 고통의 시간은 멈춰 서서 새로운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둔하여 7년이나 걸렸다.
느리고 작고 소소한 일상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누군가를 업신여기기도 했고, ‘내게는 갱년기란 없을 것이다. 내 정신은 건강하다. 건강한 정신으로 갱년기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낼 것이다’ 자신하며 살았다. 아픈 사람들을 보면 마음은 아팠지만, 그 신체적 고통을 함께 느끼지는 못했다. 워낙 혼자 있는 것을 즐겼기에, 혼자서도 꿋꿋하게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체력이 약하고 이미 골격과 근육에 문제를 느끼면서도, 저혈압에 빈혈까지 있으면서도 나는 별문제 없이 잘 살 것이라는, 그야말로 근거 없는, 믿음 아닌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노화? 질병? 뭐라 해야 할지 모를 총체적 절망이 나의 교만을 깨뜨렸다. 당연히 받아들였던 일상의 모든 것이 사실은 기적임을 깨달았다. 일어나 걷고, 뛰고, 앉고, 무거운 것을 들고 아프지 않은 몸을 산다는 그 모든 것이 기적임을 이제는 안다. 그 결과로 아주 작은 것들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나는, 나아가 사람은 결코 혼자, 또 사람끼리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아픈 사람들을 보면 내 몸이 기억하는 통증이 나의 통증을 깨운다. 몸으로 함께 아프다. 앞서 말한 가화 언니와 나는 별로 공통점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프다는 것, 외롭게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화 언니를 찾는다. 함께 식사하고 언니가 하지 못하는 인터넷 쇼핑으로 장을 봐주고 시간을 같이 보낸다. 전화에 인색한 내가 안부 전화를 한다. 수입은 줄었지만 적은 금액이라도 후원하는 곳들이 늘어난다. 작은 도움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아주 작고 사소한 삶을 살고 있다. 바쁜 일이 없다. 아주 느리게 살고 있다.
이제는 요리를 즐긴다. 요리가 싫어 밥 먹는 일이 없으면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 도시락 싸는 것도, 식구들 저녁 상차림도 다 귀찮기만 했다. 성의 없는 식탁을 차리곤 했다. 요즘은 남편과 둘만의 식탁을 차리는 일에 정성을 쏟는다. 요리를 즐기며 상을 채워주는 땅이 소중하다. 땅을 살리기 위해 농가 펀드에도 가입했다. 배우고 싶던 목공예 자리를 요리가 대신 차지했다. 예기치 못한 즐거움이다. 이전에는 별일 아니던 생일, 결혼기념일 등 작은 기념일이 다 소중하다.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 참 소중함을 이제야 알아간다. 한때 당장 이혼이라도 할 듯 으르렁거렸던 남편에게 닭살 돋는 멘트도 날리며 신혼처럼 살고 있다. 나와는 다른 그 사람의 사랑법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 다 은퇴를 한 후, 가까이서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내 삶에 거창하다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무나 작고 소소한 일상일 뿐인데 이 삶이 소중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놓쳤던 일들을 새삼스럽게 즐기고 있을 뿐이다.
‘악’ ‘악인’들을 향한 거창한 분노조차 사그라든다(악인들을 향했던 분노가 긍휼로 바뀌는 것 같다. 이것조차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악인의 악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한, 이런 생각은 그저 나만의 것일 수 있다). 작고 소소하기만 한 일상이, 지난날 알지도 보지도 못해 숭숭 구멍이 난 내 삶을 어느 정도 메꾸고 있다. 그렇게 내 삶을 채운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싶었던 그날들을 이겨냈다. 혼자라면 불가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한 이들이 있었고 경제적 자산이 있어서 가능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멈춰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원의 궤도에서 이탈해 내동댕이쳐진다. 건강, 삶을 지탱할 만한 최소한의 경제력, 따뜻하게 위로해줄 이웃조차 없을 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궤도 밖으로 던질 수 있다. 실은 던져진 것이다.
재산은 물론 학력도 세습되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이 절대적으로 불가한, 가난이 가난으로 이어지는 세상이다. 이런 때야말로 서로를 돌아보며 서로 남은 반원의 삶을 완성해갈 수 있도록 누군가의 밑천이 되어주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야 크건 작건, 테두리가 일그러졌건 그렇지 않건 원을 그려내려는 한 사람의 삶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많지는 않아도 적으면 적은 대로 최선을 다해 따뜻한 나눔을 하는 분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참 좋은 분들이다. 이분들이 짐을 나누며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린다.
글을 닫으며 묻는다. 나는 과연 나의 작은 밑천을 누군가에게 필요한 밑천으로 내어놓는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는, 교회는, 사회는 무엇을 위해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 새로운 답을 구할 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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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통의 시간은 멈춰 서서 새로운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다.
여전히 새로운 날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의 새로운 날에 감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