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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몽(稚夢)
손 창 섭
1
장례식 다음날은 아침부터 구질구질 비가 내리었다. 밤이 깊어도 비는 그치지 아니하였다. 고인의 눈물인지도 모르는 비였다. 단 모녀 뿐인 가족이었다. 어머니는 딸 하나에 온갖 낙을 걸고 설움도 괴로움도 이겨 왔고 딸은 어머니만을 하늘처럼 믿고 성장했다. 냉혹한 현실 속에서 자꾸만 얼어붙는 마음을 모녀는 서로의 체온으로 포근히 녹여주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를 사려 물고 독력으로 열아홉 살까지 길러 놓은 딸을 남긴 채, 모친은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찌 죽어선들 한이 가시랴. 정녕 이 비는 죽은 모친이 뿌리는 눈물일 거라고 을미(乙美)는 생각했다. 스산한 밤비 소리에 잠기며 휘엉한 방 안에 혼자 앉아서 고리짝을 들추고 돌아간 모친의 옷가지를 정리하다 말고, 을미는 새로운 설움이 치밀어올라 그 자리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부르며 느껴 우는 을미의 가느단 울음 소리는,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에 섞이어 윗방을 빌려 지내는 소년들의 가슴속에도 유별히 스며들었다. 평시 같으면 벌써 곯아떨어졌을 시각이지만 오늘따라 소년들은 불을 끄고 누워서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기름종이를 덮은 지봉을 후두두 후두두 내려 때리는 빗소리가 여느 때 없이 그들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였다. 바람결에 비는 토담벽을 들이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찢어진 문창지는 미친 듯이 펴덕이었다.
“을미 누나 울지?”
마침내 상균(相均)이는 죽은 듯이 옆에 누워 있는 두 친구에게 조그만 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기수(基洙)와 태갑(泰甲) 이는 거의 동시에,
“음.”
하고 대답한 것이다. 빗소리 속에 잠시 또 고즈녁한 시간이 흘러갔다. 소년들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말없이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인제 겨우 십육칠 세의 그들에게는 주인 아주머니의 죽은 모습과 슬픔에 지친 을미의 얼굴이 겹쳐서 다자꾸 눈앞을 얼씬거려 속이 으스스해 오는 것이었다.
“내려가 볼까?”
견디다 못해 기수가 먼저 상반신을 일으키며 속삭이듯 했다. 다른 두 소년도 이내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대강 옷을 주워 입고 아랫방으로 내려가 보았다. 을미는 여태 자리도 펴지 않은 채 옷 고리짝 위에 엎더져 울고 있었다. 세 소년은 그 옆에 조심스레 웅크리고들 앉아서 들먹이는 을미의 어깨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도무지 무슨 말로 을미를 위로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것이다. 저토록 심한 을미의 슬픔을 덜어 주지 못하는 것이 자기들의 책임인 것 같아서 소년들은 그저 송구하기만 했다. 얼마 뒤에 간신히 울음을 그친 음미는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이쪽으로 돌아앉았다. 요 며칠 동안에 표가 나게 파리한 을미였지만 도리어 그 용모는 희미한 불빛에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소년들은 잠시 그 가냘픈 미모에 취하여 있었다. 을미는 소년들에게 오늘 밤부터 이 방에서 같이들 자자고 했다. 혼자 자기에는 너무 허전해 못 견디겠으니 잠동무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소년들은 좀 점직해서 저희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을미는 옷고리짝을 치워 놓고 소년들의 잠자리까지 마련해 주었다. 소년들은 불을 끄고 나서야 겉옷들을 벗었다. 자리에 들어가서도 공연히 가슴이 설레는 게 마음이 별해서 쉬 잠이 오지 않았다. 밖에는 여전히 빗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슬픔에 지쳐 버렸던 심신이 차츰 회복됨에 따라, 을미는 앞으로 살아 나갈 일이 막연했다. 서울 주변의 농가를 상대로 다년간 잡화 행상을 해온 을미 모친은, 한때 수입이 괜찮아서 자그마한 토담집이나마 제 집을 장만할 수 있었지만, 근래에 와서는 잘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외상 거래만이 늘어서 간신히 식생활이나 유지해 오던 터라, 수삭 동안 몸져누웠다가 덜컥 죽고 보니, 여유는 고사하고 도리어 여기저기 소소한 빚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윗방 소년들이 아니었더면 당장 굶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을미였다. 나중에 갚아 줄 요량하고 우선 얻어먹고는 있지만, 신문배달과 구두닦이로 겨우 끼니를 메워 나가는 연소한 그들에게 단 하루라도 얹혀 지낼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 한자리에 모여 앉을 적마다,
“너희들에게 짐이 되어서 어쩌나. 어서 나도 밥벌이를 해야겠는데…….”
하고 을미는 늘 걱정이었다.
“아무렴 우리가 누나 하나쯤 못 봐줄 줄 알어!”
그때마다 소년들은 자기들만 믿고 안심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소년들은 저희들 힘으로 을미를 돌보아 줄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즐겁고 자랑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을미를 좀더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들의 당면한 숙제이기도 했다. 소년들에게 대해서 그토록 인자하고 곰살갑던 아주머니가 눈을 감기 바로 전에, 그들 세 소년을 불러 앉히고,
“을미를 잘 좀 봐다고! 친누이처럼 생각하구.”
그렇게 간곡한 부탁을 남기었던 것이다. 그 말은 소년들의 가슴속에서 생명력을 갖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을미를 위해서 심신을 아끼지 않으리라고 그들은 비슷한 결심을 했던 것이다. 을미는 소년들의 눈앞에 새로이 다가선 희망이요 행복이었다. 과거의 을미는 단순히 주인 아주머니의 딸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감히 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아주머니의 독점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던 을미가 뜻 밖에도 인제부터는 소년들의 것이었다. 틀림없이 그들의 ‘누나’요, ‘친구’요, 또 ‘애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가슴속에 황홀한 감격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소년들은 대체 어떻게 하면 을미를 가장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 머리를 쓰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으레 ‘돈’이라는 난문제에 귀착하는 것이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을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결론은 그들의 마음에 적지않이 상처를 주었다. 그들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경제 관념이 지독히 강한 태갑이만은 늘 몸에 돈을 지니고 있었다. ‘구두쇠’라고 불리는 그는 언제나 돈을 싼 보자기를 내의 속으로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것이다. 남이 보는 앞에서는 결코 그 보자기를 끄르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누구에게 돈을 꾸어 주는 일도 거의 없었다. 다만 죽은 을미 모친에게만 얼마씩 융통해 주는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 세상 사람이 다 굶어죽더라도 태갑이만은 살아 남을 것이라고, 을미 모친은 자주 감탄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태갑이라 얼마간의 저축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큰 돈이 아닐 뿐더러 아무리 을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물론 통째로 톡톡 털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 비하면 만날 큰소리만 탕탕 치는 키가 헌칠한 상균이나, 살갗이 희고 다감한 기수는 한푼의 여유조차 없었다. 신문배달을 하는 상균이와 기수는 식비로 매일 갹출하는 이백 환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는 날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 와서는 을미의 식비까지를 셋이서 분담하게 되어 매인당 하루에 이백칠십 환씩을 내놓아야 하니 더욱 쪼들릴밖에 없었다.
“임마, 느들 정신차려! 인제부턴 매일 이백칠십 환씩 내야 해, 알지.”
상균이와 기수의 경제력을 통히 신용하지 않는 태갑이가 그렇게 다짐을 두었을 때,
“남의 걱정 마, 인석아. 독자(讀者) 백 집만 확장을 하면 그 수입이 얼마가 느는지 알어!”
하고 천연덕스레 대답하는 상균이었지만, 기실 은근히 속이 켕기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그는 돈밖에 모르는 태갑을 속으로 경멸하고 있으면서도, 실제 경제력에 있어서는 언제나 한 수 꺾이었기 때문이다. 상균은 경찰서 서장이 되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서장만 되고 보면 세상에서 부러운 것도, 무서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자주 태갑이와 언쟁을 했다. 한결같이 태갑은 이 세상에서 돈이 제일이라고 주장했기 까닭이다. 그럴 때마다 상균은 돈보다도 권세가 제일이라고 우겨 댔다. 권세만 있고 보면 돈 같은 것은 저절로 술술 굴러 들어온다는 것이다. 영원히 일치점을 발견할 것 같지 않은 그들의 이러한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기수는 언제나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돈도 필요하고 권세도 좋기는 하겠지만, 돈이나 권세에다 자기 인생의 전부를 걸고 덤벼들 만큼 기수는 매력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색다른 꿈을 지니고 있었다. 위대한 화가가 되리라는 희망이 그것이었다. 기수는 미술에 관한 신문 기사는 죄다 오려서 보관하고 있었다. 말이 적고 소녀처럼 곧잘 수줍어하는 그는, 자기의 그림 이 국전(國展)에 특선되어 대통령상을 타는 광경을 자주 눈앞에 그려 보았다. 그때마다 가슴이 홧홧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수는 돈 모으는 일에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따라서 을미를 기쁘게 해주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자신이 슬펐다. 같은 건달이면서도 상균은 기수와는 달랐다. 그는 벌써 며칠 전부터 새로운 독자 백 집을 목표로 대확장에 맹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단시일에 백 부를 더 늘려 가지고 거기에서 생기는 수입은 오로지 을미를 위해서만 쓰겠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싸한 얘기였다. 참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음날부터 기수도 자기 구역을 일일이 뒤지고 다니며 새 독자 모집에 주력했다. 백 집은 어려워도 오십 집 정도면 늘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독자가 불어서 수입이 늘게 되면 무엇보다도 을미에게 구두부터 한 켤레 사주리라고 기수는 마음먹 었다. 그 모친이 살아 계실 때부터 두고두고 벼르면서도
을미는 여태 구두를 장만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색이 좋을까, 혹은 새까만 놈으로 할까, 기수는 길을 걸으면서도 예쁘장한 여자의 구두만이 머리에 떠올랐다.
2
소년들이 아랫방에서 을미와 함께 기거하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앞으로 을미가 살아 나갈 길에 대해서 의논들을 하고 있으려니까 느닷없이 에헴 에헴 하고 밖에서 두어 번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슬며시 방문이 열리었다. 이웃에 사는 복희(福姬) 부친이었다.
“좀 실례해도 좋습네까?”
그는 어딘가 비굴한 웃음을 띄우며 방 안을 한번 둘러보고 조심히 들어와 앉았다. 복희 부친은 우선 을미를 보고 위로의 말을 하였다. 육친이라곤 단 한 분밖에 안 계시던 모친이 세상을 떠나고 보니 하늘이 무너진 것 같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산 사람이란 다 묘하게 살아나가게 마련이니 그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잘 살 도리를 차리란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더니 그는 다시 자기의 얘기를 계속했다.
“내가 상처를 한 게 꼭 십 년 전 일이웨다. 우리 복희 에미는 똑 체니(을미)와 같았디요. 모습이나 마음씨나 곱기가 체니와 비슷했단 말입네다. 그러기 체니를 대할 적마다 나는 십 년 전에 죽은 우리 복희 에미가 생각나군 했답네다. 물론 우린 금슬 좋은 부부였디요. 그러던 거이, 우리 복희가 다섯 살 잽히구 복남(福男)이레 두 살 되었을 제 덜컥 죽딜 않았갔소. 그땐 정말이디 하늘이 다 노랗습데다. 단 부처 살림에 어린걸 둘이나 놓구 죽었으니 어떻겠소. 첨엔 살 것 같디 않더니 그래두 이렇게 내 손 하나루 어린것들 치다꺼리하면서 십 년을 살아왔쉐다.”
말을 끊고 복희 부친은 후 하고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정말 고생이 대단하셨겠어요.”
을미가 마지못해 인사조로 한마디 건네었더니,
“말 다 해 뭘 하갔소.”
그러고 좌중을 한번 휘 둘러보고 나서,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도 어린것들을 옆집에 맡겨 놓구―물론 한 달에 얼마씩 주기루 하구서지요―저녁때 집에 돌아와서는 보채는 어린것들을 밤새껏 달래면서 울기두 수태 울었이요. 주위서들은 모두 재혼을 하라구 권했지만 어린것들이 불쌍해서 난 지금까지 십 년 동안 고스란히 수절을 해왔습네다. 여자라면 몰라두 한창 나이의 사내루서 십 년이나 수절을 해온다는 건 정말 쉽디 않은 일이웨다. 게다가 6·25 사변까지 터디구 보니 어린것 둘씩이나 데리구 월남해야디요, 그리구 대구루 부산으루 피난생활 하는 동안에도 남들 및 배나 고생했디요. 그러나 고생한 보람이 있이요. 환도 이후 고정된 직당을 갖구 생활에 여유두 생길 뿐 아니라, 애들두 인젠 손이 안 가게 되었으니 한시름 놓았디요. 이렇게 내 신세가 좀 페난해디니까 주위에서들 또 자꾸 장가를 들라구 야단들이야요. 무슨 놈의 체니가 그렇게 많은지 말이 나는 건 모두가 체니 장가 자국이 아니웨까. 하기는 내 나이 겨우 갓마흔이니 남자티구야 아직 새파란 청년이디요. 되레 세상 모르는 애숭이들보다 믿음직해서 좋대는군요. 그래서 마지못해 및 번 맞선두 보구 했는데 맘에 드는 체니란 쉽디 않습데다. 장가 얘기가 났으니 말이디, 아 한번은 돌아가신 체니 자당께서 날 보구 좋은 데 둥맬 셀 테니 장갈 들라구 하디 않갔소. 그래 그때 내 웃음의 소리루 만일 아주머니 딸이나 줄래문 몰라두 그 밖엔 체니를 타스루.갖다 맬긴대두 난 싫습네다, 했디요. 정말 이건 웃음의 소리였이요. 그랬더니 뜻밖에두 자당께선 좀 생각을 해보시더니 본인의 의사도 들어 봐야 하니 어디 두구 봅시다. 그러디 않갔소. 자당께선 날 어떻게 보았는디 참 좋게 대해 주었이요. 사람을 알아보는 분이 었디요.”
복희 부친은 그 기다란 얘기를 마치더니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백 환짜리 한 뭉치를 꺼냈다. 손끝에 침을 발라 가며 하나 둘 소릴내어 열 장을 세어 가지고 을미 앞에 쑥 내어미는 것이다.
“당장 곤란하실 테니 얼마 안 되지만 우선 생활에 보태 쓰시우.”
을미가 한사코 거절을 하자 그는 할 수 없이 돈을 도로 집어넣고,
“뭐 벨하게 생각하디 말라구요…… 그럼 앞으루라두 무슨 딱한 일이 있거들랑 언제든지 주저 말구 나한데 의논해 주시구레!”
그러고는 또 한번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나서 돌아가 버리었던 것이다. 그가 돌아가자마자 제일 먼저 코끝을 벌름거리며 분개한 것은 상균이었다.
“이디 저런 게 다 있어. 십 년 수절을 했건, 장갈 들구 싶건, 뭐 어쨌다구 여기 와서 씨불여 대는 거야.”
그러고는 이북 사투리를 흉내내 보이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 뒤부터 소년들은 그를 가리켜 ‘십년수절’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십년수절이 남기고 간 불쾌한 언동을 잊기 위해서 화투놀이를 시작했다. 화투나 윷놀이 같은 장난은 딴 오락을 모르는 그들에게 언제나 유쾌한 시간을 베풀어 주는 것이었다.
그들 네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앉게 되는 것은 대개가 저녁 식사 이후였다. 상균이와 기수는 하루에 한 번씩 두서너 시간 배달을 하는 외에 간혹 수금을 나가는 일뿐이었지만, 이즈음은 확장을 위해서 진종일 자기의 구역을 쏘다니었고, 태갑이 역시 조반을 먹기가 바쁘게 구두닦이통을 메고 거리로 나갔다가는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소년들에게는 식사 시간이 다시없이 즐거웠다. 같은 재료이지만 을미의 손으로 만든 음식은 저희들끼리 아무렇게나 꿇여먹을 때와는 맛이 아주 딴판이었다. 더구나 을미와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 무척 기뻤다. 저녁식사 이후의 시간은 더욱 그들을 도취케 하였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뒤 저녁을 먹고 나서 을미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된 소리 안 된 소리 함부로 주워섬기며 키득거리는 것도 유쾌했지만, 화투나 윷놀이는 한층더 그들을 흥분 속으로 몰아넣었다. 화투는 득점수에 따라 손목맞기를 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저저끔 자기보다 끗수가 적은 사람의 손목을 다섯 끗에 한 대씩 계산해서 때리는 놀이다. 차례를 거듭하노라면 두루 돌아가며 때리게도 되고 맞게도 마련이었지만, 처음으로 을미의 희고 보들보들한 손목을 때리게 되었을 때, 소년들은 똑같이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이 다 떨리었다. 물론 저희들끼리는 서로 사정없이 짝짝 소리가 나게 힘껏 때리면서도 을미에게 대해서만은 한결같이 사정을 두었다.
“어머나, 이게 뭐야, 좀더 시게 때려!”
을미가 그러면서 저고리 소매를 더 높이 걷어 올리고 흰 팔뚝을 다시 내밀었을 때, 상균은 그만 때리던 손길을 멈추고 히죽거리다가 을미의 그 보드라운 팔뚝을 한번 쓱 쓸어 본 것이다. 태갑이와 기수가 히들히들 웃었다. 어떤 때는 옷 벗기기도 했다.
“지문 정말 옷 벗을래, 누나.”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태갑이가 그러면,
“남의 걱정 말구 느들이나 정신 바짝 차려. 발가벗구 쩔쩔매지 말구.”
하고 을미는 응수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소년들은 노상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을미는 차츰 소년들의 가슴속에 여신과 같이 아름다운 매력으로 진좌하기 시작했다. 단 하루도 그들은 을미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언제고 을미의 얼굴만 대하면 무조건 좋았다. 저녁때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이 어찌 이다지도 가볍고 바쁠 수가 있을까.
그러나 소년들과는 달리 을미는 늘 명랑한 표정만은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곧잘 비애와 초조의 그림자가 어리었다. 모친을 잃은 슬픔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일 게라고 소년들은 생각했다. 그 슬픔을 덜어 주지 못하는 소년들의 가슴은 아팠다.
“나두 무엇을 해서든지 밥벌일 해야겠어. 무슨 좋은 방법이 없나 느들두 잘 좀 궁리해 봐.”
어느 날 밤 을미는 그런 말을 했다.
“우리가 누날 잘 봐주지 못해서 그래?”
처음엔 그런 줄만 알고 소년들은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숙이었다.
“그런 게 아냐, 너희들의 호의만 가지구 내 문제가 뭐든 다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 안 그래? 그러니까 어서 나는 나대루 자립할 수 있는 길을 터놔야 해. 그래 그러는 거야.”
생각해 보니 알 수 있는 심경이었다. 을미의 표정에 나타나는 비애와 초조한 빛이 단순히 망모(亡母)에 대한 정에서만 아니라 주로 생활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근심임을 소년들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불안은 응당 덜어 주어야 할 사람이야말로 그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년들은 거의 저녁마다 을미가 자립할 수 있는 길에 대해서 머리를 모으고 연구도 하고 의논도 해보는 것이었다.
때로는 의견이 백출하여 당장 무슨 수가 생길 듯싶은 방법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실현성 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소년들도 차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3
그저 을미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간곡한 마음뿐, 기수나 상균이가 미처 아무러한 구체적 표시도 갖기 전에, 역시 실제 행동으로 먼저 호기를 보인 것은 태감이었다. 독자 확장을 위해 진종일 휘젓고 다니다가 별반 성과도 없이 지친 몸으로 상균이와 기수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을미가 그 화사한 손으로 고기를 썰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된 심판인가 싶어 눈이 휘둥그래진 두 소년에게 을미는 자랑스레 웃어 보이며 태갑이가 사온 것이라고 했다.
“요즈음 을미 누나 퍽 야위었어. 쇠고길 먹구 영양을 좀 취해야 해!”
태갑이가 히죽거리며 설명을 달았다. 상균이와 기수는 부지중,
“야!”
하고 감탄성을 질렀다. 그들은 실로 오래간만에 쇠고기 맛을 보게 된 것이다. 을미를 기쁘게 해주는 영광을 먼저 차지하지 못한 상균이와 기수는 한편 마음이 딜 좋았다. 그러나 제법 양념까지 한 고깃점이 듬뿍듬뿍 얹힌 당면국을 한 그릇씩 받아 놓았을 때 그들은 저도 모르게 침부터 삼키었다.
“난 국물만 먹어두 돼. 이거 을미 누나 마저 먹어!”
불시에 기수는 자기 몫의 고기를 을미 그릇으로 재빨리 옮기어 버렸다. 그러자 상균이 마저,
“그래그래, 내 것두 을미 누나 다 먹어. 우린 괜찮어!”
그러면서 한사코 자기 고기를 을미 그릇에 덜어 주려고 덤비었다.
“어머나, 왜들 이래!”
을미는 눈을 크게 뜨고 말리면서 식사 책임자인 자기의 성의를 무시하지 말고 잠자코들 어서 먹으라고 했다. 두 소년은 그래도 굳이 사양했지만,
“임마, 느덜두 같이 먹어. 그래야지 어떻게 을미 누나 혼자만 미안해서 먹을 수 있니.”
옆에서 태갑이까지 그래서 기수와 상균이도 자기 몫을 도로 받아먹기로 했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 좀 떳떳지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번엔 내가 큼직한 닭을 한 마리 사올 테다. 가끔 닭고기두 먹어야 해.”
상균은 지금부터 막 큰소리를 치는 것이다.
만족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그들은 오늘도 또 을미의 자립할 수 있는 길에 대해서 머리들을 짜내는 것이었다. 이번엔 가장 실현성 있는 방법부터 재검토해 보기로 했다. 으레 장사 얘기가 나오고 취직 얘기가 나왔다. 만일 장사를 한다면 무슨 장사가 좋겠느냐 또 취직을 한다면 어떤 직장을 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소년들은 한동안 침방울을 튕겨 가며 갑론을박하였다. 장사를 하자면 밑천이 필요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장사라도 그 자금을 장만한다는 것은 지금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역시 유일한 방법이란 취직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면 어느 방면에 취직을 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소년들은 또다시 시끄럽게 떠들어 댔지만, 결국 술집 같은 데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으니, 임시로 아무 데고 들어가 있다가 차차 좋은 직장을 구해 옮아 앉도록 하자는 을미의 의견에 따라, 우선 직업 여하를 가리지 않고 당장 일자리를 구하자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번에도 먼저 장담을 하고 나선 것은 상균이었다.
“취직 같은 건 문제 없어. 내가 발벗구 나서문 낼이라두 당장 돼. 내 구역 안에 회사, 찻집, 식당, 상점 같은 게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야. 자리만 있으면 어디서나 내 청을 무시하진 못하게 돼 있어!”
세 소년은 이튿날부터 을미의 취직운동에 분망하였다.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는 서슴지 않고 찾아가 부탁해 보았다. 그러나 성균이가 장담하듯 취직이란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첫마디에 딱 잘라 거절하기가 예사요, 고작해야 글쎄 한번 알아보지 하고 건성으로 대답해 줄 정도였다. 그 밖에는 을미가 미모의 미혼 여성이란 말을 듣고 공연히 이죽거리며 주책없는 농담을 퍼붓는 사람들뿐이었다. 을미는 자신도 거의 매일같이 밖으로 나다니며 알아보는 모양이었지만 서울에 별반 가까운 사람이 없는 을미이고 보니 헛수고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 을미의 얼굴에는 피로의 빛이 짙어 갔고 소년들은 소년들대로 기진맥진하여 갔다. 저녁때 집으로 돌아오는 소년들의 걸음걸이는 그전처럼 가볍고 명랑하지만은 않았다. 을미에게 대해서 그들은 스스로 피치 못할 죄인이었다.
“며칠만 더 기다려, 을미 누나. 여러 군데 부탁해 두었으니까 되긴 꼭 될 거야.”
그래도 그들은 거의 저녁마다 을미를 그렇게 위로해 줄 것을 잊지 않았다. 그때마다 을미는 쓸쓸히 웃으며 도리어 소년들의 노고를 치사하였다. 이러한 을미의 심정을 고무해 주기 위해서 소년들은 아주 희한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돈만 마련되면 을미에게 구두를 꼭 사주고 싶다는 뜻을 기수가 우연히 비치었을 때, 상균은 눈을 빛내며 감탄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야, 거 참 존 생각이다. 기수 네가 구두를 사면, 난 시계를 사줄 테다. 구두를 신게 되문 시계두 차야 하거든. 그러면 아주 건사하겠다.”
그러고는 태갑을 돌아보며,
“넌 뭘 할래? 너두 한 가지 해라. 우리 을미 누나에게 한 가지씩 같이 선물을 하자!”
하고 권하였다.
“뭐가 좋을까, 난.”
태갑은 조그만 눈을 유난히 깜박거리며 상균이와 기수를 번갈아 보았다.
“거 핸드백이 즐 거다. 알지, 핸드백. 시계를 차구, 구두를 신구, 그러군 으레 핸드백을 척 들어야거든. 야, 그러문 을미 누나 아주 건사하겠다.”
상균은 연방 야 야 하고 탄성을 질러가며 혼자 좋아 덤비었다. 소년들은 그날 저녁으로 이 자랑스러운 계획을 을미 앞에 공개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계획을 세우게 된 경위와 설명은 역시 상균이가 맡았다. 시계와 구두와 핸드백이 을미를 얼마나 더 빛나게 해주리라는 것까지 그는 수다스레 덧붙여 늘어놓기를 잊지 않은 것이다. 신기한 듯이 상균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을미는,
“언제 사줄래?”
하고 물었다. 뜻하지 않았던 그 질문에 소년들은 적이 당황했다. 거기 대해서 만족한 답변을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수만은 전부터 자주 시장에 들러 여자의 구두 값을 알아 보고 다녔지만, 상균이와 태갑은 자기들이 사주려고 하는 물건의 가격조차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결코 몇백 환 정도가 아니라는 것은 추측이 갔다. 소년들은 잠시 멋쩍게 서로 얼굴들만 마주 보다가,
“언제든 돈만 되문 당장 사줄 테야!”
그래도 상균은 주저하는 일 없이 그럴듯이 대답한 것이다. 을미는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쿡 웃고 나서,
“관둬. 어림없는 생각 말구 다 해진 느들 즈봉이나, 입을 벌린 운동화라두 어서 사 신두룩 해!”
그러는 품이 소년들의 이 희한한 계획을 영 믿어 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구 봐, 누나. 한번 결심한 건 꼭 실행하구야 말 테야!”
추호도 굽히지 않고 상규은 시종여일 그처럼 큰소리를 쳤지만, 기수만은 을미가 지적한 대로 도무지 자신이 서질 않았다. 기대했던 신문지 확장이 여의치 않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수금 성적까지 불량해서 그날 그날 식비를 타오고 나면 월말에 가서는 도리어 가불이 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상균이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그렇건만 태평하게 장담만 치고 있늠 그의 속심을 이해할 수가 없어 기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태갑이만은 달랐다. 을미에 대해서나 또는 상균이와 기수에 대해서나 자기의 경제력을 한번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기왕 말을 낸 김엔 조속히 핸드백을 사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허리에 띠고 있는 돈 보자기를 내의 위로 넌지시 만져 보며 내일이라도 당장에 나가 가격을 알아보고 나서, 몇천 환 정도라면 눈 꾹 감고 을미를 놀라게 해주리라고 속으로 거듭 다짐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문 밖에서 에헴 에헴 하는 소리가 났다.
십년수절임에 틀림없었다. 모두들 빙긋이 웃으며 문을 지켜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슬며시 방문이 열리더니,
“좀 실례해도 좋습네까?”
그리고 실내를 둘러본 것은 언제나처럼 비굴한 웃음을 덮어쓴 십년수절의 얼굴이었다. 그는 조심조심 들어와 앉아서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그는 한 주일에 한두 번씩은 으레 찾아왔다. 그때마다 틀에 박은 것 같은 언동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천천히 담배를 피워 물고 나서 장황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십 년 수절담을 또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얘기의 결말에는 다소의 변화를 가져오곤 하였다.
“……체니 자당께서는 과연 사람을 볼 줄 아는 분이었디요. 망처(亡妻)를 생각는 마음과 어린것들을 위하는 정성에서 한창 나이에 십년간이나 수절을 해온 사내란 세상천디에 나밖에 없을 거라구 했이요. 그러니낀 딸 가진 부모들이 제마끔 뎀벼드는 게라구 하시며 그러나 아무 데두 응하디 말구 당신만 믿구 있으라구 하시드군요. 모두 과찬에서 나온 말씀이지만 그 어른이 좀더 살아 계셨드면 아마 나는 체니하구 연분을 맺었을 겁네다. 정말 아까운 분이 세상을 떠나셨디요.”
말을 마치자 십년수절은 안주머니에서 얼른 또 백 환 풍치를 하나 꺼내더니, 소리를 내어 열 장을 세어 가지고 생활에 보태 쓰라고 하며 을미 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웃으면서 을미가 그 돈을 굳이 거절하니까, 할 수 없다는 듯이 도로 집어넣고 나서,
“뭐 벨하게 생각딘 말라구요. 곤란할 땐 서루서루 돕구 살아야 하니깐 그럽네다. 아무튼 딱한 일이 있으문 서슴지 말구 꼭 나한테 의논해 달란 말이웨다. 언제든 힘이 돼 디리갔이요. 아시갔디요.”
그렇듯 다짐을 해놓고는 좌중을 한번 휘 둘러보고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십년수절이 돌아가고 나면, 인제는 을미나 소년들이나 분개하는 대신 저저끔 그의 흉내를 내어 가며 한바탕 흐뭇하게 웃어 보는 것이었다.
4
기수는 그림을 곧잘 그리었다. 그는 대개 조그마한 스케치북과 연필을 몸에 지니고 다니었다. 기회만 있으면 풍경이건 인물이건 놓치지 않고 데생을 해두는 것이다. 한가한 날은 수채화를 그리었다. 어느 날 기수의 화첩을 떠들어 보고 있던 상균은, 야 이 자식 봐라, 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화첩에는 거의 장마다 젊은 여인의 그림으로 차 있었다. 그림의 얼굴은 첫눈에 을미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각도에서 을미의 가지가지 모양을 캐치한 소묘들이었다. 정면이나 측면에서 상반신만 그린 것, 전신상을 그린 것, 혹은 얼굴만 커다랗게 따오거나, 평화스럽게 잠든 모습을 그리기도 한 것이었다. 특히 상균을 놀라게 한 것은 나체화였다. 불룩한 젖두덩을 통째로 내놓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상반신은 여러 장 있었고, 비록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포개고 비스듬히 앉아 있어서 그 부분은 보이진 않지만, 가느단 허리며 푸진 엉덩이며 미끈한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전신 나체화도 몇 장 있었다. 마침 기수는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상균은 화첩을 태갑이 앞으로 밀어 놓으며 히들거리고 웃었다.
“자식 참 엉큼하다. 얌전한 체하면서 밑구멍으루 호박씨 까는 녀석야.”
상균은 부엌에 있는 을미마저 불러들였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들어온 을미는 상균이가 펴보이는 화첩을 몹시 감동한 표정으로 한 장 한장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한집에 살면서도 지금까지 기수의 화첩을 떠들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기수의 실력을 경시해서라기보다도 그들은 도시 미술 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밖에서 기수가 돌아오자 상균이와 태갑은 히죽거리며 신이 나서 기수를 놀려 주었다.
“임마, 너 을미 누나 벌거벗은 거 봤어?”
“이 자식 눈엔 여자의 알몸뚱이만 뵈는 모양이지.”
그 밖에 무안해서 기수가 고개를 못 들 정도로 험담을 퍼부으며 웃어 댔다. 참다못해 기수는 얼굴이 빨개 가지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울상이 되어 이 집에서 나가 버리고 말겠다고 하며, 부득부득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을미가 놀라서 상균이와 태갑의 지나친 태도를 나무나는 일방, 강제로 기수를 붙들어 앉히었다. 상균이와 태갑이도 그제는 안되었든지 멋쩍은 낯으로 만류하였다. 그래도 기수는 듣지 않고 한사코 뿌리쳤다. 셋이는 기수의 팩하는 성격을 가라앉히기에 땀을 뺐다. 앞으로 즐겨 모델이 되어 주겠다고까지 을미는 자청했다. 기수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듯 황홀한 눈으로 한참이나 을미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그 뒤로 을미는 정말 기수를 위해서 자주 모텔이 되어 주었다. 일정한 포즈를 잡고 앉은 을미의 모습을 화첩에 옮기는 동안, 기수는 딴 사람같이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 눈은 열기를 띤 것같이 빛났다. 그림이 끝나면 기수는 몹시 피곤한 자세로 벽에 기대앉은 채 국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거기에 특선이 되면 얼마나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흥분한 어조로 설명해 주었다. 특선작품 중에는 대통령상이 있다는 것, 국전 맨 처음 날은 대통령이 고관들을 거느리고 친히 관람한다는 말을 하자, 상균이와 태갑이도 적이 놀라는 모양이었다. 국전에 관한 여러 종류의 신문 기사까지 꺼내 보이었다.
“그럼 기수두 어서 국전에 특선이 되어서 대통령상을 타야겠어. 시상식에는 나두 꼭 갈 테야. 얼마나 졸까, 신문에 이렇게 사진두 나구…….”
신문 기사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을미가 그렇게 말하자,
“누나가 내 모델만 되어 준다면, 난 꼭 자신이 있어! 제일 첫 번에다는 상품이나 상금을 난 누나에게 줄 테야!”
하고 기수는 눈물이 다 글썽해지는 것이었다.
“임마, 그런 꿈같은 소린 나중 하구 어서 구두나 사다 줘.”
옆에서 상균이가 싱겁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주듯 했다.
“자식, 남의 참견 말구 너나 어서 시계를 사와.”
태갑이가 불쑥 내대자, 상균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목을 옴츠려 보이고 나서,
“원 자식두, 건방지긴…… 넌 그래 핸드백 사왔어!”
하고 반격을 해왔다. 그러자 태갑은 약간 긴장한 표정이 되며,
“그래 내가 못 살 줄 알어. 오늘 당장이라두 산다.”
그러디니 을미를 보고 정말 이 길로 핸드백을 사러 가자고 서둘렀다. 그 동안 태갑은 여러 차례 시장에 나가서 핸드백 값을 알아보기는 했지만, 거액이라고 할 만한 목돈을 내놀 일이 뻐근해서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하루하루 미루어 오던 참이었다. 태갑의 재촉을 받고 을미는 여러 번 사양했지만, 의외로 태갑이가 고집을 세우는 바람에 나중에 벌어서 갚을 셈치고 응하기로 한 것이다. 소년들은 을미를 앞세우고 의기양양해서 시장으로 갔다. 장터에 이르자 핸드백은 나중에도 좋으니 구두부터 샀으면 하는 눈치를 을미가 보였으므로, 핸드백은 기수가 맡고, 오늘은 태갑이가 구두부터 사기로 했다. 일행은 시장 안의 구두 가게란 가게는 온통 뒤지다시피 한 끝에, 뒤축이 높고 끝이 뾰족한 깜장 구두를 골랐다. 그러고 나서 상균의 제의로 그들은 시계도 미리 보아 두기로 했다. 상균은 앞장을 서서 시계 노점상 앞으로 갔다.
“여자용 손목시계 좀 봬주세요.”
그러고는 주인이 내놓는 시계를 하나하나 들어 보이며,
“누나, 이게 좋아, 저게 좋아?”
하고 거푸 물었다. 일일이 가격까지 묻고 나서는 그럼 나중에 들르겠습니다, 하고 어깨를 쓱쓱 저으며 다른 노점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창피스레 그게 뭐냐고 을미가 나무라니까 소년들은 을미보고 그러면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저희끼리 시계점을 한차례 돌고 나서 다시 핸드백까지 두루 다니며 실컷 구경을 하고 을미에게로 온 것이다. 귀로에 상균은 느닷없이 태갑이더러 돈을 꾸려고 했다.
“너 돈 좀 남았지. 내 점심을 한턱 낼 테니 점심값만 좀 빌려 줘.”
태갑은 이내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얼마문 될까?”
“육백 환이문 충분해. 저 중국집에서 백오십 환짜리 짜장면을 아주 건사하게 한다.”
상균은 마주 보이는 중국음식집은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서 을미가 불쑥 나서며,
“점심은 내가 한턱 낼게. 고만 돈은 내게두 있어.”
하고 앞장서서 음식집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정해 앉자 태갑은 을미더러 돈을 쓰지 말라고 하고, 오늘은 점심까지 자기가 한턱 하마 했다. 그러더니 주문을 맡으러 온 사람에게 짜장면 한 그릇에 얼마냐고 다짐을 하고 나서, 자 선금입니다, 썩 맛있게 해주세요, 하고 돈을 척척 세어서 내놓았다.
“요 다음 시계 사는 날은 내가 이백 환짜리 냉면을 한턱 낼 테다. 아주 냉면 잘하는 집을 내가 알어.”
상균은 침방울을 튕기며 또 큰소리였다. 하기는 상균의 흰소리도 더러 들어맞을 때가 있었다. 다음날 저녁 무렵이었다. 밖에서 돌아오는 상균은 저만치서부터 되게 홍분한 소리로,
“을미 누나, 됐어, 됐어. 낼부터 출근야, 출근.”
하고 법석이었다. 상균의 배달 구역 내에 새로 생긴 다방이 있는데 거기의 레지로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급료 기타에 관해서는 본인과 직접 면담 후에 정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상균은 태갑이와 기수를 향해서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기가 정작 발벗고 나서기만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 집에 신문을 열흘이나 그냥 넣어 주었거든. 그러구 척 들어가서 취직을 부탁했더니 주인 마담 끽소리두 못 하구 단박 오케이야, 오케이!”
아무튼 을미는 다음날 상균을 따라 그 다방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신축한 빌딩 이층에 새로 꾸민 그 다방은 ‘달밤’이라는 이름으로 외관부터 꽤 아담해 보였다. 문간에는 ‘레지 모집’이라고 적은 쪽지가 붙어 있어서, 어깨를 저으며 앞장서 자신 있게 층계를 올라가는 상균희 뒤를 따라 오르며 을미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이튿날부터 을미는 달밤에 출근하기로 정식 결정이 되었다. 그날 저녁 소년들은 을미를 위해서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용하게 돈들을 변통해 가지고 상균은 쇠고기, 태갑은 과자, 기수는 과일을 사온 것이다. 그들은 밤이 이슥하도록 먹고 지꼍이고 노래를 부르고 웃어 댔다.
“누나 내가 경찰서장이 되문 이보다 더 굉장하게 축하연을 해줘야 해.”
역시 제일 덜렁대는 게 상균이었고, 다음이 태갑이었고, 기수는 비교적 조용하였다. 기수는 간간 을미와 눈이 마주치면 당황히 고개를 떨어뜨리곤 하였다. 모두들 지쳐서 좌석이 차츰 시들해 갈 즈음 기수는 을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듯 하는 것이다.
“미안해, 누나. 핸드백을 사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자 상균이도 불시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주책없이 혼자만 떠들어 댄 것이 쑥스러웠던지 자리를 고쳐 앉고 나서,
“나두 시계를 못 사줘서 안됐어. 허지만 사주기는 꼭 사줄 테아. 두구 봐, 누나!”
그러고는 상균이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하였다.
5
을미가 출근하는 날 아침에 태갑은 자기가 사준 을미의 구두를 눈이 부시도록 반들반들 닦아 주었다. 오래간만에 화장을 하고 외출복을 입고 윤이 나는 숙녀화를 신고 나서니 과연 을미는 딴사람같이 빛나 보였다. 소년들은 황홀한 시선으로 한참 동안이나 을미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게다가 시계를 차고 핸드백까지 척 들었으면 얼마나 근사할까 생각하니 상균이와 기수는 면목이 없어 새삼스레 풀이 꺾이었다. 상균의 제의로 소년들은 다방까지 을미를 바래다주기로 했다. 호위병처럼 그들은 을미 뒤를 우줄우줄 따라갔다. 지나가던 남자들이 을미를 눈여겨볼 때마다, 소년들의 가슴속에 까닭 모를 감격이 넘쳐흘렀다. 이 여자는 자기들의 을미라는 것을 외쳐 주고 싶었다. 이윽고 달밤 문 앞에 다다르자,
“그럼 이따가 아홉시 좀 지나서 데리러 올게!”
소년들은 그러고, 안으로 사라지는 을미의 뒷모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을미는 아침 여덟시 출근에 밤 아ㅎᅟᅩᆸ시 반 퇴근이었다. 식사는 세 때 다 직장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소년들은 오랜만에 저희들 손으로 저녁을 지어 먹고 나서 아흡시 쯤 되어 달밤으로 갔다. 그들은 층계를 올라가 유리창 너머로 다방 안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을미의 체면을 생각해서 소년들은 함부로 안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한 것이다.
“있다, 있다!”
별안간 태갑이가 큰 소리를 질러 버렸다. 상균이와 기수도 어디, 어디, 하고 좀더 다가서서 안을 살피었다. 을미는 정말 카운터 쪽에서 차 주전자와 찻잔을 담은 쟁반을 들고 손님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사이를 멋지게 걸어왔다. 이윽고 한 테이블 앞에 이르자 을미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제법 그럴듯한 솜씨로 쪼르르 차를 따라 주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소년들은 모르는 사이에,
“야, 야.”
하고 감탄성을 연발하였다.
“을미 누나가 젤 예쁘다.”
상균의 자랑스러운 음성이었다. 딴은 세 사람의 레지 중에서 을미가 그중 해사한 모습과 날씬한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소년들은 극히 만족하였다. 또한 무척 자랑스럽기도 했다. 소년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서서 정신없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시간이나 거진 지나서야 을미는 하루 일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나, 정말들 왔어!”
을미는 놀라면서도 꽤나 기쁜 표정 이었다. 소년들은 의기양양해서 을미를 앞세우고 밤길을 활개쳐 돌아왔다.
그날 이후 소년들은 거의 밤마다 을미를 맞으러 달밤까지 갔다. 창 밖에서 한참 동안이나 다방 안을 들여다보고 섰다가 을미가 나오면 신바람이 나서 호위병마냥 을미를 앞세우고 돌아오는 것이다. 어떤 날 밤 을미는 귀로에서 소년들을 돌아보며 이런 말을 했다.
“마치 나는 동화 속에 나오는 여왕 같다. 너희들은 나의 가장 충실한 신하들이구.”
그러자 소년들은 와 하고 환성을 지르고, 저저끔,
“여왕이다, 여왕이다!”
또는,
“우리 여왕님 행차시다!”
막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더러는 소년들이 창 너머로 다방 안을 엇보며 을미를 기다리고 섰노라면 을미에게 추근추근 이야기를 거는 손님도 있었다. 그런 때 소년들은 까닭 모를 불안감에서 분개하는 것이다.
“저 자식 뭐야, 저게…….”
상균이가 화를 내면 태갑이와 기수도 긴장해서 주먹을 쥐고 노려보았다.
“너무 싱겁게 굴면 그냥 두지 않을 테다!”
상균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실룩거렸다. 한번은 중처럼 머리를 박박 깎은 청년이 을미를 자기 옆자리에 붙들어 앉히었다. 밤 아홉시가 지난 다방은 극히 한산했다. 머리를 깎은 청년은 을미의 귀에다 입을 대고 열심히 무슨 말을 했다. 그러다가 탁자 위에 얹은 을미의 해사한 손을 슬며시 잡았다.
“저, 저 저 자식 봐!”
상균은 치를 떨었고, 다른 두 소년도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흘겨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년들은 어리둥절해서 저희끼리 얼굴을 마주 본 것이다. 대뜸 잡힌 손을 뿌리치는 동시에,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일어서리라고 생각했던 을미가, 손을 빼기는 했지만 뜻밖에도 어깨로 지그시 청년을 떼밀듯 하면서 무어라고 속삭이고 웃어 버리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취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자기도 큰 소리로 한바탕 웃어젖히고 나서, 을미의 손을 얼른 도로 잡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을미의 귀에다 입을 바싹 대고 숙덕거리었다. 을미는 몸을 꼬며 후후후 웃어 보이었다. 마침내 청년에게서 손을 빼고 일어선 을미는, 가볍게 한 손으로 청년의 어깨를 툭 치고는 깔깔대며 카운터 쪽으로 가버리었다. 그 광경을 얼빠진 사람모양 엇보고 섰던 소년들은 또 한번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좀 뒤 을미를 앞세우고 돌아오는 소년들의 걸음은 여느 때 없이 무거웠다. 그들은 비로소 마음의 공허를 의식했다. 몹시 시장했을 때처럼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소년들은 을미를 맞으러 가서 머리를 박박 깎은 그 청년을 창 너머로 가끔 보았다.
“또 맨대가리가 와 있어.”
소년들은 청년을 맨대가리라고 불렀다. 그는 오래전부터 달밤의 단골손님 인 모양이었다. 을미뿐 아니라 마담이나 다른 레지들하고도 허물없이 농지거리를 했다. 그렇지만 을미에게 대해서는 유별히 지분거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맨대가리의 출현 이래, 소년들은 전처럼 무조건 즐겁지가 않았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과 공허감이 그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거기에 어떤 불길한 예감까지 섞이었다. 소년들의 그러한 예감은 차츰 적중해 갔다. 어느 날 밤 을미는 종이꾸러미를 안고 돌아왔다. 그것을 끄르기 전에 을미는 기수를 향해 핸드백은 사지 않아도 좋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그 종이꾸러미에서는 멋진 핸드백이 나온 것이다. 기수는 그만 울상이 되어 돌아앉아 버리고 말았다. 음미는 좀 안되었던지,
“이걸 난 기수한테서 받은 선물이라구 생각할 테야!”
했다. 그런 지 열흘쯤 뒤의 일이었다. 역시 달밤 층계 위에서 소년들이 을미를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좀 난처한 표정을 하고 을미가 나타났다. 말없이 일행이 충계를 내려서자 뒤에서 쫓아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체격이 늠름한 맨대가리였다. 을미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박(朴)선생 님, 정말 그러지 마세요.”
애원하듯 하였다. 그 말은 들은 체도 않고 맨대가리는 소년들을 한번 쓱 둘러보고 나서,
“옳지, 이 친구들이 소위 미스 강(姜)의 그 순진한 애인이군요. 그러면 오늘 밤부터는 나두 이 소년들 축에 한몫 끼여야겠습니다.”
그러더니 지독한 술내와 함께 소년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흔들며,
“자, 나는 박치용(朴致龍)이다. 인제부턴 나두 너희들 친구가 되겠단 말야. 즉 다시 말하면 나두 미스 강의 순진한 애인이 되고 싶단 말이지. 알겠나.”
군대조로 그러고는 으하하하 웃어젖히는 것이었다. 이어 맨대가리는 여유를 주지 않고, 질려서 어리둥절해 서 있는 소년들을 향해,
“자, 어서 나를 사랑의 보금자리루 안내해 다고. 응, 얼른 집으루 가잔 말야. 알겠나!”
그러고는 그 우람한 손으로 태갑이와 기수를 한 손에 하나씩 붙들고 떼미는 것이었다.
“박선생님, 제발 그러지 마세요. 다음에 적당한 시기에 한번 청할게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네!”
을미는 맨대가리의 한쪽 팔에 매달리어 사정사정하였다. 그날 밤 맨대가리를 간신히 떼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집에 와서도 모두들 떠름한 얼굴이었다. 을미도 줄곧 입을 다문 채 골뜰히 무슨 생각에 잠기었다. 소년들 가슴에 자리잡은 공허감, 불안감, 그리고 일종의 불길한 예감은 더욱 확대되어 갔다.
“우리들 인제부터는 우리 방에 가서 잘까?”
상균은 태갑이와 기수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서, 아서! 언제까지나 여기서 나하구 같이 지내.”
을미는 여느 때 없이 들뜬 소리로 그렇게 호소하듯 했다. 모두들 불 끄고 자리에 누워서다.
“술만 취하지 않으문 다시없이 좋은 분인데…….”
을미는 한숨 쉬듯 중얼거린 것이다. 마치 소년들·더러 들으라는 말 같기도 했다. 밤이 깊도록 을미는 잠을 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왜 그런지 소년들도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륙 일이 지나서였다. 평시와 다름없이 소년들이 을미를 호위하고 밤길을 더듬어 집에 돌아와 보니, 방문 앞에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여, 인제들 오시는군. 미스 강,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을미를 비롯해서 소년들은 아연하여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왜들 그렇게 멍하고 섰어. 난 박치용이야, 자, 어서 문을 열어요. 결코, 결코 난 나쁜 사람은 아냐. 암, 나쁜 사람이 아니구말구. 그I저 고독한 사람이지. 미스 강이나, 또 서장이나, 구두쇠나, 화가처럼 무척 외롭구 고달픈 인간일 뿐야. 자, 그러고들 섰지만 말구 어서 문을 열어요. 이렇게 듬뿍 선물을 사가지고 왔으니 빨리 문을 좀 열란 말야!”
약간 혀 꼬부라진 소리로 그렇게 수다스레 늘어놓고 나서, 맨대가리는 비틀거리다가 문고리에 잠겨 있는 자물쇠를 쥐고 흔드는 것이다.
“너무하셔요, 박선생님. 언제 남의 집을 알아 가지구 이렇게 미리 와 지키구 섰는 거예요. 너무 심하셔요. 어서 늦기 전에 돌아가셔요.”
을미의 그 말에는 힘이 없었다.
“미스 강, 너무 박정하게 굴지 말우. 미스 강이나 이 조무래기 친구들이 오죽 그리우문 이렇게 찾아와 기다리구 있었겠소. 내가 좀 취해서 온 건 안됐소. 그렇지만 내 본심은 내 본정신은 멀쩡하단 말요. 자, 약속대루 여기 시계를 사갖구 왔소.”
맨대가리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케이스 같은 걸 꺼내서 흔들어 보이었다.
“이렇게 승락두 없이 야밤중에 오시는 법이 어딨에요, 그리구 취해 갖구 오심 난 싫어요!”
사태가 이쯤 되고 보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로 만만히 돌아가 버릴 맨대가리는 아니었다. 소년들은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켰다. 맨대가리도 을미 뒤를 따라 방에 들어와 앉았다. 그는 들고 들어온 종이꾸러미를 끌렀다. 소년들에겐 좀처럼 먹어 볼 기회가 없었던 고급 과자였다.
“자, 이리들 앉아서 어서 먹어. 오늘 밤부턴 너희들 축에 나두 한몫 넣어 달란 말야. 이를테면 입회 기념으루, 아니 입당이 좋을까. 아무튼 그런 기념으루 내가 한턱 내는 거야. 자, 그럼 사양 말구 어서들 먹으란 말야.”
맨대가리는 군대조로 그렇게 말하고 소년들을 가까이 끌어 앉히며 강권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얼른 아까의 그 시계 케이스를 꺼내더니, 무릎을 모으고 꿇어앉아서 그것을 두 손으로 을미 앞에 내밀었다.
“아이, 챙피스레 뭘 그러세요.”
을미는 새침한 표정을 했으나, 그것은 이미 양보나 체념 뒤에 오는 수식적인 항의에 불과했다. 맨대가리가 주는 시계 케이스를 을미는 한 손으로 되는 대로 받아서 펴보지도 않고 한쪽 구석에 밀어 놓았다. 소년들은 마지못해 쪼그리고 앉아 과자를 집어 먹으면서도 무슨 맛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가슴속에 들끓고 있는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얼마 뒤에 소년들은 자기들의 낡은 담요와 베개를 가지고 자기들 방으로 돌아왔다. 오래간만에 도로 자기들 방에서 자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아무렇게나 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잠은 안 오고 울고 싶은 심정들이었다. 아랫방에서는 오래도록 이야기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을미의 가느다란 울음 소리가 시작되었다. 소년들은 을미 모친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날 밤, 빗소리에 섞어 들려오던 을미의 울음소리를 생각했다. 그때는 소년들이 달려내려가 을미를 위로해 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그들이 객쩍게 나설 계제가 아니었다. 이미 을미는 자기들의 독점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맨대가리는 한참 동안이나 을미를 달래느라 애쓰는 모양이었다. 가끔 부스럭 소리가 새어 올 뿐, 이윽고 아랫방도 조용해졌다.
“난 내일이라두 이 집을 당장 나갈래!”
상균이가 각오한 듯 중얼거리자,
“내가 사준 구두 값을 난 도루 받구야 말 테야!”
태갑의 볼멘 소리였다.
기수만은 잠자코 어둠 속의 천장을 응시하며, 자기 화첩 속에 무수히 그려져 있는 을미의 소묘상을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비 오는 날』, 일신사,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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