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바 헤밍웨이 박물관
쿠바 하바나 도심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에 헤밍웨이 박물관Museo Ernest Hemingway으로 갔다. 하바나에서 남쪽으로 12㎞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다. 헤밍웨이가 생전에 실제로 1939년부터 20여년 거주했던 핑카 비히아 저택을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다. 박물관 입구에 이르자 벌써 짙은 나무 향기와 울창한 숲이 가슴을 설레게 하며 진한 문학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인 내가 쿠바에 온 것은 어쩌면 헤밍웨이의 족적을 보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그가 생시에 생활하던 모습 그대로 유품들을 전시해 두었다. 박물관 직접 내부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문 밖에서만 둘러보았다. 헤밍웨이가 집필을 했던 서재와 수많은 책들과 침대, 그리고 그의 낚시 도구 및 사냥물품들을 보았다. 박물관이 있는 조그만 언덕의 북쪽으로는 하바나 시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은 전망대가 있다.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서 헤밍웨이처럼 쿠바 들녘을 뜨거운 문학의 가슴으로 바라보았다. 짙푸른 숲들이 그날을 읊조리는 듯 정겹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시카고 인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의사였고 모친은 성악가로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훗날 여러 단편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낚시나 사냥 같은 자연 속에서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자전적인 요소가 상당히 두드러진다는 것이 헤밍웨이의 작품세계 특징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헤밍웨이는 시카고로 가서 신문 기자로 취직한다.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 갖가지 사건에 관한 기사를 신속하게 작성한 이때의 경험이 훗날 그를 글 쓰는 직업으로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모험심에 불타던 19세 청년 헤밍웨이는 전쟁 영웅이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눈이 나빠서 현역 입대가 불가능해지자, 그는 궁리 끝에 적십자 소속의 운전요원으로 자원한다. 적십자 운전요원은 비전투원이었기 때문에 총을 지급받지도 못했고 아예 제복의 생김새 자체가 달랐지만, 그래도 헤밍웨이는 전장에 나간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젊은 미국인 간호사를 만나 짝사랑에 빠진 이때의 경험은 그의 대표작 ‘무기여 잘 있거라’(1929)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1921년 작가가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 수업을 받으려 파리로 갔다. 1920년대의 파리는 예술가의 천국, 특히 미국인 예술가의 천국이었다. 그후 헤밍웨이는 파리를 떠나 1927년부터 미국의 최남단 휴양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가서 살았다. 그때 바다낚시에 몰두하여 집필보다 오히려 바다낚시로 소일하며 세월을 보냈다. 이것은 후일 그의 걸작 중편 ‘노인과 바다’를 낳은 밑거름이 되었다. 1928년 말에 우울증에 시달리던 헤밍웨이의 아버지가 권총으로 자살해서 가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33년에 헤밍웨이는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이때의 경험이 반영된 그의 대표적인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은 모두 영화로 제작되었다. 헤밍웨이는 다시 한 번 자신의 피를 끓게 만들 소재를 찾아서 유럽으로 향한다. 마침 1936년부터 에스파냐에서 내전이 시작되어 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1937년부터 1938년까지 특파원 자격으로 네 차례에 걸쳐 에스파냐를 방문했다. 헤밍웨이는 이 취재 여행에서 작품 소재를 얻었다. 건장한 외모와 넉넉한 미소를 지닌 헤밍웨이는 에스파냐 내전을 소재로 한 장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1940년 완성해서 비평과 판매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쿠바로 건너가서 하바나의 핑카 비히아라는 작은 농장에 정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헤밍웨이는 또 다른 모험에 뛰어든다. 카리브해에 출몰하는 독일 잠수함을 때려잡겠다며 쿠바인 친구들을 동원해 의용대를 창설한 것이었다. 미국 정부의 전격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의용대 활동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종의 촌극이었다. 1944년에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하자, 헤밍웨이는 종군 특파원이 되어서 유럽으로 떠난다. 종군기자는 본래 비전투원이었지만, 헤밍웨이는 평소의 버릇대로 자체 의용대를 조직해서 총기를 휴대하고 마치 지휘관인 척했다. 사실 헤밍웨이는 무척이나 소심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었으며, 이런 약점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남성미를 과장하는 버릇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헤밍웨이의 사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전쟁 말기인 946년 신문기자 쿠바 여인과 재혼해서 쿠바에 머물렀다. 1952년 쿠바에서 쓴 ‘노인과 바다’가 문학의 명성을 안겨주어 헤밍웨이는 확고한 전설로 자리 잡았다. 백발에 턱수염을 기른 그의 외모는 마치 신화 속의 예언자를 연상시켰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관심과 감탄의 대상이 되었다. 1953년의 아프리카 여행 중에 두 번이나 비행기 사고를 당했고, 이때 헤밍웨이가 사망했다는 오보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것 역시 그런 명성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그 즈음에 헤밍웨이의 정신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폭음을 일삼았고, 더 이상은 짧은 문장조차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1959년에 쿠바 혁명이 일어나며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는다. 카스트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통해서 게릴라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면서 헤밍웨이를 향한 존경을 드러낸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결국 이듬해에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아이다호 주 케첨에 정착한다. 케첨에 정착한 이후로 헤밍웨이의 과대망상증과 우울증은 더욱 심각해졌다. 1960년과 1961년에 그는 우울증 증세 때문에 급기야 메요 병원에 두 번이나 입원했고, 여러 차례 전기충격요법을 받았다. 이즈음부터 헤밍웨이는 자살 충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주위 사람들을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두 번째로 입원했다 퇴원한 지 이틀 뒤인 1961년 7월 21일 새벽, 헤밍웨이는 아내 몰래 아래층에 내려와 장총을 꺼낸 다음, 총구를 입에 물고 발사하는 것으로 최후를 마감했다.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사망 직후에 유족들은 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발표했으며, 간소한 장례식을 마치고 시신을 케첨의 한 공동묘지에 묻었다. 헤밍웨이는 문학의 길에서 거대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세계적인 대문호로, 걸작으로 남긴 그의 작품을 읽으며 깊은 철학의 삶을 공감한다.
헤밍웨이 박물관 안내원 여자가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정원에 모여 놓고 헤밍웨이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헤밍웨이가 1961년 61세에 미국 병원에서 심한 통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 참으로 우울한 발언이었다. 목에 주사를 놓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술과 여자를 너무 좋아해서 아마도 빨리 죽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무덤은 미국에 있다. 가족 중에도 자살자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게 자살로 죽었다. 그에게는 본처만 4명이었다. 그 외 좋아했던 쿠바 여인은 수없이 많단다. 결혼 이혼, 또 결혼 이혼의 반복을 걸치며 또 술을 많이 마시며, 많은 여자를 상대하며, 몸이 탕진되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겨우 환갑을 넘긴 나이에 사망했으니 말이다. 이곳 박물관은 3번째 부인과 살았던 집이다. 그의 재산은 모두 4번째 부인에게 상속해 주었다. 요트와 이곳 집 등 모두를 그녀에게 준 것이다. 아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 4번째 부인이 요트를 선장에게 주었는데 선장이 정부에 기증하여 국가 소유다. 박물관 전시 물건들, 요트, 수영장, 숲속 등 모두 헤밍웨이의 숨길이 서려 있다. 쿠바의 자연을 보며 집필했다는 전망대에도 올라갔다. 수영장과 요트도 보았다. 비록 길지 않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의 흔적은 생생히 보존되어 세계인의 걸음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가 거닐었을 산책로를 따라 거닐며 박물관을 내려왔다. 박물관 아래 주차장 앞에는 헤밍웨이에 대한 기념상가도 있다.
헤밍웨이를 매혹시킨 쿠바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여행객들을 매혹시킨다. 나 역시 쿠바에 와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낭만과 예술의 향수가 고인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정말 며칠 머무르면서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정이 가슴을 흔든다. 바다가 그렇고, 울창한 숲이 그렇고, 비록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오래된 건축물이지만 때 묻지 않은 순수의 거리가 그렇고, 결코 바꾸지 않고 고집하며 몰고 다니는 고전적인 우아함의 자동차가 그렇다. 쿠바가 그렇게도 비난 하는 미국이 아닌가. 그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가 쿠바의 관광수입을 올려준다. 미국이 쿠바를 탐낸 이유 중에는 헤밍웨이의 족적을 미국이 보유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노인과 바다’가 쿠바에서 집필되었고 하바나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코히마르 마을은 ‘노인과 바다’의 집필 무대다. 우리는 헤밍웨이의 박물관을 모두 관람하고 ‘노인과 바다’의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쿠바의 그 코히마르 해변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