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합니다,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시편84,6)!
시인은 순례길을 떠올리면서 순례자에 대한 축복을 선언한다.시인은 성전에 사는 이들의 기쁨(5절)을 순례자들의 기쁨(6절)과 연결시킨다.여기서 행복하다고 선언된 사람들은 그들의 전 생애가 살아계신 하느님께 가는 순례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고, 그 생각 안에서 힘과 기운을 찾는 이들이다.
시편84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84편은 시온과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아름다운 성전을 사모하는 기쁨을 노래한다.성전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에 거처하시는 하느님 때문이다.그리고 성전을 사모하는 것은 그 안에서 체험되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온갖 영적 축복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공중에 날아다니는 참새와 제비도 성전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새끼를 치고 행복하게 지낸다(4절).시인은 성전 뜰에서의 하루가 천 날보다 좋고 성전 문간에 서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좋다고 한다(11절).이토록 성전에 머무르는 것이 소중하고 복된 일이다.그래서 시인은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성전 축제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례를 그리워한다.그렇다고 성전에 서의 기도만을 최고라고 하지는 않는다.다만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고 하느님의 입김으로 숨 쉬고 하느님의 손을 잡고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영혼의 간절한 소망이 느껴진다. 주님의 집에 사는 이들은 행복하다(5ㄱ).왜냐하면 그들은 늘 주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5ㄴ).그러므로 언제나 하느님 곁을 떠나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은 하느님의 집에 사는 복된 삶과 같다.시인은 또한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고백한다(13절).이 시편은 오늘날도 하느님을 찾아 교회로 나아가는 영혼은 누구나 복되며 순례자임을 말한다.우리는 하느님과 좀더 깊이 만나기 위해 피정을 한다.주말 피정,월례 피정,연 피정 또는 30일 피정 등을 통해 한 주,한 달,일 년, 또는 평생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일상과 비교할 때 피정 시간은 짧지만 그 기간에 하루는 일 년보다 소중하다는 체험을 하게 된다.마치 시인이 성전에서의 하루가 천 날보다 낫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23-2 시편 42-89편/전봉순著/바오로딸)
196. 정치와 관련하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보조성의 원리를 되새겨 봅시다.이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 존재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자유를 보장하면서 또한 더 많은 권력을 지닌 이들이 공동선을 위하여 더 큰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오늘날 일부 경제 부문이 국가보다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그러나 정치가 결여된 경제는 현재 위기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처할 수 있는 다른 논리를 지지하지 못할 것이기에,정당화될 수 없습니다.환경에 대한 참된 배려가 없는 논리는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의 통합에 관심이 없는 논리입니다.“오늘날 ‘성공’과 ‘자립’의 모델에서는 뒤처진 이들이나 힘없는 이들,능력이 모자란 이들을 돕고자 투자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197.우리는 폭넓은 시각으로 위기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하여 학제적인 대화를 포함한 새로운 통합적 접근을 하는 정치가 필요합니다.흔히 올바른 공공 정책의 부재와 부패에서 비롯된 정치에 대한 불신은 정치 자체가 책임져야 합니다.한 지역 국가가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일부 기업 집단이 후원자를 자처하며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고,자신들은 특정한 규정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게 됩니다.그래서 조직범죄,인신매매,마약 매매,폭력과 같은 근절시키기 어려운 모든 형태의 범죄들을 일으키는 데에 이릅니다. 정치가 왜곡된 논리를 깨어 버릴 수 없고,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한다면,우리는 계속해서 인류의 주요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참다운 변화를 위한 전략에는 전체 과정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현대 문화의 뿌리에 놓여 있는 논리를 문제 삼지 않고 몇몇 피상적인 생태적 고려 사항만 다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건전한 정치는 이러한 문제에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198.정치와 경제는 빈곤과 환경 훼손에 대해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그러나 우리는 정치와 경제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상호 작용의 방법을 찾기를 바랍니다.한쪽은 경제적 수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한쪽은 권력의 유지나 확대에만 집착한다면 결국 남은 것은 전쟁이든지 아니면 환경 보호와 가장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고 정치와 경제 양자가 맺는불순한 협약입니다.여기서도“일치는 갈등보다 우월하다”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서소문 성지 11/17)
Ⅴ.과학과 종교의 대화
199. 경험 과학이 생명,모든 피조물의 상호 작용과 실재 전체를 완벽하게 설명해 준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그렇게 주장한다면 부적절하게도 경험 과학의 방법론적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될 것입니다.우리가 이러한 제한적인 틀 안에서만 성찰하게 되면 미적 감각,시,심지어 사물의 의미와 목적을 피악하는 이성의 능력도 사라지게 됩니다.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종교적 고전들이 모든 시대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이러한 저술들은 새로운 지평을 엽니다. ...오로지 특정 저술들이 종교적 신념의 맥락에서 생겨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어둠 속에 폐기시키는 것이 합리적이고 현명한 일입니까?”사실 윤리 원칙들이 모든 현실 상황을 벗어나 순전히 추상적으로 성립한다는 생각은 너무나 단순합니다.윤리 원칙들이 종교적 언어로 표현된다고 해서 공개 토론에서 그 가치가 줄어들지 않습니다.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윤리 원칙들은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종교적 언어를 포함하여 다양한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200.다른 한편으로,인류가 길을 벗어난다면,곧 공동생활,희생,선을 가능하게 해 주는 위대한 동기들을 망각한다면,과학이 내세우는 모든 기술적 해결책은 세계의 심각한 문제들의 해결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어찌 되었던,믿는 이들이 자신의 신앙과 일치된 삶을 살면서 신앙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지 말도록 촉구해야 합니다.이들이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다시 활짝열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한 자신의 깊은 신념에서 힘을 얻도록 권유해야 합니다.우리의 원칙들을 잘못 이해하여 종종 자연을 착취하거나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횡포,또는 전쟁과 불의 폭력을 정당화해 왔다면,우리 믿는 이들은 이러한 행동이 우리가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지혜의 보고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종종 문화적 한계는 시대마다 그 시대의 윤리적 정신적 유산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그러나 종교가 오늘날 요구에 더욱더 잘 응답하려면 바로 그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01. 이 행성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고백합니다.이 사실이 자연 보호,가난한 이들의 보호,존중과 형제애의 관계망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대화를 서로 나누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학문들 사이의 대화도 역시 시급합니다.각각의 학문은 자기 언어의 한계 안에 갇혀 있고는 하기 때문입니다.또는 전문화는 고립과 개별 지식의 절대화를 낳는 경향이 있습니다.이는 환경 문제를 적절히 다루는 것에 방해가 됩니다. 또한 서로 이념 투쟁도 하는 여러 생태 운동들 사이의 공개적이고 우호적인 대화도 필요합니다.생태 위기의 심각성은 우리 모두 공동선을 생각하고 언제나“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을 기억하며 인내와 절제와 관용을 필요로 하는 대화의 길로 나아길 것을 요청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한국천주교주교회의)
그들은 더욱더 힘차게 나아가
시온의 하느님 앞에 나섭니다
(시편84,8).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이사40,31).
꽃을 보듯 너를 본다
(한 사람 건너/나태주)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