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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오픈 북으로 시험을 치르는 학생이 참고 도서를 거의 그대로 베껴서 답안지를 작성하는 경우 결코 좋은 학점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 후반 국내 인디 록 밴드들 중 대다수가 그랬다. 창의적인 한계에 직면한 밴드들이 영미권의 록 트렌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형국은 오픈 북 시험과도 같은 환경이었고, 각자 선호하는 장르의 스타일을 피상적으로 따라하기에 급급했다는 말이다. 관건은 무엇을 참고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드느냐의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니썬의 데뷔 앨범은 오픈 북 시험에서 A학점 이상을 획득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 어떻게 작성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본작은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와 콘(Korn)의 영향력으로부터 많은 빚을 지고 있음에도 독창적인 기운으로 충만하다. 그것은 뻔뻔(하다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자신감이라고 미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귀곡 메탈”이라는 신조어는 그 유일무이한 독창성을 대변해주는 적절한 용어다. 레인 스테일리와 조너선 데이비스를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기교를 바탕으로 특유의 기괴하고 엽기적인 아우라를 발산하는 정차식의 신기(神氣)에 가까운 보컬이 그 핵심에 자리한다. 최소한 이전까지 대중음악의 범주에 속한 록 장르에서는 결코 접하기 어려웠던 스타일로서, 밴드에 창의적인 에너지를 부여한 가장 강력한 요소로 작용했다. 음산한 그런지(‘Substraction’)와 그루브한 하이브리드 메탈(‘Pig Cross’), 명쾌한 훅의 스래시 메탈(‘Trade Fuckerness’)과 드라마틱한 하드 코어(‘Penitenziazite’) 등 다양한 장르가 무리 없이 공존함에 있어, 보컬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는 밴드로서의 유기적인 조화도 비범한 수준에 도달해있음을 증명한다.
레이니 썬은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포크와 모던 록, 트립 합과 재즈 등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에 몰두하면서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용의주도함을 보였지만 결국 이 야심찬 데뷔 앨범만큼의 뚜렷한 성과를 재현해내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2004년 모 음악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정차식은 이렇게 언급했다. “과연 1집보다 나은 2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다르게 가는 것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을 했다”라고. 어찌 보면 일찌감치 매너리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만큼 본작이 완성한 귀곡 메탈의 명징하고 컬트적인 이미지는 두 번 다시 재현해내기 힘든 독보적인 영역에 위치한다.
첫댓글 레이니 썬은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포크와 모던 록, 트립 합과 재즈 등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에 몰두하면서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용의주도함을 보였지만 결국 이 야심찬 데뷔 앨범만큼의 뚜렷한 성과를 재현해내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2004년 모 음악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정차식은 이렇게 언급했다. “과연 1집보다 나은 2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다르게 가는 것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을 했다”라고. 어찌 보면 일찌감치 매너리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