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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10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의 추억
자유인은 조동화는 두발만능자가용이 쓸만하니 걷기운동으로 천연보약 먹는일이 제일 큰일이라 오후에 모현공원에 나가 걷기운동 1만보하고 모현근린생활공원 모종부근 운동기구 있는곳에서 훌라후푸(hula-hoop) 3000회 가슴돌리기를 30회씩 2회 하였는데 두시간이 걸렸다.
건강을 위하여 매일 운동습관은 나의 철학으로 귀찮지만 실천하는거여.
운동을 실천한후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인터냇 여행하며 백두산을 항해 하였다.
백두산은 우리민족의 영산으로 한번쯤은 한국인이라면 가보고 싶어하는 관광지다.
2010/8/20-8/24 국립철도학교 동기생 친구 박용철이 백두산천지를 부부동반모임에서 다녀온 사진이 눈에 띠었는데,
조동화는 2019/5/1-5/6 5박6일동안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다녀왔다.
익산을 출발 인천항1국제여객선터미날 배로 밤세도록 15시간의 항해 끝에 중국 단동까지 이동, 버스로 7-8시간 만에 길림성도착 1박후 이튼날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인천항에서 단동페리호에 18:00에 승선, 배는 물살을 가르며 어둠속 망망대해를 항해 끝에 중국단동에는 아침9:00 도착, 장도의 백두산 여행길이었다.
단동페리호의 고객은 중국상인들도 간혹 있었으나 대부분 한국인으로 백두산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다.
인천항에서 승선한 단동페리호는 길이가 167m이고, 폭이 22m이며, 탑승 인원이 800명이었다.
5월달인데도 백두산은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아름다운 설경의 백두산 장엄한 경치를 보고 감탄하였지.
백두산 가는길은 멀기도 멀어 쉬운 여행이 아니였지.
백두산은 우리민족의 땅이었으나 세계대전의 와중에 60%가 중국으로 넘어가고 40%가 북한땅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 백두산을 한민족의 혼을 빼기 위해 장백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동화의 벗님들!
부질없는 인생길,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면서 천천히 너그럽고 여유있게 한세상 살아가자.
다둑 다둑하며 그려려니 웃으며 사는것이 현명한 삶이여.
잘되겠지 긍정적 삶이 건강에도 좋아.
편리하고 아름다운 스마트세상 즐겁게 삶을 여행하자구.
감사합니다.
건강합시다.
< 박용철 내외간 2010/8월20일-24일 백두산을 다녀왔구나. 천지에서 박용철부부 우측의 모자를 쓴 사람은 같이 동행한 사람이구먼. >
< 2010년8월22일 안개와 비땜에 천지가 보이지 않해 즐겁지 않은 백두산 여행이었네.>
<국립철도학교 동기생 박용철부부. 용철이친구 천생연분이여>
<조동화는북파 표지석 天池(천지)라는 한자 글귀가 새겨진 바위 앞에 섰다.
1983년, 백두산을 관광지로 개발했던 “덩샤오핑(鄧小平)”이 쓴 글자다.
돌 표지석에 鄧小平이란 문구가 세겨져 있으며 一九八三年 夏라고 되어 있다.
천지 (天池)둘레는 약 13㎞, 면적은 약 9.2㎢이고, 수면은 해발 2,155m이며 최심부의 깊이는 312m에 달한다. 1931∼1932년에 천지를 답사ㆍ조사한 바 있는 유명한 독일의 지리학자 라우텐자하(Lautensach)는 수심이 442m 이상인 것으로 보고 천지를 세계 10대 호수 중 하나로 꼽았다.
천지의 소유와 관련하여 북한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북한과 중국 간에 1962년 국경협약에서 천지의 분할협정이 체결돼 천지의 절반을 중국에 할양한 것으로 밝혀져 민족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조동화의 백두산관광 사진이여.
5월의 백두산은 눈이 많이 내려 설경의 백두산 천지가 장관이다>
<<2019/5/2 중국 단동에 있는 6.25 전쟁시 부서진 압록강 철교를 관광하였다.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저 건너편에는 북한땅 신의주이다.
몇채의 고층건물이 보이기도 한다.
중조우의교는 총 길이 약 940m로 1911년 단선 철교로 개통됐다가 1943년 압록강 상류 쪽에 복선 철교가 개통됐다. 원래 있던 다리는 6·25전쟁 당시 미군의 중공군 남하를 막기 위해 폭격 맞아 파괴된 상태로 보존돼 있으며, 복선 철교는 1990년 중국과 북한 간의 합의로 압록강철교에서 현재의 중조우의교로 개명됐다.
단동(丹東)은 중국 요녕성(랴오닝성) 남동부에 위치하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는 국경도시다. 인구 240만 명인 단동은 고구려 영광의 상징일 뿐 아니라 한민족과 만주족, 한족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여행자들과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에게 가까이에서 북녘 땅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한반도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가는 길목이고 드넓은 중국 동북3성의 관문이다. 평양과는 220km, 서울과도 420km의 지척거리다. 황해에 접한 이곳은 대륙과 해양성 기후가 동시에 나타나 같은 위도의 지역에 비해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민족의 한을 품고 있는 압록강철교의 끊어진 유래가 표지석으로 전하고 있다.
압록강 철교는 일제에 의해 건설되였으나 6.25 전쟁시 중공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군 B-29 폭격기가 파괴하였다.
표지석에는 1950.11.8. 1950.11.14. 2회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고 세겨져 있다.>
<압록강 단교 입구에 세워진 중국군인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맨앞쪽의 군인은 중국인민지원사령관 팽덕회(彭德懷 중국발음 펑더화이)의 조각상이며 뒤쪽에는 북조선을 구출하러 출병하는 군인 조각상이다.
팽덕회는 모택동과 동향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초대 국방부장을 지내었다.>
<압록강단교에서 조동화는 기념사진을 남기다.
압록강건너 신의주가 보인다.
압록강 철교(1911년 설치)는 한국전쟁(1950) 당시 중공군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미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 되었으며, 그 결과 압록강 철교는 중국 쪽에만 남아있게 되었고 중국은 '압록강 단교'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압록강 구교라 불리는 압록강단교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1908년 8월에 착공하여 1911년 11월 개통한 압록강의 첫 번째 철교입니다. 일제는 1905년 한반도 수탈과 만주 침략을 위해 경의선을 개설하면서 의주 서쪽의 압록 강변 벌판에 신의주를 건설했습니다. 그 후 철교는 만주지역의 곡물과 삼림자원을 일본으로 실어내는 통로로 이용됐습니다. 길이 944.2m의 이 철교는 연인원 50만9300명이 투입되었을 정도로 당시로선 대역사였는데, 일제는 3년 만에 이를 뚝딱 해치웠습니다. 철교는 개폐식이었습니다. 단동 쪽에서 세어 아홉 번째 교각 다음에 스페어 교각을 세워 이를 축으로 철교를 90도 회전시켜 범선 등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철교는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폭파됐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참전을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펑더화이(彭德懷)는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의 의용군 26만 대군을 이끌고 1950년 10월19일부터 압록강 철교 등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옵니다.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중공군의 위세를 꺾기 위해 미국 공군은 B-29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 압록강 철교를 정밀 폭격합니다. 1950년 11월 8일 오전 9시였습니다. 그날 이후 압록강 철교는 '압록강 단교(斷橋)'가 되었습니다.
이 '단교'는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전혀 다른 역사의 현장입니다. 한국인들은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혼쭐난 중국을 연상하지만, 중국인들은 대륙으로 들어오려는 침략자(미군)를 막아낸 구국 항쟁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 전쟁으로 정의합니다.>
백두산
반만년 한민족의 마음속에 담긴 最高의 靈山 백두산!
가장 오래된 고려 초 기록에 등장한 백두산은 ‘흰눈을 머리에 이고 있다’ 고하여 백두산으로 칭하여지게 되었습니다.
백두산은 북측 양강도 삼지연군 북위42°7', 동경 128°5' 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2,750M로 남북한 통틀어 최고(最高)의 산이다. 예부터 단군조선의 건국설화에 나온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민족의 영산(靈山)입니다. 백두산의 다른 이름들로는 종태산, 태백산, 개마산, 노백산 등이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고려 초 기록에 등장한 백두산은 ‘흰눈을 머리에 이고 있다’ 고하여 백두산으로 칭하여지게 되었습니다. 백두산의 다른 이름 들로는 종태산, 태백산, 개마산, 노백산 등이 있습니다. 증보문헌비고 기록상 조선 세종 때 역관 윤사웅과 최천구, 이무림 등이 처음으로 백두산을 등정한 이래 숙종 38년 1712년 조선과 청간에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백두산 일대는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현재 북측에서는 사적으로 복원하여 ‘혁명의 성산’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백두산의 생성연대는 6억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20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약화되기 시작하여 지금의 휴화산 형태로 존재합니다.
백두산 지역의 연평균 기온은 -8.3℃, 최고기온은 18℃, 최저기온은 -47.5℃입니다. 백두산에서는 9월 초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6월 중순경까지 약 10개월 동안 내립니다.
백두산은 최고봉인 장군봉을 주위로 20개(북측9개, 중국11개)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으며 천지는 이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천지는 둘레 19.7km, 수심 384m의 자연호로 식수로 사용할 만큼 청정한 물로 지하수보다 맑고 깨끗합니다. 천지에는 지금까지 생물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측에 의하면 여러 종의 어류와 식물을 새로이 찾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두산 일대는 1980년 유네스코 국제생물권 보호구로 지정될 만큼 1,200여 종의 고산식물과 산림 식물 등 여러 가지 식물자원이 자라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범, 큰곰, 사향노루 등 55개 종의 짐승류, 137종의 조류, 5종의 파충류와 양서류 등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석인성시 (惜吝成屎)
惜(아낄 석) 吝(아낄 린)
成(이룰 성) 屎(똥 시)
⇒아끼고 아끼다 똥이 된다!
가장 귀한 것들은 언제 사용할 것인가요? 귀한 그릇, 값 비싼 옷, 고급 장신구 등을 왜 그렇게 아끼며 사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재보다 미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미루지 말고 현재 지금 즐기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가 현재가 되어도 즐기기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석인성시(惜吝成屎). 아끼고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다.. 가장 귀한 것(물건)등은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 때 쓰려고 장롱에 고이 모셔 둔다고 한다. 나의 경우도 새 양복은 장롱에 고이 모셔져 있지 평소에 입을 경우가 거의 없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혼수로 마련한 밍크코트를 겨울이 되어 입으면 좋을 텐데 아껴두고 거의 안 입는다. 나도 좋은 구두는 평소에 안 신고, 편리한 운동화를 애용한다.
나중에 사용하려는 뜻은 좋지만, 지금 현재 안 좋은 것만 쓰고, 안 좋은 것만 먹다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건이나 음식만 그런 것이 아니다. 평소 안 좋은 생각과 말로 욕심만 부리다가 죽을때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포장도 뜯지 않고 쓰지 않은 명품이라도 이미 똥이 되어 버린다.
죽은 사람들의 물건을 정리해 주는 유품정리사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대개 제일 좋은 것은 써보지도 못하고 아끼다가 죽는다고 한다. 평소 아끼는 건 좋지만 써보지도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최근에 생각을 바꾸고 있다.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있다. 이, 삼십년 동안 이사할 때마다 옮겨 다니던 박스 포장을 뜯어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음반, 테이프, 수첩 등 온갖 잡동사니라서 거의 버렸다.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은수저도 꺼내 사용하고 있고, 평소 가고 싶어 아내와 약속했던 한 달에 한번정도는 휴양림으로 나들이를 할 것이다. 내년 봄으로 예정한 남미 여행도 다녀올 생각이다. 수 년 내에 다녀오지 못하면 영영 다녀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하십시오란 글을 보니 동감이 되어 내 생각을 덧붙여 인용해 본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할까 말까 망서려지면 일단 해 보세요. 성공하면 좋은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귀하고 좋은 것, 나중에 하겠다고 미루고 있는 것 너무 아끼지 말고 지금 쓰고 지금 하십시오.
만날 사람 있으면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연락하여 만나십시오. 가고 싶은 곳도 더 미루지 말고 일단 떠나십시오. 평소에 먹고 싶은 것도 찾아가서 먹으며 즐기십시오. 오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황혼 인생(人生) 스스로 찾아서 살자
예순,일흔 줄 인생은 백전노장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황혼을 맞았다.
깃발 펄럭이던 청춘은 추억일 뿐
가슴에는 회한과 아픔만 남았다.
아무리 노년의 즐거움과 여유를 강조해도
우리들 가슴에는 낙조의 쓸쓸함이 깃들어 있다.
더구나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으로
신체의 어느 부분 또는 모두가 옛날 같지가 않다.
삼삼오오 허물없이 모인 자리에서
화제에는 자연히 건강이다.
나의 청춘만은 영원하리라 믿었는데
어느새 고개 숙인 남자의 대열에 끼이게 된다.
노년은 쾌락(탐욕)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덕의 근원인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의 대 철학자 키케로가
죽기 전에 쓴 '노년에 대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던 과연 우리 노인들은
버림 받은 것일까 해방된 것일까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순리에 따라
우리가 좀 늙었을 뿐 사람에 따라 관점에 따라
해답이 다르겠지만 우리가 버림 받은 것이
아님은 확실하지 않는가
무슨 짓을 해도 부끄럽지 않다는 나이
남의 눈치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원숙의 경지에서 더 이상 잘 난체 아는 체
가진 체 할 필요도 없이 내 멋대로 살면
되는 것을 어느 한 곳이 불능이래도
다른 곳 다 건강하니 축복 은혜라 여기며 살자.
스스로 절망과 무기력의 틀 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어느 곳에 있을
자신의 용도 즐거움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인생은 70부터 고목에도 꽃이 핀다 했는데
그까짓 회춘이라고 안 된다는 법도 없는 것!
지금부터라도 걷고 뛰고 산을 오르면서
젊게 산다면 인생 60~70에는 연장전
20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자유롭고 여유 있고 슬기로운 해방의 시기를
즐기며 사느냐 울며 사느냐는
당신의 몫이고 선택입니다.
-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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