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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괄의 봉기가 진압된후 조정에서는 功臣들과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는 一群의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이들은 남인도 小北도 아닌,서인의 한 갈래로 '이이와 성혼의 문인' 들이 대부분이었다.단지
인조반정(쿠테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공신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이다.이들은 공신들의 전횡에
밀려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어 있었지만,논의가 강경하고 명망을 지닌 인물들이 많았다.斥和派의
거두인 '김상헌을 비롯해 신흠,오윤겸,김상용,강석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이들은 정치적 열
세에도 불구하고 공신들의 전횡에 정면으로 대항했다.양측은 첨예하게 대립했고 급기야 功西(공신
파)와 淸西(비공신파)로 갈렸다.이는 이전의 동인 정부에서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고,남인이
濁南과 淸南으로 갈린 경우와 비견될수 있다.공서와 청서의 대립과 갈등은 곧서인의 내부적인 분열
을 의미했다.인조시대의 정치사에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겉 포장에 불과했으며,정쟁의 본질은
공서와 청서의 서인들 대립에서 부터 왔다.
2, 공서와 청서의 대립과 충돌은 재위 중의 군주(광해군)를 폐출하고 새로운 왕을 세운 쿠테타 그 자
체에 대한 견해 차이가 발단이 되었다.여기에 공훈 분배에 대한 불공정이 화를 더했다.일개의 유생
(김원량)이 정사공신이 되었는가 하면,적극적 가담자였던 장유가 거사에 참여한 것을 수치로 여기기
까지 했다.결국 시기와 질투가 난무한 조정의 현실은 뻔한 것이었다.즉 반정공신 자신들도 반정의
약점과 공신책정의 불합리 함을 시인할 정도였다.또 청서는 공서들 관직 독점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즉 나누지 않고 독식을 경계하며 비판했던 것이다.공신들에겐 상을 주면 될 뿐이지,관직을 내리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비판했다.따라서 '장유,최명길' 등은 관직을 사양했다.한편으로 이귀 등은
여전히 '공신대우' 를 강조했다.양측은 인사 문제에도 첨예하게 대립했다.인사문제는 정치적 기반의
확보와 직결되기 때문에 초미의 관심사 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인조는 서인의 공서파 독주를 견제할
목적으로 남인과 북인들을 널리 기용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3, 여기에는 공신 제일의 실력자 김류가 인조의 입장에서 적극 동조했다.원래 김류는 남인을 이조참판
이하에만 임용할 것을 주장했던 인물이다.그런데 김류가 인조에게 동조한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청
서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는 왕과 연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공서의 경쟁자는 남인과 북인도
아닌 청서였기 때문이다.인조와 김류는 한배를 탓지만 목적지는 서로 달랐다.인조의 목적은 공서의 견
제에 있었고,김류의 속셈은 청서의 제어에 있었기 때문이다.김류는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과 이조판서
로서의 권한으로 독점적인 인사권을 행사했다.인조3년(1625) 김류는 소북의 영수 남이공을 대사헌에
추천해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김류는 전에도 소북의 김신국을 평안감사에 추천한 예가 있었다.남이공
의 대사헌 추천은 청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당시 청서의 맹주였던 '김상헌' 이 이건을 좌시할 인물이
아니였다.그는 반정후 부터 남인과 북인들의 배제를 주장한 강경파였다.이에 상소를 올린 김상헌을 향
해 인조는 '청서를 편협한 편당' 으로 폄훼,배격했다.
4, 인조의 강경한 태도는 결국 청서의 소장파들을 자극하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박정,유백증,나만
갑,김반,이소한 등 청서의 소장파들이 상소를 올렸다.양측은 서로를 몰아 부치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렸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공서의 이귀가 청서를 편들고 나오면서 대립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이귀는 반정의
원훈 공신으로 인조정부의 실권자 였다.그는 권력투쟁에서 김류에게 밀려 제2인자로 처진데다가 인사권
까지 김류에게 빼앗겨 불만이 컸다.이처럼 이귀의 개입으로 정국은 혼전에 혼전을 거듭하게 되었고,이를
수습하려던 인조는 대사헌에 추천되었던 남이공을 외직인 함경감사로 발령을 냈다.그런 다음 이귀를 파직
하고 청서의 소장파인 박정과 나만갑을 귀양 보냈다.결과는 청서의 참패였다.이처럼 공서와 청서의 대립
은 인조 7년(1629)을 전후해 서인들이 '老西와 少西' 의 대립으로 바뀌었다가,인조 14년(1636)병자년 호침
(호란)의 중에는 '斥和派와 主和派' 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한다.
5, 인조 조에 이르러서는 외침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인조정부를 세운 세력들이 새롭게 등장한 후금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친명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후금세력들과 겨룰 힘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운
主戰과 斥和派들이 조정에 진을 치고 있었다.광해군 대에는 명과 후금사이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후금
과의 충돌은 없었으나,새로 정권을 잡은 무능한 서인들은 광해의 중립태도를 버리고 '親明 反後金' 정책을
천명했다.즉 후금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후금에서 도망쳐 오는 漢人(明人)들과 여진족들을 모두 수용
하는 한편,후금에 밀려 조선에 피난해 있던 명의 모문룡을 인조조정이 지원해 후금과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다.거기에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이 이괄의 봉기때 후금으로 도망가 이미 투항해 있던 강홍립에게 군사
를 자신에게 빌려 달라고 간청하기 까지 했다.인조 4년(1626) 8월 11일 후금의 건국자 누루하치가 죽고 그
의 아들 태종(홍타이지)이 왕위에 올랐다.그후 곧바로 태종은 1627년(정묘년) 1월 '阿敏' 에게 3만 병력을
주어 조선(반도가 아님)을 침공하는 한편,일부 병력으로는 모문룡을 치게 했다.
6, 이에 인조는 장만을 도체찰사로 임명해 대적케 했다.그러나 후금의 군대가 이미 평양을 지나 평산으로
진입하자, 장만은 개성(개봉)으로 후퇴하고 말았다.전세가 불리해지자.김상용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경성
을 지키게 하고 소현세자는 全州로,인조는 '江華' 로 피난 했다.이괄의 봉기에 이어 2번째로 왕이 도망가는
피난의 짐을 쌌다.이런 한 전란속에 조선과 후금은 서로의 문제점이 노출되자 일단 양국간의 화의가 성립
되었다.이때 인조정부에서는 왕과 세자가 피난가는 형국인데도 감히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이가 없었
으나,최명길의 주장으로 화의가 체결되었다.1627년(인조 5년,정묘년) 2월 20일에 후금의 劉海가 강화에
직접와서 명나라 년호인 天啓의 사용을 금지하고,왕자를 인질로 보낼것을 요구했다.이에 인조는 元昌令
玖(구)를 君으로 봉하여 왕의 동생으로 만들어 후금 진영으로 보냈다.그런 다음 병조판서 이정구와 이조판
서 장유를 대표로 파견해 후금군의 철수를 종용하고 강화한 뒤에도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인정 받았다.
7, 결국 후금과 조선과의 약조는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 조선은 엄정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였다.그러나
이후도 후금은 과중한 세폐요구(조공 재물)요구와 서인의 후금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양국관계는 갈수록
악화 되었다.결과는 인조 14년(1636)의 병자년 호란이자 호침이였다.정묘호란(1627)으로 인조의 항복을
받은 후금은 더 과중한 세폐요구를 해왔다.또한 국경지대에서 불평등 무역을 강요하여 反淸 의식이 높아
지게 되었다.이러자 인조정부는 후금 사신들을 냉대했고,교역에도 소극적이었다.후금의 군량 요구와 선박
조달도 거절했다.그러던 중 인조 5년(1628) 8월 모문룡 사병들이 조선에 파견되는 후금의 사신을 습격한
사건이 벌어졌다.이사건은 모문룡이 조선과 후금의 관계진전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컸다.이건을 문책하고
자 후금이 조선으로 하여금 모문룡을 지원하지 말것을 요구했으나 인조와 서인들은 이를 거절했다.그런데
명나라 조정에서 모문룡을 비호해주던 魏忠賢과 당이 실각하자,모문룡은 후금으로 투항하려 시도 하다가
1629년(인조 8년)에 요동경략 袁崇煥에게 잡혀 죽었다.
8, 한편 후금은 1632년(인조 10년) 가을에 내몽고 정벌을 감행했다.이때 조선에 요구하기를 1)후금의 사신
접대를 명나라의 사례와 같이 할것, 2) 그동안 형제 관계를 君臣관게로 바끌 것, 3) 세폐(조공재물)를 증액
할것을 요구해 왔다.도저히 들어줄수 없는 요구를 하자 후금에 선전포고를 하자는 말까지 나왔다.이러자
조정은 마침내 주화파와 척화파로 갈리게 되었다.우의정 이성구와 이판 최명길 등 主和派는 전쟁의 위험이
있으므로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했다.그러나 대사간(3품) 정온,장령(4품) 홍익한,교리(5품) 윤집,수찬(6품)
오달제등 강경 척화파(친명파)들은 후금 사신의 목을 베고 단교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이때는 척화파가
월등히 강세였다.이러자 위협을 느낀 후금의 사신이 야음을 통해 도주하면서 양국의 교섭은 중단 되었다.
후금의 태종 등극을 부정함은 물론,군신관계의 요구도 전면 거부하고 국교를 단절했다.그러자 인조 14년
(1636년)4월 후금의 태종인 홍타이지(皇太極)는 국호를 淸으로 고치고,황제의 자리에 올라 년호를 '崇德'
으로 칭하면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 최후 통첩을 했다.
9, 이 통첩에서 태종은 '왕자를 비롯한 대신들 중 척화론자를 우리에게 보내어 문제를 해결토록 하라.만약
이 요구를 1636년 11월 25일 까지 수락하지 않으면,지체없이 출병할 것이다' 고 했다.인조 조정은 이 요구
도 거절했으며 전란은 눈앞에 있게 된 것이다.이를 거절하자 청태종은 13만 군사를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청태종은 장군 馬夫大(마푸타)를 선봉으로 평양,개성을 거쳐 왕이있는 한성으로 돌진했다.도원수 김자점 등
이 군대를 이끌고 곳곳에서 저항하기는 했지만 청군의 진격 저지는 실패했다.청군은 한성근처에 도착하자
마자 楊花 방면으로 진격해 江華로 통하는 길을 봉쇄했다.인조는 먼저 '윤방,김상용,이민구' 등에게 종묘의
신주와 비빈,왕자와 종실,백관 가족들을 이끌고 먼저 강화로 들어가게 하고는 곧이어 자신이 뒤따를 것이라
고 했다.하지만 청군들이 강화로 가는 길을 막아 갈수가 없었다.이에 최명길은 청군진영에 들어가 침공 이유
를 묻는등 시간을 끄는 사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인조는 남한산성에서 12월 15일부터 이듬해
(1637)1월 30일까지 45일 간을 버텼다.
10, 청군들은 남한산성을 포위한후 장기전에 들어갔다.성안에는 1만 4천명이 60일간 버틸수 있는 식량 뿐
이 없었다.곧이어 청군과 교섭을 시작했다.세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하자 척화론이 한층 강하게 일어났
다.그러나 1월 22일 江華가 함락되어 그곳에 있던 '비빈,왕자,종실,백관의 가족들' 이 포로가 되었고,남한산성
의 사정도 더 버틸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 지자 주화 여론이 높아졌다.기대를 걸었던 근왕병들도 궤멸을 당했
다.그러나 여전히 '김상헌,정온,홍익한,윤집,오달제' 등의 척화론도 만만치 않았다.당파와 관계없이 이들은 목
숨을 내놓고 청나와의 화친을 반대했다.청나라의 요구대로 왕이 출성해 항복하기로 하고 최명길이 항복문서
를 쓰자 예조참판 김상헌은 이를 갈기갈기 찢었다.반면에 이조판서 최명길은 찢어진 문서를 주워 모아 풀로
붙이면서 김상헌에게 말하길,
'대감이 나라를 위하는 충성은 모르는 바 아닙니다.그러나 나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 입
니다.대감께서 이 국서를 찢으시면,나는 다시 붙이 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병자록에 기록되어 있다.즉 애국하는 방법의 차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척화파들 중에는 군주가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는등 나라 잃은 슬픔이 있을때도 자살 쇼를 한자들은 있었지만,실제로 할복 자살을 하
거나 자진해 충절을 보인자들은 없었다.특히 친명 척화파들은 1618년 그들이 존숭하는 명나라가 45만의 군
를 보유하고도 정예의 후금군 6만 명에 패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집을 피웠다.이런 형국하에서도 친명사
대와 후금을 배척했으니 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1, 1637년(인조 15년) 1월 30일에 남한산성 아래에 있는 '三田渡(반도의 송파나루는 아님)' 에서 인조는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인조는 서문으로 나가 청군이 항복을 받기 위해 설치한 가건물인 '受降壇' 에서 청태종이
앉아있는 단상을 향해 '三拜九叩頭' 의 항복 예를 올렸다.즉 3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여진족의
천자 배알의식을 거행한 것이다.인조는 죄를 사해 줄것을 청했고,청태종은 왕을 용서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인조를 태종의 왼편에 앉게 하였다.이는 제후중에 가장 상석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의 민심을 고려
한 조치였다.이때 맺은 조약을 정축화약(丁丑和約,1637)이라 하나 패전 항복국의 처량함이 조약 11가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군신의 관계가 아니라 청과 조선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설정한 조약이라고 봄
이 더 설득력있다.
이로서 인조는 서인들과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지 15년 동안 3번이나 도성을 비우고 도망을 쳤고,3번
째 도망간 1637년에는 마침내 나라를 완전히 망했다.기록상으로는 이씨왕조의 왕중에 가장 찌질한 왕으로
남은 것이다.인조 다음으로 못난 왕은 인진왜란때 백성들과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를 들수가 있다.광해
군보다 정치를 잘하겠다며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으면 최소한 나라를 망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역사의
조선은 1592년 인진왜란으로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함으로 인해 1번 망했고,45년이 지난 후 인조시대에
청의 침공으로 왕이 삼배구고두 행위로 항복함으로서 2번째 망했다.기록의 역사가 아니면 현실에서 이러한
봉건왕조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이런 정부는 재기를 할수가 없고 부흥도 할수가 없다.
12, 한편 척화파들이자 친명파들의 정신적 고향인 명나라는 1620년 경부터 국정이 엉망이었다.이는 1626년
나라에 심각한 기아가 발생하자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즉 정치 부재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으며 명나라를
향해 조선의 친명 척화파 대신들이 이런 명을 두고 의리를 지켜한다는 말도 어이가 없기는 하다.이쯤에는 흥
기하는 청나라보다 무기력하고 나른한 명나라가 아니였던가?1644년 4월이 되면 만주족이자 여진족(건주여
진)의 청태종의 청나라는 강성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고,서부와 서북부의 폭도이자 토호 李自成은
북경을 침략해 황릉들을 약탈하기도 했다.명은 만주족이 침략하자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재위 1628~1644)는
조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많은 대신들은 '모두가 침묵하고 눈물만 흘릴 뿐' 이었다.황실의 군대는 만주족이 침략하자 도망가거나
항복하는 자가 속출했고,황제는 두아들을 변장하여 도망가게 했다.이어 숭정제는 술을 마시고 궁정으로 달려
가 후궁들에게 자살을 명했으며,자신의 딸도 칼로 베려 했다.날이 새자 숭정제는 황포를 벗고 한발은 벗을 채로
자금성의 북쪽에 있는 每山에 올라가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이러한 숭정제이자 毅宗을 두고 송시열
은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까지 수제자 권상하에게 만동묘를 지어,만력제와 함께 제사를 지내라고 부탁 했으니
그는 얼마나 어설픈 유학자인가?그러고도 서인과 노론의 宗師란 칭호가 어울리는지 연구대상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