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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혹시나☆]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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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함순례 시집 / 삶창시선 39 / 도사출판 삶창(2013.12.06)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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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함순례
마흔 지나자 손님이 찾아왔다
위아래 나란히 혹이 생겼다
본래 약한 녀석들은 아니라 하니
잘 모시고 잘 사귀어보기로 했다
손님도 때때로 기침 큼큼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유방 한쪽이 짜르르-
예리한 날에 찔린 듯 아파온다거나
종종 허리가 시큰거리고 아랫배가 묵직해지곤 했다
내 안에 무언가 돋아나 단단해지고 있다는 거
미처 소화해내지 못하누 내생의 환幻들이다
다른 세상과 눈 맞출 궁리나 하면서
새끼 치고 싶은 욕망에 들끓는 짐승처럼
사십여 년 내리 굴려온 몸이
이제 나를 부리고 가겠다는 신호
혹시나, 우주 너머
잃어버린 나에게 건너가는 환지통은 아닐까
꾀병과 엄살을 섞어 시시로 날 주저앉힐 때마다
갓 태어난 아가 어르듯
행동거지 조심해졌다 말투 더욱 겸손해졌다
멀리 계신 엄마에게 전화하는 날 많아졌다
궁극
함순례
폭설이 내렸다
영동 산간에서 단식이 예정된 말, 천지간 눈에 잠든 길을 찾아 밤 이슥하여 마을 초입에 당도하니 누군가 달빛 푯말을 펼쳐놓았다
“다만 걸어서, 발자국을 따라 오십시오”
담양
함순례
나는 왜 누가 내놓은 길만 따라왔는지
이 겨울 산골에 들어온 건
사랑을 놓치고 사랑에 서러워서였네
무덤이나 농지에서 끝나버리는 길
능선 너머로 잇대어보고도 싶었네
죽어서 가는 곳은 무덤뿐 아니니
사람이 밥심만으로 살아지는 것 더욱 아니니
나의 무기는 일심 깡다구였네
거친 나무 걷어내고 덤불 가지 쳐내며
적막강산에 구부러진 두 손 내밀 때마다
바람이 붉디붉게 올었네
몸집 큰 산꿩은 팽팽한 봉인을 풀고는
늑골에 고여 있던 그늘을 베어 물고 사라졌네
햇살 한 편
햇살 두 편
숲 가운데 오솔길이 구불구불한 등뼈 드러났네
누구와 이 길을 걸을 까
따순 볕이 가슴까지 차올랐네
길을 냈네
감포
함순례
태풍이 몰아쳐도 오봉은 달린다
포구의 꽃 김 양은 거센 파도 밀려오는 선창에 스쿠터를 댄다
먼 바다와 맞장 뜰 일에 눈 벌겋게 사내의 어깨가
다방커피에 녹아들며 은근슬쩍 김 양의 허벅지로 쏠린다
서로서로 깍지 낀 채 스크럼을 짜는 폭풍전야
아가 어르듯 말 같은 사내를 받아내고 있는 저 무릎 안장에 엎드려
나도 그만 인간적으로, 수컷이 되고 싶은 그런 날이다
벽 안에 사람이 산다
함순례
새로 도배하면서 감쪽같이 스피커를 봉했다
시도 때도 없이 고요를 흔들고 가는 방송이
슬쩍 귀찮았던 것인데
옥상 난간엘 두 번이나 오르내린 사춘기 아들 쓸어안고
먹장처럼 깜깜한 날
벽지 한 장의 긴장을 뚫고 또 그가 왔다
꽃무늬 가면을 쓰고 저리 또렷한 소릴 내다니!
황사 걷혔으니 창문을 열리는
굵고 지긋하신 목소리가
내 안 둥그런 슬픔의 물관 파고들어서
얼굴 없는 그를 아득히 올려다본다
매번 차임벨로 노크하고
헛기침 두어 번으로 가다듬지만
밤잠 설친 듯 목소리 탁할 때도 있는 걸 보면
그에게도 거둬야 할 식솔들이 있으리라
휘파람 불며 스쳐 가도 그만인
내 눅진한 살림 안쪽으로 줄기차게 말을 건네는
저 지극함은 무엇이언가, 그러므로
딴살림 챙기며 늙어가는 그의 본색은
벽 안 살림,
어리석은 내가 끝내
봉인할 수 없는
장수풍뎅이
함순례
그는 갔다
좁쌀만 한 점으로 나와 톱밥 삼키며 견디다가
가까스로 껍질 벗고
늠름한 뿔로 암컷에 닻을 내릴 수 있었으니
그 밤들이 참으로 깊고 후끈했다는 거
차마 다 전하지 못하겠다
그는 돌아, 갔다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비바람을 경작했던 아버지
수컷의 신화를 남긴 채
눈물 한 자락 훔칠 여백조차 지우고 갔다
짧다 하지 말자
뿔을 낮춘 그의 뒤란
홀로 걷는 숲의 어디쯤
푸른 정령이 되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만 원, 봄봄
함순례
봄비 내리는 날이었어요 회의가 끝나고 어느 길을 찾든 慾의 숲에 닿을 수 있는 일이어서 삼겹살 소주로 뒷속을 달랬었는데요 오랫동안 핏줄로 흘러온 이름이 바뀐들 그대론들 중심에 묻은 뿌리 쉬이 흔들리겠느니 봄비는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피가 뜨거워 아프고 아파서 차가워진 주름살들, 누구도 자릴 뜨지 못하고 탱크 호프집으로 이어져 밤은 깊어졌고요 그만 일어서는 날 잡아끈 동만 시인이 불숙 주머니에 무언가 찔러주었어요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서울 불빛은 표정이 살아나 출렁였는데요 종일 내린 봄비가 새순 틔워내는 눈물이었는지 꼬깃꼬깃 네 번 접힌 만 원의 주유로 심야버스에 오른 나도 봄봄! 봄비가
웃는 시
함순례
달맞이 고개 넘어 바다로 가는 길
도로변에서 ‘한국시’를 보았다
간판이다
그 끝엔 ‘한국시인’ 좀 작으나
핏빛 노을 같은 붉은 낙관가지 찍어놓았다
나른하게 고여 있던 자동차 안이 일순 술렁거린다
위대한 한국시인이 살고 있는 집?
봄 들판이 휙휙 지나간다
‘시’자만 봐도 ‘시인’ 소리만 들어도
속엣것 수만 길이 꿈틀거리는
아무도 모르게 품에 넣고 다니다가
무덤 속에 누워서도 야금야금 꺼내 먹을 수 있는
문장 하나
잘 익은 시 한 편
울컥 뜨거워지는데
누군가 에잇 국숫집이잖아, 크게 웃는다
아뿔싸! 되돌아갈 수 없는
제 살 파먹는
푸릇한 이 길도 도장이다
숨
함순례
오랜 시간 몸 달구고 마음 기울였더니; 일 아니고는 안부가 궁금하지 않아 도무지 그리움이 타오르지 않는 자리. 작가회의 살림지기 물려주었다 석화처럼 굳어 사람 좋아하건 속알마저 너덜해져서
비로소
사람의 단 냄새가 등 뒤에 닿았다
살 것 같았다
맞선
함순례
한 여자가 오르고 올라오고 있다
하이힐 소리가 시시한 밤길을 확 잡아챈다
삼백육십오 일 홀로 끓여 먹는 끼니와
어쩌다 바깥을 돌고 돌아 혼자 드는 방
기척 없는 문고리의 서늘함을 풀어놓던
한 소설가의 말이 뚝 끊긴다
긴 슬픔을 걸어온 듯한 여자
느릿느릿 짧은 스커트 추켜올리며
엉거주춤 이어지는 걸음하며
물맛이 쓸쓸한데
따라가 볼래요? 어쩌면 서로의 핏줄에 길을 낼 수도, 이를 테면 一家를……살, 林 속으로 성큼!
세상을 받아 적는 일과 한 여자 받아 적는 일을 견주랴
때마침 푸릇한 밤바람이 느티수 이파릴 흔들어대는데
깜냥껏 미끄러지며 지난 줄기를 퇴고해도 좋을
가을밤
서해바다 노을 저편
함순례
어린아이가 흥건히 젖은 채 울고 있다
높은 파도에 휩쓸렸는지 두 눈을 꼭 감고 다만 공퐁를 쥐어짜며 울어 젖히는데
운다는 건
울음 밖으로 이끌어줄 어떤 손길을 기다리는 것
그래, 울 때는 저리 악착같이 울어야 한다
어느 새벽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는 코피가 서러워 천지가 외로웠을 때처럼 이미 나를 지나간 사랑에 떨며 쏟아놓은 통곡처럼
최선을 다해 울고 싶다
그 붉은 귀를 열고 들어가면 기쁨이나 슬픔 같은 것, 맹감 알처럼 떫어져서 둥글어져서 단단한 뿌리로 자랄 것만 같아서
첫눈
함순례
서울 모퉁이에
집 한 채 들였습니다
웃풍 심한 살림에도 찡그림 없던
시누이
저리 펄펄 납니다
십사 년 재채기 다 쏟아내어
사뿐,
사뿐,
꽃춤
함순례
벚꽃잎 바람에 실려 돌아가시네
먼 길 걸어와
후끈하게 달아오른 온몸을 열어
절정에 올랐다가
미련 없이 길 떠나는
저 비릿한 난장蘭章,
정류장 빈 의자에 잠시 올려놓은
맨발로 가는 생의 첫 마음을 읽네
신발을 벗듯
일생 꽃피우겠다는 중심을 향해
바짝 나투시는
꽃의 일념은
제 몸 향기로운 혈관을 짜
우주의 통로를 여는 일
가벼워라, 바람은 참 맑아서
꽃 진 자리 눈뜬 새잎이 허공을 밀고 가네
꽃나비 떼 무진무진
물들이며 날아오르네
추석 무렵
함순례
빗물은 홈통을 타고 세차게 흘러내린다
연일 비 소식
비도 어딘가 바삐 달려가는 것만 같다
비의 고향에도 양철 지붕과 돌담이 많을까
회색 기와가 고즈넉한 그런 마을인가
발걸음 타다닥r 세우고 달려가는
비의 행방을 쫓아가면
처마 밑 빗소리 들으며
라디오 끼고 깔깔거렸던 풍경에 닿을 수 있을까
폭우에 잠긴 벼 포기와 씨름하던
아버지와 만날 수 있을까
적막이 내려앉은 이른 아침
빗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대추나무 이파리는
이리저리 흔들이는 마음 내비치지 못한 채
꾸중 듣고 서 있는 아이처럼
엉거주춤
겨울 배추
함순례
엄동설한에 푸른 결구 채워가는
칼로도 베어낼 수 없는
저 무량한 청춘을 보라
왼쪽 다리가 ㄴ자로 꺾이는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병실 밥상을 책상으로 밤낮 책과 씨름하더니
눈이 펑펑 내린 날
휄체어 타고 대소변 받아가며 시말시험을 치르고는
재수술 받고 새 학기 출석 수업도 받는다며
환하게 웃는 사랑스런 여자
칠십 세를 바라보는
서산 영월 형님
우수, 관음보살
함순례
아기 옹알이인가
따개비 몸 부비는 소리인가
개구리가 짝을 찾는 소리
이심전심
감히
소리를 보고자
숨을 멈추는 개골 창가
바람은 한사코, 세차구나
봄, 뜬봉샘에 닿아
- 금강 1
함순례
여기 첨병, 한 발을 담갔을 때 그 파문이 천 리 물길 따라 흘러가는 것
발원은 그런 것이다
젖은 바위에 앉아 미처 도착하지 못한 꽃을 기다리며
내 안 저만치 맺힌 꽃눈에 손 내밀어 보면서
공산성
- 금강 3
함순례
벼랑에 박아 넣은 목침에 앉아
펄럭이는 깃발 본다
山에 이르는 데 천 년, 空에 이르는 데 천 년, 空山에 닿는 데는 또 얼마를 건너야 할까
깃발은 쉼 없이 울어댄다
파헤쳐진 강바닥
흙탕물에 잠긴 금강을 추슬러 업고서
이 차디찬 세월 너머, 흰 빛
흰빛을 찾아 달려가는 말갈기 같다
속이 썩어 문드러진
성聖,
어머니 같다
배낭
함순례
검은 배낭을 메고 출근을 한다
일촉즉발,
빠르게 걸어야 하는 골목은 미끄러워서
매번 지나왔으면서도 오래 낯설다
날마다 밑바닥을 떠도는 여행자
아프리카코끼리를 업고 간다
제 무게가 삶이라는 것
등짐은 때로 집이 된다는 것, 하여
이 슬픈 정글에 작달막한 날 부려놓은
어머니와 어머니
그 초식의 진동을 메고 걷는다
교정 원고와 점심 약속과 이런저런 밥
등에 지고 걸어야 할
저 눈 시린 허공들
다 말할 수 는 없는 일이어서
오늘도 배낭을 메고 걷는다
바깥이 불편하다
함순례
당신에게 가는 길을 놓았습니다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마음 밖을 떠돈 지 오래
바깥에선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아요
술잔 잡고 웃고 떠드는 온기에 길들여진
한없이 누추해진 나의 바깥을 탈피 중입니다
늦은 아침 제일 먼저 하는 일이란
창을 열고 볕을 들이는 일이죠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야
묵은 얼룩 닦아내듯
내 밑바닥 깊숙이 내려가 나를 통과하는 일이죠
빨래 널다가 설거지하다가
문득 온몸이 부어오르는 통증을 가만히 품고 견디는 것
내 안의 불화 어루만지면
오직 마음으로 나를 보려고 해요
내가 없는 나를 만나려 합니다
내 안에서 나를
당신 밖에서 당신을 읽는 적막이
당신에게 가는 길을 놓아주기를
그러니 이미 거기에 도착해 있는 내 들뜬 마음도
외면해주시길 청합니다
무석사
함순례
사람의 마을을 지나 사람의 가슴으로 닿아야 하네
단칸 농막과 비탈밭이 스스로 방주를 이룬 곳
제 꼴대로 자란 구릅 더덕 당귀가 향기로운 곳
발 없는 생명이 저마다 빛나는 곳
무너진 몸을 추스른 무석이
자연의 곳간을 열어
수천의 바람들에게 베푸시는 곳
짧은 밤에도 매듭을 풀리고 굳은 피가 말랑해지는
이 절은 세상에 없는
내 마음에 지은 절이라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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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다양한 빛들을 모시고 싶었다
혹시나, 는
둥근 그늘이며 내생의 환幻들이다
팔순의 어머니께 이 시집을 바친다
2013년 늦은 가을
함순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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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례 詩集 [※혹시나※]
[ 발문 ] -
생의 주름에 소심小心한 대모代母의 시
최 은 숙(시인)
저 사람이라면, 싶은 이가 있다. 누가 선뜻 나서지도 않을뿐더러 아무에게나 쉽게 맡기기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보루堡壘와도 같이 미덥게 떠오르는 사람. 함순례가 그런 사람이다. 쉽게 달아오르지도, 식지도 않는 구들돌 같은 성품이 그렇고, 작은 일에 바스락거리지 않는 사람됨의 크기가 그렇고, 작은 일에 바스락거리지 않는 사람됨의 크기가 그렇고, 밖으로 보이는 진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의 속내에 감춰진 세심함, 물기 있는 마음 씀, 꼭 한 사람이 필요한 어떤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함순례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함순례가 대전충남작가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일하는 동안 작가회의 살림은 훈훈했다. 그녀가 2년 임기를 마친 뒤, 대전충남작가회의에는 모두가 뒤로 빼고 맡지 않으려하는 신임 사무국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무차장’이라는 없던 직함이 생겼다. 사무차장이 된 함순례는 기꺼이 사무국장을 도와 2년 더 일했다.
저 사람이라면, 그것은 일을 놓고 하는 생각만은 아니다. 우리는 스물서너 살 때 ‘한남문학회’라는 이름의 대학 글패에서 만났는데 함순례는 영문과 야간학부를 다니면서 낮엔 에너지기술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전공학과가 아니라 한남문학회를 졸업했다고 할 만큼 우리는 학교에 있는 시간 거의 전부를 동아리 방에서 보냈다. 학교에 가서 가장 먼저 찾는 곳도, 집에 갈 때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도 동아리 방이었다. 그곳에서 시를 쓰고 합평을 하고 학습을 하고 집회 전략회의를 하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연애를 했다. 글패의 후배들은 함순례를 지극히 따르면서도 어려워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작가회의에서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함순례에게는 후배들을 아우르는 늠름함이랄까, 한 살만 어려도 확실한 아우를 삼는 형님 포스가 있었다.
매력과 질투를 동시에 느끼면서 시인 김희정에게 물었다. 순례랑 나는 동갑인데 왜 순례한테는 누나라고 하고 나한테는 선생님이라고 하는 거야? 순례가 그렇게 좋아? 내가 그렇게 멀어? 이에 김희정은 아, 그게 아니고 선생님은 취하지도 않고 우리랑 놀지도 않고 일찍 가시니까……. 하더니 소주잔을 절도 있게 내밀면서 대뜸 말꼬리를 잘랐다. 누나, 나, 오늘부터 누나라고 할게. 기 센 후배를 건드렸다가 움찔했다.
김희정이 사소하고 다감한 전화를 몇 번이나 해주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누나도 뭣도 못되고 어정쩡할 판이다. 함순례와, 함순례의 시 속에서 느껴지는 대모代母의 품성은 공짜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너그럽고 담박하게 품는 열두 폭 오지랖으로도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시편 중에 상처의 흔적이 간혹 비치곤 한다.
조선 왕실은 음악을 귀히 여겼네
왕이 승하했거나 흉년 들어 백성이 기근에 시달릴 때는
악기는 진설하되 연주하지 않았네
포기할 수 없는 풍류와 지극한 긍휼과 배려의 중첩
캄캄한 슬픔과 배고픔을 녹이는 풍경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당신에게 이웃한 말
이심전심으로 건너가라는 말
그 말씀 듣고 진종일 입이 귀에 걸렸지
부적처럼 손에 쥐고 사탕처럼 녹여 먹으며 달콤했지
차가운 질투와 애증
경쟁과 불통에 시달려 마음이 식어버렸으니
술과 사람을 피해 내내 어두웠으니
내가 나에게
당신과 당신에게
소리 없는 노랠 불러도 좋으리
-「진이부작陳而不作」전문
오랜 시간 몸 달구고 마음 기울였더니 일 아니고는 안부가 궁금하지 않아 도무지 그리움이 타오르지 않는 자리, 작가회의 살림지기 물려주었다 석화처럼 굳어 사람 좋아하던 속알마저 너덜해져서
비로소
사람의 단 냄새가 등 뒤에 닿았다
살 것 같았다
-「숨」전문
이것이 진짜 관계다. 사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별별 꼴을 다 겪고 서로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면서 넌더리를 내는 데까지 간 뒤에야 비로소 ‘아는’, 그에 대해 한 마디라도 말할 거리가 있는 사이가 되는 게 아닌가. 선후배 동료 작가들이 함순례를 아끼고 허물없이 대하는 것은 함순례가 지난한 사람의 웅덩이를 비켜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순례의 고향은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피반령 고개 아랫마을이다. 지금도 토함산 잦은 고개만큼이나 구불거리는 피반령 고개는 버스가 지나가면 절벽으로 돌이 굴러떨어지는 험한 길이었다. 함순례는 오장환 문학관이 있는 그 마을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함순례는 어느 휴일에 기운 없이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는 친구를 보았다. 다른 동네에 사는 아이였는데 친구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너 어디 아퍼?”
“아니, 배가 고파서”
“들어와서 밥 먹고 가”
끼니를 걱정할 만큼 어려운 집이었으니 조무래기 아이들이 주전부리할 만한 것이 없었을 터. 그래서 이웃집 아이 함순례가 저의 집에 불러들여 밥을 먹여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 밥상을 받은 친구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네가 차려준 밥상이 아직도 기억에 있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너희 집 앞을 지나다 받았던
첫 애기 입덧 내내 네가 비벼준 열무비빔밥 간절했어
네 자취방의 아침밥도 잊을 수 없어
네가 차렸다는 어린 날의 밥상들이
이십 년 만에 나간 동창회 자리에 그들먹하니 차려진다
-「밥 한번 먹자」부분
남의 고픈 사정을 알아주는 이가 대모代母이지 무엇이겠는가. 함순례는 ‘외로우니까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분노와 절망이 바닥을 칠 때도 배가”(「밥 한번 먹자」)고픈 존재인 사람의 캄캄한 슬픔에 감정이입하는 시인이다. 어릴 때부터 남의 기색을 두루 살피고 밥상을 차려내는 조숙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홀어머니 아래서 일곱 남매가 자랐으니 식구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고 시시때때로 만고풍상을 겪어냈을지 짐작이 된다. 도서실에서 단테의『신곡』, 존 밀턴의『실낙원』에 심취하는 것으로 도피처를 삼던, 회인중학교 잔디밭에 앉아 친구들을 상대로 성교육을 일삼던 조숙한 산골 가시나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자식들을 이끌고 피반령 고개를 넘어 청주시 남구 우암동 산꼭대기로 이사한다. 어머니가 하숙을 치며 꾸려 나가는 빠듯한 살림에서 넷째 딸의 대학 등록금을 여퉈 낸다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날이면 날마다 대학 갈 친구들 공부하라고 주번 활동을 대신 해주고 칠판에 김소월 시를 가득 적어놓고는 군데군데 괄호를 쳐서 맞으면 빵을 사주겠다면서 퀴즈 놀이를 하는 동안, 세월이 흘러 청주여고 졸업생 함순례는 하릴없이 백수가 되었다. 그런데 회인중학교의 선생님들은 졸업생의 성적까지 챙겨보는 분들이었다. 총명한 제자가 대학을 못 간 것에 충격을 받으신 그녀의 중학교 선생님이 에너지기술연구소 과장인 친오빠에게 제자의 취직을 부탁했다. 마침 발령받아 온 신임행정부장의 비서직이 비어 있어 함순례는 스무 살에 첫 월급 십만 원을 받으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어머니에게 가장 걱정을 안 끼치고 알아서 잘 사는 자식이었다니 아마도 어머니의 평생은 열 손가락이 번갈아 깨물리는 아픈 세월이었을 것이다.
올백머리에 일생 한복을 입은 첫 남자, 자수성가의 표상이었다. 지극히 부지런하고 흙과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전업은 농부였으나 토정비결과 책력 보는 법을 알았다 그러나 실패라든가 휘어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한 해 농사 홍수에 쓸려나가자 그의 정신은 맥없이 무너졌다 알코올중독자가 되어갔다 세상에 대한 의심 키우며 자신을 학대했다 어느 신새벽 뜰팡에 쭈그려 앉아 그 징글징글한 의심의 아가리에 농약을 들이부었다 생전 다져놓은 마당이 가뿐하게 그의 몸을 받아주었다
열넷에 학업을 작파한 두 번째 남자, 스물한 살에 가장이 되자 우사 늘리고 소를 사들였다 산밭 가득 뽕나무 심었다 소값 파동이 불어닥쳤고 뽕밭은 풀섶이 되어갔다 덤프트럭 운전을 했고 화원을 차렸다 거칠기 짝이 없는 그가 풍란을 다루는 솜씨만은 예술이었지만 근면의 밑끝은 짧디짧았다 사업이 자릴 잡기 시작하면 으레 사람을 부렸다 손대는 족족 말아드셨다 누구는 매사 운이 따르지 않은 탓이라 안타까워했고 누구는 게으름은 하나님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로 치부했다 인간의 숲에서는 무얼 해도 춥고 배고팠던 그는 풍란 캐러 산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낯선 하늘의 행불자를 선택했다
-「세 남자의 독법」부분
함순례로 하여금 슬픔과 고통을 향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되게 한 이들은 가게도 안의 인물들일 것이라고 짐작되는 ‘남자들’이다. 흙과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며 토정비결과 책력 보는 법을 알던 첫 번째 남자, 한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는 한 해 농사를 휩쓸어간 홍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알코올중독자로 살다 세상을 버렸다. 열넷에 학업을 작파한 두 번째 남자는 또 어떤가? 소값 파동을 시작으로 손대는 사업마다 족족 말아 드시다가 풍란을 캐러 간다면서 집을 나가 행불자가 되었고,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남자 역시 평탄치 않다. 경찰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집안의 유일한 공무원으로서 기둥을 세워줄까 싶더니 첫사랑에 홀려 돌연 사표를 써서 던지고 야반도주를 하고 만다. 이들의 공통점은 질기지 못하고 약지도 못하고 농간도 부릴 줄 모르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란 것이다.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법칙에 의해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는 인간의 숲에서는 무얼 해도 춥고 배고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좁쌀만 한 점으로 나와 톱밥 삼키며 견디다가
가까스로 껍질 벗고
늠름한 뿔로 암컷에 닻을 내릴 수 있었으니
그 밤들이 참으로 깊고 후끈했다는 거
차마 다 전하지 못하겠다
그는 돌아, 갔다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비바람을 경작했던 아버지
수컷의 신화를 남긴 채
눈물 한 자락 훔칠 여백조차 지우고 갔다
-「장수풍뎅이」부분
이들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좁쌀만 한 점으로 세상에 나와 톱밥 삼키며 견디다가/가까스로 껍질 벗고/늠름한 뿔로 암컷에 닻을 내릴 수 있었으니/그 밤들이 참으로 깊고 후끈했다는 거/차마 다 전하지 못하겠다”하고 소리 내어 읽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온다. 어쩌면 자본의 잔인한 유린을 당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최후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는「검은무당벌레」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
수목 소독을 하자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배를 뒤집은 채 가느다란 다리 바르르 떨고 있거나
지나가는 걸음에 밟혀 온통 으깨져 있거나
꼼짝 않고 인도에 처박혀 있는
주검의 잔해 낭자했다
목련나무 아래서였다
나무에 깃들어 붉은 열매 쪼아 먹고
이파리를 갉아 먹던
벌레들의 생애가 한순간에 지나간 것이다
누군가는 아예 멀리 돌아가고
몇몇은 성큼성큼 밟고 간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타살의 흔적을 지우며
자디잘게 부서지는 동안
목련 잎잎은 수런수런 저녁에 닿고 있었다
-「검은무당벌레」전문
나무에 깃들어 붉은 열매 쪼아 먹고, 이파리를 갉아 먹고 사는 순한 생애는 죄가 없어도 한순간에 우수수 쏟아져버릴 수 있다. 누군가는 아예 관심도 두려 하지 않고 피해 가고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가는 죽음, 함순례는 그것을 ‘타살’이라고 짚었다. 힘없는 삶에 대한 외면과 침묵도 타살이다. 숨죽여 수런거리는 소심한 목소리라도 있어야 시인이 사는 세상 아닌가? 아버지의 절망을 무책임한 처사라 여기며 용납하지 않았을 때 그는 시를 쓰지 못했다.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비바람을 경작했던 아버지, 한때는 늠름한 뿔을 가졌던 아버지의 좌절이 내 가계도에서 일어난 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때닫게 되면서 함순례의 시는 목소리를 얻기 시작했을 것이다. 당신의 자식과도 같은 논밭이 홍수에 휩쓸릴 때 허우적거리며 같이 떠내려가다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목숨을 건진 뒤 아버지는 삼 년 내내 술에 취해 논밭을 뒤덮은 돌을 골라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사셨다.
함순례가 ‘내 안의 똘끼’라고 부르는 어떤 것들-원칙을 벗어나는 일에 타협하지 않는 고지식함, 한 번 정한 약속을 허물지 않는 지독함 그리고 애매한 것, 어정쩡한 것을 못 견디는 결벽증은 장수풍뎅이와 검은무당벌레들의 아픈 생애를 함께 겪어내면서 생긴 혐오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부조리하고, 연민 없는 세상에 대한, 원칙도 신뢰도 없는 천박한 세상에 대한 슬픔 말이다. 그래서 생명 있는 것들이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각기 싱싱한 존재감을 발하는 순간을 포착할 때 함순례의 시어는 싱싱하고 뜨겁다. “검정 물들인/뽀글뽀글 파파머리들이” “육 박자 쿵짝” 카세트테이프에 맞춰 “놋요강 같은 궁둥이를 돌리고 있”는「금성공원 약수터」의 풍경은 얼마나 꽃다우며 “일 년에 두세 번 큰물 지면/전둠벙 각시둠벙 몸을 섞는데/붕어 참종개 콩중이 검은물잠자리/달뿌리풀 버드나무 왜가리 흰뺨검둥오리/너구리 고라니 멧돼지 오소리 수달/죄 몰려나와 들러리 선다”는「천내 습지」는 얼마나 황홀한가“ ”막 빚어 올린 꽃술을 이기지“ 못하고, 천개 알을 방사하고도 혈기왕성하여 ”또 한번/사천왕 같은 눈을 굴리며/발아래 봄 산을 눕히고 있는“ 저 「화암사 도룡뇽」은 얼마나 짜릿한가?
함순례가 생명이 작용하는 순간들에 감응하는 것은 그에게 어미의 품이 있기 때문이다. 어미는 오갈 든 것들을 밀어내지 않는다. 금 간 것은 붙여 쓰고 떨어진 것은 꿰매 쓰는 것이 어미의 손길이다. 병든 몸은 다독이고 눌린 기는 펴주며 어미는 구석에 뒤처진 온갖 군상을 품는다.
태풍이 몰아쳐도 오봉은 달린다
포구의 꽃 김양은 거센 파도 밀려오는 선창에 스쿠터를 댄다
먼 바다와 맞장 뜰 일에 눈 벌겋던 사내의 어깨가
다방커피에 녹아들며 은근슬쩍 김양의 허벅지로 쏠린다
서로서로 깍지 낀 채 스크럼을 짜는 폭풍전야
아가 어르듯 말 같은 사내를 받아내고 있는 저 무릎 안장에 엎드려
나도 그만 인간적으로, 수컷이 되고 싶은 그런 날이다
-「감포」전문
“태풍이 몰아쳐도 오봉은 달린다.”
함순례의 시집을 읽고 난 뒤 음악처럼 경쾌하게 입안을 맴도는 시행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서로서로 깍지 낀 채 스크럼을 짜는 폭풍전야”도 그렇다 태풍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 파손 방지를 위해 배와 배가 묶이듯 태풍이라는 피할 수 없는 조건 앞에서 동일한 처지로 묶이는 사람들의 연대감, 그 사이를 김양의 스쿠터가 오봉을 싣고 달린다. 태풍은 늘 오가는 것이란 듯이, 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탈탈 달린다. 묘하게도 긴장을 해소하고 위안을 주는 존재, 아기 어르듯 말 같은 사내를 무릎에 받아주는 포구의 꽃 ‘김 양’에게서 나는 어미의 심상心象을 본다. 새끼를 품은 어미는 세사에 시달려도 고래 심줄같이 강하고, 동시에 물에 젖은 종이처럼 약하다.
새로 도배하면서 감쪽같이 스피커를 봉했다
시도 때도 없이 고요를 흔들고 가는 방송이
슬쩍 귀찮았던 것인데
옥상 난간엘 두 번이나 오르내린 사춘기 아들 쓸어안고
먹장처럼 깜깜한 날
벽지 한 장의 긴장을 뚫고 또 그가 왔다
꽃무늬 가면을 쓰고 저리 또렷한 소릴 내다니!
황사 걷혔으니 창문을 열라는
굵고 지긋하신 목소리가
내 안 둥그런 슬픔의 물관 파고들어서
얼굴 없는 그를 아득히 올려다본다
매번 차임벨로 노크하고
헛기침 두어 번으로 가다듬지만
밤잠 설친 듯 목소리 탁할 때도 있는 걸 보면
그에게도 거둬야 할 식솔들이 있으리라
휘파람 불며 스쳐 가도 그만인
내 눅진한 살림 안쪽으로 줄기차게 말을 건네는
저 지극함은 무언가, 그러므로
딴살림 챙기며 늙어가는 그의 본색은
벽 안 살림
어리석은 내가 끝내
봉인할 수 없는
-「벽 안에 사람이 산다」전문
“옥상 난간엘 두 번이나 오르내린 사춘기 아들 쓸어안고/먹장처럼 깜깜한 날”에 아파트 관리인 아저씨가 “황사 걷혔으니 창문을 열라”고 한다. “눅진한 살림 안쪽으로 줄기차게 말을 건네는” 사람의 목소리에 흔들릴 때 사람은 세상을 살아갈 힘을 회복한다. 사람의 숲은 참으로 징그럽지만, 그것을 외면하면 우리의 예술은 보잘 것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복작이고 부대끼면서 물기를 잃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내는 일이 남도 살리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살림’이란 얼마나 자주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소리 없이 찢기는 일인가.
함순례의 아들 녀석은 “하루쯤 학원 좀 쉬자 하더니” 어미가 조는 틈에 사라져 얼굴이 뽁그족족해져서 돌아와서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 “모든 게 갑갑하다고/불안하고 두려워 미치겠다고/.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사춘기 고등학생이다. 그리고 그 어미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가슴 철렁 쓰라린 에미 속을 위한 국물인 줄/아는지 모르는지” 콩나물 황태국 한 그릇 말끔히 비우고 “속이 풀리신 아들 녀석/가방 메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현관을 나서는”(이상「술국」) 뒷모습을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배웅하는 캐릭터다. 그런가하면 수염 깎는 남자가 되려 하는 아들을 두고 다른 어미들처럼 한세상 포효하는 대장부 사내를 상상해보는 여인네이기도 한데 아들은 보기 좋게 꿀밤을 먹인다. 엄마, 정신 차리셔. 엄마가 살아온 세상, 그거 아니잖아? 하듯이.
아들도 남자가 되려 한다
주민등록증 발급 기념으로 면도기 선물을 받고 싶단다
나지도 않은 수염 깎겠다고
수염 깎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조르더니
이젠 아빠 것 말고 제 것을 갖고 싶단다
열여덟 살이면
세상 거머쥐고 싶은 게 생길 나이
뿌리가 근질거리고 온몸 뿌듯해져 오는가
일생 제 자식이 포효할 날이 오리란 믿음을 놓지 않는 어미 본능적으로
사냥감 쫓아 숲 속을 맹진하는 붉은 호랑이 그려보는데
욕실에서 나온 아들이
한결 착해 보이는 얼굴 들이밀며 씽긋, 웃는다
엄마 새해 복 받으셔
-「면도 세배」부분
어미의 너털웃음이 들리는 것 같고 아들내미의 토끼같이 순한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다. 기분이 좋다. 함순례의 아들이 어련하겠는가 싶다. 녀석은 사냥감 쫓아 숲 속을 맹진하는 호랑이보다는 그렇게 날뛰는 맹수들의 숲에서 여린 것들이 목을 축이는 옹달샘 같은, 그들이 살 만한 세상을 연주하는 푸른 바람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함순례라는 사람에게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단단함과 여린 가슴앓이, 일을 추슬러내는 추진력과 수줍은 머뭇거림, 엄격함과 한결같은 따스함이 함순례를 흔치 않은 살림꾼의 모습으로 키웠듯이 그의 아들도 그렇게 키워낼 것이다. 작가회의 살림을 할 때도 그렇고, 사람이 맑고 깊은 물 같아서 노자老子라 불리는 남편 윤영진 씨와 출판사 일을 꾸려가고 있는 지금도 그렇고, 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몸에서 저리도 야무진 기운이 나오는가, 감탄하다가도 저를 위해선 바보 같은 만큼 챙김이 없는 함순례를 보면 웃음이 나곤 한다. 저보다 남의 주름을 살피는 오지랖은 떡잎 시절부터였던 듯 회인중학교 학생 시절에 치렀다는 첫사랑 이야기는 딱 함순례의 초상이다.
첫사랑 남자애는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따로 있어서 말도 못하고 덤덤함을 가장하여 지내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애가 보이스카우트 여름 수련회를 떠난 사이에 그 애의 사랑인 은주가(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은 친구은주의 관을 들고 무덤까지 배웅했다.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밤에도 가위에 눌리고 헛것을 보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함순례는 제 충격보다도 그 애가 수련회에서 돌아오면 무슨 말로 은주의 죽음을 알려야 할지가 더 걱정이었다. 마침내 수련회 갔던 버스가 돌아오는 날 함순례는 운동장에 나가 첫사랑을 기다렸다가 은주의 무덤에 데려다 주었다. 가서 뭘 했느냐고 했더니 뒤에 서 있다가 같이 내려왔다고 했다.
쩝…….
“네 시詩는 너무 착해”(「역방향」)라는 말이 마음에서 삭지 않을 때도 있고 “이름에 달라붙은 순활 順/이 무구한 업을 시시하다 여기며/독하게 몸을 달궈” 보기도 했다지만, 나는 함순례에게 순해야 한다고, 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다. 더 바보 같아도 괜찮다고 하고 싶다. 그의 시가 말하는 것처럼 “별다른 양념 없이 구들구들하게 쪄낸 물메기찜”의 “무르고 연한 살성”(이상「맛의 처소」)을 타고난 사람은 살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삶의 곳간 처처에 맛을 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은 결을 만져주는 일, 누군가의 결을 쓸어주는 건 뒤란 보이지 않는 주름에 소심하는 일”(「소심」)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결을 쓰다듬는 것은 순順하게 응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순順하느라 역행하기도 하고 돌아앉기도 하고 떠돌기도 했던 시간을 함순례의 시편들 속에서 더듬어나가면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웠다. 배고픈 친구에게 밥 한 끼 차려주는 일, 슬픔과 고통에 맞닥뜨릴 남자 친구를 빈 운동장에서 기다리는 일, 열병을 앓는 아들에게 콩나물 황태국 한 그릇 끓여 먹이는 일, 그렇게 삶의 보이지 않는 주름들을 두루 살펴 온 시간이 그녀의 시에 대모代母의 품격을 완성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흔 지나자 손님이 찾아왔다
위아래 나란히 혹이 생겼다
본래 악한 녀석들은 아니라 하니
잘 모시고 잘 사귀어보기로 했다
손님도 때때로 기침 큼큼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유방 한쪽이 찌르르-
예리한 날에 찔린 듯 아파온다거나
종종 허리가 시큰거리고 아랫배가 묵직해지곤 했다
내 안에 무언가 돋아나 단단해지고 있다는 거
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내생의 환幻들이다
다른 세상과 눈 맞출 궁리나 하면서
새끼 치고 싶은 욕망에 들끓는 짐승처럼
사십여 년 내리 굴려온 몸이
이제 나를 부리고 가겠다는 신호
혹시나, 우주 너머
잃어버린 나에게 건너가는 환지통은 아닐까
-「혹시나」부분
시인 함순례는 이제 남들이 내어놓은 길에서 벗어나 제 길을 걷기로 한 것 같다. 그의 길이 아니었던 것들, 소화해낼 수 없는 것들은 환幻이라는 걸 깨달은 것 같다. 그가 걷고자 하는 길이 “슬픈 낙타 발굽 소리와 모래바람의 숨통을”(「순례기」)여는 길이란 것을 신뢰한다. 사람의 마을을 지나 사람의 가슴으로 닿는 아름다운 길, 거기에 함순례가 다다르고 싶어 하는 절 한 채가 있다. 내 친구 함순례와 배낭을 번갈아 메면서 동행하고 싶다. 그곳에 함께 이르고 싶다.
사람의 마을을 지나 사람의 가슴으로 닿아야 하네
단칸 농막과 비탈밭이 스스로 방주를 이룬 곳
제 꼴대로 자란 두릅 더덕 당귀가 향기로운 곳
발 없는 생명이 저마다 빛나는 곳
무너진 몸을 추스른 무석이
자연의 곳간을 열어
수천의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곳
짧은 밤에도 매듭이 풀리고 굳은 피가 말랑해지는
이 절은 세상에 없는
내 마음에 지은 절이라네
-「무석사」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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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가을 강을 날아가는 백로의 흰 배가 물낯을 끌고 간다. 강함만리풍江含萬里風의 발생지다. 아픈 가슴을 쓸어내려 둥지에 닿는다. 백로 그림자가 조약돌이 된다. 시다. 함순례의 시를 읽는 것은 희고 둥근 조약돌을 만지는 일이다. 조약돌을 꺼내어 물기를 닦는다. 이끼가 막 돋아나고 있다. 볼과 눈두덩에 다슬기가 옮겨온다. 목덜미로 가슴팍으로 마침표가 돌아다니는 것 같다. 시인은 온몸을 펄떡여서 조약돌을 낳는다. 하늘의 새털구름과 백로의 깃털과 가을 물낯이 한통속으로 반짝인다. 시의 물너울이 조약돌이 된다. 흉터 없는 문장이 어디 있으랴. 물속 조약돌의 눈으로 백로를 올려다보면 지병으로 누운 병상의 시트 같다. 백로의 눈으로 조약돌을 굽어보면 마지막 알약 같다. 백로는 밤에도 검어지지 않는다. 깃에 흰 잉크를 찍어 물낯처럼 떨리는 가슴에 쓴다. 삶이라는 절창의 조약돌을 품고 함, 순례해보시라. 당신도 흰 그늘로 짝이 되리라. - 이정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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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례 시인∥
∙ 196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 1993년『시와 사회』로 등단해
∙ 시집『뜨거운 발』을 냈으며
∙ 한국작가회의와 리얼리스트 100 회원, ‘작은 詩앗 채송화’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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