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10월30일(일)맑음
하루 종일 쉬다. 제따와나 선원에 강의할 자료 정리하다. 동안거 동안 선원학생들을 위한 자습지침을 작성하다. 저녁에 강변을 산책하고 탑마트에서 시장을 봐오다.
2016년10월31일(월)맑음
초하루 법회를 봉행하다. 반야심경 20편을 합송하다. 회원들과 점심을 같이 하다. 저녁에 월수반 종강하다. 동안거 중에 자습할 것에 대해 이야기 하다. 마치고 다과를 들며 법담을 나누다. 학생 가운데 누군가 문병란 시인의 <호수>를 보내왔다.
호 수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더 가금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버린 다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그리운 그 사람은 누구일까? 부처님일까, 한용운의 님일까, 타고르의 님일까?
2016년11월1일(화)맑음
병원 진료가다. 한마음약국에서 약 타오다. 약사님이 4개월분으로 여유 있는 양을 준다. 등산화를 씻어 말리며 결제 준비를 하다. 화요 강의를 종강하다. 모두에게 자습하도록 과제를 주고, 명주 수건을 하나씩 목에 걸어주다. 끝나고 차담을 나누다.
2016년11월2일(수)맑음
제따와나 선원에서 강의하다. <사선정과 구차제정>에 대하여. 강의 끝나고 개포동 자이아파트에 사는 지월거사댁으로 택시타고 가다. 최윤영이 아파트까지 동행하다. 지월거사가 아들이야기, 시국이야기를 한다. 순실게이트로 국격이 땅에 떨어져 중국과의 사업프로젝트가 불투명해졌다 한다.
2016년11월3일(목)맑음
예술의 전당에 가서 오르세미술관전을 관람하다. 밀레의 이삭줍기와 낮잠을 보다. 덕수궁을 둘러보고 돌담길을 돌아 가을빛을 가슴에 새기다. 정민의 <우리한시 삼백수/오전절구>를 읽다. 오자와 번역이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여 이메일로 김영출판사에 보내다.
오경(吳慶, 1490~1558)의 <山中書事산중에서 일을 적다>가 기억난다.
雨過雲山濕, 우과운산습
泉鳴石竇漢; 천명석두한
秋風紅葉路, 추풍홍엽로
僧踏夕陽還. 승답석양환
비 지난 뒤 구름 산은 담뿍 젖었고
샘물 소리 돌확은 차고 시리다
가을바람 붉은 잎 아롱진 길에
스님은 석양 밟고 돌아오누나.
徐敬德(1489~1546)의 <大興洞에서>
紅樹暎山屛, 홍수영산병
碧溪瀉潭鏡; 벽계사담영
行吟玉界中, 행음옥계중
陡覺心淸淨. 두각심청정
붉게 물든 나무 산 병풍을 비추고
푸른 시내 못 거울로 쏟아지네,
옥 세계 속 읊조리며 거니니
마음은 청정하여라.
216년11월4일(금)맑음
관오사로 내려오다. 어머니를 오시게 하여 사경하고 기도하기를 당부하다. 저녁에 지우스님하고 목욕 다녀오다. 밤에 실상사 회주 도법스님이 와서 차를 나누며 대화를 하다. 경진, 혜진, 대견, 지우, 도연 스님이 합석하다. 도법스님의 불교관은 <본래부처 동체대비>이다. 그리고 그 불교관을 ‘피가 튀고 땀이 흐르는’ 현장에서 표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비행을 하자는 말은 좋다. 그러나 그 실천방법이 꼭 도법스님의 방식뿐일까? 도법스님의 실천방식이 과연 불교적일까? 그런데 내가 말하는 ‘불교적인 사회적 실천’이란 무엇인가? 도법스님의 불교관에서 그의 삶과 정치적 행보가 나왔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스님은 불교수행자라기보다는 사회운동가라고 보아진다. 그에게서 ‘꼭 불교라 이름 할 것’이 없이도 민중에 봉사할 수 있다면 그게 자기 할 일이라는 굳은 신념을 볼 수 있다. 그는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사회운동가 수준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불교학습과 수행보다는 사회적 실천이 우선이다. 불교교리 학습과 선정수행을 일종의 ‘지적 유희’라고 폄하한다. 그것은 그의 시대적 한계이며 개인적 역량의 한계이다. 사회참여로 사회정의가 완벽히 구현되고 지상천국이 건설된다면 불교가 필요 없어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회모순의 정치적 해결로 확보할 수 있는 인간의 행복이란 매우 제한적이다. 왜냐? 세상이 아무리 완전해진다 해도 욕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경험하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면제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기에 염오와 이욕과 출리로 발보리심하여 지혜와 자비를 더욱 더 닦아야 할 것이다. 사회적 실천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수행은 지극히 유물론적(Lokayata, Carvaka)이고 한계효용적이다. 물론 불자의 사회적 참여와 실천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의 학습과 수행, 출세간적 해탈과 균형이 잡혀야 한다. 그래야 세간적 참여와 출세간적 해탈이 상호보완 된다. 이것이 소위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여기에서 上과 下는 선후나 좌우가 아니라 양방향으로 동시진행형이다.
박근혜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민들의 집회 10만이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는 뉴스를 TV에서 보다.
권세를 믿고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은 스스로 바르게 갈 수가 없다. 그들은 권력이 주는 힘의 환상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사리사욕적 오용에 대한 사법적 처벌이 가능하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대중의 봉기가 일어날 것이다. 강풍에 납작 엎드렸던 들풀도 바람이 잦아지면 일제히 들고일어나듯. 가을달빛에 젖은 白頭山河여, 한바탕 큰 웃음소리에 천지가 놀라 깨어난다.
2016년11월6일(일)흐림
진주로 돌아오다. 회장단 모임과 저녁 같이 하다. 짐 싸서 산청 대성사로 가다.
2016년11월7일(월)흐림
서울로 출발. 남부터미널에서 전철 타고 의정부역에서 하차. 택시타고 봉선사 도착. 명고스님에게서 방 배정받다. 차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 도향스님은 내 옆방에 거처하시다. 서로 인사 나누고 저녁을 함께하다. 시국에 대해 이야기 하다. 돌아와 방 청소하고 짐 정리하다. 어둑어둑한 산 속, 고적한 맛이 배속까지 느껴진다. 늦가을저녁 비, 그것도 밤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봉선사는 1996년부터 이따금씩 객으로 와서 며칠씩 묵었던 절이라 낯설지 않은 곳이다. 봉황새가 깃을 접고 둥지에 깃들었다.
雲岳晩秋回, 운악만추회 운악산에 늦가을 돌아오니
老鳳歸巢來; 노봉귀소래 늙은 봉황새가 둥지로 찾아드니
今冬懷何物, 금동회하물 이번 겨울엔 무엇을 품을까?
內聖外慈世. 내성외자세 안으론 성심을, 밖으론 세상 향해 자비를.
국민의 의식수준이 정부의 질을 좌우한다. 해방 이래 친일잔재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북한에 대한 불안감을 치용하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경제개발논리를 통해 자기네 패거리의 이익을 챙겨왔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남북분단 고착화, 독재와 쿠데타, 재벌횡포와 가난의 대불림, 민생고와 민족정기 훼손이다. 우리가 정의로운 정부를 가지려면 우리의 정치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민주주의를 믿은 시민들이 연대하여 행동해야한다. 부정의 세력을 몰아내고 정의를 세워야한다. 부처님은 사회정의가 구현된 공화국을 칭찬하셨다.
2016년11월8일(화)맑음
날씨가 쌀쌀해졌다. 점심 먹고 도향스님과 함께 산속 오솔길을 올라가다. 가다보니 林道와 만나 계속 걷다. 색색의 낙엽이 깔린 길을 걷노라니 秋景山水畵 속의 인물이 된다. 모롱이를 따라 몇 번 굽이쳐 돌아가니 평지에 다다르다. 산림보호요원을 만났는데 여기는 일반 사람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여기는 광릉수목원구역이기 때문이란다. 철망을 넘어 차도로 나와서 계속 걷다. 도중에 光陵에 들러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유네스코문화재로 등재되었다는 설명을 듣다. 걸어서 절에 돌아오니 다리가 아프다.
2016년11월9일(수)맑음
아침 쌀쌀하다. 땅에 고인 물이 살풋 얼음이 얼은 것 같다. 버스타고 의정부역, 다시 전철 타고 제따와나 선원 가다. 강의하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날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고 한다. 설마 그 사람이 했던 것이 현실로 되어버렸다. 무엇이든지 조건만 맞으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진리이다.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세상을 연민히 여기고 자애를 보내는 것이 불자의 할 일이 아닌가? 국내의 정치상황은 또 어떤가? 친일잔재세력에 담합된 수구세력을 권좌에서 밀어내고 민중에 의한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원하는 정부를 이뤄내야 한다. 평화로운 민주혁명을 성취해야한다.
2016년11월10일(목)흐림
아침 먹고 의정부행 전철 타다. 의정부에서 몇 가지 물품 사가지고 돌아오다. 몸살기가 있어 무릎이 시리다. 늙은이들이 무릎이 시리다는 말을 흔히 하던데 이제사 몸으로 느끼게 되었으니, 내가 늙은이 축에 들어가는 것인가?
과학자들은 관찰의 객관성을 위해 주관을 배제해야한다고 믿었다. 특수상대성원리에 의하면 과학자가 주관을 배제해도 지구인이라는 편견은 남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관찰자가 있어야 관찰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일체의 주관성 배제한 중립이란 초현실적인 몽상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박근혜도 싫지만 야당도 싫다. 나는 국정농단도 싫지만 국정혼란도 원치 않는다고 하면 중도적이며 평화주의자처럼 보인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불자를 자처한다면 세상으로부터 초연한 평정을 지닌 듯이 보일 것이다. 그는 현 상황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양쪽을 떠난 방관자가 된 것이지 초연한 게 아니다. 兩非論者양비론자는 기회주의이다.
2016년11월11일(금)맑음
밤새 몸살로 아팠다. 점심 먹고 도향스님과 함께 진접읍내로 나가 현대병원에 들러 약처방을 받아 약을 사먹다. 이마트에 들어 물건을 사가지고 돌아오다. 圓璋원장스님이 입방했다. 곧 이어 明燮명섭스님이 들어왔다. 雲水客운수객이 서서히 모여든다. 마치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듯, 개울이 흘러 연못으로 모여들 듯. 무엇을 위해서 모여드는가? 부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이며, 성스러운 승가에 합류하기 위하여서이다. 그것은 보리도의 차제를 착실히 밟아 救世大悲願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보라! 대한민국의 문명의 전환을 예고하는 시민혁명이 진행 중이다. 광화문 광장 100만 민주시민 총궐기대회 자체가 세상의 질서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기존 체제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매우 불온한 세력으로 보이리라. 집회의 주제가 기존 질서의 붕괴와 새 질서의 출현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돈으로부터 새 질서의 출현’은 무생물로부터 생물, 개인의 두뇌로부터 인간사회에 걸쳐 두루 항시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제에 중독된 세력은 변화가 평형을 깨뜨리는 무질서이며 혼돈으로 이끌어 파멸에 이를 것처럼 불안을 조성한다. 그러나 사회현상도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혼돈으로부터 새 질서가 출현’하는 것이다. 새 질서를 가져올 혼돈은 기실 혼돈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샘’이다. 다가오는 새날에 새 의미의 샘물을 마실 대한민국은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보라! 하나의 떨림이 파도처럼 퍼져나간다. 하나의 펄럭임은 주변에 유사한 펄럭임을 만드는 공명을 일으킨다. 이러한 공명이 번지고 번져 거대한 공명의 교향곡으로 발전함으로써 새 질서가 출현하리라. 시민대중이여, 담대히 나아가라. 시민들의 창발적 집단지성은 자기조직화라는 매우 자연스러운 평형체계를 ‘혼돈의 가장자리’로 몰아가서, 혼돈의 가장자리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에는 이미 분기점을 넘어 새 질서가 정착될 것이다. 구질서에서 신질서가 발현하는 창조적 과정은 항상적으로 일어나며 그 과정의 주체는 당연히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