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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 말의 배일의병항쟁(排日義兵抗爭)과 독립군의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이끌며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운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이다. 러시아의 원동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그는 1868년 평양 외성리(外城里)에서 출생하였다고 전해진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란 그는 3년간 숙부 밑에서 지낸 뒤 이웃의 지주집에 들어사 머슴살이를 하였다. 그 후 홍범도는 고향을 떠나 각지를 전전하던 중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구면(水口面) 신현리(新峴里)의 어느 제지소에 노동자로 3년간 정착하게 된다.
1887년경 홍범도는 제지소 일을 그만두고 군인이 되고자 평양진위대(平壤鎭衛隊)에 입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총격술(銃擊術)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 한국 군대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군대 생활을 할 수가 없어 3년간 복무한 뒤 평양진위대를 탈영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때의 군대 생활은 이후 그가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어서 전술적인 도움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평양진위대를 떠난 홍범도는 얼마 동안 전전한 끝에 함경남도 단천으로 가서 금을 캐는 광산의 노동자로 2년간 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삼수 출신의 이씨(李氏)와 결혼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93년경에 다시 삼수로 이거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출중한 총격술을 바탕으로 직업적인 산포수 생활을 하였고, 얼마 뒤 다시 북청으로 이거, 그곳의 산포수 조직인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에 가입하여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포연대장(浦捐大將)에 뽑혔다. 이는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정하고 이것을 납부하는 일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의병항쟁을 시작할 때까지 14년 동안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에서 지낼 수가 있었다.
홍범도가 의병항쟁에 투신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1907년 9월 3일 일제(日帝)가 설치한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에서 공포한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級火藥類團束法)의 졸속한 시행에 있었다. '총포 및 화약류를 판매하는 자는 관찰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총포 및 화약류는 경찰관서의 인가를 받아야만 소유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법은 한국군 해산에 뒤이어 모든 한국인을 완전히 무장해제시켜 무력(武力)에 의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 경찰관으로 구성된 총기(銃器), 탄약(彈藥) 회수반이 함경도의 산포수들을 찾아와서 총기와 탄약의 납부를 요구한 것은 1907년 10월의 일이었다. 함경도 일대에서는 지역적 특성상 총기를 소지한 산포수들이 많았으므로 일제가 특히 신경을 쓰던 지역이었다. 이에 일제는 북청 각면의 면장들로 하여금 산포수들의 총기를 회수토록 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안산사포계의 동료들과 함께 일제의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즉각 항일투쟁(抗日鬪爭)을 벌였다.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安坪社) 엄방동(嚴方洞)에서 홍범도의 인솔하에 산포수들이 모여들어 거의(擧義)을 선언하고 일진회(一進會) 회원인 안산 면장 주도익(朱道翼)을 비롯한 인근의 부일배(附日輩)를 처단하였다.
70여명의 산포수를 근간으로 봉기한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점차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화전민, 토막민(土幕民) 등의 지원자를 받아들여 이듬해에는 병력이 1천여명에 달하는 대부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구한국군의 편제를 모방해서 병력을 개편하고, 군무를 관장하는 부서를 두어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 홍범도가 거느린 의병들은 1907년 11월 22일 후치령에서 일본군 무기수송대를 매복작전(埋伏作戰)으로 섬멸하고, 갑산으로부터 북청으로 향하던 우편마차 호위 일본군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다음 날에도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행군하던 일본군을 격파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러자 일본군 북청수비대(北靑守備隊)는 궁부(宮部) 대위(大衛)가 이끄는 2개 소대 병력을 후치령으로 급파하였으나, 홍범도 부대는 11월 25일에 후치령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역시 유리한 지형에서 유격전(遊擊戰)으로 일본군 40여명을 살상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후치령전투(厚峙嶺戰鬪)에서 이긴 홍범도 부대는 삼수, 갑산, 북청 등지에서 험산준령을 타며 유격전(遊擊戰)을 펼쳐 자신들을 추격해오는 일본군과 교전하여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었다. 홍범도가 거느린 의병들은 한때 삼수, 갑산을 차례로 점령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대승하기까지 하였다. 유격전에는 지역 주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홍범도 부대는 그곳 주민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군량을 조달하는 일이나 적군의 동정을 파악, 첩보 활동을 하는 일 등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부대이동을 신속히 하여 병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지휘관의 능력이 요구되는데, 홍범도는 정확한 판단력과 탁월한 통솔력으로 그러한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매전투마다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 의병수뇌부가 일제(日帝)이 회유공작에 말려들어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일제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무력(武力)만으로는 홍범도의 의병부대를 토벌할 수 없음을 깨닫고 갑산과 장진의 군수를 앞세워 의병들이 귀순해오면 1개월간의 무장해제 유예기간을 둔 뒤 아무런 조건없이 자유인의 신분을 보장하겠다는 제안을 해와, 의병수뇌부의 갈등을 빚어냈던 것이다. 홍범도는 이것이 일제의 간계임을 즉각 간파하고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차도선, 태양욱 등은 이러한 제안을 수락, 후일을 도모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의병들은 탄약과 군량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홍범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도선과 태양욱은 귀순을 원하는 부하 2백여명을 거느리고 1908년 3월 17일에 일본군에게 투항해 버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무장해제 유예기간 1개월의 약조를 지키기는 커녕 귀순한 의병들을 즉각 무장해제시키고, 태양욱을 총살한 뒤 차도선을 체포해 투옥하였다. 차도선은 그 뒤에 구치소를 탈출하여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고 홍볌도 휘하에 들어가 장진 부근에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차도선과 태양욱은 거의(擧義) 이후 홍범도와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해온 핵심인물들이었으므로, 이들의 귀순은 의병부대의 전력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와 항일전(抗日戰) 수행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이 무렵 일제(日帝)는 홍범도를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용범(龍範) 등 가족을 구류시켜 인질로 삼는 비열하고도 잔인한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홍범도는 구국대의(求國大義)를 위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기에 바빴다. 그의 가족은 끝내 일본 헌병들에 의해 희생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후 불굴의 투지로 의병부대의 재편성에 착수한 홍범도는 1908년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몸소 삼수, 갑산, 무산 북청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담하지 않은 산포수와 장정들을 권유하여 의병부대에 가담하게 했다. 또한 의병부대를 소규모 병력으로 나누어 이 지방의 각 마을에 내려가서 남은 무기를 수집하고 식량과 금품을 기부받아 군수물자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홍범도 부대는 5월 중순에 6백여명의 병력으로 증강되어 새로운 항일전(抗日戰)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홍범도는 1908년 4월부터 의병항쟁(義兵抗爭)을 재개하여 같은해 12월에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삼수, 갑산, 장진, 북청 등지를 오가며 각지에서 일본 군경(軍警)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일진회 회원들을 비롯한 부일배(附日輩)를 처단, 민족반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이제 그는 한반도 북부지방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 일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열렬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홍범도가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의기(義氣)를 드높이자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동부 및 북부 수비관구의 일본군 전병력을 동원하여 홍범도의 의병부대를 향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홍범도는 신속한 유격전(遊擊戰)을 효과적으로 펼쳐 일본군 대부대의 예봉을 피해가며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홍범도 부대는 전력이 점차 소모되어 갔다. 그 가운데서도 연이은 격전으로 인해 탄약(彈藥)이 점차 고갈되어 갔다는 사실은 홍범도의 의병항쟁에 가장 커다란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과의 대규모 접전을 피해 삼림 속으로 은신하기에 이른다. 이에 홍범도는 삼수, 갑산, 무산 등지의 삼림 속에 부하들을 잠복시켜 놓은 채 1908년 12월에 20여명만의 의병을 데리고 노령으로 이동하였다.
홍범도가 연해주로 건너간 것은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구입하는 일방, 연해주 일대의 의병부대 및 한반도 남부의 의병부대와도 연락을 취해 대규모 의병항쟁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없었다.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이 인솔하는 의병들이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벌이다가 일본군에게 패배한 뒤 연해주의 의병항쟁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의병규합 노력은 여건상 불리한 형편이었다.
홍범도는 1910년 3월 마침내 일단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장백현(長白縣)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안도현(安圖縣) 방면에다 20에이커에 달하는 광대한 개간지에 부하 수백명을 집단 이주시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항일전(抗日戰)을 준비하는 한편, 농사와 사냥으로 그 경비를 충당케 하였다. 둔전병(屯田兵) 제도와 흡사한 집단생활을 한 것이다. 홍범도는 1911년 3월에는 박영신(朴永信)이 이끄는 유격대를 함경북도 경원으로 보내 세천동에 있는 일본군 부대기지를 습격하게 하는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홍범도는 이듬해에 장백부에서 평안도 의병대장 채응언(蔡應彦)과 회동하고 심석만(沈石萬) 등을 국내에 밀파, 일본군 경비상황을 조사하게 하는 등 무장투쟁을 집요하게 벌였다.
그러나 홍범도의 왕개둔 근거지는 경제적인 압박을 심하게 받아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려워졌다. 이처럼 상황이 점차 약화되자 홍범도는 활동을 중단한 채 1913년 근거지를 노령 연해주로 옮겼다. 여기서 홍범도 일행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노동회(勞動會)를 조직하고 시베리아 철도부설공사 등 각종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의 적기(適期)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에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일어나 거족적인 반일기운이 일게 되자, 홍범도는 즉각 독립운동 군사단체 조직에 착수하여 그해 3월~6월 사이에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기에 이르렀고, 8월에는 간도의 백두산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홍범도가 총지휘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은 독립운동가들의 숙원이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전개해 두만강을 건너와 혜산진(惠山鎭)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무찔렀다. 이어 10월에는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에 진입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자성(慈城)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적병 70여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인 1920년 봄이 되자 대한독립군은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산된 독립군들을 하나로 통합,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에 홍범도는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의 군무위원 안무(安武)가 이끄는 군대와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를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과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새롭게 편성하고 화룡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6월 4일 새벽, 독립군 병사 30여명이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대 순찰소대를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자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소속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가 독립군을 추격했지만, 도리어 이들은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독립군의 매복작전(埋伏作戰)에 걸려들어 전멸당하고 말았다.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 패배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일제(日帝)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위치한 육군 제19사단 사령부에 간도의 독립군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두만강 수비를 담당하는 일본군 제19사단은 즉각 안천(安川) 소좌(少佐)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 북간도에 진입, 독립군을 포위하도록 하였다.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듯한 지형의 천연요새이고, 입구에서 오지까지는 25리로서 그 골짜기 입구로붙 하동, 중동, 상동의 마을이 30호~60호씩 몰려 있던 곳이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 추격대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봉오동의 주민을 대피시킨 뒤 험준한 사방 고지에 중대 병력을 매복하게 하여 적군을 유인, 일망타진(一網打盡)한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와 같은 독립군의 매복상황을 알지 못한 채, 일본군은 이화일(李化日) 분대와 교전하고 7일 오후 1시경에 완전히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홍범도는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고, 그동안 은인자중하여 매복해 있던 독립군 병사들은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일본군을 향해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신곡(神谷) 중대와 중서(中西)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결사적인 돌격전(突擊戰)을 시도하면서 기관총 중대로 하여금 응전하도록 하였으나, 지형적 우세를 등에 업고 무차별 총탄을 퍼붓는 독립군의 총공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독립군에게 포위되어 3시간 동안 저항하던 일본군 추격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립군의 강상모(姜尙模) 중대가 퇴각하는 적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다시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독립군 본영을 일거에 분탕하려던 일본군 제19사단 소속 안천(安川) 대대는 봉오동 계곡에다 엄청난 시체를 남겨 놓은 채 동남방의 비파동(琵琶洞)을 거쳐 유원진(柔遠鎭)으로 도망쳤다.
이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는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백여명의 적병을 부상하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에 그쳤을 뿐이다. 이 전투의 승리는 홍범도 휘하 독립군 장병들의 사기가 충천했음은 물론, 모든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홍범도는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를 치르고 나서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사령부를 떠나 약 3백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일제(日帝)가 간도 지역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가해오자 여러 독립군 부대는 1920년 8월부터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장정(長征)을 떠나게 되었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 제일 먼저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여 안도현(安圖縣) 방면의 백두산 기슭으로 행군하였고, 뒤이어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 군대, 의군부(義軍府) 등의 독립군도 이도구(二道構)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서일(徐一)과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도 왕청현(汪清縣) 서대파(西大坡)를 떠나 삼도구(三道構)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국민회의 지원을 받아가며 군사력 통합에 주력하는 한편, 간도 일대의 지리를 연구하며 독립군의 전력을 강화시켜 장차 있을 대일항전(對日抗戰)에 대비하였다.
한편, 일제(日帝)는 간도 지방에서의 독립운동 군사단체를 사멸(死滅)시키려는 전략으로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워 1920년 10월 2일 소위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일본군의 간도 출병 구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5개 사단에서 차출된 3만여명의 일본군 대병력이 동원되어 10월 7일부터 간도를 침입, 독립군을 향한 토벌작전(討伐作戰)을 펼쳤다. 그 가운데 일부의 병력인 동지대(東支隊) 1만 5천여명의 일본군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 주둔한 이도구(二道構)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주둔한 삼도구(三道構)로 진격해왔다.
그리하여 독립군 1천 3백여명과 일본군 1만 5천여명은 청산리 일대에서 서로 맞서 대접전(大接戰)을 벌이게 되었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사단(聯合師團)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마록구(馬鹿溝), 완루구(完樓溝), 어랑촌(漁郞村), 천보산(天寶山), 고동하곡(古洞河谷) 등에서 10회의 교전을 벌여 일본군 1천 6백여명을 살상하고, 많은 군복과 탄약을 노획하였다.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패배로 독립군 토벌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군은 간도에 거주하는 무고한 조선 민간인 2천여명을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켜 잔인한 보복살인을 자행하였다.
홍범도는 병력을 재정비하여 밀산(密山)을 지나 1921년 1월초에는 우수리강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들어갔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외에도 북로군정서, 국민회, 군무도독부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독립군 부대가 이곳으로 집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대소 독립군 지휘관들이 회동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총재에는 서일(徐一)이 추대되었으며, 홍범도 장군은 조성환(曺成煥), 김좌진(金佐鎭)과 더불어 부총재에 취임하여 군사작전을 실제 총지휘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만으로 들어간 대한독립군단은 그 후 다시 북진을 개시하여 알렉세호스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에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인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 발생하게 되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항일전(抗日戰) 재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홍범도는 이르크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한국인 집단 이주 정책으로 말미암아 8월 5일에 이르크츠크로 이송되었다.
항일전(抗日戰)의 상승장군(常勝將軍)으로 한국 교민들의 추앙을 받던 홍범도는 이때 소비에트 적군(赤軍)에게 병력과 무기를 빼앗기고 이제 아무런 군권도 갖지 못한 퇴역 노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즉 그는 민족해방유격대의 원로로서 예우만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22년 1월 22일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 상당한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뒤 총범도는 1922년 전반기에 다시 이만으로 돌아가 브라고웨시첸스크에서 이동휘(李東輝),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세우고 9월 1일에는 치타에서 민족대표자히의를 여는 등 한국인 사회의 자치활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7년에 홍범도(洪範圖)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스탈린의 한국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다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최후의 귀착지가 된 현재의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크주르오르다 지방에 정착, 집단농장에서 만년을 외로이 보내다가 1943년 작고해 그곳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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