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악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권력이 강할수록, 물질이 많을수록,
잃어버릴 것이 많을수록, 두려움도 더 커집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실존이
두려움이고 무엇으로도 그 빈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헤롯을 보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무엇이 그를 두렵게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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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걸작 ‘목 잘린 세례요한’은 작품 크기만 무려 502*361선치미터
에 달한다. 요한을 살해하는 모습이 담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림, 환락과
죄와 증오와 사랑, 분노와 탐욕이 뒤엉킨 드라마가 담긴 작품이 그곳에
있었다. 그림 아래쪽 중심에 희미하게 ‘I michel'이라는 서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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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의 장면이 너무 끔찍하여 성화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I michel'
은 카라바조의 이름으로, 그가 살인을 저지른 후 유일하게 작품에 남긴 서명
이라고 전해진다. (모든 작품 중 유일한 서명이라는 설도 있다)카라바조 연구
에 정통한 미술 사가는 그가 굳이 요한의 잘린 목에서 나온 피와 같은 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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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한 것은 로마에서 그 스스로 저질렀던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그의 피로
대속 받고 싶어 하는 심리의 반증이라며, 이는 다분히 카인 콤플렉스에 해당한
다고 설명했다.(김 병종,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너와 숲,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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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야! 달의 뒷면처럼 빛나는 재능에는 어두운 뒷면이 있나봐. 미켈란젤로와
견줄 만큼 명성이 자자했던 카라바조는 당대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가들에게
조소를 퍼부으면서 강렬한 소재와 기법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곤 했다고 해.
권력자의 비호 아래 작품 활동을 하던 그는 음주와 광기로 사고를 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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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살인까지 했어요. 살인 사건 이후, 그는 지중해의 작은 군도 몰타에
몸을 숨겼어. 카라바조는 거기에서도 대영주 알로프 데 비냐코트의 후원을
힘입어 작품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대. 자신의 죄 성을 덮을 만큼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성 제롬‘과 ’잠자는 큐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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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걸작을 연달아 그렸고, 인생 역작인 ’목 잘린 세례 요한‘을 그렸다고
해.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서명이 있는 유일한 작품이야. 그는 요한의 잘린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같은 색으로 서명을 하였어. 카라바조는 ’목 잘린
세례 요한‘을 그리면서 음주와 광기, 악마의 재능을 가진 천재 예술가는
감추고, 대신 죄와 용서와 구원을 갈구하는 한 사람을 새겨 넣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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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예공! 카라바조는 16세(1571-1610)기 이태리 사람이란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600년 로마
미술계에 갑자기 등단했는데 그 이후 그는 어떠한 수입이나 후원자도
없었으나 그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 천재적 재능과는 별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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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폭력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일상생활로 여러 사건사고에 휘말렸는데
그러다가 1606년 5월 29일 테니스 경기도중 말다툼 끝에 상대인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왔고 도피이후에도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켰는데 1608년 몰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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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다툼에, 1609년에 나폴리에서 또 다른 말다툼에 개입되었다. 이듬해인
1610년에 그의 10여 년간의 활동을 뒤로한 채 포르토 에콜레에서 사망
하였다. 예술가의 광기 같은 것은 부럽긴 하지만 패스하고 후원자 없이 성공
한 것에 주목해 보자. 카라바조는 당대 그림 이론, 데생, 유화와 프레스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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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법을 공부했으나, 특히 초상화와 정물화에 흥미를 보였다고 하더라.
카라바조의 부친이 건축을 했고 카라바조가 견습 생활 만년, 1588년부터
로마로 이사한 해인 1592년 여름까지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아마도
페테르차노 곁에서 실력을 갈고닦았거나, 또는 본인 스스로 작업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카라바조를 동성애자 라고 하는데 누구나 동성애 성향이 조금씩
있는 거 아닌가. 에에공! ‘목 잘린 세례요한‘텍스트를 참고 하기 바란다.
마14:1-12
대부분 문명권의 달력은 특정 시대나 인물을 근거로 만들어지지만 B. C.와
A. D.는 역사가들에게 항상 골치 아픈 문제, 즉 원년이 없다는 문제를 제기해
왔고 비판자들은 이것 때문에라도 기독교에 바탕을 둔 연대표기는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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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기원을 나누는 표기로 B. C.(Before Christ)와 A. D (라틴어
aino Domino)를 사용해 왔습니다. 이것은 수도원장이었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로마 교황 성 요한1세(514-523)에게 정확한 부활절 날짜를 짚어
주기 위해 처음 사용하면서부터 그레고리오 책력이 만들어질 때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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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졌는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탄생을B. C 4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인
것 같습니다. 헤롯대왕이 죽자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는 심사숙고 끝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쪼개서 헤롯 아켈로오에게는 유대, 이두매, 사마리아를,
둘째 헤롯 안티파스에게 갈릴리와 베레아를, 셋째 헤롯인 빌립에게 가이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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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아스와 드라고닛 등을 분할 통치하게 하였습니다. 세례요한 스캔들에 등장
하는 헤롯은 바로 둘째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3) 만약,
헤로디아가 헤롯의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가 분명하다면 시숙과 제수씨가 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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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고 산다는 말이 됩니다(햄릿 스토리 흡사). 그래서 세례요한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14:5)"고 도전한 것입니다. 갈릴리 지역의 분봉 왕 헤롯
안티바스는 예수님이 권능을 행하시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참수하여 죽인
요한이 부활했고, 그의 권능이 예수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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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요한을 가두고 죽임으로써 그를 침묵 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자신의 죄책
감은 침묵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대면하지 못할 때 예수
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한편 요한은 제사장의 후예임에도 타락한
성전에 머물지 않고 광야에 머물러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 하였고,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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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의 추악한 위선을 폭로하며 오금이 저리도록 심판을 선포했던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롯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을 체포할 때 호기를 부렸던 헤롯은 자기 세 치 혀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채 어린 딸에게 놀아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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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왕이면서도 백성을 두려워하여 요한을 죽이지 못한 나약한 왕이었습니다.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는 딸의 황당한 요구를 듣고는 의롭고 거룩한 선지자를
죽이는 것이 죄인 줄 알았기에 근심했지만, 결국 요한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질식시키고, 딸과 손님들 앞에서 알량한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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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선지자를 죽인 것입니다. 살다보면 천인공로 할 짓거리도 하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가장 큰 매력은 사죄의 은총
입니다. 하지만 처음 잘못했을 때 회개하고 청산하지 않으면 죄는 점점 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 때문에 '오픈이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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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 불륜 감추기는 세례요한과 백성들의 여론이 딜레마였다고 보여 지는데
이런 헤롯의 상황을 다 알고 등장하는 세상적인 대안이 바로 헤로디아의
지혜가 아닙니까? 나는 내 양심을 움직이는 주위의 경고를 들을 것인가,
마음에 맞는 헤로디아의 제안대로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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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헤롯의 두려움_
의로운 요한의 죽음_
한심한 헤롯의 살인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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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이 불륜을 감추기 위해 제2의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선생님들과 상담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옵소서.
에스더와 예주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시고 혹 잘못 했을 때 스스로 인정하고 돌이키도록 도와주옵소서.
2023.2.22.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