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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음이 누구 한 사람의 복음이 아니고 만민의 복음이기 때문에 기어코 만민에게 전파되고 말 때까지 전파될 것이다
왜 이런 복음이 6천년 동안 감춰져 있다가 하찮은 이 목사라는 사람에게 공개되었나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다.
유대인들은 능력 있는 메시아를 원했다. 왜냐면 신의 이름으로 온 모세가 4백 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왔다. 길도 없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이끌었다. 이것은 보통 능력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신화라고도 하지만 신화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무척 중요한 사건이다. 이것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역사가 없다. 유대인 회당에서 한 랍비가 이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아주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자기들은 그냥 아는 이야기가 아니고 큰 감동이다.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사실을 대대로 잊지 않고 전파해야 한다고 짧으면서도 충만하게 말하더라
우리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항상 능력 있는 메시아, 언젠가 이스라엘을 세계적인 나라로 만들어줄 메시아를 기다려왔다.
그런데 한가지 빠뜨린 게 있다. 그들은 유월절에 애굽을 떠났는데 방 안에서 문을 닫고 양의 고기를 먹고 문설주에 피를 발랐다. 방안에서 먹는 양 한 마리가 너무 많으면 이웃과 합쳐서 밤새 그것을 먹었고, 다음날 나왔다
이끌기는 모세가 이끌었지만 나오기는 양고기를 먹은 사람이 나왔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더라도 누가 이끌려 나오는가? 누가 앞장서 나오는가? 양고기를 먹은 사람이 나왔다.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밤에 집안에서 어린양 고기를 먹은 사람이 모세가 나가자 할 때 일제히 일어나서 나왔다. 이 사람들이 광야 40년 길을 따라왔다. 이것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것이 유월절이다.
그리고 다윗왕이 출생하기까지 상상 밖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 이스라엘 총회에 영원히 참석하지 못한다고 되어있는 모압 사람 룻이 다윗이 탄생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 사실을 그들이 까마득하게 빼버리고 능력 있는 왕 같은 메시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오늘날도 똑같다. 교회들은 모두 능력 있는 메시아를 원하고 있다. 능력 있는 목회자를 원하고 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를 바 없이 똑같다.
능력 있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 기도하면 응답해주는 그런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정반대였다. 우리가 볼 때 어떤 때는 신과 같고 어떤 때는 인간 같은 사람이었다.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는 다 달아나버렸다. 3년 반을 따라다닌 제자들이 먼저 달아나 버렸다
자기 자신도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지만 아무 응답도 받지 못했다. 그럼 이게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원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신은 신으로 사람은 사람으로 딱 갈라지는 자리다. 이게 잘못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다
신은 신이라야 하고 사람은 사람이라야 한다. 섞여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남자는 확실히 남자라야 하고 여자는 확실히 여자라야 한다. 남자가 여자도 되고 여자가 남자도 되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러니 지금까지 연합을 아무리 찾아도 안 되었다. 남자는 여자 같은 여자를 찾는 게 아니라 남자 같은 여자를 찾는다. 스스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여자는 그냥 남자를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남자를 찾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 점점 무산되어 없어져 가고 있는 시대다
여성의 남성화, 남성의 여성화가 되어서 결혼 안 하고 살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가는 게 아니라 거꾸로 가는 것이다. 이런 세대에서 이 복음이 나왔다. 그러니 정상적으로 들릴 리가 없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6천년 만에 이 복음을 선포한다고 하니 다 비웃고 있다. 여러분 외에는 다 비웃고 있다. 왜 내게 이 복음이 주어졌냐? 내가 위대해서도 아니고 믿음이 좋아서도 아니고 충성이 충만해서도 아니다. 나는 이 사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최선을 다해서 산다고 살았다. 그런데도 잘못한 게 생긴다.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게 있다. 언제 교회 앞에 완전히 까발려놓고 돌을 맞든지 하려고 생각했지만 또 한 쪽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려서 참고 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이것을 사방에 흘리고 다닌다. 그래서 알만한 사람은 대강 안다. 개인적으로 원수질 일도 없는데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맞불 작전을 펼 수도 없고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가 고관절 수술을 한지 1년 6개월인데 아직 걸음을 제대로 못 걷고 있다. 한편으로는 내가 당할 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안 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벌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그동안 알던 예수는 이 문제를 100% 해결해주지 못한다. 나를 다 용서해주시겠지 그렇게 믿지만 내가 그렇게 확실치 못하다. 그런데 이 복음이 아니면 내가 살아날 수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주고, 사람이 이것을 흘리고 돌아다니는데 차라리 한꺼번에 이야기해버리면 좋겠는데 목을 조이고 있다. 모든 것을 이것으로 막으려 하고 복음까지도 이것으로 막으려고 한다
그러니 내가 살아날 길은 이것밖에 없다. 모든 것을 떠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밖에는 나를 살릴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 복음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내가 잘나서가 절대 아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보면 가장 가난한 사람이 먼저 말씀을 듣는다. 뭔가 여유 있는 사람은 망설이고 조심한다. 이러다가 이단이라는 소리 들으면 어떡하나 한다.
아니 90 다 된 노인이 정상적이겠냐, 정신적으로 이상이 온 게 아니냐, 이런 사람도 있다. 다른 기억력은 다 쇠퇴하지만 내가 이 복음은 잊을 수 없다. 이 복음이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이 복음을 죽으나 사나 선포하는 것이다.
어제 즉문즉답 시간에 보니 간증이 마구 터져 나오는데 놀라웠다. 그런 자길이 형제가 이번에 오레곤에 초청받아서 일주일 동안 가게 된다. 그것도 그곳 사람 모두가 초청한 게 아니라 일부에서 초청해서 가게 되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오레곤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 전에도 했지만 또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민수기에 보면 어느 골짜기를 지나가는데 불평불만 하던 백성들이 독사에게 물려서 죽게 되었다. 그때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놓고 쳐다보면 산다고 했다
이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해석하는가? 여러 가지다. 구리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평불만 하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니 심판을 받아들이면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심판이 보통심판이 아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불만하고 원망하다가 걸린 죄니까 용서받기 어려운 죄다
두 번째, 어떤 사람은 그 구리 뱀은 독이 없는 뱀이다. 독이 없는 뱀을 쳐다보니 독이 빠져나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성경에 적혀있기를 쳐다본즉 다 나았다고 한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쳐다본즉 다 살았더라. 그리고 유명한 게 다음 구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이 성경 구절을 다 알 것이다. 유치원 때부터 외우던 성경 구절이고 성경 66권 중 가장 중요한 구절일 수 있다. ‘이처럼’ 어떻게 하면 이처럼인가?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했다는데 ‘이처럼’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을 성경에 찾아보니 이처럼은 감정적인 말이고 실제로는 ‘그와 같이’란 의미다. 그러니 ‘놋뱀과 같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쉽다.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다고 한다. 누구든지 놋뱀이신 그리스도를 쳐다보면 산다니 쉽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를 바라보면 사냐는 것이다.
십자가 바라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마다 십자가가 붙어 있다. 모두 십자가 십자가 하는 세상에 참된 구원이 있는가? 없다. 뱀에 물린 독이 그냥 작용하고 있다. 여러분도 다 해봤다.
이번에 유영혜 자매가 아주 유명한 말을 했다. 자기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불순종하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해도 시험이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인이 다 그렇다. 충성으로 살겠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겠다고 하는데 시험이 온다. 그러면 넘어지고 시험이 오면 또 넘어지고. 이것이 지금 신앙생활이다
중세 기독교의 유명한 작품이 천로역정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골목골목 감춰져 있는 그 시험을 극복하고 극복해서 올라가는 곳이 천성이다. 마지막에 천성문에 도착했는데, 아뿔사 사자 한 마리가 버티고 있다.
거기를 통과하려면 이 사자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통과해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서 믿음이 필요하다. 믿고 들어가야 한다는데 어떤 믿음이 그것을 이길만한 믿음이 있겠는가. 사자를 통과해야 하는데 믿음으로 통과할 사람이 있겠는가.
조련사들이 호랑이나 사자를 키울 때 밥을 주면 덥석덥석 받아먹는다. 그런데 닿으면 찌릿 하는 전자봉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사람에게 덤벼들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죽는다. 그렇게 무서운 짐승ㆍ이다.
전에 조련사가 죽은 경우가 있다. 순식간에 덤벼들어서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밥 주던 사람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이 짐승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은 짐승들인데 세상의 왕들을 가리켜 666이라고 했다
세상은 강자를 찾고 있지만 강자는 결국 약자를 잡아먹는다. 약자를 잡아먹고 강자가 된다. 약자를 잡아먹지 않고는 강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강자를 원하고 있다. 강자가 와서 자기들을 구원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될 리가 없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은 그게 아니고 어린양의 고기가 인도했다. 그 고기를 먹어야 애급을 나올 수 있었다.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데 그래도 안 돼서 애급에서 낳은 사람은 죽고 새로 태어난 사람만 가나안땅에 들어갔다.
사람이 얼마나 완악하고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지고 대화가 안 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더군다나 다말의 후손, 여리고성 기생의 후손, 모압여자 룻의 후손이 왕이 된다는 것 상상도 할 수 없다.
이것을 해석할 사람이 없다. 다윗왕은 하늘에서 뚝떨어진 사람으로 생각한다. 예수도 그런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예수는 내 문제 하나도 깔끔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더라.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짊어지고 갈 사람인데 마지막 복음, 내게 보여준 마지막 선물인 예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예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예수를 말해왔다. 그랬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못했다. 여러분 미안하다.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여러분을 고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고생 안 시켰다. 내가 먹고 소화된 것을 내놓았으니 우리 교회 와서 고생한 사람은 없다. 다 잘 지냈다.
그런데 마지막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내가 그대로 죽었으면 여러분은 아무도 마지막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여러분에게 길을 인도하다가 만 사람이 되고 모세가 되고 만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를 살리려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다.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다. 여러분에게도 주신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이것이 축복이다
내게 준 선물이 왜 여러분에게도 선물이 되는가? 여러분도 나와 같은 사람이니 십자가에 못 박히며 내려오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가 된다. 예수와 내가 하나 될 자리가 아무데도 없다.
여러분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이 있겠지만, 아무리 잘 믿어도 하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는 하나다. 나도 그 사람 여러분도 그 사람이다. 인류 가운데 그렇지 않은 사람 아무도 없다. 단지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누가 십자가에 매달면 내려올 사람이 있겠는가? 과연 있을까? 아무도 그럴 사람 없다. 러시아의 푸틴은 30년을 독재하고 있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다 없애버려서 더 이상 도전자가 없단다
중국의 시진핑도 3기 집권을 하고 있다. 보통 10년씩 신사적으로 바꾸던 그런 중국이 세 번째 연임하고 있고 독재가 더 강화되고 있단다. 어지간한 교회들은 다 없어지고, 삼자교회라고 정부에서 인정한 교회가 있는데 거기도 핍박이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결국 기독교는 중국에서 추방될 것 같다. 공산주의 외에 다른 주의가 있으면 안 된다 두 개가 공존할 수 없다. 예수도 있고 독재자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는 그런 세계 속에 와있다. 여기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복음이 우리에게 왔다. 여러분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다. 그렇게 재고 있어 봐야 헛일이다. 내려오냐 못 내려오냐 그것만 알면 된다. 여기서 무엇을 재고 있겠는가.
아니 내려올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데 무엇을 재고 있겠는가. 혹시 이 중에서도 ‘그래도 나는 아니야’ 그럴 사람 있는가? 있으면 용감하게 한번 손들어 보라.
그 자리에서는 눅두도 자신 없다. 자신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이다. 예수만인 줄 알지만 예수만이 아니다. 그게 나다. 그 예수 안에 내가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도 그렇다. 누구든지 안 그렇다는 사람 있으면 NO 하고 나가면 된다.
나가서 열심히 해보고 안 되면 다시 오면 된다. 다시 못올 곳이 아니니까 언제든지 안 되면 다시 오면 된다
그러니까 쉽다. 이미 돼 있는 것을 내가 시인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어떻게 ‘이처럼'인가? 장대에 달린 뱀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면 산다고 한 것처럼,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셨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으로 느껴지는가? 장대에 뱀을 달아놓고 쳐다보면 산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으로 느껴지는가? 그다음 구절이 ‘독생자를 주셨으니’다. 독생자를 얼른 생각하면 유일하겠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꼭 그런 의미가 아니다.
독생자, 모노게네스. 우리가 ‘모노’라는 말을 쓴다. 사운드에서 모노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 사람밖에 없는’ 그런 뜻이다. 진실한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다는 뜻이다
만일 예수가 그 위치에 없었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래서 모두 버렸다. 우리가 아는 예수는 못 내려오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나보고 말하기를 ‘내려올 수 없는’ 이 말을 빼버리면 좋겠다고 한다. 자기가 이 말이 싫다는 것이다. 자기 주님이 그런 분이란 걸 시인하기 싫어서 그렇다. 이말만 빼면 좋겠는데 왜 그 말을 집어넣었냐고 한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네가 그 말을 안 하면 내가 그만하겠다고 했다. 빼달라는 말을 안 하면 내가 그만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예수라는 구원자는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자라야 한다는 생각이 박혀있다.
그러면 그것은 천사를 기다리는 것이다. 천사는 죽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다 죽는다. 이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다. 천사 같지 않은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다.
우리는 여기서 착각이 일어난다. 천사 같은 사람이라야 나를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은 착각이다. 천사 같은 사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런 천사 같은 사람이 좋으면 천사의 종이 된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천사 같은 사람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 내려올 수 없는 사람, 이 사람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이다. 천사 같은 사람 안에는 내가 없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내가 없다.
믿음이 너무 좋은 사람도 있다. 평생동안 기도해서 5만 번 응답받았다는 사람도 있다. 보통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은 기도만 하면 그대로 된다고 한다. 그런 사람을 나도 봤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기는 오늘 5만 원이 필요하면 ‘아부지예 5만 원’ 이러면 5만 원이 들어온단다. 2만 원 필요하면 ‘아부지예 2만 원’ 그러면 2만 원이 들어온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다가 그러지 않은 세계에 오니 앞이 막힌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도 안된다. 하나님의 말을 직접 들었는데 사람의 말을 듣겠는가.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듣는 게 복음이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만 하면 응답 된다는 사람도 오기 어렵고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도 역시 오기 불가능하다.
그러면 뭐냐?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사람, 이 사람에게 말씀이 들린다. 그러니 역설이다. 종교적인 열등생이 이 안에 오면 우등생이 된다. 여러분 여기서 박수 치는 사람들은 다 종교적인 열등생들이다.
그리고 이 복음 안에서만 우등생들이다. 달려가다가 뒤로 돌아! 하니까 꼴찌가 일등 된다. 꼭 그와 같은 격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잘날 이유도 없고 남보다 더 나을 이유도 없다.
경기장에 가면 달음질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보통은 달리기를 잘하나 못하나 다 비슷하다. 우리 은혜는 몸이 보기보다 빠르다. 스타트는 잘하는데 힘이 없어서 일등을 못한다. 처음에 스타트해서 잘 나갔다가 점점 뒤로 쳐진다.
그런데 우리 화평이는 처음부터 달음질이 안 된다. 그래서 초등학교 다닐 때 늘 꼴찌 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나서 이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 오늘 이 복음 안에서는 우등생도 없고 열등생도 없다. 이게 얼마나 좋은가. 아니 이것을 시시하다고 생각하면 유명한 곳에 가봐라.
나는 영감이고 공부한 것도 많지 않고 알고 보면 정말 시시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까지 와 있지 은혜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고 실재로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다 실수까지 해 버리니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과거가 물건 같으면 다 던져버리고 싶다. 어디 쓰레기통에 다 버려서 태워버리고 싶다. 그런데 없어지지 않는다.
이 복음 외에는 나를 살릴 복음이 없다. 여러분들은 이 복음 아니라도 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복음이 아니면 살 수 없다. 그래서 내 몫이 된 것이다. 내가 위대해서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신이 없는 나를 그렇게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지금까지 온 길이 그렇다. 그래서 내 목을 조를 사람은 조르고 발로 찰 사람은 차고 그렇게 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게 다른 길을 주셨다. 무식하다고 나에게 경고해준 그것 때문에 나는 오히려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사실로서의 예수를 만나게 됐다. 나를 존경했더라면 그 말이 나올 리 없다. 내가 워낙 모르는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나에게 귀뜸해 준 것이다.
지금 목사님이 말하고 있는 예수는 신화로 포장된 예수입니다. 그때 그렇게 말해줬다. 그 말은 나보고 주의하라는 말이다. 자기의 지식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신화적인 예수를 붙들고 있었구나. 그러면 신화가 아닌 사실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찾아온 것이 지금 이 자리다. 찾아와보니까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고 죽은 사람이다.
아주 간단하다. 사람이니까 그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종교에 젖은 생각을 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해봐라.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는 것이지 어떻게 살겠는가.
그 자리에서, 나는 다른 예수는 모르지만 그 예수는 알 수 있다. 나와 같은 예수, 손잡을 수 있는 예수, 그 안에 내가 있고 내가 그 안에 있는 그 예수를 만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옛날에 예수를 알았다고 할 때보다 지금은 차원이 달라졌다. 사실은 내가 얘기를 이미 다 했다. 운명에 대해서, 위치에 대해서, 인격에 대해서 다 얘기했다.
누가 그러더라. 옛날에 양문회지 발간할 그때부터 그 말을 했다고 한다. 양문회지 발간한 때가 언제인가? 지금 우리 교회에서 52년생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대학교 1학년 때다.
그때 했던 말에 다 있다. 다 있는데 확실하지 못했던 것이다. 핀포인트가 안 맞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핀포인트가 딱 맞는 자리를 만났다. 바로 이 사람이다. 인격 하면 바로 이 사람이다. 운명하면 바로 이 사람이다. 바로 이 사람이니 너무 쉬워졌다.
여러분도 신앙적인 고민을 해본 사람이라면 유영혜 같은 얘기를 안 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사람이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했다는 것이고 그냥 문화생활로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다시 신앙생활을 해봐라. 그러면 유영혜가 하는 말이 맞는 말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는 유영혜를 어떻게 아는가? 나도 그렇게 해봤으니까 아는 것이다. 결심했는데 안 된다.
그날 유영혜 자매가 한 말이 명언이었다. 결심했는데 안 되더라는 것이다. 나도 결심했는데 안 되었다. 내가 더 잘 안다. 그래서 내가 유영혜에게 그랬다. 한 방에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내가 하는 말을 듣겠냐고 하니까 처음에는 어영부영하더라. 그러더니 해보라 해서 내가 한방에 얘기했더니 바로 알아들었다.
유영혜 자매가 어떤 사람이냐면, 효대 약대를 졸업할 때 효대 학생들은 약사 시험을 보기 한 달 전에 합숙 훈련을 한다. 그런데 합숙하는 곳에 안 가겠다는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뚱뚱하지 않았다. 다리는 절지만 날씬했다.
그 아버지가 아주 대단한 분이다. 온건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장로님이다. 얼마나 존경을 받았냐면 계대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사장까지 했다. 계명대학교 이사장으로 양쪽을 조정하고 해결을 하신 분이다.
그렇게 인망이 좋은 분이신데 아무리 딸을 설득해도 안 된다. 시내에 데리고 나와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가보니까 그러고 있다. 영혜는 내가 약사가 되려고 공부했나? 나 약사 안 한다. 이러고 있다.
생각해보라. 부모가 4년간 약대 공부를 시켰는데 시험 보는 마지막 자리에 가서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하니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아버지가 나에게 말하기를,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유영혜에게 그랬다. 너는 약사 자격증이 필요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그거 하나 있으면 정말 잘 쓰겠는데 나를 위해서 한번 해줄 수 없겠냐? 그랬더니 즉석에서 ‘그러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대답한다. 그래서 합숙하고 대번에 합격했다.
머리가 대단히 좋은 집안이다. 남동생 하나도 서울대학교 갔고, 여동생 하나는 경대 전자공학과에 유일하게 여자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경북여고 1등 졸업생이다. 천재적인 집안이다.
그태 영혜가 ‘그러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했다. 그래서 나는 영혜 자매가 뚱뚱해서 미워하지 그 외에는 미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살만 좀 빼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된다. 왜냐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먹는 것으로 해결하다가 살이 쪘다.
이제는 식구가 많아져서 안 먹고는 못 견딘다. 살이 찌면 문제가 세포가 많아진다. 그러면 식구가 많아져서 양식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조금만 안 먹으면 어지럽고 행동을 못 한다. 그런 지경에 와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한 방에 해결할 길을 얘기하니까 ‘그러면 살겠습니다’ 한다. 그래서 이번에 오레곤에 초청을 받은 것이다. 이런 자매다. 우리가 보기에는 답답하다. 올 때마다 먹는 것을 한 보따리 들고 온다. 자길 형제가 사는데 얼마나 괴롭겠는가. 아무리 말해도 안 듣는다. 이번에 오레곤 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있다. ‘그러면 해보겠습니다’ 자기에게는 필요 없지만, ‘목사님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해보겠습니다’ 나는 그것을 잊을 수 없다. 한 가지만 알면 된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한 가지는 알아야 한다.
다른 것은 많이 아는데 이 한 가지를 모르면 아무것도 안 된다. 다 아는데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죽는데 그 사람이 나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다 모르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특이한 점이 그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인도하겠다.
이러니까 빌립이 선뜻 말하기를 어떤 길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서울에 가면 아파트가 있는데 아파트를 마련하면 내가 너를 데리러 오겠다. 그러니 뭘 타고 가면 됩니까? 어느 길로 가면 됩니까? 촌놈이 묻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때 대답이 그렇다. 내가 곧 그 길이라고 한다. 이런 대답을 한 사람은 역사적으로 예수밖에 없다. 공자님도 그렇게 대답을 못 한다. 석가모니도 그렇게 대답을 못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라. 그렇게는 말할 수 있지만 내가 곧 그 길이라고는 말을 못 한다. 예수만 그렇다.
이 예수를 알려면 바로 그분을 알아야 예수를 아는 것이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길을 안다고 해서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길을 가르쳐 줘도 우리는 갈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니까.
요즘 누가 마가복음을 한다고 떠들고 다닌다. 어록만 모아서 두껍게 책을 해서 다니는데 백 말을 들어봐도 소용이 없다. 그 사람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을 알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다.
우리 교회 엠지 세대를 보라. 그 세대가 성경을 아는가? 아니면 과정을 거쳤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만나면 즉시 하나가 된다. 나도 지금도 그것을 모른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과정을 거쳐서 알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거기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면 진실하다. 교리를 배워서 한 말이 아니고 신학을 배워서 한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주의 깊게 본다. 저것이 진실한가 아닌가를 보는데 진실하다.
진실이 중요하지 신학이 중요한가? 과정이 중요한가? 우리가 과정을 겪었다면 이 자리에 오기 위해서 겪은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과정 없이 통과한 사람들이다.
감을 심어보면 처음에 잎이 나서 씹어보면 감 맛이 나고 감 냄새가 난다. 꽃이 피어도 감 냄새가 난다. 그런데 감이 열리고 나면 떫어서 못 먹는다. 그래서 에이 못 먹겠다 하고 가버린 사람은 감을 못 먹는다. 끝까지 어쩔 수 없이 기다린 사람은 홍시를 먹게 된다.
여러분 단감이 익으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아니다. 단감은 홍시가 되면 더 맛이 없다. 어떤 감이 익으면 더 단가? 떫은 감이 홍시가 될 때 진짜로 달다. 참 이상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못 먹는다고 했던 그 감이 익으면 그때는 단감보다 훨씬 달아진다.
예수도 비슷하다. 못 먹겠다고 했던 예수가 먹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는 어떤 감도 그보다 달 수 없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익은 감만 먹었으니 감나무를 모른다. 어떻게 자랐는지 모른다.
서울 아이들이 쌀이 나무에서 나는지 풀에서 나는지 모른다고 한다. 쌀만 먹어봤지 언제 농사짓는 것을 봤겠는가. 우리는 시골에 살아서 농사짓는 것을 다 봤다. 그러면 농사짓는 것을 다 봤다고 쌀을 더 잘 먹는가? 전혀 관계가 없다. 몰라도 먹는 데는 전혀 지장 없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교회 다닌 지도 얼마 안 되고 성경도 잘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과정을 거쳤다는데 나는 그런 것도 없고 내가 언제 알겠나? 이런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과정 거친 얘기만 계속하는 사람이 있다. 이거 정말 이상한 세계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과정을 거쳐서 왔는데 너희가 뭘 안다고 그러냐? 또 이런 사람이 있다.
이것은 딴판이다. 완전히 딴판이다. 여러분 여기서 환상을 벗어나야 한다. 내가 과정을 거쳤다는 것도 벗어나야 하고 내가 성경을 전혀 모른다는 것도 벗어나야 한다. 성경에 있으니까 진리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성경은 진리를 증거 하려고 있는 책이지 그것 자체가 진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알면 성경도 알고 다 알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나처럼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사랑하사’ 했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사랑했는가? 아니야 하나님이 사랑은 특이하지, 아가페니까 특이하지. 막연하게 생각하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와같이’ 그 말이다. 장대에 달린 뱀을 보면 산다고 했던 것과 같이, 그 말이다. 오늘 우리가 장대에 달린 예수를 보면 즉시 알게 된다.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너무너무 쉬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안 받아들인다. 너무 쉬운 것을 안 받아들이고 어려운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어려운 것을 받아들여서 되면 자기 의가 생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홍시를 먹었으면 자기 의가 없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는가. 이렇게 감을 먹는다는 그것밖에 없다.
요즘 엠지 세대 아이들이 하는 말이 그 얘기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과정은 전혀 모른다. 홍시가 무지무지 달다는 이것밖에 모른다. 그래도 먹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먹고 나서 다음에 알아도 될 일들이다. 먹고 난 후에 시간이 있으면 알아보면 된다. 어떤 과정으로 여기까지 왔는가를 알고 싶으면 그것이 학문이다. 그러면 찾아보면 된다.
이 복음은 아주 어려운 것 같은데 어려운 게 아니다. 아주 쉬운 복음이다. 보면 된다. 무식하나 유식하나 보면 된다. 어젯밤에도 신현영 형제가 마지막에 나와서 간증하더라. 아무것도 배운 것 없고 일자무식이다. 그런데 말하는데 들어보니까 너무너무 확실하게 알고 있다.
이것이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 확실하다. 그래서 이것이 신비한 복음이고 감춰져 있는 복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제저녁에 보니까 난리더라. 처음 왔던 그 자매도 말씀을 듣더니 눈물을 흘린다. 그럴 수도 있고 계속 들어도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올 수 없다. 이래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 오늘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이 사람을 받아들이면, 믿음이라는 말이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Believe in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말라 죽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생을 얻게 된다. 영생은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