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암각문연구회(회장 홍순석 강남대 명예교수)와 장흥문화원(원장 고영천)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장흥 암각문 발굴조사에서 54건의 암각문 현장을 찾아 실측, 탁본, 영상촬영 등을 마쳤다. 이중 부산면 수리봉 정상 바위에서 1910년(庚戌) 한일합병의 국치 소식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는 회은(悔隱) 위원량(魏元良 1882~1945) 선생의 "망곡서(望哭書)"를 발굴하여 학계와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회은 위원량 선생의 행적과 관련하여 1.부산면 기동리, 2.부산면 유량리 행정복지센터 앞 3세 효열각과 실적비·선행비, 3.장흥읍 평화리 회주사(懷州祠)의 강당 백산재(栢山齋), 4.부산면 구룡마을 옛집 흔적, 5.부산면 자미마을 뒤 묘소 등 선생의 흔적을 찾아 문중 차원에서 고찰(考察)의 기회를 갖고자 한다.
1.부산면 기동마을
장흥읍 건산리 예양강변 장흥교 오거리 인터체인지에서 장흥대로를 이용하여 부산면 소재지 방향으로 4.7km 가량 가다보면 부산사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우회전 한 후 약 1km 가다보면 예양강 다리건너 산 아래에 기동마을이 위치한다.
장흥위씨 20세 성균진사 당곡(唐谷) 위곤(魏鯤 1515~1582)의 셋째 아들 운암(雲巖) 위덕관(魏德寬 1547~1628)이 부산면 내안리 거주 영광인 성균진사 운곡(雲谷) 김귀명(金龜命 1517~?)의 둘째 딸이자 월봉(月峯) 김광원(金光遠 1478~1550) 선생의 손녀와 혼인하였다. 47세가 되던 1593년 전란 중에 관산읍 당동에서 처가와 근거리인 기동마을에 입향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번손하여 한때 120여 호로 성촌되고 우주항공학의 선구자 한죽(寒竹) 위상규(魏祥奎 1926~2008) 박사 등 15명의 박사를 배출하였다.
회은 선생은 기동마을에서 1882년 1월 15일 父 경은(耕隱) 위계선(魏啓善 1858~1917)과 母 인천이씨 사이에서 3남 1여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지역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천석꾼이라 불리었고, 근검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구제하여 향촌에서 신망이 두터웠으며, 가문은 전통적 유학을 중시하였다. 연재(淵齋) 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난 족조 만회공(國采 1846~1921), 족숙 행은공(啓勳 1866~1942)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뛰어나면서 금석문에 관심이 특별하였다. 성품은 강직하고, 부모의 근검한 생활과 남을 돕는 선행을 보고자라 몸소 실천하였다. 노년에는 수리봉 아래 구룡마을에 새로운 주거지와 별장 송암정(松岩亭 별칭 詠而樓)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기동마을 앞 예양강 주변에 10대조 소옹(笑翁) 위정호(魏廷灝 1582~1647) 선생이 지은 소옹정(笑翁亭)이 위치했었고,
1912년(壬子) 행은(杏隱) 위계훈 선생이 경치가 수려한 곳에 경호정(鏡湖亭)을 지어 수많은 시인묵객이 찾아와 수창하며 반촌의 풍류를 자아냈다.
1964년 운암종중에서는 경호정의 규모가 작아 불편이 따르자 선생이 별세한 후 방치되어 있는 정자를 매입, 해체하여 옮겨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암유장(雲巖遺庄)의 대표적 건물인 경호정에는 영이루 등 18점의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2018년 10월 30일 장흥군 향토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