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을 가꾸는 사람/靑石 전성훈
청초한 모습의 소녀가 ‘안개’라는 노래를 애절하게 부르더니, 세월 따라 농익은 과일이 터질 듯한 중년 여인의 짙은 향내를 풍기며, ‘꽃밭에서’라는 노래를 무심한 듯이 부른 게 오래전 옛날이야기다. 몸담아 사는 창동 주공아파트에는 동마다 화단이 있다. 꽃밭에는 화초와 꽃나무와 잡초가 함께 뒤섞어 산다. 꽃이 피는 순서는 철마다 다르다. 올해가 이곳으로 이사 온 지 만 29년째다. 그동안 아파트 단지를 걷거나 산책할 때 꽃밭을 들여다보기는 해도, 꽃들과 눈으로 대화를 하거나 물을 주거나 한 적은 없다. 계절 따라 아름답게 피는 꽃들이 고마워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본다.
계절은 뭐니 뭐니 해도 추운 겨울에서 봄이 가까워지며 시작되는 것 같다. 봄이 온다고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해주는 꽃은 매화이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사군자’의 하나인 매화는 올곧은 선비나 군자의 꺾이지 않는 절개와 기개를 상징하는 꽃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겨울 막바지인 3월 초순 무렵 핀 흰색 또는 분홍색의 ‘설중매’는 더욱더 고고한 향기를 풍긴다. 이때 즈음이면 봄의 전령 개나리도 수줍은 듯이 고개를 내민다. 따사로움을 전해주며 손에 넣고 싶을 만큼 작고 예쁜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노란 개나리가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손을 흔든다. 개나리꽃이 피면 그 옆에는 노란 산수유가 멋지게 단장을 하고 외출 채비를 한다. 마을을 온통 뒤덮어 산수유 마을이라 불리는 구례, 의성, 이천 그리고 양평 산수유 마을에 언젠간 한 번쯤 가보고 싶다. 산수유가 손짓하면 지구온난화 탓에 철 이른 흰색과 보라색의 목련꽃이 핀다. 목련은 우리나라 성인이면 모두가 아는 가곡 ‘목련화’로 더 정겹게 느껴진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다가 그 역할을 끝내고 땅으로 떨어진 꽃잎은 삼사일 지나면 바라보기 역겨울 정도로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화무십일홍’이라는 옛말이 딱 알맞은 표현이다. 알레르기 비염에 좋다는 민간요법에 따라, 보라색 목련 꽃봉오리를 따다가 커다란 주전자에 물과 함께 넣고 끓여서 달인 쓴 물을 마셨던 경험이 있다. 봄꽃의 여왕은 누가 뭐라고 해도 벚꽃이다. 온 산하를 연분홍색으로 또는 하얗게 물들이는 벚꽃은 많은 여심(女心)을 자극하여 봄바람 따라서 저도 모르게 길을 나서게 한다. 목련이 피고 지면 철쭉과 진달래 그리고 영산홍이 서로 경쟁하듯이 피어난다. 철쭉과 진달래는 얼핏 봐서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진달래는 진한 분홍색 꽃이 먼저 피고, 철쭉은 잎과 꽃이 함께 나온다. 진달래는 참꽃, 철쭉은 개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식물 이름에 ‘참’이 붙으면 먹을 수 있고, ‘개’가 붙으면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진달래는 4월, 철쭉은 5월에 피고 영산홍은 철쭉보다 조금 일찍 핀다. 영산홍의 꽃잎은 철쭉보다 작고 한 가지에 한 송이씩 피어 섬세한 느낌을 주고, 반면에 철쭉은 더 큰 꽃차례를 이루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꽃차례는 꽃 피는 식물의 꽃이 피어있는 생김새를 말한다. 이때쯤이면 이팝나무에 흰쌀이 무성하게 달린다. 아파트 단지에 이팝나무를 왜 심었는지 모르지만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저 꽃을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이팝나무와 더불어 온 꽃밭을 붉게 물들이는 계절의 여왕,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다. 이제는 봄도 사라지고 초여름이 우리 곁에서 슬슬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이다.
여름을 상징하는 3대 꽃나무는 ‘무궁화, 자귀나무, 배롱나무’이다. 사당이나 향교, 서원에 가면 은행나무와 배롱나무가 있다. 절에도 배롱나무가 흔하다. 우리 아파트에도 여름철에는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붉은색 꽃을 피운다. 붉은색 배롱나무 꽃말은 ‘부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고 흰배롱나무 꽃말은 '수다스러움, 웅변, 꿈, 행복'이라고 한다. 요즈음은 쉽게 보기 힘든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깨꽃도 때가 되면 스스로 피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도 핀다. 늘 화단에 정성껏 물을 주거나 잡초를 뽑으며 가꾸는 여성이 몇 분 계시다. 그런가 하면 집안에서 키우던 화분을 봄철에서 늦은 가을까지 바깥에 내어놓는 모습도 보인다. 화분에 어느 동 몇 호라는 표시를 한 명찰이 붙어있다. 간혹 화단에 내어놓았던 화분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꽃밭을 구경하고 있으면 간혹 벌과 나비가 찾아와 몸과 다리에 꽃가루를 묻혀서 다른 꽃에 전달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꽃을 가꾸는 사람의 마음을 색깔로 표현하면 노란색이 어울릴 것 같다. 노란색은 밝고 활기찬 색으로 다양한 의미와 상징성을 가지고 있고, 문화적인 관습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노란색은 밝음과 활기, 행복과 기쁨, 활력과 창의성, 태양과 따뜻함, 주의와 경고의 뜻이 있고, 어떤 문화권에서는 부자와 풍요, 신성과 황금, 기회와 성장, 사기와 에너지, 배려와 화합을 뜻하기도 한다.
집 베란다 또는 넓거나 작은 정원 혹은 꽃밭에서 꽃과 나무 그리고 화초를 키우듯이 사람을 기르는 이도 있다. 세월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듯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사람을 기다린다. 화초에 때에 맞춰서 물을 주거나 거름을 주듯이 사람에게도 물과 거름을 주어야 한다. 잘못하거나 실수할 때 원망하거나 책망하기보다는 사랑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이해하고 격려하고 껴안아 주는 따뜻한 눈길과 다정한 손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사업은 인재를 키우는 일이라고 한다.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는 물질적인 번영 또는 정신적인 가치 창조에 기여 하는 사람을 기르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2023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