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948]李白(이백)-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이백(李白, 701~762)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더니,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봉황 떠나 누대 비어 강물만 흐르네.
吳宮花草埋幽徑(오궁화초매유경)
오의 궁전 화초는 그윽한 길에 묻혔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진대 왕∙귀족들은 죽어 옛 무덤 언덕을 이루었구나.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삼산은 하늘 밖에 반쯤 걸려 있듯 하고,
二水中分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
秦水(진수), 淮水(회수) 두 강은 백로주를 갈라 흐르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모두가 뜬구름이 하늘을 가렸음으로 말미암음이니,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은 보이지 않고 내 시름만 일으키네.
*徑(지름길 경= shortcut)
*長安: 옛 중국의 전한, 수, 당의 서울
*鷺(해오라기, 백로로, night heron, snowy heron)
[해설]
역사적 유서가 깊은 남경의 봉황루에 올라,
이백은 서울 쪽을 아득히 바라보며 감개에 잠겼다.
역사에 대한 회고가 있고, 인생의 관조가 있고
또 자연의 묘사가 있고, 자신의 개탄이 있으나,
그것들이 한데 포개져서 장강(長江) 같이 흐른 곳에
이 시의 특이함이 있다.
흔히 최호의 황학루시(黃鶴樓詩)를 들어,
그것을 모방한 것이라고 평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것에 자극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되,
이를 본떴다고 보는 것은 가혹할 줄 안다.
도리어 이백의 장점인 웅휘한 기상이 거침없이 발휘되어,
그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명작임에 틀림없다
이백시선(현암사/이원섭 역해) P93
登金陵鳳凰臺 | 李白 |
鳳凰臺上鳳凰遊 봉황대상봉황유
吳宮花草埋幽徑 오궁화초매유경
三山半落靑天外 삼산반락청천외
總爲浮雲能蔽日 총위부운능폐일 |
鳳去臺空江自流 봉거대공강자류
晉代衣冠成古丘 진대의관성고구
二水中分白鷺洲 이수중분백로주
長安不見使人愁 장안불견사인수 |
(통석)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았더니
봉황은 날아간 텅빈 대에 강물만 흐르네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오솔길을 덮었고
진나라 때 의관도 옛 언덕을 이루었네.
세 봉우리는 청천 밖으로 반쯤 걸려 있고
두 갈래의 강은 백로주를 가운데로 나뉘어 흐르네
어쨌든 뜬구름이 해를 가려
장안이 보이지않아 사람을 시름겹게 하네
▶ 李白 : (701-762) 盛唐의 詩人.
字는 太白, 號는 靑蓮 또 스스로 酒仙翁이라했다.
中宗 長安 元年(701, 신라 효소왕 10년) 사천성에서 났다.
10살에 벌써 詩書에 통하고 百家書를 탐독했다.
고향에서 소년시대를 보내고, 뒤에 각지로 방랑,
襄州 漢水로부터 洞庭湖로, 다시 長江으로 내려가 金陵을 거쳐
楊州로 가 호방한 생활을 하고, 35살때에는 太原에 놀고,
산동성 任城에서 孔巢文·韓 準·裵 政·張淑明·陶 沔등과 만나,
이른바 竹溪六逸의 교유를 맺고, 742년 42살 때 翰林院에 들어갔다.
시와 술로 명성이 높았으나, 결국 술이 원인이 되어 744년에 실각,
陳留에 이르러 道士가 되고, 8578년에 江南에서 玄宗의 아들
永王의 모반에 가담한 죄로 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夜郞에 유배되어
가다가 도중에서 풀렸다.
代宗이 즉위하자 拾遺에 배명, 11월에 當塗에서 62살로 죽었다.
李白은 自然兒였다.
喜悲哀歡을 그대로 노래에 옮겨,
그의 작품은 한껏 자유분방하여 天衣無縫의 神品이라고 하거니와,
당시 그와 아울러 일컬은 杜 甫가 새로운 詩風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李白은 漢魏 六朝이래의 詩風을 集大成했다.
모랄에 민감하고 정치에 관심을 보인 杜 甫와는 달리,
현실을 떠난 감정의 소유자였다.
그는 당나라 문화의 爛熟期에 生을 받아,
그 퇴폐적 기풍에 젖은데다가 불우했기 때문에
술과 여자에 憂愁를 잊으려 했다.
詩文集 <李太白集> 30권이 있다.
▶ 登金陵鳳凰臺 :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
金陵은 지금의 南京, 長江 絶景을 끼고 있는 데다 江山이 秀麗하여,
三國時代의 吳, 六朝時代의 晉·宋·齊·梁·陳 모두가
이곳에 都邑을 두고 '建業'이라 칭하였다.
鳳凰臺는 南京 西南에 있다.
六朝時代의 宋의 元嘉十六年(439년),
五色의 깃을 가져 孔雀처럼 아름다운 새가 날아와서 群舞를 추었다.
그것을 본 當時의 사람들이 이것은 鳳凰 靈鳥임에 틀림없을 거라 생각하고,
그 자리의 산꼭대기에 記念을 위하여 臺를 쌓고 鳳凰臺라고 이름하였다.
이 시는 宮廷으로부터 追放된지 얼마 안되어 不運의 유랑을 하다가
지은 작품으로 본다.
흔히 崔顥(최호: ?∼754)의 「黃鶴樓」詩體를 模倣하여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臺空 : 봉황대에는 지금 아무 것도 없고 텅비어 적막감만 감돌 뿐이다.
▶ 江 : 揚子江, 一名 長江이라고도 함.
▶ 自流 : 예나 다름없이 自然대로 흐르고 있음.
▶ 吳宮 ; 三國時代 吳의 孫權이 세운 宮殿.
▶ 埋幽徑 : 幽徑은 사람이 다니지않는 호젓한 작은 길,
사람이 찾아오지않아 궁전의 작은 길까지도 花草가 덮고 있다는 뜻이다.
▶ 晉代衣冠 : 晉은 東晉(동진)으로 金陵에 都邑하였다.
衣冠은 조정에 나갈 때 입던 예복으로 여기서는 그것을 着用한
官吏 혹은 貴人들을 말한다.
▶ 成古丘 : 화려한 衣冠을 입던 高官들도 지금은 죽어서 옛무덤을 이루었음.
찬란한 과거가 모두 허무하다는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 三山 ; 金陵의 서남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揚子江을 굽어보고,
세 개의 봉우리가 南北으로 이어져 있다.
▶ 半落 : 반은 구름 속에 잠겨 보이지않고,
반만 하늘 저쪽에 떨어진 듯이 보임.
金陵에서 바라보면 희미하여 윤곽이 똑똑하지 못한데다
흰 구름이 산허리에 감돌아치면 三山이 마치 땅에 우뚝 솟은 산이 아니라
하늘 공중에 둥둥 떠있는 봉우리로 보인다고 했다.
▶ 二水中分白鷺洲 : 금릉을 흐르고 있는 秦水와 淮水(회수),
揚子江이 금릉의 市外에서 두 줄기로 分流되어 城內로 들어오고,
다른 하나는 성밖을 돌아 함께 하나의 섬(白鷺洲)을 끼고 흐른다.
秦淮는 다시 합쳐져 揚子江으로 들어간다.
본래 한 줄기의 강이 섬에 依하여 分流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中分이라고 한 것이다.
▶ 總爲浮雲能蔽日 : 總은 모두, 어쨌든,
사악한 무리들이 임금(日)의 총명함을 흐리게 하고 있음.
浮雲은 조정의 권신들인 李林甫(이림보), 楊國忠(양국충), 高力士(고력사),
楊貴妃(양귀비) 등을 가리킨다.
▶ 長安不見使人愁 : 장안이 보이지않아 사람으로 하여금 시름만 솟아나게 한다.
人은 작자 자신을 나타낸다.
長安에 대한 未練의 情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參考 : 李林甫는 唐玄宗 때의 宰相으로서 웃음 속에 칼을 품었다는 말로
당시 사람들이 그의 됨됨이를 평가했으니
그야말로 그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이백은 친구의 추천으로 皇宮에 들어온 후 滿朝百官이
李林甫 앞에서 서리맞은 호박잎처럼 풀이 죽어 꼼짝 못하는 꼴을 보고
한 번 李林甫를 혼내주리라 작정했다.
사실 그 때 이백은 유명무실한 翰林(한림)에 불과했다.
이백이 李林甫와 통성명할 때 자기는
"무지개를 낚싯줄로 삼고 웃음 속에 칼을 품은 자를 미끼로 삼아
바다거북을 잡는 신선"이라고 하자 李林甫가 혼비백산했다는 일화가 있다.
일전에 이백은 권고에 못 이겨 明經科(명경과)에 참가한 일이 있다.
일필휘지하여 답안지를 제일 먼저 바쳤으나 당시 시험관으로 나왔던
楊國忠과 高力士가
"너따위는 남의 먹이나 갈아주고 신이나 벗겨 줄 심부름 구실이나 하겠다"면서
빌미를 잡아 내쫓는 바람에 복시에 참가할 자격도 없이 낙방되고 말았다.
후에 이백이 입궁하여 翰林供奉이 된 후 현종을 대신해 國書를 쓸 때
술에 취한 것을 빙자하여 楊國忠에게 먹을 갈게 했다.
崔顥최호의 登黃鶴樓등황학루를 보고나서
詩를 짓지않은 李白이
南京(金陵)의 鳳凰臺 위에 올라,
崔顥 詩韻에 맞추어 읊은詩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刻時調로 불리고 있음.
崔顥의 登黃鶴樓 와 李白의 登金陵鳳凰臺 七言律詩를
羽調지름과 刻時調로 불러낸
우리나라 先祖들의 風流感覺에 感歎할 뿐이다.
이백(李白, 701-762)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중국에 시인이 많다지만 첫 번째를 꼽는다면
당(唐)나라 이백이 아닐까 싶다. 이백은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력을 등한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어린 이백이 공부하기가 싫어서 서당을 빠져 나와 놀다가
우연히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시냇가에 쪼그려 앉아
쇠공이를 숫돌에 갈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이 동한 이백은 노파에게 무엇을 하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바늘을 만들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굵은 쇠공이가 언제 바늘이 되냐고 묻자 노파가 말했다.
“얘야, 쇠공이의 굵은 모습만 보지 말거라.
매일매일 갈면 나중에는 바늘이 된단다.”
이 말에 깊이 감동한 이백은 공부할 때 늘 그 노파를 염두에 두었고
큰 성취를 얻었다. 여기서 ‘마저성침(磨杵成針, 쇠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다)’
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송나라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렇게 실력을 갈고 닦은 이백이 세상에 나오자
단숨에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이백은 호기롭게 외쳤다.
“하늘이 내게 재능을 주셨으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다
(天生我材必有用)”.
이렇게 의기양양하던 이백에게 좌절을 안긴 사건이 있었다.
명승을 유람하고 다니던 중, 이백은 황학루(黃鶴樓)에 이른다.
삼국시대 오나라 때, 호북성 무창(武昌)의 장강을 굽어보는
언덕에 지은 건물로 신선이 누런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기막힌 경치를 보고 시 한 수를 읊으려는데
머리 위에 최호(崔顥)가 쓴 ‘황학루’란 시가 걸려 있었다.
“옛 사람 누런 학 타고 가버리니
이곳에 황학루만 속절없이 남았네.
누런 학 한 번 가고 다시 오지 않으니
흰 구름만 천년 동안 부질없이 흐른다.
맑은 강물 건너편 나무 뚜렷이 보이고
모래섬에는 봄풀이 무성하다.
날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디인가,
안개 자욱한 강가에서 수심에 잠기네.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이백이 이 시를 읽고는 기가 막혀서 붓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백은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었던지 몇 해 뒤
금릉(지금의 남경) 봉황대에 이르러 반격을 시도한다.
그때 지은 작품이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이다.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더니
봉황 가고 누대는 비었는데
강물만 스스로 흐르는구나.
오나라 궁궐 꽃과 풀은 외진 길에 묻혔고
진나라 귀족의 무덤은 언덕이 된 지 오래네.
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봉우리만 보이고
강물은 모래섬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뜬구름이 늘 해를 가려서 장안을 볼 수 없으니
근심만 깊어지네.
(鳳凰臺上鳳凰遊 鳳去臺空江自流
吳宮花草埋幽徑 晉代衣冠成古丘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
總爲浮雲能蔽日 長安不見使人愁)”
후세의 평가를 보면, 이백이 최호를 모방한 것으로 보거나
기세가 부족하다고 여겨서 ‘황학루’가 낫다는 쪽이 많았다.
시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이백을 위해 한마디 하고 싶다.
‘황학루’는 앞에서 전설을 풀어내고 뒤에서는
개인의 소회를 쓸쓸히 풀어내고 있으므로
전편에 적막감이 감돈다. 이에 비하여,
이백은 ‘봉황대’에서 오나라의 영화(榮華)가 스러진 것과
동진(東晉) 고관대작의 호화롭던 분묘들이 언덕이 되어 버린 것을
탄식하다가, 구름 자욱한 장안을 바라보며 당나라의 앞날을 걱정한다.
소인배를 비유한 뜬구름에는 이백의 우환의식이 담겨 있다.
‘황학루’에 충격받고 지은 ‘봉황대’에 대한 평가는
후인들의 몫이지만,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고
다시 분발했던 이백의 투지는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이백의 삶은 고단했다.
그래도 그는 계속 전진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