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지역의 풍수지리적 환경은 특이합니다. 백두대간이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다 이뤄놓은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에 둘러싸인 국세지요. 여기에 동악(토함산) 서악(선도산) 남악(남산) 북악(소금강산)이 자리하며, 낭산(朗山)은 중악에 해당됩니다. 북악이 쇠약하다 보니 내룡맥이 허합니다.”
◇ 반달형 모양의 안산.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어서 땅기운이 다하면 쇠락한다는 풍수지리적 물형이다. ----->
비보풍수는 천년고도 경주에도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북악에 힘을 보태기 위해 산 이름을 소금강산이라 바꾸었다.
그래도 부족하다 여겨 시청 북쪽 황성공원에 인공산인 독산을 조성했다.
그러고는 이곳에 칼을 뽑아든 김유신 장군 동상이 북쪽을 향하도록 세워 놓았다는 것이 무애의 설명이다.
이러한 풍수원리의 지기 덕분으로 경주시가 융성하고 편안해진다면 누가 마다할 것인가.
기영-세린-만희-현식으로 만석꾼 지위를 탄탄하게 누려오던 최부잣집은 고운의 28세손 준(浚·1884∼1970)대에 이르러 모든 기득권을 홀가분히 털어 버린다. 일제 강점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댔고, 이때 휘청해진 나머지 재산은 광복 이후 육영사업에 미련 없이 내놓는다. 현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과 청구대학 창설에 들어간 것이다.
가문 대대로 수집된 8900여 권의 고서도 함께 기증했다. 영남대에서는 그의 호인 문파(汶坡)를 따서 ‘문파문고’라 이름 지어 뜻을 기리고 있다.
“최부잣집 선조들은 풍수에 달통했던 어른들입니다. 보시다시피 후원의 내룡맥이 허약하잖아요. 집 뒤 향교보다 대문을 낮춘다며 파낸 흙으로 북현무쪽 용맥을 북돋우고 느티나무까지 심어 비보책을 강구했습니다. 경주지역이 분지라서 평지고분이 많은데 내룡맥이 없는 양택이나 음택은 장자가 대를 잇거나 가업 지켜 내기가 힘들지요.”
◇ 집 앞을 가로 지르는 남천. 재물이 쌓인다는 동출서류 지세로 물이 나가는 파구가 안 보인다. ----->
좌향은 자좌오향으로 정남향의 동사택이다. 남쪽의 둥근 금체(金體) 안산 세 봉우리가 도당산과 대칭되면서 마치 노적봉과 창고인 양 서로 조응하고 있다.
동쪽 토함산에서 흘러온 물이 궁현수(弓玄水)로 감싸안으며 재물이 쌓인다는 동출서류(東出西流)인데, 물이 나가는 파구가 안 보인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라 하여 흠결 없이 모두를 갖춘 땅은 없다 했던가.
대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내(內)안산이 집을 향해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다. 반달이 보름달이 되었다가 기울면 그곳에 의지했던 땅기운도 쇠하는 법-. 이것이 땅의 이치다.
무애는 그만의 비법으로 산출해낸 지하 정기석에서 지속적인 발복 원인을 찾고 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합방해 설총을 낳은 요석궁터에 자리한 최부잣집은 지을 당시 8채 99칸 규모의 대저택이었으나 현재는 세 채만 남아 있다.
특히 안채의 산실에 정기석이 모여 있어 300년 세월을 흔들림 없이 버텨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자기풍수는 황천살과 팔요풍을 중시하는 일반 풍수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으로 이 지역 후학들에게 큰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무애는 지난 10여 년간 전국 각지를 수차례 일주하며 실사해 놓은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땅의 등급을 판정한다.
특급지(정기석의 혈폭 6.5m 이상)와 특해악지(정기석이 없고 수맥이 2라인 이상 있는 습지)를 포함해 1급 갑·을지∼9급 갑·을지까지 20등급으로 구분해 명당 여부를 가리고 있다. 최부잣집 산실의 지하 혈폭은 2m로 5급 갑지에 속하는 명당이다. 이 밖에도 왕릉, 시조 묘, 사찰, 재벌 생가, 각 시도 관청, 재벌그룹 사옥까지 면밀히 조사한 답사록을 갖고 있다. 풍수학계의 집중적 연구에 따라 놀랄 만한 성과가 기대되는 새로운 풍수학문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여섯 가지 가훈은 너무나 유명하다.
거기에는 부를 지켜내는 지혜는 물론 세상 인심을 얻는 처세술까지 담겨져 있어 가진 자들의 사표로 제시되고 있다.
①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
진사는 조선시대 소과 중 진사과 급제자에
게 주어지는 미관말직으로 주로 명예직이었
다. 높은 벼슬에 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
쟁에 휘말려 돈도 잃고 명예도 잃는다는 것
이다. 최부잣집에서는 9대에 걸쳐 진사 벼
슬까지만 했다.
◇ 자기(磁氣)풍수의 대가 박용환 선생이 최부잣집 쌀 창고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1000석을 저장할 수 있으며 개인집 창고로는 전국에서 가장 크다. ----->
②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 것.
만석 이상의 소출이 나면 소작료를 받지 않
거나 감면해 주었다. 그래서 이 지역 소작인들은 최부잣집이 논밭을 더 사거나 만석 이상 넘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그래야 되돌아오는 것이 많았던 것이다.
③ 어떤 과객도 후하게 대접할 것.
옛날에는 과객이라 하여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그네가 며칠 혹은 몇 주일씩도 묵어갔다. 남루한 옷차림의 거지가 와도
차별 않고 상전 대하듯 했다. 팔도를 돌아다니며 들은 정보가 최부잣집에 다 쏟아졌다. 손님이 많을 때는 사랑채와 안
채를 합쳐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④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 것.
혹독한 가뭄이 들거나 재앙을 당하면 싼값에 땅을 팔려고 내놓는다.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재산을 늘리려는 옹졸함을 경
계했다.
⑤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예나 지금이나 부잣집에 시집가는 것은 호강하기 위해서인데 최씨 가문에서는 검소와 절약부터 가르쳤다. 며느리들
이 무명옷을 깁고 기워서 가마솥에 삶을 때 그 옷이 불어나 한 짐이 되었다고 한다.
⑥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명색이 부자인데 굶어죽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세상 모두가 욕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세상 인심이 이곳으로 모였다.
자손만대의 모범이 되고 있는 최부잣집 가훈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전국을 주유하며 떠돌던 어느 노(老)스님이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나서면서 최부자에게 이른 말이라고 한다.
“재물은 똥거름(糞尿)과 같은 것이어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이상 웹에서 모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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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집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어 새로운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12대를 이어온 만석군 부자라든가 이 집에 전해져오는 가훈에 관한 이야기는, 참다운 선비나 부자의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이것이 바로 '최부자집 정신'이며 이 정신이 있었기에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더 의미있게 다가오고 있는것 같다.
이 집 내력 못지않게 이들이 살았던 집[건물]에 관한 궁금증은 컸었지만 기회가 닿지않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 집을 답사하게 되었다. 만석군의 집이기에 규모가 엄청 크고 화려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답사에 나섰으나 양동마을, 하회마을 등에서 보아온 전통 한옥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고 소박하며 수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에 사랑채와 별당채가 불에탄 뒤 사랑채는 최근에 복원하고 별당은 터만 남아있으며, 기타 부속 건물도 대부분
없어져버리고 현재는 안채, 사랑채(최근복원), 행랑채, 창고 등만 남아있다.
<대문채 : 솟을대문 형식을 이였으나 화려하지도 당당하지도 않으며 수수하고 평범하다.>
<사랑채 전경 : 최근에 복원한 사랑채는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아담하면서도 품격이 있다.>
<사랑채>
<사랑채 누마루>
조선 전기에는 경치 좋은 곳에 정자나 누각을 지어놓고 공부를하거나 풍류를 즐기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누각이 사랑채에 붙기 시작하여 사랑채 전면 한칸이 튀어나오도록 하여 누마루를 깔아 누정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러한 누마루는 통풍이 잘되고 습기를 차단할 수 있어 여름철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사랑채 기단 >
기단[죽담]은 막돌이나 다듬은 돌로 쌓기도 하나, 민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않았고, 혹 다듬은 돌을 사용하더하도 3층 이상 쌓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집의 기단은 고급스럽게 다듬은 돌을 3층으로 쌓아 품위가 있어보인다.
길게 다듬은 돌을 '장대석'이라 한다. 사랑채의 기둥을 받친 주춧돌들이 기둥과 맞지 않고 있다. 기둥은 4각인데 주추돌은 둥근 기둥을 받치도록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이 주춧돌들은 반월성에서 가저온 것이라 한다.
]
<뒷간>
사랑마당 구석에있는 뒷간, 오른쪽으로 불에탄 별당터가 보인다
주춧돌로 사용된 돌들이 범상치 않다. 이 돌들은 반월성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안채로 들어가는 내외벽>
조선 후기는 남녀유별을 강조한 시기였으므로 양반가의 안채는 밖으로 노출되지 않도록하였다. 마당에서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벽으로 가려져 있어, 안채로 들어갈 때에는 내외벽을 돌아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내외벽>
<내외담>
최부자집 왼쪽에 '전통법주'를 제조하는 집은 담을 쌓아서 안채를 가리고 있다. 이런 담을 '내외담'이라한다.
<안채>
안채는 사랑채에 비해 당당하고 규모가 크다. 마당 가운데에 장독대가 잘 정리되어 있다.
안마당의 장독대는 후대에 설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안마당은 생활의 중심 역할을 하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의식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곳이므로 장독대가 설치되면 생활에 불편이 따르게 된다.
장독대는 햇볕이 잘들어야 한다. 안마당은 건물에 가려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장을 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다.
<대청과 건너방>
건너방 문의 구조가 특이하다. 살문이 일반적이나 이 집은 판문으로 되어있다. 판문은 살문에 비해 튼튼하기는하나
실내가 어두우며 품격이 낮아 보인다.
<향단의 건너방 문>
양동마을 '향단'의 안채 건너방의 문이다. 최부자집 건너방 문과는 비교가 된다. 양동마을 '향단'의 안채 건너방의 방문은, 가운데는 띠살문, 양쪽은 넉살문으로 되어 있다.
<대청>
이
<창고 >
이 집에서 눈여겨 볼 건물은 창고 건물이다. 이 창고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통한옥의 창고 중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며, 이집의 부를 짐작할 수 있는 건물로 쌀 700석-800석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창고건물이 여러채 있었다고 한다.
<요석궁>
최부자집 바로 앞에는 '요석궁'이라는 한식집이 있다. 이집은 최부자집의 작은집이었였다고 한다.
최부자집 터는 원래 신라시대의 요석궁터였다고 하며 지금은 전통 한식집이다.
< 요석궁 중문>
정원이 잘 꾸며진 요석궁 마당에는 옛 건축물의 부재로 사용된던 돌들이 널려있다.
이 돌들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수 있으면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