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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만드는 사람, 미래를 만드는 기업 정 문 술
(미래산업(주) 창업자)
◇ 제9기 고위정책과정 (2001. 5. 22) ◇ 약 력 ◦ 원광대학교 동양철학과 졸업 ◦ 중앙정보부 기조실 조정과장 ◦ 미래산업 대표이사 ◦ 라이코스 코리아 대표이사 ◦ 벤처리더스클럽 대표이사
현 직 ◦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위원 ◦ 한국과학기술원 이사 저 서 ◦ 왜 벌써 절망하십니까?
머 리 말 저는 고등학교를 1956년에 졸업했습니다. 동기가 300여명이었습니다. 최근까지 열명 중 한명 정도가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요즘은 가끔씩 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저 역시 공무원 생활을 18년 동안 했습니다. 그 기간 제 동기들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거나, 또 불행하게 공직에서 그만두게 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대개 남의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정리로 보면 안타까움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나와 무슨 상관 있는 일인가 하고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최근에는 고등학교 동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뜨끔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왕에 살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저만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처럼 행정부처 국장쯤 되시는 분들이라면, 이제 한번 쯤은 공직생활이 끝나는 날도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보다 조금 더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써 말씀 올리겠습니다. 공직이라는 이름의 온실 저는 TV를 재미있게 잘 봅니다. 멜로 드라마를 좋아해서 연속극을 자주 보고, 스포츠 중계도 잘 봅니다. 그리고 특별히 동물 프로를 매우 좋아합니다. 동물의 왕국, 동물의 세계 등은 어지간해서 놓치지 않고 시청하는 편입니다. 그동안 보았던 동물 프로 중 아직도 제 머리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장면이 몇몇 있습니다. 2년쯤 전으로 기억이 됩니다. 시베리아 지역, 깊은 숲 가운데 있던 마을이었는데 지난 밤에 맹수가 들어 가축들이 많이 상하고, 죽거나 물어간 모양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인근 지역에서 포수들을 수소문해서 다섯 명을 모읍니다. 그들은 아주 구식 라이플 총을 메고 개를 한 마리씩 데려 왔는데, 그 개들은 크기는 우리 진돗개 정도였는데, 별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 개 이름이 라이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섯 마리를 앞세우고서 포수 다섯 명이 밀림으로 들어갑니다. 그 때가 아마도 늦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눈은 아직 내리지 않았고, 숲은 전부 누렇게 말랐습니다. 포수들은 한참 걸어가다가 해가 넘어가니까 야영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 깊은 산골짜기에 널빤지로 지은 대형 창고가 있었습니다. 대충 보니까 길이가 한 30~40미터, 높이가 10여미터 이상되는 상당히 큰 창고인데 그것을 야영장으로 해서, 그 건물 20여미터 앞에다가 모닥불을 피우고서 자게 됩니다. 한밤 중인데도 모닥불 때문인지 그 주변이 제법 환합니다. 그러다가 호랑이가 창고를 뛰어 넘으려고 시도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호랑이가 성큼 뛰고 개들이 그 뒤를 쫓아갑니다. 호랑이는 그 크기가 개하고 비교가 안됩니다. 몸길이만 3~4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호랑이들은 창고를 올라가다가 실패합니다. 다시 뛰어오르고, 떨어지고,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합니다. 호랑이는 창고 쪽에서 돌아서서 사람들이 야영하는 쪽으로 달려오는데, 그 때 사람들이 총을 쏴서 잡습니다. 또 다른 장면은 이 보다 먼저 본 것인데, 시베리아에서 개를 앞세우고 토굴로 호랑이를 몰아서 생포하는 장면입니다. 유럽, 뉴질랜드 등 서구지역에서는 양들을 키우는 큰 목장이 많은데, 이 곳 역시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맹수가 나타나 목장을 짓밟았던 모양입니다. 엽총을 둘러맨 목장주들 20여명이 포인터들과 함께 한참 동안 수색 작업을 펼쳐나가는데, 그런 와중에 표범이 나타납니다. 궁지에 몰린 표범이 나무 위로 도망치게 되는데, 그러면 밑에서 총을 쏘아 표범을 잡는 겁니다. 이러한 맹수 사냥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개와 호랑이를 예로 들자면, 개의 천적은 호랑이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는 자기의 천적을 몰아서 잡았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개와 호랑이가 일대일로 산에서 조우했다면 개는 영락 없이 호랑이 밥이 됐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 주인이 라이플을 메고서 뒤에서 떡 버티고 서있으니까, 그 빽을 믿고 자기 천적을 몰아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배운 냉혹한 사회 저는 1980년에 신군부가 들어와서 해직 공무원 신세가 되었는데, 그 이후 사회생활 하면서 느낀 것도 이런 것입니다. 공직은 라이플을 메고 있는 포수의 영향권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사회는 포수 없이 단신으로 천적과 대결해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아마도 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셨고, 그런 덕분에 능력을 인정 받고 있는 분들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여러분들의 성취는 든든한 후원자, 정부라는 거대한 공권력의 우산 아래서 했던 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직에서는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망할 염려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징계를 받는다든지 약간의 불이익을 받으면 되고, 최악의 경우라고 해야 사표 내고 나오면 그만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치명적입니다.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하면 자기 혼자의 문제가 아니고 가족들, 가까운 친구들 합동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아니 죽음까지 내몰리게 되는 겁니다. 도무지 실패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공무원 생활하면서 조그마한 자영사업을 하는 분들에 대해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분들이 하는 일들은 어쩐지 어설프고 시원찮고 엉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세상에 나와보니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5급 을로 특채되어 2급 을로 퇴직할 때까지 18년 동안 공직에 몸담았습니다. 1962년에 5급 을에서 1976년에 부이사관이 되었으니까, 14년만에 여섯 번 승진했습니다. 매일매일을 전투 정신으로 일을 했고, 오직 일 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일 꽤나 한다는 소문도 났고, 치밀하고 완벽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해직을 당했습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처음 일주일은 그냥 집에 붙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직장밖에 모르고 매일 출퇴근하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 갑자기 아무 일도 안하게 됐으니까 그럴만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해방감도 느끼고, 좋은 점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훗날 저는 구치소에 열흘쯤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구치소에 있던 때보다, 당시 집에 있을 때가 더 괴로웠습니다. 구치소에 있을 때는 이미 다 포기하고 체념하고 앉아서, 책도 보고 그럴 수가 있는데 그 때는 앞이 안보였습니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 자식은 다섯이나 올망졸망 있고, 아직 교육도 제대로 못시킨 상황인지라 하늘이 노랬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그리고 그 후 일주일을 더 놀았습니다. 베테랑 공무원에서 사회 초년병으로 그러던 어느 일요일 제가 데리고 있던 운전기사가 문안 인사를 왔는데 그 사람 손에 이끌려서 일을 벌였던 것이 그만 사기를 당하게 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한 번 버텨보지도, 저항 한번 못하고 한꺼번에 퇴직금을 날리게 됩니다. 이주일 동안 놀면서 너무도 답답했고, 무슨 건만 생기면 바로 결정하고 뛰어들겠다는 심산이었는데, 운전기사가 와서는 자기 친척 중에 한 분이 일본에 있는 어느 기술자하고 부천에서 전자부품 생산공장을 하고 있는데 아주 잘 돌아간다고 하면서, 그 사업은 자동생산이라 인건비도 별로 들지 않는다고 자랑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관청관계, 은행관계 등 대외 업무에서 회사의 기둥 구실을 할, 시쳇말로 ‘얼굴마담’이 있어야 한다면서 과장님-퇴직시 제 직책이 과장이었습니다-께서 맡아주십사 하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당장 부천 공장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서 보니까 종업원이 여섯명에 기계가 여섯 대 있었습니다. 철판을 자르는 프레스 밀링머신과 선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때 난생 처음 공장이라는 곳을 가봤는데, 이내 생산적인 부산한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기계가 막 돌아가는데, 철판이 잘라져 나가고, 기계 냄새, 기름 냄새가 왠지 힘차게 느껴졌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 운전기사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습니다. ‘그래, 내가 여기서 얼굴마담 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해 보자, 이 일을 발판으로 나중에 다시 제대로 시작해보자.’ 그 다음 날 저는 이문동에 가서 이종찬씨를 만났습니다. 당시 이종찬씨는 총무국장이었는데, 저하고는 잘아는 사이였습니다. 이종찬씨에게 부탁해 수령일이 몇 달 남은 퇴직금 2천300만원과 중앙정보부 공제회 기금 2천만원 중 절반을 먼저 가불 받았습니다. 연금을 받으려면 20년 이상을 근무해야 했는데, 저는 2년이 모자라 연금을 못 받고 일시금으로 퇴직금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렇게 미리 꾼 돈 2천만원을 부천공장에 투자해 주고, 결국 고스란히 날리게 됩니다. 공직이라는 의복을 벗자 공직에 있는 분들은 제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사회에 나오면 초년병과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이런 일 이후로 저는 후배들을 만나면,공직이란 것은 의복과 같다얘기를 자주 합니다. 중앙정보부하면 위계질서가 엄격한 기관입니다. 그 때 데리고 있던 운전기사처럼, 기능직과 과장(부이사관)이라면 정말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기능직이나 과장이나 똑같습니다. 계급이 똑같아 졌는데도, 의식 속에는 항상 예전의 나, 즉 과장이나 부이사관 이런 것들을 달고 삽니다. 공직생활 후 사회에 나와서 성공하는 사람과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갈림길은 그 의복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사람과 그걸 벗어버리지 못하고 입고 다니는 사람, 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에 비춰봐도 그렇습니다. 당시 같이 그만둔 300여명 중 대부분은 취직을 못하고 나름대로 사업을 하거나 자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거의 전부가 망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 그리고 몇분만 살아남았습니다. 같이 그만뒀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중앙정보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 중앙정보부 주변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중앙정보부에 남아 있는 후배나 동료들이 좀 봐주겠지’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외 없이 전부 망했습니다. 중앙정보부 후배 중 아주 똑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해직 후 식품업을 시작했습니다. 칡차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한국차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공군사관학교 출신이었던 그는 우선 공군, 다음에는 군부대 피엑스(PX), 그 다음에는 국영기업체 어디 등 이런 식으로 사업을 펼쳐나갔습니다. 전부 연줄로, 안면으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화성군 발안에 공장을 하나 인수하기도 했으니, 사회 데뷔치고는 대성공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던 중 칡차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가 만든 칡차는 칡성분이 100%가 아니었습니다. 한 10%쯤만 칡성분이고, 나머지는 색소를 넣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경쟁업체가 이 점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경쟁업체 사장은 국산차 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는데, 후배의 등장으로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마침내 약점을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그 후배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경쟁업체 사장은 서울 시경 수사과장을 배경으로 후배를 공격했습니다. 수사과장은 신군부 헌병 중령 출신으로 총경으로 특채 되어 경기도경 수사과장을 하다가 서울시경으로 전입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경쟁업체 사장과 손이 닿았던 모양입니다. 제 후배는 고발됐습니다. 그래서 불려 다니고, 수사를 받고, 구속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그 후배는 제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수사과장이란 사람은 헌병대 출신인데 현직에 있을 때 중앙정보부로부터 호되게 당한 모양이다. 그런 연유로 중앙정보부 출신인 내게 더욱 가혹하게 대하는 것 같다.’ 제 후배는 그 후 화병이 나서 3개월 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은 그 부인이 사업을 이어받아 하고 있습니다만, 만일 후배가 처음부터 중앙정보부의 옷을 벗어버리고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제 해직 동료 중 둘은 자살로 삶을 마감해야 했고, 나머지 대부분도 자식들 교육조차 제대로 시켜주지 못하고, 결혼도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직이 의복이란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공직에서 무슨 일을 했건, 어느 자리에 있었건, 사회에서는 초년병이며, 그런 만큼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 군대 동기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지방 출신으로 명문대학을 나오고, 참 똑똑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던 그는 제대 후 민주공화당 사무국에 들어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엘리트로 손꼽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정당에 취직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정권이 바뀐 후에도 민주정의당 간부로 자리를 유지했고, 마침내 비례대표 순위가 점점 올라가더니 임기가 두달인가, 한달인가 남은 국회의원 자리까지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는 이후 여러번 출마를 했는데, 번번이 낙선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의원이라고 부릅니다. 국회의원 고작 한달 했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자신을 국회의원으로 생각하고 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불러 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의원이라는 딱지를 자신에게서 떼어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못해 지금도 비극적인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공직은 의복과 같습니다. 공직을 떠날 때는 그 옷을 빨리 벗어버려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언젠가 사회에 나가실 텐데 그 때는 미련 없이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중년 이후 필요한 다섯가지 보물 우리 나이가 되면 중요한 것, 필요한 것이 다섯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건강입니다. 두 번째는 할 일입니다. 등산이나 낚시 등의 취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경우라면 ‘경영’이라는 전문분야가 바로 그것입니다. 공직에서 쫓겨난 후 20년 가까이 사업에 몰두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현직에서 물러난 지금도 두 곳에서 사외이사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받는 봉급이 미래산업 사장할 때보다 많습니다. 십여개 기업에서 사외이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강연해 달라는 곳도 많습니다. 지난 1월 4일 회사를 직원들한테 물려준 후 4개월 동안 50여 곳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습니다. 아마 연사가 필요한 중요 행사에는 거의 모두 초청 받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얼마전 미시간 글로벌 MBA에서 강연한 적이 있는데, 그 경우는 예외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기(?)를 당한 셈입니다. 저는 5남매를 두고 있는데 넷째와 막내가 아들들입니다. 아들 둘은 지금 4년간 직장생활 후 미국 경영대학원 유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몇몇 대학에 지원서를 냈는데, 큰 아들이 지원서를 낸 곳 중 한 곳이 바로 미시간 대학입니다. 강연 초빙을 받은 때가 합격 발표가 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때 미시간 대학 김응한 교수와 전화 통화를 하게 됐습니다. 저도 어느 한구석 세속적인 사람인지라, 김 교수께 큰 아들 문제를 부탁했습니다. 김 교수는 알아보겠다, 노력해 보자고 답변했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10분쯤 후에 김 교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자신이 글로벌 MBA 담당교수라고 소개하면서 다음달에 한국에서 교육 일정이 있는데 강연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강연을 거절하고 있던 터라, 당연히 거절해야 옳았을텐데 문득 큰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혹시 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결국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사흘 후에 아들이 떨어졌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강연을 하게 되었고, 오늘 강연이 두 번째입니다. 이번에도 고사했는데, 공무원 출신 중 기업인이 드물다며 꼭 맡아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특히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20년전 제 처지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 중년 이후의 가져야 할 두 번째 보물인 ‘할 일’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할 일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현직에 있을 때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가? 그 방법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맡고 있는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면 거기에서부터 전문성이 생깁니다. 세 번째는 조강지처입니다. 이 역시 상식적인 것이니, 따로 설명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네 번째는 나이 먹을수록 어느 정도 쓸만한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동기 중에는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많습니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학과가 상대와 공대였는데, 제 친구들 중에는 상대에 진학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상대 출신들은 대학 졸업 후 은행 등 금융기관에 주로 진출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지난번 IMF 경제 위기 때 무더기로 직장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들인데, 지금 상당수가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친구가 요즘 부러울 정도로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자식이 둘인데 모두 결혼시켰고, 두 내외가 거의 매일 놀러 다닙니다. 틈만 있으면 단체여행에 붙어서라도 해외여행에 나섭니다. 그는 은행지점장으로 끝났으니까 큰 돈은 못 모았지만 먹고 살만큼은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현금을 조금 가지고 있는데 굳이 이 돈을 굴리려고 하지 않는다. 예금 해놓고 곶감 빼먹듯이 찾아 쓴다. 이 돈을 다 쓰고 나면 아파트 한 채 있는 것 평수 줄여 그것을 여러 번 줄여 차액을 갖고 다시 예금해 빼 쓰겠다. 그렇게 살다가 내외가 같이 죽었으면 좋겠다. 저는 다른 친구들에게 이 친구가 정말 멋지게 살고 있다고 칭찬하고 다닙니다. IMF 경제위기는 사회적으로 큰 비극을 낳았습니다. 제 친구들처럼, 은행의 중견간부들, 대기업의 간부들이 아무 대책 없이 무더기로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나오면서 대부분 퇴직금을 제법 후하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돈을 퇴직 후 곧바로 불어 닥친 코스닥 열풍에, 증권투기 열풍에 고스란히 날렸습니다. 그래서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지금 빈털터리입니다. 아직 한창인 나이지만, 취직도 안됩니다. 어쩌면 한국의 중산층은 그렇게 해서 많이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섣불리 재테크 하지 마십시오. 곱게 늙어가야 합니다. 모아둔 돈, 곶감 빼먹듯이 하나씩 빼먹는 게 낫습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필요도 없고, 물러줘서도 안됩니다. 다섯 번째는 친구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이름 불러가며 “너희 내외 나와라, 등산하자 하면 따라나서는 친구,우리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제주도에 유채꽃 피었다는데 제주도 한번 가자.하면 언제든지 따라나설 수 있는 그런 친구 한 둘을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미리, 그리고 의도적으로,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그때 갑자기 친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만두고 나면 친구 안 붙습니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올까 무서워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근무하는 자리가 남을 봐 줄 수 있는 자리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한직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사회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적지 않습니다. 하다 못해 무엇이 궁금해서 연락이 오면 성심 성의껏 알아보고 답변해 주십시오. 공직에 있을 때 사회에 있는 친구들을 많이 도와주십시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제가 공직에 있을 때 박대한 사람들은 전부 저를 멀리하고 가까이 다가올까 무서워하고 귀찮아했습니다. 그래도 저한테 신세를 졌다든지, 제가 친절하게 대했던 사람들 몇몇은 끝까지 저를 측은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제가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잘 대해주었습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여기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요컨대 그만두고 나간 후에 남들이 나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지말고 현직에 있을 때, 베풀 수 있을 때 베풀어 주십시오. 남들이 도움을 청하기 전에, 가려운 곳을 긁어서라도 먼저 도와주십시오. 지금까지 다섯 가지를 필수사항으로 말씀드렸는데, 짖궂은 친구들은 여기에 한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조강지첩이 있어야 한다는 게 여섯 번째랍니다. 그런데 조강지첩이 갑자기 조달이 됩니까? 안되겠죠. 이 역시 여유 있을 때 미리미리 준비해 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상당한 선투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자 나이 60이 넘어가면 구실을 잘 못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아직 생생한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 대비해 조강지처의 사전 양해 하에 조강지첩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얘기는 농담이었습니다. 그 때 준비하면 늦는다 제 얘기의 골자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뜻하지 않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든지, 일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든지 등등의 일이 있을 수 있는 만큼 사전에 대비해야 됩니다. 아차 하면 늦습니다. 호스피스는 사람이 죽을 때 임종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호스피스들은 수없이 사람들의 임종 순간을 지켜본 결과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나 못된 짓을 한 사람이나 예외 없이 죽을 때는 후회를 하고 죽는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후회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니까, 크게 다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 더 인내하고 살 걸’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배다른 형제들이 재산 싸움을 하고 어지러운 꼴을 보이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조깅지처 말을 듣고, 혼 좀 나고, 그냥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때 못 참고 두 살림 차린 탓에 죽어가는 마당에 순순히 임종 지켜주는 자식도 없구나’ 라는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피붙이 외에 임종을 지켜보는 친구 하나 없다면 아마도 ‘그 친구와 그 때 의견이 부딪쳐 끓는 성질에 결별을 해 버렸는데, 그 때 내가 조금만 참았더라면’이라고 후회할지 모릅니다. 두 번째 후회는 ‘좀더 베풀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쓸데없이 재산을 남겨 자식놈들끼리 재산싸움을 하는 꼴불견을 만들어놨구나’ 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후회는 이런 것입니다. ‘봄이 오는지, 가을이 오는지 모르고 살았다. 좀더 즐기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얼마나 더 잘먹고 잘살겠다고 정신없이 살았는지.’ 저는 세 번째 후회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후회하지 않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지만, 세 번째만큼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을 즐기려고 노력하십시오. 지루한 강연이지만, 졸리고, 몸이 뒤틀리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즐겁게 듣다보면 어느 샌가 즐거움이 온몸에 흘러 넘칠 것입니다. 즐기면서 준비하는 미래 저는 18년 공직생활 중 14년 동안 진급을 여섯차례 했습니다. 그렇게 진급하려고 얼마나 골치 아프게 살았겠습니까? 공직이라는 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망할 염려가 없는 것이고, 또 회사처럼 경영 상황이 나빠져서 월급이 나올지, 안 나올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자신만 충실하면 별 탈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공직자들은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갑니다. 사소한 규제를 못 이겨서, 승진에 불만이 있어서, 상사가 조금 귀찮게 한다고 해서, ‘아, 이거, 이놈의 거 오늘 그만둬 버려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을 합니다. 또 동료와 경쟁 관계에서 조금만 신경을 쓴다고 해도 ‘아휴, 이거 더러워서, 이놈의 직장 못해먹겠다. 어디로 가버리든지 해야지’ 등의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합니다. 친구들은 제게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 때 자네는 공직에서 쫓겨난 게 잘됐어. 덕분에 지금 용이 되지 않았는가. 저는 이런 말에 웃고 마는데, 사실 계속해서 공직생활을 해서 정년퇴직까지 일했으면 더 행복했겠다 하는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강연까지 하고 있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의복을 벗지 못해서 결국 죽음까지 당한 동료들처럼 20년 동안 사업한다고 모진 고난과 질곡을 겪으면서 이렇게 늙어버렸으니 행복했다고만은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세상에서 월급쟁이처럼 좋은 직업은 없다는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실 그 때 중앙정보부 하면 서슬이 시퍼런 곳이었습니다. 외출이라도 하면 친구들이 제게 점심을 못 사서 안달이었고, 부탁을 못해서 안달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좋은 직장을 불평과 불만 속에서 다녔습니다. 만족할 때가 한번도 없었습니다. 특히 동료들하고 관계 때문에 늘 불만이었습니다. 저는 일처리가 치밀한 편이었기 때문에 상하 관계는 매우 좋았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이 그냥 놔두지를 않았습니다. 집적거리고, 뒷다리를 걸고, 그래서 늘 몸과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설령 제가 일을 잘해서 큰 성과를 올렸을 경우라도 시기심에서 저 전라도놈, 사병출신, ○통학교 출신이 잘난체한다고 비난을 퍼붓는게 예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후배들에게 자신 있게 얘기합니다. 너희들은 최고의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니 즐기면서 살아라, 즐기면서 일해라. 강연 전에 여러분 중 한분께 교육과정에 대한 시험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하더군요. 저도 교육 받아봤지만, 시험이란 건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일 아닙니까? 성적을 매긴다는데, 고과에 반영한다는데, 공부 안 할 수도 없고, 열심히 하기도 힘들고 골치 아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시험도 안보고 1년 동안 이렇게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교과과정 중에 금강산 방문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금강산 뿐만 아니라, 중국도 다녀오십시오. 기왕 즐기실 요량이라면 최고로 즐기십시오. 그리고 혼자만 즐기지 말고, 부인들까지 함께 다니시고, 저녁행사도 웬만하면 동부인 하십시오. 그렇게 하다보면 앞서 제가 말씀드린 친구 사귀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입니다. 이제야 제가 철이 들어 세상 무서운 것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지금은 실감을 못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손에 쥐어드려도, 모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강연을 끝내고 나면, 금새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잊어버리고 엉뚱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금 맡고 계신 직무에 푹 빠져, 정말로 열정을 쏟으신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만 근무해도 여러분들 모두가 전문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퇴직 후에도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 월급 이상의 의미 제가 앞서 말씀드리면서 아들이 둘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큰 아들은 현대자동차연구소 엔진설계팀에서 4년 반을 근무했고, 막내는 삼성카드에서 4년 반 일했습니다. 큰아들은 대학원을 나왔고, 막내는 학부만 졸업했으니까, 군복무 마치고 둘이 직장에 들어가는 시기가 같았습니다. 두 아들이 직장에 들어갈 때 저는 불러 놓고 한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너희들이 지금 가는 직장에 가면 월급을 줄 텐데 월급값을 하려면 적어도 5년간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월급값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로서는 그 시간이 지나야 너희들에 대한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회사에 등록금을 갖다주고 근무해야 하는데, 거꾸로 월급 받고 근무를 하는 셈이다. 이런 사람이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 명심하기 바란다. 이 말 때문인지 아들들은 적응을 잘 했습니다. 저는 자식들에게 전한 이 말에서 직장이란 무엇인가, 월급쟁이란 무엇인가, 직장이,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해직 당해서 사업을 할 때 주홍글씨를 달고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주홍글씨’라는 소설을 읽어보셨겠지만, 어디가서 중앙정보부 다녔다는 소리도 못할 뿐더러, 했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입니다. 경력을 숨긴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알려집니다. 사업하는데 중앙정보부 이력이 제 발목을 여러차례 잡았습니다. 중소기업 하다보면 제일 무서운 사람이 은행 지점장인데, 그 사람과 가까이 되는데 시간이 배 이상 걸렸습니다. 남보다 마음을 쉽게 열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중앙정보부하면 얼마나 이미지가 안 좋았습니까? 중앙정보부 근무하면서 수사 등의 분야에 근무해본 적은 없고, 기획업무 등 내근직만 했는데, 사람들은 대개 중앙정보부 출신이라하면 남의 약점이나 파고 드는 나쁜 경찰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 직원 대다수는 선량하고 실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물을 흐리고, 조직의 이미지를 흐려서 전체가 나쁜 것처럼 인식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이 충실한 사회인이 되었다는 것을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또 제 성격 때문에, 경영하면서 저는 가능한 한 은행 대출, 정책자금 같은 것들을 쓰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대개 사채로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아내를 통해서, 친지들을 통해서 월 1.5부~2부짜리 사채도 썼습니다. 은행 이자율이 12% 정도, 정책자금은 8% 정도로 두 배 이상 비쌌지만, 필요할 때 갖다 쓰고 돈이 생기면 바로 갚을 수 있는 게 오히려 나았습니다. 게다가 은행 돈을 빌리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개 융자금은 기한이 1년이라 돈이 필요 없어도 기왕 빌린 돈의 이자는 꼬박꼬박 내야 했습니다.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은행 지점장에게 볼일이 있건 없건 한달에 한번쯤은 찾아가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식사 대접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괘씸죄에 해당되어,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명절이면 꼬박꼬박 선물도 갖다 줘야 했습니다. 게다가 지점장은 얼마나 수시로 바뀝니까? 제가 부천에서 사기 당한 공장을 인수한 후 첫 추석이 돌아왔습니다.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점장이 제일 중요한 사람인데, 명절 선물을 전해줘야 할 것 아닌가, 돈 봉투를 줘야 하나, 중앙정보부 출신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할까, 선물을 한다면 어떤 것을 해야 하나, 본인 것을 해야 하나, 아니면 부인 것을 해야 하나 등등. 결국 부인 것을 사다주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지점장 아내도 기분 좋고, 아내가 기분 좋으면 남편도 기분 좋을 것이고, 일거양득 아니냐. 이 문제 하나를 결정하는데 며칠을 고심했습니다. 어느 하나 만만하게 생각할 게 없었습니다. 사회가 그렇게 무섭다는 얘기입니다. 아무튼 저는 그렇게 중앙정보부와 담을 쌓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쪽을 쳐다보지 않은 것이 실패하지 않았던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기업을 일으키고, ‘벤처기업인 대부’라고 지목이 되는 상황에 이르니까 중앙정보부 출신이라는 것이 다소 희석이 됐습니다. 제가 지난 1월 4일 직원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퇴임을 했는데 신문들이 매우 크게 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들을 자세히 보니까 제 경력을 기사 옆에다 큼직하게 게재했더군요. 그 경력 중에 ‘중앙정보부 조정과장’이라고 눈에 띄게 적혀 있었습니다. 처음에 제가 사업 시작 할 때는 어떻게 하면 그 사실을 감추느냐가 문제였는데, ‘나는 중앙정보부 출신이 아니고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그만두는 날 새삼스럽게 부각된 셈입니다. 제가 그만둔 것은 공교롭게도 사업 시작한지 18년 만이었습니다. 공직생활도 18년간 했으니까, 양쪽에 똑같이 제 인생을 투자한 셈입니다. 재미있는 일은 그렇게 신문에 중앙정보부 출신이라고 나니까 후배들이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는 점입니다. 중앙정보부 출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으로, 예상치 못한 감사 전화도 여러차례 받았습니다. 아무튼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갑니다만, 제가 이렇게 성공했다는 평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의복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완전히 벗었기 때문입니다. 비빌 언덕부터 없애라 저는 반도체 제조장비 중에서 맨 마지막 공정에 사용하는 검사장치를 처음으로 국산화해서 각광을 받았습니다. 제조장비의 국산시대를 연 것입니다. 그것이 1993년도입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반도체 제조장비라는 것은 선진국, 특히 미국하고 일본, 두 나라에서 사다 쓰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뿌리 깊었습니다. 감히 누가 그것을 국산화하겠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도전했고, 결국 성공했습니다. 국산화 과정을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 삼성전자에 가서 최신 미국기계 일본기계를 한 대씩을 빌려왔습니다. 이 기계들을 밤새워 분해해서 분석했습니다. 들여다보니까 두 나라 기계가 서로 장점이 달랐습니다. 이 장점들을 뽑아서, 모자이크해서 어설픈 듯 싶지만 우리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국산화에 성공하니까 주변에서 쾌재를 불렀습니다. 사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장비를 전적으로 외국업체에 의존하다 보니 칼자루는 그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부르는 게 값인데다, 공급 일정도 자기들 스케줄에 맞췄습니다. 수요자는 공급자가 주는 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었고, 완전히 주객이 전도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미래산업이 국산화에 성공, 외국업체의 못된 버릇을 고쳐줄 수 있게 되었다며 여러분들이 매우 반가와 했습니다. 당시에는 저도 잘 몰랐는데, 정부가 지정한 ‘수입선다변화 품목’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제게 당장 신청해라, 그래서 일본 사람들 혼을 내주자고 했습니다. 미국기계가 국내에 몇 대 들어오기는 했지만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장비는 일본산이었습니다. 수입선 다변화 품목에 지정되면, 일본기계 못들어 오게 할 수 있고, 미래산업이 혼자 독점해서 팔 수 있다. 정사장도 돈방석에 앉는 것 아니냐등등의 이야기들이 쏟아졌습니다. 일본 기계를 견제해야만 국산화가 되고, 국산화가 돼야만 반도체 산업이 제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뼈 빠지게 만들어서 내다 팔아도 정작 실속을 챙기는 것은 일본기업들이었습니다. 장비, 원부자재 등 알맹이를 그들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기업에 돌아오는 부가가치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장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령을 읽어보면서 심사숙고했습니다. 좋은 떡 있다고 얼른 받아먹으면 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정말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이 제도가 독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도 자체는 상공부 공무원들이 좋은 머리를 짜내어 만든 엄청나게 좋은 것이었지만, 제 경우에는 문제가 적지 않았습니다. 첫째, 반도체의 제조공정은 크게 보면 30~40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든 장비는 맨 마지막 공정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이 공정에 외국 장비를 못 들어오게 하고 우리 미래산업이 100% 판매한다는 얘기는 그 공정을 미래산업이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얘기가 됩니다. 만약에 여기에 실수가 있다면, 예컨대 기계가 고장이 난다든지 그래서 생산차질을 초래한다면 기회 비용까지 포함해서 미래산업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앞 공정에서 아무리 잘 해 왔다 하더라도 마지막 공정에서 병목이 생겨, 출하가 지연된다면 소용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제가 만드는 장비는 복잡한 장비입니다. 부품이 약 2만 5천개 동원되는데, 기계, 전산 전자 물리 화학 광학 진동 등 수많은 기술이 총동원됩니다. 그리고 비록 장비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아직 운영해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더 좋은 장비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현장에 투입돼 돌리다 보면, 어디가 마모되고 생각지도 못한 고장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반도체 생산 전 공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장 마지막 공정을 전담하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공정 중 5%만을, 그 다음에 경험을 얻어서 10%, 이렇게 공정 점유율을 올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장비는 개발원가에 최소 3배 이상을 받아야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신제품 출시를 위한 연구개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제품을 개발하고, 대량 생산판매해서 개발 과실을 거둬들인 후 다시 연구개발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장비는 수명이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즉 6개월마다 업그레이드된 신제품을 만들어서 내놔야 한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회사조직 구성상 대다수가 연구원이고, 생산인력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생산부문은 아웃소싱 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품가격을 3배 이상 받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장비가격의 결정은, 일본 기계 대비 몇 %로 하자는 식이었습니다. 예컨대 일본기계가 100만달러면, 당신 장비는 국산이니까 미안하지만 30% 저렴한 70만달러로 하자는 식이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가격이 매겨져도 이익이 많이 남았습니다. 미래산업이 1996년도와 1997년도에 한국 상장기업 중에서 순이익 비율이 제일 높았던 것도 이런 때문입니다. 순이익율이 35%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일본장비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고객인 대기업들은 장비 가격 계산을 다시 할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대기업은 생리상 원가계산, 특히 중소기업 제품에 대한 원가계산은 아주 모질게 합니다. 부품리스트를 가지고, 가격을 뽑아내고, 여기에 15%의 마진을 붙여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발비를 받아내기란 매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원천기술의 문제입니다. 앞서 제가 장비를 만들면서 선진국 제품을 보고 모방학습을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6개월마다 신제품이 나오는데, 반도체 생산회사에서 우선 1대씩 사옵니다. 그것을 분해하고, 분석하고, 여기에 몇가지 아이디어를 더해 국산화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초기에는 원천기술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일본기계를 못들어 오게 막아버리면, 모방학습을 할 대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장비를 순수 국산기술로 개발해서 세계적인 경쟁 수준까지 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데, 걱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네 번째 문제는 직원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명감이 강하고 열심히 하는 직원이라고 하더라도 경쟁 속에서, 긴장상태에서 좋은 제품을 내놓은 것이지, 땅 짚고 헤엄치는 상황 즉 일본기계도 못들어오고 미국기계도 못들어오고 미래산업이 만드는 것만 써야 되는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나태해지고, 기술개발에 소홀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수입선다변화 제도를 이용하지 않고, 점진적인 시장 확대 전략을 쓰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공정의 10% 정도만, 팔 수 있을 만큼만 팔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니나 다를까 현장 투입 후 일주일 후부터 고장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개발요원들이 할 수 없이 현장에 투입됐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고장은 반복됐습니다. 심지어 이런 고장들까지 있었는데, 예를 들면 장비에 콘넥타 전기배선을 꼽으면 그다지 오래 작동하지 않았는데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배선은 조금 삐딱하게 빠져도 문제인데, 빠지지 않도록 야물게 마무리를 해야 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소한 부분조차도 일본 장비 회사의 노하우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전기배선 쯤은 큰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 것이 덜덜거리고 흔들리고, 진동상태에 있으니까 조금씩 느슨해지고, 결국 선이 빠지고, 빠지고 나니까 어디에서 빠졌는지 쉽게 알 수 없고, 이런 일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또 볼트 같은 것을 채우는 것도 채우고 나서 빠지지 않도록, 특히 오랜 진동상태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해야 했는데, 우린 그런 노하우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좋은 스텐레스 볼트를 갖다가 채워놓고, 야물게 채웠으니까 되었겠다 싶었지만, 이 역시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기저기, 사소한 곳에서 문제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급기야는 기계 한 대당 연구원 한명씩 보초를 세웠습니다. 24시간 옆에 붙어있으면서 고장나면 곧바로 고쳐줬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국 저는 구매자에 이실직고했습니다. 반도체 생산공정 중 우리 기계가 10%를 담당하고 있으니까, 전체 생산차질이 10%이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니니, 근본적으로 해결했으면 한다. 앞으로 2주일 여유를 주면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 시급히 새로운 기계를 두 대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후 일주일 사이에 기계를 교환해 주면서, 1개월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모든 공정을 챙기겠다는 욕심을 부렸더라면, 아마도 그 때 미래산업은 망했을 것입니다. 제가 1980년대 초 창업당시에 제 꿈으로 우러러보고 그분들과 같이 되고싶어했던 분들이 셋 있었습니다. 세분 모두 한국 벤처의 선구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분이 공교롭게도 서울 상대 동문들입니다. 대기업에서 영업부서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부장까지 하다가 나와서 창업을 해서 성공했는데, 이 세분 모두 과학기술처에서 국산 1호 기술에 대해 일정기간 독점권을 주는 제도를 바탕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던 분들입니다. ‘언제 성공해 저런 분들처럼 될 수 있을까.’ 하고 한참을 올려다본 분들인데, 이 분들이 경영하는 회사는 IMF 경제위기 때 모두 퇴출돼 버렸습니다. 두 개는 이름만 남아있고, 하나는 이름조차 없어졌습니다. 그 분들은 정부의 육성정책 덕분에 처음에는 덕을 봤지만, 결국 거기에 의존하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처음에는 독점이었지만, 나중에 경쟁체제로 바뀌었고, 결국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일 제가 중앙정보부 후광을 이용하고, 그동안의 인맥을 활용하고, 중소기업 지원제도와 정책자금을 쫓아다녔다면 지금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 지인 중에는 국회의원 등 힘 있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후원회 좀 와달라, 얼굴 좀 내밀어라, 강연을 해달라 등 요청을 하면, 아무리 친한 분이라도 저는 거절합니다. 특히 정치인에게 온 우편물은 과감히 휴지통에 넣어버립니다. 처음 몇 번은 섭섭하다고들 하지만, 결국 ‘아, 저사람은 정치 근처에도 안가는 사람이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미지가 굳어지면 더 이상 섭섭한 마음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정치 뿐 아니라, 힘 있는 곳, 그런 곳은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은행조차도 가능한 한 피해갔습니다. 미래산업 성공의 비밀 사람들이 만나면 언제든지 저한테 묻는 질문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나이 먹은 사람이 첨단기술분야를 계속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까? 두 번째는 미래산업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세 번째는 왜 그 회사에는 그토록 유능한 인재들이 자동적으로 모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아닌 저희 직원들이 전부 알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미래산업에는 사훈이 없습니다. 출근부도 없습니다. 조회도 하지 않습니다. 굳이 비전을 설명하라면 우리 직원들 연구원들 머리 속에 있는 어떤 구상, 그리고 가슴속에 있는 뜨거운 열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들이 아주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회사는 단지 그 마당을 만들어 주고 돌멩이를 치워주고 다져주는, 그 역할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그 안에서 축구를 하건 진흙탕에서 뒹굴건 자유입니다. 밥을 해 먹건 죽을 끓이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즐겁게 일을 하기 때문에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아는 얘기입니다만 우리 한국 사람은 신바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합니다. 한 번 신이 나면 무서운 저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간섭하고 억누르면 절대로 성과를 못내는 것이 한국 사람들입니다. 기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997년 IMF 직전에 새로 연구소장이 왔습니다. 연구소장이 왔을 때 제가 불러놓고 단단히 말을 했습니다. 돈은 마음대로 써라. 모자라면 얻어다 주겠다. 또 사람도 마음대로 써라. 그리고 연구소 내의 모든 제도, 출근이라든지 근무, 마음대로 다 해라., 그가 어리둥절해 합니다. ‘이 영감이 괜히 해 보는 소리 아닌가.’ 바로 그 다음 날 전화가 왔습니다. 보고할 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호통을 쳤습니다. 네가 혼자서 알아서 죽고 살라고 했는데 왜 나한테 보고를 하려고 하느냐. 왜 나하고 책임을 분담하자고 하느냐. 그런데 일주일 후에 또 전화가 왔습니다.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이건 꼭 좀 보고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또 호통을 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고를 안하도록 하는데 한 달이 걸렸습니다. 위 사람한테 보고를 한다는 것은 책임을 같이 지자는 것입니다. 미래산업은 분당 서현동 삼성플라자 바로 옆에 8층의 좋은 빌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니까 연구소장은 그 빌딩 옥상에다가 일단 골프연습장부터 만들었습니다. 신원컨트리클럽 법인회원권도 샀습니다. 연구소장이 미래산업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체력단력실을 아주 깔끔하게 만들었고, 거기에 수면실까지 만들었습니다. 일하다가 졸리면 자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술도 자주 마셨습니다.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회사에서 자려고 하면 쉽게 잠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구소 근처는 먹자골목, 술집들이 널려 있으니까 술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당시 미래산업 경리를 담당하고 있는 상무이사가 있었는데, 아주 깐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연구소장은 마흔 하나, 상무는 오십살이었습니다. 상무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연구소장으로부터 술 값 영수증이 날아오는데 도저히 한마디 말 안하고는 못견딜 지경이었던 모양입니다. 연구소장을 불러다가 호통을 쳤답니다. 술을 마실 수도 있지만, 마시려면 좀 제대로 마셔라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연구소장의 술 자리는 계속됐습니다. 법인카드 영수증이 언젠가는 250만원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너무 심하다 싶어 상무가 알아보니까 술값이 100만원에 팁이 150만원이었습니다. 상무는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하고 점잖게 달랬다고 합니다. 연구소장은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했고, 하지만 술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잔소리가 가고, 규제를 하게 되고, 둘은 자주 싸우게 됐습니다. 본사와 공장은 천안에 있고, 연구소는 분당에 있는데, 연구소장에게 네 맘대로 하라고 해 놓았으니까 상식으로 볼 때 별의별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돈도 마음대로 쓰고, 근무시간도 엉망이고. 며칠씩 새우는 연구원도 있고, 이틀에 하루씩 결근하는 사람도 있고, 낮에 나가서 술마시는 사람도 있고 등등. 제가 상무를 불렀습니다. 당신 생각에는 좀 이상하겠지만, 무조건 당신은 집행해라. 당신은 돈주는 기계다. 하지만 상무는 저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저는 눈물을 머금고 그 상무의 사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경리담당 상무를 아무 잘못도 없이 내보낸 것입니다. 그렇게 그를 내보냈지만 뒤탈 없는 회사가 우리 미래산업입니다. 연구소장의 사고(?)는 여기서 그치질 않습니다. 미국에서 새로 개발된 고가의 기계설계시스템을 덜컥 산 것입니다. 제게 묻지도 않고. 물론 물을 필요도 없지만. 얼마짜리냐고 물었더니 30억원이랍니다. 그런데 60억이 넘는 장비를 거의 반 값에 샀다고 오히려 자랑합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장비는 베타시스템으로 아직까지 상업용으로는 팔린 것이 아니랍니다. 미래산업이 구입해서, 실험을 해서 실용화하는 조건으로 싸게 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 참 통이 큽니다. 그 당시 미래산업 연간매출액이 300억원 정도로,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일에 매출의 10분의 1을 집행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미래산업연구소는 한국 최고의, 한국을 대표하는 메카트로닉스 연구소가, 미래산업은 한국정상의 메카트로닉스 기업이 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메카트로닉스는 전자와 기계분야가 융합된 첨단기술입니다. 회사를 위해 일하지 말라 제가 직원들을 만나면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회사를 위해서 일하지 말라. 네 자신을 위해서 일하라. 이 말은 제가 1994년도 시무식에서 폭탄선언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한 배를 탔다. 내 회사처럼 생각하자. 주인의식을 갖자. 하지만 그 때부터 말을 바꿨습니다. 말을 바꾼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미래산업에도 신세대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생긴 것만 같지 사고방식이 전혀 달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천지 사람들 같았습니다. 회사 일에 어떤 문제가 나오면 나한테 어떤 영향이 있는가 그것부터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을 고칠 수 없습니다. 자기 부모도 소용 없습니다. 버릇도 없고 시간도 안지키고 책임감도 없고 나쁜 버릇이 많은데, 그런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재미있는 것, 간섭하지 않고 네 마음대로 한 번 해 봐라고 하면 최고로 좋아합니다. 월급 많이 주는 것, 이런 것 보다 더 좋아합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직원 통솔 방침을 바꿔야 되겠다 싶어 폭탄 선언을 한 것이 네 자신을 위해서 일해라.였습니다. 직원들이 신바람이 나서 죽기 살기로 일을 하면 회사는 그 부산물만 받아도 이익입니다. 회사를 위해서 일해라. 같이 성공하자.이런 소리는 맨날 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입니다. 자화자찬 같지만 그 때부터 저는 직업사회의 변화를 예감하고 한발 앞서 실행을 했습니다. 너 자신의 개발을 위해서 노력해라. 필요한 비용은 회사돈을 써라. 일하는 것도 스스로를 위해서 해라.부단하게 말했습니다. 공무원들도 이러한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무원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일을 하면 그 부산물로서 우리 국가도 좋아질 것이다. 또한 공무원 자신도 전문가가 되고 다 성공할 것이다. 21세기는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미 그런 시대는 20세기로 막을 내렸습니다. 조직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일하는 개인들의 능력을 회사의 이익으로 승화시키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개인과 조직간의 상생의 원리, 저는 이것이 21세기 디지털 경제시대의 조직원리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래산업을 이끌면서 지켜왔던 원리도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회사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 개인들로 구성된 회사, 이것이야말로 다가오는 미래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창조하는 기업이라는 믿음이 굳어졌습니다. 그때 우리 직원들은 사장이 미쳤다. 약간 간 것 같다. 회사를 위해서 일하지 말라니...이렇게 반문 했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공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83년 사업을 시작하면서 저 역시 남들처럼 명문대학교 이공계 출신들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단 한사람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중앙정보부 출신인데다, 사업자금도 없는데, 누가 자기 일생을 의탁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공고생 기능공 네명을 모집하고, 일본에 가서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의 유능한 퇴역기술자 한분을 삼고초려 끝에 모셔다가 기능공들을 교육시켜서 미래산업을 출범시킵니다. 그 뒤에는 지방의 공업고등학교, 영월공고라든지 전주공고, 군사공고 등에 가서 2학년생들을 1년에 30명씩 모아다가 1년동안 일을 시켰습니다. 그중 소질이 보이는 사람 서너 명을 골라, 병역특례로 남기고 나머지는 입대시키고 하는 인력 확보 순환과정을 10년간 반복해 기간요원을 길러냈습니다. 회사가 자리잡고,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면서 제게 욕심이 생겼습니다. 남의 자식도 데려다가 잘만 기르면 물건이 되는구나. 이들을 완전히 내 가족으로 만들어야겠다. 이런 생각에 꾸준히 의식교육을 시키기 시작합니다. 인재들이 스스로 모여드는 회사 폴 마이어(Paul Meier)라는 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행동철학가로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이 분이 만들어 놓은 교육 프로그램으로 ‘엘엠에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기업이나 개인이 어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것을 생생하게 상상해서 그것이 그대로 되어 지기를 깊이 원하고 그리고 행동에 옮기면 현실로 바뀌어 진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론들을 제시합니다. 이 방법론의 습득을 위한 시청각 교재도 있고, 전문교관이 매일 하루 한시간씩 3개월을 교육하기도 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수강료가 1인당 200만원 정도로 상당히 비싼 편입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제시하는 방법론의 핵심은 ‘두 마이 리스트’입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것인데, 오늘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카드에 분 단위로 씁니다. 일어나서 양치질을 하고, 그 다음 화장실에 가고,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이렇게 써내려 가면서 저녁에 결산을 합니다. 이 카드를 죽는 날까지 계속 써 가라는 것입니다. 직원들에게 이 프로그램을 가르치기 위해 1994년 한해 동안 1억4000만원을 투자했습니다. 큰 돈이었지만, 전 간부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교육을 받고 난 후 처음에는 눈빛들이 변합니다. 열기가 느껴지고, 회사가 일종의 유사종교 집단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손뼉치고 노래하는 것처럼 회사가 들끓기 시작하는데, 제 자신이 고무될 정도였습니다. 직원들 중에는 이 교육을 혼자 받기 아깝다 해서 부인과 합동으로 받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달이 지난 후 간부들 몇몇이 모인 자리에서 ‘두 마이 리스트 있는 사람 내 보세요.’ 했더니 세사람이 나섭니다. 나머지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지금은 안한다고 합니다. 3개월 후에 다시 물어봤습니다. 한사람만 남았습니다. 그 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부모도 하지 못한 인간개조, 의식개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종교도 못하는 일 아닙니까? 종교도 잘 못하는 일을, 어떻게 제가 남의 자식을 인간개조, 의식개혁 하겠다고 도전을 했는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우선 적합한 사람을 골라써야 하겠다. 그리고 적합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들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하겠다.’ 미래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무엇인가, 또 이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필요한 기업문화는 어떤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회사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 유능한 사람들이 제 발로 걸어서 미래산업에 모여듭니다. 연구소에 지금 110명의 알토란 같은 연구원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적합한 비교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들 모두가 탄탄한 이력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창업 초기에는 공고생밖에 구할 수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스탠포드 대학, 뉴욕대학 등 세계 유수대학 출신만해도 30명에 이르고, 이중에는 외국인도 있습니다. 또 대다수 연구원들이 서울대, 포항공대, KAIST 등 국내 명문대 출신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들의 학벌이 아니라, 이 분야에서 남들이 탐내는 인재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이들이 모여 일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선발하고 또 정선하고, 양성해서 회사가 꼭 필요한 사람으로 키우는 일련의 과정은 중소기업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부담입니다. 골라 쓸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입니다. 나 혼자 좋은 사람 다 골라 쓰면 다른 기업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A기업에서는 꼭 필요한 사람이지만 B회사에서는 그렇게 절실하지 않고, 이런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노동의 유연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이러한 직업관, 노동시장의 변화를 읽고, 준비한 것이 적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래산업은 인재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여든 직원들이 직장생활하면서 갖는 가장 큰 희망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임원이 되고 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래 전부터 이 미래산업의 경영은 직원 여러분들한테 물려 주겠다. 나를 이어서 최고경영자(CEO)가 될 사람은 여러분들 중에서 나온다.고 공언해 왔습니다. IMF 경제위기는 제 개인 가정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남매를 뒀는데, 딸이 위로 셋입니다. 그런데 IMF 때 사위 셋 중에서 두 사람이 실직을 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제 딸들, 집사람 그리고 사돈들 모두 아버지가, 남편이, 사돈이 미래산업 사장인데 사위들 어떻게 챙겨주겠지하고 기대했고, 실지로 부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또 밑으로 아들이 둘이라 다 출가를 시켰습니다. 며느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며느리에게는 남모를 애착이 가고, 딸과는 다른 애정이 느껴집니다. 뭐든지 들어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그렇습니다. 그런 며느리가 어느날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시아버지가 경영하는 미래산업에 대해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회사를 한번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거절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내를 빼놓고는 자식들과 가족들 누구에게도 회사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회사를 보고, 좋게 느끼게 되면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물러준다고 했는데, 자식들이 자꾸 들여다보고, 며느리가 들여다보고, 그러다 보면 탐을 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좇는 착한 기업이 되자 지난 1월 4일 제가 퇴임 이사회를 하면서 한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미래산업을 착한 기업으로 이끌어 달라. 이 당부에 앞서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돈을 열심히 벌고 돈 버는 사업에 주력을 해왔는데 앞으로는 돈을 바르게 쓰는 일에 주력을 하겠다. 생산적인 자선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 착한 기업이란 기업윤리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기업입니다. 기업의 시스템을 안팎으로 윤리적으로 구성해 놓으면 무슨 특별한 경영기법을 도입할 필요도 없고,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좇으면 됩니다. 기업의 진리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상도의(商道義)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상도의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상이란 서로 주고 받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요즘 말하는 공정거래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상도의는 공정거래를 원칙으로 지키라는 의미, 반드시 남에게 가치를 주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도의는 2천년전에도 진리이고, 오늘날에도 진리이고, 미래에도 진리일 것입니다.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저는 수십건의 사업계획서를 접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제게 직접 또는 간접으로 사업계획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수십건의 사업계획서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계획서를 보면 사업 제목이 있고 방법이 있고 연도별 매출을 어떻게 올려 이익을 얼마를 내겠다는 등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결 같이 목표가 1년내 코스닥 등록, 혹은 2년 후 코스닥 등록 이런 식이었습니다. 요컨대 코스닥 등록이 사업목표였습니다. 어떤 제품을 만든다든지, 신기술을 개발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코스닥 등록을 위한 포장,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투자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그럴듯하게 사업을 보이게 하는 악세사리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돈을 버는 것은 코스닥 등록에서 버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단이었습니다. 호통을 쳤습니다. 코스닥등록은 사업을 더 잘 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수단과 목표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머리가 비상합니다. 그런데 꾀를 가지고 사업을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꾀, 술수가 횡행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IQ(지능지수)와 EQ(감성지수) 외에 한국사람에게는 JQ라는 것이 있다고. JQ가 뭐냐 하면 잔머리지수, 잔재주지수입니다. 코스닥이 무너지고 닷컴 기업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JQ로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착한 기업인이 착한 기업을 만든다 착한 기업이 존재하려면 착한 기업인이 있어야 합니다. 기업에서 중요한 것은 선견력입니다. 특히 CEO의 덕목에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예상을 하고 오늘부터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우선순위에 꼽힙니다. 그런데 CEO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가슴 속에 욕심을 품고 있으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마음을 맑게 해야 앞을 볼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진리에 자신의 상황을 견주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아주 절실한 어떤 선택의 기로, 예컨대 회사의 문을 닫아버릴 것이냐 또는 앞으로 주력 사업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이냐 등 중대 결정의 상황에 부딪쳤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일 CEO가 불교신자라면, ‘부처님이라면 무엇을 선택했을까’하고 물어보십시오. 제게도 그런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1996년 11월에 미래산업을 증권거래소 시장에 상장할 때입니다. 기왕에 받은 거래소 상장 승인을 취소하고 새로운 제도로 새롭게 신청하면 200억원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이 제안을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 저는 예수님께 여쭸습니다. 제가 예수님이라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저는 거부했습니다. 그 결정 후, 많은 사람들이 제게 보통 장사꾼이 아니라 큰 장사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200억을 더 챙긴 것보다, 그 것을 거부하고 원칙대로 밀고 나간 결과 금전적으로도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미래산업의 원칙경영, 상도의 경영이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됐고, 주가도 그만큼 올랐습니다. 당장의 200억원 보다 10배 이상의 금전적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착한 기업을 이끄는 착한 CEO의 또다른 덕목은 자기희생입니다. 자기가 희생을 하고 행동으로 본을 보여야 따라 옵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고 이론을 앞세우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백약이 무효입니다. 자기 희생을 통해서 먼저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회사 돈을 사사로운 용도로는 일전 한 푼도 안 쓰고자 했습니다. 손님이 와서 차 한 잔 같이 마시는 것은 회사를 위한 일이지만, 개인적인 편안함을 위해, 예컨대 혼자 출근해 비서가 타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은 사사로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마시는 커피는 따로 기록해 두고, 한달에 얼마씩 계산했습니다. CEO가 이렇게 하면, 회사 임원 누구도 함부로 회사돈을 쓰지 않습니다. 사업초기 저는 시간이 나면 직접 은행 심부름도 하고 우체국도 다니고 화장실 청소도 했습니다. 사장이 화장실 청소하는데 어느 임원이 어지르겠습니까? 꽁초를 어떻게 버리고 하겠습니까? IMF 경제위기 때보다 나아졌다고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요즘 경제가 무척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래산업 임직원들이 그러한 어려움을 헤쳐나갈 것으로 믿습니다. 기업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존과 발전을 계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기업과 임직원, 기업과 사회와의 약속이며, 미래산업은 약속을 지키는 위대한 유산을 갖고 있는 기업, 착한 기업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질문∶퇴직 후 거액을 사기 당하고 다시 재기에 성공하셨는데 그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저 역시 돈 때문에 자살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 곳에서 강사로 불려다니는 이유 중 하나가 제가 탄탄대로를 밟으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 모두와 함께 죽으려 했던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성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돈에 대해 한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자식들까지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돈에 대한 한을, 제 나름대로, 제 방식대로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을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질문∶미래산업의 경영을 아주 잘 하셨는데 물러나셔 가지고 만약에 미래산업의 미래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답변 : 그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이미 제 손에서 떠나 버린 일입니다. 경영을 물려주면서 제가 가진 주식까지 다 나눠주려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이미 미래산업 간부들은 다 부자가 되어 있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이 돈으로 보다 의미있는 일을 하자고 결론 지었고, 이렇게 해서 제 개인과 미래산업과는 계산이 끝났습니다. 물론 제가 창업한 회사인만큼 영원히 잘 되기를 희망하고, 제가 힘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만, 그것이 잘 되고 안되고는 더 이상 제 소관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질문∶연구원들을 굉장히 자율적으로 일하도록 보장해 주시는 것만으로는 연구원들이 회사를 위해서 연구를 잘 할거라고 생각이 되지는 않습니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을 것 같은데요. ▷답변∶젊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것일 겁니다. 사장이 하는 일을 보니까, 정말 우리가 이대로 하다 보면 말한대로 회사가 우리에게 물려 오겠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 믿음이 행동이 되고, 행동은 결실이 되는 것 아닙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최고경영자가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먼저 본을 보이면, 그래서 믿음이 쌓이면 직원들은 따라 옵니다. 제가 10년 만에 자체 공장을 마련했을 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부천에서 10년동안 남의 공장 빌려 쓰다가, 천안 공업단지 허허벌판에 미래산업의 공장 1호(22만평단지 최초공장)를 짓고 이사를 하는데, 직원 157명중 156명이 저를 따라 천안으로 이사왔습니다. 그 한명도 개인사정상 어쩔 수 없이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미래산업이 유명해진 거죠. 도대체 어떤 회사길래 수도권을 떠나 시골로 이사를 가는데 직원들이 낙오 없이 따라가느냐 하는 얘기였습니다. 그 때 저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가 크고 작고가 문제가 아니라, 남의 자식들 모아 회사하는데,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 그 이후는 모두 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사종교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문술교’라고나 할까요.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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