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면 누구나 추억은 있게 마련이다. 일곱 살짜리도 말할 때 보면 “옛날에 ··· .하고 말하는 것을 볼 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제각기 지닌 삶의 무게가 틀리듯이 아마 추억하는 일들도 제각각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만들어 낸 신조어 중에 가장 대중 속을 파고들었던 단어가 있다면 아마 세대를 아우르는 뜻이 담겨 있는 7080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 최소한 중고등학교에 다녔다든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는 정말 그 시절이 마음의 고향을 불러내는 향수 鄕愁와 같을 것이다. 한 번쯤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난 두말하지 않고 한곳을 말하리라. 최소한 60대 이상 사람치고 옛날 다방에 잊지 못할 추억이 한 자리 없는 사람 있을까?
70년대의 다방만 해도 낭만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고, 눈물 또한 공존 했음을 잘 안다.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 시름을 덜어낸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멋들어진 추억도 있다. 어쩌다 열리는 축구 국제시합이라도 열리는 날은 단체 관람장이 되었고, 어른들은 사랑방으로, 젊은이들은 만남의 광장으로, 또 죽돌이라는 속어와 함께 맞선 공간도 되었고 기타 등등의 필요로 이용되던 한마디로 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명소였음을 새삼스레 느낀다.
언제나 계산대에 중년 여성이 마담으로 앉아있고, ‘레지’(lady)라고 불리는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커피를 날라주는 동안에 구슬픈 뽕짝 가락이 손님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그런 형태였다. 시골 읍내는 말할 것도 없고, 시내 중앙통에 있는 다방의 마담이나 레지와의 사연 한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인의 사무실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다. 문학과 예술을 불태운 아지트이기도 했다. 다방을 커피숍이나 카페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단어에서 오는 어감 또는 질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오랫동안 다방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었다. 거리엔 한 집 건너 한집이 있었고,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셔야 사는 사람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과거에 허장강이라는 유명 배우가 다방에 앉아 ”00 마담 이번 일만 잘되면 말이야~“ 운운하며 다방 마담을 꼬드기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었다. 1970년대 신문기자들이 아침에 다방에 가서 일을 보기 시작하며 마시던 커피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계란 노른자를 띄운 모닝커피가 되었다. 어느 다방은 거기에 참기름 두 방울을 친 국적 불명의 모닝커피를 만들었고, 아니면 계란 반숙이나 프라이를 서비스하기도 했다.
또 기자들이 만들어 낸 그것 중에 전날 술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 위티나 하이볼을 주문했다. 위티는 위스키+티, 하이볼은 위스키+소다수 음료다. 60년대에는 외래품 단속으로 한동안 커피, 홍차, 코코아 등을 팔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생겨난 것이 인조 커피도 있다고 한다.
인조커피란 커피대신 콩을 볶아 콩피를 내놓기도 했다고 한다. 70년대 들어선 담배꽁초를 섞어 커피를 끓였다는 ‘꽁피사건’이 커피 애호가들을 화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미제 커피 찌꺼기에 톱밥과 콩가루 계란껍질을 섞어 만든 가짜 커피 사범도 잇달아 적발됐다.
그러는 와중에 커피 수입이 자유화되었고, 70년대 후반에는 커피 자판기가 등장했다. 집이나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맛있고 질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오디오의 놀라운 보급으로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사람들은 터진 공간에 쭈그려 앉아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홀짝이다가 차츰 저만의 오붓한 공간에 들어앉아 쉬기를 바라는 쪽으로 변해갔다.
다방은 80년대 이후 급격히 침몰했다. 술집이나 서구식 커피숍으로의 업종 전한이 빠르게 이어졌고 일부는 매춘을 겸한 티켓다방으로 변질하여갔다.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사람들도 다방을 아쉬워하며 사무실로 옮겨야만 했다. 따라서 물들인 군용 점퍼를 입고 컴컴한 구석에서 담배를 피워대던 예술 청년들도 다방 문화와 함께 어느 날부터 사라졌다.
45년 해방과 함께 서울에 60개 정도의 다방이 있었다. 이후 50년 말엔 그것이 1천2백 개로 늘어났고, 63년엔 다시 800개 정도로 줄었다가 71년 1천4백 개, 72년에는 3천 개, 80년엔 4천 개, 87년 9천 개, 89년 1만1천 개로 늘어났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80년대에 늘어난 것은 ‘주다야싸’로 주간은 다방 야간은 술집이 대종을 이루었다고 한다.
사실 이때부터 진짜 다방은 죽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골동품 수준으로 몇 곳만 남아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뒤 씹고 있다.
자, 그렇다면 다방이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진 때가 언제인가 알아보기로 하자. 동양 문화권의 경우 8~9세기에 와서야 본격적인 차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사에 나타난 차 종자의 이식 시기를 828년 무렵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이미 차를 마시기 위한 ‘다연원’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경주 창림사 터에서 출토된 와당에 새겨진 ‘다연원’이라는 글자가 우리나라 차 문화를 알리는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방이란 단어는 고려 시대에 처음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 다방이 아니다. 고려와 조선의 다방은 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국가기관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국가적인 모든 행사에는 진다라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그때의 주무 관서가 바로 이 다방이었다.
오늘날의 다방은 커피의 전래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미국이나 영국 등의 외교사절이 들어오면서 커피를 마시는 풍속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고종황제가 있었다. 고종황제는 아관파천으로 1896년의 근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했다. 고종은 그 1년간 커피를 즐겨 마셨을 뿐 아니라 경운궁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정광헌이라는 서양식 다방을 지어놓고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외국 사신들과 연회를 열기도 했다.
명성황후를 잃은 슬픔을 커피로서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종과 황태자가 마실 커피에 독을 탄 독차 사건이 터진 것이 1898년이었지만 그 후에도 고종은 커피를 찾았다고 한다. 1902년 독일계 러시아인이 정동에 세운 ‘손탁 호텔’은 서울에 지어진 첫 번째 호텔식 다방이었다. 손 탁은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버르의 처형으로 1885년 10월 베버르가 공사로 부임해 올 때 같이 서울에 왔다. 손 탁은 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경운궁에서 도로 하나 건너편에 있는 서쪽의 땅과 집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정성껏 모신 것에 대한 답례였다. 그러다가 1902년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서양식 집을 지어 호텔을 경영했는데 아래층에 식당이 있고 또 그 곁에 다방이 있어 한국의 대신들도 외신을 만날 때 이 다방을 자주 이용했다. 이른바 서울에서의 다방의 효시였다. 이 호텔은 한일 병합 후에도 주인은 바뀌었지만, 국내에서 유일한 서양식 호텔로 그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1918년 이화학당에서 손탁 호텔을 인수해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3년에 이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3층 건물을 지어 프라이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오 키도’라는 이름의 2층 살롱이 서울에 나타난 것은 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대고 일본인이 주인이었고 아래층에서는 양주를 팔고 2층에서는 차와 식사를 겸했다고 한다. 지금은 헐렸지만, 한국은행 맞은편, 옛 제일은행 본점의 서쪽에 있었으며 조선 호텔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 나라 안에서 최고의 식당이고 찻집이었다고 한다. 기생을 데리고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는 것이 흉이 아닌 시대였다. 밤중까지 귀공자 貴公子와 미기 美機가 사랑을 나눴다고 한다.
(다음 편에 계속)
첫댓글 작가님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즐거운 명절 보네세요. 감사합니다.
지식이 풍부한 글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를
좋은 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 즐거운 명절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