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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9) 앙게랑 콰르통의 ‘자비의 성모’
하늘 아래 교황이 둘… 분열된 교회를 감싸는 성모님의 망토
- 앙게랑 콰르통, ‘자비의 성모’, 캐다드 제단화, 1452년경, 콩데 미술관, 프랑스 샹티이.
70여년 만에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재위 1370~1378)이 드디어 로마로 돌아왔다. 교황령을 수호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프랑스 국왕과 추기경단에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로마에 있기 때문이라거나 로마의 신자들이 목자 없이 70년을 살았다는 말은 실리적인 명분이 되지 못했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그들의 이런 생각을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로마 귀환 15개월 만에 선종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앞서 클레멘스 6세(재임 1342~1352) 교황의 조카로 삼촌이 19살에 추기경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줄곧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며 공부하고 여행했다. 페루자대학교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를 여행했다. 1367년 복자 우르바노 5세 교황이 로마를 찾았을 때, 그를 안내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1370년 우르바노 5세 교황이 사망하자 아비뇽에서 콘클라베가 열렸고, 이탈리아 추기경단과 프랑스 추기경단의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제3의 인물로 떠올라 그레고리오 11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시에나 카타리나의 간절한 요청과 충고를 들었고, 로마 백성에 대한 연민과 중요성을 인식했다. 우르바노 5세 교황이 한 번 귀환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경험도 잘 알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 중에 있었고, 피렌체 공국이 주변의 영지를 넓혀가면서 교황의 환도를 방해했다. 그런데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로마교구장으로서 더는 교구를 비워둘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목숨을 건 환도를 감행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377년 1월 7일 로마에 무사히 당도했다. 아비뇽에서 출발한 지 4개월여 만이다. 환도를 결정한 때부터 긴 여행까지, 교황은 기력이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졌고, 귀환 15개월 만에 선종했다. 48세였다.
로마계와 아비뇽계 교황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사망으로 이번에는 로마에서 콘클라베가 열렸다. 다시 긴장감이 돌았다. 로마 백성들은 프랑스인이 아닌 이탈리아인 교황으로 뽑아달라고 압력을 넣었고, 로마 출신 바르톨로메오 추기경이 우르바노 6세 교황(재위 1378~1389)으로 선출되었다. 로마교구 신자들은 또다시 목자 없는 신세가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프랑스 추기경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에서 뽑힌 교황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효라고 선언하고 아비뇽에 모여 프랑스인 클레멘스 7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해 버렸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로마로 복귀했으나 아비뇽 시절을 겪으면서 발생한 교회 혼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것을 시작으로 교회는 40년 동안 극심한 분열기를 맞게 되었다. 서방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분열이었다. 이것은 신학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인 문제로 일어난 분열이었다.
양쪽 진영에서 계속해서 후계자를 내면서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정통 교황으로 인정되는 로마계는 우르바노 6세에 이어 보니파시오 9세(재위 1389~1404), 인노첸시오 7세(재위 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재위 1406~1417)였고, 아비뇽계는 클레멘스 7세에 이어 베네딕토 13세(재위 1394~1417)가 후임 교황이 되었다.
로마계와 아비뇽계의 교황이 재임하는 동안 유럽도 두 동강이 났다. 로마계에 순명을 선언한 국가는 영국, 포르투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폴란드, 헝가리, 아일랜드,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국가들과 플란데런의 세 개 왕국들이었다. 아비뇽계에 순명 서약을 한 국가는 프랑스, 아라공, 카스티야, 키프로스, 부르고뉴, 나폴리, 스코틀랜드, 시칠리아와 사보이 공국이었다. 더 당혹스러웠던 것은 양쪽 진영에서 각자 성인들까지 나섰다는 것이다. 로마계에서는 시에나의 카타리나가 로마에서 뽑힌 교황이 정통이라며 백성을 설득했고, 각국의 정치인들을 만나 설득했다. 아비뇽계에서는 빈센트 페레르가 나와서 클레멘스 7세를 응원했다. 두 사람 다 후에 성인품에 올랐다.
분열이 종식되기까지
이런 분열의 양상이 지속되자,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409년 3월 25일, 양측 추기경들은 피사에서 교회 회의, 곧 공의회를 열어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공회의 결과는 베네딕토 13세와 그레고리오 12세를 둘 다 해임하고, 밀라노의 대주교 필라르기를 알렉산드로 5세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러자 두 교황이 사임을 거부하고 공의회 교황을 인정하지 않자, 결국 교회 안에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공의회는 교황이 3명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누가 정통이냐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세 명을 모두 퇴진시키고 새 교황을 선출하기로 했다. 그 사이, 피사계의 후임으로 요한 23세가 뽑혔다. 이런 막장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가 나섰다. 1414년 황제는 독일의 코스탄자에서 세 명의 교황을 모두 소집했다. 비록 황제가 소집했어도 참석한 주교들은 교회 공의회로 간주했고, 공의회 교부들은 ‘공의회 지상주의’와 교황 선출은 콘클라베가 담당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피사계 요한 23세를 해임하고, 끝까지 사임을 거부한 아비뇽계의 베네딕토 13세를 폐위시켰다. 로마계 그레고리오 12세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 ‘공의회 권위’를 인정한다며 자진 사임했다. 이어서 새로 콘클라베를 열어, 로마의 명문가 콜론나 가문 출신의 오도네 추기경을 마르티노 5세 교황(재위 1417~1431)으로 선출해 분열을 종식했다.
프랑스 미술계 독창적 명작 남긴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르네상스 시기, 프랑스 북부 지방 출신으로 화가 겸 세밀화가로 활동한 앙게랑 콰르통(Enguerrand Quarton, 1418?~1466)의 ‘꺄다흐 제단화(Retablo Cadard)’다. 흔히 ‘자비의 성모(La vierge de misricorde de la famille Cadard)’(1452년)로 알려졌다.
콰르통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 랑(Laon)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로베르 캉팽, 얀 반 에이크 등 플랑드르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며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르네상스 시기, 프랑스 미술에 독창적인 명작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444~1445년경, 아비뇽의 프티 팔레 미술관에 있는 ‘레퀴엠 제단화’를 그렸고, 같은 해에 샹티이의 콩테 미술관(Muse Cond)에 있는 ‘캐다드 제단화’를 그렸다.
‘꺄다흐 제단화’ 또는 ‘자비의 성모’라는 이 작품은 원래 (프랑스) 아를에 있는 한 성당의 제단화로 사용하기 위해, 잔 쨔다흐와 그의 아내 잔느 드 몰링이 자기네 집안 수호성인인 요한 세례자와 요한 사도가 있는 ‘자비의 성모’를 콰르통에게 의뢰하여 봉헌했다. 제단화 관련 문서에는 하단의 프레델라와 꼭대기 치마사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찾을 수 없으니 분실된 것으로 본다. 이후 콰르통은 잠시 아를에서 활동하다가, 1447년 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비뇽에 있었다.
아비뇽은 과거 70년간 7명의 교황이 머물면서 많은 왕족, 귀족, 학자, 시인,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문화 예술의 중심지가 됐다. 아비뇽 학파로 불린 예술가들은 15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는데, 콰르통은 그 대표적인 예술가로 손꼽힌다.
그림 속으로
‘성모의 대관식’과 함께 콰르통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자비의 성모’는 콩데 미술관 조토 갤러리(Le Cabinet du Giotto)에 있다. 그림은 이콘 형태로 비교적 단순하다. 양쪽 끝에, 좌측에 요한 세례자 요한, 우측에 요한 사도가 제단화를 후원한 꺄다흐 부부를 성모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성모의 망토 밖에 있어 아직 현실의 인물임을 말해준다.
성모의 망토 속에는 교회의 ‘대분열’시기에 유독 명이 짧았던 여러 인물이 있다. 로마와 아비뇽계 교황들과 양쪽 교회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모두 성모의 망토 속에 들어 있다. 교회가 안팎에서 그토록 싸우고 쪼개져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마리아의 망토를 빌려 여전히 교회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작품에 붙은 부제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과 화해한 교회의 모습!’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0) 바크라프 브로지이크의 ‘콘스탄츠 공의회의 얀 후스’
혼란과 이단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교회
- 바크라프 브로지이크, ‘콘스탄츠 공의회의 얀 후스’(1883년), 프라하 구시가지 시청 내 브로지이크 홀 소장.
교회 분열의 후유증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 후유증은 교회 안팎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 이후, 교황이 3명씩 나오는 초유의 사태를 겪는 동안 유럽의 지성계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을 거라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다.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른 일을 묵묵히 찾아서 하는 사람들도 있고,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며 크게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도 있었다. 100년 후에 일어날 종교 개혁의 선구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파들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개혁이 필요한 시대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도 ‘이단’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극단적이고 반교회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다. 이번에는 이들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반교회 운동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신학자며 종교 개혁가로 불리지만, 원래는 가톨릭교회 사제였다. 옥스퍼드대학교 퀸즈 칼리지를 졸업한 후, 발리올 칼리지에서 교수로, 켄터베리 칼리지에서 원장을 지냈다. 그는 가톨릭교회 교리의 핵심인 ‘실체 변화(transubstantiation)’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후 그가 제기하는 모든 반교회 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그는 1374년 세금 문제로 교황청과 잉글랜드 간 협상이 있을 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를 동행하여 사절단으로 아비뇽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교황도 영국 왕실도 문제가 많았고, 영국의 고위 성직자들은 부유했다. 성직자의 절반 이상이 사목에는 관심이 없고, 신학에는 무지했다. 그렇다고 마땅한 해결책도 없었다. 성직자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인구 65명당 성직자가 1명씩 있는 꼴이었다. 또 영국 교회가 유럽의 다른 나라 교회들보다 부유한 것도 문제였다. 영토의 3분 1일이 교회 소유였다. 위클리프가 보기에 수도회들도 위기였다. 수도자들은 돈이 많았고, 권위와 영향력을 앞세워 본래의 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탁발 수도승들을 ‘새로운 이단자’로 규정했다. 백성들은 순례, 성인 유해 공경, 전대사 등으로 신앙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겉으로만 그렇다고 보았다.
위클리프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하고, 후원 시스템을 전면 수정해야 하며, 교회는 사목에만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막 아비뇽 시대를 청산하고 로마로 귀환한 교황청이 부패했다며 개혁을 주장했다. 가톨릭교회의 수도원 제도를 비난하고, 교황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과도한 비판으로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이단 행위를 멈출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했다.
1382년,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백성에게 복음의 진리를 직접 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훗날 「위클리프 성경」으로 알려지게 될 바로 그 성경이다. 그때까지 성경은 예로니모 성인이 70인역에서 번역한 라틴어 성경이 전부였다. 따라서 라틴어를 아는 소수의 성직자만 성경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이에 위클리프는 성경이 “백성의, 백성에 의한, 백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장은 훗날 링컨이 민주주의를 주장할 때 인용하기도 했다. 위클리프의 영어 번역은 히브리어와 희랍어 원문보다는 예로니모 성인의 라틴어 번역본 「불가타」를 기초로 했다. 성경의 영어 번역은 영국 내에서부터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바로 그해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지진 때문에 조기에 종료되는 바람에 일명 ‘지진 회의’로 불리기도 한다. 대주교는 회의에서 위클리프가 주장한 10개 사안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14개 오류를 지적했다. 위클리프는 자신의 본당 루터워스에서 쫓겨났고, 2년 후에 사망했다.
체코의 얀 후스, 설교 금지 당해
그의 영향은 체코의 신학자 얀 후스(Jan Hus, 1372~1415)에게로 이어졌다. 후스는 프라하의 카렐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400년부터 교양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가톨릭교회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402년, 카렐대학교 총장이 되자 체코인들에게 독일에 맞설 것을 독려했고, 체코어의 철자법을 개혁하여 저술 활동에 활용했다. 설교와 저술로 교회의 타락을 고발했고, 대사 규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본래의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고위 성직자와 독일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는 위클리프와 달리 대중 설교를 통해 개혁을 주장한 첫 번째 인물이기도 했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드로 5세 교황은 교서를 통해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단죄했고, 프라하 대주교에게 후스의 설교를 금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스는 교황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고, 훗날 프로테스탄트들이 들고 나올 문장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운명 예정설, 오직 성경·오직 은총, 베드로의 수위권 거부, 교황 권위의 무효 등을 주장했다. 교회는 거룩하지도 않고, 교회에 대한 순명은 성직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교황청은 로마로 직접 와서 입장을 밝히라고 했고, 후스는 거부했다.
1414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하며,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공의회 참여를 독려했다. 후스는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에게 30건의 고발 목록을 비준했고, 그의 저작 중 세 개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틀간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체코 대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바크라프 브로지이크(Vclav Brok, 1851~1901)가 그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해명하는 얀 후스’이다. 체코를 대표하는 화가 브로지이크는 젤레즈니함므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행히 이른 나이에 프라하 외곽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크면서 회화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생겼다. 함께 성당에 다니던 친구의 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주선해 준 덕분에 17살에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1871년에는 드레스덴 아카데미아, 1873년에는 뮌헨 미술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뮌헨 미술원에 있는 동안 독일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칼 폰 필로티(1826~1886)을 만났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76년부터 파리에서 살며, 살롱 드 파리에서 금상을 받으며 파리 문화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파리의 부유한 미술품 거래상 찰스 세델메예라의 딸과 결혼하며 엘리트 예술가로 이름을 올렸다. 1893년부터 프라하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하며, 프라하와 파리를 오갔다. 1896년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선정한 불멸의 화가 40인에 선정되었고, 죽을 때까지 파리 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이름을 올린 첫 번째 체코인이 되었다. 말년에는 풍경화, 농민 중심의 인물화, 역사화에 집중했다. 갓 쉰을 넘긴 나이에 지병인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파리의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있다.
그림 속으로
작품은 원래 브로지이크의 장인이 소장하고 있던 개인 소장품이었다. 작품 속에서 얀 후스는 옥좌에 앉아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 앞에서 왼쪽의 교황과 공의회 교부들에 둘러싸여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교회는 그에게 이단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항들을 철회하라고 명했고, 후스는 거부했다. 그림 속 장면은 암울한 역사적인 순간을 말하는 듯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후스의 강한 의지를 반영한 듯, 고딕 양식의 기둥 배경이 압도적이다. 결국, 후스는 이 자리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415년 7월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의 제자 프라하의 지롤라모는 콘스탄츠로 달려와 지기스문트에게 약속과 다르지 않으냐고 따졌고, 그 역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얀 후스가 30년 전에 사망한 위클리프의 추종자였고, 후스의 이단 논문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밝혀져 위클리프의 시신도 다시 파내 불에 태워졌다. 이로써 1414~1418년, 온 유럽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단 논란을 종식하는 동시에 지난 40여 년간 세 명의 교황까지 나와 유럽 교회를 흔들었던 서구 대이교 논란을 종식시킨 장(場)이 되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1)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 박사들의 행렬’
비잔틴 학자와 저명 인사들의 화려한 방문, 르네상스를 견인하다
- 베노초 고촐리, ‘동방 박사들의 행렬’(1459~1460),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내 메디치 경당, 이탈리아 피렌체.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와 서구 교회의 분열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콘스탄츠 공의회 결과는 얀 후스를 단죄하고, 마르티노 5세(재위 1417~1431)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는 것으로 그간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잔틴 쪽에서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자 비잔틴 제국과 교회가 동시에 위기에 몰렸고, 서방 교회에서는 후스의 추종자들이 공의회 우위설과 교황 수위권을 공격하며 기승을 부렸다.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가 열리기까지
마르티노 5세 교황은 비잔틴 교회의 위기를 계기로 동ㆍ서방 교회의 화해를 모색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교회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1431년 스위스 바젤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공의회를 열기도 전에 교황이 사망하고 공의회는 의제만 내놓은 채 무산되고 말았다.
후임 에우제니오 4세(재임 1431~1447) 교황은 1438년 1월 자리를 이탈리아 페라라로 옮겨 공의회를 소집했고, 비잔틴 제국의 대사와 교회 수장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페스트가 포(Po)강 유역을 덮쳐 페라라 공의회는 다시 위기에 몰렸다. 또 밀라노의 비스콘티 군대가 에밀리아의 교황령을 정복했으며, 그리스 정교회 대표를 맞이할 만한 교황청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이에 피렌체 공국의 코시모 데 메디치(‘코시모 국부’로 알려짐)가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의 특사로 페라라에 파견되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공의회에 참가한 교부들과 손님들을 환대했다.
코시모 국부는 1434년 1년간 피렌체의 기득권에 밀려 쫓겨났다가 돌아온 이후, 피렌체의 시민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뚜렷해지던 상황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피렌체로 자리를 옮겨 공의회를 이어갈 것을 제안했고, 1439년 1월 10일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페라라 공의회 회기를 닫고, 피렌체 이전을 결정했다.
이런 배경에는 3년 전인 1436년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을 초대하여 피렌체 두오모 축성식을 한 것이 있었다. 필립보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하고 메디치 가문에서 전적으로 후원하여 거의 100년간 지붕이 뚫린 채 있던 대성당의 지붕을 얹었다. 오랫동안 피렌체의 수치였고, 피렌체 시민들의 숙원이 완성된 기쁨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축성식을 했다. 더 앞서는 대립교황이었던 피사 공의회 출신 계열의 요한 23세 때부터 메디치은행이 교황청 주거래 은행이 되면서 나름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도 작용하였다. 더욱이 코시모 국부가 교회 몫의 비용을 모두 떠안겠다고 했다. 그것이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가 된 이유다.
르네상스 문화 ‘만끽’
1439년 1월 27일 교황이 피렌체에 도착한 날, 피렌체는 축제를 선포하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크게 환영했다. 정교회의 요세프 2세 총대주교는 2월 11일에 도착했고, 비잔틴 제국의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는 2월 15일에 도착했다. 황제의 입성은 커다란 구경거리였다. 피렌체 공화국 총리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비잔틴 제국의 최고의 인사들을 맞아 유창한 그리스어로 그들을 영접했다. 정교회의 대표들은 피렌체 공화국의 유력한 가문들에서 제공한 궁에서 묵으며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르네상스 문화를 만끽했다.
공의회는 2월 26일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에서 개최되었고, 그해 6월 정교회 총대주교 요세프 2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에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피렌체는 가진 모든 인력을 동원했다. 인문주의 학자들 사이에는 훗날 니콜라오 5세 교황이 되는 파렌투첼리도 있었다.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등 예술가와 건축가도 있었다. 스콰르차루피와 같은 음악가와 코스카넬리와 같은 수학-천문학자도 있었다. 레오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교황청 서기관으로 에우제니오 4세 교황과 함께 참가했다. 비잔틴 학자들은 피렌체 도서관에 기증할 수백 권의 그리스어 사본을 가져왔다.
그리스 과학과 사상은 피렌체 인문주의 세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고, 정교회 총대주교와 황제를 동행한 성대한 행렬은 대단히 이국적이었다. 특이한 용모와 장식, 의복, 관습과 의식은 그 자체로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예술가와 작가들의 상상력에 강한 자취를 남겼다. 피렌체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실제로 사는 것 같았다.
그해 7월 6일,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두오모)에서는 체사리니 추기경과 베사리오네 추기경이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두 교회의 재결합을 장엄하게 선포했다. 11월 22일에는 아르메니아인들과의 일치가 선포되었고, 공의회 폐막 이후에도 계속된 노력으로 1441년에는 이집트 콥트 교회와 일치도 승인되었다. 그러나 이런 양측 교회 간의 노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잔틴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다시 분열 상태로 되돌아갔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마흐메트 2세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학문적, 문화적 성과
공의회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은 실패로 끝났지만, 학문과 문화적인 측면은 르네상스를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선 서방 교회 내부에서 인재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성직자들 가운데 그리스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그들을 통한 그리스-로마의 고전 연구는 인문주의가 중세기 ‘신에게서 벗어나 인간’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모상으로서 인간’을 인식하는 것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잔틴 학자들의 방문과 그들이 가져왔던 책의 사본들은 고대 그리스 문화를 발견하고 배울 기회가 되었고, 피렌체 철학자들은 플라톤 사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한 논문에서 고대 그리스의 미(美)에 대한 독창성과 범접할 수 없는 특성을 강조했고, 시각예술에서 그리스 모델은 기베르티, 도나텔로, 루카 델라 로비아, 안젤리코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의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나듯, 더 부드럽고 밝고 우아하고 세련된 방식을 선사했다.
그들은 예술로 1439년 피렌체 공의회를 기억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기베르티는 피렌체 세례당의 천국의 문에서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의 만남’으로 표현했고, 파올로 우첼로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의 안뜰에 ‘노아의 대홍수’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의 정면’ 설계로, 아폴로니오 디 조반니는 메디치-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 소장된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속에 넣은 삽화들을 통해서, 그리고 베노초 고촐리는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내 경당에 그린 프레스코화 ‘박사들의 행렬’로 표현했다.
르네상스 화가로 쏜꼽혀
소개하는 작품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 1421?~1497)의 ‘동방 박사들의 행렬’(1459~1460)이다. 고촐리는 피렌체 출신의 대표적인 르네상스 화가로 손꼽힌다. 로렌조 기베르티, 베아토 안젤리코의 제자로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작업에 여러 차례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나름의 양식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크게 부각할 것 없는 그의 생애보다도 유명한 것이 소개하는 바로 이 작품이다.
그림 속으로
작품이 그려진 경당은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2층에 1446~1449년 미켈로초가 설계한 것으로, 1442년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처음 개인 건물에 경당을 짓는 것을 허락해 주어 지은 것이다. 이 경당의 양쪽 벽에 고촐리는 ‘동방 박사들의 행렬’을 그렸다.
그림은 야고보 다 바라지네가 쓴 「황금전설」을 근거로 했다. 「황금전설」은 동방박사들의 이름을 처음 언급한 책이다. 고촐리는 그것을 토대로 카스팔(C), 멜키올(M), 발타살(B)라고 인용했고, 행렬 속에는 동방교회의 요세프 2세 총대주교와 비잔틴 제국의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도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메디치 가문의 식구들과 당시 피렌체의 많은 학자 및 저명한 인물들이 총출동한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자, 피렌체 공의회가 르네상스의 전환점이자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후 플라톤 아카데미의 설치와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할 때 추방된 학자들을 피렌체가 앞장서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2) 젠틸레 벨리니의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 유물함에 그려진 베사리온 추기경’
비잔틴을 지키고 싶은 간절한 눈빛
- 젠틸레 벨리니,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 유물함에 그려진 베사리온 추기경’,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동·서방 교회의 일치 모색했지만
이번 호에서는 1439년 피렌체 공의회와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비잔틴 제국의 몰락 사이에서 동ㆍ서방 교회의 일치를 모색한 인물들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1439년 피렌체 공의회는 성대하게 진행됐고, 화려하게 마감됐다. 다뤄야 했던 의제 중 종교 측면에서 가장 시급했던 것이 ‘동ㆍ서방 교회의 화해’였다. 공의회 분위기가 처음부터 잘 조성돼 결국 양측은 재결합에 합의 서명했다. 정치 측면에서의 논의는 비잔틴 제국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1439년 2월 15일 피렌체에 도착하면서 본격화됐다. 요안니스 8세는 이 기회를 이용해 위기에 처한 비잔틴 제국의 상황을 서방 국가들에 알리고 서구 교회에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정교회 입장에서는 로마 교회가 어쨌든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은 330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비잔티온(Byzantion) 땅에 세운 도시다. 황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운 ‘콘스탄티누스의 도시’에 많은 공을 들였다. 지리적으로도 콘스탄티노플은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천연의 항만 금각만(Golden Horn)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어도 8세기 이전까지는 한 형제였다.
물리적인 거리가 점차 생각의 차이를 가져온 것이라고 해야 할까! 성상 파괴, 필리오퀘와 연옥 교리, 교황 수위권 등을 문제로 동ㆍ서방 교회는 갈라서게 됐다. 하지만 양측 교회 간의 끊임없는 일치에 대한 노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분열된 역사를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을 만큼, 일치는 서로에게 필요했다. 1439년 7월 6일, 피렌체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두오모)에서 그리스와 라틴 교회는 칙령 「하늘에 맡기노니(Laetentur coeli)」에 기꺼이 서명했다. 뒤이어 시리아 교회, 콥트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도 합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결국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해 오는 오스만 군대를 보며 서방의 도움을 얻기 위한 비잔틴 황제의 필사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대표단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을 때, 그리스 교회 주교단의 3분의 2와 고위 서명 인사 31명 중 21명이 공의회의 결과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전례와 신학의 전통을 포기하고 “교황의 ‘삼중관’에 복종하느니, 오스만의 ‘터번’을 선택하겠다”라고까지 했다.
여기에는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라틴인들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촉발된 그리스인과 베네치아(이탈리아)인 간의 오래된 민족 감정이 크게 작용한 탓도 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이 1369년부터 콘스탄티노플 인근 에디르네(Edirne)를 수도로 정하고 유럽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 있었다. 행정ㆍ상업ㆍ문화의 중심지로 이슬람 문명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의 노력, 3인 특사 파견
비잔틴 제국 내부에서 드러난 반(反) 라틴 정서를 주도한 사람 중에는 황제의 동생 디미트리오와 루카 노타라 대공도 있었다. 그러나 비잔틴의 대표로 피렌체 공의회에 참가했던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1355~1452)과 바실리오스 베사리온(1403~1472)은 종교의 통합만이 희망이자 피난처라며, 오스만의 위협으로부터 유일하게 살아남는 길이라고 설파했다.
공의회 결정이 폐기되고, 동ㆍ서방 교회의 통합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재위 1431~1447년)은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교황은 포기하지 않고, 정교회가 꺼리는 라틴인이 아니라 독일인 젊은 신학자 니콜로 쿠사노(1401~1464)를 콘스탄티노플에 교황 특사로 파견했다.
이 세 사람을 간단히 언급하면, 플레톤과 베사리온은 그리스 학문의 옹호자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실용주의적 애국자였다. 플레톤은 피렌체 공의회에 참가해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로마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인 것을 비판하며 플라톤적인 신학의 우수성을 역설해 서방 교회 교부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가 보여 준 학자적 인품과 지성, 품위는 특히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치하는 계기가 됐다.
베사리온은 정교회 총대주교로 공의회 폐막에서 에우제니오 4세 교황과 요안네스 8세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정교회 연합의 선언문을 낭독한 바 있다. 교황은 그를 깊이 존경했고,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직함을 부여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쿠사노를 도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28명의 주교를 이끌고 가톨릭교회로 왔다. 그때 정교회에서 소장하고 있던 초대 교회의 많은 중요한 사료를 싣고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들어와 라틴 교회에 넘겨주었다. 그 덕분에 초대 교회 동방의 사료들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불태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훼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로마의 열두 사도 기념 성당 내 베사리온 소성당에 묻혀 있다.
니콜로 쿠사노는 비잔틴 교회가 라틴 교회에 가진 묵은 감정과 불신, 거기에 제4차 십자군 전쟁의 트라우마까지 있어 로마에 순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교황 특사이기 전에 철학, 신학, 법학, 천문학 분야의 학자이며 변호사요 외교관이었다. 그는 비잔틴 신자들을 구하는 것 못지않게 비잔틴 문화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재위 1449~1453)의 궁정 분위기는 차가웠고, 그가 내놓은 최후의 제안은 외면당했다. 그런 중에도 쿠사노는 직접 보고 접한 동방의 풍부한 유산들을 모두 기록했고, 이후 서구 사회에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가 손대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었다. 그로 인해 르네상스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플레톤과 베사리온과 쿠사노의 간절함은 비잔틴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동로마의 수도로 소아시아의 진주 같은 도시, 빛나는 문화와 종교의 가치를 지닌 콘스탄티노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베네치아 학파 대표 인물
소개하는 그림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대표적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이다.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29~1507)가 그린 ‘참 십자가 유물함에 그려진 베사리온 추기경’이라는 제목이다. 여기서 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래서 흔히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 유물함…”이라고 한다.
젠틸레 벨리니는 베네치아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아버지 야코포와 동생 조반니 벨리니와 함께 온 가족이 화가이다. 이 그림은 1472년 사랑의 형제회에서 의뢰한 것으로 베사리온 추기경이 직접 기증한 유물함 뚜껑에 그린 것이다. 누가 언제 기증했는지를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사리온은 콘스탄티노플이 몰락한 후,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잊지 않게 하려고 유물을 사랑의 형제회에 기증했다.
젠틸레 벨리니는 1474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식 초상 화가로 두칼레 궁 대회의실에 걸 도제(doge)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1479~1480년, 마호메트 2세의 요청으로 문화 외교관으로 파견돼 콘스탄티노플로 건너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동ㆍ서양 관계에 관한 베네치아인의 탄력성, 상업적인 태도, 외교에서 예술의 기능 등을 말해주는 사례로 꼽고 있다.
그림 속으로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십자가 고상을 둘러싸고 세 사람이 있다. 왼쪽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베사리온이다. 그는 서방 교회로 와서 베네치아의 사랑의 형제회에 가입했다. 그림 속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은 사랑의 형제회 두 지도자로 보인다. 회화 중앙이 많이 손상됐지만, 황금 십자가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양쪽에 수직으로 된 직사각형 안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일화가 묘사돼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세운 황제이고, 헬레나는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를 찾은 이다. 베사리온의 간절한 눈빛이 그리스도의 성 십자가를 관통하며 비잔틴 제국을 세운 역사적인 두 인물을 떠올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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