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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말씀을 만나는 자리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고 했습니다. 체험한 일이 있으신지요? 그걸 체험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말씀을 만나는 첫 번째 자리
말씀께서 머무시는 집인 교회 안에서, 말씀을 만나는 첫 번째 자리는 전례입니다. 지난달에 설명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전례 때의 말씀은 2천 년, 3천 년 전의 말씀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미사 때의 독서와 강론, 화해의 성사와 병자 도유, 시간전례와 축복예식 등의 여러 순간들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의 현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독서와 복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미사 때에 독서와 복음을 읽고 나서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읽은 그 말씀이 독서자의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신 분을 향하여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라고 환호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미사 때에 독서자를 보면 독서 전후에 읽을 말씀에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볼 수 있고, 특별한 미사 때에는 복음서에 분향을 하는 것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독서대 위의 책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독서자의 목소리에도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독서자의 영예는 얼마나 큰 것이며 얼마나 정성껏 그 말씀을 읽어야 하는지 명백하지요. 그러기에 독서자는 성경과 전례를 공부하고 기술적으로도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58항). 하느님의 말씀이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듣는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강론입니다. 교황님은 강론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59항), 사실 그것은 신자들이 더 잘 압니다. 살아있는 말씀인지 냉동되고 박제된 말씀인지, 듣는 이들은 직감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강론자 안에 살아있는 것이고 그는 말씀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배우들이 수녀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 - 제가 보면 - 너무나 어색하지요. 꼭 수도복을 잘못 만들어서만은 아닙니다. 진짜가 아니고, 자신이 그 신분에 동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살아있지 않다면 그 강론은 강론 ‘흉내’이고 ‘연기’입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강론의 중심이 되셔야 하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임이 신자들에게 분명히 드러나야 합니다.”
미사 이외의 전례
미사 이외의 다른 전례들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만납니다. 화해성사의 경우, 하느님의 말씀은 성사를 준비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적인 윤리 규범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사판 서기관이 요시야 임금 앞에서 율법서를 읽을 때에 임금은 옷을 찢었고(2열왕 22장), 에즈라가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들 앞에서 율법을 읽어주었을 때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습니다”(느헤 8장). 자신들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복음의 말씀은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복음의 요구는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자신이 범한 죄 앞에서 좌절하여 무너지지 않고 하느님께 그 죄를 고백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심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루카 15장).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고 화해를 바라시는 분이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말씀 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에 그 말씀이 사람을 회개시키는 힘을 지니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교황님보다 말이 더 많아서, ‘주님의 말씀’을 읽으신 분들은 “이런 얘기 없었는데….”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황님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지침들을 많이 말씀하시는데 해설에서는 그런 부분은 생략하고 기본 바탕을 더 깔고 있는 것인데, 교황님은 이걸 다 전제하고 쓰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맞지요, 교황님?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간전례(성무일도)입니다. 시간전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또한 시편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무일도를 바칠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찬미의 제사를 바친다. … 이 기도는 참으로 신랑에게 이야기하는 신부의 목소리이며, 또한 자기 몸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이다”(성무일도 총지침).
교회의 삶
이제는 전례만이 아니라 교회의 삶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만나는 자리를 생각해 봅니다. 물론 첫째는 각자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인 계시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없이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교회의 사목활동도 성경으로 감도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목 형태들과 병립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사목 전체를 감도하게 하는 ‘성경사목’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말은 “성경사목”보다 “성서적인 사목, 성경에 기초한 사목”이라고 번역했으면 더 좋았겠네요.(번역자인 제 탓입니다.)
성서학과 신학이 따로 있고 신학 중에 성서신학도 있지만 성경 연구가 “신학 연구의 영혼”(계시헌장, 24항)이고 모든 신학의 원천이 되듯이, 교회의 사목활동이 교회가 하느님을 만나고 복음적 가치를 살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경에 기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교리교육에서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 주요 구절들에 친숙해지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말씀에 대한 체험
글 첫머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라는 것을 체험해 보셨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학생으로 처음 구약 입문을 배울 때 첫 시간에 신부님께서 시편 34편의 앞부분을 읽어주시며,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9절, 최민순 신부님 번역)에서 멈추시고는,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보고 맛들이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 제가 구약 입문 강의를 시작할 때에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때 그 신부님의 말씀도 다시 학생 분들에게 전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례에서, 사목에서, 개인적으로, 교리교육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모두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강론자, 사목자, 교리교육자, 성서사도직에 종사하는 이들 안에 말씀의 생명력을 만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이들 안에서 그 말씀이 용처럼 살아서 꿈틀거리고 다니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백이면 백, 그것은 먼저 그 말씀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 말씀이 저를 뒤집어 놓는 체험이 있었을 때입니다.
또한 이와 함께, 말씀이 살아있는 것은 우리 삶 안에서이기에, 말씀을 듣는 이들과 삶의 체험을 공유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이 참 어렵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준비가 될 때에 듣는 이들도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께서 살아계시기를 바랍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교회, 말씀께서 머무시는 집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집니다. 누가 넘겨드렸는지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초점은 두루마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두루마리를 받으신 예수님은 그 두루마리를 펴시고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당신을 보내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그러고는 두루마리를 말아 다시 돌려주시고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그 후에 두루마리는 말린 채로 다시 보관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어느 순간에라도 다시 펼쳐질 것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기쁜 소식은 이미 이루어진 말씀으로 다시 선포될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 계시의 충만이시며 예언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말씀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 제2부를 읽기 시작합니다. 제1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었고 우리는 거기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며 말을 걸어오시는지, 그 말씀에 인간은 어떻게 응답하고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제2부의 제목은 “교회 안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계속해서 머물러 계시고, 그 말씀이 머무시는 집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되었습니다(요한 복음 서문). 이들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이들이고 다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창조되어 갑니다. 그들의 모습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교황님은, “교회의 참 얼굴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 사이에 천막을 치러 오신(요한 1,14 참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수용으로 규정되는 실재”(50항)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있듯이, 주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교회는 그 말씀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이제는 교회가 그 말씀을 살아내야 하고 말씀의 현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유다교에서 크게 중시하는 ‘셔키나’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50항), ‘셔키나’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머물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에 머무시는 그 현존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 생각한다면 천막 성소 또는 성전에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시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탈출기에서는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천막 성소를 지었다는 것이 나오고, 그 마지막에 주님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으며 이스라엘 자손들은 구름으로 신비롭게 표현되는 그 영광, 주님의 현존에 따라 나아가고 멈춰서고 했다고 말합니다. 백성이 있는 그곳에 주님께서 머무르십니다. 백성이 어느 곳에 살고 있든지 셔키나는 그곳에 함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천막을 치심”(요한 1,14)으로써, 그리고 그 말씀이교회 안에 머물러 계심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인용하신 구절은 아니지만 에제 37,27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으나, 당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머무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
말씀께서 머무시는 집인 교회에게는 세상 안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은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하고 물으며 온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을 재촉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안에서 이러한 증인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교회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계시헌장 첫머리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의 말씀을 경건히 듣고 신실하게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여러 가지 일이 주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주님의 성령을 받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을 지속하는 것으로서 모두 소중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정확히 말해서 말씀 안에서 살아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그 모든 선포와 증거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도 알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행할 동기나 힘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주님을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어가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그 말씀을 지니고 세상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례, 말씀을 만나는 첫 번째 장소
교회가 자신의 주님의 말씀을 만나는 첫번째 장소가 전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히려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성체 현존 역시 인간의 말로 형언할 수 없고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신비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주님의 말씀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은 쉽게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교황님께서 인용하신 예로니모 성인의 말대로(56항), 우리는 성체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하고 - 그리고 물론, 절대로 버려지지 않게 하고 - 그 한 조각이라도 소중히 여기는데, 전례 때에 성경을 읽는다 해도 그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경우는 흔합니다. 그 자리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돌아가셨지만 성체성사를 통해서 지금도 그 유일한 제사를 재현하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이 전례 안에서 선포될 때에 그것은 단순히 과거에 한 번 하신 말씀을 다시 인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읽으신 구절은 이사야서,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기원전 5세기의 제3이사야에게 속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2천 년 전 나자렛의 회당에서만 벌어졌던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그 시대에만 의미가 있는 일회적인 말씀으로 들어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전례 때에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의 성사적 성격을 보고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짐을 알아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읽고 풀이해 주신 방식을 충실히 따르는”(52항)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성취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성경의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의 한 시대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오늘”의 말씀으로 선포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 해석을 다룰 때에 계속 강조해 온 바이지만, 성경의 말씀을 과거 한 순간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그 말씀을 죽이는 행위, 살아있는 말씀을 냉동시키고 박제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성경을 읽으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례 때에 선포되는 말씀이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말씀하시는 바를 이루시는 말씀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다음 달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현존을 만나는 여러 길들을 따라가 볼 것입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단 하나의 책인 성경
함께 사는 저희 집 수녀님들이 가끔 저를 놀립니다. 신문을 읽을 때 기사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아니라 주로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을 힐끗힐끗 읽다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주워듣고 오기는 하는데 정확히 아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사건인지는 모르고, 누가 죽었다는 것은 아는데 누가 죽였는지는 모르고, 이런 식입니다. 집에 와서 무슨 해설위원 같은 수녀님의 설명을 듣고 나면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합니다. 신문 기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더라면 이러지 않았겠지요.추리소설을 생각하시면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범인을 알려면 책을 구석구석 잘 읽어야 합니다.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은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그 결과를 염두에 두고서 쓰는 것이지요.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범인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 한마디를 알아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한 부분을 올바로 알아들으려면 성경 전체를 그 맥락으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성경의 내재적 단일성’이라는 원칙입니다(39항).
73권의 책들이 하나
이 원칙 자체에 대해서는 5월호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성경의 한 구절을 해석한다고 할 때, 그것을 문맥에서 떼어내면 쉽게 본래의 뜻을 벗어나게 되고 실제로 많은 이단들이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해석을 하려면 그 구절이 들어있는 단락, 그 단락이 들어있는 책, 구약 또는 신약이라는 맥락, 그리고 그 다음으로 구약과 신약 전체의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전제되는 것이 구약의 책들 46권과 신약의 책들 27권 모두가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구약 46권과 신약 27권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을 39권만 받아들이는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하나의 책을 이룹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 73권의 책들이 ‘하나’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의 한 부분을 읽을 때에는 그 73권을 그 문맥으로 간주하며 그 구절을 해석하게 됩니다.
가톨릭의 성경 해석
이러한 원칙은 특별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서는 2001년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발행한 문헌인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에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우리말로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2010년에 번역 출간하였습니다.)
그 문헌의 제1부에서는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예를 들어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는 등(마태 1,23 참조) 예수님의 생애에서 어떤 일들이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밖에도 많은 곳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어떤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생각을 해봅시다. 신약성경을 경전으로 여기지 않는 유다교인들에게, 위에 인용한 이사야서의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입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짧은 글에 이런 설명을 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굳이 이 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가톨릭 성경 해석이 다른 성경 해석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드리려는 생각에서입니다.
성경 본문의 의미는 처음 저자가 생각했던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처음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썼던 글은 다른 맥락 안에 자리하게 될 때에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자체 안에서도 이루어진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예언자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은,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변모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과정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함께 하나의 책을 이루게 됨으로써 일단락지어진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본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의 해석입니다.
여기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유다교와 개신교와 가톨릭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유다교의 구약 해석은 신약은 고려하지 않고 그 대신 유다교 전통의 고유한 부분인 미쉬나, 탈무드 등의 전승 안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합니다. 개신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함께 경전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거기에 ‘성전’을,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을 함께 고려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한 부분을 해석하려고 할 때에 고려해야 하는 ‘문맥’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씀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가르치시던 어떤 신부님께서 예언의 해석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임마누엘 예언에 대해, 그 예언이 예수님께 적용될 것인지는 “이사야도 몰랐고 마태오도 몰랐고 천주 성령만 아셨다.”고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약에 비추어 구약을 해석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41항)에 있습니다.
계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늘 인용되곤 하는 히브 1,1-2의 말씀대로, 같은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 아드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보여주셨다고, 곧 그 아드님이 계시의 절정이시라고(계시헌장, 2항)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성경은 신약의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약속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은 그 약속을 보게 했습니다. 구약이 감추어진 방식으로 예고하는 것을, 신약은 온전히 현존하는 것으로 선포합니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의 예언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대한 최고의 주해는 신약입니다”(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성인들의 삶으로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
교회 안에서의 성경 해석에 관한 다른 부분들은 생략하고, 3부로 된 “주님의 말씀”의 제1부 ‘하느님의 말씀’을 마치면서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인들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입니다. 많은 성인들의 삶은 성경의 말씀들을 삶 자체로 살아냄으로써 그 말씀을 해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성인의 예를 하나만 든다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도 은도 돈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읽고는 곧 그것을 그대로 살기를 갈망하여 가난한 수도자의 삶을 시작했고, 그 자신의 삶으로 이 말씀이 뜻하는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도 이 세상 안에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성인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제2부 ‘교회 안의 말씀’과 제3부 ‘세상을 위한 말씀’에 가면 우리 역시 우리의 삶으로 성경 말씀을 오늘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해야 한다는 것,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대로 우리 각자도 성모님처럼 말씀의 육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는 인간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이 노래 가사를 뒷부분까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짝사랑이었습니다. 아마 그 사랑을 표현하려고 각자 나름대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그렇게 뚜렷하지 않아서 서로 못 알아들었을 겁니다. 알아들었으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 사랑의 표현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거기에 응답할 수 있었더라면 노래가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짝사랑이 사랑이 되려면 바로 그것, 사랑을 알아듣고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느님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랑을 표현하려고 보내는 신호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시는 ‘말씀’들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전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들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를 통해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신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을 알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먼저 말을 걸어오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갑돌이와 갑순이 사이의 대화는 둘 중에 누구라도 시작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던 때에 이미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도 그분은 언제나 사랑의 신호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보듯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것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하늘과 달과 별들을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이라고 부릅니다(시편 8,4). 그 손자국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 달과 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에서도 인간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26),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아직 하느님을 찾아나서지 않았고 주파수를 맞추지 않았기에 그분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하느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응답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하느님의 대화 상대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지닌 특전입니다.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인간
그러나 때로는 인간이 스스로 귀를 막습니다. 신호를 보내시는 것을 알지만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사랑의 표시인 줄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내가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아서 듣지 않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현대에 많은 이가 하느님은 인간의 문제들에서 동떨어져 계시며 오히려 인간의 갈망들을 희생시키고 또 인간의 자율성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인간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퍼져있는 것입니다. 거창하게 무신론적인 사상들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뜻대로 살려면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하고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보전하고자 편리함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며 나에게 짐스러운 사람을 나의 형제로 받아들여 지고 가야 합니다. 손해 아닌가요?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요?
사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 하느님과 대화를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가로막는 죄입니다. 모든 사랑의 대화가 그렇듯이 사랑의 신호를 보내시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응답을 강요할 수는 없으십니다. 강요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고 사랑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많은 경우 실제로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하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태초의 인간에게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느님처럼” 되리라고 말합니다(창세 3,5). 하느님의 말씀을 어김으로써 인간이 지금의 위치보다 더 올라가서 더 완전하게 자신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바벨탑의 유혹은 오늘에도 계속됩니다.
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까?
이러한 시대에 필요한 일이, 하느님께서 인간의 목마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마음에 새겨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물이 어떤 물인지를 모릅니다.
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까? 왜 성경을 읽고 공부하려 합니까?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이시라면 아마 하느님의 말씀에 적어도 관심은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취미생활을 하듯이 성경을 공부하고 아니면 다른 학문들을 할 때와 다를 것 없는 태도로 성경을 연구한다는 느낌을 갖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알고 싶어하는 욕구들은 매우 강하지만 그것이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정말로 알아듣으려면, 그 말씀이 나의 삶을 비추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께 강의를 하는 것이 참 부담스럽습니다. 삶의 경험이 더 풍부한 그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저보다 더 깊이 알아들으시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기말고사에서, 시험 문제를 열두 개쯤 미리 드리고 각자 두 개씩 선택하시라고 했습니다. 꽤 많은 분이 “욥기와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와 “코헬렛, ‘허무로다 허무.’라는 말과 ‘인생을 즐겨라.’라는 말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주제를 택하셨습니다.
답안지를 읽으며 속으로 놀랐습니다. 많은 분이 그 질문들을 택한 것은, 삶 안에서 한 번씩은 큰 고통을 겪으셨고 성경 안에서 그 답을 찾아가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끊임없이 창조되어야 할 우리
그렇지만, 우리의 질문에 대한 성경의 응답은 언제나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논리적인 추론을 머리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명백한 사실을 입증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 상응한다는 것, 우리를 완성시켜 더 온전한 하느님의 모상이 되게 한다는 것을 발견할 따름입니다. 그러고는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창조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분의 사랑으로 알아들어 그 말씀으로 하루하루의 삶이 엮어지게 할 때, 우리는 창세기의 진흙처럼 하느님의 손으로 빚어지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응답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데에 협력하신 성모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역할이 맡겨져 있습니다. 교황님은, 신앙을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수태하고 출산하는 것이라는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은 오늘도 이 세상에 육화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응답이, 우리의 삶이 없이는 그 말씀이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영감’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제자들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아듣지요?” 작년 이맘때 제가 구약입문 수업시간에 했던 질문입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학생들이 멀뚱멀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2-13)라고 하셨는데, 성령께서 오셔서 2천 년 동안이나 일하셨잖아요.” 이것이 설명이었습니다.
성령께서 헛수고를 하셨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분명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럴 것 같지요?
앞으로 여러 달 동안 우리는 이렇게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단계로, 성령의 작용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또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이 생겨나기에 이른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
지난달에 우리는 창조질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던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하여 그분 안에 집약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육화가 바로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그리고 인간적인 계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성령에 의하여 인도됩니다. 세례 때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밝혀주신 분이 성령이시고,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마치시면서 약속하시는 분이 성령이시고,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께서 제자들을, 교회를 인도하시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의 첫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두려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는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2,4)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느님은, 이제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 머무르게 되고, 마침내는 그 성령께서 말씀이 기록되도록 성경 저자들을 감도하시기에 이릅니다.
여기에서 작용하는 것이 성령의 ‘영감’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영감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설명해 본다면, 인간의 언어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표현되도록 하시는 성령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좀 더 쉽게 말한다면, 인간의 언어는 껍데기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은 알맹이입니다.
사람이 그냥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하고 또 자기 생각대로 기록을 하면, 그 말이라는 ‘껍데기’ 안에는 그 사람의 생각이 담기겠지요. 그런데 인간이 말을 하고 글을 쓰지만 그 안에 하느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담기도록 작용하는 것이 성령의 영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껍데기’라는 말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껍데기는 소중한 알맹이를 담고 있기에 소중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도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껍데기 속에서 알맹이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
동화책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토끼가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오겠지요. 자연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우리는 토끼가 거북이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분명 진리를 담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알아듣습니다.
성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경 저자들에게 작용하신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것을 표현하고자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전달하려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하듯이 말입니다.
이와 연관된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성경이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은 정말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요. 그런데 갈릴레이 시대에 성경 말씀을 근거로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하늘이 움직여야 한다고 여겼던 이들은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껍데기’ 속에서 ‘알맹이’를 올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동화책에서 “토끼가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이 안에 진리가 들어있다고 해서 토끼가 거북이에게 실제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윤리를 가르치고 철학을 가르치기 이전에 동물들이 나오는 동화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이 어린아이가 알아듣기에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 한 줄로 줄인다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걸 알아듣게 하려고 창세기의 그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보게 하시고, 구약의 그 복잡한(?) 역사를 보게 하십니다. 알아듣게 한 줄로 말씀하시지 왜 이렇게 어렵게 말씀하시냐고요? 우리가 알아듣게 하려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어야
이렇게 해서 다시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말씀을 듣고 읽고 알아듣는 제자들을 떠올립니다. 말씀의 육화가, 또 말씀이 기록되는 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그 말씀을 알아듣는 것 역시 제자들에게 부어진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지요.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요한 14,26 참조).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아듣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전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마치 이 세상에서 최초로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처럼 성경을 읽는다면 그는 그 말씀을 많이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보다 많이 알아들을 수도 없을 것이고, 말씀을 잘못 알아들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령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보다 앞서 2천 년 동안 그 말씀을 보존하고 읽어온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은 외떨어져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기록되게 하신 성령과 함께 교회 안에서 전수되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황님의 말씀이 아니라 제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다 보니, 하면 할수록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성령이 그렇듯이, 영감이 그렇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이 다 깨달아 알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없는 것임을 절감합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수고가 소중하게 보입니다. 누구 한 사람이 마치 구구단을 배우듯이 성경을 다 배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큰 신비의 한 조각이라도 조금 더 알아들으려는 노력이 더욱 값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 맡겨졌고 교회 안에서 전수됩니다. 그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비추시고, 이를 통하여 그는 전승의 주체가 됩니다. 그 자신이, 교회 안에서 물려받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교회에 다시 전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성경을 펴고 읽을 때에 성령께서 나를 비추시어 그 말씀을 한 조각이나마 더 알아듣게 하신다면, 이를 통하여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어제보다 더 많이 알아듣고 주님을 조금 더 알게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은 이렇게 소중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시편 27,8-9).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말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계시 헌장을 읽으면 꼭 성탄 구유가 떠오릅니다. 사실, 친구처럼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느님의 자애로우심이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때는 바로 성탄 밤입니다. 계시헌장에서도 말하듯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의 완성이고 절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의 말씀” 서론의 끝부분(5항)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말씀의 육화를 선포하는 요한 복음 서문을 이 문헌 전체의 기본 틀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서문에서 요한 복음서의 본문만이 아니라 그 복음을 쓴 제자,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도 주목한다는 점은 의미가 깊습니다. “말씀”이라는 것을 넓은 의미로 이해할 때 거기에는 성경에 글로 적힌 말씀만이 아니라 주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모든 체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분과의 만남과 사귐이 모두 포함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은 그분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 체험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 사람이며,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말”만이 아니라 그 친교를 전달해 주고 우리가 그 친교를 함께 누리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자가 됩니다.
말씀으로 신호를 보내시는 하느님
문헌의 제1부는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습니다. 계시 헌장의 본래 제목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이었지요. 사실 문헌 제1부는 많은 부분에서 계시헌장을 따르면서 여러 측면에서 더 깊이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점이라면, 계시헌장이나 그 이전의 신학에서처럼 계시라는 추상적 단어에서 시작해서 자연적 계시와 초자연적 계시 등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말씀”, “대화”라는 인격적인 개념들에서 시작하고 또한 영원으로부터 계신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제1부는 처음부터 계시헌장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고 말하는 계시헌장 2항은, 계시에 대해 말할 때에 언제나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번역문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의 첫 단어는 하느님께서 “…하기를 원하셨다, …하고 싶으셨다.”는 것인데,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한 단어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의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원의에 따라, 당신의 선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아주 인간적으로 표현해서, 우리와 사귀고 싶으셔서 우리가 당신을 알아챌 때까지 계속 우리를 향해서 신호를 보내셨던 것입니다.그 모든 신호를 말씀이라고 한다면, “말씀”이라는 표현은 근본적으로는 공통된 의미를 지니면서도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 7항에서는 이를 지칭하여, “하느님 말씀”이라는 표현이 유비적으로 사용된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2008년에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마치면서 회의 참석자들이 발표한 메시지를 참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메시지는 모두 4장으로 구성되는데, 자세한 내용을 지금 다루지는 않겠지만 각 장의 제목만 보아도 여기에서 “말씀”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메시지 1장 제목은 “말씀의 소리 : 계시”이고, 2장은 “말씀의 얼굴 : 예수 그리스도”, 3장은 “말씀의 집 : 교회”, 4장은 “말씀의 길 : 선교”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이렇게 넓은 의미로 이해할 때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넓은 의미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신다는 점입니다. 요한 복음서의 서문에서 말하듯이,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한처음부터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은 이 세상 만물을 지탱하는 기초
먼저는 “자연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시편 19,2)라는 시편 구절이 떠오르지요. 작은 기계 하나도 사람이 잘 고안해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비로소 어떤 목적에 맞게 작동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계획 없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면서, 별들이 일정하게 하늘을 도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지혜가 새겨져 있음을 알아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온 우주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깃들어 있고 우리는 이성적인 능력으로도 그것을 알아보고 적어도 어느 정도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서 13장에서는,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탄합니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9)인간 역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더구나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졌기에 이성과 자유를 지니고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나,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업적을 알아보고 또한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새겨주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창조 안에서 유일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로 시작된 하느님과 세상의 사귐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구원의 손길을 보내시며, 또한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이끄십니다.
결국, 말씀은 바로 이 세상의 만물을 지탱하는 기초입니다. 세상 만물과 인간이, 그리고 그 인간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말씀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튼튼한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이 됩니다. 말씀에 귀를 막고 이 세상의 온갖 것들로 자기 자신을 가득 채우려고 할 때 인간은 결국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선로를 벗어난 기차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듯이, 말씀으로 창조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벗어나서는 제 길을 갈 수 없고 완성에 이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하느님의 말씀”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축약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이제 말씀은 목소리만이 아니라 얼굴을 지니신 분이 되십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이미 시간과 공간의 제한된 조건 안에 사는 인간과 사귀려고, 그 인간에게 맞추어 당신 자신을 낮추셨던 영원하신 하느님은, 이제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분(1요한 1,1-4), 우리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작은 아기가 되시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좀 더 숙고가 필요한 부분은, “말씀”의 이러한 다양하고 유비적인 의미를 요한 복음서 서문과 연결시켜 볼 때, 한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과거에 다른 방식들로 우리에게 계시되어 오다가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계시되었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처음부터 계신 아버지의 말씀이셨다는 것의 연관,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문헌에서는 말씀의 그리스도론적 차원을 이전보다 더 강하게 부각시키려고 하는데, 현대에 이르러 구약과 신약의 관계, 예언과 성취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이러한 주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