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무악재라는 유서 깊은 고개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북서쪽 관문이며 의주대로의 길목입니다.
옛날에는 인왕산 호랑이가 내려와 사람을 헤친다고 해가 떨어지면 통행을 금지했고
대낮에도 몇몇 사람이 뭉쳐서 고개를 넘어 다녔습니다.
그 고개 아래 현저동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독립투사를 고문하고 처형했던 악명 높은 감옥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관순열사가 지하 감옥에서 고문 받다 순국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독립투사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일제가 자료를 남기지 않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헌데,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는 일제 강점기 잔혹사만 전시하고 있고
우리 시대 우리 손으로 우리 국민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전시는 없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드러내야 역사의 교훈이 될텐데 아쉽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2개 분기로 나뉘어집니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출발하여 1945년까지 37년간 일제 강점기.
1945부터 1987년까지 42년간 우리시대입니다.
일제시대야 더 말할나위 없이 잔혹했지만
해방 후, 우리 시대 서대문형무소에서도
우리 손으로 우리 사람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흑역사가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에서 농립부장관을 지내고
국회부의장 까지 지냈던 조봉암이
1956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여
이승만 후보의 턱밑까지 득표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가까스로 턱걸이 당선은 되었지만
차기 대선에서 위협을 느낀 이승만대통령은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체포하여
서대문형무소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2011년 재심에서 원심판결을 파기 했습니다.
엄혹했던 유신시절.
박정희대통령의 유신통치에 반대하던 대구지역 인사들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75년 4월 8일 도예종 등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확정된 18시간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을 집행했습니다.
이 사건의 재판장은 민복기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이완용과 함께 경술국적(庚戌國賊)의 한 사람인 민병석입니다.
이 사건은 아프리카 야만국에서도 있을 수 없는
<사법살인>이라고 전 세계적으로 지탄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2007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아래 사진은 그 당시 하루에 8명의 목을 걸었던 올가미 실제 사진입니다.
첫댓글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우리는 반성해야지요~
요즘 정치는 입질시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