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거 86주년
오는 29일은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 86주년 기념일이다. 윤 의사는 1932년 이날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대한 남아의 용장(勇壯)한 기개를 전 세계에 널리 떨쳐 군국주의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윤 의사의 고향 마을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는 윤 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옛집과 성역화한 그의 사당 충의사(忠義祠)가 있어 찾는 이들에게 참된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길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겨보게 한다.
예산읍에서 45번 국도를 타고 덕산면을 지나 덕숭산 수덕사 쪽으로 약 3km를 가면 왼쪽에 덕산온천장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계속해서 700여m를 더 가면 오른쪽으로 널찍한 주차장이 보인다. 이 주차장 뒤쪽으로 난 시멘트 계단을 오르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깨끗하게 단장한 윤봉길 의사의 사당인 충의사가 있다.
그 곁의 건물은 윤 의사의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위대한 정신을 본받기 위한 도량(道場)인 충의관이다.
충의사는 윤 의사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8년 4월 29일에 창건한 뒤 1972년 10월 19일에 4만 4천여 평의 터전에 그의 생가인 광현당, 성장시절의 집인 저한당, 농촌운동을 하던 부흥원 등이 대대적인 복원 보수 정화 끝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성역화하면서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충의사 앞에서 건너다보면 윤 의사의 옛집이 있는 ‘도중도(島中島)’가 한눈에 찬다. 도중도란 마을을 흐르는 목계천이 윤 의사의 집터에서 두 줄기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 배 모양의 섬을 이루었는데, 뒷날 윤 의사가 이곳을 ‘한반도 가운데서도 왜놈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섬’이란 뜻으로 이름 지은 것이다.
충의사에서 참배하고 내려와 길을 건너면 윤 의사의 옛집 등을 복원한 기념관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관리사무소 오른쪽에 윤 의사의 동상과 의거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동상은 1992년 4월 29일에 윤의사의거 60주년기념사업추진회에서 세웠고, 기념탑은 이보다 앞서 1965년 1월 30일에 예산군교육위원회가 주관하여 세웠다.
동상과 기념탑 왼쪽 정면으로는 윤 의사가 자라서 집을 떠날 때까지 살던 전형적인 초가 한옥인 저한당이 말끔히 복원되어 있다. 이 집은 윤 의사가 1911년 4세 때 부모를 따라 광현당에서 옮겨와 1930년 23세 때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살던 집으로서 1972년 8월까지 그의 유족이 살았다.
동상 맞은편 기념관에는 1972년 8월 8일에 보물 제568호로 지정된 윤 의사의 유품인 <농민독본>, <기사년일기>, <월진회취지서>, <한인애국단 입단선서문> 및 도장, 시계, 화폐 등 58점과 그 밖에 여러 자료가 보관 전시되어 가신 님의 짧지만 위대했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유물 가운데는 특히 거사 당일 아침에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과 작별하며 바꾸어 찼던 시계가 눈길을 끈다.
윤봉길 의사는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8년 6월 21일, 음력 5월 23일에 이곳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속칭 목바리마을에서 평범한 농부 윤황(尹璜)과 김원상(金元祥) 부부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 본명은 우의(禹儀) 또는 희의(熙儀)라고 했으며 자는 용기(鏞起)였다. 봉길은 별명. 매헌은 뒷날 스승이 지어준 호이다.
그의 27대조는 고려 예종 때 여진을 정벌하고 고구려 옛땅을 수복한 큰 공을 세운 명장이었으나 나약하고 비겁한 문관들에 의해 전쟁에 이기고도 패장으로 몰려 천추의 한을 남긴 윤관(尹瓘) 장군이다.
윤 의사가 고향에서 소년기를 보낼 때 조국은 간악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신음하고 있었으며, 애국투사들이 여러 형태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1909년 10월 26일에는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에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 온 나라가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했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것도 그해였으며, 홍범도(洪範圖)와 김좌진(金佐鎭) 장군 등이 이끈 독립군이 봉오동대첩과 청신리대첩 등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었다.
윤 의사는 11세가 된 1918년 동네에서 2km쯤 떨어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제의 식민교육을 거부하고 다음해에 자퇴했으며, 1921년 14세 때부터 인근 마을의 서당 오치서숙에서 유학자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 선생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윤 의사가 혼인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22년 15세 때. 신부는 이웃마을에 살던 한 살 위의 처녀 배용순(裵用順)이었다.
한학을 공부했지만 그가 시세의 변화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적에게 이길 수 있다는 <손자병법>의 명구를 새겨서 1925년부터는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돈이 생기는 대로 예산읍에 나가 <개벽>을 비롯한 잡지와 신문과 단행본 등을 부지런히 사다가 읽었다. 예산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은 서울에 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구해다 보았다.
오치서숙을 떠난 것은 1926년. 매곡 선생은 이 빼어난 제자와의 석별을 아쉬워하며 자신의 호에서 매 자와, 이웃 고을 홍성이 낳은 만고충신 성삼문(成三問)의 호 매죽헌(梅竹軒)에서 헌 자를 따서 매헌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윤 의사는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마을에 야학당을 개설, 문맹퇴치운동 등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1928년 2월 5일 부흥원을, 이듬해 4월에 월진회를 설립함으로써 더욱 조직적이고 본격화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악랄해지기만 했다.
고향에서 온건한 방법으로는 더는 조국광복을 위해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 장부가 한 번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는 글을 남긴 뒤 중국으로 떠난 것이 1930년 3월 6일,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신의주에서 중국으로 망명한 윤 의사는 만주와 청도를 거쳐 1931년 6월 23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2년 뒤에 백범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입단했는데, 그때 백범은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교민회장이기도 했다.
한인애국단은 백범이 1926년 12월에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있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우의를 다지고 대내적으로는 일본 수뇌부 인사들의 제거를 목적으로 만든 항일투쟁 조직이었다.
같은 단원인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것이 그 이듬해인 1931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일왕 히로히토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황제 부의와 동경 교외 요요기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준비한 수류탄을 던졌으나 불행하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의사는 그해 7월 19일 일제 대심원 공판정에서 재판을 바을 때, “나는 너희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거늘 어찌 너희가 감히 내게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느냐?”라는 말만 했을 뿐 재판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10일 순국하니 당시 아까운 나이 33세였다.
윤봉길 의사의 장거는 그 이듬해에 감행되었다. 그해 4월 20일자 <상해일일신문> 기사를 통해 그달 29일에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른바 천장절 기념식이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을 겸해 홍구공원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고 거사를 결행했던 것이다.
백범은 거사에 사용할 휴대용 물통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두 개를 만들어 윤 의사에게 주었다. 그리고 거사 3일 전인 26일에는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갖고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음은 선서문 전문이다.
-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키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
운명의 날 1932년 4월 29일, 백범과 아침식사를 나눈 윤 의사는 1만 명에 이르는 일인이 들어차 축제 분위기에 들뜬 홍구공원에 입장하여 연단 뒤쪽에 자리 잡는데 성공했다. 오전 11시에 관병식이 끝나고 30분 뒤부터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축하식이 시작되었다.
연단 위의 일본 요인들의 개회사와 축사가 끝나고 일본 해군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일본국가 합창이 거의 끝나갈 무렵, 윤 의사는 손에 들었던 도시락폭탄을 내려놓고 어깨에서 물통폭탄을 내려 발화용 끈을 잡아당기며 연단으로 돌진, 단상을 향해 힘껏 던졌다.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연단 가운데서 폭발했고 장내는 이내 아수라장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결과 상해 파견 일본군 최고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은 심한 부상으로 5월 24일에 죽고, 가와바타 상해 거류민단장은 창자가 끊어져 현장에서 폭사했으며, 노무라 중장은 실명했고,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버렸다. 또 시게미쓰 주중공사, 무라이 상해총영사, 도모노 거류민단 서기장 등 10여 명의 요인도 중상을 입었다. 특히 시라카와 대장의 죽음은 당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 총사령관으로서는 최초의 죽음이었다.
거사 직후 윤봉길 의사는 자폭하기 위해 남은 도시락폭탄을 집으려다가 사방에서 벌떼처럼 달려드는 일본인들과 일본 경찰에게 폭행당해 한때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체포되어 일본군 헌병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틀 동안 온갖 잔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윤 의사는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1월 18일 삼엄한 경비 속에서 우편선 대양환 편으로 일본으로 호송되어 그달 20일에는 오사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로 이감되어 이튿날인 12월 19일 총살당하니 순국 당시 꽃다운 나이 25세였다.
그의 유해는 쓰레기하치장에 버려졌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가나자와 교외에서 발굴되어 환국한 뒤 7월 7일 수십 만 추모 인파의 애도 속에서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서울운동장에서 광복후 최초의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 묘역에는 나중에 암살당한 백범도 함께 묻혔다.
1962년 2월 1일, 윤 의사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고, 1968년 4월 29일에는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그의 제향을 모시는 충의사가 건립되었다. 1965년 12월 29일 윤 의사 순국 30주기를 맞아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고, 이듬해 4월 19일부터 이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사당에서 기념제전이 해마다 열려오다가 1982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일인 이날을 앞뒤로 이틀 동안 매헌문화제를 베풀고 있다. 또한 1988년 12월 1일에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세워져 가신 님의 나라사랑, 겨레사랑을 위한 거룩한 희생정신을 새삼 되새기게 하였다.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처할수록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본받아야 할 터인데 요즘 실상은 참으로 딱하다. 지식인이나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나, 심지어는 교육자들조차 거의 모두가 자기 한 몸의 안일과 헛된 영화를 부나비처럼 쫓고 있으니 그저 안타깝고 서글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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