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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불교
1. 이회광(李晦光)
1) 운동적 맹약(기사)
원흥사(元興寺) 중(僧) 이회광(李晦光)이 수년 전부터 소위 종무원을 설립하여 13도 내의 각 사찰을조종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백반(百般) 운동(運動)을 하되 여의치 못한지라. 작년 가을경에 동경에가서 조선 원종의 대표라 자칭하고 조동종(曺洞宗) 종무원에 대하여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의뢰할새 아래와 같은 내약(內約)을 체결하였다더라.
一. 조선 전체의 원종 사원 대중은 조동종과 완전히 또 영구히 연합동맹하여 불교를 확장할 것.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무원에 고문을 의뢰할 것.
一. 조동종무원은 조선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득함에 알선의 노(勞)를 취할 것.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모할 것.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하여 각 수사(首寺)에 배치하여 일반포교 및 청년승려의 교육을 촉탁하고 또는 조동종무원이 필요로 인하여 포교사를 파견하는 시는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무원의 지정하는 땅(地)의 수사(首寺)나 혹 사원에 숙사하여 일반 포교 및 청년승려 교육에 종사케 할 것.
一. 본 체맹은 쌍방의 의가 불합하면 폐지변경 혹 개정을 위할 것.
一. 본 체맹은 기 관할처의 승인을 득한 일로 효력을 발생함
조동종종무원 대표자 홍률설삼(弘律說三) (印)
1910년 10월 6일 조선원종 대표자 이회광(李晦光)(印)
<출전 : 李晦光, 「運動的盟約」, '매일신보', 1911년 4월 2일>
2) 조선불교의 각성과 사회사업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
조선불교의 기원을 소급해 살펴보면, 불교가 전래된 것은 지금보다도 무려 1700여 년이나 앞선 옛날,저 고구려시대이다.
때문에 불교 전래 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에 대해서는 역사상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으니 새삼스럽게 여기서 떠들어댈 필요는 없으나, 특히 신라, 고려 시대의 불교는 비할 바가 없을 정도로 융성하여 일상의 모든 사물이 불교색채일색이었다.
군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교에 귀의했는데 현재 각지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고적에서 당시의 전성기를 엿볼 수 있다.
신라, 고려시대의 문화는 전부 불타(佛陀)의 교리를 토대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기원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시운(時運)과 기연(機緣)의 불가사의는 이렇게 왕성했던 불교를 하루아침에 쇠퇴시켰다.
이조(李朝)에이르러서는 무엇보다 먼저 도승(度僧)1)을 금하고 심하게는 승니(僧尼)의 입성(入城)을 금지하는 폭거까
지 자행된다.
그 때문에 오랜 동안 사원(寺院)의 탑 앞에는 초목만 무성하고 늦가을 석원(釋苑)에 불일(佛日)이 저물어가는 형세였다. 그런데 1911년에 사찰령이 발포(發布)됨으로써 조선 전국의 사원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6천명 승니의 인권도 회복되어 소위 반도 불교계에 다시 서광이 비춰지면서 한곡(寒谷)에 다시 봄이 찾아와 마른 나무에 꽃이 피었다.
이렇게 수백 년 동안 인간의 권위와 종교의 광휘를 유린당하면서도 불교도는 마음과 힘을 모아 종문(宗門)의 지덕과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 조선불교의 발전을 도모하며 쉬지 않고 백년대계를 강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을 고루과문(孤陋寡聞)하며 심산유곡에서 독선생활(獨善生活)을 해서 세상만사에 어두웠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니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지금의 조선불교는 조선의 문화, 조선인의 생활처럼 퇴폐해 세상에 나와서 국가의 법칙과 사회의 지침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세상구제에 뜻을 두고 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았던 석가모니의 성지(聖旨)와는 달리, 오히려 산에 숨어서 퇴영자몰(退嬰自沒)상태에 빠져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시대의 잘못도 제도의 잘못도 아닌 오직 우리 교도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닫으면 손바닥 안에 감춰지고 열면 우주를 채우는 불타의 교리는 철학의 근원이며 종교의 진수이기에 마음의 부동, 정(精)의 안정, 육체의 건전, 혹은 지식의 해박 등을 전부 불심으로 구할 수 있다.
문예의 현묘함도 이를 본떠 얻을 수 있으며 과학의 정확함도 이에 준한 것이니 불교야말로 세계문화의 대 지침, 그리고 인류생활의 행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도 불교의 현재 상황으로 장래를 논한다면 전도가 요원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용맹한 정신으로 떨치고 일어나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여 근본적 개조를 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혁신하고 개조하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일반의 공론(公論)도 있기는 하지만, 나는 세계문화를 위해 조선
불교를 산중에서 세상으로 끌어내 사회화하여 민중의 불교로 만들어야지 이것을 승니의 것으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불교를 사회화하고 민중의 불교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을 써야하는가.
물론 많은 명안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조선불교 자체에 대해서 한 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조선의 불교는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수백 년 동안 산중에 칩복(蟄伏)하면서 보통의 인권조차 빼앗긴 채 허생랑사(虛生浪死)의 본보기로, (개중에는)다행히 수양에 정진하여 불조(佛祖)의 성지를 깨달은 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을 제외하고는 한 시대를 교화할 도덕이 부족하고 학식이나 경력(經歷)에서 세상 사람을 지도하거나 민중의 사표(師表)가 될 자격이 모자랄 뿐만 아니라, 시대에 적응시키는 사업을 베풀어 국가, 사회에 공헌한 실례(實例)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우리 조선불교도를 일종의 무용지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불교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심도 박약해져 종교의
1) 도승 : ① 사람을 제도하여 중으로 만듦. ② 조선시대 관에서 도첩(度牒)을 받은 중.
권위가 실추되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우리 불타교도는 발분망식(發奮忘食)하며 항상 전진의 방책을 강구해야만 하는입장에 놓여 있으나, 실상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사찰령이 시행되고 몇 십 년이 지난 오늘, 발전의흔적, 사업의 결실, 어디에서 이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나 역시 말단 승려, 지주의 한 사람으로서창피할 따름이다.
30년간 본산(本山)의 주지열(住持熱)과 구백말사(九百末寺)를 감수(監守)하는 데 허망하게 세월을 보내며, 불교는 사회의 지침이 되어야 하고 사찰은 민중을 감화해야만 하는 장소인 것을 잊고 이것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며 높고 큰 누각에서 온포안일(溫飽安逸)하게 포복장와(抱腹長臥)만을 일삼고 있는 오늘날, 조선불교계의 6천여 명의 승중(僧衆)은 무슨 염치로 사회에 얼굴을 내밀려고 하는가.
도식유민(徒食遊民)의 소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또한, 어느 산에 있는 어떤 절(寺)이냐를 불문하고 주지(住持)의 자리에 있는 자가 불교의 발전이나 사찰의 흥망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사찰의 전 재산을 자기의 소유로 오인하여 시대적인 사업 즉 불교의 발전책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천하를 호령하는 망상과 절대자존(絶對自尊)의 위치만을 꿈꾸며 세도인심(世道人心)을 교화하기는커녕 일반의 꾸지람과 조소를 야기하고 있는 것은 불교자체에 폐해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를 위해서도 실로 유감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조선불교를 사회화하고 사람들을 귀의시키려면 무엇보다 위에 언급한 폐습을 타파하고 승려는 독성자각(獨省自覺)하여 모든 중생을 평등구제(平等救濟)하는데 뜻을 두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천명한 대성불타(大聖佛陀)의 본지(本旨)를 깊이 체득하여 도덕으로 몸을 갖추고 수행을 근본으로 삼아 한 시대를 동화시킬 수 있는 자격을 양성해, 존비귀천을 불문하고 사류입해(四流入海), 동일□미(同一□味)해야 한다. 독선적 생활에 뜻을 두지 않고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통해 중생과 접촉한다면 새로운 조선불교가 탄생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앞으로 우리 불교는 보수(保守)에서 해방으로, 협적(狹的)에서 보편(普遍)으로 변화하고 그에 상응하는 사업에 착수해야만 한다.
해야 하는 사업이야 물론 많이 있겠지만 내 소견으로는 아래의 것이긴요하다고 본다.
(1) 치료원(治療院)
(2) 교육장려원(敎育獎勵院)
(3) 무료숙박소, 직업소개소, 목욕탕 및 세탁소
(4) 소작인 교화원(小作人敎化院)
이 사업내용과 시설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현재 공사를 불문하고 조선각지에 있는 치료기관의 수는 많아야 수요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시골은 물론이고 경성에도 특히 빈민굴에는 생활이 어려워 삼순구식(三旬九食),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그들이 어떻게 진찰비를 조달하며 치료비를 벌수 있겠는가. 병이 들어도 진료를 받지 못한 채 허망하게시일을 보내기 때문에 사소한 병도 점차 심해져서 결국은 죽는다. 우리가 무료치료원을 설치하여 이들을 수용해 밖으로는 육체의 병을 치료해 인간백세의 행복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주고, 안으로는 망상을 분별하지 못하는 마음의 병을 수련시켜 인생의 바른 길을 깨닫게 만들고 싶다.
교육사업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현재 조선인의 상태를 보면 모두 수긍할 것이다. 조선의 아동은 가정에서 대충 교육을 받기 때문에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 때문에 주로 일요학교 및 유치원 등을 설립해 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아동을 상대로 종교정신으로 인생의 본위(本位)를 학습시켜 장래 학문에 취미를 갖도록 만들고 싶다.
이러는 한편 보통과 중등 교육기관을 각처에 설립하고 이와 연계해 불교전문 연구과를 만든다면 장래 반도의 정신계에 공헌할 일이 많을 것이다.
또한 교화대상자로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자와 그 외의 사람들을 위해서 무료숙박소와 직업소개소를 설치하고 나아가 목욕탕, 세탁소를 만들어 일반의 편의를 도모하고 싶다.
그리고, 소작인 교화는, 각 사찰이 소유한 임야를 개방해 이것을 개척, 보식(補植)하여 잠업 등 기타 생산개발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하고, 이 일에 종사하는 소작인을 지도해 농사(農事)를 개량하여 수익을 얻는 방법을 알려주면서도 근검저축의 미풍을 양성하고, 그들의 청소년 자녀에게는 보통교육과 직업교육을 실시해 공존공영의 열매를 얻게 된다면 단지 조선인만의 행복이 아닌 동양평화의 영원한 기초로, 또 조선불교의 계몽책만이 아닌 국가의 백년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사업을 실시하려면 물론 상당한 경비가 필요하다. 원래 조선 사찰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일사일암(一寺一菴)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유지하는 기본재산은 다 갖고 있다. 현재 조선에 있는 사찰의 소유재산을 대략 계산해보면 전답이 약
200만 두락(斗落)(일 두락은 백오십 평) 임야는 약 4십만 정보(町步)나 되는 거액이다. 만약 이것을 경제인의 수완에 맡겨 정리한다면 세입으로만 이백여 만 원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조선에 산재해 있는 종교계의 각 파(派)중 자력(資力)면에 있어서 우리만한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항상 개탄해 마지않는 것은 천만사위(千萬事爲), 사람 탓이지 자력의 부족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승려의 손에 맡겨 때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당국의 편달과 사회의 여론이 우리를 나태함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도 좋은 방책일 것이다.
조선불교를 산중에서 세상으로 끌어내 사회적인 종교를 만들기 위해 내 소신을 간단히 피력했다.
<출전 : 李晦光, 「朝鮮佛敎の覺醒と社會事業」, '朝鮮', 1921년 6월>
3) 조선불교운동상 2대 조류의 충돌, 강대련 대 이회광, 조선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병합하려는 중대 문제!(기사)
조선의 불교는 일찍이 조선의 문화에 적지 아니한 공헌을 하여왔으며 조선의 문화가 조선의 불교로부터 손목을 잡고 혁혁한 문화를 일으킨 것은 오랜 역사가 밝혀 증명 하는 바이라. 조선의 불교가 망하고 흥하는 것은 조선 민족의 퇴패와 발흥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도 과도한 말이 아닐 듯하다.
일찍이 조선의 문화가 찬연하였을 그때에 조선의 불교가 또한 발흥하였으며 스러진 문화의 남은 불꽃을 그리워하던 조선민족의 퇴패시대에 불교−그것도 또한 산골에 물러나 잠자듯 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넉넉히 조선민족의 신앙은 곧 불교에 몰리어 있었으며 그동안 오래 동안에 조선 민족의 흥망에 따라 일어나던 조선 민중의 정신적의 비애를 불교 그것으로 더불어 한 가지 울고, 한 가지 웃고 하여, 은연중 그 불교에게만 한 정신적인 위안을 받아 온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라. 실로 조선의 찬연한 문화에 아름다운 빛을 들여 주던 조선의 「조형미술」, 조선의 ‘조각’은 실로 불교의(종교적)정신을 한껏 발휘하였나니 그것을 보아도 능히 알겠거니와, 조선민족은 불□에 신앙을 바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불교에 위안을 받아 온지도 또한 오래되어 새로운 성명의 영광이었다.
지금에 조선민족의 머리에 비침을 따라 오래 잠들었던 조선불교에 새로 공공등이 일어나 불교에 대한 집회가 새로이 되고 불교에 대한 진리를 연구하는 기관이 생기어 조선불교에 부활의 서광이 비치어 조선 민중은 그 아름다운 불교의 진리 아래 따뜻한 위안을 얻으려 한다. 그러하나 근일에 조선의 불교로 하여금 일본 불교에 합병을 하려 한다는 일반 민중의 부르짖는 바가 있어 불교계에 중요한 지위에 있는 모 불교신자에게 그 자세한 사실을 알아본 즉 조선불교계에 중추 지위에 있어 조선 불교로 하여금 생명을 한 가지 하고자 하는(합천 해인사)의 주지 이회광(李晦光) 씨가 지금 30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三十本山聯合事務所委員長) 강대련(姜大蓮) 씨와 더불어 조선의 불교로 하여금 한층 더 발흥을 시키고자 하여 무한한 진력을 하여 오던 중에 피차에 의사 충돌되는 바가 있어서 점점 지내올수록 사이에 한 장벽이 가로막게 된 고로 그들의 개인상의 정의는 여전하다고 하더라도 불교계에 중요한 자리에 앉아 조선의 불교로 하여금 발흥하게 하고자 하는 점에서 그들의 피차에는 한 장벽을 사이에 두고 지내오던 터이라.
그러한 뒤 그 후에 이회광 씨는 조선의 불교를 통일하게 하는 목적으로 조선의 불교는 일본의 불교와 계통이 같다 하여 그는 일찍이 경성에 있는 조동종(曹洞宗)파의 일본 불교와 연락을 얻고자 하여 왕래가 잦았으며 은은한 양방 의론이 자주되었고 뜻하던 바를 물거품에 흘려 보내인 뒤에 그는 오랜 번민(煩悶)과 고통 속에서 오래 머리를 썩이며 오랜 방황을 하다가 제 2회의 계획으로 진종(眞宗)이라는 일본 불교에 또 그와 같은 연락을 맺고자 하는 의미 있는 교섭을 하였으나 마침내 그 또한 패의 탄식을 하게 되어 그는 아주 낙망과 절망의 깊은 함정 속에서 두루 있기를 오래 하면서 생각하여 오던바 조선의 불교를 다시 생각하며 또 한 번 머리를 썩이기 시작하였다.
그러하다가 이회광 자신과 조선의 불교를 위시하여 행인지 − 불행인지 − 임제종 묘심사파(臨濟宗妙心寺派) 포교사 후등서암(後藤瑞岩)과 피차에 의미 있는 악수가 합의한 웃음 속에 자주 되어 마침내 이회광 자기로 하여금 성공의 기쁨을 노래하게 되었나니 그것이 곧 지난봄부터 몸소 그 묘심사에 나아가 의미가 있는 설교를 오륙차한 것이며 그 동안에 백여 명 되는 자기의 수하에 있는바 신도로 하여금 그 묘심사에 입사하게 한 것이라.
그는 그 뒤에 말하기를 조선 불교의 계통은 임제종이니 마땅이 묘심사파의 임제종과 연락을 맺는 것이 하등의 관계가 있으려 하야 더욱 더욱 힘 있는 활동을 계속하여 소위 암중비약(暗中飛躍)을 하다가 오륙인의 동지를 얻어 일본에 건너가 교토에서 후등서암을 맞나 장래의 진행할 사업의 내용과 계획을 말하고 그 후등서암을 따라서 도쿄에 들어가 문부대신을 방문하여 조선의 불교와 사찰에 대한 자기들의 의견서를 제출하고 뜻하는바 사업을 이루어 달라는 뜻을 고한 뒤에 그들은 다시 교토에서 내려 임제종의 모심사파와 두 사이에 모모한 방침은 다시 협의하고 조선 전도의 각 사찰은 일본의 임제종 묘심사파에 부속하기로 한 뒤에 조선에 들어온 그 사실에 대하여 일반 민중은 더 한층 분격하여 그들 민중의 부르짖는바 여론이 자못 크게 된 고로 삼십본산 연합사무소의 위원장 강대련씨가 재무부장 이혼 성씨와 한 가지 학무국에 종교과장 반정청 씨를 방문하고 위와 같은 이회광의 사실을 말하고 그의 의견을 들어보았는데 종교과장의 말은 그것은 결코 되지 못할 일이라, 사찰령이 허락하지 않는 바라 하였으며 더욱이 일찍이 일본 각파의 불□에서 조선 문의 30본산을 넘어다보고 침을 삼킬 때에도 정무총감은 그것을 허락하지 못한 바이라 하며 이회광가 뜻하는 바는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더라.
그러한대 이회광은 뜻하는바 사업을 철저하게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종무원’이라는 불교 연합단체를 건설할 목적으로 이왕직으로 고등관의 서기로 □□문의 대□ 경운궁 안에 약 7천 평의 토지를 27만5천 원에 사기로 계약을 맺고 우선 2만 원을 먼저 지불하기로 하였는데 이회광은 경상남도의 팔본산을연하여 그 중부 □의 사업에 후일 하기로 각각 서약을 받았으며 승낙하였다는 뜻으로 도장까지 받았다하는데 그 종파의 □□을 일본 불교의 □□□□고□라 하기로 하였다더라.
<출전 : 李晦光, 「朝鮮佛敎運動上二大潮流의 衝突, 姜大蓮對李晦光, 朝鮮佛敎를日本臨濟宗에 倂合하려 하는 重大問題!」, '朝鮮日報', 1920년 6월 24일>
4) 간판은 조선불교총본산, 주지는 일선융화와 정교일치(기사)
아직까지도 혼돈상태에 있는 조선불교계에는 연전에 이회광(李晦光) 일파가 일어나 조선불교 전체를일본불교의 한 종파인 임제종(臨濟宗)과 병합을 하려던 사실이 있은 후로 그 동안 뒤를 이어 그 같은 기괴한 사건이 종종 있던 중 최근에 이르러서는 매불사건(賣佛事件)으로 면직당한 전 위봉사(威鳳寺)주지 곽법경(郭法鏡)과 김보운(金寶雲, 一名사바하, 88), 이회광(李晦光), 김구하(金九河) 등 일파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일본인 정목일랑(正木一郞)과 송진옥(宋鎭玉) 등과 의논하고 소위 조선불교를 개혁한다는 이름 밑에서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목적으로 한 소위 종교운동을 또 다시 하려고, 우선 그들의 대표자인 곽법경은 장문의 건백서를 휴대하고 십여일전에 동경으로 건너가 귀족원 의원 와타나베(渡邊)
모(某)와 모 통신사(某通信社) 사장 우좌언태랑(宇佐彦太郞)과 결탁하여 그 건백서를 내각에 까지 제출하려고 와카츠키(若槻) 수상(首相)을 방문하는 등 맹렬히 암중 비약을 하고 있다는데 그 건백서의 내용은 현재 조선불교의 모든 기관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이 경성 안에 조선불교총본산을 건설하고 그 본산 법당 안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메이지 천황(明治天皇)과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를 한 자리에 안치(安置)하여 정교일치(政敎一致)로 일선융화를 철저히 실행하겠다는 것인 바, 전기 곽법경은 동경에서 재류하는 조선불교학생들에게 무슨 위해나 당할까 하여 동경 경시청에 보호원(保護願)을 제출하는 동시에 불교 유학생을 여러 가지로 모함중상을 하여 오던 중 수일 전에는 동경을 떠나 어디로인지 종
적을 감추어 버리었다더라.
음모의 발단
전기 곽법경 사건의 최초 발단은 일본인 정목(正木) 등이 작년 가을부터 선승(禪僧) 임해봉(任海峯,68)을 앞에 세우고 소위 조선불교부흥회(朝鮮佛敎復興會) 또는 조선불교임제종연합회(朝鮮佛敎臨濟宗聯合會)를 조직하여 회관을 시내 견지동(堅志洞)에 두고 정목과 임해봉은 그동안 수삼차 동경으로 건너다니며 역시 우좌언태랑의 소개로 조야(朝野) 모모(某某)를 방문하고 조선불교를 일선융화에 공헌할 터이니 임해봉에게는 수원 용주사(龍株寺) 주지를 임명하고 그 외 다른 절도 수야 모야에게 맡겨 달라는등 별별 운동을 다 하다가, 전기 임해봉이 그 동안 전후 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야 수원 용주사 사유전답 소작사음권(小作舍音權)을 청주 이종태(李鍾泰) 외 5, 6명에게 팔아 수천여 원을 편취한 사실이
최근에 발간되어 월전에 경성으로 건너온 임해봉이 시내 모 경찰서에서 구류까지 당하여 그 동안 계획하던 운동이 모두 뜻대로 되지 아니함으로 정목은 또 다시 곽법경 일파로 그 음모를 계속하게 한 것이라더라.
<출전 : 李晦光, 「看板은 朝鮮佛敎總本山, 主旨는 日鮮融和와 政敎一致」,'東亞日報', 1926년 5월 12일>
2. 김구하(金九河)
1) 이세대묘(伊勢大廟)
정성을 다해 대묘 찾아가는 길 비 내리는데 輸誠廟路雨中尋
수없이 늘어선 푸른 나무는 갈수록 깊어지네 碧樹森羅轉轉深
신전 앞에서 배알하니 천지가 엄숙해지고 拜謁神前天地肅
음악 소리에 신선들 사는 곳임을 깨닫게 하네 笙歌一曲覺仙林
<출전 : 金九河, 「伊勢大廟」, '朝鮮佛敎叢報' 7호, 1917년 11월, 34쪽>
3. 강대련(姜大蓮)
1) 데라우치 수상을 뵈옵고(見寺內首相)
거듭 용문에 오르니 영광이 함께 하고 重上龍門與有榮
조복 입고 알현하는 모습 안연히 소리도 없네 搢笏凝然不動聲
많은 황금과 오색 실로 百鎰黃金絲五色
주조한 공의 모습 공의 이름을 아름답게 수놓네 鑄公像貌繡公名
<출전 : 姜大蓮, 「見寺內首相」, '朝鮮佛敎叢報' 7호, 1917년 11월, 34쪽>
2) 불교옹호회와 법려(法侶)의 각오
우리 조선에 유불(儒佛)이 병행하여 천여 년 간을 상안무사(相安無事)하더니 고려 말경에 이르러서야 주자(朱子)의 학파가 성행하여 우리 불교의 도(道)를 지척(指斥)2)하기를 시작하였는데, 이조(李朝)의 유가(儒家)는 이를 계승하여 “기세멸륜(棄世蔑倫) 무부무군지학(無父無君之學)”이라고 표방(標榜)하여 지척하였으니 약간의 승려는 ‘고봉절정(高峯絶頂) 위암고사(危庵孤寺)’로 내쫓겨 인민이 근접하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법도(法道)를 천양(闡揚)3)하는 능력을 모두 전실(全失)하여, 저 유가의 적대적 군기(群起)4) 공격은 구실을 주게 되고 우리 불도의 소극적 독선주의(獨善主義)는 사실을 성(成)하였도다.
비록그러하나 이조(李朝) 중엽에 이르러서 ‘청허(淸虛)5), 송운(松雲)6), 허백(虛白), 벽암(碧岩)7)’등 모든 대사의 근왕(勤王)의 훈공(勳功)과 축성(築城)의 노적(勞績)을 보여서 위로부터 조정(朝廷)에서 아래로는 여서(黎庶)8)에 이르러서 불교의 효력을 흠경(欽敬)하여 해남(海南)의 표충(表忠)과 향산(香山)의 수충(酬忠)의 정표(旌表)를 사전(祠典)이 있어야 300년 이래의 불교가 영불타지(永不墮地)함은 저들 제사(諸師)의 공력(工力)을 전뢰(全賴)하였고 1901년에 이르러서 조선불교가 정부의 보호하시는 은덕(恩德)을 의지(仗)하여 다시 중흥의 기운을 만났도다.
비록 그러하나 최근에 불교 상태를 논할진대, 구병지인(久病之人)이 의사를 만나 효험을 얻었으나,원기(元氣)가 쇠약하여 정신은 자약(自若)하나9) 지체(肢體)는 무력하여 자기자행(自起自行)치 못하고 곁의 사람의 부호(扶護)를 필수로 하여 일보전진(一步前進)하는 모양과 흡사하도다. 근경(近頃)에 이르러서야 귀족(貴族) 제씨(諸氏)의 발기(發起)로 불교옹호회(佛敎擁護會)가 성립되었음은 본보(本報) 전호(前號)에 이미 보도하였던 바이다.
이러한 시절에 있어서 우리들 법려(法侶)는 불교정신으로써 수양방법을 인사(人士)에게 권도(勸導)하여 이 세기에 행복을 향수(享受)하면 다른 생에도 극락을 가히 점칠수 있으니 집경문난(執經問難)10)에 석의(釋義)를 더불어 함은 희망의 노력이 되며, 간화공부(看話工夫)
2) 웃어른의 언행을 지적하여 탓함.
3) 드러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
4)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일어남.
5) 서산대사로 더 잘 알려진 휴정(休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한양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
6) 조선중기 승려 유정(惟政).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휴정의 휘하에서 활약했고, 정유재란 때도 울산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웠다.
7) 조선중기 승려 각성(覺性).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활약했으며 남한상성 축조 시에도 힘을 보태었다.
8) 보통 서민을 뜻함.
9) 큰 일을 당해도 놀라지 아니하고 보통 때처럼 침착하다.
10) 불경을 들고 어려움을 묻는다는 뜻.
의 법문(法門)을 말함은 선사의 책임이 될지나 그중에 제 1착으로 대강령(大綱領)을 지을 것은 우리 불교의 교리에 충효이사(忠孝二事)가 유설(儒說)에 양보할 수 없음을 극변(極辨)해야 저 유자가 배척을 하던 구실을 세척(洗滌)하고 가리왕(歌利王)의 인욕경계(忍辱境界)를 광설(廣說)하여 기독교의 정사구세(釘事救世)한다는 복음을 압도치 아니하면 아니될 지로다.
충어군일사(忠於君一事)에 대하여 일례를 들면 신라시대에 원광(圓光)법사는 속자(俗子)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사람의 문도(問道)함에 대하여 말하기를 “불교에는 보살계(佛有菩薩戒)가 있어 그 구별이 열 가지가 있으나 너희들은 신하된 자이므로 능해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하나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이요, 둘은 사친이효(事親以孝)요, 셋은 교우이신(交友以信)이요, 넷은 임전무퇴요, 다섯은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하니 귀산과 추항 두 사람이 종신토록 봉행(奉行)하여 과연 임전불퇴(臨戰不退)하여 충신이 되고 신라 김유신(金庾信)은 유명한 장군인데 매번 출병하는 때에는 반드시 삼일 간을 참선(參禪)하여 정신을 수양하여 전필승(戰必勝) 공필취(攻必取)한 행적이 있으니 일러전
쟁(日露戰爭)에 일본의 승려(僧侶)가 다수 종군(從軍)하여 출전군인의 심혼(心魂)를 위안(慰安)하였다함도 조선 고대의 불교는 이를 이미 행한 바이니 조선 법려(法侶)는 이 점에 대하여 크게 각오(覺悟)할것이오.”
<출전 : 姜大蓮, 「佛敎擁護會와 法侶의 覺悟」, '朝鮮佛敎叢報' 4호, 1917년 9월, 22~23쪽>
3) 불교기관 확장 의견서
조선 통치가 시작된 이래로 문화가 일신하였고, 비로소 30본산연합의 종무기관이 있게 되었고 또 중앙학림 기초를 설립하였으니, 불교진흥의 첫 번째 기회이다. 지금 총독각하가 부임한 이래로 정치가 개선되었고, 교화가 더욱 밝아졌다. 불교의 종무기관은 이때를 당하여 확대할 수 있고 불교의 교육기초는이때를 당하여 공고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불교진흥의 두 번째 기회이다.
불교의 운이 바야흐로 태양이 동쪽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어떠한 방편이 없다면 이 기회에 부응할 수 없다.
故本職旣在三十本山委員長之任, 多年經營之擴張方針蘊籌胷窩而未敢發者, 待此機會而然也. 幸當千載一遇之秋, 敢陳
조선승려는 전부 선종이다(임제종 맥을 전한다). 선종은 일본과 조선승려는 물론이고 아내를 취하고 고기를 먹는 등 계율을 어기는 것이 마땅하냐?
그것은 없어야 한다. 또 불교를 위해서는 금단해야 한다.
그러나 내지승려 중에서 동·서 본원사의 법주(法主) 승려는 조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황실과 인척관계에 있으며, 그 밖의 승려도 일반서민과 서로 결혼하고 있다. 지금 재운니(材雲泥)전하는 황실에서 출가하여서, 황실출신이 출가한 즉 황실과 승려 사이에 직접적으로 통하는 관계가 있고 서민과 승려들도 역시 버릴 수 없는 관계가 있으니, 이로 말미암은 불교의 감화는 바람이 불을 크게 일으킴과 같아 동·본원사 법주 나 승려는 (法主)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서 교화를 한다. 그러므로 조선 왕족의 여자나 귀족의 여자, 그리고 일반 서민의 여자에게도 이러한 예를 준용하여 일본 승려나 조선 승려와 결혼을 시킨다면 이는 불교의 감화를 정교롭게 하고 향상시키는 첫째 요소가 될 것이다.
또 조선의 왕족 남자나 귀족 남자로 출가한 승려로 하여금 일본의 왕족 여자나 귀족여자와 서로 결혼하게 한다면 이는 불교 감화의 둘째 요소가 될 것이다. 또한 내선승려가 서로 설법하여 깨달음을 열고 마음을 선하게 하는것은 오직 언어가 통하는 것으로서 세 번째 요소가 된다. 조선 승려는 먼저 일본어를 급선무로 삼는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승려도 조선어를 통한 연후에만 마음속에 있는 말을 계진할 수 있으니 정신상의 융화가 멀지 않아 이루어질 것이다.
이 어찌 同感同化의 一大하나의 큰 主旨가 아니겠는가? (후략)
<출전 : 姜大蓮, 「佛敎機關擴張意見書」, '朝鮮佛敎叢報' 20호, 1920년 3월, 1~10쪽>
4. 김태흡(金泰洽)
1) 법려의 자각과 사회교화의 유의
“동아인(東亞人)의 동아건설과 영원한 동양평화수립에 공총(倥傯)한 사이에 세서(歲序)는 천역(遷易)하여 1939년의 신춘을 맞게 되었음으로 강내(疆內) 7천의 법려(法侶)와24만의 신도와 같이 삼가이 성수무궁을 기도하며 국운융창(國運隆昌)을 봉축하고 법려의 자각을 촉진하는 동시에 사회교화의 유의(留意)를 종용(慫慂)하는 바이다.
회고하건데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로 국민정신의 순화계배(醇化啓培)에 대하여 위대한 공헌이있으며 또는 사원이 신앙의 중심 문화의 전당으로서 인심의 계발(啓發)과 복리의 증진을 위하여 다대(多大)한 공헌이 있어 온 것은 찬언(贊言)을 불요(不要)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 조선의 현상을 볼것같으면 만근(輓近) 사회정세의 변화에 건(件)하여 신앙의 동요가 심하며 사찰과 민중의 관계가 전일과 같지 아니함은 부지(不知)하고 의연히 구태(舊態)를 하여 은수주의(隱遀主義)에서 일보를 부진(不進)하고 있으니 참으로 유감천만(遺憾千萬)의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불교도의 생명이 무엇보다도 불교선포(宣布), 포교(布敎), 교화(敎化)에 있는 것이거늘 이를 망각하고 돌아보지 아니하는 고로 그간에 유
사 종교의 사교(邪敎)가 발생하여 민중을 준독(蠢毒)시키는 위법행위가 속출하지 않는가.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며 누구의 죄악인가.
이는 아국(我國)의 국교로 자임하는 우리 불교도가 불교 본래의 면목을 발휘하지 않고 국민정신교화에 유의치 않은 관계라고 하겠으니 우리 법려는 현하 시국다단(時局多端) 국민정신총동원을 강조하는 금일에 있어서 더욱이 건전한 신앙의 고취와 국민정신작흥에 관하여 분기(奮起)하지 않으면 아니 될것이라고 믿는다.
본보(本報)가 창간된 후 지금 5년의 신춘(新春)을 맡게 된바 그간에 비록 큰 성속(成續)은 없었으나 항상 사회화에 유의하여 자수자리(自遂自利), 이타겸제(利他兼濟), 대은보사(大恩報謝) 이와 같은 3대강령하에 법등계소(法燈繼紹)의 헌신적 희생, 불교시사(佛敎時事)의 보도충실, 교화운동의 전력철저,이러한 삼대 사명을 위하여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면서 꾸준하게 지켜온 것이다. 그러나 본보는 금년부터 또 일순(一脣) 사회교화에 유의하여 매진할 각오를 가지고 있는 바이니 법려는 자각하여 본보와 같이 동일한 보무(步武)로써 답진(踏進)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더욱이 기묘(己卯)년인 본년 내에는 전 조선의 불교 사찰을 통제할 만한 총본산의 기구조직이 합법적으로 인가되어야 법령으로써 공포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따라서 만반 시설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을느끼게 된다.
그런고로 본보도 이 총본산을 보좌하여 내적으로는 여론을 광정(匡正)하고 외적으로는 불교 홍포(弘布)에 주력하고자 하는 바이니 일반 법려도 그와 같이 양찰(諒察)하고 협력하여 주기를 바라마지않는다.”
<출전 : 金泰洽, 「法侶의 自覺과 社會敎化의 留意」, '佛敎時報' 제42호, 1939년 1월 1일, 1쪽>
2) 신동아건설과 내선일체
천업회홍(天業恢弘)11)의 성전(聖戰) 제4년 동아 신질서 건설의 완수를 기한 신춘(新春)을 맞이함을 당하여 삼가 성수무궁(聖壽無窮)을 축도(祝禱)하고 황실의 어번영(御繁榮)을 봉축하여 마지않는다.
이와 같이 경사스러운 전첩(戰捷)의 신춘을 하영(賀迎)하게 된 것은 넓고 크신 어릉위(御稜威)12) 하에 충용의열(忠勇義烈)한 황군 장병제씨(諸氏)의 분전역투(奮戰力鬪)한 적성(赤誠)에 의한 힘이라.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바치어서 더욱이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여 또는 호국충령(護國忠靈)에 대하여 그 명복을 빌며 언제든지 보은일념(報恩一念)을 불사(不捨)하고 총후봉공(銃後奉公)에 지성을 다하여 어성지(御聖旨)에 봉부(奉副)13)하고자 한다.
회고하건대 우리 조선인은 소질상(素質上)으로 보아서 결백(潔白), 용감, 의협(義俠), 독창성이 풍부하였으나 지리적으로 조선은 대륙에 붙은 한 반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본과 병합전(倂合前)까지도 사대주의, 모화(慕華)주의, 문존무비(文尊武卑)주의에 마비되고 중독이 되어서 개인생활에 있어서 독립진취, 활발 용감 등 기상과 훈련이 전혀 상실되고 의뢰심 증장(增長), 타력생활(他力生活)이 본위가 되어서 말할 수 없이 가엾은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세계 대세(大勢)의 전환에 따라서 조선민중이 대일본 제국 신민(臣民)의 일분자(一分子)가 되어서 천황폐하의 적자(赤子)로서 일시동인(一視同人)14)의 대이상 하에 대화(大和)15) 민중과 흥망을 같이 하는 동시에 선천적으로 품수(稟受)16)한 조
11) 천업(天業) : 임금의 사업, 회홍(恢弘) : 넓고도 큼.
12) 존엄, 천자의 위광을 뜻함.
13) 받들어 맞이함.
14) 모든 사람을 하나로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인데, 일제가 조선인을 일본인과 차별없이 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5) 야마토. 일본국을 일컫는 말.
16) 품부(稟賦)와 같은 말. 선천적으로 타고남을 뜻함.
선남아의 정기를 고작 발휘하게 되었다. 보라 이제부터 조선민중 앞에는 압록강만 건너서면 일찍이 고향이었던 대륙이 전개(全開)되어 있지 않은가. 조선은 일동제국(日東帝國) 동아건설에 병참기지이니만큼 우리 노력여하에 따라서 활약하고 성공할 무대(舞臺)와 기회가 얼마든지 혜여(惠與)17)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조선민중으로서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은 대화민족과 일체가 되어서 한편으로 수천 년간 훈련된 바의 용감과 단합과 능률을 가진 대화민족으로부터 지도편달을 받아야 할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우리 소질에 고유한 전통적 미풍양속을 보존하고 지속하여야 내선인(內鮮人)의 장처(長處)를 합해가지고 동아신질서 건설에 매진하여야 될 것이다. 장기 건설수행에 있어서 가장 급선무는 내선일체라고 하겠으니 미나미(南) 총독이 내선일체와 선만일여(鮮滿一如)를 표방하고 강조함도 이에 큰 이유가 있는것이다.
그러면 내선일체의 정의란 무엇인가. 일본인도 폐하의 적자이지라 일시동인 하에 다 같이 생활하는
것 내선일체의 기초원칙이다.
그런데 이 원칙상에서 내선일체를 실현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으니 즉 우리 내선국민이 한 가지 자아를 멸각(滅却)하고 황실의 번영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전시체제하에 있는 우리 국민으로서는 천업회홍의 성전을 위하여 멸사봉공(滅私奉公)이 일대목표라고 하겠으니 우리 국민이 사적 생명을 거두어서 무량무궁한 황실의 어대생명(御大生命)에 몰입함이 근본요체라고 하겠다.
<출전 : 金泰洽, 「新東亞建設과 內鮮一體」, '佛敎時報' 제54호, 1940년 1월 28일, 1쪽>
3) 황군장병 노고에 대한 감사
건곤일척(乾坤一擲) 세월이 바뀌어 성전(聖戰) 제5년을 맞이하여 희망의 불이 타서 광명이 떠오르는1941년) 황기(皇紀) 2601년 27세기의 초년두(初年頭)를 봉영(奉迎)함에 제(際)하여 우리들은 생명(生)을 황국(皇國)에 드린 것을 무상의 광영으로서 믿고 감격함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우러러 조국(肇國)의 정신과 성□의 어(御)번영을 돌아보고 현재 금일의 국운의 융성을 목도(目覩) 할 때에 국민으로서 누가 황국의 광피(光被)18)에 공구(恐懼) 감격하지 아니할 자가 있겠는가.
최근까지 서양문명의 수입에 의하여 수많은 사상적 여폐(餘弊)가 우리나라에 풍미(風靡)하여 개인주의의 유물사상(惟物思想)이 황국 일본의 건전한 국민사상에 이완(弛緩)을 준바 적지 않아 실로 유감된일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것은 이미 일시적 악몽을 보는데 불과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본연한 황국정신의 용자(勇姿)는 일단 완급(緩急)의 역사적 사건이 있을 때에는 신국(神國)시대의 본연한 건국정신, 황국성자(皇國聖姿)로 돌아가서 희생봉공(犧牲奉公), 충효일관(忠孝一貫), 군민일덕(君民一德)의 실(實)을 다투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 지나사변 이래에 거국적 애국운동은
17) 은혜롭게 무엇을 줌.
18)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으로, 덕(德)의 광택이 세상에 널리 퍼짐을 이르는 말.
국가생활에 대한 일본국민의 본능적으로 전통되어 충군애국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 4년간에 단속하여온 지나사변으로 말하면 각자는 사변이로되 실상에 있어서는 일·청(日淸) 전역(戰役)과
일·러(日露)전쟁을 합한 수배 이상의 대성전으로서 전몰자(戰殁者)의 수로 본다든지 물질의 소비로써본다든지 연월의 경과로써 본다든지 우리 국민이 놀라지 아니할 수 없고 긴장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반면에 있어서 연전연승의 결과로 동아고독(東亞蠱毒)의 악마인 백인의 세력을 구축하고 영구한 동양인의 동양평화의 확보를 보게 되며 황국 일본이 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는데 동시에 독일·이탈리아와 동맹하여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려고 거보(巨步)를 내딛게 되었으니 이것을 생각할때에 우리들은 천황폐하의 어능위와 함께 황군의 공적이 실로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충용의열(忠勇義烈)의 황군의 분전(奮戰) 미담(美談)을 들을 때마다 사자분신(獅子奮迅)의 황군 격전의 영화(映畵)를 배
관(拜觀)할 때마다 우리들은 오직 감격의 암루(暗淚)로써 황군의 노고를 감사하는 바이지마는 황군장병은 참으로 대남공(大楠公)의 칠생보국(七生報國)의 정신과 도고(東鄕) 대장(大將)의 「황국흥패(皇國興敗) 재차일전(再此一戰)」이라는 격려의 분전과 노기(乃木) 대장의 성충무비(誠忠無比)의 희생적 봉공의 실천과 「의중산악(義重山岳) 사경홍모(死輕鴻毛)」의 각오를 가지고 수많은 곤란(困難)과 신고(辛苦)를 불고(不顧)하고 생사의 혈항(血巷)을 출입(出入)하며 연전연승의 전과를 거두기 때문에 금일에 있어서 국위(國威)가 더욱 선양되고 무운(武運) 길이 길이 장구함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총후국민은 호국영령에 대하여 적심으로써 감사를 바치고 묵도하며 출정 장병 및 전상(戰傷) 용사에 대하여 감사위문을 행하며 군인 유가족과 출정 유수(留守) 가족에 대하여 위문애무하고 적극적인 원호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써 믿는 바이다. 그런고로 우리 불도는 신년을 당하여 황군장병의 노고에 대하여 감사를 바치는 적성(赤誠)으로 국위선양과 무운장구를 불전에 기도하는 동시에 제국 일 억의 국민이 다시 더한층 결속을 굳게 하여 확고불발(確固不拔)의 정신으로써 황군을 후원하여 난국돌파에 매진하기를 충심으로써 빌고 사변처리(事變處理)의 전도(前途)는 극히 광명에 빛나는 바 있음을 확신하는 바이다.
<출전 : 金泰洽, 「皇軍將兵勞苦에 對한 感謝」, '佛敎時報' 제66호, 1941년 1월 15일, 1쪽>
4) 국민정신과 씨 창설
국민정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거기에 강한 자랑을 느끼는 일이요, 둘째는 일본과 조선과는 절대적으로 한 몸이라는 신념(信念)을 가짐이요, 셋째로는 제 각기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하여 직업을 배워서 충실히 그 직분을 다하는 동시에 인고 단련하여 황도를 널리 사해에 발휘하는 것으로서 가장 큰 기쁨을 삼는 것입니다.
우리네 반도동포도 황은을 입어서 벌써 30년이나 되지만은 태고의 역사를 살펴 볼 것 같으면 내선(內鮮)이 한 집안이어서 이,삼십 년이라는 것은 우리가 내지(일본)를 떠나 있다가 다시 본 집으로 돌아와서 부터의 연수이지 실상은 삼천년 동안이나 우리는 직접으로 간접으로 황은을 입고 온 것입니다.
그러한 고로 우리는 새로이 황국신민이 된 것이 아니라 벌써부터 황국신민으로 있었던 것이 어떠한 사정으로 조금 분가를 해가지고 있다가 본시와 같이 다시 황국신민이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에는일천사해개귀묘법(一天四海皆歸妙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팔굉일우(八宏一宇)의 일본중심(日本中心) 세계통일(世界統一)의 황도정신으로 본다면 우리가 어찌 일찍부터 황국신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겨우 삼십년 전에 황국신민이 되었다고 해서 신부(新附)19)의 백성이라든지 의붓자식과 같은 계자(繼子)20)의 관념을 가지고 일본 동포에 대해서 공연히 서먹한 생각을 두고 간극을 두어가지고 어름어름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이라는 불경에서 보면 신해품이라는 데 사부도서(捨父逃逝) 즉 아버지를 내버리고 달아나갔다가 환가상속(還家相續) 즉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비유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우리 반도 동포는 꼭 이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반도동포도 신부의 백성이나 가봉자(加捧子)21)나 서자(庶子)22) 계자가 아니라 적자(嫡子)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그러한 신념과 자랑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서 봉공해야 되겠습니다.
미나미 총독이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조선동포로 하여금 씨창설(氏創設)을 하여 내선동포가 동일한 씨를 같게 한 것은 참으로 나갔던 자식이 들어와서 집의 아버지에게 상속받을 만한 자격을 만들어주게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기회를 잃지 말고 하루바삐 씨창설을 하여서 어느나라를 가던지 우리 씨명만 보더라도 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인 것을 인식케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씨창설만으로서는 아직 황국신민 되기에 자격이 부족한 것인 즉 황국신민이라는 그 이름과 내자식의 씨명인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됨에 있어서는 성의와 수련이 더욱 필요합니다.
내선(內鮮)은 이미 한 몸이 되었으나 진정한 몸의 열매를 맺기에는 서로 수양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신적 실질을 배양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해서 정신을 단련하고 실질을 높여야겠습니다. 이렇게 단련하고 높인다는 것이 곧 국민정신 연마인데 이 연마라는 것은 남이 시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서 참으로 기미가요의 국가가 솟아 나오고 일장기를 볼 때마다 감격한 생각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반도 동포가 모두 이렇게만 되고 보면 가정을 위해서 개인끼리 서로 싸워나가는 모든 근심과 걱정이 국가를 위해서 다 사라지고 어찌하면 우리나라를 씩씩하게 할까 하는 새로운 결심 하에 청신한 기분과 깨끗한 성신과 굳은 믿음과 뜨거운 희망만이 남는 행복 된 국민이 될 것입니다.
<출전 : 金泰洽, 「國民精神과 氏創設」, '佛敎時報' 제59호, 1941년 6월 15일, 1쪽>
19) 새로 복속함.
20) 양자, 의붓자식.
21) 여자가 덤받이로 데리고 온 아들.
22) 본부인이 아닌 딴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들.
5) 광영의 징병제도 실시
황국신민으로서 감격에 넘치는 광영의 징병제 실시를 보게 되니 황은의 홍대함을 감읍할 뿐입니다.
반도 2천 4백 만의 신자가 오랜 옛날부터 대망하고 갈구하던 반도 징병제도 실시가 5월 9일 각의(閣議)에서 결정되어 공식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 고로 반도 청년도 모두 1944년부터 황국의 간성(干城)23)으로 폐하께 몸을 바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열리게 되었습니다. 병합 이래 일시동인(一視同人)의 무변하신 황은을 받들어 온 지 30여 년 천은의 두터우심에 반도 적자들은 오늘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1938년 특별육군지원병제도가 실시되어 반도 청년들도 제1선에 나서서 충성을 바칠 수 있었지만 한걸음 나아가 황국신민으로서의 가장 큰 광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기를 우리는 손꼽아 기다려온 것입니다.
그러던 터에 전첩에 빛나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24) 하 5월 9일로서 이 발표를 접하게 됨에 반도 민중은 감격에 넘쳐 있는 바입니다.
그런 고로 우리 반도 신민은 이 징병제도 실시를 목표로하고 그 책임이 크고 중함을 다시금 명념하고 봉공의 대임을 완수키 위하여 일사보국(一死報國)의 큰 결심 하에 많이 배우고 정진하지 않으면 아니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반도 청년이 1944년에 실시하기까지 그에 준비할 것은 제일 먼저 일본 정신인 충절(忠節)의 대화혼(大和魂)을 연성(鍊成)하여 제국 군인으로서 부동명왕(不動明王)25) 같은 건전한 정신을 가질 일이고, 둘째는 신체를 강건히 하여 동두철신(銅頭鐵身)의 장사를 만들 것이고, 셋째는 국어26)공부를 열심히 하여 언어의 불통과 난삽(難澁)이 없이 할 것이고, 넷째는 일본문화의 예의작법을 심득(心得)27)하여 배워서 내선일체의 결실을 거둘 것이고, 다섯째는 언제든지 정직을 목표하여 거화취실(去華就實)28)하고 순실(純實)하게 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전 : 金泰洽, 「光榮의 徵兵制度實施」, '佛敎時報' 제82호, 1942년 5월 15일, 2쪽>
5. 허영호(許永鎬, 德光允)
1) 황실의 어번영(御繁榮)을 축함
권두언
황기(皇紀) 2599년 이제야 황위(皇威)는 동아 대륙의 위에 광피(光被)29)하니 이는 오직 만세일계무이
23) 방패와 성.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군대나 인물을 일컫는 말.
24) 태평양전쟁을 뜻함.
25) 대일여래의 화신으로 악마와 번뇌를 응진하는 왕.
26) 일본어를 뜻함.
27) 충분히 이해함. 마음 깊이 깨달아서 간직하고 주의함. 또는 그런 주의 사항.
28) 형식을 버리고 실질을 취함.
(萬世一係無二)의 국체와 윤문윤무(允文允武)30) 폐하의 어릉위(御稜威)에 기한 바를 1억 적자(赤子) 오로지 감흡 할 뿐이다.
황도(皇道)를 천하에 선양하고 국위를 팔굉(八紘)에 편진(徧振)하여 만민을 황화(皇化)에 자윤(滋潤)케하고 보토(普土)를 군덕(君德)에 귀순케 하니 위로 황실의 존엄 아래로 국민의 위대 참으로 빛나도다.
우리나라는 황실과 국민이 유자유애(維慈維愛)한 만고무비(萬古無比)의 일가(一家)로서 황실의 번영은 곧 국민의 부성(富盛)으로 국민 전체가 항상 황실의 유고(愈高)와 미영(彌榮)을심축(心祝)31)함을 마지않은 연유(緣由)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년을 당해서 삼가 황실의 번영을 축원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출전 : 許永鎬, 「皇室의 御繁榮을 祝함」, '佛敎新' 제19집, 1939년 2월 1일, 1쪽>
2)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세계는 미구(未久)에 회전(回轉)되리라 실로 수세기에 걸친 역사가 최근 이 삼년동안 동아 천지에 움직였다 할 것이다. 정확 또 강건한 동아의 성업은 수행되고 순애 또 정의인 황도(皇道)의 정신은 선양되다.
이에 우리 반도 민초는 총후(銃後)의 진(陳)에서 어찌 감루(感淚)32)할 뿐일까. 더욱 철저한 각오와 아울러 비상한 결심을 배전(倍前)33)해야 할 터이다. 앞서 내선일체의 진체(眞諦)를 체득하여 순일무잡(純一無雜)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오. 나아가 팔굉일우의 대이상을 실현하여야 할 것이다.
2천 3백여만은 2천 3백여만의 힘으로 일단(一團)이 되어 황은 그의 만분(萬分)중 일라도 보답하여야 할 것이며 7천여 승려(有呂)는 7천여 불심(佛心)을 일치케 하여 신앙보국의 일대사(一大事)에 집중케 할 것이다.
사유컨대 학제개혁 지원병제 실시, 또 씨가창설34)을 허함은 황위(皇威) 무량대(無量大)의 덕음(德陰)이며 이는 바로 내선의 문화적 혈맥적 일원화의 서곡이다.
‘유사 이래 최대 그리고 최선(最善)이고, 최고 그리고 최미(最美)의 도의황국(道義皇國)’의 대이상 실현에로 맥진(驀進)35)하는 이 반도 강산에 성재(聖哉) 황기 2600년 경진(庚辰) 원단(元旦) 휘황한 상서로움이 동쪽 창공에 있다.
<출전 : 許永鎬, 「皇紀2600年을 맞이하여」, '佛敎新' 제20집, 1940년 1월 1일, 1쪽>
29) 널리 비친다는 뜻으로, 덕(德)의 광택이 세상에 널리 퍼짐을 이르는 말.
30) 천자(天子)가 문무의 덕을 겸비하고 있음을 이르는 말.
31) 진심으로 축하함.
32) 매우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
33) 이전의 갑절.
34) 창씨개명.
35) 좌우를 돌아볼 겨를이 없이 힘차게 나아감.
3) 총본산의 운영
1.
우리 종교의 숙망(宿望)은 드디어 이루어져서 총본산(總本山) 태고사(太古寺)의 창설을 보게 된 것은 법려(法侶)와 함께 반가워하는 바로써 확실히 조선 불교사상의 일전기(一轉機)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전기를 지은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요 반가운 것이 아니라 총본산의 건설로 말미암아 2600년의 조선불교가 과거의 모든 불운을 청산하고 침체를 소결(掃決)하고 새로운 사명과 새로운 진로를 얻어서 웅비하려는 그 점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종래에 있어서도 교단으로써 그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였다는 것은 아니나 자체 내부의 혼란과 모순은 스스로의 진전을 저해하였고 이 사실은 서로 인과적 관계 아래서 교단으로 하여금 그 본연의 사명에서 유리된 향로의 한 편에서 방황하게 하였던 것도 지적할 필요조차 없다고 할 것이다.
이 혼란과 모순을 정돈(整頓) 양기(揚棄)36)하고 그 혼란과 모순으로부터 따라오는 쇠태(衰態)와 약체를 회복보건
(回復補健)하기 위함이 총본산 건설을 꾀한 중대한 일조건(一條件)이다. 중대한 일조건(一條件)이라는것보다 총본산 건설의 소극적 방면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총본산은 먼저 이 혼란과 모순을 철저히 정돈하고 철저히 양기(揚棄)하지 않으면 총본산 건설의 일인(一因)을 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단 자체 내부의 혼란과 모순을 철저히 정돈 양기하는 것이 총본산 건설의 소극적 방면의 유일한 조건이라 하면 교단자체에 ‘유기적 통일을 주고 혼연일위(渾然一位)가 되어 불타(佛陀)의 성법(聖法)을선양하고 국가부문의 중요한 일면을 부담하여 정신교화’에 진췌(盡悴)37)하라는 것은 총본산 건설의 적극적 방면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2.
이상의 소극적 조건과 적극적 조건이 총본산 건설의 2대 여건이라 하면 총본산으로서의 힘쓸 바 방향은 스스로 밝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면이 정해지고 진로가 밝혀졌다 하더라도 도리어 문제는 그 방면으로 어떻게 향하게 하며 그 진로를 어떻게 걸어가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곧 교단 자체 내부의 혼란과 모순−그것은 결코 단일한 것도 아니오 복잡한 것이며, 결코 현저한 것만 아니오 은미(隱微)한 것도 있어서 제도상으로 의식상으로 교육상으로 포교상으로 교리상으로 신앙상으로 내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생활적으로 지적하기까지 미황(未遑)38)한 그 혼란 그 모순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조직적으로 능률적으로 정돈하며 또 양기할 것인가 또는 천여 사찰 7천 승니(僧尼)가 어떻게 유기적 통일을 가지고 혼연일체가 되어 불교를 선포하고 국가의 정신문화에 진췌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비겨 말하면 아무리 훌륭한 교육제도를 세우더라도 교단의 현실과 승니의 생활을 전제하지 않을 동
36) 지양(止揚).
37) 몸이 여위도록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애씀.
38) 미처 겨를이 없음.
안 그것은 일종의 관념적 교육제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교단의 이상과 승니의 향상의 전진적 요소를 내포하지 않을 때에도 이상적 교육제도라 이를 수 없다. 한 예에 지나지 않지마는 모든 부문에서 그렇게 하여야 하며 각 부분이 그렇게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부문의 혼융(渾融)한 관계에서 조화되어야 할 것이다.
혼란과 모순만을 피할 것이 아니라 그 혼란과 모순을 구성한 사실과 현상에 질서와 조화를 주도록 할 것이다.
갑(甲)의 사실과 을(乙)의 사실이 모순되고 혼란되었다고 갑에 통일 또는 을에 획일 하는 것이 결코 그 혼란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오, 도리어 거기에 새로운 혼란과 모순의 원인을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원리에 의지해서 재조정, 재편성 하여야 한다.
위에서 말한것처럼 교육제도뿐 아니라 포교방법, 의식, 승규(僧規)제도가 모두 그러하여야 하며 또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즉, 한 제도 한 양식에 외연적으로는 현실과 이상에 즉한 제도 양식을 어떻게라도 또는 어느것이나 채용하더라도 중심에는 일관하는 관념이 없어서는 되지 않는다.
즉 조선불교 조계종에 있어서는 교육제도이고 포교형식이고, 승규의식이고 간에 조계종적에 귀일(歸一)시켜야 할 것이다.
교육의 목적이 국민의 연성(鍊成)에 있다면 조선불교 조계종에 있어서는 조선불교 조계종(曹溪宗) 종지(宗旨)에의한 황국신민의 연성에 있는 것이며 어떤 방식의 포교제도를 채용하더라도 조선불교 조계종지의 선포와 그 실천에 있는 것이다.
3.
그러므로 교단 자체의 혼란과 모순을 알기 위해서 또 정돈 양기하기 위해서는 교단의 전통과 현실과 승려의 의식과정과 성격 내지 반도 민중의 생활과 지향을 깊이깊이 알아서 혼란된 현상과 모순된 사실에 그 존재 이유를 먼저 발견하고 다음에 정돈 양기하지 않으면 새로운 오류를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총본산 사업의 지난성(至難性)이 잠복(潛伏)해 있다.
그러므로 총본산의 기초 확립 내지 조선불교의 재편성은 결코 한 사람이 능히 할 바도 아니오, 결코 한사람이 주도할 바도 아니오. 대중의 지혜가 모인 곳에 비로소 그 온전함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또 적극적 방면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시설(施說)39)과 입책(立策)이 깊은 사려와 밝은 통찰을 통해서 여과된 것이 아니면 그 시설과 그 입책의 항구성(恒久性)을 바랄 수 없으니 일시의 편의와 안이(安易)를 생각해서 임시적으로 시책(施策)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소극적 여건과의 상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 이상 일시의 편의와 안이는 절대로 금물이니, 1차의 입책은 적어도 기구(機構)와, 강령과 규약을 만들지 않으면 그 미치는 해(害)와 불편은 여러 배의 노력을 후인(後人)에게 남기는 것임을 생각하고 마음이 새삼스러워짐을 느낀다. 종무(宗務) 당국자의 책임과 고심이 또한 중차대함을 느끼게 하며 법려 일반의 기대와 신뢰가 생각보다 큼도 또한 이러한 여러 가지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조(一條)의 입법, 한 개의 시책이 그 공명과 정대를 잃어버리고 그 필연과 적절을 가지지 않으면 대중 일반의 신뢰를 저버리는 바가 되니 일반 대중의 신뢰를 저버리는 곳에 혼연일체가 있을리 만무하고 또 종정(宗政) 운용의 원활을 기하기 지난(至難)하다.
총본산의 운용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으나 도저히 다 말할 수 없고 이상에서도 너무 추상적이 되
39) 시책 또는 정책을 뜻함.
어 정작 할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그 진로가 이미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교단 자체의 혼란과 모순의 철저한 정돈, 합목적 양기와 시대에 적응한 불교의 현대화 나아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총본산의 운영을약간 말한 것으로 그친다.
<출전 : 許永鎬, 「總本山의 運營」, '佛敎新' 제32집, 1942년 1월 1일, 11~14쪽>
4) 대동아전 하의 화제(花祭)를 맞아서
황망하옵게도 지난해 12월 8일 미·영(米英)에 대한 선전조서가 환발(渙發)되옵시어 이래4개월간 동아민족의 백년구적(百年仇敵)이던 미영으로 하여금 동아의 전지로부터 구축(驅逐)하고 있는 이때에 석존의 탄생을 축하하는 화제(花祭)를 거행하게 됨은 진실로 의의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대동아전쟁은 물질의 주구(走狗)인 유태(猶太)와 결합하여 세계제패를 꿈꾸던 영미의 적성(敵性)을 아시아(亞細亞)로부터 추방할 뿐 아니라 미영의 이상적 세력까지도 구축(驅逐)해 버리고 아시아로 하여금 그 본래의 면목(面目)에 돌아가게 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시아의 모든 민족은 오랫동안 미영의 물질적 내지 이기적 사상에 마비되어 수천 년래 지켜오던 동양 본래의 사상을 망각하고 헛되이 배미영적 사상에 물들어 왔습니다. 지금이야 이 대동아전쟁은 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해독(害毒)해 온
영미 사상을 아시아의 천지로부터 구축해버릴 절호의 기회일 뿐 아니라 각각 그곳을 얻게 하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조국(肇國)의 대이상을 동아공영권의 위에 확립할 시기입니다.
아니 세계 18억 민중으로 하여금 이 대이상의 아래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대어릉위(大御稜威)의 아래 충용무비(忠勇無比)한 황군은 개전 이래 연전연승(連戰連勝) 벌써 「마닐라」, 「싱가폴(新嘉坡)」, 「랑군(蘭貢)」이 함락되고 「보르네오」, 「수마트라」, 「자바」같은 프랑스령 제도(諸島)도 이미 무조건으로 항복하여 황군이 가는 곳에 적이 있을 수 없고 국기의 휘날리는 곳에 평화가 넘칠 뿐입니다.
지금은 다만 대동아공영권의 일익(一翼)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濠洲)와 인도(印度)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미영제국이 아무리 모략과 회유에 광분(狂奔)하고 있지마는 정의(正義) 황군의 힘은 벌써 인도로 하여금 해방의 기치를 선명하게 하였고 호주 또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대동아공영권 10억의 민중은 소수의 이슬람교도와 가톨릭교도를 제하면 전부가 불교를 신봉하는 불교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동아공영권의 여러 민족을 지도해서 공존공영의 도의적 국가를 건설함에 있어서 불교도로서의 책무가 결코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천고성업의 완수를 협력하게 하는 것은 우리 불교도의 의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욱 수양과 노력을 쌓아서 남방공영권의 불교도와 굳게 악수하여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한층 협하게 하고 또한 긴밀히 제휴해서 조국의 성업을 완수하고 황군의 흥륭(興隆)에 익찬(翼贊)할 것입니다.
불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인도 가비라국(迦毘羅國)40)의 왕자이시던 석가세존으로부터 창설된 것으40) 가비라국(迦毘羅國) :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아버님 정반왕(淨飯王)이 다스리던 나라. 싯다르타(悉達多) 태자(太子) 곧 석존(釋尊)이 태어난 곳. 머리 빛이 누른 선인(仙人)이 이 나라에서 도리(道理)를 닦았으므로 가비로서 한 줄기는 북으로 서역(西域) 중국을 지나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한 갈래는 남으로 실론(錫蘭), 미얀마(緬甸), 태국(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佛印), 자바(爪哇)등에 전해졌는데, 북방불교는 이른바 대승불교로서 서역이나 중국에서도 위대한 교훈과 찬란한 문화를 남겼으나 우리나라에 전해 와서는 단순한 불교라기보다 황실을 중심으로 하는 황화(皇化) 불교로서 발달되고 완성되어 세계불교사상의 고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방불교라는 것은 이른바 소승불교로서 계율을 중심으로 하는 특징을 가져서 북방불교와 그 모양을 달리 하고 있지마는 부처의 일미법문(一味法門)인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남방민중들과 제휴하고 또 그들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불교를 빌려서 하는 것만큼 적절한 것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말하면 남방에 있는 그들은 벌써 불교를 말미암아 황국의 정신을 받아들일 심적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씨만 뿌리면 잎이 나고 꽃이 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남방불교는 계율을 중시하는 불교입니다. 경론(經論)을 배워 교리를 알고 선(禪)을 닦아서 마음을밝히려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나 계(戒)를 가지고 율(律)을 지키는 것을 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장차 그들과 제휴하고 또 지도하기 위해서는 계율불교가 무엇보다 필요하다하여 국내불교도의 계율적 방향에 대한 각성을 환기시키는 소리가 자못 높습니다. 물론 어떠한 종교를 막론하고 행위와 실천을 통해서 구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되나 남방불교의 계율주의적 경향에 대해서 철저한 비판을 지니지 않고 다만 표면상 형식상에 나타난 현상과 습속(習俗)만을 보고 계율지상주의에 추종한다는 것은 생각할 문제입니다.
대저 계율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의 각성과 완성을 기초하고 목적한 생활에서 표현된 도덕적행위 또 윤리적 실천인데서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인데 그 현실생활과는 유리된 형식적인 율문(律文)행위는 산 사람이 인간으로서 국민으로서 인간답게 국민답게 살아 나가려는 말하면 무한히 진행되고 발전되는 인간 또는 국가생활에 있어서는 서로 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금(現今) 남방불교의 계율중심이 우리 불교도에게 새로운 자극과 영향도 줄줄은 압니다마는 위에서 말한 그러한 생기 없는 형식에 흐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계율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리고 형식적 율문에 얽매이는 것은 단순한 전통의
묵수(墨守)로서 시대의 진전에 관계없이 남아있는 것이 남방불교의 현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남방불교의 특징이 동시에 국가생활 내지 사회생활에 있어서 하등의 진전도 없고 발달도 없는 침체한 생활을 가져왔다는 병폐 그것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생기를 주고 밝은 희망을 주고 굳은 신념과 자각을 주는 것은 우리 북방 불교도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남방민중의 문화정도라든지 신앙 형태라든지 그밖에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이 된 것은 여러 가지 원인, 정치적으로나 또는 풍토적으로 천후(天候)라든지 기상(氣象)이라든지 온도습도라든지 여러 가지 원인이 그러게 만들은 역사적 필연성이 있겠지마는 장차 과학으로 기술로 정치로 문화로서 그들의 모든 불행을 제거하고 풍토적 원인까지도 제거해서 새로운 생활감정 사유방법으로부터 생활양식이며 심지어 문화의 진로까지 규정해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지도종교로서의 불교민중지도자로서의 불교도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대동아전쟁이 일어난 뒤로부터 제국은 벌서 1억 국민의 속에 든 일본이 아닙니다.
10억의 국민을 영솔하고 20억의 국민을 지도할 일본입니다.
이 세계사적 전환을 맞이한 일본국민은 물론이려니와 불교도로서 그 담당된 부문에 있어서 그들이 지도할 불교원리라국(迦毗羅國)이라고 함. 가비라위(迦毗羅衛)라고도 하고, 가유위(迦維衛)라고도 하며, 가이(迦夷)라고도 함.
를 확립하고 지도할 인격을 함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단(宗團)불교 사원(寺院)불교로서는 10억 내지 20억 민중의 인심을 파악하고 지도하기에는 너무나 승니(僧尼)적이오, 종단(宗團)적입니다.
대동아공영권의 불교를 세워야 하며 세계적 일본불교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승니로서 생각하는 불교, 종단으로 생각하는 불교를 떠나서 국민으로 생각하는 불교, 사람으로서의 생각하는 불교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대동아공영권을 지도하는 국민으로서 생각하는 불교’, ‘세계를 지도하는 국민으로서 생각하는 불교’를 세워야할 것입니다.
제일선에서 생명을 국가에 바치는 장병들의 신고(辛苦)를 생각하고 ‘대사일번악착(大死一番齷齪)’한 승니불교를 청산해야 국가의 진군에 순행병진(順行竝進)하는 불교 또는 교단을 확립할 것입니다. (하략)
<출전 : 德光允41), 「大東亞戰下의 花祭를 맞아서」, '佛敎新' 제36집, 1942년 5월, 6~8쪽>
5) 오직 하나의 기대
제 한 사람이 아니고 누구라도 한 개인으로서 또는 공인으로서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일은 결코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시 기대내용도 당시의 기대에 정비례하여 무겁고 또한 크다고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은 학창생활을 하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배움에 대한 마음의 기대가 크다는 것은 물론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에 대한 보답이 무겁고 또한 간절하겠지요.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한 분량이 충분하다고 한다면 기대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도 그것이 만족을 느껴서 종지부를 찍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여러분에게 다른 기대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시운(時運)은 끊임없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자 하며 인류는 참으로 걸을 수 없는 운명을 타개하고자 하
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분에 대한 기대가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어서 좋을 것인가요?
세계는 지금껏 상상도 하지 않았던 대 전환을 하고자 하고 있다. 아니, 전환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새로운 발족을이루고자 하고 있습니다.
구미 의존의 모든 제도, 조직, 사상, 문화를 창성하여, 영원한 인류의 도의적인 평화를 확립하도록 숭고한 이념과 구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숭고한 이념과 구상은 강당에서는 체득하는 일이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학도로서는 너무나도 과중한 번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역사의 전환과 문화의 창성 내지 인류의 운명은 그 후 유현(幽玄)하고 징미(徵微)한 의지력으로 나아갈 뿐으로, 고루(固陋)하고 청고(淸枯)한 관념의 세공(細工)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세계의 방대한 힘이 태동하고 있다는 일을 경험한 사실이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세계의 태풍 한 가운데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서 고투한 일이 있는가, 말하자면 대지에 발을 확실히 딛고 미래의 대도를 돌진하는 용맹심을 느낀 일이 있을 것인가?
그렇게 커다란 세계사적인 격동기를 즈음하여 여러분에 대한 기대는 결코 적지 않으며 또한 단순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국민으로서 또는 동양인으로서 아니, 동아공영권의 지도자로서 내지는 세계 인류의 지도자로서 고매
41) 김태흡의 法名.
한 기백의 연성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의 창조자, 새로운 생활의 설계자가 되어 세계 신 질서건설의 담당자로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불교도이기 때문에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책임이 더 무겁다는 것을 스스로 통감할 것입니다. 혹은 제가 하는 말은 한가로운 사람의 헛소리라고 해 두고, 관념자의 헛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면서도 그러한 이상 내지는 기백으로써 정진 해 나가지 않으면 국민으로서 또는 불교인으로서 낙오를 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도자로서의 임무도 수행하는 것이 곤란 할 것입니다.
조선불교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무엇보다도 조선에서는 민중의 지도적인 성능의 확립인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교법의 융성, 종단의 권위와 지위의 향상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래의 전통적인 이념에 의해서는 새로운 지도자적인 성격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새로운 연성이 있으야만 기대가되는 것이다.
참으로 종단의 일체 규례와 기구가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지도자적인 성격이 확립하지 않는 한, 단순한 아름다운
공낭(空囊)에 지나치지 않는 것일 게다. 이상으로써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대라고 하지만 오히려 제 본심으로부터 나오는 염원인 것입니다.
<출전 : 許永鎬, 「唯一の期待」, '金剛杵' 제26호, 1943년 1월 25일, 77~79쪽>
6. 권상로(權相老)
1) 승려 지원병에 대하여
조선에는 아직 징병령이 실시되지 못하였으므로 병역의 의무를 행하려 하는 자 없지 아니하나 그 길을 얻지 못하여 장지(壯志)를 품고 차탄(嗟歎)42)하는 자를 위하여 부득이 지원병제도가 생겼는데 이번,제3회 모집에는 지원병 수가 6만을 초과하게 되고 그중에는 청년 승려로서 지원하는 자도 있어서 설봉산(雪峰山) 귀주사(歸州寺)를 필두로 하여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와 내금강 장안사(長安寺)에 모두 4~5인씩의 지원자가 있다 하며 그 외의 다른 사찰에도 없지 아니한 듯하다.
혹자는 이에 대하여 불교자로서의 탈선적이 아닌가 하지만 아니다. 이 또한 불교의 본령중에 하나이며 더욱이 조선불교에서 있어서는 이채(異彩)를 가지고 있는 특색의 조건이다.
석존께서도 스스로 위무(威武)의 상(相)을 다투시어서 이웃나라의 병화(兵禍)를 방어하신 일이 있으며 마나라존자(摩拏羅尊者)는 고복(鼓腹)43)을 하여서 적병을 퇴각시키었고, 백제의 도침대사(道琛大師)는 국망(國亡)함을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복국(復國)을 꾀하였고, 이조의 서산대사(西山大師)와 그제자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여러 법형제(法兄弟)는 판□(板□)을 당하여 장검립공(仗劍立功)하였고, 벽암대사(碧巖大師)는 병자(丙子)의 난에 항마군(降魔軍)을 조직하고 독보(獨步)는 홀로 명(明)에 내왕하
42) 탄식하고 한탄함.
43)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생활이 풍족하여 태평한 세월을 즐김을 이르는 말.
였으며, 그 외에도 남북한(南北漢)에 치영(緇營)을 두고 승군(僧軍)을 양성하던 것이 아직 어제인 듯하니 금일과 같은 초비상시국을 당하여 의용(義勇)이 있고 지개(志槪)가 있는 청년 승려로서 분연히 일어나서 지원병에 응모하는 것은 불교의 본령을 잊지 아니할 뿐 아니라 더욱이 조선불교의 고유한 색채를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이다.
비구(比丘)는 원래에 걸사(乞士), 포마(怖魔), 파악(破惡)의 삼의(三義)가 있다.
그리하여 과(果)를 성취하면 응공(應供), 불생(不生), 살적(殺賊)의 삼의(三義)가 있다.
그리하여 과를 성취하면 응공, 불생, 살적의 삼의를 가진 나한(羅漢)이 된다. 파악(破惡)의 원인을 닦아서 살적(殺賊)의 과를 얻는 데는 정진(精進)의 □를 쓰고 인욕(忍辱)의 갑(甲)을 집고 지혜의 검(劍)과 지계(持戒)의 방패로 선정(禪定)의 성지(城池)를 지켜서 자내아(自內我)로는 번뇌의 적을 파멸하고 심왕(心王)의 국(國)을 정화(淨化)하며 외적으로는 응화(應化)함에는 중생의 사생포외(死生怖畏)를 조복(調伏)시키어 안락의 피안(彼岸)으로 인도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불보살(佛菩薩)이 중생을 교화함에는 지옥(地獄)에 들어가는 것을 전사(傳舍)44)처럼 여기고 생사 삼계(三界)에 손님(賓)이 되어서 순화로 역화로 잠시를 쉬지 않는 것이니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지옥문 앞에서 눈물을 거둘 시간이 없는 것도 이러한 의미이며, 3천불 중에 투전승불(鬪戰勝佛)이 있는 것도 이러한 표시이다.
이러한 본회(本懷)와 목적을 가지고 출가한 승려로서 찬심수도(灒心修道)하여 명심견성(明心見性)하여서 불언(不言)의 교(敎)와 무공용(無功用)의 도(道)로 세계중생을 □탈(□脫)하면 그만이지만 그러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몸으로서 도솔자(導率者)가 되고 접인자(接引者)가 되어서 좋은 법과 착한 일로 일반에 앞서는 것이 당연한 바이다.
일본 각 종파에서는 군려(軍旅)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종군승(從軍僧)을 다수 파견하여서 포연탄우(砲煙彈雨)의 창황전패(蒼黃顚沛)한 틈에서도 법어(法語)와 법행(法行)으로써 위안을 주며 무양(務樣)을보이거늘 조선불교에서는 간신히 위안대를 1회 파송함에 그치고 말았더니 열혈이 있고 애국성이 풍부한 청년 승려들이 징병에 지원하는 것은 진실로 의외의 희유(希有)45)의 일인 즉 진소위(眞所謂) ‘장위무인(將謂武人)이러니 뇌유일인(賴有一人)’의 격이다. 그러나 승려 지원병 제군은 의용(毅勇)한 군인의 훈련이 있는 위에 광대한 불교의 본령을 잊지 말고 자비로써 원적(怨敵)을 섭화(攝化)하며 지원(智願)으로써 국위를 선양하여 안으로 불교에 점욕(玷辱)이 없게 하고 밖으로는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바란다. 그렇지 못하면 도리어 쌍방으로 치소(耻笑)를 거듭하여서 ‘초불여불발(初不如不發)’의 탄(嘆)이 있을까 한다.(매일신보 일일일인에서 옮겨 실음)
<출전 : 權相老, 「僧侶志願兵에 對하여」, '佛敎時報' 제57호, 1940년 4월 1일, 1쪽>
2) 비상시 반도불교의 임무
현재의 시국을 단순히 비상시국이라고만 하면 너무 평범하다. 즉, 초비상시국이다.
내가 서술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초비상시국을 맞이하여 반도불교도의 임무가 얼마나 중대한가를 논하는 것이다.
44) 여관. 일정한 돈을 받고 여객을 치는 집.
45) 아주 드묾
물론 전시체제하에서는 총동원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면 임무를 운운하는 그 자체가 찬론(贊論)일 수도 있으나, 정진(精進)에 정진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석양조순(夕陽朝詢), 잠시라도 멈추거나 방일(放逸)해서는 안 된다.
정신총동원 즉 국가총동원 체제하에서는 견마(犬馬)도 충절을 바치고 구합(鳩鴿)도 능력발휘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인간으로서 아니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잘못 관찰하기 쉽기 때문에 (일반의 논리에 의존하지 말고)종교인의 자발적인 관찰과 엄정한 비판을 통해 시국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녀야만 한다.
불교도는 대개 다음과 같은 관념을 지니고 있다.
“불교는 자비와 인욕(忍辱)을 교조(敎條)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인명이 걸린 전쟁은 물론 그 어떤 쟁론(爭論)도 허락하지 않는다.
불교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적자(赤子)로 보니 하물며 인류애에 대해 말해 무엇하랴.
이처럼 사해동포를 일시동인시하는 것이 신조(信條)이기 때문에 서로 살해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것은 옳지 않다.
불교는 □친에 평등해서 적일지라도 사랑하고 아비를 죽인 원수라 해도 보복하지 않는 박애와 아량을 주지(主旨)로 삼고 있다. 따라서 너와 나를 구별해 적대시하며 살육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불교는 윤회인과(輪廻因果)를 골자로 삼고 있다. 사람과 동물의 사이도 그러하다.
사람이 죽으면 양이 되고 양이 죽으면 사람이 되어 서로 보복한다. 따라서 항상 악의 원인을 제거해 악과(惡果)를 초래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타인의 악을 □경(□憼)하는 것은 도리어 나에게 악의 원인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불교도의 머리 속을 점령하고 있을 것이다.
불교도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도들도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부분 이러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며 오해이다. 악을 제거하지 않으면 선을 불러들일 수 없으며 악귀를 항복시키지 못하면성불(成佛)할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의 육신에 있어서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 여섯 가지 근원을 굳게 제어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는 것이며, 마음에 있어서도 망상망념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 외적의 유혹 혹은 외적의 입거(入據)를 경계하는 것이다. 밖으로는 몸, 안으로는 마음이 이러한 작전을 행하기 때문에 이욕(利慾), 명예, 사업을 방기(放棄)하거나 혹은 자기의 생명까지도 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악귀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성불할 수 없다, 파괴하지 않고는 건설할 수 없는 것이 종교 그 자체에 있어서도 거짓 없는 사실이다.
지금 대일본제국의 주의(主義)는 불교의 대승적 교의와 완전히 똑같다.
세계의 중생을 불토(佛土)에 들이고 대지의 국토를 적광정토(寂光淨土)의 불국(佛國)으로 만드는 것이 대승불교의 위대한 목적이다.
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증보살(悲增菩薩)과 지증보살(智增菩薩) 등이 육도만행(六度萬行)으로 역화(逆化)도하고 순화(順化)도해서 악귀의 종자를 참멸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악귀와 부처의 구별이 없는 마즉법계(魔卽法界)이며 마즉불(魔卽佛)이다.
세계열강은 우리 동양에 □시(□視)와 낭심(狼心)을 멈추지 않는 악귀일 뿐이다. 때때로 육근문두(六根門頭)의 틈을 노려
심장의 의지(意地)에 침입해 점거하려고 한다. □□로 비둔한 육체는 악귀의 감언(甘言)에 넘어가서 순종하며 자신의 진심에 등을 돌리기 때문에 그 육체를 편책(鞭策)하여 마귀와의 연을 끊고 불성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으면, 동양의 대적광토(大寂光土)는 악귀에게 유린당하고 동양의 불자(佛子)들은 악귀의 희생물로 바쳐질 것이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 아래 어떻게든 이것을 없애버릴 수밖에 없다.
역화도 해야 하지만 순화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전(聖戰)으로 그들을 □□하는 것은 역화이며 대동양을 새롭게 건설하는 것은 순화이다.
이렇게 하여 제국의 이상이 관철되는 날에는 일시동인 아래 마신마민(魔臣魔民)였던 그들도 똑같이 불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4억 명의 적자(赤子)에게 성마성불(成魔成佛)의 분기점에서 일념(一念)의 반성을 요구하는 성전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당면한 비상시국인 것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역사를 보더라도 석존(釋尊)은 음력 12월 8일 전날 밤에 마왕이 자신의 신민(臣民)을 총동원하여 위협할 때 맞서 싸웠다.
그때 석존은 모든 도력(道力)과 일체의 지(智)를 다해 마왕을 정복시키는 대법전(大法戰)을 벌였다.
지금의 성전의 형세가 꼭 이와 비슷하다. 따라서 총후의 우리는 모든 심력(心力)과 모든 생명을 바쳐서 비상시국에 대처해야만 한다. 실로 대의(大義)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야만 하는 시국이다.
차분히 공부한 것을 소란스러운 시기에 사용하고, 평상시에 수련한 것을 급한 시기에 사용하려는 것이다.
조선불교도는 정중(靜中)의 공부도 오랫동안 했고, 평상시에 수련도 쌓아왔다.
지혜의 검도 있으며 정진(精進)의 투구도 있고 인욕의 갑옷도□색(□索) 손도 있다. 다만 용맹력과 분투심(奮鬪心)만이
아직 부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임진역(壬辰役)에 서산대사는 선조대왕이 시국에 진력하라고 하자,
“-”
라고 대답하고 팔도에 격문을 띄워 승군(僧軍)을 일으켜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이것이 과거 우리조선불교의 특색이며 현대조선불교도의 유일한 모범이니 우리는 이러한 정신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불교는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그 본령(本領)이다. 비심(悲心)으로 중생의 고통을 없애고 자심(慈心)으로 중생에게 기쁨을 안겨준다.
그리고 해탈하게 도와준다. 불교는 안락한 중생보다도 위험과 어려움에 빠진 중생을 제도(濟度)하려하기 때문에 태평한 시대보다도 험난한 시대를 광제(匡濟)46)하려고 한다. 그리고 석존의 근본취지도 항상, ‘하제(下濟)에 세 가지 고난이’ 있다며 지옥, 기아, 축생(畜生)의 세계에 있는 중생을 가엾게 여겨 구제하고, 물, 불, 바람의 세 가지 재난을 극복해 기근, 질병, 도병(刀兵)의 삼겁(三劫)을 초탈(超脫)하여 국토와 시대를 모두 극락화(極樂化)하는 데 있으니, 4억의 민중이 생지옥에 떨어진지 오래되어 도병겁(刀兵劫)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정말로 시급하다.
자비의 본령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는 지옥문전의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극락계의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되어야만
한다.
각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 금수(焚修)47)하며 삼보(三寶)의 가호를 바랄 것인지 양 어깨에 병기를 메고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것인지는 각자의 재능에 달려있다 해도, 그 정신만은 총동원사상에 일치시켜 일반대중의 지도자나 교화자가 되어서 각자의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급무(急務)이다.
이번 제2회 지원병모집에는 청년승려도 다수 응모하였다. 안벽관심(按壁觀心)하며 잠거수도(潛居修道)하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의 기백이 있고 불교의
46) 악을 바로잡아 선으로 인도함, 즉 잘못된 일을 바르게 고쳐 구제함.
47) 부처 앞에 향을 피우고 도를 닦음.
정신을 지니고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부처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회피하지 않았고 보살도 금강분노(金剛忿怒)의 모습으로 화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비의 실현이며 대승적견해이다.
‘위급하고 어려운 가운데에서 모든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해탈한다.’ 이것이 관세음의 신통(神通)이며, ‘깨달음으로 세상을 바르게 한다’는 심지관경(心地觀經)의 법문이다.
모든 신명을 중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보살의 큰 덕행이기에 법문을 배워 보살행을 닦아 성불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불교도가 이러한 비상시국을 맞아 본령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불자도 사문(沙門)도 아니다.
시국을 타개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화평을 순치(馴致)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활동하지 않고 독선을 하는 것을 불교의 수치로 생각하고 심신을 모아 전력을 다해 적성(赤誠)48) 을 바치자.
종군도 좋고 행첩(行諜)도 좋다.
청허(淸虛)같은 통솔자가 되고 사막(泗漠)같은 행자(行者)가 되어라.
이것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며, 민중의 사표(師表)가 되는 일이고, 불타의 혜명(慧命)을 잇는 일이다.
어쨌든 총후의 종교인, 교화자도 최대의 임무와 건전한 정신으로 시국에 대해 몸소 자각하여 먼저 자신을 제도하고 나아가 사회의 정신지도와 사상조절 공작(工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종교인에게 주어진 교화자로서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비상시에 종교인의 면목을 발휘하지 않고 교화자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런 종교인은 이 국토에서 없어져도 좋으며, 그러한 교화자는 이 사회에 없어도 상관없다.
조선불교도들이여! 이 시국이 비상시임을 알고 이 시국의 광구책(匡救策)은 오로지 불교도의 손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출전 : 權相老, 「非常時半島佛敎徒の任務」, '總動員' 2권 6호,1940년 6월 7일, 18~20쪽>
3) 대동아전쟁과 대승불교
도(道)가 높으면 마군(魔軍)의 저희(沮戱)49)가 생기고 벼슬이 높으면 소인의 시기가 깊어 간다더니 제국의 대의(大義)가 일관불변(一貫不變)하여 대동아의 공영권이 완수에 가까워 가니까 정의가 무엇인지 대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무저(無底)한 학욕(壑慾)50)만을 품고 세계열국을 향하여 흡혈귀 노릇을 하는 각 민족의 거마(巨魔)인 미영(米英)은 드디어 일본 제국을 향하여 배전적(排戰的) 악행위를 감행하여 선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미영의 동양에 대한 야욕은 품어온 지가 오래일 뿐만 아니라 그 악랄한 수단을 마음대로 부려서 국토를 집어 삼키고 인민을 노예로 삼은 데가 한두 곳이 아닌 동시에 이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 일인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은 즉, 새삼스럽게 말한 필요까지도 없지
48)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
49) 귀찮게 굴어서 방해함.
50) 학(壑) : 골, 도랑, 개천, 구렁
마는 침침한 눈과 음험한 심장은 동양 전부를 몰탄(沒呑)51)하려는 획책을 가지고 혹은 종교로 혹은 물질로 혹은 채권으로 혹은 무력으로 심지어 아편에까지 못할 짓이 없게 해 온 것은 오로지 동양에 있어서 가장 역사가 오래고 지역이 넓고 민중이 많이 살고 물산이 많이 나는 중국(支那) 그것에 침을 흘리고 꿈을 꾸어왔던 것인데, 명완무지(冥頑無知)52)한 중국은 그들의 내흉(內凶)한 것을 알지 못할 뿐만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감언과 이간에 유혹되어서 그들의 세력에 등을 대이고 그들은 비식(鼻息)53) 하에 의존하려 하여 동문동족(同文同族)의 사이에 제휴와 모의는 새로이 도리어 불만과 반감을 품고 항모(抗侮)를 감행하게 됨으로 우리 제국에서는 동양의 대세를 보아 우이(牛耳)54)를 잡을 자격은 오직 제국이 있을 뿐이오, 제국이 만일 일보일태(一步一怠)이라도 소홀히 하는 때에는 중국 그것이 과분(瓜分)55)을 당하게 될 터인즉 그렇게 된다면 비특순치보차(非特脣齒輔車)에만 그칠 것이 아니오.
대동양 전부를들어 저들의 노예를 만들게 됨으로 제국은 어떠한 어려움과 어떠한 해로움이 있을지라도 중국을 맹호
(猛虎), 독사(毒蛇)의 입에서 구출하여 가지고 공영권의 안전지대에 두지 않고는 되지 아니할지라도 곧 중국의 일부만이 그 안정된 바를 얻지 못할지라도 ‘약기추면납제구중(若己推面納諸溝中)’하는 ‘자비민련(慈悲愍憐)’한 성념과 성의를 다하여 저를 유액(誘掖)56)하며 응징하여 성업이 수성(垂成)하게 된 즉 인도(人道)에 배치되고 마심(魔心)이 탱중(撑中)57)한 저들은 자기를 욕망하던 마업(魔業)에 동요(動搖)있을까 대공포를 일으키어 일변(一邊)으로 원장(援蔣)하기에 부단의 노력을 하며 일변으로는 제국에 무리한 제시가 있었다.
광명(光明)한 제국의 정의 하에는 당연히 ‘왕손만각지(王孫滿却之)’를 하겠지마는 ‘이덕불차력(以德不此力)’으로 하려는 관대한 포용과 순순(諄諄)한 응접으로 저들의 양심자회(良心自悔)가 있기를 얻기 위하여 8개월간이나 두고두고 제안을 간단히 수정도 하며 대사(大使)를 중첩으로 파견하여 회담을 거듭하고 각서(覺書)를 수교(手交)하였으나 완만미명(頑慢迷冥)한 저들은 회감(回感)이 있음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제국의 은인(隱忍)도 더할 수가 없고 회유도 더할 길이 없어서 결국 납월(臘月)58) 8일로써 혁노(赫怒)를 발하여 간과(干戈)로 상견하게 되었다. 성업(聖業)의 완수도 여기에 달렸고 세계의 평화도 여기 달렸다.
오직 백절불굴(百折不屈), 만난불퇴(萬難不退)로써 초지(初志)를 일관(一貫)하는 외에는 아무 것도없다.
마치 석가모니께서 진세계중생(盡世界衆生)을 제도(濟度)하여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안락의 피안(彼岸)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최초의 발심(發心)으로부터 역겁(歷劫)의 수행을 쌓아서 강생(降生)59)과
51) 몰끽. 남기지 않고 다 먹음.
52) 어리석고 완고하며 무식함.
53) 콧숨. 기세.
54) 쇠귀. 맹주(盟主) 또는 우두머리를 뜻함.
55) 오이를 나누듯 토지를 신하에게 나누어 줌.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의 영토분할을 일컫는다.
56) (남을)이끌어 도와 줌.
57) (어떤 감정이나 심리 상태, 곧 화나 욕심이) 가슴 속에 가뜩 차 있음.
58) 음력 섣달(12월)을 달리 이르는 말.
59) 신이 인간으로 태어남.
내지 고행을 닦아 정각 에 이르게 (正覺) 됨으로 마왕 파순(波旬)이 공포와 시기를 이기지 못하여 마신(魔臣), 마녀(魔女), 마민(魔民)을 총동원 하여가지고 법보제장중(法菩提場中)을 향하여 협박과 공격을 행하는 것과 동일한 상태에 들었으니, 석존으로 하여금 견인불발(堅忍不拔)하는 정력(定力)과 직하처파(直下覷破)하는 혜안이 없이 파순(波旬)에게 동요한바 되고 좌절한바 되었던들 무상(無上)의 법왕(法王)이 되어서 3천세계를 불국토(佛國土)로 정화하고 미래(未來) 무량겁(無量劫)에 혜명(慧命)60)을 전하여 법계(法界) 중생을 성역의 낙방(樂邦)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완명(頑冥)한 일개 미국(米)이 포외심(怖畏心)을 일으키어서 감히 광명혁혁(光明赫赫)한 제국의 대주의를 향하여 발지(跋智)한 생각을 동(動)함에 영국(英國)도 거기에 협조(協助), 오스트레일리아(濠洲),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蘭印), 쿠바, 호리(扈利), 캐나다(加奈陀)등 모든 소국들이 거기에 추수(追隨)하게 된 것은 마왕의 호령에 따라 마녀, 마민들의 준동(蠢動)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물론 대체(大體)를 위하고 동양의 공영을 위하여 질서의 신건(新建)을 위하여 일억일심으로 최후의일각까지 불굴불요(不屈不撓) 결사의 매진이 있을 뿐이지마는, 특히 우리 불교도는 어떠한 체제 어떠한 사상으로 금일의 역할을 당해야 할 것인가? 불교의 최고 목표는 단악수선(斷惡修善) 이고득락(離苦得樂) 전미개오(轉迷開悟)61)에 있다. 나도 그렇게 하고 남도 그러하여 일체 중생이 다 같이 각지(覺地)에 이르는 것이 대승불교인 동시에 섭수(攝收)할 자는 섭수하고 절복(折伏)할 자는 절복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저들은 지금 악을 짓고 있으니 선(善)하게 해야 하고 고(苦)를 취하고 있으니 낙(樂)을 주어야하고 혼돈(迷)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시각이 바쁘게 각로(覺路)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금일에 급히 취할 바가 아닌가.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육도(六度)를 가지고 자리(自利)도 하며 이타(利他)도 한다.
육도의 각자는 일반이 잘 알고 있는 터인즉 구태여 열거할 필요도 없지마는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인욕(忍辱)과 정진(精進)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와의 여섯 가지를 이르는 것이니 이 여섯 가지를 단지 자기 한 사람의 작복(作福)이나 수행이나 수행을 위하여 이용한다면 이것은 협의적(狹義的)인 개인주의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만일 광의적으로 해석하건대 이때야말로 육도를 행할 날이라고 한다.
보시(布施)는 간탐(慳貪)을 버리고 재력을 바치게 하며, 지계는 염욕(染欲)이 없는 것이니 성업(聖業) 조성의 청정한 욕망을 품게 하며 견인불발의 인욕으로 모든 고난을 인수(忍受)하며 용진매왕(勇進邁往)하는 정진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서(盟誓)하고 유진무퇴(有進無退)하며 질서가 정연(整然)하여 산란(散亂)이 없는 선정(禪定)으로 침착 건실한 저력을 발휘하며 필승의 신념이 명확한 지혜로 진향(進向)할 전로(前路)에 미혹이 없는 것이 불교도 된 우리의 자수(自修)할 바이며, 또한 대중에 권할 바이다.
육도를 행함에는 근행(勤行)도 있고 가행(加行)도 있다. 물론 지나사변(支那事變)62)이 발발한 이래에 벌써 5개 성상(星霜)63)을 출력(出力)도 해왔으며 인고도 해 왔으며 용진(勇進)도 하였으며 단결도 되었지마는 과거의 5개년은 근행에 지내지 못하였고 지금부터는 가행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시기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보다 배 이상으로 모든 것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과거의 모든 것이
60) 지혜의 생명. 불법의 명맥을 뜻함.
61) 어지러운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에 이름.
62) 중일전쟁을 뜻함.
63) 별은 일년에 한 바퀴를 돌고 서리는 매해 추우면 내린다는 뜻으로, 한 해 동안의 세월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힘을 다하였다면 지금부터는 실력의 미치지 못하는 데까지 힘을 내어야 하고 견딜 수 없는 데까지 견뎌야 할 것이다.
유생(有生)이면 필유사(必有死)다. 이 세상에는 아니 죽는 수가 없다. 언제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다.
생사(生死)를 무서워하는 것은 범인(凡人)이오, 생사를 평등시하는 것은 달인(達人)이오, 생사를 초월하는 것은 불교이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지마는 즉시생(卽是生)이 있은 이상에는 이 생(生)을 정의에 바쳐야 하고 즉시사(卽是死)가 있을 바에는 이 사(死)를 정의에서 얻어야할 것이나 정의의 앞에는 죽음도 없다. 강적도 없다.
1억이 모두 다 각각 생로(生路)만을 구한다면 생(生)을 얻기 어렵지마는 그와 반대로 1억이 모두 심력(心力)을 모아서 사지(死地)를 찾는다면 생(生)이 올 것이다. 각각 찾아서 얻는 생에는 자기 한 사람의 구제도 넉넉지 못하지마는 심력을 합하여 얻는 생에서는 전 민중과 전 국가가 한가지 활로(活路)를 얻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중(人衆)을 모두 그 품안에서 살릴 수 있고 영원미래(永遠未來)의 모든 인류를 그 터에서 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십도(十度)를 닦는 것이오, 이것이 이른바 대승적(大乘的) 불(佛)이다. 시간(時艱) 극복이 여기 있고 전승기원이 여기 있고 성업완성이 여기 있다. 자비한 불교도여, 이것으로 사은(四恩)을갚고 중생을 인도하라. 반근착절(盤根錯節)64)이 아니면 이기(利器)를 구할 필요 없고 험위급난(險危急難)이 아니면 성도(聖道)를 신(信)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솔선(率先)하여 육도로써 자도(自度)하는 동시에 타(他)를 도(度)하여 가까이는 이 시국을 이 동양을 어서 빨리 건지고 멀리는 전 세계를 먼 미래를 건지어 주자.
한 음험흉완(陰險兇頑)한 마왕(米)65)이여. 간교 노회한 마녀(英)66)이여. 명완우준(冥頑愚蠢)한 마장(魔將=蔣)67)이여. 광미(狂迷) 추종하는 마(魔: 民濠·蘭·智등)이여. 광명한 태양의 아래에는 형영(形影)을 오래 머물 수 없느니라. 어서 반성하여 대 자비(慈悲), 대 능위(稜威)의 아래에 굴복하라.
우리의 대승적(大乘的) 불교 견지(見地)에서는 마즉법계(魔卽法界)이다.
마가 따로 없는 동시에 불교도 따로 없다.
마도 일념회광(一念回光)하면 곧 불(佛)이다. 모든 것을 복구(復舊)하여 평화한 마음과 얼굴로 제국을 대하는 동시(同時)이면 그 순간에 곧 워싱톤(華盛頓)·런던(倫敦)뿐이 아니라 전 세계가 청정(淸淨)·광명(光明)·환희(歡喜)·원만(圓滿)한 불국토(佛國土)로 변할 것이다.
우리는 불타(佛陀)의 대성전(大聖前)에 합장(合掌)을 드리고 이것을 기원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불광(佛光)이 조림(照臨)하는 곳에 마분(魔氛)이 소멸하소서.
<출전 : 權相老, 「大東亞戰爭과 大乘佛敎」, '佛敎新' 제32집, 1942년 1월 1일, 6~9쪽>
64)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라는 뜻. 처리하기 매우 어려운 사건을 일컬음.
65) 미국을 뜻함.
66) 영국을 뜻함.
67) 장개석(蔣介石)을 뜻함.
4) '임전의 조선불교' 발췌
[4−1]
성불(成佛)은 전승(戰勝)이다
석존(釋尊)의 성도(成道)하신 팔상중(八相中)에 나무아래 항마상(降魔相)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곧 성도하시기 직전 납월(臘月)68) 7일의 밤에 보제수(菩堤樹) 아래 금강좌상(金剛座上)에서 최후의 승리를 얻은 것이 곧 항마(降魔)라는 것이다. 석존께서 종인지과(從因至果)69)히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70)을 닦으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곧 마(魔)로부터 장기전을 하신 것이다.
세밀하게 말한다면 팔만 사천 마군(魔軍)이라고 하지마는 대부분으로 분류 한다면 곧 10조마(租魔)이다.
마왕(魔王)·마신(魔臣)·마졸(魔卒)·마민(魔民)·마여(魔女)·마종(魔種)으로 편성한 10부대의 마력,곧 10대전구에 열진(列陳)하여 있는 대마 적진을 향하여 오직 견고한 신앙과 서원(誓願)만 가지고 적신단력(赤身單力) 즉 육탄(肉彈)적으로 용감하시게 싸움을 시작하여서 한량없는 장기전을 하여 오셨다.
오온마(五蘊魔)·번뇌마(煩惱魔)·업마(業魔)·심마(心魔)·사마(死魔)·천마(天魔)·선근마(善根魔)·삼매마(三昧魔)·선지식마(善知識魔), 이러한 10대부대의 마진을 향하여 발심(發心)이라는 거탄(巨彈)을 던지어 선전포고를 내린 후로는 장원(長遠)한 기간에 불면불휴(不眠不休) 부단불식(不斷不息), 시시념념 재재처처(時時念念在在處處)에 일미□허(一微□許)의 지면(地面)에나 일찰나(一刹那)의 시분(時分)이라도 악전고투하시지 아니한 바가 없었다.
안신(安身:色)과 안심(安心: 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이 혹(惑)을 일으키시고 업(業)을 짓게 하여서 정도(正道)에 장애(障礙)되는 것 도 분쇄(分碎)하여 버리고 대번뇌(大煩惱: 癡·放逸·懈怠·不信·昏沈·掉擧) 소번뇌(小煩惱:忿·覆·慳·嫉·惱·害·恨·諂·誑·憍)도 모두 제어하고 살(殺)·도(盜)·요(媱)·망(妄)의 업해(業海)에도 제패권(制覇權)을 가지시고 생사의 애하(愛河)에도 적전도하(敵前渡河)의 성공을 하시고 이번에는 마의 수뇌부인 천마(天魔:大自在天)로부터 최고전선에 서게 되었다.
앞으로 성도하시려는 순간에 대광명이 나타나며 찬란숭엄(燦爛崇嚴)하던 마왕의 궁전은 석존의 광명에 은폐(隱蔽)되어서 아주 무색하게 되어버리고 대지가 진동하여 마왕의 궁전까지도 흔들흔들 동요하여서 방장(方將)에 붕괴할 것 같이 되었다.
마왕은 대공포를 내어서 자기의 부하를 총동원시키고 무비(武備)를 모두 기우려 뇌전우박(雷電雨雹)이며 도창검극(刀鎗劒戟)이 공중을 뒤덮고 암석(岩石)·사력(沙礫)·열철(熱鐵)·연화(烟火)가 운무(雲霧)같이 쌓였으나 석존께서는 시종일관하신 대선정(大禪定)에서 안연부동(晏然不動)하시는 위압하(威壓下)에 마왕은 드디어 백기를 세우고 항복을 바치었으니 이것이 석존께서 장기전을 하여 오시던 최후의 승리였고 개선(凱旋)이셨다.
이에 대한 수훈(殊勳)이야말로 이른바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신 성불(成佛)이었고, 이에 대한 업적이 삼계대사사생자부만법(三界大師四生慈父萬法)의 왕이시다.
<출전 : 權相老, '臨戰의 朝鮮佛敎', 卍商會, 1943년, 7~9쪽>
68) 음력 섣달
69) 불도의 수행에 따라 인위(因位)에서 과위(果位)에 오름.
70) 무량겁으로 수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수 또는 시간
[4−2]
계(戒)는 전투훈(戰鬪訓)이다
계(戒)를 잘못 해석하는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범계(犯戒)가 될까하여 십지(十指)를 부동(不動)하고 긍긍업업(兢兢業業)하는 소극적 방면으로 들어가지마는 계는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
계는 정순(正順)의 의(義)가 있고 청정(淸淨)의 의가 있다. 아무리 계의 조문(條文)에 촉범(觸犯)됨이 있더라도 그 목적과 동기가 정순청정(正順淸淨)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지계(持戒)71)이고 아무리 불살생(不殺生)불사음(不邪婬)을 역행(力行)한다고 할지라도 그 목적과 동기가 정순청정하지 못하면, 지계(持戒)로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는십악업(十惡業)72)도유과무과(有果無果)를말씀하였으되,“다섯 가지 인연을 말미암아 비록 살생(殺生)을 하였더라도 살생의 업과 살생의 죄가 없을 수가 있으니, 이른바 행로(行路)할 때에 무심(無心)으로 개미(蝓蟻)등 명(命)을 살상한 것은 업죄(業罪)가 없고 철물(鐵物)같은 무거운 것을 운반할 때에 무심으로 살생한 것은 비록 물명(物命)을 끊었으나 살생의 업죄가 없고 의사가 병을 다스릴 때에 이익을 위하여 병자에게 약을 주었건만 그 약으로 인하여 단명이 될지라도 약사는 악심이 없었기 때문에 살생의 업죄가 없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때리지만은 때림으로 인하여 명종(命終)이 될지라도 살생의 업죄가 없고 불을 피울(燃) 때에 미충(微蟲)을 살생할 마음이 없었지만 미충이 화중(火中)에 들어가 죽음으로 살생의 업죄가 없다.”
하였으니 그 동기가 무심에 있어서도 오히려 살생의 업죄가 성립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목적이 일체의 마(魔)를 구축 제거하고 ‘진대지유정(盡大地有情)’들과 한 가지 낙토(樂土)에 살자는 것이다.
범강경(梵綱經)에 「효명위계(孝名爲戒)」라 하였으니 효(孝)는 백행(百行)의 원(源)인즉 효가 불계인 동시에 충(忠)도 불계이며, 신(信)도 불계이며 용(勇)도 불계이며 경(敬)도 불계이며 화(和)도 불계이며 섭수(攝受)도 불계이며 절복(折伏)도 불계이며 모든 경국(經國)·이민(理民)·어적(禦敵)·치화(致和)가 선법(善法)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명교결숭대사(明敎契嵩大師)의 효론(孝論) 「명효장(明孝章)」에,“孝名爲戒니 盖以孝로 爲戒之短也라 子與戒以欲忘孝면 非戒也라 夫孝也者는 大戒之所先也오 戒也者는 無善之所生也니 爲善微戒면 善何生耶며 爲戒微孝면 戒何自耶라.”하였으니 중선(衆善)을 구하는 데는 일살다생(一殺多生)도 있고 역취순수(逆取順守)도 있다.
문중자(文中子)의 말에,“망국(亡國)은 전병(戰兵)하고 백국(伯國)은 전지(戰智)하고 왕국은 전인(戰仁)하고 제국은 전덕(戰德)하고 황국(皇國)은 전무위(戰無爲)라.”
함과 같이 대일본제국에서는 본래에 무위의 전을 하려고 하였다.
노구교사변(盧溝橋事變)이 일어난 후에도 1월 유여(有餘)를 은인(隱忍)하여 무사의 해결을 기다렸으나 피완(彼頑)이 무지하여 항모(抗侮)로써 역린(逆鱗)을 자영(自嬰)함에 부득이 응징을 행하나 항상 덕과 인을 주로 하고 일찍이 지전(智戰)에도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이번 미영(米英)에 대하여서는 더욱이 무위를 희망하여 8개월 동안이나 불가
71) 불교에서 계율을 지키는 것을 이르는 말.
72) 불교에서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에 해당되는 열 가지 죄악. 10불선업(十不善業)이라고도 한다.
곧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망어(妄語)·기어(綺語)·악구(惡口)·양설(兩舌)·탐욕(貪慾)·진에(瞋恚)·사견(邪見)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인 (不可忍)할 것을 능인(能忍)하고 대사를 거듭 보내어 교섭이 비지(備至) 하였지만 노욕(怒慾)이 무저(無底)한 저들은 제국의 성의에도 감화되지 아니하므로 부득이하여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인즉 저들이 제국에 자절(自絶)하여 주륙(誅戮)을 자속(自速)한 것이니 제국이 어찌 무위와 인덕을 버리고 지전(智戰이니 병전(兵戰)을 한 것이겠는가. 열화(熱火)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나방은 금지할 도리가 없고 암벽에 스스로 부딪히는 짐승은 구제할 방편이 없는 것이다.
금일에 이르러서는 임의 무위의 전이 되지 못하고 덕과 인으로써 임전(臨戰)한다 할지라도 전선에 임한 이상에는 불용명자(不用命者)를 주륙치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전진에서 용기가 없이 겁나(怯懦)하거나 후퇴하는 자도 역시 대계를 파하는 자이며 효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예기(禮記)의 한 대문(大文)을 인용하여 이것을 좌증(左證)하겠다.
‘左處不莊이 非孝也오. 涖官不敬이 非孝也오. 朋友不信이 非孝也오. 戰陣無勇이 非孝也라.’하였으니 다만‘昏定晨省하며 問衣燠寒하며 問何食飮하며 出必告하며 返必面하며 不遠遊하며 遊必有方하면’ 하는 등등의협의적(狹義的)으로해석하는자이나또는□飛□動이라도살해치않고일문(一文)의가치라도더불어 능히 취하지 말라는 소승적(小乘的)으로 지행(持行)하는 계(戒)로는 금일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4−3]
임전(臨戰)의 역할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에 ‘漢敵이 不兩立이라’73)는 말과 같이 번뇌와 보제(菩提)가 양립되지 못하고 생사와 열반(涅槃)이 양립되지 못하고 망(妄)과 진이 양립되지 못하고 마와 불이 양립되지 못하고 제국과 적이 양립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번뇌가 얼마나 많다 할지라도 보제심 하나로서 그것을 익혀야하고 생사가 아무리 오래일지라도 열반의 일 찰나(刹那)로서 그것을 익혀야 하고 망(妄)이 아무리 상속불단(相續不斷)할지라도 일단 진심이 그것을 익혀야 하고 마(魔)가 아무리 봉기교란(蜂起攪亂)할지라도 불타(佛陀) 홀로 그것을 이겨야 하고 적이 아무리 전구(全球)에 편만(遍滿)할지라도 제국 단독으로 그것을 이겨야 한다.
마(魔)를 항복받지 못하면 성불(成佛)의 대이상이 성취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을 모두 항복받지 못하면 제국의 대 주의(主義)는 완성되지 못한다.
도력(道力)이 높을수록 마(魔)의 무리는 많아지고 국위(國威)가 강할수록 적의 무리는 늘어간다.
제국의 대동아주의가 날로 발전되고 실현됨에 따라 자기들의 복마전(伏魔戰)이 흔들거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겁(怯)을 내여서 대도(大道)에 방해하려는 파순(波旬)74)의 미영(米英)을 서로 서로 결탁하여 가지고 광명정대한 욱일기(旭日旗)75) 아래를 향하여 감히 교란책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석존의 성도
73) 촉한은 한나라의 적인 위나라와 양립할 수 없다는 뜻.
74) 불교에서 천마(天魔), 악마를 뜻함.
75)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태양 문양주위로 퍼져나가는 햇살을 붉은 색으로 그린 깃발.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
국주의 군대 깃발로 사용되었고, 현재 자위대 군기로 사용되고 있다.
(成道)하시던 12월 8일 새벽의 직전 즉 세존(世尊)이 항마하시던 시분(時分)에 제국은 드디어 마의 세계를 향하여 제1성의 뇌음(雷音)을 발하여 마력은 날로 압축이 되고 마담은 날로 나약해져서 그들의 항복의 깃발을 세우기는 다만 시간문제인즉 전첩(戰捷)의 축하에 사용할 노포(露布)와 사문(赦文)을 미리 지어 두어야겠다.
문자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지마는 홍명집(弘明集) 중에 도안법사(道安法師), 일명 지정법사(智靜法師)의 저술인 「격마문(檄魔文)」과 「파마노포(破魔露布)」·「평마사문(平魔赦文)」·「평심노포문(平心露布文)」에 제대보살(諸大菩薩)로서 역할에 배당(配當)한 것이 있으므로 이것을 열기(列記)하여 여러분의일소(一笑)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使持節前鋒大將軍閻浮都督歸義侯薩陀波崙……領衆四十萬揚□首路
使持節威遠大將軍四天都督忉利公導師□無竭……領衆百萬億虎眄須弼
使持節征魔大將軍六天都督兜率王解脫月……領衆五百萬億鳴變天□
使持節通微大將軍七天都督四禪王金剛藏……領衆七百萬億雲廻天門
使持節鎭城大將軍九天都督八住大王□魔詰……領衆九百萬億□馬靈津
使持節□後大將軍十三天都督小千諸軍事十住大王大文殊師利……領衆塵沙翺翔斯土
使持節匡敎大將軍十九天都督□魔諸軍事群邪校尉中千王觀世音……領衆不思風呤虎嘯
使持節無化大將軍三界大都督補處王大慈氏……領衆八百萬億嚴駕特命
(이상은 격마문에서)
廣緣將軍流蕩校尉都督六根諸軍事除惠建善王臣心
賑惠將軍善散子都督廣諸軍事監軍臣施
繕性將軍剋欲界都督攝志諸軍事司馬臣戒
平忿將軍蕩恚侯都督洪裕諸軍事司空臣忍
勇猛將軍勤習伯都督六度諸軍事行臺臣進
安靜將軍志忿都尉都督觀累諸軍事攝散侯臣禪
博通將軍周物大夫都督調達諸軍事監□王臣智
(이상은 破魔露布에서)
中書令補處王臣逸多
侍中臣文殊師利
侍中臣薩陀波崙
黃門臣獅子吼
黃門臣舍利佛
黃門臣須菩提
使持節儀同三司領十二住大將軍唯識道行軍元首上柱國晋國公臣般若
使持節□一大將軍領四念處諸軍事率道品縣開國公臣求知
使持節寧境大將軍領八正道諸軍事通眞縣開國公臣實知
使持節兜率大將軍婆婆招慰大使上柱國翅頭末開國公臣阿逸多
使持節平等大將軍兼行軍長史上柱國淸凉縣開國公臣正念
使持節遍滿大將軍兼行軍司馬上柱國常樂縣開國公臣眞如
(이상은 平心露布文에서)
이와 같은 역할을 정돈하여 가지고,
擊法□二出三空하고 建慈幢以臨八難하여 講武大千하고 曜威萬城하니 神戈가 暫指則魔徒가 失膽하고 慧劍을 一揮則群邪가 俱□라
(破魔露布文의 一節)
集戈盤□□度之津하고 命□車於一乘之轍하여……氛祲蕩이 若和氣之泮春冰하고 醜穢戱夷를 似凉風之卷秋□
(平心露布文의 一節)
上籍三味之士하고 下憑六度之師하여 控淸方夏하고 大戡荒服하니 故로 六軍이 雷動則三有가 雲消하고 慈施가 電馳則四凶이 面縳이라 降附가 若□하고 生擒이 萬計라
(平魔赦文의 一節)
이가 조금도 틀림없이 황군의 소도(所到)에 만국이 전율하고 욱기(旭旗)가 일휘(一揮)에 팔굉(八紘)이 명랑(明朗)하여 집과 동일한 경계이라 아니 할 수 없은즉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우리 제국에서는 불교 그대로 정치화하고 정치 그대로 불교화하여 정치와 불교가 비일비이(非一非異)·불즉불리(不卽不離)한 관계인 까닭이라고 나는 말하기를 자저(趑趄)치 않는다.
<출전 : 權相老, '臨戰의 朝鮮佛敎', 卍商會, 1943년, 70~75쪽>
7. 김삼도(金三道, 宇英生)
1) 총후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하여
일억일심(一億一心) 백억저축(百億貯蓄) 이 표어는 곧 총친화(總親和) 총노력(總勞力)의 한 부면적(部面的) 제창이거니와 우리가 신앙보국 혹은 전도보국을 특서(特書)함도 이 또한 그러한 총친화, 총노력의 일면영(一面影)을 창도(唱道)함이다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총친화, 총노력의 근본정신을체득하고 또 그에 입각하여 현하 동서의 풍운을 일고 다시 세계의 정세를 전망하고자 함에 정금(整襟)76)하며 다시 생각할 바가 한 둘이 아닌 것이니, 첫째 총후(銃後)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시간(時艱)77) 극복의 태도라든지 다음 우리의 명제(命題)인 견인지구(堅引持久)의 각오라든지 또 그리고 보국정신의 인식이라든지 이상과 같이 몇몇을 들어 말한다면 먼저 그 태도부터 전일(全一)78)하다고 해서 온당하다고해서곧그의각오또인식여하를추단(推斷)하지못할것이오, 결정못할것으로믿어진다.
제 아무리 태도만을 표현만을 아름답게 장식한들 참다운 각오에서 우러나오지 못한 진정한 인식에서 형성되지 못한, 말하자면 태도로서의 태도, 태도만을 위한 태도이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태도는 각오 여하에서 인식 여부에서 우러나와서 결정되어야만 할 것은 여기에 우언(愚言)할 바 아니다.
오늘날 신문으로 라디오로 우리가 보고 읽고 들어서 그 위 참작할 수 있는 비근(卑近)한 한 예를 들어 말한다면 북구(北歐)의 전화(戰火)가 의외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폭발하였으나 동(同) 반도는 이미 구주전(歐洲戰)의 천왕산(天王山)이 되었거니와 전국(戰局)은 혹은 다시 새로운 무대에 발전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전 세계에 자못 이상한 흥분과 긴장을 소리쳐 부르고 있는 금차(今次)의 북구(北歐)전쟁의 폭발은 이를테면 나치스의 전통적 전법의 태도이오, 표현이라 할 것이다. 물론 금차의 전격전(電擊戰)으로서의 독일(獨乙)측의 전과(戰果)는 문자 그대로 통쾌한 수확이었고 동시에 그 반면 영(英)·불(佛)측 특히 영국측에 있어서는 실로 치명적인 일대 통봉(痛棒)79)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우리가 감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히틀러 총독의 참다운 각오 또 그 진정한 인식이다. 그러나 혹자는 말하리라.
이와 같은 인례(引例)는 첫째 총후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하여 그 실증성이 너무 현격함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여실히 이해되지 않는다고, 그러나 이 실례를 이해하여야 한다. 아니 적정하게 이해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총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시간극복(時艱克服)의 태도가 적어도 구주정세를 호흡하여야, 소화하여야 비로소 비상한 큰 용력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도무지 필자의 독견(獨見)일까! 필자 스스로의 억측일 것인가!
비판보다 신념에서이므로 시비는 막론할 터이다.
그래서 그러면 유럽 정세를 도의(道義) 황국 국민인 우리들이 호흡 또 소화함에는 누구보다 먼저 히틀러 총독을 알아야 하고 어느 국가보다 앞서서 독일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두 친목하고 모두 협화(協和)함은 국가사회의 원리이며 도의 황국의 시사(示唆)80)이다.
흥아의 성업수성(聖業遂成), 또 황도의 정신선양을 나아가 팔굉일우의 대이상실현이라 한다면 총친화, 총노력의시사는 우리 국민정신의 실제(實際)요, 실천을 위한 목표이다.
이에 총친화의 근본 면목을 고찰할 때 무엇보다 총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시간극복의 태도, 견인지구의 각오, 보국정신의 인식 등등 첫째 태도보다 각오 더욱 각오 보다 인식을 다시 새롭게 하여야 할 것은 다시 재언할 것이 없거니와 그의
일면영(一面影)을 신앙보국 혹은 전도보국(傳道報國)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오. 그의 일치된 근본정신
76) 옷깃을 여미어 모양을 바로잡음.
77) 그때의 어려움, 또는 시국의 어려움.
78) 완전한 것. 또는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
79) 불교에서 좌선할 때 마음의 안정을 잡지 못하는 사람을 징벌하는 데 쓰는 방망이.
80) 어떤 것을 미리 간접적으로 표현해 줌. 귀띔, 일러 줌.
에서 실제로 실천을 위한 목표로 비로소 그와 같은 실성(實性)을 파악할 수 있는 터이다.
<출전 : 宇英生,81) 「銃後우리들의 日常生活에 就하여」, '佛敎新' 제23집, 1940년 5월, 21~22쪽>
8. 이종욱(李鍾郁)
1) 조선 불교도의 새로운 각오
우리 조선 불교계의 현상을 볼 것 같으면 사찰 수로 1,500개가 있고 승니(僧尼)수로 7천여 명이 있고 신도 수로 2만 이상이 있고 재원(財源)을 말하더라도 연 수입 150만 원을 계상(計上)할만한 대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사람이 없어서 그럽니까.
재정이 없어서 그럽니까. 모두 아니요, 오직 통제기관(統制機關)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조선불교의 교계(敎界)체제를 볼 것 같으면 퍽 유감스러운 일이지만은 그 조직내각이 마치 형제만 있고 부모가 없는 거와 같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31본산(本山)이 대등하게 병렬되어 있을 뿐이오, 상위에 통제하는 아무 기관이 없으니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고로 그 통제기관이 없기 때문에 조선불교(朝鮮佛敎) 종정(宗政) 운용상 또는 불교 포교발전책에 대하여 장애가 적지 않고 고 폐단이 첩출(疊出)82)합니다. 그러나 현 제도로는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방어할 도리가 없는고로 하루 바삐 총본산(總本山)이 합법적으로 실현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재작년부터 총본산 대웅전의 건물을 짓고 작년도에는 기어이 총본산을 합법적으로 실현시키려고 다대한 노력을 해왔는데 우리법승의 무작각한 암투, 알력(軋轢)과 같은 불상사가 첩출하여 오늘 날까지 실현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본산 실현의 책임을 가진 분자(分子)인 나로서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금년 중에는 총본산의 기구가 실현될 것으로 믿고 있는 바이며 또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실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니까 제산법려(諸山法侶)의 대덕(大德)이 신년에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힘써 주심을 바라는 바입니다. 현시 전시체제하에 있어서 전 국가적으로 일억일심의 단결을 부르짖고 있는 이 해에 우리 법려가 교계 발전을 위하여 일치단결이 없다면 이게 될 말입니까.
우리법려가 일치단결하고 화애협력(和哀協力)83)하여 통제기관을 확립시키고 그 밑에서 인재융통을 하여 흥학포교(興學布敎)를 잘해야 이것이 국가를 위한 신앙보국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즉 청구(靑邱)84)법려 대덕은 신년에 새로운 각오를 가져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출전 : 李鍾郁, 「朝鮮佛敎徒의 새로운 覺悟」, '佛敎時報' 제54호, 1940년 1월 28일, 2쪽>
81) 김삼도의 法名.
82) 같은 사물이 거듭 나옴.
83) 화해협력의 오기로 보임.
84) 조선.
2) 각자의 고집을 버리고 전체주의로
의의(意義) 깊은 황기(皇紀) 27세기의 초년두(初年頭)를 맞이하여 일억 신민이 더욱이 안으로는 신체제 확립으로 신도(臣道) 실천의 길을 얻어서 직역봉공(職域奉公)을 굳게 실행하여 밖으로는 일(日)·독(獨)·이(伊) 삼국동맹과 함께 일(日)·만(滿)·중(中)의 새로운 공존공영(共存共榮)의 결실을 거두어 동아신질서 건설을 매진하는 동시에 세계 신질서 건립을 위하여 활약할 것을 믿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더욱이 삼가 황실(皇室)의 어번영(御繁榮)을 봉축(奉祝)하고 황군장병의 어노고(御勞苦)에 대하여 충심으로 감사를 드리오며 따라서 조선불교도 신체제 하의 혁신을 단행하여 국가사업에 만에 하나라도 보좌하고자하여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대하는 차제(次第)85)올시다.
그런데 이 의의 깊은 신년을 당하여 조선불교의 발전과 총본사(總本寺)에 대한 희망을 말씀드릴 것 같으면 조선불교도의 총의를 대표한 31본사 주지가 지난 해 11월에 경성에 집합하여 총본사 건설에 대해서 회의를 열고 종래 조선불교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써 세워오던 종명(宗名)을 고쳐서 조선불교 조계종(曹溪宗)이라 하고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太古寺) 사법인가(寺法認可)를 신청하는 동시에 조계종 총본사 건립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니까는 늦어도 금년 3월 전으로 반드시 총본사 사법인가가 나게 되며, 따라서 총본사 기구가 조직되리라고 믿습니다.
반도 불교가 과거에 있어서 발전되지 못한 것은 통일기관이 없어 31본사로 통일하는 총본사가 건설하게 되는 고로 반도 불교는 앞으로 광휘(光輝)있는 발전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다만 문제 되는 것은 총본사 기본 재산 조성의 건(件)인데 이것만 소정의 규약에 의지하여 각 사(寺)에서 기부 헌납하고 보면 모든 일이 뜻대로 성취(成就)되리라고 믿는 바입니다.
<출전 : 廣田鍾郁,86) 「各自의 固執를 버리고 全體主義로」, '佛敎時報' 제66호, 1941년 1월 25일, 2쪽>
3) 총본산의 현실과 조선불교의 장래
세화(歲華)87)가 바뀌어 이에 전승의 신춘을 맞이하여 삼가이 황실의 어번영(御繁榮)을 봉기(奉祈)하고 동시에 황군이 건설한 위적(偉積)을 찬앙(讚仰)하여 국가의 광영을 경축한다.
그리고 신년 초두(初頭)에 임하여 조선불교 총본산의 기구 확립을 촉진하는 동시에 조선불교의 장래를 위하여 소회일단(所懷一端)을 서술하고자 한다.
조선에 불교가 유입된 지, 이미 1568년을 헤아리게 됨에 유구연선(悠久連線)한 법□(法□)의 주류는 각 시대 각 사회를 통하여 널리□흡(□洽)하지 아니함이 없다. 의연한 불교사를 돌아볼진대 고구려의 순도, 백제의 마라난타, 신라의 아도(阿度)를 시조로 한 각 조(朝)의 불법은 국정, 민속, □□, 문화 등
85) 이때, 때마침 주어진 이 기회.
86) 이종욱의 창씨명.
87) 세월.
백반에 걸쳐 □□를 지었으므로 조선의 모든 문화는 불교를 이별(離)하고 그 존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오교구산(五敎九山)의 강성(降盛)은 더욱이□□한 문화를 …… 판독불가(5줄)……과 도의(道義), 혜철(惠哲)등 구산문(九山門) 조사(祖師) 및 보조(普照), 뇌옹(瀨翁)등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부터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불문으로부터 족출(簇出)한 역대의 국사(國師), 왕사(王師)의 □오심원(奧深遠)한 덕화(德化)는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하여 그 법도가 천추에 범(範)을 드리울 뿐만 아니라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상(曆象), 방술(方術), 가요(歌謠)등에 이르기까지 깊은 조예를 가져서 혹은 창조하고 혹은 중흥(中興)하고 혹은 지도하여 만반 문화의 창조발달에 기여함이 크다. 그래서 북학동전(北學東傳), 내수외화(內修外化)로써 사회의 궤범(軌範)이 되며 민중의 표□가 되어서 삼국으로 하여금 삼국답게 하고 고려로 하여금 고려답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조(李朝)에 있어서는 국정으로써 불교 흥륭에 배척을 □하더니 중엽이후로는 점차 박해하여 압박하는 정도가 가혹하여 겨우 선교(禪敎) 양종(兩宗)만이 유지(維持)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 종파의 존속이 파괴되고 사찰(寺刹)은 산악(山岳)에 격재(隔在)88)하여 승니(僧尼)와 민중의 간섭(干涉)이 끊어지고 불교와 사회의 접촉이 소원하여□□ 5백년에□□의 강성(降盛)을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오히려 불타(佛陀)의 가호가 없지 않아서 청허대사(淸虛大師)같은 이가 나와서 선교 양종을 통제하고 승려를 거느리고 근왕(勤王)의 위훈(偉勳)을 세움으로써 불력의 여력을 나타내고 산중에 깊이 내재(內載)하였던 혜명(慧命)89)과 법□(法□)은 은은(隱隱)히 보존하여 갱생의 기력을 잃지 않고 한국90) 말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건너서 뛰어서 1910년 ‘일한합병(日韓合倂)’의 대업이 성취되자 지인지공(至仁至公)에 신정치는 우리 조선 불교에 출유갱생(出由更生)의 기회를 주어 다음 해 1911년에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공포하게 되어 31본산(本山) 및 그 말사(末寺)의 법적 존재를 공인함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불교는 이와 같이 오백년의 유폐(幽閉)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불교 자체 부진의 쇠미(衰微)91)와 민중 암매(唵昧)92)의 누적된 습속은 아직까지 양자의 급속한 접촉을 용납하지 못하게 된 중에 특히 외래의 사상과 특질문명의 도취는 한층 포교의 진전을 저해(沮害)하여 오기 때문에 사찰령 공포 이래 이십 하고도 9년 조선불교는 지금까지도 의연히 승니(僧尼) 전속(專屬)의 신앙인 경역(境域)에 머물러 있고 사찰령의 정신과 부처의 뜻한 바에 부합치 못하고 있는지라 우리 법려(法侶)는 한 가지 유감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당국서는 만근(輓近)93) 사상(思想)이 혼돈(混沌)한 민중의 심전개발(心田開發)을부르짖고 이를 실현키 위하여 신앙 유도(誘導)94)에 주력하고 있는지라. 이 기회에 제회(際會)하여 부처
88) 떨어져 있음.
89) 지혜의 생명이라는 뜻. 불법의 명맥을 이어가는 비구를 높여 이르는 말.
90) 대한제국을 일컬음.
91) 형세가 기울거나 기운(氣運)이 쇠퇴하여 미약함.
92) 일에 어두움.
93) 몇 해 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
94) 사람이나 물건을 목적한 장소나 방향으로 이끎.
를 숭봉하고 있는 우리들 승도(僧徒)는 바로 조선불교 재흥의 절호 기회를 삼고 자숙정화(自肅淨化)로써 강력한 통제를 도모하고 당국의 시책에 호응하여 민중의 심전개발에 기여하고 부처 본래의 소지관철(素旨貫徹)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래서 이의 구현책으로써 먼저 조선불교 31본산이 통제방법을 논의하게 되자 재작년(1937년) 봄 31본사 주지 대회석상에서 관계당국의 어수시(御垂示)95)와 어지도(御指導)에 의하여 조선불교 총본산 창건의 토의가 만장일치의 그 가결을 보게 되어 이의 전제로서 대웅전의 건립 계획이 성립되어 같은 해봄에 그 기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공사 중에 뜻밖에도 저 폭려(暴戾)한 중국 군권(軍權)의 도전에의하여 지나사변을 유발하게 되었는데 완미(頑迷)한 □정권의 배후에 있어서는 호시탐탐 집요하고 교활한 마수를 희롱하는 제 3국의 이□(異□)은 더욱더 전화(戰禍)를 장기에 이르게 하므로 이에 대응하여 우리 제국도 또한 장기전과 장기건설의 체제에 들게 되어 국민정신총동원의 진용이 견고하게 되었음으로서 반도 민중의 정신 진작상 한층 조선불교 통제기구의 급속 실현을 요구하게 되어 대웅전의 공
사를 급히 하여 작년 10월 중에 준공을 고하게 되었으니 전각 건평이 225평이나 되고 건축비가 15만원에 달하게 되었는데 현대 조선건축으로서는 정교를 다한 것으로서 굉장하고 웅대함이 동양 유일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조선불교 총본산의 불전으로서 상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당은 훌륭하게 건축되었으나 총본산의 기구가 법적으로 공인을 얻기까지 각 본산의 합력이 중차대한지라 31본산 주지 제위 용상대덕(龍象大德)과 7천의 법려는 조선불교의 내일의 장래를 위하여 그중대한 사명을 반성하고 멸사봉공의 정신으로써 어디까지든지 화합과 협력하여 조선불교 통제의 제 일보를 전진하기 바라는 바이다. 오인(吾人)은 조선불교의 장래 발전은 총본산이 실현되고 아니되는데 있다고 믿으며 또는 조선불교의 운명도 역시 그러하다고 믿는 것이니 각위 첨덕(僉德)96)에서는 총본산의 실현을 위하여 또 한층 더 노력을 해주기를 충심(衷心)으로서 갈망하는 바이다.
<출전 : 李鍾郁, 「總本山의 實現과 朝鮮佛敎의 將來」, '佛敎時報' 제42호, 1941년 4월 1일, 2쪽>
4) 전첩(戰捷)의 봄
대동아건설과 한 가지 우리 제국의 전첩(戰捷)의 봄을 봉영(奉迎)하여 시시각각으로 세계 인류로 하여금 시명(時命)의 시정(是正)을 하게하고 그 분(分)에 자안(自安)해서 신의 대도(大道)와 불타(佛陀)의 본분을 심체(深體)하게 하는 것은 우리 황도불교(皇道佛敎)의 종도(宗徒)된 직분이며 또한 제국신민으로서의 보국에의 적성인가 생각합니다.
동아의 봄과 제국의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된 의의 다른 이번 봄(今春) 종회 개회벽사(開會僻頭)를맞이하면서 삼가이 성도(聖禱)를 봉(奉)하여 맞지 않은 바입니다.
특히 국가 총체의 혈탄(血彈)을 모으는 이 대업의 진행 도상(途上)에 있어 국가관념의 본위와 종교관
95) 교시.
96) 첨(僉) : 다, 모두, 여러.
념의 시정이 아울러 재정리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어 선차적(先次的)으로 이번 임시종회를 다달아 종도 일반의 관념 시정을 번(煩)코자 함이다.
국가지상주의, 국가유본주의(國家唯本主義)를 본위로 구체제 관념을 청산하여야 국가 대망에 합치되는 것이며 자유주의는 물론 종교지상주의까지도 구체제 관념이니 이것도 자성하여서 국가를 선위로 삼고 불타정신이 육화(肉化)하도록 종단관념(宗團觀念), 종단지도원리(宗團指導原理)를 세워야 합니다.
특히 종교는 국경이 없다는 관념이 공허(公許)되고 불교사상의 일면에 이른 유사한 관념형(觀念型)이 있는 것으로 사료(思料)하는 것은 크게 오견(誤見)으로 알아야 합니다.
어찌 종단(宗團)에 국경이 없으면 종단에 어찌 종단의 특수한 존재성이 있고, 그 종단의 특색으로 그 종단의 율의(律儀)가 있겠습니까. 자고(自古)로 국가가 모태(母胎)로 하고 그 민족문화를 원태(原胎)로해서 종단이 커나왔으므로 그 민족의 문화유입과 아울러 종단이 유포되었던 것입니다.
종단의 사상만이 유리(流離)되어 전파된 것이 아니고 그 문화의 옷을 입고 유포된 것도 이에 기인(基因)된 것이며 인류의 본질을 본위로 하였기 때문에 서로 인류문화의 대강(大綱) 속에서 그중요한 율의(律儀)가 인류생활을 본위로 해서 건설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인류생활의 가능을 전제해서 그 통도율의(通導律儀)가 건설됨도 그 주지(主旨)가 이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확호(確乎)한 신념을 국가원기(國家原基)에 세우고 국가대업에 익찬(翼贊)하도록 하여 주었으면 더욱 부탁하는 바입니다.
신라의 사군이충(事君以忠), 임전무퇴(臨戰無退)가 곧 불즉불리(不卽不離)한 국가와의 관계를 여실히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대업으로 대동아건설 도상(途上)에 있어서 국민으로 모든 임무를 더욱 철저하게 실행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바인데 그 선급한 일로서 법요구(法要具)의 금속물(金屬物)에 있어 특히 예술적 가치나 긴급한 것이 아닌 한 국방헌납을 실행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다음 의정(議程)에 따라 의결안도 있게 될 것이므로 먼저 주지(主旨)만을 다음 단(段)에 말할뿐입니다.
국방자촌 헌납운동 결의안(國防資村獻納運動決議案)으로 다음의 세항(細項)을 상정하게 되겠습니다.
(備參)
목적
각 사찰에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철, 동, 청동 또는 황동 등의 금속류는 군(郡) 또는 면(面) 연맹을통해서 군에 헌납할 것. 단 아래의 것에 한해서는 제외함.
1. 위험 방지상 특히 필요한 것
2. 고등(高等) 미술공예품
3. 특히 유서(由緖)깊은 기념품
4. 법령에 의해 사용되는 것
5. 기타 국보 또는 법령상 지정된 것.
사유
목하 정전 진전(征戰進展)에 수반하여 군사자료의 대량 필수에 비춰 각 절에 있는 사장(死藏)금속류를 헌납(獻納)함으로써 본 종도(宗徒)의 적성(赤誠)의 일단(一端)은 나타내 보일 수 있도록 함에 연유함.
방법
헌납수속 기타에 대해서는 각사(各寺)는 각 관할 연맹의 지시에 따를 것.
기타
위의 헌납기간은 제한이 없고, 헌납할 경우 각 본사는 그 도도(都度) 총본사에 보고할 것.
<출전 : 廣田鍾郁, 「戰捷의 春」, '佛敎新' 제36호, 1942년 5월 1일, 4~6쪽>
5) 징병제 실시의 영(榮)을 예대(譽戴)하고
제국 징병제의 전문적 연구는 나의 지역이 아니므로 그 상세는 간략히 하거니와 대략 일별(一瞥)하면 1873년1월 10일 제국의 징병령이 발표된 뒤로 지금까지의 제국황군의 조직의 특질과 정신의 견실은과장한 번필(煩筆)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라도 금차 대전의 진행으로 보아 이미 증명되고 있음이 있다.
실시 이래 1894~1895년, 1904~1905년의2대 전역(戰役)97)은 동아에 있어 오고야 말 세계역사 운태(運態)의 작은 서막에 불과하였던 것이나 그 정신적 기초로 보아서는 국기(國基)가 여기서 세워진 것이라 할것이다.
메이지(明治) 시대는 제국의 화발성시(花發盛時)이면서 큰 결실을 남기고 새 역사의 씨를 뿌린때라 하리라.
이 광채 있는 역사의 보폭이 넓어짐을 좇아서 그 발이 대만에 반도에 남양(南洋)에 사할린(樺太)에 뻗쳐 다시 북만(北滿)에 남북지(南北支)에 이에 다시 대동아 해상에 점철된 천여 도서와 태국(泰國:邏羅) 미얀마(緬甸)이며 인도(印度), 오스트레일리아에 까지 이 역사의 보폭이 넓어지려는 것은 우연이 아닌 큰 사인(史人)의 분투와 노력이 전과주옥(全科珠玉)으로 새겨 있고 누전(鏤塡)된 관계였다.
국가만반 조직에 간발(間髮)에 잘못이 없이 총체적 진행을 여실히 보이고 있음은 동아의 공영과 제국의 다행으로 보아 민초의 대망이날로 높아가는 때 황화(皇化)의 역내(域內)에 동인(同仁)의 은혜를 베풀게 된 1938년칙령 제95호 육군특별지원병령이 발표되고 5월 8일 각의(閣議)에서 1944년도부터 징병제실시를 행하게 될 것을 준비 진행 중이라 하니 내선일체(內鮮一體), 동아공영이 명실구전(名實俱全)으로 실시됨이라 하겠다.
이 영광을 입게 된 반도 대중은 비로소 이기(利器)를 들고 가장 효과적인 동아 개척의 제일 보초(寶鍬)를 일제히 내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국의 일 여수(黎首)98)로 동아의 일 민초로서 천의(天意)
97)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컬음.
를 존중하고 성명(聖命)을 온전히 해서 반도인의 남김 없는 천자(天資)를 발휘하게 됨이 아닐까?
경전(經典)에 전거(典據)한 전쟁의 일단(一端)우리 불교로서 국가와 관계에 대한 것을 경전에 전거해서 이 징병제 축하기념법회의 강설(講說)로서 몇 말을 한 적도 있지만 첫째, 우리 인류는 내심(內心)전쟁, 외부전쟁 이 두 가지 종별(種別)이 있으나 인류 자체가 미숙이요, 상대요, 불완전의 일쾌상을 가진 만큼 전쟁이란 것이 일초일각도 끊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백팔번뇌와 싸워 조복(調伏)을 받지 않으면 정심(正心)을 세우지 못해서 난혜(亂慧)와 난상(亂想)에서 본연(本然) 성상(性相)을 닦아 밝힐 수 없고 외계(外界)로는 기(氣)의 변화, 시(時)의 천이(遷移), 물(物)의 부제(不齊), 연(緣)의 각이(各異)로 인하여 상반된 제반사정(諸般事情)과의 마찰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 점이 인류가 있어온 오늘까지 또 있을 미래 때가 다하도록 그 해결에 궁(窮)하고 선도(善導)에 겨를이 없었던 바며 현림성철(賢林聖哲)에 있어 초려(焦慮)하던 바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나타난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도 가장 요체(要諦)되는 것은 부전(不戰)이 승(勝)이란 것이 전법(戰法)에 최상승(最上乘)이라 하였고 이것이 자연법(自然法)이오, 시연법(時緣法)을 자기(自機) 성숙기(成熟期)와 합치시키는 뜻인가 합니다.
동양에 병서(兵書) 7경(經)이 모두 부전이승(不戰而勝)으로주(主)를 한 것이 육도삼략(六韜三略)이며 손무병서(孫武兵書)들이 모두 이 중아사경(中阿舍經)에서 얻어 배운바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성철(聖哲)의 일언(一言) 일구(一句)가 철리(哲理) 아님이 없음을 학득(學得)함인가 합니다.
그 말의 원문을 약기(略記)하면 중아사(中阿舍)엔 ‘이쟁지쟁(以爭止爭)은 경부득지(竟不得止)요 인능지쟁(忍能止爭)’이라 하고, 잡보장경(雜寶藏經)에 말하되 ‘득승(得勝)도 장증원(長增怨)이요.
패부(敗負)도 즉 증우고(增憂苦)니 승부부쟁(勝負不爭)하면 그 즐거움이 가장 제일이라’고 하였으니 결국 전쟁을 피하거나 전쟁을 원리적으로 부인함이 아니라 치자(治者)와 병가(兵家)의 역량과 도략에 따라서 가장 바른 천명을 향(享)하고 큰 선(善)을 세우는 데는 내화(來化)의 방편이 갖가지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忍)과 부쟁(不爭)이 도를 넘어서 비법(非法)과 불선(不善)이 증장(增長)할 때에는 절복(折伏)과 퇴치(退治)를 말하였으니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에 「약견악미차비법편증장(若見惡未遮非法便增長)」, 승만경(勝鬘經) 「아약득력시피처견중생가절복자절복가섭수자섭수(我若得力時彼處見衆生家折伏者折伏可攝收者攝收)」한 것이 수기(隨機)99)의 응화(應化)를 말합니다.
경전에 의거한 국민과 국시(國是)의 촌철(寸鐵)
국가란 특정한 인종의 지역과 문화를 한계하고 중심한 결속이며 국군(國君)이란 질서의 위차(位次)이다.
시(始)가 있고 종(終)이 있으며 선(先)이 있고 후(後)가 있고 고(高)가 있고 저(低)가 있는 자연계(自然界)의 위차에서와 동일한 국가조직의 법의(法儀)와 원리가 군(君)을 주재로 함이 근간이요, 핵심입
98) 검수(黔首). 검은 맨머리라는 뜻으로 일반 백성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99) 기회를 따름.
니다.
그래서 자고로 심지관경(心地觀經)에 ‘세간당전이주위주인민지풍악이왕위주(世間堂殿以主爲柱人民之豊樂以王爲主)’라 하였으며, 불설자애경(佛說自愛經)에 ‘국무군유여체무수불가구립(國無君猶如體無首不可久立)’이라 하였고, 이 양자관계의 일단으로 심지관경(心地觀經)에 ‘약유인민능행선심경보인왕(若有人民能行善心敬輔仁王) 존중여불(尊重如佛) 일국안온풍악(一國安穩豊樂)’이라 하여 있습니다.
민(民)으로 나라에 일한 말로는 증일아사경(增一阿舍經) 제3에 ‘위가망일인(爲家忘一人), 위촌망일가(爲村忘一家), 위국망일촌(爲國忘一村) 위신망세간(爲身忘世間)’이라는 것은 개(個)에서 전(全)으로 사신위국(捨身爲國)을 말하였으나 위신망세간(爲身忘世間)의 원의(原意)는 출가인(出家人)으로서 자심(自心)의 투관(透觀)과 자성(自性)의 증득(證得)을 말합니다. 국군(國君)으로서의 화덕(化德)의 일단이 각 경에 많이 있는 가운데 심지관경(心地觀經)에 ‘국왕등시군생여동일자(國王等視群生如同一子), 섭호지심주야불사(攝護之心晝夜不捨) 여시지왕(如是之王) 왕어인(王於人)」이라 하여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왕화(王化)가 균점(均霑)되고 여수(黎首)에 향하는 평등(平等) 성지(聖旨)가 천의(天意)와 같이 균여(均如)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왕실정치(王失正治) 인무소의(人無所依) 왕약이정위화(王若以正爲化) 공포불침(恐怖不侵)
[심지관경(心地觀經)]
공포(恐怖)(타국침핍(他國侵逼), 자계반역(自界叛逆), 악마질병(惡魔疾病), 국토기근(國土飢饉), 비시시우(非時風雨)……)를 의미합니다.
이런 경전에 전거한 말씀들이 설명(解)이 조루(粗漏)하고 그 뜻(旨)이 미미한 것 같지만 현대의 국가조직 이념에서 그 국시에 속한 원의만은 균섭(均攝)하여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 대의에 비춰 준수(遵守)하면 불타(佛陀)의 이상과 국가의 이상이 제행(齊行)되는 것입니다.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조서(詔書) 환발(渙發) 후로 33년을 지나 이제 내선일체, 일시동인이 당초의 성지대로 여실히 실현됨은 시이무의(恃而無疑)임은 지명(至明)이었지만 1944년을 기하여 반도 청년을 동일한 병제(兵制)를 받게 되는 희열은 실로 공구감격(恐懼感激)하여 불감하는 바입니다.
더욱 최신 반도 인구가 2천 4백만에 달한 것을 증전(曾前)100) 천 3백만에서 다시 2천 2백만이 되던 것에 비하면 천혜(天惠)의 균점(均霑)에서 얻은바 반도의 발전태(發展態)요, 생(生)의 전실(專實)을 말함이 아닌가 합니다.
<출전 : 廣田鍾郁, 「徵兵制實施의 榮을 譽戴하고」, '佛敎新' 제38호, 1942년 7월 1일, 4~6쪽>
6) 개병주의
대전(大戰)101) 1주년 기념을 즈음하여 황군장병의 노고에 대한 감사는 물론 1억 국민이 일심으로 이 큰 전시(戰時)에 후진(後陣)을 수비해간다는 것은 세계 이목에 놀람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동해 해역에
100) 이미 지나가 버린 그때.
101) 1941년 발발한 태평양전쟁을 일컬음.
서구 (西歐) 모든 노대국(老大國)들을 여지없이 삭제(索制) 혹은 파쇄(破碎)한 혁혁한 전과는 세계 전사상(戰史上)에 특필될 것이다.
서전(緖戰)에 있어 적의 실력과 전비(戰秘)를 이미 탐구하여 그 약세를 극복하여 인도양과 남태평양 상에서 2대 해상전지(海上戰地)를 버리고 궁서(窮鼠)102)를 이에 쫓는 것과 같이 막다른 명맥의 선에까지 돌진하였다는 것은 필승의 분수지는 벌써 넘어선 것이다.
영국(英)을 명맥의 선인 인도에까지 그 손발을 물리치게 하면 영국이 거의 괴멸에 임박한 것이라는것은 아무라도 상상할 바이나. 미국의 군비확장의 말은 내허(內虛)한 방송이라 하더라도 그리 장소(長嘯)103)할 것은 못된다. 그러나 시기지만(時期遲晩)104)의 혐(嫌)이 없지 아니하다.
결국 영국이 호주와 인도에 떠나 캐나다로 옮겨 영국과 태평양 넘어서 구아(歐亞) 대(對) 미주(米洲)의 2대 진지(陣地)를 구축(搆築)하고 만년의 서로의 안택(安宅)을 계(計)하는 어느 저정(著釘)시기로 들지 않을까? 이것이 순조(順調)로 가서 구아(歐亞)의 재건책(再建策)일 것이오. 영국과 미국의 몰락이 결과 짓는 차책(次策)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독일과 소련의 전투에 대해서는 논급(論及)의 필요를 갖지 않으므로 본지(本紙)에 신조(愼調)함이 있고자 하며 이 큰 사실을 중심(中心)하고 사계(斯界) 군사군략가의 성안(成案)이 30, 40년 전에 결정되어 있겠으므로 남루(濫漏)를 불허하는 바일까 한다.
여기까지 추축(樞軸) 제국의 사명이 달성되려면 우리 국민은 좌이자성(坐而自成)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수많은 적이 눈을 뜨고 있고 해양(海洋)노도(怒濤)가 음험(陰險)을 더하고 있는 것은 해약(海若)이 무슨 희생을 더 필요로 하고 있다. 호주의 완점(完占)과 인도의 완립(完立)까지 우리 황군의 임무가 남아있고 서쪽으로 서아(西阿)105)와 영국 본토(本土)의 완점(完占)까지 독일과 이탈리아의 임무가 남아있으니 지중해상의 황파(荒波)가 아직 인류의 큰 비참한 혈조(血潮)를 맛보고야 말 것은 남은 과제이다.
이 양대 전역(戰役)만으로도 천우(天佑)와 신조(神助)의 명가호력(冥加護力)도 기다리는 바이지만 1억 국민이 개병(皆兵)의 정신 이래 대동아 건설, 아시아 자위자건(自衛自建)을 위하여 역사적인 대결투가 있어야 할 각오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 큰 성업에 모두 군신이 되어 아시아 대륙에 대동아건설 신(神)의 높은 탑이 히말라야와 백두상(白頭上) 이상으로 높아질 때까지 원계(遠計)와 홍도(鴻圖)있는 포부로서 오직 혈탄(血彈)되어 우주의 참된 꽃으로 피어날 것을 맹서하는 것이 신흥 대동아의 역군(役軍)이며 어능위하(御稜威下)에 수행되고 있는 이 대전(大戰)을 통하여 참된 충의감(忠義感)이라고 하겠다.
개병주의(皆兵主義)가 잠연(潜然)한 말이 아니고 모두 변방 육로의 수만 천,106) 해상의 수만 해리에 걸친 전선의 수비자가 될 각오라만 이 성은에 답하고 홍도(鴻圖)의 계승이 되리라 생각한다.
<출전 : 廣田鍾郁, 「皆兵主義」, '佛敎新' 제43호, 1942년 12월 1일, 3~5쪽>
102) 쫓겨서 궁지에 몰린 쥐.
103) 휘파람을 길게 붊.
104) 지만(遲晩) : 옛날에 죄인이 자백하여 복종할 때에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이르던 말.
105) 서아프리카.
106) 阡=km.
7) 사상선도·종교보국
이번에 '금강저(金剛杵)'가 그 내용을 충실히 하고, 지면을 쇄신함에 즈음하여, 그 장래를 축복함과 동시에, 겸해서 평소 저의 소신의 일단을 피력하게 된 것은 참으로 흔쾌 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되돌아보면, '금강저'가 창간 된 것은 벌써 26년째. 우리 종(宗)의 유일한 학술적인 잡지로서 춘풍추우 끊임없는 건투를 이어 온 것에 대해서는 감사의 뜻을 금할 수가 없는 동시에 주간(主幹) 여러분의 진력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전쟁에 나아가는 초 비상시국! 적도 이남의 대양, 또는 북극의 어름바다 속에서 우리황군의 육해 정예는 모든 간난신고에도 견디며, 대동아공영권건설의 간성(干城)으로서 용전분투, 능위(稜威) 아래에 혁혁한 공전의 대 전과를 확대 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우리 후방의 1억 국민은 그들의 심신의 단결을 도모하고 전선의 충용 무쌍한 장병의 사기를 고취하고, 후방확보의 대 결심을 굳군 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국책에 부응하여 우리의 책임을 통감해서 종래의 '금강저'도 그 구각에서 선탈(蟬脫)하여 사상 선도의 종교보국에 재출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왕년의 개인문제에 대한 사소한 사건의 게재 등은 일체 청산하고 애오라지 시국의 인식, 종지(宗旨)의 거양과 학술의 연구 등에 주력하여, 명실 모두 종문의 유일한 학도잡지가 되도록 기대 해 마지 않는 바이다.
<출전 : 廣田鍾郁, 「思想善導·宗敎報國」, '金剛杵' 제26호, 1943년 1월 25일, 75~76쪽>
8) 성전필승과 불일증휘(佛日增輝)
태고사(太古寺) 종무총장(宗務總長) 광전종욱(廣田鍾郁)
황위(皇威) 팔굉(八紘)에 찬연히 빛나며 혁혁한 전과는 사해를 제압하고 있는 이때 이에 대동아전쟁하 제2년의 신춘(新春)을 크나큰 희망과 환희 가운데 맞이함에 있어 반도 불교계의 교직자 및 신녀와 함께 삼가 성수(聖壽)의 만세와 실조(實祚)의 무궁을 봉하(奉賀)하여 받드는 동시에 아울러 황실의 어미영(御彌榮)과 국운의 융창(隆昌)을 기념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회고하건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107) 발발 이래 이미 1년여 위로는 황조 황실의 신령을 받들며 용명하옵신 성상(聖上)을 봉앙(奉仰)하오며 밑으로 대조(大詔)를 받들은 억조(億兆)의 신민이 육해공(陸海空)의 황군과 같이 연전연승의 정의의 금기(錦旗)를 휘날리는 곳에 북(北)으로는 멀리 ‘알류샨’열도(列島)로부터 남(南)으로는 저 멀리 적도(赤道)를 넘어서 호주에 이르기까지 육지로 해양으로 하늘(大空)로 광고(曠古)108)미증유(未曾有)의 대전과를 거두고 있음을 오로지 열성(列星)109)의 어가호(御加護)와 어
107) 1941년 발발한 태평양전쟁.
108) 전례가 없음.
릉위(御稜威)의 신력(神力)에 인함이다. 공구(恐懼)와 감격을이기지 못하는 동시에 진충장사(盡忠壯士)의 어력전(御力戰) 분투(奮鬪)에 대하여 감사를 바치며 더욱이 순국령영(殉國靈英)에 대하여 충심(衷心)으로 애도의 적성(赤誠)을 바치는 바입니다.
그리고 상병장사(傷兵將士) 각위(各位)의 재기(再起) 봉공(奉公)을 빌며 아울러 이들 용사의 유가족 여러분의 다상(多詳)함을 기원하여 마지 않습니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군국다사(軍國多事)의 제정무(際政務) 어다단(御多端)하옵심에도 불구하옵시고 작년 11월 26일에 신도, 불교 등 교단 관장 통리자(通理者)에게 사알(賜謁)110)의 어사태(御沙汰)111)를 내리사 협심육력(協心戮力) 종교보국(宗敎報國) 하랍시는 어분부(御吩付)가 계시었고 12월 12일엔 친히 이세로(伊勢路)에 행행(行幸)하옵시어 신궁에 어친배(御親拜)하옵시와 개전(開戰) 1년의 전과를 어봉고(御奉告)하옵시는 동시에 신령의 어가호(御加護)를 어기념(御祈念)하옵시는 성려(聖慮)를 배찰(拜察)하옵시건대 우리들 불도는 황감(惶感)한 나머지 다만 감읍(感泣)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굉대무변(宏大無邊)한 황은(皇恩)에 감분흥기(感奮興起)하여 청사(靑史)에 빛나는 황국의 일원으로서의 영예를 뼈 속에 깊이 새겨서 성전필승(聖戰必勝) 목적완수(目的完遂)에 매진하는 동시에 흥선포교(興禪布敎) 불교증휘(佛敎增輝)를 기하려는 결심을 갖기 바라는 바입니다.
<출전 : 廣田鍾郁, 「聖戰必勝과 佛日增輝」, '佛敎時報' 제90호, 1943년 1월 15일, 3쪽>
9) 종정유시(宗正諭示)를 봉하여
공구(恐懼)하옵게도 선전(宣戰)의 대조(大詔)112)를 환발(渙發)113)하옵시서 우리 황군(皇軍) 정예는 어능위 하에 태평양 상에 있어서 결사분전이 착착 전과를 거두게 되고 있는 이때에 있어 본 종도(宗徒)의 정신진작을 촉진하기 위하여 지난 해 12월 12일 종정(宗正) 예하(猊下)께옵서 ‘선전대조(宣戰大詔)의 환발에 즈음하여 종도(宗徒)에게 고함’이란 유시(諭示)를 선포하심에 대해서 전선 종도에 이미 통달하였거니와 종도 일반은 대조 어지(御旨)를 심체(深體)하고 종정 유시를 명패(銘佩)114)하여 위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아래로 출정 장병에 노고를 위자(慰藉)115)하는 의미에서 다음의 실천요목을 본산 주지완(住持宛)으로 지시한 바도 있지마는 더욱 그 실시실행에 철저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1. 저축(貯蓄)실행으로의 적극화
각 사(各寺) 1942년도 예산에 대하여 저축실행의 중점주의로서 이 경리(經理)에 당하여는 끽긴(喫
109) 하늘에 떠있는 무수한 별.
110) 임금이 신하에게 알현할 기회를 줌.
111) 사태 : 물건이 주체할 수 없이 한꺼번에 많이 쏟아져 나오는 일.
112) 조칙(詔勅), 조서(詔書).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
113) 임금의 명령을 세상에 널리 알리던 일.
114) 고마움을 마음 속 깊이 새겨 간직함. 명심(銘心).
115) 위로하고 도와줌.
緊)116)을 요한 사업이외에는 그 경비를 타관(他款)에 활용함이 없이 필히 국민저축운동에 협력해서 은행 기타 금융기관에 저금할 것.
2. 필승 기도법회의 개최
대동아전쟁 필승기원법회에 대해서는 지난 1941년 12월 15일 및 동(同) 24일부터 30일까지 삼가히 거행하여 마쳤지만 다시 수시로 기도 지시를 하려고 하는 바이다.
3. 민중사상 선도의 적극화
직원 또는 유위(有爲) 청년승려로 하여금 정회(町會)에 역원(役員) 또는 애국반 지도역 등에 나아가 총력운동을 익찬(翼贊)함과 동시에 국민사상 선도에 노력할 것을 특히 포교에 종사하는 자는한층 성의를 다할 것 (중략)
5. 노동보국의 거행
청장년 승려로서 청년대 편입한 자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노동봉사에 참가할 것
6. 시국에 순응할 시설의 급속 실현
현하 시국 중대함에 있어서 각종 관영시설에 협력이 필요한 체신사무(遞信事務)의 일부 (전신별배(電信別配) 또는 서신의 국외배달중지 등) 중지에 시급 대처할 필요가 있는 곳은 담당 관할 당국의 인가를 받아 사서함를 설치하여 통신의 민속(敏速)을 도모할 것(사서함 또는 수신소 설치의 장소는 총본사에 보고) (후략)
<출전 : 廣田鍾郁, 「宗正諭示를 奉하여」, '佛敎新' 제33호, 1942년 2월 1일, 4~5쪽>
10) 징병제 실시에 대하여 검선일여(劍禪一如)의 투철을 바라노라
조선불교 조계종 태고사(太古寺) 종무총장(宗務總長) 광전종욱(廣田鍾郁)
사람이 그만한 힘과 그만한 책무를 가지고도 그 것을 발휘할 기연(機緣)117)이 없어 초목과 더불어 덧없이 사라지고만 일이 많이 있었다. 이제 우리 반도는 징병제 실시로 황민 최고의 책무를 봉답(奉答)완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어찌 반도 청년 당사자인 청장년들만의 영예리오.
반도의 노약(老若)은 물론 제 불보살(佛菩薩)과 반도산하가 다함께 기꺼워하고 동시에 감읍하여 마지않는 일이다. 그러나 결코 감격 감읍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상응할 심신의 견고한 태도로 정의의 총검을 다투어 잡고서야 한다. 조선의 불교는 수입 이래로 호국정신을 가지고 내려온 사실(史實)이 있고 더욱이 신라의 고승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법훈(法訓)을 세워 국가를 위하여 일하였다.
그리고 불교는 자비를 주지(主旨)로 삼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자비는 검(劍)과 통하는 것이다.
이 전통과검의 자비심을 가지고 7천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 민중은 검선일여(劍禪一如)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116) 아주 긴요함.
117) 어떤 기회를 통하여 맺어진 인연.
군문(勇躍軍門)에 달려가 젊음이의 지성과 충의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출전 : 廣田鍾郁, 「徵兵制實施에 對하여 劍禪一如의 透徹을 바라노라」,'佛敎時報' 제97호, 1943년 8월 15일, 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