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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f 2022년 신년 메시지 이강 주일 메시지 열두제자의 선택은 차선이었다
누가복음 6장 강해 삼부 열두제자를 부르신 것은 차선의 선택이었다
말씀 누가복음 6장 12절~누가복음 6장 19절
요절 누가복음 6장 13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성경적으로 보면 이렇게 수정되어야 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제자를 남긴다.’로요.
예수님은 생애 동안 두 가지 큰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나라 복음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그 복음을 깨닫고 전할 12제자를 양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남긴 것은 바로 한 사람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열두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열두 제자를 양성한 것이 차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열두 제자를 양성한 것이 차선의 선택이었을까요?
(1) 밤새 고민하며 기도하신 후 결정하신 제자양성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손마른 자를 고치시고 시기심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자 바리새인들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싸우려 하지 않으시고, 이 문제를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산에 가셔서 밤새 하나님께 철야 산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서 밤새 기도했을까요? 구속역사의 큰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고민을 가지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ubf를 시작하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60년대 가장 세계에서 가난한 한국 대학생에게 헌금을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문둥이처럼 오그라진 손을 펴서 주자는 구호가 나왔습니다. ubf의 자비량 선교사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제자로 부르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면 아주 귀하게 쓰일 수 있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복음 역사를 위해서 1000여년을 준비시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많은 성경지식을 갖고 있고 리더십이 있고 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아까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변화되면 바리새인이었던 사도바울처럼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도 회개치 않고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완악함으로 마음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이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고민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바리새인을 계속 도와야 하는지, 새로운 사람을 뽑아서 일을 해야 하는지 고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며 고민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밤새 기도하시고 방향을 잡은 것이 바로 12제자의 양성입니다. 12제자를 부르신 것은 최선은 아닙니다. 이들은 준비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지식도 부족하고 하나님을 위한 열심도 부족하고 인간적인 야심이 있는 자들입니다. 최선은 준비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된 자들이 교만하였습니다. 교만하면 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차선책으로 준비되지 않았지만 겸손한 제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저를 부르신 것도 차차선책입니다. 저는 서울대 생도 아닌 지방대생입니다. 거기에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구도자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겸손하게 하시고 복음을 알게 하시고 쓰고 계십니다.
제자양성은 예수님이 기도하고 얻은 결론입니다. 제자양성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도 홍수 심판을 하시고 노아의 후손을 통하여 인류 구원 역사를 이루고자 하셨지만 노아의 후손들은 다 죄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깊이 고민하시고 제자양성을 결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을 제자 양성하셨습니다. 야곱을 통하여 12제자를 양성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에베소 교회에서 공개 전도 후에 많은 바람들이 공개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떠나 순종하는 12제자를 세우고 2년 반 동안 제자양성을 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소아시아 7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바울은 누가와 디모데와 디도를 제자로 양성하였습니다.
(2) 열둘을 사도라 칭하신 예수님
13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고 날이 밝자 많은 제자 중에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신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전권대사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합니다. 이들이 쓴 예수님 이야기가 복음서가 되고 이들이 쓴 편지가 성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보내사 사도행전의 새 역사가 이루어질 소망을 보셨습니다.
열두 제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무엇이 달라야 할까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어떤 점을 책망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라새인들은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의 교권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생명을 목적으로 사랑하는 목자를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참 안식과 회복을 주는 목자를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내가 차가 고장 났는데 한 정비 공장에 갔는데 120만원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현대 서비스 공장에 갔는데 거기도 100만원 정도 드는데 그곳은 또 다른 곳을 고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대흥공업사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20만원도 안 들고 고쳤습니다. 지금까지 이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잘 타고 있습니다.
자동차 공장이 차를 고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버는데 관심이 있는 것은 타락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사람을 살리는데 관심이 있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권 유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동차공업사가 타락하면 돈이 더 드는 문제가 있지만 종교지도자가 타락하면 한 생명을 천국에서 지옥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양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열두 제자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열두 지파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고 그들을 통하여 세계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열두 제자를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이 바로 신약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가 형성되고 세계선교가 이루어지고 복음이 자손대대로 계승될 소망을 보셨습니다.
사도들은 아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너무나 부족한 자들입니다. 양처럼 허물투성이인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입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탐내며 권력투쟁을 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십자가를 앞두고 다 도망할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의심할 것입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의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사도로 소망을 두시고 믿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연약함과 허물을 십자가에서 감당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믿어주고 사랑할 때 사람은 변화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승천하신 주님은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때 그들이 변화되어서 세계선교의 주역이요, 역사를 만드는 히스토리메이커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양성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을 보고 믿어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 사도를 양성하기까지 많은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변화시켜주시고 사도로서 귀하게 쓰십니다.
(3) 부족하지만 겸손한 열두 사도들
“14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여기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 안드레는 형제요.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입니다. 특별히 시몬에게만 베드로라는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양성할 때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차별대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 사람 리더를 중심으로 제자양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한 사람을 더 세우고 그에게 특권과 함께 책임도 주어야 합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들요, 동업자들입니다. 어부는 많은 학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겸손을 보시고 이들을 열두제자의 핵심멤버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핵심 멤버를 키우셨습니다.
빌립은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지적인 사람입니다. 바돌로매는 나다나엘로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마태는 당시의 매국노인 세리요. 도마는 의심이 많은 실증적인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여기만 이름이 나오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셀롯인 시몬은 독립운동을 한 사람입니다. 가롯 유다는 매우 실리적이고 타산적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인간적으로 훌륭한 점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만 못합니다. 열두 제자가 쓴 편지는 바라새인인 바울이 쓴 편지보다 부족합니다. 바리새인의 열심보다 이들의 열심은 부족합니다. 두려움도 많습니다. 물론 최선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회개하지 않자 차선으로 이들을 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부족하지만 매우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겸손히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잘못했을 때는 회개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 공부하고 똑똑해야합니다. 그래야 크게 쓰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겸손히 배웠을 때 곧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겸손해야 똑똑한 것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똑똑했습니다. 그도 교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간질과 같은 사탄의 가시를 주어서 그를 재갈 물려서 겸손 훈련을 시켰습니다. 우리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해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제자는 그 사람이 훌륭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스승이 훌륭한 것입니다.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이 훌륭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누구나 위대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끝까지 배우고자 겸손 투쟁을 해야 합니다. 제자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는 믿고 순종하고, 겸손히 배우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차선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열심히 학문도 공부해야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4) 제자들이 힘써 해야 할 두 가지
17,18 “17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평지에 내려오자 많은 사람들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일을 하심으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둘째는 병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를 돕고, 셋째는 귀신과 같은 영적인 문제를 도와야합니다. 제자들이 이 세 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힘써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소제목을 제자들이 해야할 두 가지 일이라고 붙였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함께 하며 배우는 일입니다.
17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배워야합니다. 제자는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삶을 배워야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제자양성의 삶을 보여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보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삶에서 행동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하는 모습은 예수님이 하시던 모습과 흡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배운다고 합니다. 부모와 목자는 자녀와 제자에게 삶으로 본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와 제자들은 부모와 목자의 삶을 배울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함께 하며, 성령과 함께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배우는 제자들과 함께 해야합니다. 올해 방향처럼 성령의 주시는 생각을 하고 성령이 주시는 말을 하고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야합니다.
둘째, 순종을 배우고 순종을 도와야 합니다.
19절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였고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능력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시지만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만 일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갔을 때 동네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순종하여 믿음의 분위기를 만들자 능력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이를 배워서 능력을 행하기 전에 믿음을 심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믿음을 심으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바울이 불순종하는 자들을 떠나 12제자를 따로 세우고 순종을 도왔습니다. 그때 바울의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낫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고 믿음을 돕자 제자들이 많은 무리들 앞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쳤습니다.
(결론 예수 동행일기를 쓰자)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죽으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후에 무엇을 남기셨나요?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이 예수님은 바로 열두제자를 남기셨습니다. 우리도 하늘나라에 간 후에 제자들만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제자를 양성해야합니다. 우리가 제자를 양성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 뒤에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캠퍼스별 한 사람의 제자를 양성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자녀를 제자로 양성해야합니다. 올해 못해도 좋습니다. 내 평생에 한 사람의 제자를 양성하면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말씀과 함께 하고 성령님과 함께 해야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말씀에 기초하여 삶을 나누는 방식으로 써야합니다. 본이 되는 목자를 배우고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요즘에 선한목자 교회 유기성 목사를 중심으로 예수 동행일기 쓰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ubf는 60년대부터 양식을 쓰는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 동행일기는 성경에 기초가 없습니다. 넋두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양식은 지나치게 성경중심이고 삶을 나누는 것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일용할 양식이 말씀에 기초하여 삶은 나눈다면 앞으로 이 시대을 변화시키는 좋은 본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가 겸손에 더하여 인간적으로 뛰어나면 최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여 최선은 못되어도 겸손히 배운다면 우리는 차선은 될 수 있습니다. 차선으로 보리떡 같은 우리를 쓰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차선이라도 겸손하여 예수 동행일기를 쓰는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똑똑한 단대 의치약대 학생들이 최선으로 우리 가운데 제자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한마디 겸손한 제자가 되어 차선이라도 쓰임 받자
ubf 2022년 신년 메시지 이강 주일 메시지 열두제자의 선택은 차선이었다
누가복음 6장 강해 삼부 열두제자를 부르신 것은 차선의 선택이었다
말씀 누가복음 6장 12절~누가복음 6장 19절
요절 누가복음 6장 13절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