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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31일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제1독서 : 1테살 3,7-13
복 음 : 마태 24,42-5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떤 분으로부터 화초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어떤 식물도 키워본 적이 없어서 여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지요.
더군다나 당시에는 인터넷도 활성화되어 있지 않을 때였기에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친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잘 모르지만 물 잘 주고, 햇빛 볼 수 있게 해주고,
여기에 사랑하는 마음까지 있으면 잘 자라지 않겠냐고 조언합니다.
매일 분무기로 물을 뿌려 잎과 줄기를 닦으며 사랑을 주었습니다.
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물을 주었고, 햇빛도 볼 수 있도록 햇볕이 좋은 곳에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식물은 점점 시들어갔습니다.
화초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보더니 분갈이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화원에서 처음 가져온 화분이 작아서 뿌리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해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제까지 식물에 이 정도 관심과 사랑을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기울였음에도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누구 탓을 해야 할까요?
사랑을 주었어도 죽어버린 이 식물을 탓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사랑했다고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한 제 탓이었습니다.
사랑의 주님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화내는 분이 있습니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였는데 왜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냐며 불평하는 분도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원망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정성을 다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단순히 정성을 다했다고 사랑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잘 알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도록, 일상의 쉬운 예화를 통해서 설명해주십니다.
특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시기에, 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지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주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주인에 대해서 잘 아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인 것처럼,
주님에 대해 잘 아는 우리가 되어야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직도 멀었다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데에 온 기울여야 할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은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위선자들처럼 하늘나라 앞에서 울며 이를 가는 모습이 아니라,
환하게 웃으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늘 깨어 준비하고 산다는 것은 지혜로운 삶입니다.
비나 태풍 등 자연의 능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몫입니다.
무슨 일이든 코앞에 닥쳐서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먼 안목으로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은 못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실행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오면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제가 그렇습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보여줄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한다 해도 그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 자체가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속임수로 준비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 여정의 길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깨어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 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날은 구원의 날입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으십시오”(마태24,42).
예수님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24,46).
하셨듯이 오늘 우리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인정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5,5-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잼버리’가 끝났습니다. 이번 행사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폭염에 대한 대책이 부족했습니다. 더위에 지친 학생들이 탈진하여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배수 시설에 대한 대책이 부족했습니다.
텐트를 치는 것도 어려웠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모기를 비롯한 해충에 의한 피해였습니다.
방역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많은 학생들이 벌레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화장실이 부족했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화장실 사용에 불편을 겪었습니다.
영국의 대원들은 급기야 야영지에서 철수 하였습니다. 미국의 대원들도 철수 하였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는 말처럼 태풍까지 상륙하여서
모든 대원들은 야영장에서 철수하였습니다.
2023년 ‘새만금 잼버리’는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남는 행사였습니다.
대한민국의 품위를 떨어트린 행사가 되었습니다.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에서 지원을 안 했다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의 준비가 소홀했다고 책임을 묻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국제행사를 무탈하게 진행하였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앞으로는 국가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행사가 없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하면 좋겠습니다.
군대에서 전해지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다.”
전투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그 죄를 물으면 군대가 존립하기 어렵습니다.
승리와 패배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경계를 소홀히 해서 부대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죄를 물어야 합니다.
모든 부대는 불침번과 초소 경계병을 운영합니다.
불침번과 초소 경계병이 있기에 다른 부대원들이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깨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잼버리를 기획하는 사람들도 깨어 있었습니다.
해외 출장도 다녀왔습니다. 예산도 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준비에는 소홀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깨어 있지만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소 경계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뜨고 깨어있었어도 적이 몰래 침투하였다면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방을 주시하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어느덧 가을은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민들레 꽃 한 송이를 민들레가 피웠다면
하늘은 뭐가 되고 땅은 또 뭐가 되나.
하늘이 피웠다 하면 민들레는 뭐 되나.”
작은 글이지만 울림이 있었습니다.
가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여름을 온몸으로 맞이했던
땅과 곡식과 사람의 땀이 있었기에 가을이 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고금통의’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예전에 있었던 일들에서 지금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를 찾아야 하는데 이익을 찾으려 하고
그 때문에 많은 갈등과 분쟁이 생깁니다.”
신앙은 이익을 쫓는 것이 아니라, 의를 생각하는 것이고,
특히 하느님의 뜻과 의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영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면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의 교우들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고 하니 우리는 이제 살았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덕분에 우리의 하느님 앞에서 누리는 이 기쁨을 두고,
하느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주님 앞에 굳건히 서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앞의 23장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해 불행선언을 하신 다음,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셨으며,
가장 큰 재난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해 말씀하시고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한 '도적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곧 “깨어 있으면서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3-44)고 하십니다.
재림의 때가 예측 불허할 뿐만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올 것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있다가 그때를 돌발적으로 맞이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비유 속에서 '종'은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이며,
주인은 '종'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곧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주인이 자기 종에게 자기 집안의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 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마태 14,45)
‘충실함’이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인 집안 식솔들’(마태 24,45)과
‘그들에게 제 때에 양식을 내어주는 일’(마태 24,45)에 대한 충실함으로 묘사됩니다.
곧 ‘맡겨진 사람’과 ‘맡겨진 일’에 충실함이 주인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주님 집안의 식솔들, 곧 양들이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님께 대한 충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슬기로움’이란, 먼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이요, 그리고 ‘그 뜻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 양식이나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양식’을 내어주는 일,
곧 당신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일 자체도 그분이 맡기신 일이요, 그분의 일임을 알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깨어 있음'은 ‘의식의 각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실행’을 말합니다.
곧 '깨어 있다'는 것은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일을 맡기신 ‘주인의 신뢰에 대한 깨달음’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분께 대한 '깨어 있음'에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종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신뢰하시는 주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구체적인 행동으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주님께서 맡겨준 형제들에게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형제들을 존중해야 할 일이요,
결코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마태 24,45)
주님!
당신께 속해 있는 종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에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형제들에게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시고,
그것이 당신께 대한 저의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되게 하소서.
아멘.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초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때를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이 언제든지 올 수 있으므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분을 만나게 되고, 확실히 오신다.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뵙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날,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종말을 모르는 것은
우리가 늘 노력하라는 하느님의 뜻이다.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노력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죽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늘 선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43절)
우리의 삶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45절)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것은 충실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야 동료 종들에게 제때 양식을 내주는 일을 할 수 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때 양식을 내주기 위해서는 슬기가,
어려울 때 양식을 자기 혼자 차지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이 받은 것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여야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그러한 종에게 위대한 약속이 주어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7절)
종이 하늘의 보물을 받는 것은 이 지상에서 책임 있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영예이다. 신앙인들은 그런 영예를 입은 사람들이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못된 종”(48절)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종은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심판을 전혀 생각지 않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방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며, 여기에서 주님께 받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께 또 다른 직무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를 처단하여”(51절) 라는 것은 영으로부터 자녀 됨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웃음거리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벌 때문에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온 마음을 바쳐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못 배기는 사람들이 되어,
더욱더 충만한 은총을 받도록 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 할 때 기억들이 가끔 떠올라 혼자 웃곤 합니다.
강의나 회의 참석차 출타를 할 때는, 이런저런 과제물이나 작업을 한 보따리씩 안겨주고 떠납니다.
“나 없는 동안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게으름 피우지 말고, 완벽하게 마무리해놓아야 한다.”
우렁찬 목소리로 “네!”라고 외치는 형제들의 얼굴은 벌써 제 부재로 인한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이박삼일 출장을 끝내고 돌아오는 날은 일부로 귀가 시간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불시에 돌아오면 형제들의 모습이 천태만상입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늘어지게 자고있는 형제,
식사 시간도 아닌데 뭔가를 만들어 신나게 먹고 있는 형제, 행방이 묘연한 형제...
심기가 불편해진 저는 ‘니들이 그러고도 인간이냐?’며 불벼락을 내립니다.
그런데 어떤 형제는 자습실에 앉아 열심히 과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는 경당에 앉아 깊은 기도에 심취해 있습니다.
마음이 흐뭇해진 저는 크게 칭찬하며,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깨어 있는 우리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도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4장 42~44절)
미국판 법정 스님 정도 되는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명언(名言)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들 역시 깨어 있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황량하고 깊은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어두운 동굴 깊숙이 들어가 기도와 노동에 전념했습니다.
홀로 고독 속에 단식하며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했습니다.
시메온 교부 같은 경우 언제나 깨어 있기 위해 37년 세월 동안 높은 기둥 위에서 기도했습니다.
수도회 입회 후 평생토록, 환한 얼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40년간 주방장 소임을 다한 가르멜 수도회 소속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역시
언제나 깨어 있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영성생활은 지극히 단순명료했습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늘 깨어 있을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거룩하게 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늘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이 일 가운데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하셨던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저것 부탁하는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저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처럼 깊은 고요 속에 하느님을 모십니다.”
나의 죽음 - 세상의 종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 마태오복음 23장을 통하여
예수께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내뱉은 신랄한 비난과
7번의 불행선언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마태오는 23장을 마무리하면서 유대교 신앙의 상징인 聖都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유대교의 총체적인 멸망을 예고하였다.(23,34-39)
이는 곧 이스라엘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마태오는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테마를 근거로 인류역사의 종말을 제고한다.
인류역사의 종말은 마태오가 엮은
예수님의 종말 설교(24-25장) 안에서 논리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산상설교(5-7장), 파견 설교(10장),
비유 설교(13장), 공동체 설교(18장)에 이어
마지막으로 종말 설교(24-25장)를 논리적으로 엮었다.
마태오의 종말 설교는 대략,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르코복음 13장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나, 한층 포괄적이고 조직적이다.
마태오의 종말 설교는 크게 7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①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고(24,1-3)
② 종말 예고의 전조들 / 재난의 시작(24,2-14)
③ 종말 직전의 전조들 / 가장 큰 재난 발생(24,15-28)
④ 종말 사건들 / 인자의 내림(24,29-31)
⑤ 무화과 나무의 비유(24,32-35)
⑥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한 말씀(24,36-44)
⑦ 종말에 관한 비유 4편(24,45-25,46)이다.
종말에 관한 4편의 비유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0,
열 처녀의 비유(25,1-13), 달란트의 비유(25,14-30) 그리고 최후 심판의 비유(25,31-46)이다.
이 마지막 최후 심판의 비유로서 사실상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앞둔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은 끝난다.
오늘 복음은 종말 설교의 ⑥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한 말씀의 마지막 단락(24,42-44)과
⑦ 종말에 관한 비유 4편의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에 해당하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를 매끄럽게 연결시켜 들려준다.
종말에 관한 비유들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을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4절)는 첫 단락의 말씀이
종말에 관한 비유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종말에 관한 비유들의 특징과 요구사항은 종말을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예수께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종말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24,36)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들이닥칠 수도 있고, 시간을 두고 더디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다림의 마음은 초조하기 마련이다.
곧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의 종말과 인자의 재림이 늦어지면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해볼 만하다.
이와 같이 ‘재림지체현상’은 종말의 시기와 모양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말설교에 담겨있는 4편의 종말 비유를 묵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이 오리라고 생각했던 시점에서 2,0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언제 종말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인간이 삶을 다하고 죽는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든 필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아 있도록 허락하신 기간 동안에는
누구든 삶에 애착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동시에 권리도 있다.
그러나 삶이 곧 죽음의 준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모든 것을 마감한다면 그 준비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 준비가 헛되지 않도록 분명히 다시 오실 주님께서 점검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을 준비시킬 책임을 맡은 종의 임무가 한층 돋보이는 것이다.
책임이 크면 압박감도 크지만, 그에 대한 즐거움과 보람도 크기 마련이다.
행복하여라, 마지막 날을 향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잘 준비시키는 데
밤낮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여...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인 도미니카 수녀
알파요 오메가이신 주님께서
"깨어있으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과의 상복의 준비는
충실하고 슬기롭게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
평범한 일상의 시간들이
영원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명심하여
현재의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복된 당신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출처] 마태 24,42-51 연중 제21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