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이전의 역사
기원전 7세기 왕정이 시작되었지만 곧 집정관에 의해 주도되는 귀족정으로 변모했고 드라콘 시기에 최초의 성문법이 시작되었으며 솔론 때 잠시 금권정으로 돌아가다가 6세기 말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참주정으로 운영되고 그의 아들인 히피아스까지 이어지지만 히피아스를 끝으로 참주정이 끝납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508년에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정치개혁이 이루어져 부족 기반 행정을 도입하고 500인회, 민회 등의 정치기구와 그 유명한 도편추방제를 실시합니다. 이후 테미스토클레스 주도로 아테네 해군이 건설됩니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며 해군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해군을 운용하는데 있어 노잡이들의 중핵을 이루는 무산자 계급의 목소리가 높아져 이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반영되어 탄생한 것이 아테네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탄생
이러한 목소리를 배경으로 에피알테스가 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하여 기존 삼권을 모두 가지고 있던 아레이오스 파고스(귀족회의)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500인회, 민회, 시민법정에 나누어주었고 아크로폴리스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성문법을 거리에 공개해 누구나 법률을 알 수 있게 하였으며 에피알테스가 죽은 뒤에는 페리클레스가 집권하여 모든 공직자에게 보수 지급(정치인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정치하는 만큼 보수가 있어야 빈부에 관계없이 정치할 수 있고 부정부패도 줄어듭니다.), 재산을 통한 정치참여 제한 폐지, 전 시민들에게 피선거권 지급(이전까지 아테네인들은 귀족 등 핵심계층이 아니면 스트라테고스나 아르콘 같은 고위직이 될 수 없었습니다.)이라는 개혁을 단행하여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탄생합니다.
구조
정치구조는 3명의 아르콘과 10명의 스트라테고스(행정)와 500인회(행정+입법)와 에클레시아(=민회, 입법), 600인의 배심원으로 이루어진 시민법정(법원)과 300인 아레이오스 파고스(귀족 중심 정치체제로 민주주의 이후 살인사건 등 몇가지 사안의 재판의 권한 외엔 유명무실) 등으로 구성되었고 성문법을 통한 법치체제를 갖추었으며 참주(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10년간 아테네로 추방하는 도편추방제가 시행되었습니다.
계급으로는 귀족, 평민, 노예가 있었고 또 재산에 따라서 펜타코시오메딤노이, 힙파다텔루테스, 제우기타이, 테테스가 있었고 이중 테테스는 무산자 계급(재산보유가 200메딤노스 이하)으로 그 수가 가장 많았기에 아테네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지지기반
시작부터가 무산자에게도 정치권력을 주자는 의도였으니(이 당시 그리스권에서 시민이란 스스로 무장하여 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설 수 있는 남성이고 무장을 잘 갖출수록 높은 계층이니 반대로 재산이 없어 무장할 수 없는 남성은 권력이 없을 수 밖에... 의외지만 초창기 근대 민주주의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었기에 처음으로 투표권을 가진 이들은 부유한 성인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무산계급이 민주주의를 지지했으며 또한 무산자 출신이 많은 해군 역시도 민주주의를 지지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가 스파르타가 속국화되자 이에 반발한 것도 해군입니다. 그 외에 대중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웅변가, 시인, 교사, 정치가 등도 민주주의의 지지자들이었습니다.(이런 구조르 잘 보여주는게 크세노폰의 말로 크세노폰 曰: "감히 말하건대 빈자와 평민이 명문거족을 눌러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함선들을 추진시키고 도시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평민이 아니던가?")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자들
무산자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한 것과는 달리 귀족, 엘리트, 부자 등은 반대로 민주주의와 해군을 싫어했습니다. 민주주의 하에서는 '귀하고 부유하여 남들과는 다르신' 자신들과 '땡전 한푼 없는 거지'도 동등한 정치권력을 가지는 것이니 이를 받아들이기 싫어했고 해군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누진세를 통해 이들의 돈에서 마련되었으며 무산층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기에(빈민층이나 소작농 등은 일거리가 없으면 해군의 노잡이가 되었고 아테네가 잘 나갈 때 해군의 규모는 200척 규모였으며 함선 한척에 동원되는 노잡이가 엄청났으며 툭하면 전쟁이 일어나기에 일거리야 충분했습니다.) 해군도 싫어했습니다.(물론 그 해군이 민주주의를 강력히 지지한 것도 있겠지만)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지향하였고 따라서 귀족, 부자, 엘리트의 정치권한을 일반 평민과 똑같이 주었을 뿐 박탈하지는 않았기에 그들은 공개적으로 열심히 반민주주의 활동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란 결국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것으로 귀결되었기에 대중들에게 그다지 반향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기회가 되면 아테네 민주정을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게 펠레폰네소스 전쟁인데 전쟁기동안 반민주주의자들은 아테네가 전쟁에서 지게 만들기 위해 스파르타나 페르시아 같은 외세와의 영합 역시 마다하지 않아 시칠리아 원정 이후 아테네의 패색이 보이자 부유층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실패하기도 했고(이 때 쿠데타 세력을 엎어버린게 아테네 해군과 민주주의자들)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으로 아테네 해군이 괴멸된 이후에 스파르타에 의해 세워진 과두정의 일원들도 친스파르타 성향에 부유층, 귀족, 반민주주의자들이었습니다.(이들도 결국 민주주의자들의 저항으로 전복) 그러다가 헬레니즘 시대에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아테네는 마케도니아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는데 이 때도 대다수 시민들은 지지했지만 부유층은 반대했으며 결국 아모르고스 해전에서 지휘관인 에우에티온이 함장들과 함께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병크를 터뜨리고 크란논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시도는 실패하고 마케도니아는 아테네를 상대로 부유층을 제외한 모든 시민을 추방시킵니다.
이들의 성향은 투키디데스나 플라톤 등의 반민주주의 성향의 역사가, 철학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의도적으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자들을 폄하하고 자신들과 같은 반민주주의자들, 스파르타를 띄워주는데 예시로 투키디데스는 민주파 지도자인 클레온을 비난하고 니키아스를 찬양했지만 실은 클레온은 스파르타를 평화협상으로 이끌어냈을 정도의 명장이었지만 니키아스는 아테네를 패전으로 이끈 시칠리아 원정을 기획한 인물이었으며 소크라테스의 처형의 경우 플라톤은 이것을 두고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비난했지만 사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인 알키비아데스는 연속 삽질로 아테네를 패망으로 이끌었고 역시 그의 제자이자 플라톤의 친족인 크리티아스(친족이라 그런지 플라톤은 이 사람을 옹호했습니다.)는 스파르타 주도로 세워진 과두정에서 폭정을 저질러서 아테네로서도 좌시하기 힘들었고 그마저도 아테네에서는 처음에는 처형을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소크라테스가 재판장에서 배심원들을 도발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애초에 그 플라톤도 아테네에서 자유를 보장해주니까 열심히 반민주주의 주장을 이어갈 수 있던 것이고요. 그리고 이런 이들이 아테네식 민주정의 대안으로 생각한 스파르타식 정치체제는 체제 자체는 문제가 없다 쳐도 그걸 실행하는 국가에 문제가 많아 플라톤 생전에 이미 쇠락하였습니다.
어두운 면
일단 아테네는 모든 시민이 직접 정치하는 시스템으로서 개개인의 기회는 극단적으로 보장하는 반면 개개인의 능력은 거의 배제한 정치를 행했기에 일부 고위 관직을 제외하고는 추첨으로 돌렸고 이렇다 보니 전반적인 정치운영이 능력껏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고 한편으로는 이렇다 보니 극단적으론 정치능력은 없는데 선동 능력만 탁월하여 정치인이 되는 중우정치가 만연하기 쉬웠으며 당시 아테네 개념으로는 중우정치가 없는 것도 문제점이었습니다.(쉽게 말해 무능력자가 정치해도 당연한 권리) 이러다 보니 아테네 민주주의의 황금기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정작 그 자신은 탁월한 정치능력과 포퓰리즘으로 30년씩이나 집권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아테네는 종종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쉬웠고 대표적으로 멜로스를 침공한 일이나 아르기누사이 해전 이후 승리한 지휘관들을 오히려 전사자들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 못했다는 이유로(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권은 각 폴리스는 많아도 수십만 정도의 작은 사회였으니 그럴만한 이유는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휘관을 처형한건 순전히 그에 따른 분노지 제대로 된 판단으로 내린게 아니었습니다.) 처형하는 병크를 터뜨리기도 했습니다.(이 때문에 아테네는 고급 지휘관들을 잃었고 결국 패전으로 이어집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 동안 보여준 아테네의 호전성과 우왕좌왕하는 행보도 시민들의 잘못된 판단에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아테네의 몰락 후의 공화정 국가들은 대게 스파르타식의 정치체제를 갖추어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요소를 모두 혼합한 체제를 갖추어 예를 들어 로마는 집정관이 왕정적 요소가, 원로원이 귀족정적 요소가 민회는 민주정적 요소가 있는 체제였고 현대 민주주의의 체제도 아테네의 그것은 다수결이라는 원칙 뿐이고 시스템 자체는 스파르타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왕과 집정관/행정부-국가원수를 제외하면 내각은 국가원수 혹은 의회가 '임명'하므로 왕정과 비슷, 민회/입법부-국민이 직접 선출하기에 민주정과 비슷, 원로원/사법부-'그들만의 리그'로 선출되므로 귀족정과 비슷) 물론 현대민주주의 국가들은 도저히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규모가 거대하지만 결국 능력이 배제된다는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한계도 한몫을 할 것입니다.(예시를 들어 북핵도발이 있을 때마다 현대 민주주의는 그래도 냉철한 판단력 하에서 상식적인 대처가 이루어지겠지만 아테네식 민주주의로는 여론에 휩쓸려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쇠퇴와 몰락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페리클레스의 치세에서 황금기를 누렸지만 페리클레스 사후 서서히 중우정치화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여 한차례 위기를 겪지만 다시 부활합니다. 물론 이전만하지는 않았어도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그래도 어느정도 유지되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합니다.
유산과 교훈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이후 오랫동안 잊혀졌습니다. 유럽에서 공화국들이 여러차례 등장하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귀족 등 유력가문 주도의 귀족 공화정이었지 만인이 정치참여가 가능한 체제가 아니었기에 아테네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잊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테네 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의 시조이긴 하니 현대 민주주의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유산이라 할만하지만 다만 다른 점이라면 다수결과 권력견제만이 원칙이었던 아테네와는 달리 현대 민주주의는 권력분립이 좀 더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이를 보장하는 헌법, 간접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 효율을 높이고(인구가 많아졌으니 직접 민주주의가 힘들 수 밖에...) 좀 더 전문적인 이들이 자리에 앉아 능률도 높였다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