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정리하는 김에 집의 설합도 정리하다가.
표지가 떨어져 너덜너덜한 국민학교, 요즈음은 초등학교이지만, 앨범을 찾았다.
스캔이라도 해 두지 않으면 삭아 버릴 것같아.
그때는 학기가 4월부터 시작이라 단기 4293년(서기 1960년) 3월에 졸업하였다.
내가 다닌 학교는 대구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달성국교 37회 출신이다.
그 시절이 어떠하였는가?
내가 54년 입학하였을 때 아버지는 공군군의관으로 부산에서 근무 중이었고
내가 살았던 곳은 대구의 변두리인 침산의 야간진료로 쓰는 가게에 딸린 단칸방이었다.
사실 시내 인교동에 우리 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으로.
포장이 안된 신작로를 따라 어린 걸음에 거의 한시간을 걸어가면 학교가 나온다.
들판을 가로 질러 가는 길의 중간에는 커다란 분뇨수거장이 있어
여기서 애가 빠져 죽기도 하였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돌았고.
그 반대편으로는 벌마, 아마도 벌마을이란 뜻, 과
관중 스탠드가 높다란 경마장이 있었다.
언젠가 가을, 아버지가 Agfa camera로 란도셋매고 학교가는 나를 찍어주어서
햇볕에 눈을 찌푸린 사진과 갓 서른이 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를 배추밭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지금 그 사진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 시절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것들로는 군내나는 안남미의 배급,
일본의 조미료, 아지노 모도가 들어와서 뱀가루라며 사람들이 쑤군대고,
조선배추보다 훨씬 모양이 좋은 개량종 배추 학사이,
동네로 군용트럭이 들어오면 바퀴가 여섯개 달린 육발이, 열개 달린 십발이,
유행하던 노래로는 전쟁끝이라 '아내의길' 로 '임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이었다.
3학년때쯤에는 새로 마당 넓은 집을 짓고
아버지도 대구의 공군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겨 왔다가
제대를 하시고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유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었다.
줄장미가 올라간 담장, 일단 담 안으로 들어와 현관을 통하는 지은 병원 건물은
몇년전 일본에 갔을 때 우리집과 비슷한 병원을 보고
아하! 아버지가 저런 건물을 모델로 하였구나?
그 집에서는 닭, 거위, 토끼, 새 등 여러 가지 짐승들도 키우고
2백평이 넘는 넓은 터에 만든 꽃밭과 온실,
초겨울에는 움집을 파고 겨울에 먹을 채소를 갈무리하였다.
내가 다닌 유서깊은 달성국민학교는 육군정보학교에 차출되어
(형이 다닌 수창국교는 육군 헌병학교에 차출되었었고)
우리 학생들은 가교사에서 공부, 여름철이면 함석지붕아래 저글저글 끓고,
겨울이면 추워 손이 곱아 글도 못쓸 지경이었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지붕을 때리는 그 소리에 책읽는 소리가 파묻혀 버렸다.
그 후 거머리가 들끓는 미나리강을 지나 5관구 사령부 옆으로 걸어 올라가는 분교장,
여기는 철길 옆이라 디젤 기관차가 처음으로 개통되어 기관차 앞을 태극기와 성조기를 꽂고 운행하는 걸 보기도 하였고
소련에서 스프트니크 위성 발사가 큰 뉴스이었다.
그 후는 학교를 짓느라 임시 천막교사에서 3부제 수업,
우리는 그래도 염색공장하는 동기의 창고에서
한 여름을 시원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으나 비라도 내리치면 한쪽으로 비를 피해야 하였다.
전교생들이 같이 치루는 일제고사는 화판을 들고 종합운동장에서 보았었다.
운동장 옆에는 미군부대가 있어 애들이 가져 온 흘러나온 콘돔을 불어 만든 풍선,
보아도 영문모르는 포르노 사진을 돌려보다가 선생님한테 뺏기고
심지어는 밀짚모자 테두리도 자세히 살펴보면 8 밀리 포르노 필름도 있어
낄낄 대기도 했었다.
이때 나온 노래는 '양깔보 똥깔보, 어디를 가느냐?
뺏딱구두 신고서 어디로 가느냐?'
6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담한 2층 독립된 건물로 우리 학년인 10반 모두가 들어가서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왼쪽 사진의 뒤줄에서 왼쪽으로 두번째가 나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졸업여행 사진이 보이질 않는다.
1959년 9월 추석날 아침,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한 태풍 사라호가 불었다.
우리가족들은 제사를 지내러 택시를 타고, 아니 그때는 하아야 라고 했지.
경산 반야월 큰집 과수원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태풍에 거의 수평으로 떨어지는 사과들을 보았고
국도는 가로수가 넘어져 차들이 다녀지 못하여 반야월 역까지 걸어 왔었다.
이렇다보니 졸업여행도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여행이라해도 겨우 경주에 1박 2일 코스이었지만.
해가 바뀌어 60년 초 대구의 2.28학생운동,
3.11 마산 김주열 시신이 항구에 떠오르고,
3.15 부정선거로 뒤숭숭한 정국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만나는 국민학교 동창 친구들이 적지 않다.
그 중 국민학교 졸업이 최종학벌인 한 친구는 졸업 후 공장에서 일하다
서울까지 십여일만에 걸어와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노량진 수산시장.
그곳에서 뼈빠지게 노력을 하여 지금은 가게와 아파트 등이 있고
으젓한 생활을 하며 얼마전에는 나의 정년을 기념하여 찾아와서
점심을 한 턱 사고 갔다.
낡아버린 앨범을 보며 떠 오르는 생각들이다.
첫댓글 우리가 국민학교 졸업은 1960 년, 조국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학을 들어가니 옆에는 자기 아버지가 경무대에 들어가 권총 차고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는 유일한 사람이라던 시경국장인 정모 씨의 아들이 있었고 올빼미 표 피아노 표 등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을 돕던 모모 인물들을 아버지로 두었던 친구들이 많았는데 곧 불어닥친 4.19 로 추풍낙엽...다음 해는 5,16 등등으로 영문도 모르고 학교에 나오질 말라나까 무조건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학교 교정 한구석에는 4,19 당시 희생된 선배학생들의 위령비가 서 있었다.
정말 풍운의 시절이었다.
우리 시골 국민학교만 돌깔고 앉아서 공부했나 했는데, 대구도 사정은 비슷했네요.... 워낙 못살던 시절이니까....., 소중한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산님이 워낙 똑똑해서 국민학교는 안다녔을줄 알았는데.. 대구 달성국민학교면 거, 뭐야 자갈마당인가 뭔가 하는데서 별루 멀지 않은 곳으로 생각되는데, 흠, 어려서부터 거기 보고 자란게 그런거였군요...ㅋㅋ 나이들어서도 항상 다리는 조심해야한다고 그러데요, 남들이,, 근데 그 국민학교에서는 교장, 교감만 선생님이구 담임은 그냥 선생이네요.
척박한시절에도 저런 교육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6 학년 담임선생님도 훌륭한 교육자이셨기에 나의 오늘도 가능하다. 저분들의 자손들이나마 유복하게 살기를 기도한다.
일학년 여선생, 아마도 2년제 교육대학 나오고 갓 담임을 맡았으니 나보다 13, 4년 위의 나이인듯한데.
80년대 초 스승찾기 프로그램에 넣어 열심히 찾았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 나이 30대 중반이었으니 겨우 쉰 넘었을 나이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