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회사의 84%가 가족기업…수십년 미래 안목으로 경영 전문경영인 영입해 순혈주의 단점 막아
독일 소도시 슈타인에 위치한 필기구 제조 회사 파버카스텔. 지금은 회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파버카스텔 성 옆 생산공장에 들어서자 연필 수백만 자루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기계에 드나들고 있다. 캐주얼 복장의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회장이 연필 검수작업 중인 생산직 근로자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부인이나 아이들의 안부를 챙기기도 하고, 최근 제품 품질에 대해 묻기도 한다.
파버카스텔은 1761년부터 252년간 8대째 연필을 만들고 있는 독일의 대표적인 가족기업이다. 수백년 동안 교황과 빈센트 반고흐(화가), 귄터 그라스(작가), 칼 라거펠트(디자이너) 등이 파버카스텔 가문이 만든 연필에 극찬을 보내왔다. 세계 최초로 6각기둥 모양 연필을 만들기도 했다. 하루 생산하는 연필량 50만 자루, 연매출 20억 유로에 이른다. 파버카스텔 회장은 “가족이 기업을 경영해왔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독일 슈타인에 위치한 파버카스텔 생산공장에서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회장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파버카스텔 제공
독일 전체 회사의 84%가 가족기업…순혈고집하지 않아
독일중소기업연구원(Ifm Bonn)에 따르면 독일 전체 기업 중 84%는 가족기업으로 분류된다. 가족들이 회사 지분을 소유하며, 경영권이 상속되는 등의 기업을 통칭한다. 독일 전체 일자리의 2/3, 국내총생산(GDP)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가족기업이라도 첫째 자녀가 기업 경영권을 이어받는 경우는 10%에 불과하다. 가족 구성원 중 CEO에 적합한 인물이나 외부 전문 경영자를 영입하기 때문이다. 독일 기업의 60% 가량이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영입하고 있지만, 영·미·프 등 여타 국가는 23~31%에 불과하다.
파버카스텔의 경우 회사 지분의 98%를 현 파버카스텔 회장이 보유하고 있다. 파버카스텔 측은 “10남매 중 여섯째였던 현 회장이 경영권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때, 다른 가족들이 보유한 지분까지 모두 물려받는 걸 조건으로 내세웠다”고 말했다.
독일 하노버에 위치한 세계적인 음향설비 제조사 젠하이저는 3대째 대물림된 가족 기업이다. 연매출은 5억3140만유로. 젠하이저 기업고객담당 이사 바르텔사씨는 “가족끼리 협약을 통해 주식은 가족끼리만 경영해 경영권을 보호한다”며 “대신 순혈주의에서 비롯된 단점을 막기 위해 전문경영인을 영입하고, 젠하이저 가문 식구라도 이사진이 되려면 다른 회사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와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젠하이저사 이사진 7명 중 창립자 가문 출신은 2명에 불과하다.
가족기업 젠하이저의 기업고객담당 전문경영인 이사 바르텔사씨./양모듬 기자
독일 디칭엔에 위치한 설비도구 제작 트룸프사는 설비도구를 만들어 연매출 23억 유로(2012년도 기준)를 올리는 기업이다. 전 회장 라이빙어씨의 사위이자 이사인 캄뮬러씨는 “라이빙어 전 회장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트룸프 가족이 아니었다”며 “라이빙어 전 회장이 입사한 뒤 낸 특허들이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당시 트룸프 회장이 지분 일부를 넘겼다”고 말했다.
“내 돈으로는 즐겁게, 긴 안목으로 경영한다”
독일 바르크테하이데에 위치한 가족기업 플렉시사(社)는 전세계 자동개줄 시장에서 70%를 점유 중이다. 회사 창립자 보그단씨는 1972년 회사를 창설한 이후 40여년간 자동개줄만을 개발해 연매출 5000만유로(약 720억원) 규모의 회사를 일궜다. 보그단씨는 “창립 당시 2만마르크(당시 약 246만원)를 빌린 이후 단 한번도 돈을 빌린 적이 없다”며 “비록 천천히 성장하더라도 내 돈으로 즐겁게 장기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독일 뮌헨에 위치한 3D스캐너 생산 가족기업 에오스의 홍보 담당 옌센씨는 “가족기업 주주들은 자신들과 회사를 일치시켜 생각한다”며 “회사가 이익을 보더라도 배당금 대부분을 다시 회사에 재투자한다”고 말했다.
파버카스텔과 젠하이저 등은 “주주들의 눈치를 보며 단기 이익에 신경쓸 필요없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차근차근 경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1980년대 파버카스텔의 경우 파버카스텔 회장의 진두지휘하에 브라질에 숲 1만㏊를 사들였다. 20년간 이 곳에서 나무를 키워 연필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파버카스텔 언론 총 책임자 주파씨는 “현재 해당 숲에서 파버카스텔 생산량의 90%를 충당할 수 있다”며 “가족기업이 아니었으면 수십년을 내다보는 장기투자를 감히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슈타인에 위치한 파버카스텔 본사. 뒤쪽에 보이는 성은 파버카스텔 가족이 거주하던 곳으로, 지금은 회사 박물관 및 직원 복지시설로 사용되고 있다./양모듬 기자
젠하이저의 경우 1990년대 초반부터 디지털 고주파수 마이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바르텔사씨는 “기술적으로 개발이 어려운 제품이라 연구개발팀에서 난색을 표했지만, 당시 2대 회장이 5000만 유로를 들여 뚝심있게 밀어붙였다”며 “20년동안 개발한 끝에 지난해 출시하자마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등에서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젠하이저의 경우 창립자인 프리츠 젠하이저 박사의 “비록 천천히 성장하더라도 남의 돈을 차입하지 말라”는 유훈을 지키고 있다.
가족적인 회사 분위기…3대 이어 일하는 근로자도 많아
독일 앙겔라 메르켈 수상으로부터 “독일 미텔슈테트(중소기업)의 전형”이라고 칭한 라이빙어 트룸프 전 회장은 회사가 위기에 처한 1990년대 말 근로자들에게 고용보장을 약속했다. 당시 콜 총리가 “경제가 어려우니 동독 지역 근로자들을 정리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라이빙어 전 회장은 “회사 직원들은 가족과 다름없을 뿐더러 경제 위기가 완화되면 다시 숙련노동자가 필요하다”며 맞섰다.
젠하이저 역시 지난 미국발 금융위기 당시 경영진의 정리해고 건의를 젠하이저 가문이 반대해 무산됐다. “해고는 감정적으로 힘들뿐더러, 후에 회사가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플렉시사는 매월 300여명의 직원들과 파티를 연다. 매년 모든 임직원 자녀들을 초대해 놀이공원 소풍을 가기도 한다. CEO 보그단씨는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어야 직원들이 근무하는 데 능률이 오른다”고 말했다.
파버카스텔 측은 “독일의 근로자들이 한 기업에서 근무하는 평균기간이 10년”이라며 “파버카스텔의 경우 평균 근속기간이 14년으로, 일부는 3대가 이어 입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