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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 예레 20,7-9
제2독서 : 로마 12,1-2
복 음 : 마태 16,21-27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공하면 행복해질까요? 대부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꿈이 이룰 수만 있다면, 나는 행복할 텐데….’,
‘이 목표에 달성하면 행복할 텐데….’, ‘로또 1등에 당첨되면 행복할 텐데….’
반면, 큰 실패를 겪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꿈은 이제 끝났어. 모든 걸 망쳤어. 목표에 이르지 못했으니 나는 불행해질 거야.’
하지만 성공해야 행복해진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실제로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은
얼마 뒤에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는 결과만을 봐도 그렇습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행복도 얼마 뒤에 다시 예전과 같아집니다.
그렇다면 성공과 행복은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공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않을 뿐, 대신 행복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어줍니다.
행복 수준이 오르면 더 친절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또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 효과를 주변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이런 사람이 좋을까요? 싫을까요? 당연히 좋습니다. 또 함께하고 싶을 것입니다.
감정이 전달된다는 말도 있듯이, 행복한 사람의 곁에는 그 사람의 행복이 전달되기에
행복한 사람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좋고, 더 건강하고, 더 윤리적인 세상을 함께 만들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이가 성공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바라보고 행복을 살아야 하는데, 성공만을 바라보니 힘든 시간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우는 사람을 향해 일침을 날리시면서,
하늘 나라의 진리를 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나는 과연 행복을 보는가? 아니면 성공만을 바라보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나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은 하느님께 있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영광의 시간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극도로 화를 내십니다.
예수님 신원에 대해 정확한 답을 이야기했다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셨는데,
그 베드로에게 ‘사탄’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세상의 성공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함께 사는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또 하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성공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 나는 젊었을 때 10번 시도하면 9번 실패했다. 그래서 10번씩 시도했다(조지 버나드 쇼).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사랑 안에 항구하게 머물러있기를 희망합니다.
성 요한 비안네에 의하면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주님 사랑의 표징이지만
막상 짊어지려고 하면 힘이 들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가운데 감당할 힘을 주시길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당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시면서 인생길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요한16,28).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한마디로 겸손의 길이요, 죽기까지 순명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25).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 먼저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릇은 비어있어야만 무엇을 담을 수 있습니다”(노자).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비어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나의 취향과 성격대로, 나의 계획을 내 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은 ‘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버리라는 말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지 말고,
더 크고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자기 왕국을 만들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자기 안에 건설하라는 요청입니다.
바오로 사도 기억하시죠?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8-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3,20).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으로 만족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번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결국 자기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동안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희생과 아픔이 동반합니다. 그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로마12,2)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는 구체적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참으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 속죄 제물이 되셨듯이
우리도 죄의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1,18).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그 속을 보면 다 십자가를 안고 살아갑니다.
근심, 걱정,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그
러나 참고 순종하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져줄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허락하시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간 기꺼이 짊어지고 갈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새 생명에 이르는 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내 뜻, 내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을 갈라놓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에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4-17). 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한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1-62).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자신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세상일에 미련을 버리는 일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포기하는 일이
곧 십자가를 통한 영광을 차지하는 길임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1독서의 말씀처럼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위안을 얻은 예레미야’처럼 여러분도 말씀을 통해 위로받기를 빕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2).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은 다 잃어도 ‘목숨’을 얻은 것이고
그리스도를 잃은 사람은 다 얻어도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날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마태16,27) 갚아줄 보상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교훈,
살아있는 책’(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며 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분은 이 세상의 원리라는 유혹에 빠진 것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논리, 예수님의 논리는 세상과는 반대로 겸손과 무상성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실패 안에서 사랑을 봅니다.
완전하고 굳건하게 남은 사랑, 그리고 거절하지 않고
인류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음으로써 완성되고 드러난 사랑 말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져주신 사랑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운전하면서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려면 스마트 폰을 자동차의 USB 단자에 연결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자동차의 스크린에 스마트 폰의 스크린이 옮겨집니다.
마치 스마트 폰의 내용들이 자동차의 힘에 의해서 조정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USB 단자에 연결된 케이블을 뽑으면 스마트 폰은 다시금 제 자리를 찾습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카톡’도 그렇습니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던 카톡을 숙소에서 사용하게 되면 사무실의 카톡은 정지가 됩니다.
카톡을 설치할 수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카톡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래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최면치료’에서도 보았습니다.
최면 상태에 들어가면 마치 영혼이 최면을 건 사람에 의해서 조정되는 것 같았습니다.
최면을 건 사람이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우는 것을 봅니다.
평소에 잊고 있던 일들,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간직했던 기억들이 최면에 의해서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담자는 과거의 상처를 치료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마음이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중국 무협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뜻은 이렇습니다.
“운기조식이나 영약을 섭취하고 기운을 갈무리할 때 외부에서 충격을 받거나,
심마 같은 마음에 큰 동요가 있을 때, 혹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과하게 영약을 복용했을 때
몸 안에 도는 기를 통제하지 못하여 내공이 역류하거나 폭주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쉽게 설명하면 마가 내 몸을 치고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본인은 대부분 그 상태를 잘 모르고 있으나 차츰 평소의 내 의지와는 다른 행동이나
몸의 변화가 오게 되는데 대게 건강이 악화되고 정신적인 장애가 생기며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성서에서 주화입마의 대표적인 상황은 ‘마귀’에 들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라는 마귀들을 쫓아버렸습니다.
마귀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을 알아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귀에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버리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에게 조정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율법을 잘 안다고 하지만 무엇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지,
무엇이 마귀로부터 오는지 식별하지 못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던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던 일곱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일곱 마귀는 ‘칠죄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칠죄종에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음욕’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반석이다. 내가 너를 통하여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
우쭐해있던 베드로 사도는 ‘교만’의 마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교만에 빠져있던 베드로 사도는 감히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사제복이 우리를 마귀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마귀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직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의 삶의 현실에는 갖가지 어려움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코로나 19 감염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 죽음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결코 그것들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어찌할 수 없는 불편함과 어려움,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무능과 약함과 한계를 깨우쳐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일’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아는 기원전 6백년 전후, 유다왕조가 이집트와 연합하여
바빌론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오히려 “유다는 망해야 한다. 바빌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던 예언자입니다.
이는 유다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반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과 사제, 거짓 예언자들과 관리들이 일어나 예레미아를 잡아 가두고 폭행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미움을 당하고, 고통당하고, 폭행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극한적인 고통 속에서 원망조로 이렇게 읊조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8)
그러나 모두에게 저버림을 받아도, 자신이 반역자로 취급될지라도,
결국 외쳐야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존재의 근거요 힘이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을 수락하는 삶, 그 안에 구원이 있음을 본 까닭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본 까닭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믿음이 구체적으로는 봉헌이란 형태로 드러납니다.
곧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곧 일상의 크고 작은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거룩한 산 제물”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의 메시아적 행위, 곧 구원의 행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곧 당신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충격적인 말씀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21절)는 예고 말씀으로, 승리자와 통치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던 메시아가
수난을 받아 패배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요,
둘째(22-23절)는 베드로와의 대화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예고요,
셋째(24-28절)는 고난 동참 요구와 상급 약속으로,
메시아를 따르는 자에게는 능력과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에의 동참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 하며,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양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우리를 질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보다 피하려 합니다.
마치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에는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아야 하고,
되고자 하는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고, 나아가서 하느님께 희망하는 것마저 기꺼이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마태 16,22) 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하고 있을 때,
혹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노고를 피하고 있을 때,
또는 그가 나에게 잘해주는지를 따지고 있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힘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에 동참하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게 하소서!
제 삶이 산 제물로 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마태 16,21)
주님!
길을 인도하시는 당신을 따라 걷게 하소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따라 걷게 하소서.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어도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보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끌어안게 하시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자기 자신을 끊어버려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지난 주일과 오늘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베드로의 모습에서 지난 주일에는 메시아로 고백한 바위 같은 신앙과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반대되는 걸림돌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항상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십자가 위의 죽음이란 체험은 모든 신앙인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오늘 전례에 나타나는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소명을 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무나 강하신 분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불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오늘 복음은 곧 다가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와
그에 대한 베드로의 민감한 반응(마태 16,21-23)과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당신을 따라야 할 제자들의 의무에 대해 말씀하신다(24-27절).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십자가와는 무관한 영광과 권세로 가득 찬 현세적 메시아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세의 인간적 체계에 꿰맞추어 나름대로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신앙을 상실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 신앙은 더는 하느님의 생각에 따르지 않고 인간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 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당하실 모든 것을 운명이나 숙명으로 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뜻으로 인식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1절).
하느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미래의 영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당할 어려움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에서 떼어놓으려 했던 베드로가
이제 스승을 따라 그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면
베드로에게는 더더욱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으로만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기까지
스승을 따름으로써 교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지만,
이제는 또한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수난당하는 종으로서도 고백해야 한다.
이 고백은 자신 역시 스승의 고통스러운 운명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죽음의 운명이 지워진 메시아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아직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베드로에게는 참으로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하신다.
예수님의 권고 내용은 관심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이웃에게 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 밖에 관심을 두셨고,
당신을 잃으셨으며,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셨고(필립 2,7-8) 당신을 내던져 이웃들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셨지만,
부활 영광의 생명으로 당신 자신을 되찾으셨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고 우리를 잃어버림으로써
그리스도와 이웃의 선익을 구함(필립 2,21)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십자가란 이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진 신앙과 인간적인 욕구로 인한 갈등을 언제나 체험한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갈등하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이 하느님의 뜻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갔듯이, 그리고 주님께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바치신 것처럼,
모든 갈등을 이겨내고 자신을 이기고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올바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다.
사도 바오로도 십자가 위의 죽음의 체험에 덧붙여 말하고 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자신을 이기면서 바치는 영적 예배가 진정한 희생제물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는 아픔을 요구한다.
형제들에 대한 충실한 사랑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행위가 진정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삶의 형태로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매순간 규칙적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매순간 규칙적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으로 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심한 질책을 받는 모습,
정말이지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탄이라는 표현은 웬만해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머리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은, 그래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표현이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선발하신 제자 중의 우두머리 베드로 사도에게
너의 지금 생각과 행동이 사탄 같다고 다그치시니
베드로 사도가 당시 받은 충격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그토록 혹독한 질책을 당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걸으셔야만 하는 수난과 죽음, 십자가 길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단 한 가지 길, 십자가 길뿐이었는데,
베드로 사도가 그 길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니 예수님 입장에서는 강력한 철퇴밖에 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탄 소리를 들은 이유는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사람들은 환대하고 먹이고 재우고 교육시키느라 정신없이 보내지만,
하느님을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는지?
그분 앞에 앉아 그분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가장 가까운 동료 인간 존재 안에 하느님이 계시니,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받고 있는 형제들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니,
그들을 극진히 섬기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꾸준한 이웃사랑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매일 매 순간 규칙적으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수시로 그분 앞에 앉아 그분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분의 따뜻한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다시금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고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을 말립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죽어서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 같이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미리 다 알고 계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참다운 죽음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기 죽음 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의심과 절망이 뒤섞인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으로 체험합니다.
예수님은 게쎄마니에서
“아빠 아버지, 당신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마르 14,36)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 15,34)라고도 기도하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과연 알고 계셨다면,
이 기도들은 죽음의 비극성을 과장하며, 진실성이 결여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자,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스승을 말립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스승이 유다교 실세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는
불행은 없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충직한 사랑에 감동 받았어야 할 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면서,
당신에게 장애물이라고 꾸짖으시고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들은 초기 교회의 믿음을 수록한 문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깨달음과 더불어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친 바를 배워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발족한 초기 신앙공동체들입니다.
그들이 복음서를 집필할 때,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기억하던 바와 믿던 바를 함께 수록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의 삶은 이미 변하였고,
그들은 그들이 기억하던 바와 믿고 실천하던 바를 이야기로 만들어 복음서들 안에 담았습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 같이 말하는 것은
그분이 죽음을 피하다가 잡혀서 어찌할 수 없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평소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과가 죽음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이 도달한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고,
그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셨습니다.
이 해석이 반영되어 각 복음서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리라고
세 번씩이나 예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스승을 말리자 예수님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사실도
사실의 보도이기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데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안전만 생각하고, 훌륭한 분이니까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겪은 죽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내어주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철이 들면,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합니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일에는 자기의 미래를 위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격증도 취득합니다.
수입이 있으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자기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 보장하려는 노력이고,
그것은 인간으로 당연히 해야 할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런 일에 익숙한 우리는 신앙도 우리의 미래를 위한 대책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거리 선교사들의 외침도
죽음 후의 일을 위해 각자 대책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미래를 보장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구원에 반대되는,
불행한 운명을 마을 것이라는 뜻도 그 말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삶의 운동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넓은 시야 안에서 살겠다는 신앙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좁은 시야를 벗어나는 것은 때때로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을 오늘 복음은 ‘제 목숨을 잃는 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나 한 사람 배부르고, 나 한 사람 많이 갖고, 나 한 사람 편안하겠다는 우리의 좁은 시야입니다.
주변에 배고픈 사람과 고통에 우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시야에 사는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을 위한 護身術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교섭하여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죽어서도 잘 살겠다는 수작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비록 자기 자신을 소모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가 있어도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베푸시는 분이라,
자기 스스로 그 자비와 그 베푸심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률적으로 강요된 일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의 능력만큼 또 원하는 만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 17,10)라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1-27)
박 마리 안젤로 수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7)
완전한 선으로, 공정과 정의로,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우리를 구원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판단하고 내 나름의 심판을 내린다.
그렇게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을 단죄한다.
그리고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가 어려울 때, 그때는, 심판은
하느님께 유보하고, 구원받는 데 힘써야 할 시간이다.
[출처] 마태 16,21-27 연중 제22주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