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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구려 토론방 스크랩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9회) <요동지역의 변천에 대한 고찰>
사람이 하늘이다 추천 1 조회 2,846 14.04.10 23:11 댓글 2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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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4.13 14:54

    첫댓글 두번째 그림에 대한 질문을 드립니다. -> 전국시대 위 혜왕과 방연의 대화를 보면 BC350경 각국의 위치가 나옵니다. 동쪽은 제, 서쪽은 진, 남쪽은 초, 북쪽은 한, 대, 연입니다. 대는 위나라의 영토였던 중산을 장악하여 양국이 원수처럼 지내던 시기인데요. 두번째 그림대로 따른다면 이 내용에 조선도 등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록이 없다면 그곳에 위치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 춘추시대의 연과 전국시대의 연의 위치는 다릅니다. 춘추의 연은 산융과 고죽국과의 전쟁을 하였으므로 초기 거점 지역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고, 전국의 연은 중산(석가장시)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 14.04.13 15:05

    소진이 언급한 연나라 2천리 강역은 만리장성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서쪽은 북경 서북에 위치해 있는 대동시와 삭주시 주변, 동쪽은 진황도시 정도로 보면 대충 2천리가 나옵니다. / 북경 북쪽의 만리장성을 보면 성곽이 2 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상곡은 아래쪽 성곽에 해당하는 연경현과 이남지역으로 봐야 하고, 장가구시의 성곽은 진나라때 쌓은 것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요?

  • 14.04.13 15:24

    요동에 대한 설명에서 낙랑과 대방이 등장합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낙랑과 대방은 한 4군의 낙랑이 아닌,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점령하자, 보급로가 막힌 장통이 요동으로 이주한(313년, 314년) 낙랑과 대방이 아닐까요? / 정리를 하면 요동에는 옛 기자 조선의 도읍 험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나라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때부터 요동의 양평으로 불리게 됩니다. 한나라때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낙랑이 고구려를 피해 요동으로 이주해 오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기록에는 요동에 험독, 양평, 낙랑. 대방 등이 거론되어 아주 헷갈리게 되는데요. 시대별로 정리하면 요동의 위치는 적어도 발해때까지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 작성자 14.04.13 23:22

    중요한 질문이군요. 두번째 지도에서 조선의 위치는 여러 사서들의 교차검증을 거친 것입니다. 제 글 『사기』 '조선열전' 해설(제2회)에서 자세히 언급하였으며,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5회)'에서도 자세히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여러 사서들을 보면 춘추전국 시대에 분명히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부근에 조선이 위치했던 것으로 나오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시기에 그곳에 선우국과 중산국이 존재헸던 것으로 나옵니다. 특히 호타하 북쪽의 영수지역에서는 중산국의 유물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었지요. 그렇다면 조선과 중산국이 동시대 같은 지역에서 동시에 존재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 작성자 14.04.13 23:19

    이럴 경우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다. 중산국과 조선이 같은 나라를 의미하든지, 아니면 두 기록 중 하나가 틀린 기록일 것입니다. 그런데 『회남자』에 의하면 “기자는 조선朝鮮에 봉해지고,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 하북성 平山으로 추정)에 봉해졌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한 시대의 비석인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에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장주본 탁본 첫머리)는 구절이 나옵니다.

  • 작성자 14.04.13 23:28

    『회남자』와 '한나라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를 통하여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며, 선우국이 기자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임이 입증된 것입니다. 선우국이 후에 중산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결국 선우국과 중산국은 기자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로 조선으로도 불렸던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우국과 중산국이 바로 기자조선의 실체라고 보고 있습니다.

  • 14.04.15 08:14

    @사람이 하늘이다 감사합니다. 글의 내용이 조금씩 이해가 되는군요. / 석가장시와 보정시는 지리적으로 하나의 블록으로 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해당 지역은 교류가 활발하였고, 유물도 공유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춘추시대는 연이 확장하던 시기였기에 정확히 특정할 수가 없지만 전국시대에서는 조선이 그 지역에 없었던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요. /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기원전 403년 진이 3국으로 분열하면서 전국시대가 시작됩니다. 춘추시대의 조선의 강역은 기록상 연에 의해 변화가 있었으므로 특정 지역을 지정하기가 어렵지만, 전국시대가 들어서면 조선은 여러 기록으로 봤을때 중산과 보정지역에는 없었다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14.04.14 00:06

    두번째 질문에서 연나라 강역이 사방 2천리이므로 그 동단을 진황도시까지로 보는데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본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소진이 이 말을 한때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진번.조선)를 천여리 공격하여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하기 전입니다. 상곡군. 어양군 등이 현 중국 북경시 부근인 것은 이론이 없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소진이 말한 진개의 동호 침략 전 연나라의 강역은 결코 현 북경지역을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전국책』에서 소진이 말한 연나라 강역과 『사기』'흉노열전'의 기록이 서로 상충됩니다.

  • 작성자 14.04.14 00:05

    역사 기록이 서로 상충될 때 어느 기록을 선택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역사서를 읽을 때 흔히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다른 관련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중하게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국책』에서 소진이 한 말은 연문후에게 합종책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유세를 하는 도중에 나오는 말로, 유세가가 그러하듯 자신의 주장을 통하게 하려고 과장된 언사를 많이 씁니다. 연나라 강역 사방 2천리도 그런 과장된 강조의 표현으로 볼 수 도 있고, 또 사방 이천리가 동서와 남북이 각각 천리인 경우를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므로 소진이 말한 연나라 강역 2천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 작성자 14.04.14 00:11

    반면 『사기』'흉노열전'의 기록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겨우 『사기』'흉노열전'의 기록을 더 중요시 할 수 밖에 없지요.

  • 14.04.15 08:10

    연나라의 강역 2천리는 만리장성으로 보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동쪽은 진황도이며, 요동이 있는 곳입니다. 진황도에서 북경 북쪽의 만리장성1까지가 하나의 블록으로 형성이 되며, 이곳이 요동, 요서, 우북평, 어양, 상곡의 5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북경 북쪽 만리장성 1과 장가구시 북쪽 만리장성 2 사이를 또 다른 블럭으로 볼 수 있는데 현 연경현에서 대동시와 삭주시까지 연결이 됩니다. 두 곳을 합치면 2천리가 나오며, 삼국지에 연나라가 조선의 강역 2천리를 빼앗았다라는 의미가 혹시 이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도 고려중입니다.

  • 14.04.15 08:59

    전국 시대의 진개의 기록을 보면 동호의 땅 천리를 빼앗았다가 아닌 천리 밖으로 쫓아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호가 장가구시의 땅을 잃고 锡林郭勒盟 으로 퇴각을 하였다면 천리 밖으로 쫓겨난 것이 되니까요. 그리고 지리를 살펴보면 5군이 있어야 할 곳은 만리장성이 있는 지역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국경이기 때문입니다. 만리장성을 보면 뺴앗은 영토가 아닌 기존 연의 영토(춘추시대에 획득한 영토)에 5군이 설치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 작성자 14.04.16 16:28

    카론님의 역사해석이 독특하군요. 진개가 동호를 천리 밖으로 물리친 것이 땅 천리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군요. 진개의 동호 침략과 연장성 설치는 『사기』'흉노열전'의 앞 뒤 문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필자의 글 『사기』'조선열전' 해설<제3회> 참조) 관련 글을 보면 진나라가 의거융을 쳐서 멸하고, 농서.북지.상군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았으며, 또 조나라는 임호.누번을 격파하고 운중.안문.대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았으며, 연나라는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 요동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았다는 내용이 연결된 문장으로 나옵니다.

  • 작성자 14.04.16 16:27

    모두 빼앗은 땅에 새로 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5군 지역이 진개의 침략 전부터 연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은 견해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카론님이 난하 하류 방면을 요동을 보는 견해는 윤내현 교수나 이덕일 교수처럼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으로 보는 때문으로 보입니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태행산맥의 갈석산(백석산)이 지명이동된 것으로 가짜 갈석산입니다. 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1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14.04.17 21:25

    @사람이 하늘이다 역사 기록을 그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사기의 東胡卻千餘里에서 卻의 뜻이 물러나다 입니다. 그냥 동호가 천리를 물러난 것입니다. 천리를 빼앗았다라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5군을 설치한 이유가 以拒胡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호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영토를 차지해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호가 다시 공격해 올 것이 두려워 5군을 설치해 대비를 했던 것입니다. 卻과 拒의 뜻을 정확히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 염철론에서도 却地千里로 되어 있습니다. 却 물러나다의 뜻입니다. 진개가 활동했던 기대와 가까운 기록에서는 빼앗다가 아닌 물러났다 입니다.

  • 14.04.17 21:25

    @사람이 하늘이다 그런데 삼국지에서는取地二千餘里로 되어 있습니다. 2천리를 취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는 사기와 염철론과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해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삼국지의 특징은 여러 시대의 기록들을 마치 동일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2천리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 정리하면 연 5군에 대한 정리는 사기의 기록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입니다. 삼국지는 배재하였습니다. / 진개의 기록과 지형(교통로)을 살펴서 지역을 정리한 결과 요동과 요서 지역을 비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기준으로 고구려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 14.04.14 00:31

    세 번째 질문에서 본문에 나오는 낙랑과 대방은 장통이 요동으로 이주한(313년, 314년) 낙랑과 대방이 아닐까 하였는데, 통설을 지지하는 분들이 많이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주장입니다. 본문의 『진서』'지리지'<평주조>의 기록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진서』'지리지'가 하북성 요동지역에 평주(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를 설치한 해는 함녕 2년(AD 276년)으로 장통이 미천왕에게 쫓겨서 313년 모용외에게 가기 38년 전 일입니다.

  • 14.04.15 08:07

    진나라(264년~419년)와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두고 다툽니다. 고구려가 313년에 낙랑 땅을 차지했다면 낙랑은 요동의 동쪽에 있어야 합니다. 이때를 편의상 낙랑1로 하고, 낙랑 땅이 고구려에 넘어가면서 장통이 요동 서남쪽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곳이 낙랑 2가 됩니다. 진의 행정구역상 평주는 낙랑1과 낙랑2 모두를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낙랑1 지역은 한나라 영토를 이어받은 진의 영토였으니까요. 다만 기록에 등장하는 낙랑은 후기에 해당하는 낙랑2가 될 것이다. 대방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며, 한서보다 진서의 낙랑의 호구가 줄어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 작성자 14.04.16 16:42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낙랑군은 요동군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미천왕 3년(302)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명을 포로
    미천왕 12년(311)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함
    미천왕 14년(313) 낙랑군을 침략하여 2천명 포로
    미천왕 15년(314)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
    미천왕 16년(315)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림



  • 작성자 14.04.16 17:01

    본문의 지도 '『삼국지』에 기록된 고구려의 강역 및 주변국 지도'를 참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미천왕 시기 고구려와 서진은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미천왕이 제일 먼저 공격한 곳이 현도군입니다. 이때 난하 중류의 현토군 일부지역을 차지합니다. 요둥군 서안평은 난하 하류의 요충지입니다. 고구려가 서안평을 직접 공격하려면 산해관의 좁은 험로를 이용해야 하므로 공격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난하 중류의 현도군 일부지역을 먼저 차지하면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하기가 쉽지요. 그래서 난하 중류의 현도군 지역을 먼저 차지하고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한 것입니다.

  • 작성자 14.04.16 17:26

    낙랑군 지역은 그 특성상 수군이 아니면 공격하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그래서 전한 한무제나 후한 광무제 등도 모두 수군으로 낙랑군을 침략하였지요. 난하 하류의 서안평지역은 수상교통의 요지입니다. 고구려가 서안평을 차지하면 낙랑군을 공격하기 아주 좋은 거점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안평을 차지한 후 수군으로 그 서쪽의 낙랑군을 공격하고 이어서 그 남쪽의 대방군을 공격한 것입니다. 만약 낙랑군이 요동군 서안평보다 동쪽에 있었다면 서안평보다 낙랑군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고구려가 낙랑군을 공격하자 장통이 낙랑군의 북쪽에 위치한 창려군 지역의 모용외에게 귀부하고 새롭게 낙랑군을 설치합니다.

  • 14.04.17 21:38

    @사람이 하늘이다 윗글 '고구려의 해상 교역로에 대한 고찰'에 그림이 있습니다. 연 5군과 낙랑 지역 그리고 역사에 등장하는 각 지역에 대한 위치도 비정하였으니 비교 검토가 가능하실 것입니다. / 위치 비정과 관련하여 설명드리면 기록을 통해 결정적 단서가 되는 내용들로 위치를 잡았고, 지리적 특징을 고려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는데요. 최근 버전은 항구를 단서로 잡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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