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아들 감싸주신 포커 페이스 교장 선생님
[J플러스] 중앙일보 2017.07.01 11:37김정수
미국에서 살 때 한번은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아들이 교칙을 위반해서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교장, 교감 선생님과 아들의 카운슬러(진학 생활 지도) 선생님, 그리고 아들의 교칙 위반 사항을 보고한 선생님이 참석하셨고, 부모인 나와 아내, 당사자인 아들이 참석했던 그 회의를 평생 잊을 수 없다.
그 해, 고교 시절 내내 학교 합창반에서 리더 노릇을 했던 아들을 아껴주시던 음악 선생님이 전근을 가신 후, 새로 오신 음악 선생님과 아들은 사이가 영 좋지 않았었다. 무조건 아들의 말만을 믿지는 않지만, 해오던대로 자유롭게 친구들의 뜻을 모아 합창반을 이끌어 가려던 아들과, 새로 부임하여 교사의 권위를 세우려던 선생님 사이에는 지속적인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부모와도 하루가 멀다하고 신경전을 벌이며 질풍노도기의 중심에 있던 아들은, 컨서트 기획 등 학교 행사를 준비하고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선생님과 마찰이 점점 많아졌다. 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쌓인 아들이 하루는 선생님을 면담하고 나와 복도를 걸어가면서, 혼자말로 선생님 욕을 했나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지나가던 어느 학부모가 하필 그것을 듣고는 선생님께 가서 알렸고, 그로 인해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아들에게 잘못을 인정하는지를 확인하는 교장 선생님의 얼굴은 늘 그랬던 것처럼, 전혀 표정이 없는 포커 페이스였다. 아들이 잘못을 시인하자. 교장 선생님은 부모의 생각을 물어오셨다. 나는 전날부터 준비해온 말을 하나라도 빼놓을까 신경을 쓰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학교가 학생들을 위해 많은 좋은 것을 주고 있으며, 교장 선생님과 모든 교사들이 학생들을 위해 애쓰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부모로서 자식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고 한후, 관대한 처벌을 내려주기를 부탁하는 나의 등에 소리없이 땀이 흘렀다.
“선생님을 욕하는 것은 교칙에 의해 처벌받아야 하나, 평소 바른 생활을 하는 학생이라는 점을 알기에, 엄중한 징계는 하지 않고, 경고로서 졸업직전 합창반의 봄 콘서트 무대에는 설수 없게 합니다.”
회의 말미에 교장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 나는 안도의 한숨도 들킬까 나누어 내쉬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기록이 남지 않는 징계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합창반 반장으로서 콘서트를 기획해놓고도 무대에 못서는 것은 마음아프겠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윽고, 회의를 마치려는 교장 선생님은 아들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하게 했다. 아마도 배려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기회를 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아들은 나로 하여금 또 한번 땀을 닦게 만들었다.
“저는 저 선생님께서 조금 더 현명하셨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가운데, 학생 시절에 선생님 욕 안해보신 분이 계신가요? 저는 선생님 앞에서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다들 선생님 안계신 곳에서 선생님께 대한 불만을 말하고 욕하고 그러지 않으셨나요? 그리고 제가 선생님이었다면, 즉시 저를 불러 직접 말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교장 선생님부터 저희 부모님까지 다 오시게끔 일을 키우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계신 음악 선생님에 관해 그렇게 거침없이 아들이 말을 마치자 정적이 흘렀다. 나는 고개를 못들고, 이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수없어 불안했다. ‘아들아, 산통 다 깨졌다. 넌 어쩜 이리도 생각이 없니.’ 그 때 교장 선생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럼 회의를 마칩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교장 선생님은 그렇게 회의를 마치셨다. 마치 절벽 끝에서 안전지대로 갔다가 다시 절벽으로 미끄러지려할 때, 휙 손을 내밀어 나를 구해주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수퍼맨과 같았던 교장 선생님. 그 분의 무표정한 얼굴을 난 지금도 기억한다.
에반 글레이져(Evan Glazer) 교장 선생님. 그 전해, 아들에게 랩을 배워 졸업식에서 부르셨던 교장 선생님은 아들의 부족한 점보다는 장점을 늘 보아주셨고, 대학 지원시에는 직접 추천서를 써주셨다. 미국 최고의 과학고등학교를 만들겠다면서, 부임 첫해, 전년도 성적이 일정 기준(GPA 3.0)에 이르지 못하는 학생들은 퇴교시키는 규칙을 만들었던 교장 선생님은 그 다음해부터 그로 인해 학교를 떠나는 일부 학생들을 보시면서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학교가 언론으로부터 미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하기도 했지만, 당신은 줄곧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를 줄이는데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셨다.
지금 아들에게 작은 것이라도 이루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스승들의 덕이며, 철없던 아들을 보살펴주신 글레이져 선생님의 사랑에 힘입은 바 크다. 졸업 후 지금까지도 아들이 연락을 드리면 여전히 반겨주시는 교장 선생님이 이제 뉴욕의 다른 학교로 가셔서 새로운 일을 하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새 학교에서도 제자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실 모습이 상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