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를 쓰게 된 배경 / 강인한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강인한
은빛 서걱이는 강변에 바람 부는 갈밭, 검은 달이 애드벌룬처럼 기나긴 쇠사슬 끝에 매여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갈대는 여기저기서 단칼에 허리가 꺾인다. 허리 아래 드러난 복두장이의 피 묻은 너털웃음이 비비꼬여 달아난다. 쇠사슬을 절컥이며 절뚝절뚝 달아난다.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 앙금으로 남은 귀엣말 시퍼렇게 녹이 슬려 인양된 뒤.
-《현대시학》 198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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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것을 말하지도 못하던 악몽의 시대
이 시를 쓴 것은 1979년 6월 9일입니다. 유신 독재 시절이지요. 유신헌법 위에 다시 대통령 긴급조치 1호, 2호…9호가 발동합니다.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키는데 아마 세계에 그 유례가 없는 대대적인 부정선거였을 겁니다. 그를 위하여 하수인으로 동원된 건 전국의 초중고교 교원들이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인 나도 그 유신의 주구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마다 주민들에게 찾아가 계도하는 사랑방 모임을 열고 유신헌법만이 국가를 부강하게 할 헌법이라는 선무공작을 펼쳤으며, 국민투표 당일 개표 현장에서 개표요원으로, 집계요원으로 종사한 이들도 선생님들. 행정관청에서 지시하는 대로 투표지 백 장 묶음 맨 위에는 찬성표를 장식하여 올리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정당 참관인도 없고, 검표도 없고 물론 누구 하나 입 열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는 기막힌 현장이었습니다. 사전에 책정된 98퍼센트던가 97퍼센트던가, 먼 뒷날 수정하여 확정 발표된 통계는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으로 통과된 것이 유신헌법입니다.
유신헌법을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말을 하면 대통령 긴급조치 1호령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군사재판에서 최고 징역 15년까지 처해질 수 있었습니다. 걸핏하면 빨갱이로 몰리고, 자칫하면 간첩으로 몰려 죽는 것도 유신시절엔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의 상황을 시로 그려내기에는 어쩔 수 없이 초현실주의적인 기법과 상징의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감히 독재자에게 비판적인 발언을 할 수 없었던 암흑과 공포의 시기. 이 시를 쓰면서 나는 살바도르 달리나 막스 에른스트, 혹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떠올렸습니다.
수많은 시민들과 젊은 학생들의 성토와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아니 전국의 대학교 교문을 휴교령으로 닫아걸고 1965년 박정희는 필생의 소망이던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굴욕적인 한일 협정을 졸속으로 체결하고 맙니다. 이것은 50년 뒤에까지 정신대 문제, 강제 징용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1965년 그 해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를 시작으로 전투부대인 청룡, 맹호부대를 파병합니다. 2000년대에 밝혀진 프레이저보고서(1978년 10월 31일 미국 하원이 발간한 한미관계 보고서)에 보면 당시 베트남 파병 계약에 장병 1인당 월급을 2백 달러로 책정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지에서 장병들이 받은 월급은 기껏 30달러(나머지 170 달러는 박정희 개인금고로 들어갔는지 정부 기금으로 사용됐는지 밝혀진 바 없음)에 불과했습니다. 포항제철을 필두로 경제 개발 명분으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공장을 건설하기에 앞서 청와대 측근들은 그전에 미리 공사가 벌어질 땅을 알아두어 헐값으로 매입하여 막대한 보상비를 챙기거나, 그 부근에 건물을 지어 집값을 올리는 데 선봉에 섰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부동산 투기의 근원은 박정희의 경제개발에 빌붙은 측근들의 떡고물 나누기에서 비롯된 것. 결국 오늘의 부동산 문제의 원흉은 조국 근대화라는 명분을 세운 박정희 휘하의 배후에서 놀아난 그 측근들입니다.
1970년 6월 18일. 박정희는 청와대로 기시 노부스케를 초대하여 1965년의 한일 수교에 대한 공을 치하하여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합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6년 만주국 산업차관이었으며 당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만주군의 청년 군관. 30년 세월을 건너 두 사람은 만주국 시절을 떠올리며 술잔을 부딪쳤습니다. 평소 청와대에서 기분 좋게 술에 취하면 대통령은 일본 군가를 즐겨 불렀다는 말이 전합니다.
두 번, 세 번 감언이설로 국민들을 현혹하는 거짓말로 삼선개헌을 하며 대통령직을 거머쥔 그는 급기야 1972년 가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떠올린 듯 시월 유신(維新)을 선포합니다. 이제 더 이상 민주적인 선거제도에 의하여 집권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종신 집권을 위한 쿠데타 형식의 다른 무엇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게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시월유신이었지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씌운 유신 체제는 엄밀히 보면 1인 독재의 강화 술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8년간 집권한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한 사건(70년 전 만주 하르빈 역두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날 10월 26일)이 터집니다. 그 이후 '안개 정국'이라는 신군부의 암중모색 기간이 계속되다가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대학살과 그에 맞선 시민들의 민중항쟁이 터집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억압된 슬픔을 다독이며 쓴 「검은 달이 쇠사슬에 꿰어 올린 강물 속에」는 궁정동의 10.26 사태를 지나 5.18 한 달 전 『현대시학』에 발표되었습니다. 무언지 모르지만 기분 나쁘고 암울한 속에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안개 정국. 축축하고 음산한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건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전두환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육군대장 진급을 하고, 예편을 하고, 마침내 유신헌법의 도움을 받아 장충체육관에서 단독 출마하여 대통령으로 군림하며 화려한 저녁 아홉시 ‘땡전 뉴스 시대’를 열었지요. 내가 전주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1960년 3월,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는데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전국적으로 3인조, 5인조로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그에 항거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데모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4월 19일 학생들의 시위대가 경무대(뒷날의 청와대)를 향하여 가는 것을 저지하여 경찰들이 쏜 총탄에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 한주일 뒤 만 12년간 1대, 2대, 3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이 물러났습니다.
김수영 시인은 그 4월 26일 아침에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전국의 국민학교란 국민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이었느니/ 썩은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무서워서 편리해서 살기 위해서/ 빨갱이라고 할까보아 무서워서/ 그저그저 걸어만 두었던/ 흉악한 그놈의 사진을…”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시를 썼습니다. 다시 공명정대한 대선이 치러졌고 새로운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아, 얼마나 고대했던 민주주의 정부였던가. 그러나 민주당 정부가 면밀한 국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구상하고 미처 실행에 옮기기도 전, 합법적인 민주 정부를 무너뜨린 1961년 5. 16 군사쿠데타가 4. 19 이후 1년 만에 악몽처럼 나타났습니다. 이때 무슨 혁명공약이 전단지로 날아다녔는데 열 가지 항목이 적혀 있고 말미에 육군중장 장도영이란 계엄사령관 이름이 있었습니다. 혁명 공약 마지막 항목은 국가가 안정되면 즉시 군은 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 뒤 슬그머니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장도영에서 박정희 소장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리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는 혁명공약 마지막 항목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박정희의 거짓말은 세 번, 네 번 세월 따라 거듭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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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수영 시인은 그 4월 26일 아침에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전국의 국민학교란 국민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이었느니/ 썩은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무서워서 편리해서 살기 위해서/ 빨갱이라고 할까보아 무서워서/ 그저그저 걸어만 두었던/ 흉악한 그놈의 사진을…”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시를 썼습니다. 다시 공명정대한 대선이 치러졌고 새로운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나도 이 시를 석사학위논문 <김수영 연구>에 인용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