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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콜로 1,1-8
복 음 : 루카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을 도우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기 위한 것일까요?
함께 사는 세상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일까요?
언젠가 어느 신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본당에서 어렵다고 모금을 나와도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성당에서 성당 건축을 위해 모금을 와서
우리 본당도 어렵지만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아서 공동체가 함께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본당에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본당은 낡은 오르간인데, 그 본당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더라고요.”
어쩌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만 돕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본당보다 더 멋진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도움을 꼭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도움받은 본당 사람들도 자기들이 받은 도움을 기억하면서,
다른 이에게 많은 나눔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사는 멋진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또 도움을 주는 것은 상대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아일랜드 리머믹 대학교 크리벤 박사 연구팀이
봉사활동과 정신 건강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설문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2만 7천 301명을 대상으로 평소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지와 우울증을 겪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우울 증상이 적게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도 도움 주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봉사활동은 곧 나를 위한 영양제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 이유를 들어 영양제를 먹지 않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이 가시자마자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중을 들었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이 장면을 묵상해 봅니다.
사실 사위가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모습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병‘이 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치유를 받게 되지요.
정신적인 치유인지, 육체적인 치유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던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그 이후 장모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곧바로 일어나 시중을 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거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처음에 감사했던 마음을 곧바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도 간절히 기도했다가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새하얗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곧바로 행동했다는 것이지요.
사랑의 실천은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만 돕겠다는 생각도 아니고,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섬기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실패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다(장 파울).
떠날 때를 안다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것에 연연해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때야말로 떠나야 할 때임을 잊지 맙시다.
칭찬받을 때, 그때가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카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33). 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인기에 매몰되지 않고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주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98년 여름입니다. 보좌신부에게 여름 행사는 연중 가장 큰 행사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 청년 여름 캠프는 준비만 6개월 이상 걸리는 행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입니다. 거리는 2시간 내외이면 좋습니다.
다음은 시설입니다. 숙소는 깨끗한지, 수영장은 안전한지, 음식은 적당한지를 살피게 됩니다.
답사를 3번 정도 가면서 꼼꼼하게 프로그램을 챙깁니다.
당시만 해도 아직 학생들이 많을 때이고, 교사들도 열정이 많았습니다.
공고를 내면 학생들은 신청하였고, 사목회를 비롯해서 어른들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트럭에 물품을 가득 싣고 캠프장으로 떠나려 할 때입니다.
비가 오고 있었고, 태풍 소식도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비가 올 때를 대비한 프로그램도 있고,
캠프장은 높은 지대에 있어서 비가 온다고 해도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꼭 가야 하는지, 캠프장은 안전한지 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캠프장은 안전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안전하게 잘 다녀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저를 보셨지만 잘 다녀오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저를 믿고 여름 캠프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신부님께 지금도 감사드립니다.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내리는 비는 결코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리는 비도 한 여름밤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뉴욕에 살면서도 한국의 뉴스를 보곤 합니다.
한 군인의 기자회견을 보았습니다.
실종자 수색작업 중에 해병대 병사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엄정하게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수사단장은 해병대 병사의 영정 앞에 철저한 수사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군에서 발생한 사망사고는 군에서 조사를 하지만,
수사는 경찰이 하도록 법이 개정되었다고 합니다.
군 자체만의 수사는 때로 은폐와 조작, 그리고 축소가 있었고,
이로인해 억울한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사단장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보고서를 작성했고,
결재를 받아서 경찰에 서류를 인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사단장은 인계하는 과정에서 외압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철저하고, 엄정하게 수사했던 수사단장은 ‘항명’ 죄가 적용되어서 보직 해임되었고,
오히려 군검찰에 의해서 수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사단장은 기자회견에서 군검찰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제3의 기관에서 수사를 받게 해 달라고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청원하였습니다.
만일 수사단장이 상부의 의견을 들어서 수사기록을 수정했다면, 경찰에 인계하지 않았다면
수사단장에게는 보직해임이라는 불이익은 없었을 것입니다.
군검찰에 항명이라는 죄명으로 수사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사단장은 왜 상부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수사에 의해서 밝혀질 것입니다.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억울한 군인이 없도록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뉴스를 보면서 문득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비록 사람의 일이라고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 결과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구심점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박해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저는 수사단장도 충분히 결과를 예상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군을 명예롭지 않게 떠나야 할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항명이라는 죄가 확정되면 감옥에서 지내야 하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홀로 있었던 예수님처럼 인간관계도 단절되고 고독하게 지내야 하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가족들에게도 큰 시련이 닥칠 것 또한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군인들이 사람의 일을 선택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 역시도 사람의 일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사람의 일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박해가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지라도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입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열을 '꾸짖으시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몰아내십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은 마귀가 붙어서 병이 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 주실 때는 '손을 얹으시고'(루카 4,40),
마귀를 쫓아내실 때는 '꾸짖으셨다'(루카 4,41)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병자들에게는 측은히 여기시지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은 꾸짖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막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됩니다.
곧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시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조욱현 토마스 신부
복음에서 병의 치유는 하늘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이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성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다.
이러한 열병들을 주님을 가까이하면서 치유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청하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병이 완치되었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부인은 즉시 실행에 옮겼다. 부인의 행동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봉사하며,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신앙인,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붙잡는 우리, 떠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은 군중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고 가슴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발길이 닿는 곳 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몰려왔고, 그분이 선포하시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에 환호하고 박수를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라다니는 광경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 군중의 환호와 박수갈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절대 한곳에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군중을 뒤로하고 또 다시 길을 떠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붙들려는 군중을 진정시킨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붙잡는 우리 인간, 그러나 길 떠나시는 주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뭐든 붙잡는데 이력이 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 대상이 재물이든 자식이든 배우자든 상관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조차 꼭 붙들어 내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으려고
기를 쓰는 우리 인간의 모습 앞에 씁쓸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지 않고,
꼭 붙들어 새장 안에 가두어놓으려는 시도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자녀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떤 동물, 어떤 피조물이 자신의 새끼를 30년, 40년, 50년 동안 붙들고 있습니까?
사실 18년 세월이면 붙들어 놓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긴 세월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놓아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그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자녀들을 ‘어른아이’로 전락할 때까지 끝까지 붙들고 있는 부모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충분히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결정권을 가질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진학할 대학교, 학과까지 부모가 나서서 다 결정해줍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군부대 앞까지 따라가서 눈물을 닭똥 같은 눈물을 철철 흘립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녀 직장 상사들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려 듭니다.
자녀 대신 사직서까지 대신 써줍니다.
더한 것은 그런 치맛바람을 보면서도 당연한 듯 바라보는 자녀들입니다.
더 한 것은 이런 붙듬이 피조물을 넘어 하느님에게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본질적인 측면이 어떤 것입니까?
그 어느 것에도, 그 어떤 혈연, 학연, 지연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무한히 크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크신 하느님, 바람처럼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으려 하니 그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으로 축소시켜 독차지하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나만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신 작은 하느님이 절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작은 고을 나자렛,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위해 오신 메시아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인류 전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다가오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혹시라도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 내 틀 안의 하느님,
내 방식대로의 하느님으로 가둬놓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박상대 마르코 신부
세례와 광야의 유혹 이후, 어느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자기 公生活의 목적과 방향을 논리적으로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또다시 안식일에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첫 공생활의 행적으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다.
회당을 나선 예수께서 오늘은 (아직 제자로 불림을 받지 않은)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뿐 아니라, 해질녘에 사람들이 데려온
수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에 연결시켜 살펴보면 구마 기적과 병자치유는
모두 같은 날, 바로 안식일에 이루어진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4,31-41)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엄연히 불법이다.
아직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분명히 이 ‘일’을 두고 트집을 잡을 것이다.(6,2.7)
앞으로도 자주 접하게 될 예수님의 구마기적사화나 병자치유사화는
그 서술상 일관된 구조를 보이고 있는바,
① 마귀와 병자의 고백 및 상황묘사, ② 예수님의 기적적 구마 및 치유,
③ 구마 및 치유 實證, ④ 당사자와 목격자의 증언과 반응 등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마귀 들린 사람과 질병으로 앓는 사람을 분명히 구별 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은 물론 천재지변까지도
마귀(악)의 다양한 직업이라 보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향하여
마치 ‘구마예식’을 행하시듯이 ‘열이 떨어져라.’(39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 은혜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곧 이웃에 대한 ‘봉사’로 이어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는 마지막 날까지 연일 계속될 그분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구마와 병자치유가 예수님 일상의 스케줄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어디론가 따로 가셨다고 한다.
바로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이다.(42절) 왜 그곳으로 가셨을까?
이부분에 대하여 오늘 복음의 언급은 없지만
그분은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것이다.(6,16 참조)
祈禱는 루카가 특별히 선호하는 복음의 테마이다.
루카는 공관복음 작가 가운데 기도에 관한 말씀과 이야기를 가장 많이 수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기도하셨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권장하셨다.
많은 부분이 루카의 고유사료이다.
그러나 루카는 신자들의 믿음을 보존하고(22,32), 유혹을 이기며(22,40.46),
장차 재림하실 인자를 맞이하는(21,36) 방법으로 늘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가르침을 받고 치유와 구마기적의 은혜를 입은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늘 그들 곁에 두려고 붙잡았다.(42절)
그러나 예수님은 마냥 그들 곁에 머무를 수 없으시다.
세상의 만백성을 위한 자신의 길을 가셔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시는 길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속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만 속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입은 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람이신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를 묵상하면서 나의 하루는 과연 어떤지 생각해 본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최 코르디아 수녀
아픈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 마귀에 들린 이들을 해방시켜주신 예수님.
치유의 기적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 예수님께서는
날이 새자 돌연 다른 고을로 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선한 일, 좋은 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보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행하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유하게 부여해주신 소명을 발견할 때,
보다 기쁘게, 보다 충만하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자주 외딴곳으로 물러나 기도하셨던 것처럼,
십자가 앞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나에게 고유하게 부여해주신 소명을 발견하여
오늘도 기쁘게 주님을 따라 걸을 수 있길 소망해봅니다.
[출처] 루카 4,38-4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