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주머니
나는 어려서부터 바느질을 좋아했다. 어른들은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종손이란 녀석이 생기긴 울퉁불퉁한 것이 사네건만 하는 짓거리는 계집애 같다고 속으로 걱정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다. 구십이 내일모래인 노인이 인터넷으로 뭐든지 곧장 잘 산다. 주로 옷이다. 저렴한 일상복이다. 받아보면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데가 있게 마련이다. 마음에 안 드는 데가 있어서 오히려 좋아한다. 수선 가게에 가서 고치고 나면 마음이 참 개운하다. 그 기분을 즐긴다. 취미이기도 하다.
눈만 예전 같다면 재봉틀을 한 대 사고 싶다. 수선 가게는 못 차리더라도 원피스나 데님팬츠 같은 것을 특색 있게 만들어 보고 싶다. 그보다 먼저, 나의 흰 두루마기를 만들 것이다. 그보다 먼저, 옛날 어머니가 산에 나무하실 때 자주 입으셨던 통치마를 만들 것이다. 그보다 먼저, 복주머니 같은 걸 하나 만들고 싶다.
나는 사춘기에 접어들고부터 거울을 자주 봤다. 양놈처럼 콧날이 우뚝하고 희고 갸름한 얼굴이 부러웠다. 나는 어머니를 닮아서 검고 못 생겼다고 어머니 면전에서 투덜거리곤 했다.
중학교 때, 읍내에 사시는 왕고모할머니 댁에 하숙을 했다. 일학 년 겨울이 되었다. 어머니가 나의 겨울 이불을 만드셨다. 이불 겉 홑청은 스무 새 명주에다 붉은 물을 들여서는 이불깃으로 하고 초록 물을 드려서는 이불몸통으로 했다. 안 호청과 속 이불 호청은 열한 새 흰 무명으로 했다. 햇솜을 세 겹으로 둬서 북대산 같은 솜이불 한 채를 꾸미셨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이 이불을 지고 하숙집에 갔다. 일단 할머니 방으로 먼저 가야 한다. 내가 아지매라고 부르는, 나보다 세 살 더 먹은 할머니의 딸이 이불보를 풀고 이불을 헤치자 붉은 주머니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요즘의 미니 핸드백만한 크기의 비단 주머니였다. 아지매가 주머니 끈을 푸니 주먹만한 하얀 통이 하나 입을 꼭 다물고 들어있었다. 크림이었다. 할머니는 빙긋이 웃으시고 아지매는 깔깔거리며 손뼉을 쳤다. 순간 나는 어찌나 부끄럽던지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나는 밤마다 그 크림을 얼굴에 덕지덕지 처바르고 잤다. 아침에 거울을 보면 얼굴은 여전이 거무스름했다. 그때도 나중에도 이 크림에 대해서 어머니도 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궁금해 하셨을 터인데도 나는 참 재미없는 머슴애였다. 내가 만약 계집애였다면 붙임성 있게 무슨 소리라도 한마디 했을 것이다. 이때의 어머니의 사랑을 늙어서야, 구십에 가까운 최근에 와서야 사무치게 느끼며 눈시울을 적신다. 어머니한테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이 붉은 주머니와 비슷한 주머니가 어디 있나 하고 인터넷을 뒤졌지만 그런 주머니를 찾지 못했다. 비단 주머니 대신에 가죽으로 된 주머니를 찾아 보았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서양식 주머니라고나 할 핸드백을 주머니려니 하고 사려다가 말았다.
붉은 공단을 끊어다가 내 손으로 주머니를 만들었다. 안감은 장롱 속에서 잠들어 있는 여덟 새 흰 무명으로 했다. 옛날의 그 주머니를 떠올리며 그런 모양 그런 크기로 애써 만들었다. 손바느질이라 매끄럽지 못하지만 이 주머니를 크림이 들어 있던 옛날 그 붉은 주머니를 대하듯 한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을 때에도 이 주머니는 어찌하여, 언제나 배가 불룩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