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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7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콜로 1,9-14
복 음 : 루카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 그리기 대회에 나간 주인공이 ‘불꽃놀이’를 주제로
불꽃과 검은색 밤하늘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본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밤하늘이 마냥 검은색인 건 아니야.”
주인공은 밤에 빛이 없으니 검은색이 맞다고 우겼지만,
상을 받은 것은 짙은 남색으로 밤하늘을 칠한 친구였습니다.
그때 주인공은 처음으로 하늘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파란색, 붉은색, 연보라색을 거쳐 짙은 남색이 된 하늘을….
인상적인 이야기였고, 동시에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이럴 것이다’라며 판단했던 적이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읽고 있는 역사책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해짐을 깨닫습니다.
당시의 군주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역사는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최악의 선택을 했던 당시의 군주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좋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고, 겸손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시선으로 봐야 나의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는 어부였습니다. 어부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겉모습만을 보고서 과연 장차 교회의 반석이 될 것임을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만이 알아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어떤 목수가 어부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하면,
어떤 어부가 따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지요.
예수님을 통해 베드로는 어부라는 자기의 옛 역사가 아닌, 삶의 변화가 이루어져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새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기의 가장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평가될 자기의 역사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주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 인생은 자전거와 같다. 계속 페달을 밟는 한 넘어질 염려는 없다(크라우드 페퍼).
버리고 떠나기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하셨을까?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짐 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 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 숙소를 내놓으셨다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셨습니다.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기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여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인정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입학생 대부분은 저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군대도 마친 후에,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한두 살 차이가 나면 ‘형’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 저보다 7살은 많았고,
그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분은 저보다 15살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제일 나이가 많은 형님은 1948년생이었고, 그다음은 1952년생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직업도 다양했었습니다.
어떤 형님은 학원 강사를 하였고, 어떤 형님은 보험회사를 다녔고,
어떤 형님은 장교였고, 어떤 형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가수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라는 노래처럼
형님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신학교로 왔습니다.
반듯한 직장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온 형님,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기꺼이 신학교에 들어온 형님들을 보니
신학교에는 분명 세상의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신학교에 들어온 저와는 생각의 폭과 깊이가 많이 달랐습니다.
그 형님들과 군대에 갈 때까지 4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군대 갈 때는 형님들이 조촐한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마지못해서 하는 일들을 형님들은 기쁘게 하였습니다.
성소주일이나 축제를 마치면 청소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저는 일의 요령도 잘 모르고, 힘들어하는데 형님들은 군대를 다녀와서인지 삽질을 잘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청소하였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졸리기도 하고, 집중이 잘 안되었습니다.
외출하고 한잔 한 날은 몸은 성당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습니다.
형님들은 기도 시간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형님은 더운 여름날에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는 길은 오직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그랬습니다.
저는 다른 책을 읽은 적도 있고, 늦게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형님들은 나이가 많아서 배움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구도자의 자세로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장학금은 수녀님과 형님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면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형님들은 신학교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신학교로 들어왔으니 그 기쁨이 충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을 보면 어린 나이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첫 번째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베드로는 장모가 있었으니 결혼도 했었습니다.
바오로는 유대교의 정통파 바리사이였습니다. 당대의 스승인 가말리엘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바오로도 총 맞은 것처럼 예수님께 사로잡혀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니교를 신봉했었습니다. 방탕한 생활도 했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았던 프란치스코 성인도 방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분들도 예수님께 사로잡혀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직업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던 많은 동기들도 이제는 서품 32년이 되었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적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보다 더 많이 감사할 것이다.”
저 역시도 많은 빚을 탕감 받았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의 무게가 쌓이면서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면 됩니다.
다른 것들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방법으로 채워 주심을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타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다음,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러자 시몬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귀찮기도 한 일이었지만,
더 깊은 의미로, 그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자신의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앎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내려놓고 ‘말씀대로’을 따랐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앎에 대한 한계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많은 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예수님을 어떤 한 분 ‘스승’(5,5)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5,8)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찾아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는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대상이 될 때에 오게 됩니다.
곧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가 될 때 찾아들게 됩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배’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주님의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주님의 배일 뿐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회당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은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어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절)
베드로는 자기 일생을 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 잡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오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베드로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따랐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하였다.
고기 잡는 일에 그렇게 경력이 있고 능력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불결한 인간으로서 순결한 분을 감히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신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랜 경험 등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
커다란 체험을 하였듯이,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할 때가 많다.
더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항상 말씀이 강생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강생시키는 삶, 여기에서 근본적인 우리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 생각이나, 고집, 고정관념을 주님의 말씀 앞에 모두 버렸을 때,
기적을 체험했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안에 자녀로서의 기쁨과 구원을 체험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 안에 강생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루카 5,3-5)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와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 1,35-37.40-41ㄱ.42ㄱ-ㄷ)
어부들은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은,
그들을 처음 만나시고 나서 몇 달 뒤의 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어부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 몇 달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또는,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부르심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부들을 눈여겨보시면서 그들이 제자로 적합한 사람들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정하신 때에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려고 작정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어부들이 어느 날 우연히 만나서,
만난 그날 바로 느닷없이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이 갑자기 응답한 것은 아닙니다.
어부들은 이미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고, 따라나설 수 있었습니다.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일도,
그렇게 하려고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는 시몬의 말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뜻에 따라 풀이하면,
“저희는 지금 저희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허무하지 않은 새 인생을 스승님께 청합니다.”가 될 것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시몬이 먼저 간청했고,
예수님께서 그 간청에 대답하신 것으로 바꿔서 풀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는 말씀은,
고기를 많이 잡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새 인생’을 사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깊은 데’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인도해 주시는) 길’, 또는 ‘주님께서 가시는 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나를 따라라.”와 같은 말씀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이야기겠지만,
뜻을 생각하면, 이야기 자체를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위해서 ‘고기잡이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그들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라,
그들이 제자가 되었을 때 살게 될 새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어부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지시를 실행해서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은 일은,
주님의 권능을 체험한 일이기도 하고,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면 허무하지 않은 새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믿게 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6.8-11)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은,
초자연적인 주님의 권능에 대한 경외심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자신이 하게 될 엄청난 일들에 대한 두려움과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강한 희망 등이 섞여 있는 복잡한 심정을 나타낸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까지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사는 어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될 것이다.
너의 새로운 인생을 두려워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서면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은,
‘새 길(새 인생)’을 선택함으로써 ‘옛 길(옛 인생)’을 버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좁은 문’을 선택함으로써 ‘넓은 문’을 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루카 13,24).
<신앙인은 ‘부르심’에 응답하고 주님을 믿기 시작함으로써 ‘새 인생’을 살게 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깊은 데’에서 그물을 내리는 생활이고,
신앙인이 그 그물로 잡게 되는 첫 번째 물고기는 바로 자기 자신의 ‘새 인생’입니다.
우리는 이미 버린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앞만 보면서, 즉 앞에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신앙여정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복음 5장부터는 예수님의 공적인 가르침과 활동이
제한된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넓은 지평으로 펼쳐진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교적 회당에서 행해졌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겐네사렛(갈릴래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행하신 가르침과,
현직 漁夫들인 시몬과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엄청난 고기를 잡게 하신
自然異蹟을 통하여 첫 제자들을 얻으신 제자 소명사화를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회당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초월하는 이유는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예수께서 언제 어디에 계시던 그분이 계신 바로 그 시각과 그 장소가
구원성취의 시간이요 장소이기 때문이다.(루카 4,21)
예수께서 시몬과 그의 동료(안드레아, 야고보, 요한)들을 첫 제자로 삼으신 소명사화는
4복음서 모두에 보도되고 있다.(마태 4,18-22; 마르 1,16-20; 루카 5,1-11; 요한 1,35-42)
마르코의 소명사화가 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마태오가 이를 그대로 베꼈고,
루카는 마르코의 原典에 자연이적사화를 곁들였다.
요한은 제자소명사화를 구조와 내용은 전혀 다르게 편집하였고,
오늘 복음의 자연이적사화를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사화와 연결시키고 있는 반면(요한 21,1-14),
루카는 이를 제자소명사화와 연결시켰다.
루카의 이러한 의도는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불림을 받는
마르코에서와는 달리 시몬(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향한 가르침을 마치시고 갑자기 시몬을 향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4절)
시몬이 예수께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응답하였다.(5절)
예수께서는 물풀만 걸려든 빈 그물을 씻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
밤새 허탕을 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시몬은 아는 사이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을 나오셔서 곧바로 시몬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일(4,38-39)로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되었고,
시몬은 예수님의 능력에 이미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마르코는 그 순서를 다르게 보도하고 있는 바,
소명사화(1,16-20)가 먼저고 장모치유(1,29-31)는 그다음이다.
이 점이 바로 마르코에 없는 자연이적 사화를 루카가 곁들인 이유이다.
天職이 어부였던 시몬이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 앞에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시몬이
예수께 떠나달라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8절)
예수께서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불러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것이다.
예수와의 직접적인 대면에서 베드로는 예수께 대한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는 신비를 경험한 인간의 통상적인 태도이다.
매혹이 강하면 예수를 따를 것이고, 공포가 강하면 예수를 버릴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자 예수를 따라나섰지만,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압박은 늘 베드로를 따라다닐 것이다.
신앙이란 아마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여정이 아닌가 싶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찬미 수녀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5,11)
물길의 불안함도 덜어주고
만선의 기쁨도 맛보게 했던
배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이젠 안녕...
근데 제가 배를 대 놓은
호수 주변만 맴도는 건지
아님 진짜 배가 강아지처럼
제 주변을 맴도는 건지
인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또 다시 인사합니다.
안녕~
[출처] 루카 5,1-11 연중 제22주간 목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