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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8일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제1독서 : 미카 5,1-4ㄱ
복 음 : 마태 1,1-16.18-23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코로나 팬데믹 전에는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신용카드를 내면 직접 직원이 받아서 결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펜데믹 후에는 단말기에 소비자가 직접 긁어서 결재합니다.
그런데 돈은 그냥 주고받지요. 여기서 의문점이 듭니다.
돈이 더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하지 않을까요?
바이러스는 지폐보다 신용카드에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바이러스에 노출된 지폐에서는 바이러스가 30분 뒤에 자동으로 사라지지만,
신용카드에서는 48시간 뒤에도 바이러스가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용카드에서 변기보다 두 배 많은 세균이
검출되기도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물론 지폐도 깨끗하지는 않습니다.
1달러 지폐에서 약 3천 여종의
박테리아, 세균, 곰팡이가 검출되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글쎄 미생물이 그 안에서 자라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셀 때 침을 묻히는 것은 아주 안 좋으며,
예기치 않은 돈이 들어왔다면서 돈에 입맞춤하는 것도 매우 비위생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비위생적인 지폐이고 신용카드였습니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만 진리라며 착각 속에 매여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께서는 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사셨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사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노력에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모님의 탄생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님의 탄생을 경축하였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탄생으로 인해 하와의 죄악으로 생긴
죽음의 저주가 없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탄생은 구세주의 탄생과 아주 가깝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모님의 탄생이 없다면 구세주의 탄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알리는 서곡’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강생을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잉태를 준비하셨고,
성모님의 탄생으로 옛 죄의 저주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갈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우리 곁에서 항상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늘 힘써주십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윌리 페이머스 아모스)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반영억 라파엘 신부
현대를 자기 홍보 시대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알려야 성공에 도움이 된다며
이력을 과대 포장하고, 심지어 거짓으로 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는 법이고 마침내, 망신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으로
피알시대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떻게 든 자기를 알리고 인정을 원하며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모습에 견주어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한 그는 그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마태1,19).
그는 법의 의도를 지키는 법대로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허물을 감싸 안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친절하며 그의 성숙한 인간성이
하느님의 계명과 잘 융화되어 빛을 발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 인간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조사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약혼하고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것이 드러났으니
요셉에게는 얼마나 큰 고뇌와 의혹, 심사숙고,
마음의 동요, 당황스런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드러내어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바보짓이지만 그는 역시 의로운 사람으로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는 온유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버지의 특권과
아이를 낳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마태1,24).
마리아는 아기를 낳고 요셉은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마태1,21).
요셉의 마음고생 못지않게 마리아의 마음도 고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까닭입니다(루카1,45).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 안에 항상 함께하셨고,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즉 육화, 구세주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성모님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을 거치지 않고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못 누릴 따름입니다(차동엽).
그러므로 성모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예수님께’ 이르게 하시는 ‘전구자’ 이십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마리아처럼
굳은 믿음과 온유함 속에 꿋꿋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주님 안에 머물면 주님께서 필요할 때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묵묵히 위엄과 사랑과 믿음 안에서
피할 것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지혜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리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9월 10일은 어머니의 ‘기일’입니다.
2020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으니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코로나 팬데믹 중이어서 한국으로 가지 못하고,
뉴욕에서 교우들과 함께 연도를 바쳤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겠지만 저의 어머니도 저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첫 본당에서 저는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습니다.
40도가 넘는 고열로 중환실로 갔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병원에서 제가 퇴원할 때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분들의 도움이 컸지만,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간호로 저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제가 가야 할 본당이 정해지면
어머니는 저보다 먼저 본당으로 가서 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주임신부가 되어서 간 본당은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이 100명가량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3년 동안 저를 위해서
식사를 준비해주었고, 청소와 세탁도 기꺼이 해 주었습니다.
본당에서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방문하였습니다.
덕분에 아버님은 3년 동안 혼자서 지내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에 동생 수녀님과 저는 건강하게
수도자와 성직자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저와 동생 수녀님을 위해서 기도하실 것입니다.
올해는 기일이 주일입니다. 교우들과 함께 연도를 바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생일’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었던 성모님은 9월 8일에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겠지만 성모님도 예수님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모님이 예수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성모님은 신앙인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은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모님은 ‘배려와 헤아림’이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려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전구를 구하면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랬듯이
우리들의 청을 예수님께 말할 것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고통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모자(母子)가 만났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숨지신 예수님을 품에 안았습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성모님의 탄생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기도인 성모찬송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 날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을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 주셨나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이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오니
저희가 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축하합니다.
오늘은 '성모 탄생 대축일'입니다.
또한 오늘은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연합회>의 주보 축일입니다.
오늘 '성모성탄 대축일'로부터 열 달을 거슬러 올라가는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입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위해,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들려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다윗 자손으로 메시아이심을 전해줍니다.
동시에 마리아께서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
하느님의 특별한 간택을 받으신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오,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카 1,28)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됩니다.
이처럼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시고,
우리도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이처럼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으며,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어머니의 노래’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기뻐합니다.
“내 영혼이 내 구세주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루카 1,46-48)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성모님의 탄생 축일이다.
교회가 성모님의 성탄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구원의 역사적 측면에서 마리아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하려는 그런 의미가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1,1-7)로 시작한다.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첫째, 다윗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
둘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서의 합법성,
셋째, 구원 역사의 정점이며 종합이신 예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오의 족보는 우선 우리나라의 족보가 장자 중심으로 되어있는 것과도 다르지만,
당시의 유다이즘에서도 여인들의 명단이 열거되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들은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이다.
또 하나는 요셉과 관계없이 오직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탄생이다.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선 네 여인은 죄인들이며, 예수께서는 그러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들은 이방인들이다.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는 이 여인들이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넷째로 이 여인들의 결혼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결혼이 아니었다.
마리아도 요셉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건, 죄인이건, 또 평범하지 못한 결혼을 한 사람이건 상관없이,
인간적인 결함이나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 역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 구원계획의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인간이 지닌 어떤 결함에도 상관없이 당신의 주도로서 이루어진다.
선택된 마리아는 인간적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하느님 섭리의 표징이 되고 있다.
예수의 족보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요셉과 예수 사이에 모종의 단절이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님 출생에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진정한 아버지가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다.
이 족보는 예수를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메시아로 제시하면서도,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보증하는 요셉의 기능도 등한시하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더욱 중심이 되는 것은 마리아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면서 마리아에게서 동정으로 잉태되고 태어난 사실을 명확히 한다.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에 그가 당황스러워하고
파혼까지도 생각하며 고민했던 모든 상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 탄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임마누엘로서(이사 7,14),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아라는 사실과 더불어
마리아는 일찍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지내는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이다. 구세주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역시 작은 마리아로서 그리스도를 낳아 주어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잘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한다.
성모님의 생애
송영진 모세 신부
성경에는 성모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없는데, 그래도 성모님의 생애를 연상하게 하는,
또는 복음서 저자들이 성모님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루카 2,36-37)
한나가 남편과 같이 살았던 기간이 짧았다는 것,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는 것,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는 것 등이 모두 성모님의 생애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모님은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사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살아 있는 성전이신 예수님’을 떠나는 일 없이
끝까지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하셨고,
예수님 승천 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 분입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렙톤 두 닢’을 봉헌한 어떤 과부의 이야기에서도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1-44)”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혹시 그 가난한 과부가 성모님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는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루카 9,58),
성모님도 물질적으로는 늘 궁핍한 생활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진 것을 모두 다 봉헌하셨습니다.
<당신의 생애 전체를 하느님께 바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그 마음을 보셨기 때문인데,
아마도 그 과부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봉헌한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봉헌을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마주치신 과부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루카 7,11-15)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예수님도 외아들이셨고 성모님도 과부셨습니다.
울고 있는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때,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에
성모님이 겪게 되실 ‘비통한 심정’을 미리 보셨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울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성모님께도 하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젊은이를 살리신 일은,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이기도 하고,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죽은 젊은이를 살리심으로써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 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사건이지만,
그래도 성모님께 가장 큰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신 것은(요한 19,26-27),
어쩌면 ‘나인’ 고을의 과부의 모습을 기억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는 것은,
창조 이전부터 성모님을 협력자로 뽑으시고,
성모님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구원사업을 시작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페 1,3-5)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과 ‘탄생’과 ‘승천’은
모두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귀한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성모님을 본받아서, 성모님처럼,
그 선택과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끊임없이 관상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우리는 성모님 탄생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신앙 여정, 하나하나 짚어나가 보니 참으로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의 잉태 이후 성모님은 당혹해하는 부모와 맞서야 했고,
난감해하는 약혼자 요셉과 맞서야 했고, 따가운 이웃들의 시선과 맞서야 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성모님께서는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그뿐입니까? 정녕 있을 수 없는 마굿간 탄생, 헤로데 박해를 피하기 위한 이집트로의 피신,
때로 이해하기 힘든 아들 예수님의 돌출 발언, 결국 아들 예수님의 출가,
그리고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 결국 십자가 죽음...
정녕 성모님의 한평생은 길고도 험난한 여행길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우리에 앞서 때로 힘들고, 때로 외롭고,
때로 시련투성이의 가시밭길을 용감히 걸어가셨습니다.
때로 밀려오는 외로움에 돌아서서 울었습니다.
때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아득해 주저앉고만 싶었습니다.
때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온몸으로 떨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모님은 기다림의 달인, 견뎌냄의 달인이셨습니다.
희망의 달인, 믿음의 달인이셨습니다. 철저하게도 ‘Yes woman'이셨습니다.
그 바탕에는 다름 아닌 단순함, 소박함, 가난함, 겸손함의 덕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 앞으로 닥쳐오는 비관적인 상황 앞에서도
성모님은 단 한번도 No라고 하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Yes라고 외치셨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Yes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거룩한 생명의 잔, 하느님의 거처인 지성소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이 위대하신 이유는 그분의 신앙이
한 자리에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해나간 것입니다.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언을 들었을 때,
나자렛의 마리아가 지녔던 믿음은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을 출산하고, 그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시선을 항상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즉 관상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상처도 입으셨고, 이해하지 못할 일도 겪으셨지만,
늘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기도 안에서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갔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의 신앙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을 거듭했고,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이 있는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겸손하고 순종적인 마리아를 총애하시고,
하늘의 어머니로 품위를 격상시켜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재된 나의 이름
박상대 마르코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을 기념하는 축일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지냈다.
이는 마리아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에 건축된
성녀 안나 성당의 축성기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마리아의 탄생 장소가 나자렛임을 주장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제84대 세르지오 교황의 재임기간(687-701) 중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4대 축일을 정하고
우선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이를 경축하였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의 4대 축일은 성모영보(주님 탄생예고)축일,
성모승천축일, 성모성탄축일, 마리아 빛의 축일이다.
이들 축일들은 모두가 예수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성서상의 탄생예고와 출생,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심에 근거한 것이다.
마리아의 4대축일 중 “마리아 빛의 축일”은
마리아의 입장에서 본 객관적인 축일이지 마리아 본인의 주관적인 축일은 아니다.
이 축일은 이미 동방교회에서 예수 탄생 후 8일째 있었던 예수님의 命名과
예루살렘성전에서의 봉헌(루카 2,21-40)을 기념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축일의 이름도 “예수와 이스라엘의 만남 축일”이었다.
이를 서방교회에서는 마리아의 축일로 받아들였고, 후일 “초 축성과 촛불 행렬”을 곁들였다.
1960년 가톨릭교회는 전례개혁을 통하여
이 축일을 “주님 봉헌축일”(2워ᅟᅧᆯ2일)로 축일 명을 변경하였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장소와 일자에 대하여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서방교회에서 9월 8일인 오늘, 이 축일을 기념하였던 것이다.
이날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지만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9월 8일 성모의 탄신일에 거꾸로 계산하여 12월 8일로 정하였다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12월 8일 마리아의 잉태 후 9개월이 지난 9월 8일이 마리아의 탄생일이 되는 셈이다.
주님탄생예고축일(3월 25일)도 주님성탄대축일(12월 25일)에서
거꾸로 계산(9개월 전)하여 정해진 것이다.
[복음산책] : 예수님의 족보에 등재된 나의 이름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 축일에 봉독되는 복음은
17절과 마지막 24~25절을 뺀 마태오복음 1장 전체로서 예수의 족보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의 족보는 마태오복음(1,1-17)과 루카복음(3,23-39)에만 기록되어 있다.
둘은 다 구약성서를 토대로 족보를 편집하였지만
비교해보면 조상들의 이름에서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표기도 있고 누락된 조상도 있다.
아무튼 루카는 예수님부터 아담까지 77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마태오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14×3)대를 내려가며 기록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두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족보 중 어느 것도, 정확한 족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두 족보는 모두 고고학적으로 조상들의 계보를 밝히기보다는
신학적으로 예수의 정체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밝히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후손으로서 약속된 메시아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모든 조상의 계보를 통틀어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마태오가 편집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신학적으로 두 가지 특이할 만 한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① 첫째는 족보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부인 넷의 이름을 언급한 점이다.
여인들은 다말(3절), 라합(5절), 룻(5절)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6절)이다.
다말과 라합은 여호수아가 정복하게 되는 가나안의 원주민 출신이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인데 나중에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게 된다.(창세 38,6; 역대 2,4)
라합은 예리고를 정찰하려 나간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다고 해서
여호수아가 그녀와 가족들을 이스라엘 가문으로 받아들였다(여호 6,25)
룻은 나오미의 며느리로서 모압 출신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들어가 보아즈를 만나서 아들 오벳을 낳게 된다.(룻기 참조)
우리야의 아내는 바쎄바로서 다윗이 우리야를 전장으로 내보내
죽게 한 다음 아내로 맞아 솔로몬을 낳는다.(2사무 11,3.15.17; 12,24)
이렇게 마태오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 넷은 모두 이방인 출신으로서
각각 기이한 인연으로 이스라엘 가문과 관계를 가지게 되어 가문의 혈통을 잇게 한다.
이 점은 언급된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를 고려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구원의 역사에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개입하는 하느님의 섭리를 밝히고,
예수님을 또한 이방인의 메시아로 소개하려는 마태오의 강한 의도로 보인다.
② 두 번째로 지적할 점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는 대목에서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났다.”는 점이다.
족보의 모든 부분에 또 등장하는 4명 여인의 경우에도
아버지가 “주격”으로 아들은 “목적격”으로 구사되지만,
이 대목에서는 아들 예수가 “주격”으로 구사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의도를 더 가지고 있다.
하나는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를 강조하는 것이고,(1,18-25)
다른 하나는 예수님, 즉 하느님이 모든 구원 역사를
계획하시고 실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주역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과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23절)께서
직접 자기 백성을 죄에서 해방시켜 구원하실 것(21절)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마태오가 기록한 예수의 족보(마태 1ㅡ1-17)를 일년 중 3번 미사복음으로 봉독한다.
대림시기의 12월 17일과 성탄 시기를 시작하는 성탄 전야 미사,
그리고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 축일이다.
반면 루카가 기록한 예수의 족보(루카 3,23-38)는 성서를 공부하는 개인의 몫으로 돌렸다.
마태오는 족보에서 예수가 아브라함의 정통 후손인 다윗의 왕통을 이어받은 메시아임을 보여주며,
루카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가문이 다윗과 아브라함과 아담을 거쳐 하느님께 이름을 보여준다.
우리는 오늘만이라도 예수님의 족보를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가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묵상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 많은 인간이 사는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철저한 구원계획에 천지창조 때부터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구원 역사에 꼭 필요했던 사람들,
그가 비록 여자라고 해도 초대해 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성취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오늘까지 이어진 예수님의 족보에 바로
우리 각자의 이름도 登載되어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