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에트르타의 일몰, 30×24㎝, 종이에 먹과 채색, 2020.
앙리 마티스·빅토르 위고·오펜바흐… 화가·문학가·음악가들이 사랑했던 절벽
■ 노르망디 에트르타
화폭에 담지못할만큼 강렬한 색채
모네의 작품들도 실재를 못따라가
사과는 세잔 · 해바라기는 반 고흐
그림도 저마다 ‘대표 화가’있지만
에트르타 기암절벽 언뜻 안떠올라
인왕산 암벽 그려낸 조선시대 정선
이 거대한 형상 어떻게 해석했을까
고교 시절 국어 교사는 시인이었다.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나를 불러 놓고 당부했다. 사물에 주인이 있는 것처럼 말에도 주인이 있다. 그러니 앞으로는 언어를 고를 때 주인이 있나부터 살펴라.
국화는 서정주 것이니 근처에도 가지 말아라, 나그네는 박목월의 것이니 손대지 말아라. 진달래? 소월이 주인이다.
그 후로 그림을 그릴 때면 혹 주인이 있나, 살피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림에서도 조각에서도 주인이라고 함직한 목록들이 있었다.
사과는 폴 세잔, 수련은 클로드 모네, 해바라기는 빈센트 반 고흐다. 새우는 치바이스(齊白石)요. 말(馬)은 쉬베이훙(徐悲鴻)이다.
에트르타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나는 미술 평론가 K에게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에트르타의 그 기암절벽에도 주인이 있는가”라고.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듯한 그 하얀 절벽과 그 아래로 감아 도는 물, 석양 그림들을 미술관이며 책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뜻 에트르타의 대표화가라 할 만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화가가 그렸지만 아무래도 모네의 에트르타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K의 말이었다. “그는 수련이나 루앙 대성당을 그릴 때처럼 에트르타 가까이에 숙소를 잡아놓고 일출부터 일몰까지의 다양한 모습을 수없이 그렸으니까요.” 그랬을 것이다. 그 빛의 사냥꾼은 짚단에서도 성당 건물에서도 수련에서도 오브제에 떨어지는 빛의 미묘한 변화와 그 빛의 반사에 따라 달라지는 색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성당은 푸른색이었다가 분홍색으로, 혹은 안개 속에 서 있듯 몽롱하게 바뀌곤 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하얀 공룡의 화석같이 서 있는 에트르타의 절벽과 그 밑을 감아 도는 물결이 그에게는 아주 매혹적이었으리라. 그런데 왜 모네의 에트르타는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지 못했을까. 그것은 이미 대상이 가지고 있는 극적인 형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허다한 인상파 화가들이 에트르타에 매혹돼 다가갔지만 막상 허구가 실재를 못 따라가기가 태반이었다. 그것은 빼어난 미인을 화폭에 담았을 때와 비슷한 현상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어쨌든 모네는 수많은 에트르타를 그렸지만 그의 대표작은 수련과 루앙 대성당으로 남아있다.
드디어 차가 저만치 서 있는 에트르타를 바라보며 선다. 바닷가의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을 마시는데 가슴이 조용히 고동쳐 왔다. 마치 옛 화가와 대결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천천히 스케치북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가 그 모습을 담아본다. 어림없다. 그 거대하게 압도하는 풍경은 좀체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다. 몇 장 그려보아도 그 위용이나 기운이 옮겨지지 않는다.
아, 이 재주없음이여.
화폭에서 끈질기게 ‘빛’을 파고들었던 모네나 ‘시간’을 붙잡고 싶어했던 세잔, ‘형태’를 부수고 세우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했던 파블로 피카소. 그들에게도 이런 좌절의 순간이 있었을까. 아마 수없이 지나갔을 것이고 말고다.
에트르타 그리기를 포기하고 허름한 레스토랑에 들러 시장기를 달래는데 신기하게도 홍합이며 생굴 같은 메뉴가 있다. 마치 우리나라 남쪽 어느 어촌에라도 온 느낌이다. K와 와인 한 병을 놓고 잔뜩 쌓아 올려진 홍합에 마른 빵을 씹는 기이한 조합의 식사가 시작된다. 오늘 나의 에트르타 그리기는 사물의 거대성 앞에 자꾸만 작아지는 나의 붓이 완패를 당한 형편이기에 음식 맛마저 씁쓰름했다. 먹기를 마친 후 에트르타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올라가니 오래되고 작은 교회당 하나가 보인다. 현실이 그림이 되는 순간이다. 풀밭에 누워 모처럼 귀에 가득 차오는 바람소리, 물소리를 듣는다. 문득 작고한 소설가 C 씨가 원고지에 만년필을 찧고 싶은 순간들마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오늘 호락호락 곁을 주지 않는 에트르타로 인해 그와 비슷한 생각의 근처에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느낌이었는데 어느새 그 무거운 기분은 씻겨지고 없다.
서서히 에트르타의 바다로 노을이 진다. 하늘이 주홍빛으로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물은 순식간에 그 주홍빛을 받아내며 수채화처럼 푸른색과 섞여들고 보랏빛 구름들은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
보고 있노라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데 물감을 가지고 오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그리는 본능을 타고난 자는 그려서 성공할지 앞뒤로 재지 않는다. 특히 풍경이 황홀할수록 마음이 급해진다. 에트르타는 그런 면에서 어느 미학자가 지적한 대로 ‘유혹하는 주체’다. 매혹당한 화가들은 이길지 질지 생각하지 않고 그 주체에 다가가는 것이다. 오늘 행려(行旅)의 나 또한 그랬다.
문득 원(元)·명(明)대의 산수화 명인들이 이 에트르타를 수묵화로 그렸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아니 조선시대 정선이 이 앞에 왔었다면 필묵을 움직여 어떻게 해석해 냈을까. 그의 파도치는 듯한 금강산 그림이나 거대한 암벽의 인왕산 그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화두처럼 머릿속으로 한 가닥 생각이 지나간다. 형상을 사실(寫實)로 다가가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따라가지 말고 존재가 ‘거기 있음’만 인식하라. 형상이 압도적이고 장엄할수록 거기 끌려가지 말고 기죽지 말라. 상상력을 동원해 다시 짓는 것이다. 인간이 신을 닮은 위대성은 거기서부터 발현되어지리라. 에트르타가 미술 학교의 실습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물이 아름다울수록 ‘자기포기’가 먼저여야 된다는 이치, 생각해보면 어찌 그림에서뿐이랴.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 앙리 마티스·빅토르 위고·오펜바흐… 화가·문학가·음악가들이 사랑했던 절벽
화가와 문학가들이 사랑했던 에트르타는 파리에서 차로 세 시간쯤의 거리에 있다. ‘코끼리 바위’로 불리는 바닷가의 하얀 절벽과 자갈 해변 그리고 일출과 일몰의 모습이 장관이어서 예술가들이 글과 그림으로 많이 표현했다. 19세기 소설가 알퐁스 카는 “처음으로 바다를 보여줘야 한다면 그것은 에트르타”라고 했을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다. 작가 기 드 모파상이 이름 붙였다는 코끼리 바위는 무려 100m 가까운 석회암 절벽으로 돼 있다. 앙드레 지드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는 한동안 이곳 작은 마을에 머물렀다고 하며 빅토르 위고, 마르셀 프루스트,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도 이곳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화가로는 이 지역 출신인 외젠 부댕과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 귀스타브 쿠르베, 앙리 마티스 등이 에트르타를 화폭에 담았고 특히 근처 르아브르(Le Havre)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클로드 모네는 ‘에트르타 절벽의 일몰’ 등 연작을 많이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