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에 단식은 속죄의 날에
지키도록 정해져 있었는데, 공적으로 집단에서
지키거나 개인이 따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단식은 의도하지 않게 율법을 지키지 않았거나
어긴 것을 본래대로 회복하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또한 단식은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속죄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후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단식을 권고한 기록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문헌인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할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단식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시지 않습니다(마태 6,16-1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이 회개해야 할 때라고 보았습니다(3,2 참조).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스라엘이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혼인하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때라고 보셨습니다(이사 62,5 참조).
단식의 실천과 관련하여 세례자 요한이 강조한 회개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치의 초대는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영적인 삶은
비이성적인(irrational) 것이 아니라 이성에
지배되지 않는(nonrational)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단순히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한창현 모세 신부)
-출처 매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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