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구름 속에서 만들어져 내리는 빗방울이라도 그것이 어느 쪽으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즉 태백산맥 동쪽으로 떨어지면 동해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떨어지면 서해로 흘러간다. 학문도 이와 비슷하다. 한 때 지구촌을 양쪽으로 갈라놓은 채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도 따지고 보면 재산권(Property)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재산권이란 물권․채권 따위의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재산상의 권리를 말한다. 좀 더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재산권은 어떤 경우에 특정 사람이 특정 재산을 소유하는 권리가 정당하게, 즉 다른 사람의 합의하에 인정되는 지를 한정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소유란 단순히 소유주가 소유 대상과 맺는 관계가 아닌, 특정 소유주가 다른 이들, 즉 소유주의 소유물이 사용이나 수익에서 배제되는 이들과 맺게 되는 관계까지 포함한다. 그러므로 소유주에 의한 권리로서의 소유 주장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때문에 재산권 사상가들이 하는 작업은 이 소유 권리의 정당성을 검증하는 일인 것이다. 쉽게 말한다면, 재산권 사상가들은 “앞집에 사는 길동이의 아버지가 왜 그 집을 소유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따지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밴담(Jeremy Bentham)과 마르크스(Karl Marx)는 먼저 소유를 구분하는 기준, 즉 나의 것과 너의 것을 나누는 기준으로 "노동"을 꼽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이 사실은 그들 모두 "노동한 사람에게 그 노동의 결과가 귀속되게 함으로써 노동을 장려하고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에 기여한다."라는 당시의 사상적 의도에 동의한 셈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왜 노동이 소유 구분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관해서는 각기 다른 입장을 제시했다. 먼저 밴담은 노동이 소유 구분의 기준이 되는 이유로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 전체의 행복 증진에 이바지하기에… "라는 논리를 폈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를 구성하는 성원 중 일부가 희생되더라도 만약 전체 사회에 득이 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라는 논리였다. 즉 밴담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모티브로 해서 사람들끼리의 경쟁을 장려했으며 거기에서 발생되는 낙오자를 무시했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소유 구분의 기준으로 노동이 되는 이유로 "그 사람의 노동이 들어갔기에 그래야만 된다."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즉 마르크스는 밴담의 그것과는 달리 낙오되는 패배자들에게도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왜 이렇게 상반된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각각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재산권 사상을 형성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8, 19세기 유럽은 산업혁명 이후 산업 자본주의가 급성장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전의 봉건적 농업체제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사회의 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엔클로져(Enclosure)운동이 일어나 도시로 내몰린 농민들이 비참한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밴담은 전체 사회의 생산력 증대라는 목표에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고정시켜서 자신의 재산권 사상을 정립시키게 되었고, 밴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功利主義)이론은 당시 불평등한 재산권의 독점자라는 공격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던 부르주아의 계급에게는 서광과도 같은 복음이 되었다.
한편 마르크스는 자신이 직접 기아의 위기에 내몰린 빈민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을 했기에 당연히 당시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예찬했었던 "보이지 않는 손"의 악마적인 면을 똑똑히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이론은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시각에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은 당시 핍박받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사상적 무기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밴담의 재산권 사상과 마르크스의 그것을 세부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전술했듯이 밴담은 공리주의자의 시조이다. 이 공리주의란 사람에게 있어 선(善)이란 행복, 즉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상이다. 그리고 이 행복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에 부합될 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밴담이 그의 저서인 민법 원리(Principle of the Civil Code, 1830)에서 공리주의를 표현한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공리(utility)의 원리라는 것은, 어떠한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되, 그 행동이 당사자의 행복을 증대시키느냐 감소시키느냐에 따라서 판정하는 원리이다. 다시 말하면 행복을 증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행복에 반대되든지 하는 그 지향을 보아서 모든 행동을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원리이다. 나는 『어떠한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행동』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개인의 모든 행동뿐만 아니라, 정부의 시책에 대해서도 이 원리는 적용된다."
이러한 철학을 지닌 밴담은 근세 이후의 불평등한 재산권에 대한 새로운 정당성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는 재산권이나 정부의 권한 등 모든 것의 근거를 유용성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에 두었던 것이며, 이때의 행복이란 고통을 능가하는 쾌락에 의해 측정되는 것, 다시 말하면 일부 성원이 손해 보는 한이 있더라도 전체 사회가 이득을 보게 된다면 선이라는 생각으로 규정짓는다. 그래서 그는 위의 원리가 결코 평등해질 수 없는 재산 제도를 필연적으로 유발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을 다른 측면에서 고찰하게 되면 다음과 같다. 그는 행복 추구를 위한 법률의 목적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는데, "생계유지, 풍요, 평등, 안전"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 네 가지의 목적의 우선순위를 정했는데, "안전, 생계유지"를 "풍요, 평등"의 앞에 두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안전 없는 평등은 하루도 유지될 수 없고, 생계유지가 없는 풍요는 전혀 존재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그가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제를 철폐하고 재산을 사회가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가 공유재산제를 지향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류의 생존에 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는 필히 대공황을 통해 붕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한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도 재빨리 부르주아들을 척결하고 그들의 부를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들이 모두 사이좋게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밴담과 마르크스는 소유를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노동"을 꼽는 데에는 동의하였지만 "왜 노동이 소유구분의 기준이 되는가?"라는 물음에는 서로 다른 생각을 피력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의 사상은 평행선을 긋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각자의 사상은 자기발전을 거듭하여감에 따라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이데올로기들로 변화되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세계의 양끝에 서서 도저히 합쳐질 수 없어 보이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두 학파간의 시각 차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두 이데올로기도 자신들의 재산권 사상의 기초인 "소유의 권리는 노동한 자에게 돌아간다."라는 대명제에는 서로 동의하였다. 즉 서로 다른 사상들도 그 원점으로 돌아가 보면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양자를 혼합한 수정자본주의가 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