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기 2558년 갑오년(甲午年) 정월 성지순례
서울 강남 수도산 봉은사(修道山 奉恩寺)를 찾아서 ④
-영각(影閣)과 미륵대불(彌勒大佛) 그리고 기도-
지난 2월 23일, 북극보전을 물러나 미륵대불 쪽으로 가는 길에 다시 한 전각이 있는데 이 름하여 영각(影閣)입니다. 영각은 봉은사와 관련된 고승의 진영을 모신 전각입니다. 어떤 분이 모셔졌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들어 예를 올렸습니다.
영각(靈閣)
영각은 고승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추모하기 위해 모신 전각입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조 사당(祖師堂)이란 이름으로 사찰에 공헌이 지대하신 고승의 진영을 모시기도 합니다.
영각(靈閣) 편액. 석주(昔珠 1909~2004) 스님 글씨
우보처 무독귀왕 대원본존 지장보살 좌보처 도명존자
영각에는 중앙 불단에 지장삼존불상과 탱화가 있고 벽면으로는 좌측에 봉은사의 개산조로 여겨지는 연회국사(緣會國師)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그 옆에 석주(昔珠) 큰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불단 오른쪽에는 조선불교의 중흥조 보우대사(普雨大師)와 서산대산(西 山大師), 사명대사(四溟大師), 남호 영기율사(南湖永奇律師), 영암(映岩) 큰스님의 영정진 영이 모셔져 있습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봉은사 역사에서 생생한 발자취를 남기시고 을축년 대홍수 때 수많은 인명을 구해 활불(活佛)로 추앙받았던 나청호(羅晴湖) 화상의 진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연회국사지진영(緣會國師之眞影)
연회국사(緣會國師 ?~?)
『신라의 고승이며 봉은사의 창건주. 당대의 고승 낭지(朗智)스님의 사사를 받아 영축산에 은거하면서 늘「법화경」을 읽고 보현관행(普賢觀行)을 수행하였는데 정원 연못에 연꽃이 피어 항상 시들지 않았다. 국왕 원성왕이 상서러운 이적을 듣고 스님을 국사로 봉하였다. 한강 이남에 상서로운 흰 까마귀가 출몰한다 하여 상서로운 땅에 절을 짓고 연회국사께 주 석케 하니 이 사찰이 바로 견성사이며 봉은사의 전신이다.(신라 원성왕 7년, 791)
정원 연못에 연꽃 몇 송이가 있어 항상 시들지 아니 하였다. 국왕 원성왕이 그 상서로운 이적을 듣고 그를 불러 국사로 삼으려 하니, 스님이 그말을 듣고 곧 암자를 버리고 달아나 다가 서령의 바위 사이를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 한 노인이 막 밭을 갈고 있다가 스님에게 "어디를 가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이 "내가 들으니 나라에서 잘못 알고 벼슬로써 나를 구 속하려 하므로 피해 가는 길입니다."라고 말하자 노인은 듣고 나서 "여기에서 피할 수도 있는데 어찌하여 수고롭게 멀리 가려 하는가, 스님이야 말로 이름 팔기를 무척 좋아하는 구려." 하고 말했다.
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묻기를 "스님은 어디로 가느냐?" 하므로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 다. 노파가 다시 "여기 오기 전에 누구를 만났던가"? 하고 물으니 연회는 "한 늙은이가 있 어 나를 너무 업신여기므로 불쾌해서 그냥 오는 길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노파는 "그는 문수보살인데 왜 그 말을 듣지 아니하였는가?"라고 말하였다. 연회는 그 말을 듣고 놀랍고 송구스러워 노인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 이마를 조아리고 뉘우치며 "성자의 말씀을 어찌 듣지 않겠습니까? 지금 되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냇가의 노파는 도대체 누구 입니까?" 하였다. 노인은 "변재천녀이다" 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연회가 노인에게 감응 받은 곳을 '문수점'이라 하고, 노파를 만났던 곳을 '아니점'이라 한 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연회국사에 대한 기록의 대강이다.』 -봉은사 홈피에서-
허응당 보우대사진영(虛應堂 普雨大師眞影)
보우대사에 대한 이야기는 순례기 제1탄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
청허당 휴정대선사지진영(淸虛堂 休靜大禪師之眞影)
청허당 휴정대선사(淸虛堂 休靜大禪師 1520~1604)
『조선중기 한국불교 선맥을 이은 고승으로 임진왜란시 승병장으로 유명하다. 완산 최씨 로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이다.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ㆍ풍악산인(楓岳山人)ㆍ두류산인(頭流山人)ㆍ 묘향산인(妙香山人)ㆍ조계퇴은(曹溪退隱)ㆍ병로(病老), 법명이 휴정(休靜)이다. 평안도 안 주출신으로 아버지는 세창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유학자의 집에 태어나 성균관에서 3 년간 공부한 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지리산을 유람하다 태고 보우선사(太古普 愚禪師)의 법통을 이은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은사(奉恩寺) 주지를 거쳤으나, 명리란 본시 세속의 바깥일이지 수도승이 해야 할 마음속 의 일은 못된다 하여, 일체의 승직에서 물러나 금강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지를 유 력하면서 도를 닦는 한편 후학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문하에 수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 사명당 유정, 뇌묵 처영, 편양 언기, 소요 태능, 정관 일선, 현빈 인영 등이 특히 뛰 어나 일가를 이루며 조선 중기 불교의 꽃을 피웠다.
공을 세우는 등 나라를 지키는 일에 큰 몫을 해냈다.
뛰어난 활약상과 한국 불교의 숙원이던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명실공이 단일 불교를 형성 하였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나이 85세, 법랍 67세로 입적하였다. 입적 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선조는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 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시호를 내리고, 스님의 깊은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였다. 저서로는 <청허당집(淸虛堂集)>ㆍ<선가귀감(禪家龜鑑)>ㆍ<선교석(禪敎釋)>ㆍ<선교결 (禪敎訣)>ㆍ<(운수단(雲水壇)>ㆍ<설선의(說禪儀)> 등 다수가 있다.』 -봉은사 홈피-
사명당 유정대선사지진영(四溟堂 惟政大禪師之眞影)
사명당 유정대선사(四溟堂 惟政大禪師 1544~1610)
『1544(중종39)∼1610(광해군2) 조선 중기의 큰스님. 풍천임씨(豊川任氏). 속명은 응규(應 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유학자의 집에 태어나 어렸을 때에는 한학을 공부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599년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고 그 후 묘향산 보현사의 서산대사를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 구하였다.
과 당대의 시인이며 학자인 임제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노수신에게 학문과 시를 배웠다. 30세 때는 직지사의 주지를 역임하고, 32세에 봉은사 주지가 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에 은거하던 스승 휴정대사를 찾아가 참선에 몰두하였다.
다니다가 다시 풍악산으로 들어가 보덕사에서 3년을 보내고 다시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을 거쳐 병술년 봄에 옥천사 상동암에 이르러서는 제자를 모아놓고 설법을 하셨다.
평양 등에서 적을 대파하고 정부를 서울로 환도시켰다. 57세경 백화암(구표충사)에 근거를 두고 3년간 영남지방에 있으면서 군량미 수만 석과 갑옷 수만 점을 만들어 정부에 바치고, 다시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서 홍제암을 창건하였다.
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대일강화 전권특사로 임명되어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왜황의 항 복서를 받아 많은 문화재와 동족 3,500명의 포로를 생환하여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그 위 대한 공적을 표창하고 이조판서, 병조판서, 영의정 양국대장 통제군직을 임명하니 3일간 집정하다가 사직하고 가야산 해인사에서 조용히 정진하다가, 광해군 2년(1610년)경술 8월 26일 대중을 모아 놓고 임종설법을 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나라에서는 '자통흥 제존자(慈通洪濟尊者)' 라는 시호를 내렸고 국장으로 애도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란록(奮忠紓難錄)> 1권이 전한다.』 -봉은사 홈피에서-
남호당 영기율사지진영(南湖堂 永奇律師之眞影)
남호당 영기율사(南湖堂 永奇律師. 1820~1872)
『스님은 경전의 판각(板刻)에 주력하여 봉은사를 비롯한 지장암, 내원암, 흥국사 등에서 경판의 판각에 힘을 썼다. 어렸을 적에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문둥병까지 올라 병자의 무 리와 함께 유량하다 철원 심원사에서 대연(大演)스님을 만나 스님의 권고로 지장기도 용맹 정진을 통하여 문둥병이 낫자 대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스님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경판을 판각하고 사경을 했는데 사경을 할 때에는 삼배일자(三拜一字)를 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몸에서 피를 받아 먹물을 타서 사경을 하기 도 했다.
비롯한 경전을 판각하여 판전을 지어 봉안하였다.』 -봉은사 홈피에서-
영암당 임성대종사지진영(映岩堂 任性大宗師之眞影)
영암당 임성대종사映岩堂 任性大宗師(1907~1987)
『영암스님은 높은 수행력과 함께 조계종단 및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근ㆍ현대 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으로 1975년 당시 큰 어려움에 처한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 서 위기를 헤쳐나가 지금의 봉은사 기틀을 세웠다.
1907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15세에 통도사로 출가하여 구하 천보(九河天輔) 스님께 사 미계를 받았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뒤 통도사 해인사 등지에서 수 행하였으며 월정사 한암(漢岩)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는 사찰은 당시 어려운 경제 사정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해인사 주지 소임 이후 1975년 봉은사에 주석하시면서 봉은사의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동 국역경원장, 중앙종회의원, 종회의장, 총무원장, 동국학원 이사장, 원로회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고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하였다.
트러짐이 없이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으며 늘 스님은 주머니가 둘 달린 옷을 입고 다니셨는데 오른쪽 주머니에는 공금을 왼쪽 주머니에는 사비를 넣고 다닐 정도로 철 저하셨으며, 종단과 절의 어려운 일에 늘 발 벗고 나서곤 하였다.
서 다비식을 거행하였다. 다비 후 10여과의 사리가 출현하여 현재 봉은사에 봉안된 스님 의 부도에 모셔졌다.』 -봉은사 홈피에서-
금정산인 석주당정일대종사(金井山人 昔珠堂正一大宗師)
한국 현대불교의 산 증인인 석주(昔珠) 큰스님은 1909년 경북 안동 북후면 옹천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5세인 1923년 서울 선학원에서 남전(南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고, 6년 간의 행자 생활을 거친 뒤, 1928년 범어사에서 득도하시고, 1933년 범어사 불교전문 강원 대교과를 마치셨습니다. 산 동래 금정선원장을 역임했으며, 1965년에는 동국역경원 부원장으로 추대돼 역경사업 을 주도하셨습니다. 하셨고, 2000년에는 보문사에 안양원을 세워 노인복지활동에도 힘쓰셨습니다. 계종 대종사, 칠보사와 봉은사 조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등을 지내셨으며, 한글팔만대 장경 역경사업 후원회장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에 힘쓰다가 지난 2004년 입적하셨습니다.
영각을 참배하고 난 후 미륵대불을 뵙고자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미륵대불을 뵈옵니다.
미륵대불(彌勒大佛)
1996년에 완공된 미륵대불은 봉은사의 새로운 성보로써 높이 23m로 국내 최대의 크기의 부처님입니다.
1만명 이상이 불사에 동참하여 1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대작불사라고 합니다.
미륵대불전에 오니 참배객들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우리는 한쪽 가장자리 에 서서 기도를 봉행하였습니다. 삼배를 올리고 반야심경을 합송하고 발원문 낭독과 축원 그리고 특별히 정수님 친정아버님 쾌유를 비는 발원문을 올리고 사홍서원으로 마치는 약 식기도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의식을 갖추어 목탁성을 울리며 하고 싶지만 여건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륵여래불께 삼배 올립니다.
저희들의 삼배를 받으소서.
반야심경 봉독
다음은 향불교성지순례발원문을 염화님께서 낭낭하게 발원문을 낭독해 주셨습니다. 이 장면을 잡았어야 했는데... ^^
동참 법우님과 미동참 법우님도 다함께 축원 올렸습니다.
이 장면은 정수님의 친정아버님의 쾌유를 기원하는 발원문 낭독입니다.
바라옵건대 향불교 정수님의 춘부장 어르신에게 하루속히 크나큰 미묘한 가피를 내리시와 전과 같은 건강을 주옵소서. 건강의 기쁨을 내리소서.
저희들이 언제나 부처님의 크나큰 원력 가운데 있음을 감사하오며, 병없이 건강하고 착실 하게 살아가는 불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발원한 공덕으로 정수님 불자의 가족과 향불교 법우님들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법계의 모든 중생들도 다 부처님의 대자대비 광명 속에서 생명의 실상을 증득하여지이다.
감사의 답례 -미소님 사진-
기도 발원이 끝나고 향불교 천수막을 제작 보시해 주신 화광님께 정목스님의 친필 사인 이 있는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책을 한 권 드렸습니다.
공양미를 탐하는 비둘기
비둘기와 참새들이 엄청 많았었는데 다 날아가고 한 마리가 남아 있네요. ^^
여기서 기념사진 찍을 터이니 다 모이세요.
활짝 웃으세요~!
과객을 불러 저도 섰습니다. ^^
여기는 미륵전(彌勒殿) 뒷모습입니다. -미소님 사진-
미륵전에는 불상이 없습니다.
불상이 있어야 할 자리엔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미륵대불을 바라보고 예배할 수 있도록 하 였습니다.
염화님, 미소님과 더불어 미륵전에 들어 예를 올렸습니다.
미륵전(彌勒殿) 앞모습입니다.
미륵전은 미륵대불을 완공하고 예전의 법왕루 건물을 그대로 옮겨 지은 건물입니다. 이는 법왕루를 새로 증축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락집 형 태의 건물입니다.
이제 판전(板殿)으로 나아갑니다. 제5탄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
첫댓글 순례길의 최고는 법우님과 함께하는 기도 _()_
날마다 좋은날, 가족건강을 빕니다.
앞으로 우리는 전각에 들어 기도하기 보다는 야외의 탑이나 불상 앞에서 기도하면 좋을 듯 합니다. 그리 해왔지요. 보광사 대불 앞 기도도 생각나네요. 늘 건강 하세요. _()_
우리는
영각에 모신 고승분들의 발자취와 미륵대불전의 기도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_()_
영각의 고승에 대하여 행장 정도는 숙지해야 할 것 같아 길지만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_()_
미륵대불전의 기도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많은 고승님들 그리고 근간엔 영암스님 석주스님이 주석하셨내요.
영암스님은 70년도 초반에 대원정사에도 상주 하셨지요.
석주 큰스님은 은평구에 있는 수국사에서 자주 뵈었던 기억이 나내요.
사찰순례의 하일라이트는 기도 발원이었지요.
함께 동참 안하신 분들도 한분 한분 모두 축원 올려주신 백우님 수고 하셨습니다.
....나무묘법연화경()()()
영암 스님, 석주 스님은 많이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친견한 적은 없었네요. _()_
석주 스님께서 수국사에도 자주 가시어 법문하셨군요.
대불전에서 기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건안 하시지요??
()()()
감사합니다. 다 읽으셨나요 아닌 것 같은데... _()_
역시나 백우님에 정성어린 순례기에 감사드립니다. _()_
감사합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_()_
마음을 턱 놓고 차를 마시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세한 설명 감사합니다._()_
상세히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_()_
영각에 있는 조사님들을 뵈오니 참으로 청사에 빛나는 분들이네요. 이런 훌륭하신 분들이 봉은사를 이끌어 오셨으니히 정수님의 친정아버님의 쾌유를 비는
감했습니다. _()_
오늘날에도 봉은사가 빛나는 것 같습니다. 백우님의 지적처럼 나청호스님의 초상화도 모시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듭니다. 미륵대불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특
발원문도 올리셨군요. 빠른 쾌유를 빕니다. 그런데 단체사진에서 현수막이 보이지 않네요. 깜박하셨나요
저도 봉은사를 순례하면서 참 많은 고승대덕들의 향훈이 남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_()_
미륵대불전에서 정견님도 기도축원올렸습니다. ^^ 정수님 친정아버님 쾌유를 한마음으로 발원했습니다.
미륵대불전에서도 현수막을 들고 하는 것인데 깜빡했네요. 여기서 들고 기념사진 찍었으면 좋았을 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