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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으론 알 수 없는 예수님 (요 7:1-5)
요 7:1-5=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은 자들에겐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멸망을 받을 자들에겐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냐 라고 묻는 것은 항상 현재 진행형의 질문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답을 해야 합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하지 말고 솔직한 자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왜? 내 신앙고백을 남의 눈을 의식하여서 거짓으로 합니까?
그건 어리석은 겁니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자신에겐 솔직해야 해요.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예수가 누구지?
나에겐 예수님은 어떤 존재이지?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지!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난 진짜 예수 믿고 있는 것이 맞는가?
우리는 늘 묻고 또 물어야 해요.
이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하면 신앙은 외식으로 허구로 흘러요.
평생 예수와 상관없이 교회 마당만 밟고 다니다가 지옥에 갑니다.
괜히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 어쭙잖은 종교인으로 살다가 지옥에 갈 바엔 세상에서 즐기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이 훨씬 덜 억울할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다가 뭉터기로 망한 사람들이 유대인이에요.
이들은 그 종교성을 지킨다고 요즘말로 하면 흔하디 흔한 나이트클럽 한번 못가 보았어요.
자기 딴에 경건하게 산다고 살았지만 결과가 지옥행인데 경건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일평생 소중하게 훈장처럼 지킨 그 경건이 지옥을 가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어요.
신앙은 신적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삶이기 때문에 대충 대충 할 수가 없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위선을 떨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희노애락하는 삶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내 말 속에, 내 호흡 속에 예수님의 생명의 기운이 흘러 나와야 해요.
예수님의 피 냄새가 풍겨나야 해요.
난 예수님의 피흘리심 때문에 살았다는 고백이 삶에 고백으로 흘러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가 되어야 예수를 만났다 할 수가 있고, 예수를 믿는다 할 수 있어요.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덤덤하게 들린다면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에요.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도 예수를 모르는 형제들과 같아요.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덤덤해 질 수가 없어요.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지고, 예수님의 피가 주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죄사함 받음이 오르가즘처럼 감동이 되어 온 몸과 영혼을 울리는 떨림으로 너울처럼 일어나요.
그럴 땐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부럽지가 않고 염려와 근심이 없어요.
죽음조차도 감사로 받아들일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아! 스데반이 이런 감동이 있었기에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할 수가 있었구나!
바울이, 12제자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런 기쁨으로 살았구나! 를 알게 되어져요.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밤하늘에 불꽃놀이 하듯이 간헐적으로 예수님의 피가 주는 위로와 안식과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와요.
마치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주님의 재림 모습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진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보는 순간엔 베드로의 눈엔 오직 예수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 순간 만큼은 세상은 없었어요.
베드로 자신도 보이지 않았어요.
오로지 예수님만 보였어요.
물론 그 때 뿐이지만!
또 다시 냉엄한 현실로 돌아와야 하지만!
그러나 베드로에겐 그 변화산의 놀라운 감동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었어요.
사도 바울도 삼층천을 보았기에 그 모진 고난조차도 주님의 뜻으로 보고 이겨낸 겁니다.
이런 감동이 성령이 임한 사람은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요.
사도들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없는 믿음을 보이려고 쇼를 하지 않았어요.
실제로 성령이 주는 하늘나라의 소망과 예수님의 피뿌림이 주는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요즘말로 신앙은 쇼가 아니에요.
예수 믿는 것은 쇼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실제이고 사실이에요.
누가 공교하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인들에겐 전설의 고향과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어요.
예수!
그 사람이 누구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지!
예수 안에선 그 무슨 짓을 해도 정죄함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
에이! 목사님 무슨 그런 농담을!
살인해도 천국간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 그 말 못 믿겠습니다.
물론 비유가 극단적이긴 하지만 사실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늘 자기 행동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비유가 믿어져야 예수 안에선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십니다.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 모든” 속에 괄호 열고 여러분들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를 집어넣고 괄호를 닫으세요.
예수님의 피가 죄인의 그 어떤 죄도 사할 능력입니다.
이걸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쇼를 한 게 아니에요.
헛 죽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엔 실제로 죽음이 넘어 갔어요.
장난이 아니라니까요.
설정이 아니고 실제였어요.
우리나라가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을 한 것이 사실이듯이 예수의 피로서 모든 죄가 깨끗케 되는 것도 사실이란 말입니다.
수백만 명이 죽었어요.
진짜로 북한 공산군에게 죽었어요.
요즘 젊은 세대들이 6. 25 전쟁을 말하면 그게 뭔데요?
그런게 있었나!
왜? 전쟁을 했지!
북한! 그 사람들 우리 형제잖아!
왜? 어른들이 북한이 핵무기 만든다고 난리를 치지!
이 시대 교인들이 마치 북한사람들과 교류하면서도 북한을 모르는 철없는 좌파들과 같아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몰라요.
전쟁의 쓰라린 아픔을 모르는 자들에겐 북한은 이웃이고 형제로 보여요.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전쟁을 치러서 나라를 지켜낸 어른들에겐 북한은 적이에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적이에요.
내 부모 내 형제 내 이웃 내 친구를 죽인 적이에요.
과거 삼국시대 때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김춘추의 한이 서려 있어서 그랬어요.
하나뿐인 자기 여동생의 한을 풀기 위해서 남의 나라 힘을 빌려서라도 백제를 멸망시킨 거에요.
전쟁 통에 가족과 형제를 잃은 사람들에겐 한이 서려 있어요.
저도 이산가족이지만, 이산가족들에겐 북한은 이웃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고 적이에요
베드로와 바울을 말하다가 왜? 갑자기 북한을 말하고 좌파를 공격하느냐? 라고 휘둥그레지지요.
그러나 제가 공격하는 것은 믿음에 좌파들을 공격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상주의로 만들어 버린 자들을 공격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짐승의 피처럼 하찮게 여기는 자들을 저주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희화화 하여서 아무데서나 십자가를 팔아먹는 육에 속한 자들을 탄핵하는 겁니다.
육으로 예수를 판단하고 아는 것으로 진리라고 외치는 자들을 향한 저주를 끌어 붓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이 이성으로 좋은 나라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안주거리가 아니에요.
믿음에 좌파들은 마귀와의 처절한 싸움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자로 둔갑시켜 놓았어요.
죄를 모르고 마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희화화 하는 겁니다.
자신이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니 십자가를 앞세우고 퍼포먼스를 하고 유희를 즐기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광우병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데 이용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명박 정권은 물러가라고 외치는데 이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노무현이를 순교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죄를 모르고 마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전 죄를 알고 마귀를 알아요.
어르신들이 6. 25 전쟁을 경험했듯이 저도 마귀가 노리는 노림수를 알아요.
죄가 뭔 줄 알아요.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알아요.
예수님의 죽으심도 알고, 십자가의 의미도 알아요.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능멸하는 자들을 용서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 이미지 관리나 하고, 자기 배를 불리고자 하는 거짓 목사들을 공격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과거에 예수도 모르고 십자가도 모르면서 목사 노릇을 했고, 목사 대접을 받으며 살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도 모르고 십자가도 모르면서 남들보다 더 큰 소리로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했으니까요.
내 열심과 충성심으로 예수를 말했고 십자가를 말했으니까요.
내 딴엔 죽도록 충성하고 오로지 교회만을 위하고 살았어요.
물론 수십 년을 한결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한 동안은 그렇게 살았어요.
내 가정보다 내 가족보다 더 예수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았어요.
육신의 영달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미명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살았어요.
온 가족이 오로지 성경대로 살고자 애를 쓰고 또 썼어요.
자식들도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교육하였듯이 저 또한 어린 자식들과 아내를 철저하리만치 율법신앙으로 가르치고 행하도록 했습니다.
TV는 마귀상자라고 해서 집안에서 몰아내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오직 성경만 읽으며 경건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시간만 나면 성경보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살았어요.
교회 일이라면 내 집 일보다 앞서서 했어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내 집에 쓸 돈은 없어도 각종 헌금은 빠트리지 않고 남보다 더 했어요.
마치 바울이 율법에 흠이 없는 것처럼 살았듯이 제 나름대로도 바울처럼 흠 없이 살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그 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 믿는 것인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에 제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속된 말로 영안이 열리니 예수와 상관없는 종교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알았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 와서 보면 그게 십자가의 원수였는데!
죽도록 예수를 위해서 충성하고 살았는데 예수와 원수였다니!
율법주의와 성화주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죽이는 거에요.
제가 그땐 철저한 율법주의였으니까 십자가의 원수 노릇한 거지요.
성화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입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으면서 예수를 위하고 사랑한다고 떠들었어요.
이런 어리석음을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니 알게 된 겁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서 보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 달고 있다는 것이 보여졌어요.
야! 내가 예수를 죽인 원수였구나!
이런 우매함이 어디에 있나!
그래서 지금은 과거의 저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에 감추고 싶은 수치이고, 어리석음이지만 부득불 말하는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았던 죄인의 괴수를 길이 참으시는 중에 용서하시고 찾아 주셨는데 어찌 십자가를 말하지 아니할 수가 있나요.
누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두렵지가 않아요.
다만 예수님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신데 어찌 그 불꽃같은 눈을 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 여러분들보다 반듯하지 않아요.
내 행실이 올바르고 착해서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에요.
저는 여러분들보다 더 이기주의고, 더 더러운 사람이에요.
내 속엔 악으로 가득차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이용해서 입신양명(立身揚名) 할 수 없을까 꿈꾸는 악당입니다.
나도 남들처럼 큰 교회 하나 꿰차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고 싶어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이런 육신의 생각이 잔상으로 남아서 나를 유혹해요.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입니까?
가장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예수를 이용하고자 궁리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철면피 같은 인간입니까?
그러나 전 이런 개 같은 자를 주님의 피가 뿌려져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이 나의 못남과 악함보다 더 크기 때문에 담대히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의 악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그 피를 자랑하고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는 능력이에요.
이 사실이 믿어지기 때문에 나의 악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용서해 주신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를 말하지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이런 죄인도 넉넉히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이런 내가 용서 받고 사는데 착하신 여러분이야 얼마나 더 큰 은혜를 받고 살겠어요.
우리 모두 그 은혜를 찬미하고 자랑하자는 겁니다.
목사의 자격에 함량이 부족한 사람을 목사 노릇하게 하시니 이 얼마나 영광된 일입니까?
한마디로 깜도 안 되는 위인을 깜 되게 만들고 계시니 이 얼마나 놀랄 일이에요.
전 누가 목사님 신앙생활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이렇게 말해요.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자랑하고 사는 겁니다 라고!
내가 용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사는 것입니다 라고!
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했나?
예수님 자랑하라고 구원했어요.
아들자랑 좀 하라고 죄인 중에 괴수를 용서해 준 겁니다.
그래서 전 에베소서의 말씀을 참 좋아해요.
구구절절이 탄성을 자아내고 내 자아를 해체시켜주는 말씀들이에요.
건성건성 읽지 마시고 죄인의 눈으로 정독하면서 읽어보세요.
오늘은 시간이 좀 갈 것 같으니 인내하고 들으세요.
아무리 바빠도 한번 보고 갑시다.
엡 1:3-1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세상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고 하잖아요.
대통령도 아니고 하나님이 선택했대요!
그래서 하늘에 복을 뭉텅 주셨다고 합니다.
송두리째 부어 주셨다고 합니다.
복에 텀벙 담궜다고 합니다.
그 복이 무언가 하면 예수에요.
예수 안이에요.
더러운 죄인을 예수의 피로 거룩하게 하셔서 자기 아들을 만들었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입고 거룩하게 한 것은 때가 찬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예정 된 것이라고 합니다.
전 이 말씀에 너무 너무 놀랐어요.
세상에!
일전에 제 말을 했지요.
전 없었던 자인데 생겨나게 되었다고!
전 아버지가 58세이고 어머니가 47세 때 태어났어요.
노인네가 낳은 겁니다.
왜? 노인네의 몸을 빌려서 나게 하셨을까요?
예수 안에서 때가 찬 경륜에 의하여 예수 안에서 천국백성 되게 하기 위해서예요.
이 마지막 때에 예수의 피로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라고 그러셨어요.
아니! 조선시대 태어났으면 어쩔 뻔 했어요.
아니! 지금이라도 복음도 모르는 곳에 살았으면 어찌했겠어요.
더 사실적으로 예수의 피도 모르면서 과거처럼 목사 노릇했으면 어쩔 뻔 했어요.
제가 이근호 목사를 만나서 복음을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 속에 포함된 예정된 수순이었어요.
제가 구원을 받고 보니 이런 사실들이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여지더라고요.
마치 사극을 보면 첫 회에 주인공의 현재를 말하다가 2-3회 지나면 주인공의 과거 출생부터 시작하여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서 과거에서 현재를 풀어내는 것과 같아요.
예수 안에 들어오고 보니 제가 늙으신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것과, 아내를 만난 것과, 율법 아래서 수십 년 동안 종노릇하게 한 것과, 늦게나마 이근호 목사를 만나서 복음을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사건들이에요.
그래서 전 노사연씨가 부른 “만남”이라는 노래를 좋아해요.
좋아하는 노래가 몇 개 있는데 모두가 간증적인 가사들이에요.
만남이라는 노랫말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지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이걸 저는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였어! 라고 불러요.
제 아내를 만나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고, 이근호 목사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요.
모두가 십자가 피를 깨닫고 증거하라고 만나게 해준 분들이에요.
세상에 없어도 될 자를 있게 하셔서 이런 큰 은혜를 입게 하셨으니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웬 은혜이고! 웬 사랑입니까!
이걸 어찌 감사치 아니할 수가 있어요.
저와 여러분이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의 만남이에요.
왜? 때가 찬 경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나요.
그 아들의 피로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찬미하고 자랑케 하시려고 했다고 하잖아요.
누구를 자랑하라고요?
예수 자랑하라고!
예수 믿는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악당의 죄도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는다는 것을 자랑하라고 이런 은혜를 주신 겁니다.
그럼 지금부터 왜? 우리가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엄청난 축복인지를 예수님의 동생들과 비교하여서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믿지 않는 예수님의 동생들 이야기입니다.
우리 생각엔 예수님의 동생들이니 당연히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선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왜? 예수를 가장 잘 믿어야 할 동생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겁니다.
무엇이! 어떤 것이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한 것들인가?
무엇이 육의 생각인지 살펴보자고요.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육적으로만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수십 년을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눈만 뜨면 보고 한 이불을 덮고 한 솥밥을 먹으면서 살아도 예수님을 몰라요.
섬뜩하지 않나요?
예수님의 동생들에 사고가 곧 모든 인간들의 사고라 할 수 있어요.
우리도 예수를 모르면 이런 생각을 해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육으로 예수를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에요.
예수님의 동생들의 모습을 보면 육에 관심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요.
요 7:3-4절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예수님의 동생들은 한마디로 예수님에게 시골에 있지 말고 큰 곳에 나아가라고 합니다.
왜? 그런 좋은 재주를 가지고 촌 구석에서 썩고 있느냐 에요.
동생들은 형님을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겁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하나님의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성공해야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맞아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강한 분으로 생각해요.
그 누구도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힘 없이 죽어 주신 하나님을 몰라요.
마귀가 광야 사십일을 주리고 있던 예수님을 찾아와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영웅이 되어서 입증해 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하나님의 아들을 원해요.
이건 마치 과거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저도 과거엔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의 능력을 평가 했어요.
믿음이 좋으면 영웅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 달라” 는 기도를 수 없이 했어요.
율법 아래 있을 땐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사는 줄 알았어요.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면 예수 믿으면 잘 사는 것처럼 보여요.
구약엔 사실이잖아요.
특히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보면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말씀에 불순종하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 받는다고 했잖아요.
육은 문자적으로 이해를 해요.
하나님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예수도 구원도 인간적으로 이해를 해요.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믿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면 교회가 부흥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경쟁하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복음을 말하면 교인이 얼마나 모입니까? 라고 묻잖아요.
교회가 크면 하나님이 함께하고 교회가 적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잖아요.
육에 속한 사람은 열이면 열 명 다 이렇게 물어요.
노회에 가보면 목사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대번에 드러나요.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있는지 들어나요.
만나서 하는 첫 마디가 교회 부흥 많이 되었지? 라고 물어요.
자랑하는 게!
교회 건축 했다!
주차장 넓혔다!
차 바꿨다!
그도 아니면,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나온다든가!
아니면 돈 많은 회장이나 사장이 나온다고 하든가!
그도 아니면 성지순례 갔다 왔다거나, 아니면 갈 것이라고 자랑해요.
어느 놈도 예수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요.
아예 관심조차 없어요.
예수나 십자가를 모르니까 그래요.
그들 속엔 예수가 없어요.
온통 교회뿐이에요.
예수님의 동생들과 같은 사고방식뿐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은 육이니까요.
예수님의 동생들 생각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능력을 행하면 많은 사람들이 믿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넓은 무대로 나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능력을 보여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초막절을 기해서 유대로 올라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겐 봄, 여름, 가을 절기가 있어요.
(7대 절기는 특강 란에 올려져 있으니 침고하세요.)
유대인들에겐 7대 절기가 있는데 이를 세 절기로 나누어서 지내요.
봄 절기는 무교절이라고도 하고 또는 유월절이라고도 합니다.
여름 절기는 오순절 또는 칠칠절 또는 맥추절이라고도 해요.
가을절기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하며 수장절이라고도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런 절기들을 주면서 남자들은 일 년에 세 차례씩은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지내라고 했어요.
그러니 이 삼 대 절기만 되면 예루살렘은 원근각처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로 넘쳐났어요.
예수님의 동생들은 초막절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때이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떨치기에 안성맞춤이라 생각한 겁니다.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 앞에서 능력을 행하여 보세요.
대번에 전국구로 뜨지요.
예수님의 동생들이 이걸 노린 겁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한 갖가지 기적들을 종합해 보면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어필이 될 것이라고 믿었어요.
요즘 말로 큰 교회 하나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처럼 보인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문 5절에서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라고 말해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라 라는 말은 예수님이 무엇 하러 오신 분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족을 베풀고 병자를 고치고 하니 인간들의 육신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들은 더 큰 무대에 나가서 성공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촌 구석에서 고생하지 말고 큰 무대로 나가서 성공해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육적으로는 절대로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도리에 세상에선 장려 할 일입니다.
예를들어 우리 형제가 만약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개척한다고 한다면 성공하기를 바라잖아요.
다른 교회들 보다 더 큰 교회로 부흥되기를 바라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발상이 육이라고 합니다.
저주 받을 생각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도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과 같은 형을 두었다면 얼마든지 동생들과 같은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육은 힘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성공신화를 쓰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제가 만약에 저에게 육으로 말한다면 예수고 십자가고 다 때려치우고 교인들 좋아하는 기복신앙이나 은사 신앙으로 교인을 혼을 빼서 교회를 부흥시키라고 할 겁니다.
괜히 돈도 안 되고 교인들도 좋아하지 않는 십자가 붙잡고 여러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호응하고 좋아하는 목회를 하라고 할 것입니다.
제 주변에 아는 일가친척 형제들도 그래요.
제 누님이 그래요.
만나면 요즘 교회 손님이 많이 오나! 라고 물어요.
누님 집 옆에 있는 교회 목사는 외제차 타고 다니던데!
그러면 전 교회가 하꼬방만 해서 그런지 손님이 도통 안 오네요.
누님이 돈 많으면 교회 하나 크게 지어 줄래요.
미친놈! 내가 돈 있으면 먹고 죽겠다고 하면서 난 도통 널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해요.
왜?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목사가 되어서 그런 생고생을 하느냐! 라고 측은해해요.
제가 과거 직장 생활 할 때는 돈도 많아 벌고 잘나갔거든요.
그 때는 누님을 찾아가도 돈 씀씀이가 쩨쩨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누님은 그 때를 그리워하는 거예요.
몸은 늙어가고, 교회 손님은 없다고 하니 걱정이 태산인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잘 좀 해서 손님들이 많이 오도록 하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대꾸하기를 누님이 우리 교회에 나오세요.
울산에 있는 일가친척들만 다 모아도 백 명은 될 것입니다.
누님네 식구들만 다 와도 금방 차고 넘칠 것 같은데 좀 나오지요.
조카들 보고 삼촌 교회 좀 가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퉁퉁 달아서 미친 소리 하지 말고 가라고 해요.
이걸 어찌 나무라겠어요.
제가 잘못 되었지!
제 누님은 지극히 정상이에요.
누님 말대로 내가 미친놈이에요.
저도 제가 왜? 목사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거기다가 그 누구도 듣고자 하지도 않고 알고자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개도 물어가지 않을 예수 십자가는 알아가지고 이 모양 이 꼴로 개고생하고 있으니 내가 미친놈이 맞지요.
육으로 보면 예수님의 동생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말을 형에게 조언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동생들의 제안은 인간 세계에서는 충분히 호응 받을 수 있는 제안들이에요.
그런데 성도라면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과연 예수님께서도 동의하시느냐 에요.
예수님께서 동생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도 동생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께서 동생들의 제안을 거부하였다면 성도들은 예수님의 형제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동생들에 생각이 마귀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혹시나 나에게 예수님의 형제들과 같은 사고가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어요.
아니 점검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우리도 이런 생각으로 살아요.
이제부터 중요하니 새겨서 잘 들으세요.
저 역시도 복음을 전하면서 야! 오늘은 하나님이 교인들을 교회로 보내 주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 할 때가 많아요.
지나고 나면 역시나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혹시 블로그에 글을 보고 누가 온다고 하지나 않을까 생각해요.
요즈음 같으면 하루에 만 명 이상씩 방문해요.
울산에도 1-2백 명이 보고 있어요.
예전엔 전국적으로 전화가 참 많이 왔는데!
지금은 뜸해요.
그러니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어요.
이게 육의 바램이거든요.
육에 소망은 더 크게, 더 높게, 더 넓게, 더 많아지기를 바래요.
이건 몸뚱아리 끌어안고 살아가는 한 없어지지가 않아요.
성도는 이 두 사이에 끼여 있다는 것을 아는 자에요.
우리는 이 뻔한 싸움에 끼어서 일평생 한숨 쉬면서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서 또 다른 법이 어이구! 이 미련하고 하나님 말씀을 더디 믿는 놈아! 라고 책망해요.
그래요 우리는 예수님의 동생과 같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안 버려져요.
과거에 복음을 몰랐을 땐 탐심을 버립시다! 라고 했는데 복음을 알고 보니 이런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실제로는 버려 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결국 오늘 본문은 우리 안에 있는 죄악성을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제 아내가 아침이면 묻는 말이 있어요.
블로그를 개설하고 난 후에 새로 배운 말이에요.
어제는 몇 분이나 다녀갔어요.
응! 만 명!
예~에!
그렇다니까?
당신도 믿기지 않지!
나도 그래!
이건 아니지!
물론 저 역시도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더 많은 분들이 계속하여서 보시길 바래요.
아내와 이런 말을 합니다.
여보! 이러다가 숫자가 뚝 떨어지면 어떨까?
마치 기드온의 군사를 줄이듯이 줄이고 줄이고 하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고파해서 하나님이 사용하니 우린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저나 제 아내의 마음은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아요.
이게 육이에요.
전 과거에 복음을 모를 땐 성령을 받으면 욕심이 사라지는 줄 알았어요.
미움도 안 생기고,
시기 질투도 없어지고,
사람이 점잖아지고,
온유해지고,
겸손해지고,
부처님처럼 자비로워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성령이 임하고 나니 내가 이런 것을 생산해 내는 공장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놈에 공장은 밤낮이 없이요.
3교대로 24시간 풀로 가동이 되요.
옛날엔 누가 잘못이라도 하면 비판과 정죄와 욕지거리가 먼저 나갔어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화를 냈어요.
그런데 지금은 누가 그러면 그래 그게 인간이다.
저 사람은 저러고 싶어서 그랬겠나!
이젠 돌을 던지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그를 변호하고 있어요.
교인들이 교회에 안 오면!
그래 얼마나 예수가 싫으면 교회에 안 오겠나!
그동안 믿어지지도 않는 예수를 믿는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목사가 소리치고 하니 마지못해 나와 준 세월이 고맙지!
반대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데도 교회에 나와 주면!
그렇게 고마워요.
어휴! 하나님께서 또 꼬셔서 등 떠밀어서 데리고 왔구나!
그러면 속으로 그래요.
하나님! 피곤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저렇게 주님께 충성한다고 교회에 왔는데 예수님의 피로 목욕을 시켜서 돌아가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세상 근심걱정 다 잊고 잠시라도 천국에서 놀다가 가게 하소서!
이곳이 베드로가 주님의 재림을 보고 뽕 갔던 변화산이 되게 하소서!
눈을 확 열어서 바울이 보았던 그 삼층천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요.
살아갈수록 육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겠어요.
죄를 이기지 못하겠다는 것을 깨달아요.
마귀를 못 이기겠다는 것을 알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육신의 소욕이나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고마워져요.
야! 예수님이 안 계셨으면 어찌할 뻔 했나!
하나님이 나한데 죄를 물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나!
하나님이 내 죄를 예수님에게 물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고 약속을 하셨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혹시라도 하나님 마음이 변해서 우리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하면 어쩌겠어요?
물론 그런 일은 없지만!
한번 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거짓말 할 수 없는 그 신실함 때문에 죄 가운데 딩굴고 살면서도 배짱 좋게 살고 있는 겁니다.
믿음은 배짱을 동반해서 와요.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배짱이에요.
뭐 저런 인간이 있나 싶을 정도로 세상을 초연하게 살아요.
무엇으로도 가둘 수가 없는 배짱입니다.
죽음으로도 가둘 수가 없고, 인간의 윤리나 도덕으로도 가둘 수가 없고, 인정머리로도 가둘 수가 없어요.
세상 적으로 보면 괴물이에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육으로는 알 수가 없다고 한 겁니다.
육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무익해요.
감당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가 없다고 했어요.
고전 2:11절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미련하게 보여요.
그리고 반대로 생각해요.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데, 육은 인간의 죄를 감추려고 해요.
하나님은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육은 순종하라고 해요.
심지어 하나님은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하는데, 육은 믿겠다고 합니다.
이처럼 항상 육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치 않아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이는 하나님은 죄인을 죽이고자 일을 하시는데, 인간들은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죄인을 해체 시키려고 하는데,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확장하고자 해요.
죽으라고 성령을 주셨는데 우린 살고자 하잖아요.
여러분이 성경을 보아도 하라는 것은 하기 싫어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기를 쓰고 하려고 하지요.
이는 모두가 죄가 하나님의 뜻에 굴복치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못하는데 가두어 놓은 것입니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보세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잖아요.
육은 순종이 안 되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러니 육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육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지지가 않으니 예수님을 보내서 구원시켜 준 겁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뜻에 불 순종하는게 지극히 정상이에요.
그런데 마귀가 달리 간교한 놈입니까?
죄가 달리 죄인가요.
마귀라는 놈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요구해요.
너 그따위로 살아서 쓰겠나?
그러고도 목사냐?
목사라면 목사다워야지! 그게 뭐냐? 라고 깐족거립니다.
자존심을 건드려요.
그래서 알았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 라고 만들어요.
이러면 마귀의 작전은 대성공입니다.
마귀는 언제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 어기라고 하지 않아요.
반대로 성령이 넌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 없다고 해요.
성령은 네까짓 것이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산단 말인가!
아서라! 말아라!
그냥 죄에게 항복하라고 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그 무슨 망발입니까? 하고 따지고 싶지요.
맞아요.
따질 수 있어요.
저도 과거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율법 아래 있을 땐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인줄 알았거든요.
그땐 누가 하나님 말씀을 폄훼하면 대판 싸웠어요.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어찌하여 불순종하느냐! 라고 책망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예수 안에 들어와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예수 안에 들어와서 보니 우린 하나님 말씀으로 얻어터지는 종자라는 걸 알았어요.
청개구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지독히도 하고 사는 그런 인간이란 것을 알았어요.
아무도 이런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하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잖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하면 마귀라고 하지요.
성화주의자들이 저를 보고 이단이고 마귀라고 해요.
성화주의자들은 말씀에 순종하라고 가르치잖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 누구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하지 않잖아요.
성령이 왔는데 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느냐! 라고 하지요.
아니! 바울이 지금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수 없다고 하잖아요.
로마서 7장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 없는 자신을 보고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성령이 알려 주시기를 불순종하게 해서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보이고 싶어서 불순종가운데 가두어 놓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쩌자고 그 자비를 싫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지금 순종치 못하는데 가두어 두고선 긍휼을 베풀려고 하는데 마귀(죄)가 긍휼을 받지 말고 떳떳해지라고 꼬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해 자라고 하잖아요.
넌 왜? 그 모양이니!
예수 믿은 지가 얼만데!
아직도 그 말씀하나 못 지키고 사느냐! 라고 바아냥 거리잖아요.
마귀는 항상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서 예수의 피로서 용서해 주겠다고 것을 거부하게 만들어요.
스스로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의 피가 필요 없도록 만들게 한단 말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전부 이 마귀의 꾐에 빠져 버렸어요.
마치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그 상황이에요.
모두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바리새인들만 우굴 거려요.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겐 예수의 피가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어요.
하나님의 긍휼이나 은혜도 필요 없어요.
모두가 잘나서 예수의 의(義)가 필요 없다고 합니다.
교회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의 의(義)가 필요 없도록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 우리는 예수님의 의(義)가 필요 없어요!
저 쪽 십자가 마을에나 주세요! 라고 하잖아요.
저기 있는 정낙원 목사에게나 주세요! 라고 해요.
그럼 전 쪼다 같이 하나님 주세요! 라고 합니다.
교인들이 자신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는데, 예수님의 피 뿌림에 대한 감사나 기쁨이 없어요.
자신들이 말씀대로 살았다는 희열은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심에 대한 고마움과 그 피안에서 주어지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감격스러움이 없어요.
예수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교인들!
뭔가 모순스럽지요.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 안에선 예수의 피가 필요 없는 신앙이 정상적으로 통용됩니다.
이는 모두가 예수 밖에서 육이 시퍼렇게 살아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 밖에 있으니 예수가 지켜주신 것은 없고 자기가 지켜야 할 것들만 가득한 겁니다.
여러분 죄인이 정답을 아는 것하고 정답대로 사는 것하고는 달라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육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내지를 못합니다.
육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좋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성경은 죄인을 일컬어 중풍병자라고 해요.
중풍병자는 마음으로는 달리기도 하고 싶고, 축구도 하고 싶고, 야구도 하고 싶어요.
등산도 가고 싶고, 춤도 추고 싶어요.
그러나 몸은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중풍병자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살아낼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존재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중풍병자를 고치는 일을 하신 겁니다.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감상주의로 성경을 대하지 말고 자기 실존을 분명하게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난 하나님 말씀 앞에선 중풍병자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내지를 못하는 중풍병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그러니 무슨 말씀이든지 감상적으로 의협심으로 받지 마세요.
여러분의 성의나 가상한 뜻을 폄훼하고자 함이 아니고 우리의 실존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뜻은 가상하지만, 그냥 뜻으로만 두고, 난 뜻대로 살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뜻은 버리지 마세요.
그래야 그 뜻이 내 죄를 깨닫게 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뜻을 통하여서 난 하나님 앞에선 중풍병자란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러니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하세요.
죄인에게 있어 최고의 신앙은 하나님 도와주세요! 에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 예수님 전 개가 맞습니다.
그러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세요! 라고 해야 해요.
그게 최고의 믿음이고 신앙생활이에요.
예수님이 도와주시려고 왔는데 뻘쭘하게 세워 놓고 우리가 다 하려고 하면 어찌합니까?
파출부를 불렀으면 그분에게 일을 맡기시고 볼일을 보세요.
파출부를 불러 놓고 혼자사 일을 다 하면 어쩝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가능해요.
영적으로라야 분별한다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을 벗어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일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일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선 영적이라는 말은 추상적으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어요.
속된 말로 할 말이 막히면 영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靈)과 육(肉)을 분명하게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쉽게 설명할게요.
영(靈)이란? 육(肉)의 반대말입니다.
이러면 분별이 쉬워집니다.
육(肉)은 죄인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靈)은 하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세상 나라를 육(肉)에 나라” 라고 하고, “하나님 나라를 영(靈)에 나라”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이라 함은 하늘나라에 관한 일을 말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벌리신 하늘나라의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 일을 육(肉)으로는 몰라요.
그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알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은 성령이 아니면 알 수가 없어요.
비밀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벌리신 일이 뭡니까?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이라 함은 예수님에 관한 일로 구체화 됩니다.
성령의 오심도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하나 도출이 됩니다.
왜? 성령이 와서 예수님에 대하여서 증거해 주어야 합니까?
왜? 우리 인간들의 지혜로 예수님에 대하여 알면 안 되는가요?
이는 인간이 죄 아래 있기 때문이에요.
죄 아래서 예수님을 접근하게 되면 인간 중심으로 이해를 해요.
왜냐하면! 죄가 인간 중심으로 판단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면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서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깨달아져요.
중심이 인간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이동이 되요.
육(肉)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 나 좀 도와주세요! 그럽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 뭐 할까요? 해요.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줘요.
그래서 성령은 내가 살아야겠다는 것이 죄라고 지적을 해 댑니다.
성도는 이런 지적은 평생 당하고 살아요.
완벽한 자가 아니라 죄인이라 것을 지적당하고 살아요.
예수를 믿어도 이 지적을 피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육신은 항상 내 중심으로 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악이라는 법아래서 태어납니다.
알다시피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죽은 자가 되었어요.
선악과는 선(善)과 악(惡)이라는 전혀 다른 상반된 법(法)을 가지고 있어요.
상반 된 법이란? 자연히 서로를 정죄하는 심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선(善)의 기준에서 보면 악(惡)이 틀렸고, 악(惡)의 기준에서 보면 선(善)이 틀렸어요.
선과 악(惡)은 서로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가 없고 서로 밀어내요.
이처럼 선악과는 서로 하나가 될 수가 없는 태생적인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정죄하는 곳엔 반드시 심판이 있고 죽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나는 인간의 지혜는 죽은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선악의 법으로 스스로 늘 옳으냐! 그르냐! 로 정죄합니다.
양심이 늘 자기 자신을 참소하게 되어 있어요.
알다시피 법은 완벽을 추구하고 완전함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완벽 할 수도 없고 완전할 수도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늘 자기 안에 선악의 법에 참소당하여서 늘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잠깐 하나 살펴보고 갑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선악 기준은 뭡니까?
생명과와 선악과를 가지고 본다면 생명과를 먹는 것이지요.
알다시피 하나님은 영생 하시는 분입니다.
영생 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선 죽음이란? 악이고 죄에요.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 죽은 송장이 있다면 그 송장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악한 거에요.
그럼 선악과와 생명과 중에서 영생을 주는 과실은 무엇이고 죽음을 주는 과실은 어떤 것입니까?
생명과는 영생을 주고 선악과는 죽음을 주지요.
그렇다면 영생 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선 영생을 주는 생명과는 선(善)이 되고, 죽음을 주는 선악과는 악(惡)이 되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지요.
그렇다면 죽은 자인 인간 속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생명과 차원의 선(善)이 안 나오겠지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죽음을 안고 있는 선악과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악(惡)이 되겠지요.
맞아요.
하나님 앞에선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악(惡)이에요.
비록 예수를 믿는다는 것조차도 악(惡)이에요.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믿겠어요.
자기를 위해서 믿겠지요.
육은 자기를 벗어 날수가 없어요.
그러니 육으로 예수를 믿으면 자기를 위하여서 예수를 이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죄인이 예수를 믿는 것 조차도 악(惡)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에게선 선(善)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자아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사람은 행위와 상관없이 죄인인 것입니다.
선악의 법이란? 글자 그대로 선(善)과 악을(惡) 판단하는 겁니다.
그럼 선(善)과 악(惡)을 판단하는 것이 뭡니까?
율법이지요.
우리가 율법을 일컬어 선악의 법이라고 하는 이유가 정죄와 심판을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선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율법은,
옳으냐! 그르냐!
했어! 안 했어!
지켰어! 안 지켰어! 로 늘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죽은 선악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의 법으로 오셨어요.
자기 백성들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로마서의 말대로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오셨어요.
긍휼이란? 불쌍히 여겨주시는 겁니다.
불쌍히 여겨 주신다는 것은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용서 하지도 않고 긍휼이 여겨 주시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용서 해 주시기 때문에 긍휼인 겁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한 거잖아요.
의인에겐 용서가 필요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죄인에게만 필요한 분입니다.
죄인만 용서가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고 용서만 있어요.
무조건 용서하는 이런 법은 선악의 법아래 있는 인간들에겐 너무도 생소하여서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선악의 법 아래선 잘하면 상(賞)을 받고 못하면 벌(罰)을 받는 것만 있어요.
그런데 예수 안에선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을 해줘요.
선악의 법에선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반칙(反則)입니다.
죄인을 죽여야 정상입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선 법이 바로 설려면 상선벌악이 분명하게 서 있어야 해요.
흔히들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리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이 하는 일엔 동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예수를 죽였습니까?
착한 사람들입니까? 악한 사람들입니까?
착한 사람들이지요.
율법으로 따지면 율법을 잘 지킨 사람들입니까? 안 지킨 사람들입니까?
율법을 잘 지킨 바리새인들이지요.
왜? 율법을 잘 지킨 자들이 예수님을 죽여야만 했습니까?이는 예수님을 살려 두면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기 자신들의 삶이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율법대로 살지 않은 세리와 창기들과 비교하여 의로운 그 의(義)가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의(義)가 날아가면 말짱 도루묵이 되요.
일평생 목숨 바쳐서 지켜온 율법이 붕괴되기 때문에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동등하다고 하면 자기들은 뭐가 됩니까?
율법을 안 지키고 살아온 세리나 창기들은 예수님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는 있어도 율법을 생명처럼 지켜온 바리새인들은 환영할 수가 없어요.
예수 안에서 너나 나나 차별 없이 모두가 동등하다고 하면 바리새인들은 엄청 손해를 보는 겁니다.
법 아래선 법을 지킨 것은 힘이에요.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 할 수 있는 힘이고 권세에요.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율법대로 살아온 것을 힘으로 믿고 의롭고 잘난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 왔는데, 어찌 이 힘을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절대로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없앤 겁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율법대로 살아왔다는 의롭다는 힘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있어야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난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자랑 할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선악의 법으로는 예수가 죽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유대사회는 무너지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 라고 비하하고 조롱하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율법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와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 같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다 저주 받은 자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율법 하나 믿고 살아온 자긍심이 일순간에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누가 율법신앙을 무가치한 것으로 박살내는데 참을 수 있겠어요?
참으면 죄인이 아니지요.
죽여야 죄인답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민족을 위해서라도 죽어야만 했어요.
유대인의 의(義)가 의(義)로 남으려면 예수가 주는 의(義)가 죽어야 해요.
예수의 의(義)도 맞고 유대인의 의(義)도 맞는 것은 없어요.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이 유대인에게 있어 의(義)도 하나만 있어야 해요.
예수님은 마치 눈 두 개 달고 살아가는 동네에 눈 하나 달린 사람으로 온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보시기엔 눈 하나 달린 것이 정상인데 인간들은 모두가 눈이 두 개에요.
유대인들이 생명이라는 눈 하나로 보아야 하는데 선악이라는 눈 둘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온 세상을 둘로 갈라 놓은 겁니다.
그래서 눈 하나 달린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의 법으로 와서 눈 두 개 달린 선악을 병신이라고 합니다.
이걸 어찌 용납 하겠어요.
아니 선악의 법아래 있는 세상에서 눈 하나 달린 놈이 병신이지 왜? 눈 두 개 달린 놈들이 병신입니까?
눈 하나 달린 예수를 곁에 두고선 찜찜해요.
그래서 죽인 겁니다.
율법을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다 죄인이라고 하는 예수가 살아 있으면 유대인은 이방인에게 자랑 할 것이 없어져요.
썩어도 준치라고 하듯이 비록 지금은 로마의 식민지로 살지만 선민의식은 강하게 남아 있어요.
민족의 자긍심은 로마 놈들이 짓밟고 있어도 변하지 않아요.
지금은 비록 힘이 없어 로마의 압제 아래 있지만 메시야가 오면 일순간에 전세가 역전 된다고 믿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있기 때문에 개 같은 이방인하고는 다르다는 자긍심으로 버티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가 와서 그 신주(神主)단지 같은 율법신앙을 묵사발 내고 있어요.
그러지 않아도 이방인들에게 로마의 식민지로 있다고 조롱당해서 쪽팔려 죽겠는데 예수가 와서 염장을 지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종로에서 빰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는 심정으로 이방인에게 자존심 상한 울분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면서 토해 내는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이 사라지면 제사장들이 설 자리가 없어져요.
유대사회에선 제사장은 엘리트 들이고 지식층이고 존경 받는 대상들이에요.
비록 나라가 힘이 없어 식민지 생활은 하고 있어도 신앙마져 사라진 것 아니에요.
그러니 제사장들은 성전중심으로 먹고 살아가는 일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요.
성전중심의 신앙의 근간은 율법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절대로 건들면 안 되는 그 율법을 건든 겁니다.
율법의 상징인 성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율법이 없으면 성전도 사라지고, 제사장도 사라지고, 제사도 사라지고, 제물도 사라지고, 안식일도 사라지고, 절기와 월삭도 사라지는데 어찌 두고 있겠습니까?
예수의 말을 그대로 두면 자신들은 굶어 죽어야 해요.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인데!
그걸 건들었으니 죽지 않고 베기겠어요.
제사장 그룹들은 예수를 반드시 죽여야만 했어요.
예수야! 우리가 살아야겠으니 네가 좀 죽어 주어야겠다고! 해서 죽인 겁니다.
엊그제 전라도 광주에서 끔찍한 일이 발생 했지요.
경미한 교통사고를 내고 멀쩡한 아이를 공기총을 쏴서 죽인 사건 말입니다.
아이를 죽인 이유가 간단해요.
이 아이가 살아 있으면 자기 죄가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교통사고 낸 것이 발각되면 앞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부득불 죽었다고 합니다.
이게 죄인의 진정한 모습이에요.
우리 모두 이런 사건을 접하면 비분강개합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열을 올립니다.
우리 안에 법이 작동해서 쳐 죽일 놈이라고 해요.
그러나 조금만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세요.
우리도 늘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어요.
공기총으로 쏘지 않았을 뿐이지, 감정적으로 우린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요.
남 잘 되는 것 보면 배가 아프지 않나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시기가 생기고 괜히 미워지지요.
목사들은 우리교회보다 이웃교회가 잘 되면 괜히 트집 잡고 싶어지잖아요.
여러분도 누가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선뜻 공감해 주고 싶어지지가 않지요.
같이 칭찬을 하면서도 뭔가 흠집을 내고 싶어지지요.
은근히 그 사람을 넘어서고 싶어지지요.
이런 것은 모두가 죄가 자기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라고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언약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를 바라잖아요.
정상적이라면 이런 마음이 들어야 하잖아요.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벗어나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주어지는 평강과 안식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어야 하잖아요.
정상적이라면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나 실상은 목사들을 그걸 바라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교인들은 항상 자기 수하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교인들이 자기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어야 자기 입지가 흔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자신을 신비주의로 남겨두고자 하는 겁니다.
너희들 나 없어 봐라!
이런 비밀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이런 말씀은 아무나에게 들을 수가 없어!
그러니 내 말 잘 듣고! 내게 잘해! 라고 합니다.
전 제가 과거 수십 년 동안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해온 것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어찌하든지 제가 아는 분들에겐 복음이 주는 자유함을 누리게 해 주려고 애를 씁니다.
물론 이런 일도 하나님께서 눈과 귀를 열어서 복음을 듣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한 일이지만 제 마음은 알게 해주고 싶은 겁니다.
제 입장에선 온 라인으로 만나든지, 오프라인으로 만나든지 간에 귀한 만남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사귐을 갖는 한은 더 많은 복음을 알게 하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나니 이러한 간절함이 마음속에서 늘 묻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귀한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제가 복음을 깨닫게 된 이근호 목사님의 글들을 블로그에 많이 올려놓았어요.
앞으로도 엄청나게 올라 갈 겁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블로그를 방문하는 분들에게도 저에게 눈과 귀를 열게 해 주었던 이근호 목사님의 글들을 접하게 하여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이근호 목사님의 글들을 읽고 복음에 대하여 눈을 떠가는 것을 보고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해요.
누구의 글을 보든지 누구의 말을 듣든지 복음만 많이 증거되는 일이라면 좋은 일이잖아요.
누구라도 복음에 대하여 눈을 뜨면 마치 어린아이 키우면서 애기가 처음으로 엄마! 아빠! 말을 배울 때와 같이 흥분되고 기뻐요.
어린아이의 옹알이에서부터 발걸음 하나하나를 뗄 때의 기쁨처럼 마음이 설레고 흥분 되요.
어린애기를 키워본 부모들은 다 알잖아요.
그런 기분이에요.
전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나바를 참 좋아 합니다.
바나바는 늘 바울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인물이잖아요.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바울이 복음을 잘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청빙하여 복음을 전하게 한 사람입니다.
요즘말로 바울을 자기 교회에 담임 목사로 세우고 자기는 부 목사로 내려간 사람입니다.
이건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즘엔 부목사가 복음을 잘 전하면 좇아내잖아요.
저희 십자가 마을과 교제하는 정석훈 목사님이라고 계세요.
중국에 계신 분입니다.
참 복음을 잘 전해요.
젊은 분인데 너무 너무 귀한 분이랍니다.
이 분이 인천에서 중형교회에 부목사로 부임을 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다가 약 3개월 만에 쫓겨났어요.
당회장이 자기와 다른 복음을 전하니 좇아낸 겁니다.
우리 십자가 마을에 “Blue island” 라고 링크가 되어 있는데 한번 들어가서 보세요.
참 복음에 깊이가 있어요.
광주에 계시는 “화평교회” 오용익 목사님도 그런 분입니다.
한번 싸이트에 방문해서 설교를 보시면 엄청 은혜를 많이 받을 겁니다.
저 보다 훨씬 복음에 깊이를 아는 분들입니다.
전 율법에 매여 있을 때 그 율법으로 벗어나고파서 신학교에 갔어요.
목사들이 가르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서 제가 좀 알려고 갔어요.
그런데 신학교에 가서도 모르긴 매 일반이에요.
어디 신학교에 가르치는 목사들이 예수님을 아는가요.
몰라요.
예수에 대하여 지식으로 만들어 놓은 학문만 알았지 진정한 예수를 몰라요.
예수는 학문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 신학교에서 깨달은 최고의 소득이에요.
예수를 만난 경험이 없으면 천사의 말도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같아요.
그러나 사랑이 임하고 나면 무식한 말을 해도 복음이 되요.
성령이 임하고 복음이 깨달아지면 학문의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 안에서 숨 쉬고 희노애락하는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어요.
바울을 보세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어디 신학을 말하고 철학을 말했는가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이 임하고 나니 예수가 이런 분이다! 라고 증거했어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신 그 예수만 증거했어요.
여러분! 예수님은 학문으로 연구해서 알아지는 분이 아니에요.
아니 어떻게 육으로는 알 수 없는 분을 학문으로 안단 말입니까?
학문으로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자들은 믿어지지는 않고 믿기는 해야겠기에 만든 요설이에요.
예수는 성령이 임해야만 알 수가 있어요.
성령이 알게 해주신 예수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에요.
학문으로 감추어 둘 필요가 없어요.
학문은 많이 배우고 아는 사람만 알잖아요.
무식한 사람은 모르잖아요.
그러니 학문화 하여 예수를 알고자 하는 것은 육에 속한 자들이 자기 자랑 거리들이에요.
난 이렇게 많이 배워서 안다 라고 자랑하면서 사람들 위에서 선생 노릇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만약에 신학으로 믿어지는 예수라고 한다면 성령이 오실 필요도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인간이 배워서 믿으면 되니까요?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결국 예수가 틀렸다고 십자가에 죽인 것 밖에 못해요.
그래서 지금도 신학으로 연구해서 믿음을 만들고자 하는 자들이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신학을 말하지 않았어요.
바울이 유대교 신학으로 예수를 알았을 땐 예수는 악의 축이었어요.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선 겁니다.
예수를 메시야 라고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만나기 전에 전가의 보도처럼 자랑하던 유대교 신학을 똥이라고 버려 버렸어요.
예수를 만나고 보니 육에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분이란 것을 알아서 배설물로 버린 겁니다.
바울은 신학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했어요.
그런데 후대에 성령을 안 받은 인간들이 예수를 이용해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바울의 증거를 신학으로 만들어 놓은 거에요.
무슨 바울 신학이 있고, 베드로 신학이 있고, 마태신학이 있고, 요한 신학이 있어요.
그들은 다만 그들이 받은 은혜를 간증한 것이에요.
그런데 이런 은혜를 육에 속하여 일명 똑똑하다고 하는 자들이 전부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자기들의 똑똑함을 남기고 싶어서에요.
그들의 가르침을 받다가보니 신학이나 철학으로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도 굳이 목사들이 신학을 배우고 철학을 배워야 한다면 인간들이 자랑하는 신학과 철학으로 예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배워야 해요.
신학과 철학이 틀렸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에요.
이런 분야에서 신학과 철학을 접근하는 목사는 이근호 목사님이 최고라고 봐요.
전 아직까지 신학의 허구성과 철학의 죄성을 고발하는 목사는 만나보지 못했어요.
모두가 신학과 철학을 자랑하는 자들만 보았어요.
이근호 목사의 강의를 들어보세요.
이 분은 신학을 말하고 철학을 말해도 그 속에서 죄를 끄집어내고 왜? 예수님의 피 뿐이어야 하는가를 증거하려고 신학을 말하고 철학을 말해요.
그래서 제 블로그에 이근호 목사님의 지역별 강의를 다듬지 않고 원문 그대로 올려놓은 겁니다.
강의하면서 울분을 토하고 십자가 피 안에서 깨닫는 감흥들을 리얼하게 그대로 녹취해서 올려놓은 겁니다.
만약에 이미지 관리를 하거나 학문화 하고자 한다면 그대로 올려놓으면 안 돼요.
책으로 출간 한다면 다듬고 다듬어서 내어놓아야 하겠지요.
그러면 감동이 반감이 되요.
그래서 실례인줄 알면서도 묻지도 않고 올려놓은 겁니다.
우리 이미지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피에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전 아직까지 이근호 목사와 같이 십자가만 증거하고자 하는 목사를 만나 본적이 없어요.
이 분은 오직 십자가 피 하나 증거하기 위해서 세상에 학문 이란 학문은 다 섭렵했어요.
십자가 마을에 철학 강의를 올려놓은 것 보세요.
전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뇌 과학과 철학” 이라는 것을 보면 용어 자체가 생소해서 당췌 뭔 말인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생각 할 땐 뇌 과학하고 십자가 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싶지요.
그러나 이근호 목사님의 주장은 인간들이 쏟아 내는 모든 것은 죄를 바탕으로 나오기 때문에 과학이든 정치든 경제든 문화 예술이든 모두가 죄와 관련이 있다고 해요.
그러니 세상의 모든 학문을 연구하고 죄를 고발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십자가 중심의 학문 연구 정신입니까.
학문을 알아서 남에게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로지 죄를 고발하고 예수님의 피 앞에서 모든 인간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 신학이니 철학이니 조금 아는 것으로 식자(識者)인척하면서 밥 빌어먹는 인간들 하곤 질적으로 다르지요.
전 이 목사님을 볼 때마다 마치 사도바울을 보는 것 같아요.
예수에게 완전히 미친 사람이에요.
미쳐도 적당히 미치지 않고 완전히 미쳤어요.
얼마나 귀한지 몰라요.
이런 정신을 모르고 언어적인 문제로 아니면 윤리도적덕인 표피적인 것으로 시비 거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솔직히 말해서 이근호 목사의 사상을 그르다고 반박할 인간이 없어요.
실력이 안돼요.
무식해서 몰라요.
왜? 무식하다고 하는지 아세요.
목사가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면 무식한 겁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면 하나님께서도 알아주는 하늘나라의 천재에요.
이 분이 신학을 하고 철학을 하는 이유는 호랑이를 잡고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그들이 자랑하는 신학이나 철학 속에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그들의 학문을 배운다고 해요.
나 이거 배워서 사람들 앞에서 뽐 내야겠다가 아니라 왜? 예수의 피 뿐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를 배우니 근본부터 다르지요.
이근호 목사는 철학을 말하고 신학을 말하여도 항상 결론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다고 도출을 해요.
전 솔직히 신학이나 철학에 깊이가 없어요.
그냥 주워들은 것뿐이에요.
신학은 신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운 것이라서 조금은 알지만 철학은 영 자신 없어요.
이근호 목사님의 철학 강의를 들으면서 아! 인간들이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구나!
그래 맞아 내 안에도 저런 사고가 있어!
맞아 그게 죄였어!
같이 공감하고 깨닫는 겁니다.
철학을 고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져 인간이 이런 존재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이라 생가하세요.
철학을 모른다고 해서 믿음이 손상을 입지 않아요.
우리같이 지식이 일천한 목사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우는 겁니다.
마치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식으로 배워서 흉내 낼 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십자가 안에 들어가 세상 학문을 보면 죄가 보여요.
인간이 누구인지가 보이고 죄가 보인단 말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그러니 십자가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예수 이야기를 술술 하게 되는 겁니다.
철학이나 신학을 모른다고 복음을 아는데 전혀 지장이 없어요.
또 증거 하는데도 전혀 지장이 없어요.
지금도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제자들처럼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해요.
예수님 만난 것을 학문화 하려고 하지 마세요.
학문으로는 예수를 알 수가 없어요.
예수는 만남이에요.
성령이 만나게 해 주면 다 알아요.
이 시대 목사들이 바울처럼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신학을 말하고 철학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말을 하면 많이 배우고 유식하다는 티를 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런 말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 설교를 들어 보세요.
갑갑해요.
목사는 예수님의 피 이외에 다른데 정신을 두면 안 돼요.
자기 이미지 관리하거나 하면 안 돼요.
제가 만약 제 이미지 관리한다면 이근호 목사님 글을 올리지 않아요.
차별성을 두려고 하지요.
그러나 전 그럴 생각이 없어요.
이근호 목사와 저는 경쟁자가 아니에요.
모두가 복음을 위하여 쓰임 받는 주님의 용병들이고 동역 자들이에요.
누구를 통해서든지 예수그리스도만 잘 증거되면 돼요.
저는 저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면 되고, 이근호 목사는 이근호 목사에게 주신 은혜를 증거하면 되요.
각자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으면서 받은 은혜가 있어요.
내가 이근호 목사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고, 이근호 목사 역시 제 흉내 낼 이유가 없어요.
제가 늘 하는 말이지만!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증인은 본 것을 증거하는 자에요.
본 것을 증거하는데 있어서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다를게 없어요.
빈부귀천이나 박학다식과 일학무식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냥 자기가 보고 깨달은 것을 증거하면 되요.
사람들이 이미지 관리하는 것은 십자가 밖에서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한마디로 예수를 만나지 못해서예요.
예수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는 겁니다.
저도 과거엔 원어 설교를 한다고 꼴값을 떨었어요.
원어도 제대로 모르면서 원어 사전을 붙들고 주석을 가지고 유식한 설교를 한다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설교를 했어요.
교인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언어를 많이 사용하면 공부 많이 한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되도 않는 발음으로 히브리어 헬라어를 한다고 쇼를 많이 했어요.
안에 든 게 없으면 말을 많이 하면 금방 드러나요.
그래서 가능하면 교인들을 만나도 말수를 적게 하고 많이 들으려고 해요.
이미지 관리를 하려면 자기를 감추어야 하니까요.
많은 말도 하지 말고 주로 듣기만 하고, 글도 내어 놓으면 안 돼요.
흠 잡히니 철저하게 신비주의로 나가야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니 원어로 말하는 자들이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파서 하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걸 알았어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니 성경이 보여지기 시작한 겁니다.
모든 성경이 예수님 이야기라는 것이 보여졌어요.
그러니 원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지니 히브리어 헬라어를 모른다고 해서 전혀 불편하지가 않아요.
철학이든 신학이든 원어이든 예수님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다 쓰레기에요.
그 사람이 그 어떤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해서 말을 한다고 해도 예수의 피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은혜가 쏟아져 나오지 않으면 전부다 쓰레기에요.
목사는 예수를 가리키는 자이지, 자기가 예수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 돼요.
너도 나도 다 내려놓아야 해요.
지식도, 학벌도, 지위도 다 내려놓아야 해요.
모름지기 목사라고 한다면 아니 복음을 안다고 하는 성도라고 한다면 복음만 증거되는 일이라면 자존심을 다 버려야 해요.
전 솔직히 교회 사정만 허락한다면 이근호 목사님을 주일마다 저희 교회에 모시고 말씀을 듣고 싶어요.
제 아내나 자식이나 성도들에게 더 많은 복음에 깊이와 풍성함들을 맛보게 하고 싶어요.
제가 듣고 싶어요.
어떨 땐 교인들을 몽땅 데리고 대구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릴까 생각 할 때도 있어요.
전 제 아내가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을 보면 너무 기뻐요.
그래 나를 통하여서 받지 못한 은혜를 이 목사님을 통해서라도 받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하면 남에게 깎아 달라고 해야 하잖아요.
뭐가 수치인가요.
하나님 앞에 수치는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겁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겁니다.
예수를 모르면 모른다! 알면 안다! 라고 하세요.
이해가 안 되면 묻고 또 물어야지요.
언제까지 물어야 하는가요?
알 때까지 물어야지요.
전 과거에 진리를 알고자 자살까지 하려고 했어요.
진리에 대한 갈급함을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진리에 대하여 갈급해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곧 임한다는 전조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생수를 준비해 두고선 목마름을 일어나게 만들어요.
그래서 진리를 찾고 또 찾도록 해요.
그렇게 해서 찾아진 진리는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문제가 생기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면서 가르치는 자가 되고자 해서에요.
모르면 배워야 하는데 기껏 안다고 한 것이 예수님의 동생들처럼 육적으로만 아는 것으로 선생 노릇을 하고자 해서 그래요.
자기가 앉을 자리가 아닌데 앉아 있기 때문이에요.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목사 자리에 앉아 있고, 장로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장로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을 모르면 복음 아는 분을 불러서 들어야지요.
그게 무슨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예수를 만나 보세요.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더 감출 이유가 없어져요.
남에 이목이 안 보인다니까요.
목사들이 이미지 관리하는 것은 남에 이목 때문이에요.
한마디로 수치를 드러내고 싶지 않기 위해서예요.
복음을 알면 자유 한 것은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편해요.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것에 무관심해지니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져 하루 하루 주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사니 감사할 뿐이에요.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복음이 주는 복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에게 담임 목사 자리를 내어 놓고 스스로 부목사가 된 것도 복음이 주는 자유함 때문이에요.
복음을 위하여 자기를 죽였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만약에 정석훈 목사님이 계셨던 인천의 그 교회 목사가 복음을 알았다면 정석훈 목사님을 좇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교인들에게 이렇게 복음을 아는 목사님을 우리교회에 보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시간 시간 복음을 증거케 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그 목사는 복음에 관심이 없고 교회를 붙잡아야 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목사를 좇아낸 겁니다.
그런 목사에게 있어 교인들은 자기 배를 불리게 해 주는 먹잇감들입니다.
그런 목사 밑에서 양털을 깎이면서도 붙어있는 교인들도 복음에 관심 없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복음 전하는 목사를 좇아내도 가만히 있는 겁니다.
교인들이 소경이니 무당인 담임 목사를 좇아내야 하는데 진짜 목사를 좇아낸 겁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목사에게 거짓 신자들을 붙여 놓은 겁니다.
우리 블로그에서 글을 퍼가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대 다수의 분들은 십자가 복음이 좋아서 퍼 갑니다.
참으로 감사 할 일이에요.
어떤 분들은 아예 제 방을 하나 만들어서 글들을 올려놓기도 해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겁니다.
아마도 복음이 좋아서 그러겠지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감추는 분들이 있어요.
제가 일부러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글들을 그 곳에 퍼 날랐더니 취사선택해서 대 부분 삭제를 했더라고요.
제가 십자가를 아십니까? 를 보고서 복음에 눈을 뜨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혹여라도 저처럼 이 글을 통해서 눈을 뜨는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하고 올려놓았는데!
부담스러워서 지워버렸어요.
왜? 십자가를 아십니까? 를 지웠겠어요.
십자가를 아십니까? 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제사도 없다, 성전도 없다, 안식일도 없다, 십일조도 없다 라는 것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에요.
교인들이 이런 글을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교인들이 십자가를 알면 교회도 안 오고, 십일조도 안하고, 그러면 교회 유지하는데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니 이런 글들은 보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십자가와 예배, 십자가와 기도만 달랑 남겨두었더라고요.
이게 마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율법을 폐한다고 하니 자기들이 살아갈 근본을 헐어 버리는 것이 되니 죽여 버린 것과 같아요.
말로는 복음을 위하여 카페를 운영한다고 하지만 정신머리가 다른데 가 있는 겁니다.
복음은 핑계이고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 이미지 관리하는 겁니다.
난 괜찮은 사람이다.
난 복음 알거든!
그러니 날 좀 불려줘!
내 가치를 좀 알아줘!
선생 노릇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야고보서에서 선생 되지 말라는 말을 우습게 여기는 겁니다.
거짓 선생의 무서움을 모르니 상좌에 앉아서 가르치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안다고 하는 그것이 스스로 걸려들어서 스스로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있는 올무인줄을 몰라요.
예수님께서 그리시지요.
네가 옳다 하는 그 말에 심판 받고 네가 그르다고 한 그 말에 심판 받는다고!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데에는 인간의 똑똑함도 어리석음도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 흔히 말하는 신학적 철학적 하는 인간들 앞에서 주눅 들지 마세요.
신학을 말하면 여러분은 예수를 내어 놓으세요.
철학을 말하면 십자가를 내어 놓으세요.
당신들이 예수를 알어!
개그콘서트에서 유명한 달인을 만나다 의 김병만이처럼!
당신 예수를 만나 봤어!
안 만나 봤으면 말을 하지를 말어!
당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마셔봤어!!
안 마셔 봤으면 말하지 말라고 하세요.
마셔봤다고 하면!
그걸 아는 놈이 그래! 라고 하세요.
예수의 피를 마신 놈이 학문을 자랑하고 인간을 자랑하고 그래!
이 썩을 놈아!
그래 예수의 피를 마셔본 놈이 설교시간에 신학을 말하고 철학을 말하느냐! 라고 하세요.
이러려면 여러분이 만난 예수가 있어야 해요.
예수의 피 안에서 주어지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죄사함의 은총이 있어야해요.
내가 만난 예수가 있어야 해요.
예수 안에 있어야 세상이 두렵지가 않아요.
참 재미있는 것이 제가 지금 이글을 교회에서 쓰고 있을 때 이근호 목사님이 전화를 했어요.
웬일인가? 싶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십자가 마을 게시판에 저에 대한 글을 짧게 써 놓았다고 해요.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쓴 글인데 제가 보면 섭섭할 수도 있다고 해요.
지금 보시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우겠다고 합니다.
제가 혹 시험에라도 들까봐 염려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교회엔 인터넷이 안 되니 나중에 집에 가서 보겠다고 하고 끊었어요.
그래서 저녁 시간에 집에 와서 보았어요.
오늘 쓰는 글과 너무도 같은 것이라서 옮겨 놓았어요.
성령께서 인용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아래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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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정낙원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하는가? (이근호)
감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실력을 감출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대단한 실력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대단치도 않는 실력임을 본인이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모든 목사들의 특징은 은근히 자신들이 진짜 실력을 감추고 다녔다.
왜 감추는가?
여차해서 자기 무식이 폭로되면 자신의 배후에 설치해 놓은 어두운 동굴 속으로 황급히 숨기 위해서다.
왜 숨는가?
그 동굴에는 아직도 빼먹을 만한 자기 존재 가치가 약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생이 망가져도 빼먹을 존재 가치가 있는 한 그 가치를 솔솔 빼먹는 재미로 남은 생애를 보내려한다.
정신적인 노후대책이다.
예를 들면,
이근호 목사는 지금도 나이 많고 병들어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되었지만
한 때는 많은 저서를 남겼고,
강의도 많이 다녔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 보람 있는 존재였다는 과거사로 재료로 하여 자아의 존재 가치를 구축해놓고, 솔솔 빼먹는 보람으로 남은 생애를 자아도취에 빠져 버티겠다는 수작이다.
존재함 때문에 생겨나는 신종 마약이다.
그렇다면 왜 정 목사님은 그런 짓을 안 하는가?
왜? 자기 실력을 다 드러내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영적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다른 목사들은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다른 목사들과 시합 중이다.
“우리 중에 누가 더 세냐?” 게임에 열중한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
왜? 목사들은 이런 못된 게임에 몰두하느냐?
눈에 보이는 것이 같은 인간 군상들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목사님이 상대하는 자는 목사가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악마다.
정 목사님께서는 악마를 상대하는 방법을 아신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쏟아내는 것이다.
즉 자기 배후에 어두운 자기만의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다.
도무지 피할 구석을 없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것이다.(고전 15:31)
정 목사님은 자기 세계가 늘 부셔지는 것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어 하신다.
마치 땡볕에 나아가 두꺼운 외투를 한 벌. 두 벌 벗는 재미다.
자기 껍데기가 한 번씩 벗겨질 때 마다 복음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정 목사님의 설교에서 나오는 모든 문장은 와르르 자신이 허물어지고 깨어질 때 나는 소리다.
악마 앞에서, 이단 앞에서 정 목사님이 내뱉는 소리는 이것이다.
“그래, 나는 졌다.
사람에게도 졌고,
아내에게도 지고,
교인들에게 지고,
식구들에게도 졌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도 졌다.
이 예수님에게 진 기념으로 벌리는 축하 공연이 남은 내 인생의 전부다”는 것이다.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 19:15)
악마는 바보가 아니다.
지혜롭다.
따라서 도리어 악마가 인간들을 바보로 본다.
이미 죄 속에 살면서도 의인인 채 하니 그 얼마나 바보인가?
인생 실패가 부끄러워 자기만의 동굴 속으로 숨어 기어들어가 봤자!
이 바보들을 격려해주는 착한(?) 악마가 있어 다독거려주고 있다.
“수고했어 애들아~”
정 목사님의 설교는 늘 악마를 향한다.
“나? 예수님 때문에 살았지! 나 때문에 산 것이 아니니 내 천국행에 시비 걸고 싶거든 나에게 따지지 말고 예수님의 피에게 따져라”고 외치신다.
이 얼마나 깊이 있는 무식한 외침인가!
악마보고 외치는 이 설교는 곧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는 설교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예쁘장한 악마가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동굴에 함께 살고 있다.
이제 정 목사님 설교처럼 그 어두운 동굴에다 예수님의 피를 쏟아 붓자.
그러면 그 어두운 동굴을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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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글을 읽으면서 이 양반이 고수는 고수이구나!
어찌 내 마음을 이리도 잘 알까!
물론 그 안에 빛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다 알아요.
특히 영적인 일에선 귀신같이 알아요.
저도 목사들의 설교를 듣거나 글을 읽거나 대화를 해 보면 알아요.
아! 이 사람은 예수 만난 사람이구나!
아! 이 사람은 지식 팔아먹는 사람이구나!
아! 이 사람은 이미지 관리하는 사람이구나! 알아요.
이건 그 속에 성령이 거하는 사람은 다 알아봐요.
맞아요.
이근호 목사님의 지적대로 감출 것이 없어요.
학문적으로 보면 전 초등학생이에요.
그럼에도 제 부끄러움을 드러내면서 글을 쓰는 것은 제가 만난 예수님을 간증하고 싶어서예요.
예수님을 자랑하고 싶어서예요.
아니 내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간증하는데 무슨 학문적 지식이 필요한가요?
전혀 문제가 안돼요.
나 같은 이런 사람도 예수를 아는데!
나처럼 학문적인 지식이 일천한 사람도 복음을 아는데!
예수를 아는 데에는 인간의 조건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픈 겁니다.
전 복음을 아는 데에는 신학이나 철학이나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왜냐하면! 제가 철학이나 신학을 많이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에요.
한마디로 나 같은 철학이나 신학 지식이 미미한 사람도 예수를 아는데 여러분 같이 잘난 사람들은 얼마나 더 잘 알아야 하겠느냐 에요.
젊고 똑똑하고 많이 배웠으면 더 잘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에요.
제가 잘 하는 말입니다.
그래 비싼 학비 들여서 외국에 유학까지 갔다 왔으면 예수에 대하여 박사가 되어야 하지 않느냔 말입니다.
예수를 알라고 유학을 갔으면 예수를 알아와야지!
그런데 이 인간들이 예수는 모르고 전부 세상 학문만 베워왔어요.
바울식으로 말하면 외국 놈들 똥만 싸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외국 똥 자랑하느라고 마치 그레데 인들처럼 말쟁이들이 되어 왔어요.
뭐라고 씨부렁거리는데 전부 귀신씨나락 까먹는 말만 해요.
철학의 헛된 속임수일 뿐이에요.
그래서 바울도 철학의 헛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어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대로 “밀”은 없고 전부 “겨” 뿐이에요.
예수의 생명이 없고 전부 선악으로 아는 학문뿐이에요.
학문은 똥이에요.
학문으로 사람을 살려내지 못해요.
그러니 학문으로 안다고 하는 자들 앞에 주눅 들지 마세요.
전에 십자가 마을 논쟁을 할 때 화란(네덜란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양무리 마을에 관여된 목사하고 대판 싸웠어요. (아마 양무리 마을 운영자인 것 같아요)
그 싸움의 내용이 신앙의 글 란에 보면 “영과 육 논쟁 끼어들기” 란 제목으로 써 있어요.
유학까지 가서 배운다는 것이 절간에 중들과 같은 학문을 배우고 있어요.
예수를 전혀 몰라요.
그러면서 온 동네방네 감초처럼 다 끼어들면서 판단을 다 하고 정죄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좀 심하게 힐난을 했어요.
예수를 만나지도 못한 사람이 만난 척 하면 다른 사람들이 사기 당해요.
물론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은 사기 당할 일이 없지만!
그래도 혹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사기 당하지 말라고 논쟁을 한 겁니다.
전 그 목사처럼 많이 배우지 못했어요.
하지만 난 예수를 만났어요.
성령께서 제 안에서 증거하는 증거가 있어요.
그 증거란 다름 아닌 예수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이에요.
아주 지극히 단순한 거에요.
그런데 이 단순한 것이 육으로는 안 믿어진 단 말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모든 수고와 짐을 내려놓게 되요.
예수 만난 사람의 특징은 두려움이 없어요.
목사 앞에서도, 신학자 앞에서도, 세상 권세 잡은 자들 앞에서도, 돈 많은 부자들 앞에서도 기(氣)가 죽지 않아요.
자기 안에 만유보다 크신 예수님을 안고 살아가는데 왜? 기(氣)가 죽습니까?
세상에 대하여 기(氣)가 죽는다는 것은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이 아니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제자들의 모습을 보세요.
그 어떤 것 앞에서도 기(氣)가 죽지 않았어요.
당당하게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라고 말했잖아요.
죽음 앞에서도 굽히지 않잖아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두려워서 문을 잠궈놓고도 벌벌 떨었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 돌변합니다.
날 잡아 죽여라 라고 죽음과 정면으로 맞닥뜨리잖아요.
이러면 도리어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 무서워해요.
이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 십자가의 능력인 겁니다.
이 능력은 성령을 받아야 나타나요.
그러니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하거나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육(肉)들이에요.
삼겹살 덩어리들이에요.
짐승이니 세상의 힘 앞에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이미 부활의 생명 안에 있기 때문에 죽음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부디 여러분도 이런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말이 너무 많았네요. ^죄송^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과거엔 희미하던 것들이 이젠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또렷하게 보여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보여지는 이 보여짐이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그 어떤 것으로도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능력으로만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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