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신앙
여행 채널 ‘T’에서 시리아 광야에 사는 베두윈의 일상을 담은 다큐를 보았다. 놀랍게도 세상의 오지라고 여긴 광야에 살면서도 그들은 현대적 편리함을 누리고 있었다. 바로 핸드폰이었다. 장막은 접어 살림살이와 함께 트럭으로 나르고, 흩어진 목동들끼리 핸드폰으로 서로 위치를 알렸다. 물론 장막 생활과 빵 굽는 일, 식구 같은 양떼와 함께 하는 이동 생활은 수천 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하긴 베두윈이 사는 곳을 오지라고 말하는 것도 편견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누구나 자신이 사는 곳은 세상의 중심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이동하면서 산다. 현대판 베두윈족은 뉴욕에도, 베를린에도, 서울 광화문에도 존재한다. 베두윈 사람들에게 이동 생활을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양 떼에게 푸른 풀밭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자기 양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베두윈 목동은 이렇게 말하였다. “양이 배부르면 우리도 배부르고, 양이 굶으면 우리도 안 먹어!” 서울 유목민들에게 그들이 부러운 것이 있다면 아마 내집 마련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아브람은 대표적인 떠돌이로 모든 유목인의 조상이 되었다(창 12:5). 그는 장막을 접고, 또 펼치며 끝없이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창 13:18).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손들은 아예 장막을 접고 정착한 거주지에 살게 되었지만, 성경은 흙집조차 계속 장막으로 표현하고 있다.
장막이란 이름은 이동식이든 정착식이든, 초가집이든 아파트든 모든 거주 형태의 대명사가 되었다. 고정된 장막에 살지만 현대인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날마다 자기 집과 일터를 중심으로 뱅뱅 돌면서 가끔씩 ‘꿈꾸는 여행자’를 노래하지만, 그저 다람쥐 쳇바퀴처럼 일상을 순례할 뿐이다. 도심 속 현대판 유목인은 생활의 속도를 얻은 대신, 마음의 여유는 점점 잃어버렸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유목민이다”란 말도 생겨난 모양이다.
유대력 7월은 장막절(Sukkot) 기간으로, 올해는 10월 16일 저녁부터 23일 저녁까지이다. 명절 기간에 사람들은 8일 동안 안락한 집을 떠나 기꺼이 불편한 공간에서 머문다. 도시인들은 도심의 골목이나 주차장, 혹은 옥상과 아파트 베란다에 텐트를 설치한다. 농촌에서는 수확철 풍속에 따라 집 밖에 임시 오두막을 만들어 지낸다. 전통적으로 여러 가지 식물(느 8:15)을 사용해 임시거주지를 마련한다. 신앙유산은 현대인조차 유목민의 전통 안에 묶어 두었다.
장막절은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공간이 되지 못함을 배우는 절기이다. 이때 다섯 권의 작은 두루마리(메길롯) 가운데 전도서를 읽으며 인생의 한계를 다시 배운다. 유대인은 장막절이면 활짝 개방된 자신의 초막(수카)으로 조상들이 방문한다고 믿는다. 첫째 날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날마다 이삭, 야곱, 모세, 아론, 요셉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다윗의 순서로 찾아온다. 이러한 풍속을 히브리어로 ‘우쉬피진’이라고 부른다.
현대판 유목인들이 배워야 할 진리는 지상에서 인간이 세운 장막은 임시적일 뿐이란 사실이다. 장막은 거둘 때가 있는가 하면, 다시 펼 때도 있다(전 3:3). 더 나아가 성경은 ‘땅의 장막에서 하늘의 장막으로’ 이동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지상의 장막을 벗어나 하늘로 옮겨지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동경에 대해 설명한다(고후 5:1).
땅 위에서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거주지로서 장막이든, 낡아가는 육신의 장막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생활의 유목인이요, 영적 순례자이다. 평생 ‘똑 같은’ 하루를 반복해 살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제 고정된 생각을 깨뜨리고 ‘노마드’(유목인)의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순례자의 눈으로 본다면 고난당하는 삶의 터전 한가운데 살고 있는 내 현실에 찾아오셔서 하늘 장막을 수선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계 21:3). 오늘을 사는 현대판 유목민들은 마치 명절 귀성객처럼 일찍이 하늘 장막을 예약한 순례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