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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것 못 잊을 것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내가 지금 여기 부르는 것은 천하의 모든 씨알 다를 향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똑히 깬 씨알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소리를 내고 소리를 듣는 씨알은 나는 씨알 중에서도 깬 씨알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녕하신가 하는 것은 똑똑히 깨어 있는가 묻는 말입니다. 깨어 있으면 물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평안합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화려한 음악 속에 누워 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구경의 목적은 전체 씨알이 하나 빠짐없이 다 하나로 깨어 소리를 지르는 일입니다. 전체 씨알이 소리를 지를 때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세상을 짓밟고 훑어먹던 폭군의 군대더러 “물러가라” 하면 일시에 미치는 돼지떼처럼 산비탈을 내리 달아 물속에 빠져버리고, 갈 곳을 몰라 미치는 흉흉한 민심의 바다더러 “잔잔하라” 하면 갑자기 잠드는 어린 아기 숨소리같이 가라앉아 배가 어느새 가려던 언덕에 닿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시간이 듭니다. 씨알은 느립니다. 덤비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깬 씨알이 가만있어서는 안됩니다. 가만있지 못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깬다는 것은 역사의 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사람은 나의 소리도 들어야 하고 하늘의 소리도 들어야 하지만 또 역사의 소리도 듣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피리의 이 끝이요 하늘이 피리의 저 끝이라면 역사는 피리 이 끝과 저 끝 사이에 있는 전체의 통입니다. 그것 없이는 하늘도 그 숨을 불어 넣을 곳이 없고 나도 그 숨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소리를 들으려 해야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 해야 내 소리를 들을 수 있기도 하지만, 또 역사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내 소리나 하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소리는 그저 듣기만하면 되는 것 아닙니다. 역사는 보통 떠들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으면서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기 쉽습니다. 그것을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돼야 정말 들은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의미가 통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 통한다는, 곧 뚫린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뚫린다는 것은 이 끝에서 저 끝이 내다뵈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둘이 하나가 됩니다. 둘이 하나가 되면 셋이 하나 곧 삼위일체가 됩니다. 나와 하늘과 역사입니다. 그 하나로 만드는 그 힘이 뜻입니다. 뜻이기 때문에 의미라고 합니다. 뜻은 말씀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의 시에 곡경통유처(曲徑通幽處)에 선방화목심(禪房華木深)이라, 꼬불 길 깊숙이 뚫린 곳에 중의 집에 꽃나무 즘숙했더라 하는 귀가 있습니다마는 역사의 길이야말로 꼬불꼬불한 길입니다. 그것을 뚫어 의미가 통하는 말씀을 알아듣게 하는 것이 뜻 곧 의지입니다. 위에서 똑똑히 깬다는 것은 역사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깊은 뜻(意味)을 찾는 굳센 뜻(意志)이 있으면 똑똑히 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 속에 하늘 소리를 들으려하고 하늘 소리 속에 역사의 소리를 들으려하는 깬 씨알 여러분 평안하셔야 합니다. 꼬불꼬불한 속에서도 기가 죽어서는 아니되고, 죽겠다 살겠다 하는 속에서도 고요히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우리 뒤에는 소리 없는 무한 씨이 소리 없이 섰습니다. 소리가 없는 것은 소리를 들으려고 숨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죽인 숨은 폭발하고야 마는 법입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지만 또 무조건 다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 의식 가졌으면 사람이지만 없으면 아닙니다. 의식 있기는 누구의 가슴속에도 다 숨어들어 있는 전체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깨여 현(現)의식으로 나와야 힘입니다. 그리고 깸은 의식적으로 깨워야 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식이 무엇입니까? 나는 자유하는 사람이다 하는 자아의식, 우리는 서로서로 ‘하나’다 하는 전체의식, 사람은 긴긴 세월을 두고 자라서 된 것이요, 이 앞으로도 무한히 자랄 것이다 하는 역사의식, 내 속에는 양심이 있다 하는 도덕의식, 어떤 보람진 것을 지어내려는 문화의식, 저도 모르게 제 속에 그런 의식들을 일으키게 하는 그 근본 생명의 신비는 무엇일까고 찾아 마지않는 종교의식, 그런 것들 아니겠습니까? 그 생각 있으면 사람이고 없으면 아닙니다. 가능성은 있지만 노릇을 못하는 형상 뿐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깬 여러분을 향해 부르는 것입니다. 자아와 전체와 문화와 근본적인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의미적으로, 신앙적으로 깨기 시작하신, 씨알 중의 씨알이신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우리 이웃으로 더불어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인위선’(與人爲善)입니다.
앞 물결 뒷 물결이 서로 밀고 서로 높여주듯이, 이 옥(玉)돌 저 옥이 서로 갈고 서로 빛을 내주듯이 사람은 사람에 부대낌으로만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합니다만 물(物)중에서도 물은 사람입니다. 지(知)가 물(物)을 격(格)함으로 된다면 인(仁)은 인(人)을 격함으로야 됩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요, 격인치인(格人致仁)입니다. 격인해서 인격이 됩니다.
생명도 하나요, 인격도 하나요, 마음도 하나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제 노릇을 못하면 불인(不仁)이라 합니다. 불인(不仁)은 곧 불인(不人)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제 노릇을 못하면 앓는 것은 그 부분만이 아니고 전체 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어느 부분이 아프면 온 전신이 아파하고 만져주고 돌봐줍니다. 나라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불행은 전체의 불행입니다. 어리석다 모질다 하는 것일수록 사랑하고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란 것은 원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신가 묻는 것은 정신이 말짱히 깨어있나 물음인데 정신이 깨려면 옆엣 사람과 손을 잡고 이야기를 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혼은 졸음을 모릅니다.
사랑하는 씨알 여러분, 역사의 엘리뜨 여러분, 이 한많은 1974년이 갑니다. 이 가는 해를 잘 보내자고 하려고 나는 이 붓을 들었습니다. 가는 해를 잘 보내주어야 오는 해가 잘 옵니다. 역사를 박차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에 빠져 죽듯 역사를 박찰 줄 모르는 국민은 역사에 치여 죽습니다.
가는 해를 잘 가게 하려면 진 빚을 깨끗이 물어주어야 합니다.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그 가슴에 안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 박차는 일입니다. 미워서 박차는 것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으로 역사의 성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가슴에 선물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같이 있기도 하지만 또 떠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붙들고만 있는 것이 사랑 아닙니다. 떠날 때는 선뜻 떠날 줄 아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떠나야 속에 영원히 같이 있습니다. 못 떠나면 육을 뚫지 못한 거죽 사랑이므로 살아 죽을 때 아주 없어져버립니다.
여러분, 가는 이 해에 안겨줄 선물이 무엇입니까? 이해의 역사의 기록입니다. 떠나기가 섭섭해 머뭇거리던 친구도 그같이 있을 때에 한 일의 의미를 회상시켜 치하하고 감사해주면 마음 흐뭇해 선선히 떠나가듯이, 가는 해도 잊기 어렵다가도 그 역사적 의미를 분명히 가슴에 안겨주면 잘 갑니다. 이제 1974년의 가슴에 그 역사를 새겨줄 시간이 왔습니다.
가는 해의 가슴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의 짐에 눌려 헐덕이는 씨알의 가슴 내놓고 다른 데가 없습니다. 자연에 묵은 해 새 해 없습니다. 끝없는 변천의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낡으니 새로우니 하는 것은 생각함으로써 의미에 사는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꺼질 수 없는 역사의 영원히 산 기록을 새길 만세 반석은 펀펀한 씨알의 가슴 밖에 될 곳이 없습니다. 다른 말이 아니라,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온 이 한해이지만 그 지낸 일들을 고요히 반성하여 엄정한 역사적 판단을 내려 심장의 육비(肉碑)에 기록을 하며 우리는 이 해를 평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가 있고, 그러면 새해에 역사의 주인으로 살수가 있단 말입니다. 성공 실패는 문제가 안됩니다. 의미가 있느냐 없느 냐가 문제입니다.
사람은 현상의 세계에 살지만 그 경험한 것은, 달이 물에 비쳤다 지면 그림자도 사라져버리듯,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물이 아닙니다. 달이 지면 제 속에 영원한 달의 모습을 만들어 품습니다. 현상계에서 경험한 외적 사건을 반성하여 그것을 자료로 영원한 내적 의미의 세계를 창조해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정신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기억입니다. 저 유명한 인도의『바가바드 기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감각의 대상물에 마음을 두면 집착이 생긴다. 집착이 생기면 욕심이 일어나고, 욕심이 일어나면 화가 일어나고, 화에서 어지러움이 오고, 어지러움에서 기억의 혼란이 오며, 기억이 혼란되면 이성이 파괴되고, 이성이 파괴되면 그 사람은 아주 망해버린다.
기억은 그와 같이 중요합니다. 모든 정신 활동의 기초가 됩니다. 개인에도 그렇지만 한 민족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나간 일을 다 잊어버리고 역사를 창조하는 민족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잘 잊어버리는 민족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발전이 없습니다. 밤낮 제자리걸음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국적 민주주의니 고전적 민주주의니 경제생활이 넉넉해져야 민주주의가 된다느니 그런 소리가 어떻게 정치 맡아한다는 사람들 입에서 나옵니까? 누가 가져다 맡기기나 했습니까? 자기네가 마구 도둑해 간 것이지. 설혹 도둑해 갔다 하더라도 옛날의 약탈 결혼같이 내 사람이 된 담엔 사랑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이 살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도 잘해보잔 성의가 없고, 그저 붙잡고 있는 동안 착취할 수 있는 데까지 착취하면 그만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성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종의 멍에를 벗은지 30년인데 아직도 한국적 민주주의니 서구적 민주주의가 무엇입니까? 이름은 한국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그 명사 속에 담은 내용은 옛날 ‘대감’ ‘영감’ 하던 때의 꼴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덴노헤이까’ 대일본제국 하던 때의 민중의 꼴입니다.
그리고 경제생활이 넉넉해져야 민주주의는 될 수 있다, 그때까지는 참아라 하는 말은 세계 역사를 왼통 잊어버린 말 아닙니까? 민중이 제 권리를 주장하는 데서 경제발전이 왔지, 어디서 경제가 넉넉해져서 민권을 올렸습니까? 이것은 영원히 지배해먹자는 욕심을 정당화하려는 궤변(詭辯)밖에 되는 것 없습니다. 먹을 것이 있어야 자유가 있다는 그런 식의 소리는 공산주의자의 입에서만 나오는 소리입니다.
잊었습니다. 양반시대 일제시대의 경험을 왼통 잊었습니다. 그 혹독했던 악정에 대해 많은 씨알이 항거했기 때문에 그 덕택에 오늘 이만큼이라도 자유를 찾고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멀리 갈것 없이 아직 10년이 못되는 4·19도 잊어버렸습니다. 4·19 대열에 나섰던 그 자신들조차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연히 잊게 내버려 나두면 좋게, 일부러 잊어버리게 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는데 어떻게 합니까? 지난 일년이 무엇입니까? 4·19를 깎아버리노라고 악을 쓴 것 아닙니까? 생손가락을 잘려도 기가 아찔해진다는데 이것은 심장의 육비(肉碑)에 새겨진 것을 긁히우노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데모를 뿌리채 뽑겠다는 것은 다른 말 아닙니다. 민중의 가슴에서 3·1,4·19의 기억을 영 없애버리겠다는 악독한 소리입니다.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지난 한 해의 치떨리고 이 갈리는 일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잊으면 사람 아닙니다. 잊고 이 해를 넘으면 짐승입니다. 내일부터 역사는 없습니다. 절대로 원한을 품으란 말 아닙니다. 원한으로 역사창조는 아니됩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망했고 ‘로베스삐에르’도 잊혀졌습니다. 심장의 육비(肉碑)에 새기라는 것은 그 죄악의 짐을 나 자신이 지고 십자가 위에서 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만 역사는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못한다(forgive, but not forget)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용서 못하는 것은 악한 사람이지만 잊어버리는 것은 역사를 지어갈 수 없는 멍청입니다.
1974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 년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기억하므로 살지만 또 잊어버리지 않으면 살수 없습니다.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잘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어떤 것을 잊고 어떤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인가? 거기 중요한 지혜가 있습니다. 가를 줄 알아야합니다. 골라야 합니다. 열자(列子)에 “견기소견(見其所見)이요 불견기소불견(不見其所不見)이라, 그 볼 것을 보고 안 볼 것을 아니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뭐나 다 보는 것이 잘 보는 것 아니라 보아야 할 것만 보고 아니볼 것은 능히 아니 봐야 정말 잘 보는 것입니다. 뭐나 다 보려면 눈이 못 견디어 마침내 아무것도 못 보게 될 것입니다. 백낙(伯樂)은 왜 말을 잘 볼수 있었던가? 천리마가 되려면 그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그것을 잘 알아서 그것만 봤기 때문입니다. 천리마가 되는데 털빛이 희냐 검으냐 수컷이냐 암거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열심히 천리마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찾노라면 그 필요 없는 것은 뵈지 않습니다. 그래서 견기소견(見其所見)이요 불견기소불견(不見其所不見)입니다.
역사도 그렇습니다. 망기소망(忘其所忘)이요 불망기소불망(不忘其所不忘)입니다. 그 잊을 것을 잊고 잊지 않을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잊을 것을 잊지 못하면 잊어 아니될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청소를 잘 하는 집이 오래 튼튼히 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나 다 아까워서 둬두면 모든 것이 다 썩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욕심 많은 민족은 나라를 못합니다. 긴 역사를 가지는 민족은 욕심적은 민족입니다.
어떤 것은 잊고 어떤 것은 잊지 말아야 할까?
개인은 잊고 전체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은 잊고 도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연은 잊고 역사적 필연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 실패는 잊고 의미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는 잊고 이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형사가 나를 잡아갔고 고문을 했느냐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를 잃고 학대를 당한 것이 이 나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욕이 나가도 참고 원수 갚을 생각이나도 쓸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 슬픈 것은 이 나라에서 도리가 죽어버린 것임을 알아 비통히 여기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끗날 같은 150명 젊은이를 물 속에 넣어 죽인 것은 우연입니다. 그러나 그런 실수를 하게 만드는 것이 관료주의인 것은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작은 도둑을 잡으려다가 큰 도둑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공 실패를 따지면 결국 영웅주의에 빠집니다. 너도 나도 다 같이 역사를 메는 일꾼입니다. 영원에서 보면 내려감도 올라감이요, 멀어짐도 가까워짐입니다. 몇 사람이 데모에 참가했다 해서 어떤 결과가 얻어 졌나가 문제 아닙니다. 단 하나라도 데모가 있었다는 그 사실에 큰 뜻이 있습니다. 전체는 수에 있지 않고 정의는 시간에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학대를 당하고 어떻게 억울한 재판 아닌 재판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터무니없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잊을 수 없어 이를 갈고 하늘 땅을 부르짖기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이것을 입속말로 외어봅시다.
이 해에 우리 젊은 혼은 용감히 일어나 죽음에 빠져드는 조국을 건져내려 안간힘을 썼다. 노래로 감옥을 흔들었다.
이 해에 우리는 우리를 종으로 묶는 주문인 거짓 헌법을 태워버렸고
이 해에 우리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감옥인 악한 체제를 부수기 시작했으며
이 해에 우리는 우리 인권을 힘있게 주장하여 압박자로 하여금 당황하게 했고
이 해에 우리는 근로자의 정당한 권익을 주장했다.
이 해에 우리 기독교회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군대로 힘있게 일어났으며 교파와 종교인 비종교인의 차별을 초월해 새로운 공동체의 체험을 했으며
이 해에 우리는 세계의 모든 정의와 인도와 평화를 사랑하는 씨알로 부터 “너희는 외롭지 않다”는 격려를 받았다.
이 해에 우리 언론의 비둘기는 그 죽지를 떨쳐 흐린 물 위에 감람가지를 가져왔다.
이 해에 우리는 정치인 비정치인을 초월해 국민이 하나되어 나라를 건지고 새 역사를 이룩하자는 새 운동을 일으킴으로 해를 보내는 송년사를 삼았다.
이제 우리는 오려는 새해를 내다보며 신부를 건너다보는 신랑 같은 확신을 가집니다.
악의 세력은 틀림없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들의 그 일마다에 있어서 하는 억지의 궤변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무죄한 사람을 방자히 심판함으로 그들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판자에 대해서 하는 말에 나타나는 그 도량이 좁고 작음이 그 궁지에 빠진 단말마인 것을 증거합니다. 말마다 ‘일부 소수’ 라는 것은 스스로 일부 소수임을 자인하는 콤플렉스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1974년더러 잘 가라 하십시오. 그 얼굴이 왼통 피요, 그 옷이 함빡 진창에 더러웠지만 그 속에는 성숙해 가는 신부의 살갗이 있습니다. 그는 그 상처와 더러움을 역사의 깊은 소에서 진주를 얻어오느라고 입었습니다.
씨알의 소리 1974. 12 39호
전작집; 8- 229
전집; 8-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