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손자 석재씨. |
20세기 초 조선문단에서 엄청난 작품을 쏟아낸 인물이 채만식(蔡萬植)이다. 1989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채만식전집》은 모두 10권으로 권당 400~700쪽에 달한다. 마흔아홉(1902~1950)의 짧은 생애 동안 15편의 중·장편 소설, 70여 편의 단편, 30여 편의 희곡·촌극·시나리오, 40여 편의 문학평론, 140여 편의 수필과 잡문 등 시를 제외한 전 장르에서 작품을 남겼다. 아직도 그가 남긴 글들이 빛바랜 신문과 잡지에서 종종 발견된다.
양(量)만이 아니라 질적(質的)인 면에서도 채만식은 동시대 작가 위에 도도하게 군림한다. 오죽하면 스스로 자신의 문장을 ‘신경쇠약이 걸릴 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글’(《조선중앙일보》 1934년 5월 15일자)이라 표현했을까. 타인과 어울리기 힘든 결벽증과 ‘심한 신경질’로 평생 고독과 싸웠으며 자신의 작품 속 부정적 인물에 대한 증오심이 유별났던 그였다. 오랫동안 괴롭혔던 가난조차 문학적 열정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원고지와 ‘지지고 볶고 싸웠으나’ 정작 주머니는 늘 비었었다. 풍자와 반어·역설·아이러니로 가득찬 그의 칼칼한 문장을, 어리석은 독자들은 감히 돈을 주고 사 보기 까다로웠을까. 채만식은 자기 이름이 걸린 대문 문패를 가져 본 일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1948년 6월 장편 《탁류》의 3판 인세와 〈잘난 사람들〉의 고료를 보탠 돈으로 전북 익산시 주현동에 처음으로 기와집을 산 것이다. 그러나 1년2개월 만에 그 ‘거룩한’ 집도 팔아 버리고 초가집(익산시 마동 296번지)으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의 대표작 〈레디메이드 인생〉에 나오는 ‘갈 곳 없는 초상집의 개’가 된 식민지 지식인의 한(恨)이 그의 삶에, 소설에 중첩되어 보인다.
그가 남긴 작품들이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정신적 자산(資産)이 되었으나 그의 삶은 행(幸)보다는 불행에 가까웠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 역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평생 추구해 온 식민지 현실과 민족에 대한 소설적 탐험 이면에 그의 가족들은 불덩이와 같은 가내(家內) 갈등과 이산(離散)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그 혹독했던 고통이 세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내 은선흥이 견뎌야 했던 ‘여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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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보 재학 당시 채만식(뒷줄 왼쪽). |
채만식은 중앙고보에 다니던 1919년 부모의 강권으로 고향(전북 군산시 임피면)에서 10여km 떨어진 마을(전북 익산시 함라면)에 살던 은선흥(殷善興·1901~1993)과 결혼해 두 아들 무열(武烈·1926~1945)과 계열(桂烈·1928~2004)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과 정이 멀어진 뒤 어느 고아를 딸(福烈)로 삼아 호적에 올렸다.
장남 무열은 스무 살 때 말라리아 열병으로 사망해 후손이 없다. 차남 계열은 2남1녀를 낳았는데 장남이 채석재씨다. 그의 말이다.
“할머니(은선흥)는 할아버지(채만식)와 혼인했지만 정을 느끼지 못해 평생 혼자 사셨습니다. 생전 할머니 회고에 따르면, ‘결혼식을 올리고 가마를 탄 채 함라(전북)에 있던 친정으로 가다가 개천 둑에 이르러 난데없이 돌풍이 불어 왔다’고 해요. 그 돌풍에 가마뚜껑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할머니는 이 일을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셨는데 불행한 결혼을 예감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셨어요.”
고향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서울 중앙고보(1918~1922년)에 다니며 신문물을 일찍 접했던 채만식은, 18세가 되던 1919년 4월 집에서 결혼하러 내려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당시 중앙고보 2학년이었던 그는 하는 수 없이 내려갔다. 채만식의 부모는 이미 결혼 준비를 다 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구습의 조혼(早婚)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결혼 처음부터 별거를 하고 말았다.
채만식은 1922년 도일(渡日), 와세다대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듬해 관동대지진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부모와 아내·자식이 있는 고향으로도 내려가지 않았다.
채만식의 집안은 보수적이고 아들 편애가 심해 며느리를 심하게 차별했다고 한다. 은선흥은 고된 시집살이를 하다 아들 둘을 낳고 쫓겨나 친정(함라) 부근에서 살았다. 이혼절차도 없었다. 자식이 장성하면서 나중 경기도 구리(교문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손자 석재씨의 말이다.
“할머니는 청상(靑孀)으로 사셨어요. 삯바느질을 하며 살림을 일으켰어요. 지금도 할머니가 쓰시던 낡은 재봉틀이 남아 있습니다. 이웃의 입방아가 창피해 낮에는 집밖에 못 나가고 밤에 땔감 나무를 구하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친정 도움도 원치 않으셨어요.
제가 국회도서관에 가서 조사해 보니 소설가 중에서 채만식과 관련된 논문 수가 제일 많더군요. 하지만 가족과 후손 입장에선 씁쓸함이 많이 남죠. 자랑스러움이 아니라 씁쓸함…. 할아버지의 후광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들이) 그 그늘에 가려진다는 게 가슴 아파요. 채만식이란 이름이 더 빛날수록 후손들은 좀 더 씁쓸한 마음을 가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할머니가 견뎌야 했던 ‘여자의 일생’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할머니 힘으로 일가를 이뤄 냈잖아요.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할머니 산소(남양주 모란공원묘지)에 가면 쓸쓸함을 느낍니다.”
결벽증… 남의 집에 갈 때도 자기 숟가락 챙겨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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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전북 익산시 마동 269번지 초가. 장독대 옆방에서 1950년 6월 11일 오전 11시반에 영면했다. |
소설과 수필, 희곡 등 맹렬히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그의 생활은 여전히 안정적이지 못했다.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1930년 《개벽사》에 들어갔다가 다시 《조선일보》(1934~1936년)로 직장을 전전했다.
파탄이 난 결혼은 채만식의 까다로운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채씨 문중(平康蔡氏 牧使公派 臨陂派)에 따르면, 채만식은 가부장 성향이 짙은 집안의 막내아들로 어머니 한양조씨 조우섭(趙又燮)의 지극한 편애 속에 응석받이로 자랐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봄이 되면 남편과 아들이 먹을 고추장을 따로 담가, 며느리와 머슴이 먹을 고추장과 구별했을 만큼 차별이 심했다. 자연스레 채만식은 유년시절부터 음식과 거처에 대한 결벽증과 같은 까다로운 습성을 가지게 됐다. 그는 남의 집에 가서도 밥을 먹을 때는 숟가락을 닦아 사용하거나 앉아서 얘기하는 도중에 몇 번이고 엉덩이 밑을 쓰다듬어 먼지를 털고 몸매를 추슬렀다고 한다. 심지어 어딜 가든 자기 숟가락을 들고 다녔다고 전한다. 또 빈털터리 신세였지만 여행길에조차 호텔이 아니면 유숙하지 않았고, 삼복더위에도 스리피스 정장에다 모자, 두꺼운 외투까지 입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그를 ‘불란서 백작’이라 불렀다.
이런 결벽증과 까탈스러움은 소설을 쓰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소설 속 등장인물 중 악인에 대한 증오심이 유별났다. 부르르 떨며 참지 못할 정도였다. 채씨 문중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에 대한 후일담 중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선생은 등장인물의 성격에 휩쓸려 덩달아 감정이 격해져서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작중 악인을 작가가 못 견뎌한 셈이죠. 이런 성격이 선생의 병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겁니다.”
이 인사는 또 “생전 채만식은 가슴을 둘러싸고 있는 늑골과 늑골 사이에서 발생한 ‘늑간(肋間) 신경통’으로 오래 고생했다. 숨을 들이쉬거나 기침할 때마다 가슴과 등이 죄어 오는 고통으로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이런 성격적인 면은 작품 속 풍자·반어를 통한 아이러니로 재연됐다. 대표적인 작품이 〈태평천하〉다. 부정적 인물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우고, 긍정적 인물을 후면에 두거나 희화화한다. 심지어 긍정적인 인물들은 부정적 인물에 의해 시종일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성격만큼이나 그의 삶 역시 고단했다. 채만식의 문우(文友)인 소설가 이무영(李無影)이 그를 보내는 조사(弔辭)에서 “나는 그를 잊고 싶고 또 잊어야 한다. …안양에서 이십 리 길이나 되는 궁촌으로 좁쌀을 얻으러 오던 중견 작가 채만식. 그의 일생을 나는 무(無)로 돌리고 싶다”라고 추모했듯, 겉으론 고고하고 귀족적이었지만 실은 가난에 찌든, 얽은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다만 복잡한 내면과 가난한 현실, 파탄난 가정은 그의 작품을 지식인의 관념적 수준이 아닌 체험의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편 《아름다운 새벽》 서씨와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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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선생의 아내 은선흥 여사. |
이 소설은 1942년 2월부터 7월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됐다가 1947년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소설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막 그럴 때에 건넛방으로부터 병색과 수심을 얼굴에 드리우고, 며느리가(방금 강부인이 하던 말로 하면 ‘죄 없이 소박 받은’ 준이 아낙이) 헝클어진 머리를 다스리면서 원기 없이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중략)
며느리 서씨는 심화와 부실한 건강으로, 볼썽없이 바스러지고 조로를 하였다. 언뜻 사십이 훨씬 넘어 보인다. 그와 반대로 시어머니 강부인은 이른바 노익장(老益壯)하여, 원 나이보다 네댓 살은 젊어 보인다. (중략)
노상 혼인하던 첫날밤 애기신랑에게 소박을 맞은 이래 이십 년은, 꼬박 생과부로 살아오는 여인이니라 하는 선입주견만으로가 아니다. 아무 내력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어딘지 불행하여 보인다. 추레하고 수심스러운 표정이야 그 자신의 항상 경황없고 슬픈 심정의 반영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말고도, 일종의 선천적인 것으로 무엇인지 모를 불길스런 듯 박행스런 듯한 상모(相貌)다. (중략)
준이 아낙을 소박한 소연이 그 인물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심성이나 부덕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도 아니다. 또 열세 살에 든 장가라서 자성한 후 개성이 눈뜸을 좇아 자유결혼을 욕망하는 나머지 아낙에게 애정이 없다는 것을 구실로 명령결혼(命令結婚)에 대하여 의식적인 항거를 일삼고 있는 것이냐 하면 그역 아니다. (중략) 오직 한 가지 특별한 사유가 따로 있던 것이다. 하되 그것은 맹랑하기 상식을 초월한 것으로, 항용 이성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좀처럼 휘어잡기 어려운 마성(魔性)을 띠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십 전 생과부로(정히 처녀과부로) 사십 고개를 넘고 있는 그 서씨였다.〉(p11~12, 《채만식전집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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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선생의 차남 채계열 선생. |
채만식의 손자 석재씨는 “할머니 말씀에, 할아버지는 집에 잠시도 안 계셨지만 어쩌다 집에 들어오면 애가 생기고, 또 둘째가 생겼다”고 말했다.
—조혼에 항거하려 했던 측면도 있었지 않았을까요.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감당해야 할 여성의 입장에서는 가혹하죠. 제가 할머니에게 ‘왜 이혼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진 적이 있어요. 당시 이혼이란 게 있었겠습니까?”
석재씨는 “할머니 역시 할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장남(채무열)의 죽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고 처가가 있던 함라를 지나고 있었다고 해요. 공교롭게도 같은 버스 속에 장남이 있었어요. 부자상봉을 한 셈인데 성장한 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동행한 분이 ‘네 아버지’라고 말하자 장남이 ‘나에겐 아버지가 없어요’라고 말했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큰아버지가 열병으로 돌아가셨어요. 할머니는 장남의 죽음이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친아버지와의 만남에 충격을 받아 열병으로 죽었다는 겁니다. 큰아버지는 굉장히 똑똑했고 남자다워 할머니가 남편처럼 의지했는데 그날 만남 이후 갑자기 죽었으니 원망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채만식의 차남 계열씨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아버지는 5·16 전에는 체신공무원이었어요. 혁명정부에서 공무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실직했고. 그 후 1968~69년인가 보사부에 들어가셨습니다. 하지만 몸이 편찮아서 일찍 그만두었죠. 아버지는 허약하게 태어나서 굉장히 병치레를 많이 했다고 해요. 제가 고등학교 때는 황달까지 걸렸죠. 할머니는 장남을 가슴에 묻고 차남까지 허약하니 평생 조마조마하게 사셨어요. 자식들이 당신보다 먼저 떠나지 않을까 하고요.”
신여성과 동거해 2남1녀 낳아… 채만식이 사망하자 집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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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조선문단》에 등단할 당시의 채만식 선생. |
채만식은 임종 때까지 본처 대신 김씨와 살았다. 현재 병훈과 영훈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딸 영실은 출가하여 비구승이 되었다.
채만식의 손자 석재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았어요. 사실 조부의 명성이 제 삶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반항심도 생겼어요. 아버지(채계열)가 조부 제사를 지내면 ‘벌이도 시원치 않으면서 때 되면 제사를 지내냐’고. ‘도대체 해 준 게 뭐며, 뭘 물려받았는지’ 따지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어요.
고교 때는 아버지와 함께 선산(군산 임피)에 갔고, 대학에 입학하고선 혼자 다녔어요. 그땐 익산을 거쳐 군산에 가야 했기에 꼬박 1박2일이 걸렸어요. 제가 현대차에 입사해 1987년인가, 처음 차를 뽑아서 부모님 모시고 선산에 갔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석재씨는 몇 해 전 조부모의 기제사를 합쳤는데 합제(合祭) 날을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 기일로 정했다. 은선흥은 93세이던 1993년 10월 21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할머니 산소를 남양주에 있는 공원묘지에 두었어요. ‘왜 할아버지가 계신 선산으로 안 옮기느냐’고 속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고, ‘채만식 문학관’을 세운 군산시에서도 그런 제안을 하지만 쉽게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어요. 생전 할머니는 합장을 원치 않으셨어요. 할아버지도 그 결혼이 싫어 집을 나가셨지 않았나요?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언젠가 할아버지가 함라에 와서 문을 두드렸지만 당신은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고요. 할머니는 평생 꼿꼿하게 사셨어요. 돌아가실 때도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주무시다가 가셨습니다.”
‘탁류에 휩쓸린 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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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와세다 대학 시절의 채만식.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
채만식·김시영 사이는 본처와 달리 정상적 부부로 지냈는지 알 수 없다. 채씨 문중에 따르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채만식이 하숙집 딸이던 김시영과 동거를 시작했으나 두 사람 사이 역시 정이 없었다고 한다. 채만식이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김시영은 자신이 낳은 2남1녀를 버리고 가출을 해 버렸다. 자식들은 고아원을 전전했지만 백부(채만식의 큰형 明植)가 이들을 찾으려 애를 썼다고 전한다.
기자는 1973년 10월 16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채병훈씨와 관련한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작가 채만식의 아들 병훈씨… 깡패 20년 청산’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달렸다. 그는 어린 아들과 함께 한때 아버지 채만식이 기자로 재직했던 《조선일보》를 찾아와 자신이 직접 쓴 ‘탁류에 휩쓸린 어제는’이라는 제목의 수기(200자 원고지 350장 분량)를 꺼내 놓고선 한동안 원고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병훈은 인터뷰에서 “이미 지은 죄는 씻을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사람답게 살겠다”고 말했다. “뒷골목 생활 20년을 청산하고 재생의 길을 걷겠다. 리어카를 끌며 채소장사라도 하겠다. 그것도 안 되면 넝마주이라도 하겠다”고도 했다.
당시 그는 폭력과 특수절도 등 전과 4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을 합쳐 교도소를 7번이나 드나들었다. ‘창신동(서울 동대문구) 독종’으로 관내 형사들도 혀를 내두르는 특급 우범자였던 것이다. 기사에는 고아로 자라야 했던 눈물겨운 사연도 담았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아홉 살의 소년이었던 저는 손수 화장한 아버님의 뼈를 골라 선산에 묻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저는 고아로 자라야 했습니다.”
채만식이 사망한 후 6·25가 터졌고 그는 어머니 김시영과 함께 전북 군산 임피면으로 피란을 갔다. 채만식이 죽기 직전 부산에서 발행되던 월간지 《학우》에 작품 〈소년은 자란다〉를 연재 중이었는데, 학우사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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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노부부가 채만식의 아들(채계열)과 며느리 방희정씨. 뒷줄 왼쪽 세 번째가 손자 석재씨, 네 번째가 홍만표(채길성의 남편), 다섯 번째가 손녀 길성씨, 오른쪽 끝이 손자 석환씨. |
그러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명륜동에 있다는 말만으로 외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거리를 방황하면서 서울 뒷골목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남의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다. 1961년 6월 절도죄로 1년간 복역한 후 성격이 더욱 난폭해졌고 ‘똘마니’ 8명을 거느린 왕초 노릇을 하며 주먹질과 도둑질을 일삼았다. 1963년 1월에는 터키 대사관에 침입해 타자기 등을 훔치기도 했다.
1969년 박모씨와 가정을 이뤄 아들까지 낳았으나 여전히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1973년 9월 27일 7번째로 교도소 문을 나선 그는 도저히 살길이 막막했던지, 무턱대고 《조선일보》를 찾았던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맨주먹뿐이다. 전과자인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도 무섭다. 리어카라도 마련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요?”라고 도움을 청했다.
《조선일보》 보도 후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당시 김현옥(金玄玉) 내무장관이 그를 불러 집세와 생활보조비를 전하기도 했다. 채만식의 《탁류》에 빗댄 수기 ‘탁류에 휩쓸린 어제는’은 김 장관의 호의로 출판사와 계약(당시 계약금이 23만5000원이었다고 전한다)했으며 출판사 외판사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선심을 베푸는 척하며 접근하는 악인들도 있었다. 《동아일보》 1973년 10월 29일자 기사에는 장씨 성을 지닌 사기꾼이 병훈에게 “일본 제일권업(第一勸業)은행 서울지점을 털자”고 꾀다가, 마음을 다잡은 병훈의 신고로 덜미가 잡혔다는 것이다.
이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검색했지만 병훈씨가 간행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수기집은 찾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
시절의 채만식 채만식은 1934년 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후 1936년 1월 퇴사했다. 열심히 취재현장을 누볐지만 작가로서의 위상도 이 시절 확고히 다졌다. 그러나 《조선일보》 기자 시절에는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했다. 《채만식연구》를 쓴 김홍기는 “신문기자의 호화롭고 분망한 생활에 빼앗겨 작품의 제작에 잠시의 공백기를 가져오게 하였으나 반면 기자생활은 시대와 인간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력을 키워 줌으로써 그 이후의 작가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채만식은 《조선일보》에 입사하자마자 함북 회령의 오지 탄광으로 장기 출장을 떠나야 했다. 총독부는 만주와 두만강변 국경 지역으로 조선인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세워 우선 시범적으로 만주 요하(遼河) 지역에 6000여 명, 관북지역 탄광에 3800여 명을 이주시켰다. 대부분 전라·경상·충청도 농민들이었다. 《조선일보》는 조선인 집단 이민촌의 생활상을 신년호 특집기사로 싣기 위해 만주, 관북, 관서지역을 나눠 3명의 기자를 파견했는데 그중 채만식이 포함됐다. 1935년 8월에는 경남 통영 아래의 섬 욕지도를 취재했다. 이곳의 멸치어장과 문어어장에 대한 르포기사는 ‘생활해전 종군기’란 제목으로 《조선일보》(1935년 8월 10~14일)에 실렸다. 채만식은 기자로 체험한 민족과 사회현실을 바탕으로 퇴사 후 본격적인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936년 1월 퇴사 후 3년간은 그가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활발하게 문학활동을 한 시기였고 작품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그의 대표작 《탁류》는 1937년 10월부터 《조선일보》에 198회 연재했고, 또다른 대표작 《태평천하》 역시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에 1938년 1월부터 연재했다(2005년 간행된 《일제시대 조선일보 사람들》 참조). |
“고모 永實씨 뵙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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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16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채만식의 3남 병훈씨 기사. |
—채씨 문중 족보에 김시영씨와 낳은 자식들의 이름은 올라갔나요.
“파족(派族)에는 그쪽 집안 안 올라와 있어요. 두 분(병훈·영훈)은 이미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고모는 출가하셨죠. 제가 어린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우리집에 한두 번 오셨는데 조카와 고모로서의 만남은 없었고 어떤 관계인지도 몰랐어요. 커서 알았죠.”
—서로 갈등은….
“출판사에서 할아버지 책을 낼 때 밤새 판권도장을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아버지(채계열)의 배다른 동생들이 찾아와 돈을 달라 하면, 있는 돈 없는 돈 해서 갖다 드리고, 어머니(방희정)도 그 집에 가셔서 쌀을 팔아 주고 연탄 들여놓고…. 하지만 삼촌들이 하도 말썽을 피우니까 채씨 집안 사람들이 그분들을 안 보고 사셨어요. 그래도 형제니까 아버지는 찾아가려 했지만 자꾸 손을 뿌리치려고 해서 이후 연결이 안 됐습니다.
고모(蔡永實)가 살아계시면 일흔이 넘었을 텐데 어떤 연유로 비구니가 됐는지 알지 못해요. 마지막으로 뵌 것이 2003년인가, 군산에 채만식문학관이 개관할 때였어요. 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군산에 내려갔는데 고모도 초청을 받아 오셨더군요. 아버지가 멀리서 보고 고모를 가까이 오라고 불렀는데 고모는 냉담하게 외면을 했어요. 얼핏 (군산)시청에서 들리는 얘기가 ‘왜 저쪽 집안을 불렀냐’고 했다는 겁니다. 그때 아버지도 몸이 편찮아서 휠체어를 타고 계셨는데….”
—섭섭하셨겠네요.
“저는 특별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섭섭한 마음보다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도 고모를 뵙고 싶으시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입장은 그래요. 그분이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 살아계시다면 찾아뵙고 안부라도 전하고 싶어요. 제 나이도 어느덧 환갑입니다. 살아서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 뭐가 큰 문제겠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뵐 수도 있고요. 이런 말을 하니까, 좀 슬퍼요, 가족관계가.”
채석재(1955~)씨는 박은경(朴銀敬)씨와 결혼해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명석(明錫)씨는 법대를 나왔으나 연극무대와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석재씨는 “처음에는 제발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할아버지 피를 이어받아 예술적인 기질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딸 희원(稀媛)씨는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채만식 선생도 〈가죽버선〉 〈시님과 새장사〉 〈심봉사〉 등 희곡과 촌극, 장막극에 쓰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유전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석재씨의 동생 석환(奭煥·1958~)씨는 몇 해 전 섬유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정리하고 일식집을 하고 있다. 최옥주씨와 결혼해 1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 현석(玄錫)씨는 공대, 딸 윤희씨는 간호대학에 다니고 있다.
석재씨의 누나 길성(吉成·1951~)씨는 해운업을 하는 홍만표씨와 결혼해 딸 둘을 두었다. 두 딸 모두 미국으로 유학을 가 의대와 간호대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석재씨의 말이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모두 외롭게 돌아가셨어요. 어떤 면에선 안타깝고 안됐다는 생각입니다. 말년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생을 후회하는 부분도 있다고 느낍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우리 세대는 우리 나름의 몫이 있어요. 정(情)을 내어 열심히 살아야죠. 열심히, 임피(채만식의 선산)와 모란공원(은선흥의 산소)을 왔다갔다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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