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방 속의 필수품 표준 한국어발음사전
TV 드라마 초창기 시절, 우리는 국어사전을 펼쳐놓고 대사 연습을 했다.
“이 발음이 맞냐?” “아냐, 그건 장음이야. 길게 발음해야 해.”
그렇게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대본 연습을 했다. 당시엔 연출자도 그렇고 연기자도 그렇고 조금이라도 의미가 불명확하거나 발음에 의문이 생기면 방송국의 사전을 빌려서라도 확인을 하고 넘어갔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우리 연기 분야도 기본이 중요하다. 발성법과 연기력 등 기본이 확실히 다져진 바탕 위에서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표준 한국어발음사전>을 가지고 다닌다.
<이순재 탤런트>
TBC 시절 모 드라마를 녹화할 때였다. 2004년 작고한 김순철씨가 출연했는데 이 친구가 접속어 하나를 잘못 발음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작가는 녹화를 중단시켰다.
“어휴 미안해. 이거 나 때문에 밤새우게 생겼네. 미안한데 다시 한 번만 해줘. 이봐, 김순철. 자네는 빼어난 배우야. 근데 그게 같은 말 같지만 의미가 다른 거야. 나는 이런 의미로 쓴 거니까 한 번만 더 해줘. 미안해. 내가 저녁 살게.”
‘한국 TV 사상 최고 걸작’으로 격찬 받은 <탑>을 비롯해 우리나라 방송 초기 주옥 같은 드라마들을 쓰신 김희창 선생의 일화다.
그때는 편집이라는 게 안 될 때여서 한 번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그런데도 작가들은 잘못된 발음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김희창, 한운사, 김영수 선생 등…. 당시 드라마를 썼던 분들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분들이 밤을 새워가며 쓴 원고는 어휘 하나도 틀림이 없다. 대충 입에서 나오는 대로 쓰는 법이 없다. 요즘 작가들 중에도 김수현씨처럼 선배들의 영향을 받은 정통 작가들이 있다. 이런 작가들의 대본은 글자 하나 뺄 수가 없다. 바로 철저한 작가정신, 기본기에 충실한 작가들의 대본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기본이 중요하다. 기본이 확실하게 다져졌을 때 그에 따르는 훌륭한 창작물이 나온다. 연기자에게는 정확한 표준어 발음이 기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소위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젊은 연기자들에게서는 그러한 기본 정신이 많이 부족한 듯 보인다. 시청률에 급급해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을 주인공 시키는 방송국과 연출가들도 문제이지만 톱스타라는 배우들이 연극을 한다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면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사실 언어훈련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원생들 가운데에도 한 작품을 가지고 두 달 반을 매일 4시간씩 연습했는데도 발음이 제대로 안 되는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용어는 전부 응석받이 용어다. ‘나아느은~’ ‘그거느은~’ 식으로 말을 질질 끈다.
우리나라 말에는 엄격한 발음체계가 있다. 예를 들어 ‘눈’하고 짧게 하면 눈[眼]이고, 길게 ‘눈:’ 하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雪]이다. ‘벌’도 짧게 하면 벌(罰)이고 길게 하면 벌[蜂]. 이런 발음이 많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잘못 발음해도 이야기가 통할 수 있지만, 한문이 섞인 학술적인 용어나 전문적인 용어를 쓸 때 잘못 발음하면 전혀 의미 전달이 안 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 내용만 전달되면 되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기가 좋아 연기자가 된 사람들 아닌가. 연기의 기본을 모른 채 세월만 보낸다면 결국에는 오래도록 사랑받는 연기자가 되기 어렵다. 기본이 안 되면 창의력과 생명력은 금세 힘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환경은 열악했지만 우리 때는 참 행복했던 것 같다.
연기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대본을 써주는 투철한 작가정신의 작가들이 있었고, 바로 그와 똑같은 마음이던 연출가, 동료 연기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영화에 심취하여 연기자가 된 이후 흔들림 없이 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분들의 덕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도 내 가방 속에 들어 있는 <표준 한국어발음사전> 덕분이 아닐까 한다.
탤런트 이 순 재 님은 1935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56년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로 데뷔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일일연속극 <눈은 나리는데>의 주인공을 비롯해 최장기 방영된 일일연속극 <보통 사람들>,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보고 또 보고> 등에 출연했습니다.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남자최우수연기상, 2002년 문화관광부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습니다. 10년 전부터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7월에 종영되는 <거침없이 하이킥> 후속작으로 사극에 출연할 예정입니다.
출처 : 월간 마음수련 2007년 8월호 중에서
첫댓글 우와 ^^
이순재님을 보면 한결같이 자기 일에 종사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정말 멋진 연기자^^* 잘생긴데다 수재였고~
정말 ~뭐든지 기본이 중요한것 같아요..ㅋ
순재 아쟈씨 왕팬이에요~~
아직도 깊숙한 야동순재라는 사진..ㅎㅎ
순재 아저씬 연예인계 공무원이시라며 ㅎㅎㅎ 열정 멋있습니다 ^^
야동순재 ㅋㅋㅋㅋㅋ 난 그거 안봐서 모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