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와 심야 극장
기형도(1960-1989)는 190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테어났다
중학생 때부터 시 쓰기를 시작했다
연세대 문학 써클 '연세문학회'와 안양의 문학동인 '수리'에 참여했다
연세대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한 '박영준 문학상'과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안개는 기형도에게 운명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우룩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선 간 일행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의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팍팍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게 이곳은 안개의 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사내의 반쪽이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것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름다움은 무럭무럭 자리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는 늘 헐벗은 영혼이다 나는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간)을 세 번째 읽으며 더욱 가슴이 아리다. 그가 죽음의 장소로 택했던 심야 극장은 아마도 파고다극장은 아니었을까?*
*1989년 3월 7일 새벽, 그는 시집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