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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윤리 사상사
중국의 역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전개된 사상의 전체. 이것이 특히 문제시되는 것은 그 발상(發祥)이 고대 그리스나 인도와 같이, 극히 오랜 옛날부터 독자성을 가진 전통을 형성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 제국(諸國)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특수한 성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중국철학이라는 명칭으로 연구대상이 되나 그 실태는 전통사상에 치중하고 있어, 현대 중국연구는 별도로 행해지기도 한다.
【사상의 성격】 일반적으로 중국사상은 현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사고(思考)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를 현실의 실재세계에서 뚜렷하게 분별하는 관념철학으로서의 사고는 부족하다. 예컨대 유교사상과 노장(老莊)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은 전통사상으로서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어 왔으며 유교에서 말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듯이, 도덕과 정치를 중심으로 하여 어디까지나 현실과 밀착된 형태에서 사고하였다. 노장에서는 현실의 근저에 있는 도(道) 사상이나 정치사회 밖으로 나가는 은일(隱逸) 사상 등을 보면 마치 초월적인 사고가 행해지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역시 개인생활의 평안이라는 현실적인 관심이 중심을 이루었다. 인도에서 전해 온 불교도 그 진여(眞如)의 세계가 본래의 순수한 형태로서보다는 ‘입처즉진(立處卽眞:현실세계가 그대로 진실세계)’이라는 형태로 이해되었다는 것도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이 현실주의적 경향은 실은 일반적인 감각중시의 입장에서 온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확실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추상적 사고는 진실성이 없는 것이라고 거부되었다. 이 감각중시의 입장은 과학적·유물론적인 사상과 연결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였다. 개체(個體)의 객관적 관찰보다는 다양한 현상의 형식적 종합을 추구하는 경향이 한편으로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강한 감각중시의 경향은 현상의 다양과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약을 갈구했을지도 모른다. 음양(陰陽)·오행(五行:木·火·土·金·水)에 의한 우주론과 그 밖의 정리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형식 또는 원칙의 존중이라는 경향이 생겨난다. 유교에서의 예(禮)의 존중이 바로 그것이다. 잡다한 현상을 잡다한 그대로 방치해둘 수 없다면 그 잡다한 현상에 관한 통일의 원리를 추구함직도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나가기보다는 형식적 원리에 의한 질서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 질서원리와 현실은 완전히 일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그것은 그것대로 허용된다. 원칙은 원칙으로서 중요하지만,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관용의 입장이다. 이 입장은 이른바 ‘중용(中庸)’의 사상, 현실에서의 조화(調和) 존중의 사상과 연결된다. 중국사상의 현실주의적 경향을 주축으로 한 성격규정은 이상과 같으며 이러한 사상에서는 신과 악마,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절대적 대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자(絶對者)와 개체,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원래 인생론적이고 조화의 철학이며, 예술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중국사상에서는 ‘천(天) 사상’도 중요하다. 천은 자연 그 자체라고 생각되었고 권위 있는 명령자·통솔자로 생각되었으며, 또한 우주와 인생을 관찰하는 이상적인 질서원리로 생각되었고, 운명을 좌우하는 근원자(根源者)로 생각되었다. 그러한 존재로서의 천과 사람의 깊은 관련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국사상의 주류를 차지하는 정통적 경향이다. 이에 대하여, 천을 자연 그 자체로 보고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단적(異端的) 사상이다. 이단사상은 각 시대를 통하여 그 나름대로 강세를 보였지만 정통사상의 광범한 보급에는 결국 미치지 못하였다. 인생론적인 중국사상은 인간의 현실생활의 문제를 가장 중요시하면서도 인간존재의 유한성(有限性)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변천】 중국 사상사의 시대구분은 4기(期)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주초(周初)에서 한초(漢初)까지(BC 21∼BC 2세기)로 황허문명[黃河文明]의 정신문화가 순조로운 발달을 이루어 공자(孔子)를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이 만개(滿開)했던 시대이다. 제2기는 한왕조(漢王朝)의 체제가 확립되어 당말(唐末) 5대까지(BC 2∼AD 10세기)로 왕조체제와 결부된 유교의 권위가 확립되고 마침내 고정화되면서 불교와 도교(道敎)가 대두하게 된다. 제3기는 송초(宋初)에서 청말(淸末)까지(10∼19세기)로 유교가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생명을 찾은 시대이다. 송학(宋學) 즉 주자학(朱子學)과 명학(明學) 즉 양명학(陽明學)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시대이다. 제4기는 청말 아편전쟁 이후로, 서양세계의 충격에 의해 전통사상이 근본적 변혁을 강요당하게 된다.
〈제1기(고대)〉 중국사상이 그 후의 전통과 같은 관계를 가진 것으로서 처음으로 분명해진 것은 주왕조(周王朝) 초기부터이다. 그 이전의 은대(殷代)의 사상은 그 종교적인 상황을 다소 엿볼 수는 있지만,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조상신(祖上神)이나 잡다한 자연신(自然神)을 중심으로 하여 제(帝)라고 하는 최고의 인격신(人格神)이 있어, 그것이 주초(周初)의 천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은나라 대신 들어선 주나라 사람들은 그 왕조 교대라는 사실을 단순한 무력(武力)의 제압이라 생각하지 않고, 천명(天命)에 의한 것으로, 그 근원은 백성을 평안케 하는 왕자(王者)의 덕(德)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경우 천은 그래도 종교적·초월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덕이라는 인간 문제에 치중하여 생각하는 점에 이미 중국사상의 두드러진 특색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 종교의례를 인간적·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 상응하는 것으로 마침내 춘추(春秋) 말기의 공자의 유교가 탄생하였다. 공자도 또한 천을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의 내면의 윤리적인 문제로서 공자 자신의 한계상황에서 말한 것이어서 주초에서처럼 특별히 강조된 것이 아니었다. 공자의 최대 관심은 인간세계의 새로운 질서 수립에 있었다. 춘추시대까지의 사회는 혈연적 일족(一族)으로 지켜진 세습적 영주(領主)가 중심이 되었으나, 말기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 해체되기 시작하여, 경지(耕地)와 농민을 확보한 새로운 지주세력이 옛 영주를 뒤엎는, 이른바 하극상(下剋上)의 시대가 되었다. 이 세력은 일반 민중의 대두를 촉진하고, 따라서 활발한 사상의 개화(開花)를 위한 토양이 형성되었다. 공자는 우선 이 혼란한 사회를 혈연의 연대의식에서 배운 새로운 도덕질서에 의해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인(仁)의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공자에 이어 나타난 묵자(墨子)는 겸애교리(兼愛交利) 즉 나의 몸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도모한다는 사상을 내세워, 유교의 인이 가족애(家族愛)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임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공자 사상의 주관적 측면을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묵가(墨家)와 대항하기 위해 인과 함께 의(義)의 덕을 강조하여 사랑의 차이 등을 설명하고, 인간 본성을 선(善)한 것[性善說]이라 하여 윤리의 내면적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펴 유교의 정비를 이루었다. 같은 무렵 이러한 현실적 입장에서, 인간만을 관찰하는 입장을 비판하면서 현상의 안쪽을 주시(注視)하고 또한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을 보려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이 나타났다. 세속을 초월한 입장에서 현실을 고쳐봄으로써 정신의 평안과 사태의 처리를 도모하려는 것으로, 그 중심은 도의 자연성과 통일성의 강조였다. 유가(儒家)의 순자(荀子)는 이에 반발함으로써 같은 유가의 맹자와 대립되는 입장에 섰다. 여기서는 선이란 인간의 작위(作爲)이다. 내면의 자연성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이 제정한 외적·객관적인 예제(禮制)를 좇아야 한다 하고, 인간본성은 악(惡)이라 하였다[性惡說]. 그러면서도 인간의 지능을 속박하는 천은 부정하였다. 이 객관적인 사회규범으로서의 예(禮)의 강조는 앞으로 올 통일제국(統一帝國)의 이론으로서 준비되었으며, 같은 시대의 한비(韓非)의 법가사상(法家思想)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 목적과 합치하였다. 그것은 엄격한 상벌(賞罰)에 의해 객관적·형식적인 법의 통계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강한 인간불신(人間不信)을 바탕으로 한 지배의 철학이었다. 순자의 예사상과 한비의 법사상으로 통일제국의 이론적 준비는 끝났다.
〈제2기(중세)〉 한제국(漢帝國)의 지배이론은 동중서(董仲舒)의 유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신비적인 음양사상과 결부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었다. 인간계의 사건과 자연계의 변이(變異)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어 천의(天意)가 거기에 나타난다고 함으로써 천명(天命)을 받은 왕권을 수식하였다. 유교는 여기에 신비적인 색채를 가하여 한왕조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화(化)한 사상은 부질없이 신비적·미신적 경향을 조장하였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은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사적(意思的)인 천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를 기(氣)의 운행에 의한 물리적 자연이라 생각하여 미신타파에 노력하였으나 그 비판적 합리주의는 개인의 운명을 인정하는 점에서 커다란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도 미미하였다. 그러나 후한의 정치권력이 붕괴되자 도덕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노장사상이 번성하게 된다. 3∼4세기의 위(魏)·진(晉) 시대에는 유교적인 예교(禮敎)에 얽매인 신사를 이[]에 비유하거나 사관(仕官)을 떳떳치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높아, 유교의 성격도 한대(漢代)와는 다른 자유롭고 절충적인 것이 되었다. 노장의 도사상은 마침내 불교의 이해를 도와 특히 반야(般若)의 공사상(空思想)에 관한 깊은 철리(哲理)를 깨닫게 되어 현실적인 중국사상도 이 인도사상과의 교류로 더욱 폭을 넓히고 심화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사변적(思辨的)·피안적(彼岸的) 불교는 끝내 주류가 되지 못하고, 수(隋)·당(唐)에 와서 성립된 천태(天台)·화엄(華嚴)·선(禪), 그 밖에 중국불교의 제파(諸派)는 모두가 피안보다 현실을, 번잡한 것보다 간이직절(簡易直截)한 것을, 사변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중국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불교의 형성과정을 모방하여 노자를 조사(祖師)로 하는 도교가 민간의 미신을 포섭하여 성립되었으나, 종교사상으로서는 저속한 것이었다. 유교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사상적으로는 번성하지 못하였으나 당말(唐末)에 와서 한유(韓愈)가 이러한 풍조에 반대하여 유교의 복고적(復古的) 혁신운동을 주장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송학(宋學)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제3기(근세)〉 송대(宋代)에는 정치의 중심적 담당자가 세습적인 귀족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으로 과거에 급제한 신흥(新興) 인재들이었다. 사상계가 활발해진 것은 이런 사실과 관계가 있다. 당나라 한유도 이러한 신흥 인재였다. 여기서는 불교의 철리에 대항하여 유교의 입장에서 새로운 인생철학을 확립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고, 그것은 송학 또는 이학(理學)이라 불리었다. 그것은 11세기, 북송(北宋)의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형제, 그리고 장횡거(張橫渠) 등의 사상가에 의해 이(理)의 철학, 기(氣)의 철학 또는 화엄(華嚴)의 철학을 응용한 근본의 이와 현상을 일치시킨 철학 등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입각한 인생철학, 특히 심성(心性)의 이론이 발전하여, 그것들이 마침내 주자(朱子)에 의해 대성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주자학(朱子學)으로, 우주 존재의 근본은 태극(太極)으로서의 이(理)라는 설이다. 그러나 존재가 현상(現象)하기 위해서는 기(氣)의 참여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여 세계는 이와 기에 의해 성립되었는데, 인간에 있어 이는 본연의 성(性)으로서 선(善) 그 자체이지만, 기는 그 물질성에 의해 정욕(情欲)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이 인욕(人欲)을 누르고 천리(天理)를 발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적 심성을 가다듬어 내성(內省)하는 동시에 내외를 관철하는 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외계의 사물 하나하나에 관한 이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 방법을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자학의 흐름 외에 북송의 구양 수(歐陽修)의 실증주의나 왕안석(王安石), 남송(南宋)의 영가학파(永嘉學派) 등에서 볼 수 있는 실리적 공리주의 사상 등도 있었으나, 송대는 대체로 보아 존재의 근원과 심성의 본질을 생각하는 내성적·사변적 사상이 지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학에 대항하는 사상으로 육상산(陸象山)의 심학(心學)이 있다. 그 사상은 마침내 명대(明代) 중기의 왕양명에게서 완성되었다. 주자에게서는 이가 외계의 사물에도 객관적으로 널리 존재하는 것이었으나, 왕양명에게서는 심(心)이 바로 이(理)로서 심 외에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을 인지(認知)함으로써 이가 생겨난다. 뿐만 아니라 그 지(知)는 행(行), 즉 체험을 통해서만 확실해진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주자학의 형식화에 따른 사회나 정치의 질서 원리로서만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이의 성격을 바꾸어 자유로운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움직임이었다. ‘양지(良知)를 이루다’ 즉 본래적인 심정을 충분히 발휘하는 일, 그러기 위해 ‘사상(事上)에서 마련(磨練)한다’고 하는 수양론(修養論)에 의해 양명학은 완성되었다. 명말(明末)이 되면서 이 주관적 경향은 한층 심해져 이탁오(李卓吾)처럼 인욕(人欲)을 긍정하고 거짓 없고 솔직한 동심(童心)을 존중하여 기성질서에 반역하는 사상도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 양명학의 실천적 면을 이어받아 17세기 명말 청초(明末淸初)에는 일종의 실학적 경향이 활발하였다. 황종희(黃宗羲)나 고염무(顧炎武)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이 경향은 청조(淸朝)의 한인(漢人) 압박으로 세력을 잃고 훈고고증(訓考證)의 학술로 바뀌어 사상계에서는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
〈제4기(근대)〉 중국은 아편전쟁(1841∼42)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사상계에서 그것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은 공양학파(公羊學派) 사람들이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이론을 재생시킴으로써 어려운 시국에 대처하는 개혁사상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이른바 변격이론(變格理論)으로서 청·일전쟁(淸日戰爭:1894∼95) 후의 캉유웨이[康有爲]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침입은 한편 중국의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문물을 이용함으로써 복리를 얻으려고 하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을 일으켰는데, 또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사상을 고양하여 멸만흥한(滅滿興漢)의, 혁명사상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하여 오랜 왕조체제에서 민국(民國)으로 전환하는 신해혁명(辛亥革命:1911∼12)을 맞이하게 되며, 그 지도자 쑨원[孫文]은 최초의 서양적 사상가이다. 그의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확실히 데모크라시의 이론을 주축으로 한다. 이러한 데모크라시와 사이언스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중국사상은 봉건적 사상이라 하여 이제 통렬한 비판대상이 되었다. 5·4운동(1919)의 문화혁명 시기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마오쩌둥[毛澤東] 이 후의 상황은 얼핏 보기에 전통적인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생각되지만, 위에서 말한 역사를 돌이켜 보고 그 사상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전통적 사상은 지금도 강하게 존속하며, 또한 미래에도 존속할 것이다.
중국 고대의 전설적 제왕. 3황은 일반적으로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 또는 泰皇)을 가리키지만, 문헌에 따라서는 복희(伏犧)·신농(神農)·황제(黃帝)를 들기도 한다. 또는 수인(燧人)·축융(祝融)·여와(女)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사마 천(司馬遷)은 3황의 전설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사기(史記)》의 기술을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마 천이 5제로 든 것은 황제헌원(黃帝軒轅)·전욱고양(頊高陽)·제곡고신(帝高辛)·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 등이며, 별도로 복희·신농 또는 소호(少昊) 등을 드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원래 이 전설은 다양한 신화·전설이 혼입된 것이며, 도덕적·정치적으로 억지로 끌어들인 것이어서 그 기원은 애매하다. 오행설이 일반화된 전국시대 말 이후 이야기 경향을 띠게 되었다.
중국 전설상의 가장 오래 된 왕조. 하와 그에 이어지는 은(殷)·주(周)를 합하여 3대라고 병칭하며, 옛 중국에서는 이상적 성대(聖代)로 불려왔으나, 명확한 유적·유물이 남아 있는 것은 은나라 이후이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記)>에 의하면, 하왕조(夏王朝)의 시조 우(禹)는 황허강[黃河]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순(舜)이 죽은 뒤,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여하려고 하였으나, 제후는 우의 아들 계(啓)를 추대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相續制)에 의한 최초의 왕조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17대의 이규(履癸), 즉 걸(桀)에 이르러 정치가 포악을 극하였으므로 민심을 잃어서 은나라 탕왕(湯王)에게 멸망하였다. 주나라 때에는 허난성[河南省] 동부에 있는 기(杞)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칭하였으나, 만일 하왕조가 실재해 있었다면 그 위치는 오히려 산시성[山西省] 남서부를 중심으로 한 황토대지(黃土臺地)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또, 고대 중국에서는 오랑캐에 대하여 중국의 제후를 중화(中華)·화하(華夏)라고 총칭하였다. 한편, 유목민족인 흉노(匈奴)를 하의 후예라고 하는 설 따위도 《사기》에는 나타나지만, 근거 없는 말이다.
중국 고대의 왕조(?~BC 1100?).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한다. 하(夏)·은·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은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서,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고 할 수가 있다.
【성립과 계보】 전설에 따르면 하왕조는 중국 전토를 휩쓸었던 대홍수를 잘 다스렸고, 전국을 9개 주(州)로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완성한 우(禹)의 자손을 왕으로 섬겼다. 그로부터 17대째가 되는 걸왕(桀王)은 전제정치로 인하여 중국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은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天乙)은 백성의 요망에 따라 걸왕을 쳐서 멸하고 은왕조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이 탕왕으로부터 29대의 왕이 잇달아 중국을 통치하였다. 이 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에 사마 천(司馬遷)이 고대의 계보에 따라 《사기(史記)》<은보기(殷本紀)> 속에 기술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의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갑골문자는 은왕조의 점술사가 은나라 선조의 제사를 점쳤던 것이었으며,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는 《사기》에 전하는 은왕조의 계보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문화】 은왕조는 개조인 탕왕 이래로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으나 20대의 왕 반경(盤庚)이 은허로 옮긴 이후 31대의 주왕(紂王:帝辛)이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은허에 정주하였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각지에서 은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는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한다. 전기의 유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허난성 얼리터우[二里頭]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이보다 앞선 허난성 신석기시대 룽산문화[龍山文化]의 영향을 받아, 은대의 최전기(最前期)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이 유적들은 허난성 중부에서 산시성[陝西省]에 이르는 황허강[黃河] 연변의 황토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중기의 유적 분포지역은 이보다 확대되어 있으며 그 대표는 허난성 정저우[鄭州]의 유적이다. 후기에 이르면 서쪽은 산시성 치산현[岐山縣]에서 동쪽은 산둥성[山東省]의 지난[濟南], 북쪽은 허베이성[河北省]·산시성[山西省]에서 화이허강[淮河] 유역에 걸치는 화북평원의 거의 전부와 양쯔강[揚子江] 중류에까지 확대되었다. 요컨대 은허시대의 은문화는 이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은왕조는 약 1,700 m의 토벽으로 둘러싸인 정저우를 중심으로 하여 대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문 밖에서는 청동기·도기(陶器)·골기(骨器)를 만드는 장인의 공장과 주거가 발굴되었다. 반경이 은허로 천도한 이후, 귀갑과 우골에 새겨진 점복문(占卜文), 즉 갑골문자의 기사(記事)와 궁전·묘능의 유적과 유물에 의하여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은의 여러 왕은 타이항산맥[太行山脈]에서 동방으로 흘러가는 위안허강[洹河]의 굴곡진 지점에, 하안(河岸)의 단애(斷崖)를 북·동쪽으로 업고, 서쪽으로는 도랑을 파서 북서의 유목민에 대비하는 견고한 성을 쌓았다. 샤오툰촌 북쪽의 대지 중앙에는 토단(土壇)을 쌓아 올려, 위에 종묘(宗廟)·궁전을 건축하였다. 제왕이 죽으면 그 시체는 위안허강의 북안 허우자좡[侯家莊]의 지하 13 m에 200 m2 이상의 큰 널방[墓室]을 만들고, 생전에 애용했던 거대하고 정교한 청동기를 비롯하여, 옥기(玉器)·석기 등을 껴묻거리[副葬品]로 함께 매장하였다. 호화로운 청동기는 고대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예술품이지만, 그보다도 이 널방의 안팎으로 산재해 있는 다수의 인골군(人骨群)이 고고학자를 놀라게 하였다. 이들은 소수의 시종(侍從)·시녀는 있지만 대부분은 병사(兵士)로서, 왕에게 순사(殉死)한 것이며, 그 수는 한 왕묘에 500명에서 1,000명에 달하였다. 은의 왕은 점복(占卜)으로 신의(神意)를 받아서 백성을 통치하는 종교적인 원수(元首)였다. 또한 이민족을 정복하여, 그들을 노예나 병사로 삼았던 것 같다. 이민족 가운데 북서의 고방(苦方)·토방(土方)이라 불렸던 유목민이, 은허로 옮긴 당초의 무정왕시대(武丁王時代)의 강적이었다. 그리고 서경(西境)의 산시성에 있던 주(周)민족은 제후(諸侯)로서 은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멸망】 은왕조도 말기의 무을(武乙)·주왕의 시대에 이르자, 신의 은총을 받은 나머지 방자해져서 자신이 신과 똑같은 절대자라고 믿고 혹독한 전제군주로서 제후·백관·인민들에 대하여 잔혹한 압정을 가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하여, 화이허강 유역의 인방(人方)이라고 하는 동이민족(東夷民族)의 국가를 정복하였다. 주왕이 전쟁에 국력을 다 써버린 틈을 타서 서방의 산시성에서 실력을 길러, 이 지방 제후의 인망을 얻고 있던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동진하여 화북평원으로 내려왔다.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더욱 동진하여 은나라 주왕의 대군을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무찌르고 은의 수도에 입성하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대신하여 주왕조를 일으켰다. 무왕은 은의 왕족인 무경(武庚)을 위(衛)에 봉하여 뒤를 잇도록 하였으나, 무왕이 죽은 뒤 반란을 일으켜 성왕에게 멸망당하였다.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인 은왕조는 주술(呪術)이 문화의 기조를 이루었으며, 그 결과로 죽은 왕에게 1,000명의 군인을 희생시키는 등 불합리한 체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은의 문화를 받으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주민족에게 패하였다.
중국의 고대 왕조(BC 1122?∼BC 256). 은(殷)나라 다음의 왕조이며, 이전의 하(夏)·은과 더불어 삼대(三代)라 한다. 요(堯)·순(舜)의 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理想)의 치세(治世)라 일컬어진다.
【건국】 주왕조(周王朝)의 시조는 후직(后稷:棄)이며, 13대째의 고공단부(古公亶父:太王) 때에, 기산(岐山:陝西省 中部)에 옮겨 정주(定住)하고, 국호를 주(周)라 하였다. 당시 황허강[黃河]의 하류지역에는 은왕조(殷王朝)가 번영하고 있었는데, 주족(周族)은 그 서쪽 변두리의 제후(諸侯)의 하나였다. 태왕의 손자 문왕(文王:昌)에 이르러 태공망(太公望:呂尙) 등의 보좌로 서방의 패자(覇者:西伯)가 되었다. 그 아들 무왕(武王:發)은 제후의 지지를 받아, 당시 민심을 잃고 있던 은의 주왕(紂王)을 멸할 싸움을 일으켰다. 이 출병(出兵)을 하지 말도록 간(諫)한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무왕은 마침내 목야(牧野)전투에서 은의 대군을 무찔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갈음하여 주왕조를 창시하였다.
【문화】 주는 종주(宗周:陝西省 渭水 유역의 鎬京)를 도읍으로 하였으나, 동방을 통치하는 중심으로서 낙수(洛水)를 따라서 동도(東都) 성주(成周)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희성(姬姓)의 동족을 노(魯)·위(衛)·진(晉) 등의 요지에 후(侯)로 봉하고, 건국의 공신 태공망 여상도 제(齊)에 봉하였다. 이것을 봉건(封建)이라 부르고, 흔히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旦)이 처음으로 실시한 제도라 하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봉건’과 유사한 제도는 이미 은대 말기에 행하여진 것 같다. ‘봉건’뿐만 아니라 주공이 창시했다고 하는 주의 예제(禮制)는 후세에 원망을 산 것이 많으나, 주의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나 상형문자(象形文字)는 은에서 발달한 것을 이어받은 것이 명백하다. 대체로 주의 문화는 은의 문화에 힘입은 바가 많다. 은을 멸한 후, 주의 지배자는 그 정치적 변동 등을 하늘의 뜻에 의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일찍이 은에 내린 천명(天命)은 주왕(紂王)이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은에서 떠나고, 새로이 주(周)에 내려진 것이라 했다. 이렇게 천명을 고친, 즉 혁명(革命)한 주왕조가 영속되기 위해서는 덕(德)을 닦고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동주시대】 무왕부터 소왕(昭王)·목왕(穆王)에 이르는 동안이 주왕조의 전성기였으나, 마침내 BC 9세기부터 안에서는 제후의 이반(離反), 밖에서는 융적(戎狄)의 침입이 잦아져서 주는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1대 선왕(宣王:靜)은 융적을 격퇴하여 한때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그의 아들 유왕(幽王)은 포사(褒)를 총애하여 내정이 문란해져서 견융(犬戎)의 침입을 초래하여 유왕은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평왕(平王:宜臼)은 마침내 도읍을 성주(成周:河南省 洛陽 부근)에 옮기고 주왕조를 부흥시켰다. 이 평왕의 동천(東遷:BC 770)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며,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 불러 구별한다. 동주시대에 들어서서 약 반세기가 지나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된다(BC 722). 춘추시대에는 제후 등의 이반으로 국내의 정정(政情)이 불안정하였고, 열국 간에 전쟁과 회맹(會盟)이 끊이지 않았으며, 제(齊)의 환공(桓公), 진(晉)의 문공(文公)과 같은 패자(覇者:覇는 伯과 같은 뜻이며, 大諸侯를 의미한다)가 회맹을 주재(主宰)하여, 중원(中原)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패자는 명목상으로는 주왕실의 권위를 존중하고, 주의 봉건질서를 적극적으로 허물어뜨리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BC 5세기에 들어서자, 여러 나라의 내부에서 하극상(下克上)의 풍조가 일어나, 그 기세에 눌려 주의 위열왕(威烈王)은 진의 유력한 귀족 한(韓)·위(魏)·조(趙)의 3씨를 정식으로 제후로 격상하는 것을 인정했다(BC 403). 이 해를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되는 해로 보는 설이 있는 것은 주왕 자신이 ‘봉건’의 정신을 망각한 점을 중대시하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주왕은 낙양 부근을 영유하는 한낱 작은 제후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마침내 동서(東西)로 분열된 나머지 BC 256년, 난왕(王)이 진(秦)에 항복하여 주는 멸망하였다.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춘추시대의 시초는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한 후로, 노(魯)나라의 연대기 《춘추》의 최초의 해(BC 722)라고 한다. 전국시대의 시초는 진(晉)의 유력 귀족인 한(韓)·위(魏)·조(趙) 3씨가 실권을 잡은 해(BC 453), 또는 이 3씨가 정식 제후(諸侯)로 승격한 해(BC 403)이며, BC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통일로 끝이 난다.
【정치】 춘추에서 전국에 걸친 전국시대는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해체되고, 진(秦)·한(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어가는 과도적 시대이다. 춘추시대는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00여 개나 존속하고 있어서 전통적 기풍이 강하였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강국이 약국을 병합하여 진(秦)·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성립하였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하였다.
【사회경제】 이 시대의 정치적 변동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춘추시대 말에는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한편, 소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몰락한 귀족의 자손을 비롯하여 상공업자나 농민들도 입신출세하기 위하여 군주나 유력 인사에게 접근하여 법률·군사·외교 등 각자 재질에 따라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속출하였다. 군주나 유력관료측에서도 부국강병을 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자도 등용하였다.
【사상】 ‘제자백가(諸子百家)’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이 시대는 중국 사상사상(思想史上) 드물게도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맹자·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商)·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중국 전국시대의 최강국인 진(秦)과 연(燕)·제(齊)·초(楚)·한(韓)·위(魏)·조(趙)의 6국 사이의 외교 전술. BC 4세기 말 여러 나라를 유세하고 있던 소진(蘇秦)은 우선 연에게, 이어서 다른 5국에게 ‘진 밑에서 쇠꼬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되자’고 설득하여, 6국을 종적(縱的)으로 연합시켜 서쪽의 강대한 진나라와 대결할 공수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이것을 합종(合從:從은 縱)이라 한다. 뒤에 위나라 장의(張儀)는 합종은 일시적 허식에 지나지 않으며 진을 섬겨야 한다고, 6국을 돌며 연합할 것을 설득하여 진이 6국과 개별로 횡적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을 연횡(連衡:衡은 橫)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은 합종을 타파한 뒤 6국을 차례로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로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C 221∼BC 207).
【건국】 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대구(大丘)의 비자(非子)는, 주나라 효왕(孝王)으로부터 진읍(秦邑:甘肅省 淸水縣)에 봉해져 서융(西戎)의 방위를 맡음으로써 진을 일으켰다. 그 후 진은 BC 8세기 초, 주나라가 견융(犬戎)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幽王)을 도왔고, BC 771년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이를 호위한 공으로 산시성[陝西省]의 서부 지역을 맡아 제후(諸侯)로 승격하였다. 이가 양공(襄公)이다. 진나라는 BC 7세기의 무공(武公) 때부터 정복지를 현(縣)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현이라고 해도 그것은 명목일 뿐 실상은 읍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간쑤성[甘肅省] 동부에서 웨이수이강[渭水] 연안을 따라 이동하다가 무공의 동생인 덕공(德公) 때에 옹성(雍城:陝西省 鳳翔縣)으로 이동하였다.
【춘추시대의 진】 BC 659년에 이르러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건숙(蹇叔) 등을 등용해 정치를 혁신하고, 동쪽의 진(晉)나라와 싸워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으며, 또한 서융 출신의 유여(由余)를 등용, 서방 이민족의 12국을 통합하고 영토를 1,000리에 이르도록 확장하여 서방의 패자(覇者)가 되자, 주나라 황실에서는 동고(銅鼓)를 하사해 경축하였다 한다. 그 후 하서 땅은 다시 진(晉)나라에 빼앗기는 등 진(秦)나라의 당면한 적은 진(晉)나라 였으므로 초(楚)나라와 손을 잡고 빈번히 진(晉)나라와 싸웠다. 진나라는 무공(武公)에서 목공(穆公) 때에 걸쳐 산시성 내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관중(關中)의 땅을 통일하였다.
【전국시대의 진】 헌공(獻公) 때에는 순사(殉死)의 습속을 금지하고 BC 383년에는 동녘에 역양성(陽城:陝西省 臨潼縣 북동)을 구축하여 동방으로의 진출 의지를 보여주었다. BC 362년 효공(孝公)이 왕위에 오르자 위(衛)나라 사람 상앙(商)을 등용해 내정을 개혁하였다. 즉 종래의 혈연 존중의 인사를 고쳐서 공적에 따른 신분제도를 설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이때부터 종래의 읍(邑)과는 그 성격이 다른 새로운 현(縣)이 생겼고, 군주권이 현내의 서민과 직결되었다. 이같이 하여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는 수도 안읍(安邑:山西省 解縣)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河南省 開封縣)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는 효공 때 수도를 셴양[咸陽]으로 옮겨 셴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았다. 위나라의 대량 천도와 진나라의 국력 증강은 열국(列國)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국은 연합전선을 펴 진나라를 관중(關中)의 땅에 봉쇄해 두려는 소진(蘇秦)의 이른바 ‘합종책(合縱策)’을 안출하였다. 이를 알게 된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공손 연(公孫衍)으로 하여금 ‘합종책’을 분쇄하도록 명하고, 장의(張儀)로 하여금 각국이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이른바 ‘연횡(連衡)’을 성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책동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진은 파(巴)·촉(蜀), 즉 쓰촨성[四川省]을 장악하고, 초(楚)나라로부터는 한수이강[漢水]의 상류를 빼앗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어느 때든지 초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혜문왕은 BC 325년부터 공(公) 대신 왕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로부터 다른 나라들도 모두 왕호를 쓰게 되었다. 소양왕(昭襄王) 때에 이르러 청두[成都] 부근에 운하를 열고 쓰촨의 옥야(沃野)를 개발하는 한편,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BC 278년에 대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을 함락하고, 초왕 역대의 능역(陵域)이던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렸다. 초나라는 허난[河南]의 진(陳:河南省 淮陽縣)으로 옮겨야 하였고, 뒤에 다시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다. 진나라 군대는 양쯔강[揚子江]을 건너 다시 구이저우성[貴州省]의 동부와 후난성[湖南省]의 서부도 공격하였다. 백기 장군은 북방의 조(趙)나라도 공격하여,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만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수도 한단(邯鄲)에 육박하였으나,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의 원군이 투입되어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였다. 이즈음 진나라는 서제(西帝), 제(齊)나라는 동제(東帝)라고 높여서 ‘황제’ 칭호를 쓰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왕호를 썼다. 소양왕이 위나라 사람 범수(范)를 등용한 뒤부터는 그의 건의에 따라 ‘연횡책’을 버리고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마지막 마무리 작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형세를 살핀 주왕(周王) 난()은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나라는 주나라부터 공격을 시작하자 난왕은 영읍(領邑) 30과 인구 3만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주나라는 멸망하였고, 7년 후에는 동주군(東周君)도 멸망하였다.
【진의 통일】 BC 247년에 즉위한 진나라 왕 정(政)은 어렸기 때문에 모태후(母太后)가 섭정했는데, 장성해서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재상 여불위(呂不韋) 등을 제거하고 이사(李斯)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는 법가(法家)의 학자로서 이후부터 진나라 정치는 그의 의견에 따라 시행된다.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원교근공’ 정책을 써서, 진나라의 왕전(王) 등 장수들은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BC 230년에는 먼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 조(趙)·연(燕)·초(楚)·위(魏)·제(齊)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였다. 한나라가 멸망하고부터 제나라가 멸망하기까지는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왕 정은 황제가 되고, 이로부터 진나라는 황제가 죽은 뒤에 그 이름을 정하는 시호를 사용하지 않게 되어 그는 시황제(始皇帝)가 되고, 그 후의 황제는 이름 없이 2세·3세로 부르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 진나라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하고 각종 통제정치를 단행, 획일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른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가 완성된 것이다. 시황제는 다시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광둥성[廣東省]·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정복하였다. 진나라의 위명은 해외에까지 뻗쳐, 중국의 다른 이름을 ‘支那(지나)·震旦(진단)’ 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진(秦)이라는 음이 와전한 것이다. 그러나 시황제의 대외전쟁은 결국 국민의 부담이 되는 것이어서 만년에는 민심이 동요하자 극단적인 탄압정책이 시작되었다. 시황제가 죽은 뒤에는 2세 황제가 위에 올랐는데 환관인 조고(趙高)와 이사(李斯)의 불화로 조고가 이사를 죽이고 궁중의 권력을 장악했으며, 2세 황제도 살해하였다. 유군(幼君) 자영(子)이 진왕이 되어 조고를 처단했으나, 자영은 BC 207년 한중(漢中)에 들어온 유방(劉邦)에게 항복함으로써 시황제의 중국 통일 후 불과 3세, 15년 만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진(秦)에 이어지는 중국의 통일왕조(BC 202∼AD 220).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8~22)나라에 의하여 잠시의 중단이 있어, 그 이전에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였던 한을 전한(前漢:西漢), 뤄양[洛陽]에 재건된 한을 후한(後漢:東漢)이라고 한다.
【역사의 개설】 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왕조는 기본적으로는 진(秦)나라의 국가체제를 계승하여 전국통치의 조직은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한왕조의 수립은 진말의 난 이래의 여러 집단의 지도자와 유방 직속 부하들의 협력에 의한 것이어서, 유방은 이들 공신(功臣)과 그의 일족을 제후왕·열후(列侯)로서 각지에 봉건하였다. 한(漢)의 군현과 봉건 병치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부르는데, 유방의 치세 중에 공신인 왕들은 모두 멸망하고, 왕은 결국 유씨 일족(劉氏一族) 출신자에 한하는 것이 한왕조의 정제(定制)가 되었다. 한나라의 봉국(封國)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의 씨족적 결합을 기초로 한 읍(邑)과는 성질이 다르지만, 제후왕은 중앙관제와 유사한 관제를 가지며, 한대(漢代) 초기에는 자립적 경향이 있었다. 유방이 죽은 뒤 황후 여씨(呂氏)와 그 일족에 의한 궁정정치의 일시적 혼란이 있었으나, 문제(文帝)·경제(景帝)의 시기에 한왕조의 지배체제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제후왕의 봉토삭감 정책이 취하여져, BC 154년에 일어난 오초 7국(吳楚七國)의 난 후에 경제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으며, 무제(武帝) 때 제후왕은 봉국에 대한 통치의 실권을 완전히 잃어 군국제는 내용면에서는 군현제와 똑같은 것이 되어, 한왕조의 중앙집권적 전제통치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日南郡) 등의 9개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張騫)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域)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帝國)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增稅),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철·술의 전매제,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에 의한 상업관영(商業官營)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公)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元帝) 이후는 외척(外戚)·환관(宦官) 등 근신(近臣)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外戚) 왕망(王莽)이 8년에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왕망은 《주례(周禮)》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赤眉)’ 등의 농민집단과 호족(豪族)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왕망 말기 반란의 지도자층 가운데서, 경제(景帝)의 6대 자손인 유수(劉秀)가 남양(南陽:河南) 호족연합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농민 집단이나 호족의 자립세력을 평정하고, 25년 뤄양[洛陽]을 수도로 하여 후한(後漢)을 재건하였다. 그가 곧 광무제(光武帝)이며, 유교를 국교로서 확립시키고 군병(郡兵)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으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한나라는 명제(明帝)의 치세부터 재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북방으로는 북흉노를 압박하고, 화제(和帝) 때에는 한제국(漢帝國)의 지배권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海) 이동에 있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50여 개의 서역국가군(西域國家群)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화제 이후의 황제는 어려서 즉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명하였으므로, 또다시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기골 있는 관료나 학자의 일파가 환관의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지만,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당하였다. 그 사건을 ‘당고(黨錮)의 옥(獄)’이라 하며, 그 후 궁정정치는 혼란을 거듭하고 후한왕조는 소농층(小農層)의 몰락, 호족세력의 발전 등의 사회적·정치적 과제에 대처하는 통치 능력을 상실하였다. 호족은 전한시대부터 사회적 세력을 확대하고, 후한의 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후한은 호족의 정권참가로써 지탱되고 있었다. 유교 국교화의 강화도 호족층이 자체결합의 근거를 유교에 구하였던 것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효렴(孝廉) 등의 관리임용제도를 통하여 중앙관료에의 길을 확보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소유지를 확대하여 소농층을 지배하에 편입하였다. 그 결과 황제통치의 기반인 농민층은 축소되고 호족층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감퇴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누적 끝에 일어난 것이 황건(黃巾)의 난으로서, 도교(道敎)의 시초인 태평도(太平道)의 주창자 장각(張角)이 수령이 되어, 184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에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원소(袁紹)가 궁정의 환관을 절멸시켰으나, 그 후로는 원소·동탁(董卓)·손책(孫策)·조조(曹操)·유비(劉備)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하북(河北)을 지배하던 조조의 아들 비(丕)는 220년, 헌제를 강박하여 제위를 물려받고, 위(魏)왕조를 창시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3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정치】 한왕조는 진나라가 세운 황제의 직접통치에 의한 전제적 관료국가의 체제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의 관제는 진제(秦制)를 답습하였다. 중앙관제로는 황제 밑에 3공(公)이 있어, 승상(丞相)은 황제를 보필하여 백관을 통솔하고, 태위(太尉)는 당시 상설의 관(官)은 아니었으나 군사를 담당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는 감찰관인 어사를 통솔하는 한편 부승상(副丞相)으로서 행정에도 참여하였다. 3공 밑에 중앙행정을 분담하는 관서로 태상(太常:禮儀祭祀)·광록훈(光祿勳:宮廷護衛)·위위(衛尉:宮門守備)·태복(太僕:帝室의 車馬管理)·정위(廷尉:司法)·대홍려(大鴻'A:諸侯 및 外國의 來朝)·대사농(大司農:국가재정)·종정(宗正:皇族關係)·소부(少府:帝室財政) 등 9시(寺)가 있었다. 9시의 장관을 구경(九卿)이라 하고, 집금오(執金吾:수도의 치안)·장작대장(將作大匠:토목공사)·대장추(大長秋:皇后職·東宮職)를 더하여 12경(卿)이라고도 불렀다. 군(郡)은 지방통치의 중심기관이었으며, 그 장관으로 태수(太守), 군사지휘관으로 위(尉)를 두었다. 태수 밑에 부관으로서 승(丞)이 있고, 수(守)·승(丞) 밑에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공조(功曹)·연사(椽史) 등의 속관이 있었다. 공조는 그 지방의 호족 출신자가 임명되었으며, 지방행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군(郡)은 현을 통할하였으나, 현에도 영(令)·장(長)·위(尉)가 임명되고, 군과 똑같은 하부기구가 있었다. 현(縣)의 통할하에는 향(鄕)과 정(亭)이 있었으며, 향에는 유질(有秩)·색부(嗇夫)·유요(游)가 임명·파견되어, 호적·징세·요역(役) 등을 담당하고, 정에는 정장(亭長)이 있어 경찰업무를 담당하였다. 현·향·정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읍으로서 공통의 성격을 가진 취락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읍이 그 기원이 된 것이 많았으나, 진(秦)·한(漢)의 형성과 함께 치수 관개기구의 정비로 개척이 진행된 화북평원(華北平原) 등에 새로 건설된 현이 상당수가 있어 현은 전제제국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현·향·정 등의 도읍(都邑)은 약간의 이(里)로 구분되고, 이것이 일반 양민의 거주지구였다. 따라서 이는 종래와 같은 자연부락이 아니고, 이에는 이민(里民) 출신의 이부로(里父老)가 있어 그 유력자를 현·향 등의 삼로(三老)로서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BC 106년 국토를 13개주로 나누고, 자사(刺史)를 파견하여 군태수(郡太守) 이하에 대한 감찰을 행하였다. 후한(後漢)에서는 자사가 지방장관의 실질적 역할을 하게 되었고, 주(州)는 군·현의 위에 위치하는 지방통치의 단위가 되었다. 한제국에서는 군·현 이외에 제후의 나라가 있었고, 경제·무제의 억압정책으로 군국제(郡國制)가 실질적으로는 군현제(郡縣制)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제국은 전제적 통치기구에 의하여 농민에 대한 직접적이며 개별적인 인신지배(人身支配)를 실현하였고, 각종 조세와 요역을 부과하였다. 조세 중에서 전조(田租)는 그 토지의 수확량에 일정률을 부과하는 것이 원칙으로, 고조(高祖) 때에는 15분의 1, 이후 수차의 변경을 거쳐 경제(景帝) 때인 BC 156년에는 30분의 1로 정해졌다. 후한에서는 30년부터 30분의 1이 정제(定制)로 되었다. 그러나 이 정률제(定率制)는 현실의 운용면에서는 토지면적에 대한 수납액이 정하여져 정액제(定額制)가 실시되었다. 조(租)라고 부르는 조세에는 시조(市租:商業稅)·해조(海租:漁業稅) 등이 있었다. 인두세(人頭稅)로는, 산부(算賦)는 15∼56세의 남녀에게 1산(算:120錢, 상인과 노비는 배액)을 부과하고, 구전(口錢)은 3∼14세의 남녀에게 23전을 부과하였다. 그밖에 재산세로서 자산(算:算緡錢)이 있는데, 1만 전(錢)에 대하여 1산(算:120錢)을 부과하였으며, 무제 때 상공업자의 자산이 특히 중과(重課)되었다. 농민이 부담한 요역으로는 노역(勞役)과 병역(兵役)이 있는데, 노역은 15∼56세의 남자가 매년 1개월, 거주 군·현의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이것을 경졸(更卒)이라 하였다. 실역(實役)에 종사하지 않을 경우는 경부(更賦)라 하여 300전(錢)을 대납케 하고, 경부는 후에 상제(常制)의 부담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상의 조세 가운데 전조·산부·경부 등은 대사농(大司農)이 수납하여 국가재정에 편입시키고, 시조·구전 등은 소부(少府)에 수납하여 제실(帝室)재정의 수입으로 하였다. 한나라의 병제는 징병제로서 병역은 요역의 일종으로 23∼56세의 강건한 남자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하였다. 재역기간 중, 1년은 출신지 군(郡)에서 군병(郡兵)으로 복무하고, 1년은 황제의 근위군, 수도의 수비대 병사로서 복무하든가, 변경의 정졸(正卒:實役에 복무하지 않을 경우에는 免役錢 징수)로서 복무하였으며, 잔여기간은 출신지에서 연 1회의 도시(都試:군사훈련)가 부과되었다. 후한은 군병제(郡兵制)를 폐지하여, 일반농민은 병역의 실무가 사실상 해소되고, 특정한 가족에게 영구적인 병역이 부과되기 시작하였다.
【사회·경제】 한나라 때에 사회의 기초적인 구성원은 농민이었다. 그들은 오구가(五口家:다섯 식구)와 같이 소형의 가부장적인 가족을 구성하여 자영농업을 영위하는 소농민이었으며, 군현제를 통하여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그 거주구(區)는 군현제하의 이(里)이지만, 농민은 원칙적으로 모두 국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아서 이내(里內)의 신분질서를 형성하고, 그것을 매개로 하여 황제 지배하의 국가질서 내에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각종 조세·요역 등의 부담의 중압으로 농민층의 빈곤화가 진척되고, 이와는 반대로 호족층은 더욱 세력이 신장되어 대토지 소유자가 되고, 농민은 소작인이나 노비로 전락하여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상인·고리대금업자의 활약으로 이 농민층은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상품생산과 판매에 종사하는 상공업자는 도시의 시(市:市場)라고 부르는 상업구역에서 영업하며 시적(市籍)에 등기되어 시조를 부담하고, 법률적으로는 농민보다 한 단계 낮은 신분적인 지위에 있었다. 최하층의 신분으로서는 관유(官有)·사유(私有)의 노비가 있어 이들은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의 일부는 수공업 등에 사역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한대(漢代)의 많은 생산부문에서 노비가 직접적인 생산자의 주요부분을 차지한 경우는 적었던 것 같으며, 대부분은 가내의 잡용이나 기타 비생산부문에 사용되었다. 한대의 중국은 철제농구의 전면적인 보급, 우경(牛耕)의 일반화와, 통일 전제제국에 의한 치수·관개시설과 기구(機構)의 정비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며, 전한의 대전법(代田法), 후한의 구종법(區種法) 등의 농경기술의 개발도 진척되었다. 한대 농업의 중심은 치수관개가 잘 된 화북(華北)에서의 보리·조 등이 주요작물이고, 강남 저습지대의 벼농사는 기술적으로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한대는 전국시대에 성장한 수공업이 더욱 발전한 시대이다. 한대의 수공업에는 농민 및 호족층의 자급자족적인 가내수공업도 있었으나, 중요한 경향은 민간수공업자의 상품생산의 발전이다. 철기 수공업과 염엄(鹽業)은 특히 발전하여 대상인에 의한 대규모의 경영이 출현하였고, 기타 청동기 수공업·칠기 수공업·섬유 염색 수공업·양조업·식품가공업·피혁업 등이 번영하였다. 또한, 한대는 대규모의 관영 수공업이 출현하였는데, 대부분은 소부가 관할하였지만 무제 때에는 소금·철·술의 전매제가 시행되어 대사농(大司農)이 관할하였다. 상업의 중심은 도시에 설치된 시(市)이며, 점포는 시내에서 업종별로 나뉘어 배열되고, 이것을 사(肆)라고 불렀다. 도시에서는 시사(市肆)에 점포를 가진 좌상(坐商)이 일상적인 상품매매에 종사하였으나, 각 지역간 또는 도시간의 원격지 교역도 번영하여, 이에 종사하는 대상인·상려(商旅)가 출현하였다. 외국무역도 사상 최초의 번영을 보였으며, 그 중에서도 서역무역이 가장 유명하였으나, 북변에 설치된 관시(關市)에 의한 북방유목민과의 무역, 쓰촨성[四川省] 방면을 경유하는 서남의 오랑캐·인도 등과의 무역, 광저우[廣州]를 거점으로 하는 남해무역도 번영하였다. 상업의 번영에 대응하여 화폐의 유통도 활발하였으며, 화폐경제가 농민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여 통화제도가 확립되었다. 한대의 주화는 무제 때인 BC 119년에 오수전(五銖錢)이 제정되었으며, BC 113년 이후는 상림(上林)의 3관(官)에서 관주전(官鑄錢)이 나와 당(唐)나라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제정되기까지 중국 화폐의 기본형식이 되었다.
【문화】 한나라 문화는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각 분야의 문화를 보다 발전시키는 동시에, 그 후 중국의 전통적 문화의 기본적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아, 한나라가 중국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중요하다. 학술·사상의 분야에서는 전한 전반기(前半期)는 도가사상과 법가사상, 특히 후자가 전제적 통치의 현실면에서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무제의 치세에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설치되어 유교의 국교화가 비롯되었다. 이런 경향은 원제(元帝)의 시기부터 결정적으로 되어, 유교는 국가통치·사회질서의 기본적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후한시대로 계승되었다. 전한시대의 학자는 옛 경문(經文)의 복원(復原), 정본(定本)의 작성에 노력하여, 경전을 금문(今文:漢代의 書體)·고문(古文:先秦時代의 옛 書體)의 2계통의 경서(經書)로 성립시켰다. 후한시대에는 마융(馬融)·정현(鄭玄) 등의 학자에 의하여, 고전의 주석에 전념하는 훈고학(訓學)이 발전하였다. 사학(史學)에서 한대는 명확한 역사적 의식으로 편집된 사서(史書)가 출현했던 시대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는 그 대표작으로서, 이후의 중국 정사(正史)의 기본형식이 확립되었다. 과학적 지식의 분야에서도 진보와 그 체계화가 이루어졌는데, 유흠(劉歆)의 《삼통력(三統曆)》은 중국의 천문학·역법(曆法)의 틀[型]을 만들었으며, 수학의 저작으로서 《구장산술(九章算術)》, 의학을 체계화한 《상한론(傷寒論)》 《황제내경(黃帝內經)》 등은 특히 유명하다. 문학분야에서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가 한대 산문학(散文學)의 대표적인 거작이다. 운문학(韻文學)에서는 전국시대에 비롯된 초사(楚辭) 등의 흐름을 채택한 사부(辭賦)와, 궁정문학으로서 악부(樂府)의 양식이 나타났다. 미술·공예 대부분은 예속적 직인층(職人層)에 의하여 제작(制作)되었다고 생각되나, 이 분야에서도 현저한 전진이 있어, 중국의 전통적인 기본 양식으로 형성된 것이 많다. 회화(繪畵)에는 칠화(漆畵), 고분벽화 등이 있으며, 조소(彫塑)에는 화상석(畵像石)이나 이상(泥像) 등이 있다. 서(書)는 한대에서는 예서(隸書)가 정식 서체로서 중시되었으나, 해서·행서·초서 등의 서체도 생겨났으며, 후한 말에는 장지(張芝)에 의하여 고유의 서예(書藝)가 형성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 공예도 동기·칠기·도기·직물 등의 기술과 양식에 현저한 진보가 있었다.
【공예】 한대의 미술은 국가적인 통제가 강하였다. 그러나 미술의 발전을 위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큰 조직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양산(量産)하고, 단순한 형식 속에서도 층이 두텁고 깊이 있는 표현을 창조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공예품을 제작하는 공방이라 할 만한 공관(工官)이 만들어졌다. 제도(帝都)에서는 고공실(考工室)·동원장(東園匠)·상방(尙方)이라고 하는 관제 공방이 있었다. 고공실과 상방은 오로지 제실용(帝室用)의 여러 기물(器物)을 만들고, 동원장에서는 능묘에 부장되는 명기류(明器類)를 만들었다. 은(殷)·주(周) 시대의 공예품은 제례용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한대에서는 일상용구의 제작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것도 일반 서민이 쓰던 기구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제왕 주변의 특수계급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예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기이다. 은·주의 초자연적·주술적인 형태가 여기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활의 용구로서, 신선한 생명력이 주입되었다. 신(神)의 용품이던 것이 인간의 용품으로서 새로운 사명을 지니게 된 것이다. 박산로(博山爐:山東省 靑州의 산을 본딴 향로)·촛대·초두(뺅?음식물을 데우는 容器)·대구(帶鉤:혁대 고리) 등에 정교한 기법을 구사한 일품(逸品)이 많다. 동경(銅鏡)도 이 시대에 수작(秀作)이 많아 신선문(神仙文)·기하문(幾何文)·신수문(神獸文) 등을 곁들인 것이 있고, 또 금은 상감(象嵌)의 기술을 응용한 것도 있다. 칠공예품도 한대 공예의 일품에 속한다. 제법에도 몇 종류가 있어, 목심칠(木心漆), 건칠(乾漆), 대[竹]를 엮어서 틀을 만들고 옻칠을 두껍게 입힌 남태칠기(藍胎漆器)와 토기에 칠을 입힌 것 등이 있다. 한국의 낙랑군(樂浪郡)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옥기도 중국 특유의 산물인데, 주대(周代)에 이미 관영의 제조소가 있었으며, 한대에는 귀족의 의례적 필수품으로서뿐만 아니라, 일반의 장식품으로서 패옥(佩玉)·옥즐(玉櫛)·옥부(玉斧)·옥배(玉杯) 등이 만들어졌다. 명기는 무덤 속에 사자(死者)와 함께 넣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채색도자기인데, 사람의 형태를 취한 것을 용(俑)이라고 한다. 용 이외에도 조수(鳥獸)를 비롯하여 말이나 소를 나타낸 것에 걸작이 있으며, 사자가 생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주택건축이나, 양·멧돼지 등의 명기도 있다. 이들 명기는 조각으로서 보더라도 조형성이 뛰어난 것이며, 소박한 가운데서도 한대 장인(匠人)의 생명과 역량을 잘 나타내고, 또 당시의 생활습속을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도자기도 한나라는 다음 시대인 육조(六朝)와 함께 그 초창기에 해당하며, 당(唐)·송(宋)시대가 동양 도자기사(陶瓷器史)의 백미(白眉)를 이룬다면 한대는 그 선구(先驅)라 할 수 있어, 이 시대에 이미 높은 화도(火度)로써 용해시키는 유약, 즉 고열유(高熱釉)가 사용되었다. 이때의 도기는 동기 같이 묵직하게 생긴 중후한 형태의 것이 많았다. 염직은 문헌에 보이는 것과 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유품을 비교하여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수(繡)·금(錦)·기(綺)·능(綾)·나(羅)·문직(紋織) 등 기법적으로 상당히 뛰어나, 그 중에는 당대(唐代)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것도 있다.
【회화】 회화라고 하여도 오늘날 볼 수 있는 한대의 유품은 전(塼)이나 능묘의 벽면에 새겨진 화상석(畵像石)이 주된 것인데,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필치는 중국 회화를 발전시키는 풍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선묘(線描)를 중히 여긴 이 시대의 필법은 선(線)의 예술이라고 불린 중국화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인물·풍경·동물·화훼(花卉)·신선 등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어, 중국미술의 한없는 깊이와 풍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중국의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세운 왕조(8∼23). 왕망은 전한 황실의 외척 왕씨의 일족이었다. BC 8년 대사마가 되었고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한 후 안한공(安漢公)이 되었다. 그러나 평왕을 죽인 다음 2세(歲)의 영()을 세워 스스로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으며, 8년에는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왕망은 복고주의(復古主義)를 내세워 《주례(周禮)》 등 유교경전을 근거로 하는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고전에 입각하여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이하의 관직을 제정하고 정전법(井田法)을 모범으로 하는 한전(限田)정책과 노비매매를 금지하였으며, 국가 권력에 의해서 물가의 균형책과 전매제도(專賣制度)를 강화하여 상업을 통제하였고 또한 화폐를 개주(改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혁정책은 실정에 맞지 않아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흉노(匈奴)를 비롯한 대외정책도 실패했기 때문에 안팎으로 불안과 동요가 고조되었다. 그 결과 적미(赤眉)·녹림(綠林) 등의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또 지방의 여러 호족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여 왕조 개창 15년 만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멸망하였다.
중국 후한(後漢)이 멸망한 후 위(魏)·오(吳)·촉한(蜀漢) 등 3국이 정립(鼎立)했던 시대.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후한 왕조의 권위는 붕괴하여 동탁(董卓)이 뤄양[洛陽]으로 입성하여 환관(宦官)을 주멸하고, 황제의 폐위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동탁 토벌의 군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산둥[山東]에 있던 조조(曹操)도 189년에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격파하고 동탁을 토멸하여 후한의 헌제(獻帝)를 옹립해서 기주목사(冀州牧使) 원소(袁紹)와 화북지방을 양분(兩分)하였다. 양자(兩者)는 202년 관도(官渡)에서 자웅을 결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화북지방의 지배권을 거의 확립하였다. 한편,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에게 식객(食客)으로 있던 유비(劉備)는, 현신(賢臣) 제갈양(諸葛亮)의 협력을 얻어 형주를 빼앗아 손에 넣고 오(吳)의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였으며, 211년에는 익주(益州)를 공략하여 이 지방을 빼앗았다. 그 후 오(吳)의 손권은 유비와 싸워서 형주를 손에 넣었으며, 거의 양쯔강[揚子江]의 중·하 유역을 세력하에 두었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후한의 헌제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케 하고, 뤄양에 도읍하여 위국(魏國)이라 칭했다. 그 전년에 한중왕(漢中王)을 호칭하던 유비는,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칭하여 성도(成都)에 도읍하고, 한제(漢帝) 또는 촉한제(蜀漢帝)라 칭하였다(221). 손권은 처음에 위의 오왕(吳王)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222년에는 스스로 연호(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3국 가운데 화북(華北)에 있던 위는 병호제(兵戶制)·둔전제(屯田制)·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을 실시하여, 군사적·경제적 기초를 공고히 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촉한은 국토도 좁고 가장 약하였으나, 한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중원의 회복을 뜻하여, 수차에 걸쳐 위에 도전하였다. 그 후 위에서는 사마 의(司馬懿)가 중심이 되어 이를 격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마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 소(司馬昭)는 263년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며,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이 위제(魏帝)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받고 진(晉)나라를 세웠다. 이 사람이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재차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 삼국시대 3국의 하나(225~265). 후한(後漢) 말 당고(黨錮)의 옥, 황건(黃巾)의 난으로 후한의 위세는 땅에 떨어지고, 동탁(董卓)·원소(袁紹)·원술(袁術)·공손 찬(公孫讚) 등 군웅이 각지에 할거하였다. 조조(曹操)도 한 부장(部將)으로서 황건적을 토벌하여 복속시키는 등 점차 세력을 확대하더니, 196년 헌제를 허(許:河南省 許昌縣)에 받들어, 승상(丞相)이 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하여 화북(華北)을 통일하였다. 당시 강남(江南)에는 손권(孫權), 쓰촨[四川]에는 유비(劉備)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나, 208년 조조가 적벽(赤壁:湖北省 嘉魚縣 西)에서 유·손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자 천하 3분의 형세가 정하여졌다. 216년 조조는 위국왕(魏國王)으로 봉하여졌으나, 220년 조조가 죽자 아들 조비[文帝]는 헌제에게 강요하여 제위를 선양받아, 연호를 황초(黃初)라 하고 뤄양[洛陽]에 도읍하여, 위나라를 세웠다. 조조는 전란과 황폐 속의 중원을 지배하면서,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하여 대규모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 징병제(徵兵制)를 대신한 병호제(兵戶制)를 실시하였다. 또한 징세의 단위를 호(戶)로 하는 호조(戶調)를 시작하였고, 인재를 발탁하기 위하여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제정하였으나, 실제로는 명문 출신자가 관계(官界)를 독점하였다. 그 중에서도 사마씨(司馬氏)의 세력은 강대하여서, 황제를 폐립(廢立)하기도 하였다. 265년 사마 염(司馬炎:武帝)은 위의 선례에 따라 원제(元帝)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제위에 올랐으며, 위는 멸망하였다.
중국 삼국시대 국명(222∼280). 한말(漢末) 군웅(群雄)의 한 사람인 부춘(富春:浙江省 富陽縣)의 호족(豪族) 손견(孫堅)이 원술(袁術) 밑에서 동탁(董卓)을 토벌하여 세력을 얻고, 그의 맏아들 손책(孫策)은 영자강 동쪽의 여러 군(郡)을 평정하고, 동생 손권(孫權)에 이르러 208년(건안 13) 유비(劉備)와 결탁,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 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 천하를 3분(分)하여 그 하나를 영유하게 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 헌제(獻帝)로부터 제위(帝位)를 양도받아 위(魏)의 황제가 되자 손권도 오왕에 봉해졌으나 222년 스스로 연호를 황무(黃武)라 부르고 229년 위와 촉한(蜀漢)의 싸움이 격화하자 그 틈을 타고 무창(武昌)에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오라 하고 도읍을 말릉(陵:현재의 南京)으로 옮겨 그곳을 건업(建業)이라 불렀다. 오는 손권 때 위세를 떨쳤으나 그가 죽자 국내의 대성(大姓)들이 서로 싸우고 내란도 자주 일어나 국력이 쇠퇴하였다. 263년 촉한이 위에게 망하고, 위가 진(晉)에게 망하자 진은 대군을 파견하여 오를 공략하였으므로 210년 건업은 함락되고 오는 멸망하였다.
중국 삼국시대에 정립(鼎立) 상태에 있던 한 나라(220~263).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후손 현덕(玄德) 유비(劉備)가 촉(蜀:四川省)에다 창건하였다. 정식 명칭은 한(漢). 계한(季漢)이라고도 하며, 촉(蜀)·촉한으로 통칭한다. 후한(後漢) 말 황건적(黃巾賊)의 대반란이 일어나 후한의 권위가 무너지자 군웅할거의 정세는 결정적이 되었다. 형주(荊州) 목사 유표(劉表)의 객장(客將)이던 유비는 유표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종(琮)이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자, 제갈 량(諸葛亮)의 협력을 얻어 천하 ‘3분의 계(計)’를 세우고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적벽(赤壁) 전투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형주의 목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양쯔강[揚子江] 중류 유역을 거의 장악하자, 익주(益州:成都) 목사 유장(劉璋)을 공략하여 스스로 익주 목사가 된 뒤 219년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칭하였다. 다음해 조비(曹丕)가 한제(漢帝)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자, 221년 유비도 또한 제위에 올라 수도를 청두[成都]로 정하고, 고조(高祖) 이하의 종묘를 세워 한(漢)의 정통성을 명백히 하였다. 다음해 손권도 연호(年號)를 세웠으므로 바야흐로 3국 정립의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를 둘러싼 촉한·오(吳)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유비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오를 쳤으나 백제성(白帝城)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후사를 위임받은 제갈 량은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잘 보좌하여, 오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고 산업을 장려, 민력을 기른 후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를 토벌하여 이를 개발하는 등 국력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중원(中原)을 회복하고자 자주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34년 우장위안[五丈原]에서 대전중 병사하였다. 그 후 장완(蔣琬)·비위(費褘)·강유(姜維) 등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해마다 일어난 위(魏)와의 전쟁 때문에 환관 황호(黃晧)의 전횡까지 겹쳐, 국력이 쇠퇴하여 263년 위군의 대공격에 유선이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의 중국 왕조. 서진(西晉:265∼316)과 동진(東晉:317∼419)으로 구분되며, 그 제실(帝室)은 사마씨(司馬氏)이다. 사마씨는 원래 하내온현(河內溫縣:河南省 溫縣)의 명족으로, 사마 의(司馬懿)가 3국의 하나인 위(魏)나라의 조조(曹操)를 비롯하여 여러 황제를 섬기면서 군사적·정치적으로 공적을 세워 권신(權臣)이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 사(師) 및 소(昭)도 권신으로서 세력을 확보하고 반대자를 제거해서 위나라 황실을 위압하였다. 263년 소가 집정할 때 3국의 하나인 촉한(蜀漢)을 멸망시켰고, 265년 소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武帝)은 위나라의 황제 조환(曹奐)으로부터 선양(禪讓)이라는 명목으로 황제위를 빼앗아 제위에 오르고 뤄양[洛陽]을 도읍으로 삼아 진나라(西晉)를 세웠다. 진나라는 280년에 오(吳)나라를 평정하여 3국을 통일하고, 점전법(占田法)·과전법(課田法) 등의 토지제도와 세법(稅法)인 호조식(戶調式)을 공포하였다. 2대의 혜제(惠帝)는 무능하여 귀족관료는 9품관인법(九品官人法:九品中正法)에 따른 문벌주의에 안주하고 소외된 하급 사인(士人:寒門)의 일부는 제실(帝室)의 일족인 여러 왕의 심복이 되어, 290년 8왕의 난을 일으켰다. 또 이 반란에 종군한 흉노 등 변방의 여러 민족들도 자각하기에 이르러,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궐기하여 영가(永嘉)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써 뤄양과 장안(長安:西安)은 외방 민족에게 파괴되고 311년에는 3대의 회제(懷帝)가 살해되었으며, 316년에는 4대의 민제(愍帝)도 잡혀 서진은 멸망하였다. 이에 앞서 오(吳)나라의 옛 도읍지 건업(建業:南京)에 있던 서진 왕족의 사마 예(司馬睿:元帝)는 뤄양과 장안이 함락되자 건업을 도읍으로 삼아 동진을 세웠다. 황허강[黃河] 유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왕도(王導) 등 귀족은 강남(江南)의 토착 명족(名族)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면서 이들과 화합하여 귀족제의 국가를 이루어갔다. 또한 북방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따라 양쯔강[揚子江] 중·하류 유역의 개발이 진전되어 장원(莊園)도 형성되었다. 문화면에서도 왕희지(王羲之)의 글씨, 고개지(顧愷之)의 그림, 도연명(陶淵明)의 시 등 훌륭한 명사들이 나와 좋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동진의 제권(帝權)은 약해서 장군들의 정권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419년 무장(武將) 유유(劉裕)가 공제(恭帝)로부터 선위(禪位)받아 송(宋)나라를 일으켰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304년 유연(劉淵)의 건국에서 439년 북위(北魏)의 통일까지 중국 화북(華北)에 흥망한 5호(胡)와 한인(漢人)의 나라 및 그 시대. 4세기 초엽에서 100 수십 년간 화북에서는 흉노(匈奴)·갈(:흉노의 별종)·선비(鮮卑:터키계라는 설이 있다)·저(:티베트계)·강(羌:티베트계)의 이른바 5호가 잇달아 정권을 수립하여 서로 흥망을 되풀이하였다. 그 중에는 한인이 세운 왕조도 있고 그 수도 16개국을 넘었는데 이것을 흔히 5호 16국이라고 한다. 이민족(異民族)에 의한 중국지배의 최초의 형태이다. 이보다 앞서 한제국(漢帝國)이 주변의 이민족을 정복하여 한문화(漢文化)를 침투시켜 나가자 이민족의 중국 내륙에 거주하는 자가 늘어갔으나 민족의 자주성을 잃은 그들은 한민족으로부터 갖가지 압박을 받고 노예·농노 등으로 전락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경향은 위(魏)·진(晉) 시대에 이르러 더욱 심했는데 크고 작은 반항을 거듭하다가 304년 흉노의 추장인 유연이 팔왕(八王)의 난에 편승하여 거병(擧兵), 산시[山西] 지방에 흉노국가를 재건하였다(漢:뒤에 前趙로 바꿈). 같은 해 저족인 이웅(李雄)이 쓰촨[四川]에 대성황제(大成皇帝)를 자칭하며 나라를 일으켰다. 이어서 서진(西晉) 왕조는 한군(漢軍)에게 수도 뤄양[洛陽]을 빼앗기고 멸망, 강남(江南)에 망명정권이 탄생하였다(東晉). 한(漢:東晉)은 갈족인 석륵(石勒:後趙)에게 멸망되고 후조도 또한 동북방면에서 남하한 선비족의 전연(前燕)과 서쪽의 저족인 전진(前秦)으로 2분되었다. 전연을 평정한 전진(前秦)의 부견(堅)의 치세는 5호시대 중에서도 가장 안정된 시기였으며 그 지배지역은 화북 전토는 물론 쓰촨·서역에까지 미쳤다. 다시 동진(東晉) 정복을 꾀했으나 화이허강[淮河] 남안(南岸)의 페이수이[肥水]에서 대패함으로써 멸망, 화북은 다시 후연(後燕:鮮卑)과 후진(後秦:羌)으로 분열하였고 간쑤[甘肅] 방면에서도 여러 민족의 소국가가 분립하여 서로 항쟁하였다. 이윽고 일어난 선비탁발부(鮮卑拓跋部)인 북위(北魏)가 제국가를 평정하고 북량(北凉)의 멸망을 끝으로 이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같은 무렵 강남에서도 송(宋)이 진(晉)에 교체되어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으므로 이 이후를 남북조라 부른다. 오호의 제국가는 호족(胡族) 중심의 국가로 유목사회 특유의 부락제도로 호족을 묶어놓았으나 한족에게는 중국 전통의 군현제(郡縣制)를 적용하여 이른바 호한(胡漢) 2중체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군주 중에는 폭군도 적지 않았으나 한문화를 존중하였고 한족 사대부(土大夫)를 예우하였으며 중국의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하려는 경향도 강하여 반드시 야만과 무질서만의 시대는 아니었다. 불교에 관심도 많았고 불도징(佛圖澄)·구마라습(鳩摩羅什) 등 서역승(西域僧)과 도안(道安) 등의 한승(漢僧)이 중국 불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다만 정권의 바탕을 이루는 부락제도의 존재가 국가의 통일성을 저해하였으므로 각 왕조는 모두 단명하였으며 복잡한 정국을 펼치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의 시대구분의 하나(420~589). 진(晉)나라와 수(隋)나라 중간시대에 해당하며, 이 동안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각각 왕조가 교체해서 흥망하였다. 남조는, 한족(漢族) 왕조인 송(宋)나라의 문제(文帝)에서 시작되어 제(齊)·양(梁)·진(陳)의 4왕조가 교체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589년 진이 수의 문제(文帝)에게 멸망될 때까지를 가리킨다. 북조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혼란을 수습한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 때부터 시작되어, 이 북위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고 동위는 북제(北齊)에게, 서위는 북주(北周)에게 교체되었다가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화북지역을 통일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외척 양견(楊堅:文帝)이 제위를 양위받고 건국한 수가 남조 최후의 왕조인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천하를 통일한 때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의 정치적 특징으로는 남조에서는 귀족정치의 번영이었고, 북조에서는 군주권의 강화였다고 할 수 있다. 남조의 귀족은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을 이용하여 항상 고급관리의 지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교체는 군사권을 장악한 무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북조의 군주는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탁발씨(拓跋氏)로서, 군주권강화를 위하여 지배종족인 선비를 모든 군사담당자로 구성하였으며, 호적을 정비하여 인보제(隣保制)와 삼장제(三長制)에 의해서 체제를 지탱하였다. 또한 균전법(均田法)이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며, 부병제(府兵制)도 채용하였다. 이 북조의 군주권 강화를 위하여 실시된 정치기구가 뒤에 수·당(唐) 두 제국의 정치기구로서 완비되었다. 문화면으로는 유교보다 불교·도교(道敎)가 성하였다. 불교는 남조에서 불법존숭의 황제까지 나타났고, 북조에서는 국가불교적인 성격이 강하여 윈강[雲崗]·룽먼[龍門]석굴과 마이지산[麥積山]석굴 등과 같은 대대적인 조불사업(造佛事業)이 성행하였다. 도교는 남조에서는 양의 도홍경(陶弘景)에 의해서 대성되었고, 북조에서는 북위 태무제 때의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가 천사도(天師道)를 대성하고 국가본위의 도교 종파를 이루어 중국 도교를 종교로서 확립되게 하였다. 문학은 남조에서는 진(晉)에서 송(宋)에 걸쳐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 등이 나타났으며, 그 경향은 귀족사회의 풍조를 반영하여 화려한 수사를 중용한 사륙변려체(四六儷體) 문장이 널리 보급되었다.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문선(文選)》과 서릉(徐陵)의 《옥대신영(玉臺新詠)》은 그와 같은 경향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된 시문집(詩文集)이다. 이 같은 귀족적인 경향에 대하여 생생한 민간의 감정을 표현한 악부(樂府)가 있었는데, 남조의 악부는 연애감정을 노래한 것이 많았고 북조의 악부는 전쟁과 영웅을 노래한 용맹하고 웅장한 것이 많았다. 이 밖에 문학작품이 아닌 것으로, 북위의 여도원(Y道元)의 《수경주(水經注)》와 양현지(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가사협(賈思d)의 《제민요술(齊民要術)》, 안지추(顔之推)의 《안자가훈(顔子家訓)》 등이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다.
중국의 통일왕조(581∼618). 양견(楊堅:文帝)이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받아 나라를 개창하고, 589년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문제·양제(煬帝:廣)·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나,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오랫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 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
【역사의 개략】 양견은 북주 황실과 인척관계임을 기화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즉 양견의 처는 북주의 주국(柱國:제2勳位)이던 독고 신(獨孤信)의 딸이었고, 그 처의 언니는 북주 명제(明帝)의 황후였으며, 양견 자신의 딸은 북주 선제(宣帝)의 황후임과 동시에 정제(靜帝)의 어머니였다. 양견은 북주에서 그의 전권(專權)에 맞서는 위지형(尉遲) 등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상국(相國:首相)·수왕(隨王)이 되어, 그의 사위인 정제로부터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으로 쉽게 북주를 빼앗아 수조(隋朝)를 개창하였다. 양견을 수나라의 고조(高祖)라고도 하는데, ‘隋’란, 원래 양견이 수왕(隨王)이 되었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隨’자에 ‘착(o)’이 있으면 뛴다는 뜻으로 왕조가 안정되지 않는다 해서 ‘隋’로 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587년 그의 보호국으로 강릉(江陵:湖北省)에 도읍을 정하고, 남조(南朝) 양(梁)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 후량(後梁)을 멸망시켰으며, 589년 그의 차남인 진왕(晉王) 광(廣:煬帝)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아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켜 통합함으로써, 동진(東晉)의 남천(南遷) 이래 317년에 걸쳤던 중국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제는 내정에 힘을 쏟아 재정적으로는 긴축정책(緊縮政策)을 취하였으며,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터키계(系)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598년(고구려 영양왕 9)에는 요서(遼西)를 침범한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황실에서는 문제의 장남 용(勇)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진(陳)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간지(奸智)가 넘치는 진왕 광이 형인 용을 대신해 황태자가 되고 뒤에 즉위하여 양제(煬帝)가 되었는데, 문제는 아들 양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양제는 문제의 유업(遺業)을 이어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大運河)를 완성하고, 남북의 통일을 추진하여 동도(東都:東京)를 뤄양[洛陽]에 조성하고, 토욕혼(吐谷渾)과 돌궐을 토벌하였다. 또한 611∼614년 돌궐과 손을 잡을 우려가 있었던 고구려에 3차에 걸쳐 대군을 파견하여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양제는 중국 통일 후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너무 서둘러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원정을 속행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과중한 부담으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고구려 원정 기지에 가까웠던 산둥[山東] 지방 백성들은 그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게다가 이 지방은 옛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나라의 영토여서 북주를 멸망케 한 수왕조에 대한 반감도 높아서, 반란사건도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613년 제2차 고구려 원정 도중에 일어났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은 2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나, 그 후 수나라는 본격적인 반란기에 들어갔다. 또한 양현감의 반란이 있을 무렵 옛 남조(南朝)의 영토 안에서도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은 삽시간에 각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양제는 강도(江都:揚州)에 행행(行幸)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617년 타이위안[太原:山西省] 유수(留守) 이연(李淵)은 내란이 격화하여 양제가 있던 강도가 고립되자, 타이위안의 호족들을 끌어모아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侑:恭帝)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하여 살해되자, 이연이 공제로부터 양위받아 스스로 즉위, 당조(唐朝)를 창건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양제의 총애를 받던 왕세충(王世充)은 공제의 동생인 월왕(越王:)을 옹립, 수나라의 대통을 잇게 하였으나, 619년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 정국(鄭國)을 세움으로써 수나라의 황실은 그 맥이 완전히 끊겼다.
【정치】 문제는 북주를 이었으나, 그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북주의 여러 법령을 근간으로 개혁을 단행하여 개황율령(開皇律令)을 공포하였다. 중국 법제의 모법이기도 한 당나라의 율령제(律令制)는 거의 이 때 그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관제(官制)로는 상서(尙書)·문하(門下)·내사(內史)·비서(秘書)·내시(內侍)의 5성(省), 어사(御史)·도수(都水)의 2대(臺), 태상(太常)·광록(光祿)·위위(衛尉)·종정(宗正)·태복(太僕)·대리(大理)·홍로[鴻'A]·사농(司農)·대부(大府)·국자(國子)·장작(將作) 등 11시(寺)를 두었다. 그러나 정치의 중추적 기능은 상서·문하의 2성에 집중되어 있어, 상서성에는 이부(吏部)·예부(禮部)·병부(兵部)·도관(都官:당의 刑部)·탁부(度部:당의 戶部)·공부(工部) 등 6조(曹)를 두었는데, 이는 당나라 6성(省)·1대(臺)·9시(寺)·5감제(監制)의 기초가 되었다. 지방에는 주(州)·군(郡)·현(縣)을 두어 그 장관을 각각 자사(刺史)·태수(太守)·영(令)이라 하였다. 그러나 주와 군은 그 넓이에 있어 차이가 없었으므로 군을 폐지하고 주에 현이 직속하게 하였다. 또한 자사가 그 때까지 장악하고 있던 병권(兵權)을 빼앗아 지방행정에서 병제를 분리하여 부병제(府兵制)를 따로 두었으며, 지방의 관리는 모두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꾀하였다. 토지제도로는 북위(北魏)에서 비롯된 균전제(均田制)를 북제(北齊) 때 보완한 제도를 근간으로 해서 시행하였으나, 그 세부적인 것은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수나라는 중앙의 지배권력을 말단 백성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해 북위(北魏) 이래의 인보제(隣保制)를 두어 500가(家)를 향(鄕), 100가(家)를 이(里), 25가를 여(閭), 5가를 보(保)라 하여 각각 그 장(長)을 두었다. 특히 옛 북제(北齊) 지방에서는 모열(貌閱)이라 해서 백성의 머릿수를 일일이 확인하여 나이 등의 부정신고를 엄중하게 단속하였다. 이 같이 제도를 정비한 결과 인구의 장악수(掌握數)가 증대하여 609년에는 호수(戶數) 890만 7,549, 인구 4,601만 9,956명에 이르러, 이후의 당나라 초기 때보다 월등히 많은 인구수를 나타냈다. 또한 문제(文帝)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이라 해서 그 때까지 귀족의 출세의 발판이 되어온 관리임용법을 폐지하였고, 양제는 관리임용법으로서 진사과(進士科)를 두었는데, 이것은 뒤에 당나라에 과거제(科擧制)라 불리어 성행하게 된 관리임용제의 창시로, 고려에서도 이를 실시하였다. 양제는 즉위 후 문제의 율령을 개정하여 대업율령(大業律令)을 발포하였는데, 후에 당나라가 제정한 율령은 문제의 개황율령(開皇律令)을 근간으로 한 것이다.
【문화】 수시대의 문화는 그 기간이 짧았고, 이 때 일하던 사람들은 당나라에서도 활약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수와 당의 문화는 획을 그어 구별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수나라의 남북통일에 의해서 그 때까지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화가 하나로 융합하게 되어 남조계(南朝系)의 문화계 종사자들도 수나라 조정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상면에서 왕통(王通)은 《문중자중설(文中子中說)》을 남겼는데, 그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바탕에 두고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파한 특이한 사상가로, 후세에 그 사상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문제가 불교에 귀의(歸依)하여 주(州)마다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세웠고, 양제도 진왕(晉王)으로 불릴 때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다. 지의(智)의 천태종(天台宗), 길장(吉藏)의 삼론종(三論宗)은 수나라 때 개창되었다. 문학면에서도 남북융합의 바람이 불어, 그 때까지 육조문학(六朝文學)이 외형의 아름다움을 위주로 명맥을 이어온 데 대한 반성이 가해졌다. 이 당시에는 새로운 경향의 문학이 생겼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唐) 시대에 일어나는 문학 융성의 소지(素地)를 숙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미술면에서는 불교 조각 가운데 석조물이 오늘날에도 많이 남아 있다. 뤄양 남쪽 룽먼[龍門]석굴의 약방동본존(藥方洞本尊)과 양협보살(兩脇菩薩)·양협나한(兩脇羅漢) 등과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에서 가까운 톈룽산[天龍山]의 제8동굴은 문제 때인 584년에 조영(造營)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둥성[山東省]의 지난[濟南]에서 가까운 위한산[玉5山]의 불곡사(佛錐?에는 수나라 기년(紀年)의 좌고(坐高)에서 30 cm~1 m에 이르는 불상이 많다. 또한 산둥성의 윈먼산[雲門山] 석굴에는 제1동굴과 제2동굴이 있는데, 제1동굴에는 중앙에 큰 좌불(坐佛),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있다. 이들은 모두 경직된 블록적(的) 구성으로 당(唐)시대의 원만한 형식에 가까우나 우미(優美)하다기보다는 웅장하고 중후하다. 금동불 중에는 석조와는 달리 우아하고 친밀감에 넘치는 소상(小像)이 있다. 또한 한말(漢末) 삼국 이래 쇠퇴하였던 동경(銅鏡)의 제작이 성행하여 수경(隋鏡)이라 불리는 사수문(四獸紋)·사신문(四神紋)·단화문(團華紋) 등이 있다. 이들 거울의 배면 외구(背面外區)에는 문학적으로 표현된 명문(銘文)이 있으머, 그 안에 문제의 연호(年號)인 ‘仁壽’라는 글씨가 보여 수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고구려와의 관계】 수나라가 일어선 581년은 고구려의 평원왕, 신라의 진평왕, 백제의 위덕왕이 다스리던 삼국시대의 말기로, 그 전까지 북주(北周) 및 진(陳)과 주로 관계를 맺어오던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수나라가 수립된 그 해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왕의 책봉을 받았고, 진나라와 관계가 깊었던 신라는 진나라가 수나라에 의해 멸망한 뒤에야 사신을 보내고 왕의 책봉을 받아, 수나라와 3국은 형식상 주종관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의 랴오허강[遼河]을 경계로 수나라와 국경을 상접한 고구려는, 589년 수나라가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통일하자, 그 세력의 동진을 경계하여 재빨리 병사·군량 등을 증강하고 병기를 제조하는 등 가상적국(假想敵國)으로서 대하였다. 평원왕에 이어 즉위한 영양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598년(영양왕 9) 친히 말갈병(靺鞨兵) 1만여 기(騎)를 거느리고 랴오허강 서쪽의 요서(遼西)지방에 쳐들어가 양국은 첫 충돌을 하게 되었다. 이에 수의 문제(文帝)는 수륙군 30만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나, 육상부대는 도중에 홍수를 만난 데다가 군량미의 수송이 여의치 않아 군사들은 굶주렸고 질병까지 유행하여 곤욕을 치렀다. 고구려의 평양성을 향하여 항행하던 해상부대는 폭풍을 만나 큰 타격을 받자, 수나라 원정군은 고구려와 싸워보지도 못하고 회군(回軍)하였다. 그 후 양국 관계는 고구려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요서를 공격한 데 대한 사과를 함으로써 표면상으로는 일단 정상을 회복하였으나, 수의 식자층에서는 고구려를 다시 정벌하자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문제에 뒤이어 즉위한 양제는 부황(父皇) 때의 한(恨)이 남아 있는 데다, 고구려가 돌궐(突厥)과 비밀히 내통하면서 조공(朝貢)조차 바치지 않자, “고구려왕이 친조(親朝)의 예를 하지 않으면 친히 군사를 이끌겠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때맞추어 고구려의 남진(南進)에 시달려 온 백제와 신라는, 번갈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토벌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위협이나 주변정세에도 고구려는 굴하지 않고 입조(入朝) 요구를 묵살, 거부하였다. 고구려의 태도에 화가 난 양제는 원정을 결심하고 전쟁준비에 총력을 기울여, 612년(영양왕 23) 제1차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수군(隋軍) 규모는 수군(水軍)을 제외한 육군만도 좌익 12군(軍), 우익 12군에 총수 113만 3800명, 군량운반자는 그 2배에 이르러, 출정 군사가 모두 탁군(郡:北京 부근)의 본진을 떠나는 데 40일이 걸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해전술에도 수군은 고구려군의 지략과 용맹에 고전하다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섬멸되어 개전 4개월 만에 전군을 철수하였다. 수나라는 613·614년 2차·3차의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수는, 고구려가 3차원정 때 제의한 강화(講和)조건에 따라 고구려 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였으나, 고구려 영양왕은 끝내 수나라에 가지 않았다. 수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무리하게 강행한 징발·사역 등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2차 원정 때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전국이 반란에 휩쓸려, 결국 고구려의 원정이 수왕조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모처럼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수는 3국에 정치적·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칠 기회를 맞았으나, 그 후반기의 잦은 원정·반란 등으로 인한 국력 소모로 자체의 문화조차 뚜렷이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렇다 할 문화적 교류도 없이 다만 승려들이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 건너간 데 그쳤으며, 간접적으로는 율령·관제(官制)·과거제도(科擧制度) 등 수에서 제정된 제도들이 당(唐)·송(宋)을 거쳐 통일신라와 고려에 전래되었을 정도이다.
수(隋)나라에 이은 중국의 왕조.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東)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三國體制)가 붕괴되고 정치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기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이후 이민족(異民族)의 흥기(興起)와 국내 지배체제의 모순이 드러나 중앙집권체제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
【정치】 수나라 말기 내란이 한창이던 617년, 진양(晉陽:太原)에서 반란진압을 하고 있던 태원 방면 사령관 이연은 둘째아들 세민(世民) 등과 더불어 거병(擧兵)하여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618년 수(隋)의 양제(煬帝)가 반란군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양제의 손자 공제(恭帝)를 협박하여 선위(禪位)받아 즉위하고 국호를 당이라 하였다. 건국 초에는 각지에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있었으나, 차례로 이들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공로자는 세민이었는데, 형이며 태자(太子)인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이 시기하자, 세민은 이들 형제를 죽이고 626년 제2대 황제에 올랐다. 이를 ‘현무문(玄武門)의 난’이라 하며, 세민이 곧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최대의 외적(外敵)이던 돌궐(突厥)을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여러 종족도 조공(朝貢)하게 되어 국위(國威)를 크게 떨쳐서, 한(漢)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大帝國)이 되었다. 태종은 내치(內治)에도 힘써 치세 20여 년은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태종의 후광(後光)은 뒤를 이은 고종 때까지 미쳤으나, 고종이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宮人)이었던 무씨(武氏:則天武后)를 황후로 세움으로써 이른바 ‘여화(女禍)’의 길을 열게 되었다. 무후는 고종에 이어 즉위한 자기 아들인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폐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주(周)로 개칭[武周革命]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재위 16년간은 악랄한 책략과 잔혹한 탄압의 공포정치가 계속되었다. 반대파의 쿠데타로 황제에 복위한 중종은 국호를 당으로 복구시켰으나 황후 위씨[韋后] 또한 실권을 쥐고 중종을 독살한 뒤, 권력을 휘두르는 등 무후시대의 정정(政情)이 재현되었다. 위씨 일파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예종을 복위시켜 당조(唐朝)를 명실공히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자가 이융기(李隆基), 즉 현종(玄宗)이다. 그는 정치를 쇄신하고 사회안정에 힘써서 ‘정관의 치세’에 비길 만한 ‘개원(開元)의 치세’를 열어 당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다. 현종의 치세는 선천(先天) 1년, 개원 29년, 천보(天寶) 15년을 합쳐 45년간(712∼756)인데, 이 시기에 문화의 꽃이 만발하여 서울 장안(長安)은 명실공히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번영은 궁중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일 뿐, 그 이면에는 균전제(均田制)의 모순이 격심해지고, 농민은 변경(邊境)으로 강제 출병(出兵)되고 중세(重稅)로 시달리는 등 현종 말기의 천보시대에는 당조 와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오랜 통치에 권태를 느낀 현종은 양귀비(楊貴妃)를 얻어 연유(宴遊)를 일삼고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楊國忠)을 재상(宰相)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는데, 755년 평로(平盧) 등 3지구의 절도사(節度使)를 겸하고 있던 안녹산(安祿山)이 양국충의 제거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뤄양[洛陽]에 이어 장안을 점령하였다. 현종은 쓰촨[四川]에 피란하고 그 도중에 양귀비는 살해되었다. 안녹산의 부장(部將) 사사명(史思明)에 이어진 이 반란은 9년 동안 계속된 끝에 이민족(異民族)의 도움으로 겨우 그 예봉(銳鋒)을 꺾을 수 있었으나, 조정측에서 완전히 평정할 힘은 없었다. 이 반란으로 균전법을 기반으로 하였던 고대(古代) 중국사회는 몰락의 첫발을 내디뎠으며, 반란 후 당조(唐朝)의 정치체제도 일변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부장들은 허베이[河北]·산둥[山東]을 점거, 조정으로 하여금 절도사의 지위를 승인하게 하였다. 또한 반란 중에 조정에서 전국 곳곳에 절도사를 둠으로써 번진체제(藩鎭體制)가 전국에 미쳐 조정 자체가 하나의 번진으로 격하되는 듯한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번진의 절도사란 몇 개의 군진(軍鎭)을 관할하는 지휘관인데, 현종 때 모병제(募兵制)가 실시되자 많은 병사를 마음대로 모집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어 대종(代宗)·덕종(德宗) 때는 이들의 횡포와 반란에 시달려 덕종은 조명(朝命)을 거역하는 허베이 제진(諸鎭)의 토벌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헌종(憲宗)은 절도사의 권한을 축소함으로써 한동안 중앙집권(中央集權)에 성공하였으나, 중앙집권의 강화책, 특히 재정강화는 일반민중에 가혹한 부담을 주어 숱한 유민(流民)이 생겼다. 또한 조세의 중앙집중은 일반 농민뿐만 아니라 지주호족층(地主豪族層)에게도 고통을 주고 번진병사의 대우를 악화시켜 절도사와 병사 간의 분쟁 및 지주·농민·유민을 주체로 한 반항은 859년 구보(甫)의 난을 일으켰고, 868∼875년의 방훈(龐勛)의 난에 이어 875∼884년에는 황소(黃巢)의 대란을 겪었다. 물론 이 반란도 실패로 끝났으나, 이 전란으로 강회(江淮)의 곡창지대가 황폐되어 국가재정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또한 중앙의 통제력도 약화되어 조정 내부는 환관파(宦官派)와 재상파(宰相派)로 갈려져 각기 외부의 번진을 자파 세력으로 끌어들여 싸우던 중 재상파와 내응한 황소의 구장(舊將) 주온(朱溫:朱全忠)이 장안에 들어가 소종(昭宗)을 살해한 다음 애종(哀宗)을 폐위시키고, 907년 스스로 즉위하니 당은 이로써 20대, 약 290년 만에 멸망하였다.
【제도】 당나라는 수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과거의 제도를 집대성,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중앙관제로는 3성(省) 6부(部)를 두어 국정을 관장하였고, 지방은 10도(현종 때는 15도)로 나누어 그 밑에 주(州:郡으로도 개칭)·현(縣)을 두었다. 도는 행정구역이 아닌 순찰구역으로, 처음에는 장관을 두지 않았으나 후에 순찰사를 두어 지방의 감찰임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주에는 자사(刺使), 현에는 현령(縣令)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일반민은 향(鄕:500家)·이(里:100家)·인보(隣保:5家) 제도에 따라 조직되어 현의 지배를 받았다. 이(里)의 책임자인 이정(里正)은 민호(民戶)의 가족 수와 토지를 호적에 올려서 토지의 환수, 부세(賦稅)의 징수 등의 사무를 맡아보았다. 일반민의 대부분은 이른바 균전농민(均田農民)으로 나라에서 일정한 토지를 지급받아 직접 국가에 조용조(租庸調)를 바쳤다. 이 밖의 의무로서 병역·잡요(雜)가 있었으며, 병사로 뽑힌 자는 병역기간 중 국도(國都)의 경비, 변경(邊境)의 방위, 향리에서의 동계교련(冬季敎練)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그 지방의 절충부(折衝府)에 소속되어 있어서 부병(府兵)이라 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데는 고관의 자제에게 시험을 치르지 않고 선조의 관위(官位)에 따라 임명하는 은음제(恩蔭制)와 학과시험에 의한 선거(選擧:科擧)로 하였다. 이러한 여러 제도와 국가통치는 율령격식(律令格式)이라는 독특한 법체계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이 중 율은 금지법(禁止法:刑法), 영은 행정법규(行政法規:命令法), 격은 증보개정법규(增補改正法規), 식은 시행세칙(施行細則)이다. 그러나 율령제도도 후기에 와서는 무너지고, 농정(農政)의 기반을 이루었던 균전제도 역시 지배층의 장원제(莊園制)에 의해 유명무실화하여 조용조제(租庸調制)에 대신해서 대토지의 사유(私有)를 인정하는 양세법(兩稅法)을 제정하였다. 국방의 근간을 이루던 부병제도 역시 현종 때 무너지기 시작하여 이에 대신해서 실시한 병제는 절제사의 세력을 비대화해서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을 약화시켰다.
【문화】 유학(儒學)에서는 공영달(孔穎達)이 태종의 명을 받아 고전에 관한 주석(註釋)을 정리·종합해서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역사에 있어서도 《주서(周書)》 《북제서(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수서(隋書)》 《진서(晉書)》 및 《남북사(南北史)》와 같은 전대(前代)의 왕조사가 편찬되었다. 중기에 이르러 유학의 독자성을 고양(高揚)하고 여기에 선종(禪宗)의 학설을 도입한 한유(韓愈)·이고(李)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은 후대의 송학(宋學)을 앞지르는 선구적인 사상을 내포한 것이었다. 당대의 문학은 귀족문학으로서 시(詩)·문(文) 모두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문학사상(文學史上) 초당(初唐:국초에서 현종까지 약 100년간)·성당(盛唐:현종∼숙종 50년간)·중당(中唐:代宗∼文宗 70년간)·만당(晩唐:문종∼唐末 80년간)의 4기로 나누고 있다. 문장(文章)에 있어서는 중당기에 한유·유종원(柳宗元)이 출현, 고문(古文)을 부흥하여 종전에 형식미(形式美)만을 추구하였던 변려체(儷體)를 배제하자는 고문운동이 일어났으며, 《유선굴(遊仙窟)》 《회진기(會眞記)》 《이혼기(離魂記)》 《이왜전(李娃傳)》 등 문어체소설(文語體小說)이 나타나 문장의 묘미를 보여 주었다. 특히 관리를 임용하는 선거에서 작시(作詩)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시는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성황을 이루어 오언(五言) 및 칠언(七言)의 율시(律詩)와 절구(絶句)의 형식이 완성되어 성당기에 이백(李白)·두보(杜甫)의 2대 시성(詩聖)을 비롯하여 시화일치(詩畵一致)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王維), 전원과 자연을 읊은 맹호연(孟浩然), 정로이별(征虜離別)을 읊은 고적(高適)·왕창령(王昌齡)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는 백거이(白居易)·원진(元), 만당기에는 두목(杜牧)·이상온(李商穩)·온정균(溫庭筠)이 나왔다. 산문 분야에서는 수대(隋代)의 괴기전설(怪奇傳說)을 원류로 하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이 많이 나왔다. 음악분야에서는 한(漢)나라 이래의 아악(雅樂:궁중음악)·속악(俗樂:민간음악) 및 호악(胡樂:西域音樂)이 정착되고 특히 호악이 번성하였으나 말기에 가서는 서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호악도 쇠퇴하였다. 또한 음악연주도 궁중에서 민간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어 신속악조(新俗樂調)라고 하는 음악이 흥성하였다. 서화(書畵)·조각(彫刻) 등의 미술에 있어서도 수대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켰으나, 중기 이후 크게 변모한 면도 있다. 종교에서는 특히 불교가 발전하여 수 이래의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이 종래의 여러 교의(敎義)를 집대성하고, 현장(玄)은 인도에서 가지고 온 방대한 경전(經典)의 번역사업을 일으켜 법상종(法相宗)을 확립하였으며, 당과 인도 사이에 승려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불교교리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천태·화엄·법상 외에 지론(地論)·섭론(攝論)·구사(俱舍)·성실(成實)·삼론(三論)·진언(眞言)·삼계(三階) 등 다수의 종파가 분립하여 제실(帝室)·귀족의 호응을 얻어 불교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 밖에 정토교(淨土敎)와 선종(禪宗)이 개종(開宗)되어, 특히 선종은 말기에 다른 종파가 모두 쇠퇴된 뒤에도 홀로 번영하여 중국불교로 완성되었고 송학(宋學)에도 다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도교(道敎)는 노자(老子)의 성(姓)이 제실과 같은 이씨(李氏)였던 관계로 제실의 호응을 크게 얻어 현종은 《도덕경(道德經)》을 집집마다 비치하게 할 정도였다. 이 밖에 동서간의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敎)·마니교(摩尼敎), 아랍의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派) 등의 외래종교도 들어와 이들의 사원(寺院)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당나라와 한반도와의 관계】 당나라가 개국한 618년의 한반도는 삼국시대로 고구려의 영류왕(榮留王) 1년, 신라의 진평왕(眞平王) 40년, 백제 무왕(武王) 19년에 해당되며,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은 신라·후백제·마진(摩震)·발해(渤海)가 한반도 및 만주 일부지역에서 각축을 벌이던 때이다. 당나라 건국 3년 후인 621년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당나라에서도 신라에 사신을 보내와 삼국 중 가장 먼저 국교를 튼 신라는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국경을 접한 고구려와는 사이가 나빠 결국 당나라 고종 때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백제와 더불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628년 처음으로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봉역도(封域圖:국경의 경계도)를 보내는 한편, 당나라를 경계하여 631년(영류왕 14)부터 16년간에 걸쳐 동북은 부여성(夫餘城:農安)에서 서남은 발해만에 이르는 국경지대에 1,000여 리의 장성(長城)을 쌓았다. 백제에서는 651년 사신을 보내고, 당나라에서는 새서(璽書)를 주어 신라와 화해하게 했다. 당나라의 태종은 일찍이 고구려를 도모하려는 야심을 품었으나 수나라가 패한 사실을 감안하여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642년 백제가 신라를 쳐서 대야성(大耶城:陝川) 등 40여 성을 빼앗고,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당항성(黨項城:南陽)을 빼앗아 신라의 대당(對唐) 교통로를 끊으려 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당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를 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두 번째 온 당나라 사신을 굴에 가둠으로써 두 나라의 숙명적 대립은 시작되었다. 645년 이래 안시성(安市城)의 혈전(血戰)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668년 고구려도 신라와 당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로써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는 막을 내리고 당나라는 백제의 고지(故地)에 웅진(熊津) 등 5도독부(都督府)를 두었으며, 고구려의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部)를 두고 전 영토를 9도독부, 42주(州), 100현으로 나누었다. 669년 고구려민 2만 8200호(戶)를 인구가 희소한 중국의 내지(內地)로 옮기는 이민정책을 써서 고구려 유민의 실질적 예속화를 꾀하였다. 이에 앞서 당나라는 신라에도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설치, 문무왕(文武王)을 계림도독으로 삼아 한반도의 완전귀속을 꾀하였다. 이로부터 당나라와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고토(故土)에서 영토 쟁탈전을 벌여 당나라는 677년(문무왕 17)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만주 撫順 부근)으로 옮긴 후 양국관계는 거의 정상을 회복하였으며, 699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고토에 진(震:후의 발해)을 세움으로써 당나라와 한반도의 관계는 삼국시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당과 발해는 초기에 여러 차례의 충돌이 있었으나, 2대 무왕(武王) 때부터는 발해에서 태도를 바꾸어 당나라의 관제(官制)와 문화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신라는 649년 처음으로 당의 의관(衣冠)을 사용하고, 650년 당의 연호(年號)를 사용함으로써 당의 문화 및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처음부터 시작된 당제(唐制)의 채용은 통일 후에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여러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또한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당나라의 율령격식을 많이 섭취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최초의 중세적 전제왕국(專制王國)을 확립한 고려도 선진 전제왕국인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제를 정비하였고 이와 같은 고려의 제도는 다음의 조선왕조에 다시 계승되었다. 교육에 있어서도 삼국이 귀족의 자제를 당나라 최고학부인 국학(國學:國子監)에 유학시켜 학문을 닦게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이를 본떠 최고교육기관으로서 국학을 두었으며, 고려도 이를 계승하여 국자감(國子監:후에 국학·성균관 등으로 개칭)을 두는 등 학문 전수(傳授)와 고급관리 양성에 있어서도 당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중국에서 당(唐)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에 나라를 세운 송(宋)이 전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979년까지의 약 70년에 걸쳐 흥망한 여러 나라와 그 시대. 그 중 5대는 화북(華北)의 중심지대를 지배하고 정통왕조(正統王朝)의 계열로 볼 수 있는 양(梁:後梁)·당(唐:後唐)·진(晉:後晉)·한(漢:後漢)·주(周:後周)의 5왕조인데, 사가(史家)들이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같은 이름의 왕조와 구별하기 위해 앞에 후(後)자를 붙였다. 10국은 화남(華南)과 기타 주변 각 지방에서 흥망한 지방 정권으로, 오(吳)·남당(南唐:江西·安徽·福建)·오월(吳越:浙江)·민(:福建, 뒤에 南唐에 병합)·형남(荊南, 또는 南平)·초(楚:湖南)·남한(南漢:廣東·廣西)·전촉(前蜀)·후촉(後蜀:四川)·북한(北漢:山西)을 말한다. 이 밖에도 단기간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연(燕:河北)·기(岐:鳳州)·주행봉(周行逢:建州) 정권 등이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지방의 절도사(節度使:地方軍司令官)들은 군사·민사·재정 등 3권을 장악하여 군벌화(軍閥化)하고, 특히 875년의 왕선지(王仙芝)·황소(黃巢)의 난에 활약한 유적(流賊)이나 이민족 용병(傭兵) 출신자들은 자립해서 절도사를 칭하여 이들이 병탄(倂呑)을 되풀이한 결과 대체로 11개 세력으로 갈라져, 후량(後梁)이 당의 제위(帝位)를 탈취한 것을 계기로 해서 각각 왕호(王號) 또는 제위를 칭하게 되었다. 이들 나라의 지배체제는 절도사의 막부(幕府)를 확충한 형태의 것으로서, 그 지배자들은 다투어 직할군단인 아군(牙軍)을 확대하고, 그 밖에도 세습화(世襲化)한 직업군인들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일찍이 양성해온 친위군(親衛軍) 조직을 두었으며, 행정의 모든 부문에도 심복의 무장(武將)들을 앉혀 무인정치(武人政治)의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들 정권은 중원(中原)의 5대를 비롯해 모든 왕조들이 군인의 쿠데타로 성립된 것이었고, 하층계급 출신자가 권력의 정상에 뛰어오른 하극상(下剋上)의 양상을 띤 것이었다. 당나라 말기의 극한상태에 다다른 사회적 혼란으로 생산체제는 일시 붕괴되었으나, 각국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다투었기 때문에 점차 회복되어갔다. 5대에, 최초로 등장한 후량(後梁)은 옛 당나라 귀족 세력의 숙청에 힘을 기울여, 이 때문에 중원에서 탈출한 귀족들이 촉(蜀)·남당(南唐) 등에 당문화를 들여오게 되었다. 그 뒤 처음에는 진왕(晉王)이라 칭하였던 이씨(李氏)가 923년 후당(後唐)이라 개칭하고 후량을 멸망시켜 화북을 거의 통일하였으며, 제도상으로도 새로운 통일 기운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후당은 당나라 때의 3성 6부(三省六部)를 중심으로 한 행정체계를 대신해서 민정을 관장하는 재상(宰相:同平章事)과 군정을 관장하는 추밀사(樞密使), 재정을 관장하는 삼사사(三司使)가 중앙정부의 중심이 되고, 여기에 금군(禁軍:近衛兵) 장관인 시위친군도지휘사(侍衛親軍都指揮使)를 더해서 정권의 4대핵이 되게 하였다. 한편 화남(華南)에서는 오(吳)를 무너뜨리고 뒤를 이은 남당(南唐)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형남(荊南)·오월(吳越) 등이 화남·화북의 완충지대적 존재로서 중개무역으로 나라를 보존하여 나갔다. 남한(南漢)은 남해무역(南海貿易)에 의존하였으나 다른 나라들은 특산물을 개발(吳越의 窯業, 四川의 製紙 등)하여 지역분업(地域分業)을 배경으로 해서 진(鎭)·시(市)·초시(草市) 등 소도시의 융성을 보게 되어 이는 뒤에 올 송(宋)의 재통일 아래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할 바탕이 되었다. 이 당시 농촌의 양세(兩稅)에 대해서 도시의 옥세(屋稅)·지세(地稅)를 늘인 것도 이와 같은 경제발전에 대응한 것이었다. 그 사이 북방에서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923) 급격하게 강대해진 거란(契丹)은 후당에 반역한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燕雲) 16주(州)를 할양받고, 후진까지 멸망시켜 하북(河北)을 점령해서 폭정(暴政)을 하였다. 거란에 대한 민족적 단결의 필요성과 함께 군사력·재정규모·영토 등 모든 면에서 분할되어 소규모화한 절도사는 중앙 의존적인 존재가 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 및 군대가 점차 지방에 침투하게 되어 중앙집권적인 문신관료제도(文臣官僚制度)가 완성되어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럴 즈음 후주(後周)의 명군(明君)이라 일컬었던 세종(世宗)에 의해 통일의 기초가 거의 굳혀졌고, 마지막으로 후주의 근위군(近衛軍)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일어나 송(宋)을 세우고 안일(安逸) 속에 빠져 있던 남당(南唐)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병합해서 통일을 완성하였다. 문화적으로 이 시대에는 촉(蜀)의 인쇄술, 문학에서의 사(詞), 회화(繪畵)에서의 수묵화(水墨畵) 등 송문화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중국의 왕조(916~1125). 정복왕조의 하나이다. 창시자는 동호계(東胡系) 유목민인 거란족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이다. 거란족은 4세기 이후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江)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6~9세기경, 수(隋)·당(唐)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발전하였는데, 9세기 말 당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점차 발흥(勃興)하였다. 질라부(迭刺部)의 실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야율아보기는 무공을 세워 기반을 구축하고 이주시킨 한인(韓人)의 협력을 얻어 거란제부(契丹諸部)의 통합에 성공하여, 군장(君長)이 되었다가 916년에 즉위하여 중국식으로 황제라 칭하고 본거지였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遼寧省 巴林左旗)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가 곧 요의 태조(太祖)이다. 태조시대에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제부족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고, 동쪽으로는 발해(渤海)를 멸망시켜 만주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제2대 태종(太宗)은 중국 경략에 힘써, 후당(後唐)의 장군 석경당(石敬d)을 도와 후진(後晉)을 세우게 하였고, 그 보상으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아 국호를 요라 하였다(946).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으로 진출하여 후진을 멸망시키고, 대량(大梁:河南省 開封)으로 진출하였으나 한지(漢地) 지배에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제3대 세종(世宗), 제4대 목종(穆宗), 제5대 경종(景宗) 때에는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계속되어 남방진출은 어려웠으나, 제6대 성종(聖宗), 제7대 흥종(興宗), 제8대 도종(道宗)의 3대 약 100년간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성종 때 가장 강성해져서 성종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유리한 조건으로 송과 화의를 맺었다(淵의 盟約). 이후 요는 송으로부터 획득한 세폐(歲幣)로 재정이 풍요해졌고, 송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문화상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편 동만주의 여진(女眞), 닝샤[寧夏] 지역의 탕구트(후의 西夏) 등을 복속시켜, 그 세력은 중앙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 방면으로까지 미쳤다. 흥종 때에는 송과 서하와의 분쟁을 틈타 조약을 유리하게 개정하는 등 탁월한 솜씨를 보였으나, 성종이 국력 충실을 꾀하여 중국 체제를 많이 받아들인 결과, 국수적인 보수파(保守派)와 혁신파(革新派)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 흥종·도종 때에는 양파의 파쟁과 종실(宗室) 내부의 세력쟁탈이 결부되어 때때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이에 동부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완옌부[完顔部]가 점차 강대해져, 1115년 그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독립하여 제위에 올라(太宗)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요의 토벌군은 번번히 패퇴를 거듭하였으므로 요는 금과의 화친을 고려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하여 금은 일찍부터 연운 16주 회복을 꾀한 송의 요청에 따라 대요협공조약(對遼挾攻條約)을 맺었으므로 요는 갑자기 곤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帝)는 연경(燕京:北京)과 다퉁[大同], 그리고 서쪽의 협산(夾山:內蒙古 自治區)으로 도망가 금군의 추격을 피했으나, 25년 여도곡(余睹谷:山西省 朔縣下)에서 사로잡혀, 요는 멸망하였다. 이때 제실(帝室)의 일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요(西遼)를 건국하였다.
【사회·경제】 요의 지배하에는 잡다한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지배민족인 거란 및 그 근친관계인 해(奚) 등의 유목민과, 한인(韓人) 및 발해인(渤海人) 등의 농경민으로 대별된다. 유목민에 대해서는 부족제로써, 농경민에 대해서는 중국과 같이 주현제(州縣制)로써 통치하였다. 특히 요의 본거지인 동(東)몽골에서는 당초부터 이주시켰던 한인을 위하여 주현을 만들어 이에 편입시키고 성곽을 세워 거주시켰기 때문에 농경민과 유목민과의 거주지역이 혼합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을 그 생활양식에 따라서 둘로 나누었던 것이 요나라 사회의 특징이었다. 법률상으로 당(唐)의 법률을 계승하면서도 거란 고유의 법률을 보존한 것도, 관제(官制)에 있어서 북면·남면의 2중체제를 간직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농경민의 민정(民政)을 관장하기 위하여 남면관(南面官:최고관청은 南樞密院)을 두었으며, 유목민의 군(軍)·민(民) 양정(兩政)은 이것을 북면관(北面官:최고관청은 北樞密院)에게 관할하도록 하였다. 남(南)추밀원에는 군정(軍政)을 맡기지 않고, 북(北)추밀원이 이를 통할하도록 하였고, 그 장관에는 원칙적으로 거란인을 임명하였다. 이 2중체제로 말미암아 유목민이 농경민에 의하여 한화(漢化)되는 정도는 극소수였으나, 양자의 융합은 잘 진척되지 않아, 그 대립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요의 경제에는 유목 생산적 경제와 농경 생산적 경제가 병존하였으나, 점차로 농경적 생산에 중점이 놓여지게 되었다. 상업 무역은 전연(淵)의 맹약(盟約) 이후 현저히 발달하여, 국경의 몇 개소에 각장(場:다른 민족과의 교역을 위하여 국경에 설치된 관청)이 개설되어 교역이 활발하였고 국내에서도 유통경제가 발달하였다.
【언어·종교·문화】 거란족의 언어는 퉁구스어(語) 등이 섞인 몽골어계(語系)의 언어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문자로 표현하기 위하여 920년에 태조가 거란문자의 대자(大字)를 만들었으며, 이어 그 동생인 야율질라(耶律迭剌)가 거란 소자(小字)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거란 문자의 제작은 한(漢)문화에 대한 대항의식을 나타내는 민족적 자각의 소산(所産)이며, 인근 제민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거란의 고유한 종교는 샤머니즘이지만 국초(國初)에 농경민을 통치하기 위한 필요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던 바 점차로 유행하였다. 한인과 발해인에서는 물론, 거란인 등의 유목민 사이에서도 불교가 흥행하여 성종·흥종·도종의 3대에는 최성기에 달하였다. 요왕실의 불교열(佛敎熱)은 매우 왕성하였는데 사탑(寺塔)의 조영(造營), 기타 방대한 국비(國費)가 소비됨으로써 이것이 국력쇠퇴의 한 요인이 되었다.
중국 역사상 당(唐)·오대십국(五代十國)에 이어지는 왕조(960∼1277). 처음 카이펑[開封]에 도읍하였으나 1126년 정강(靖康)의 변(變)으로 강남(江南)으로 옮겨 임안(臨安:杭州)에 천도하였다. 카이펑시대를 북송(北宋), 임안시대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개관】 오대(五代) 유일의 명군인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죽은 뒤 그의 부장(部將)인 조광윤(趙匡胤:太祖)이 근위병(近衛兵)의 추대를 받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960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그는 오대 부장들의 횡포에 혐오를 느껴 제위(帝位)에 오르자 군인을 억압하고 문관을 우대하여 문치주의를 채택하였다. 한편, 모든 권한을 중앙정부로 집중시켜 독재권 확립을 도모하고 다음의 태종도 이 정책을 답습하여 송나라의 기초는 이 2대 왕 사이에 이루어져 일단은 독재정치기구가 확립되었다. 이 독재제도는 그 후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독재정치의 기반은 강력한 군대와 치밀한 관료제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나, 당초 군인을 억압한 결과 군대가 약화되었으므로 그 수를 늘려 독재권을 지속시키려 하였다. 군사비가 재정의 80 %를 차지하게 되어 종래의 양세(兩稅)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차(茶)·소금·술·백반 등 일용필수품의 전매수입으로 방대한 군사비를 염출하려 하였다. 이 신경제정책이 안으로는 밀매자(密賣者)를 자극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반란의 온상을 형성케 하였다. 밖으로는 외부민족을 자극하여 민족의식에 눈뜨게 하고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여 송나라에 대항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송나라 300년의 역사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태조시대에 강남(江南)·쓰촨[四川]에 할거하던 여러 나라는 멸망하여 천하가 거의 평정되었으나 산시[山西]의 북한(北漢)은 거란(契丹)의 원조가 있어 그의 평정은 태종시대로 승계되었다. 때마침 거란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냉각된 것을 안 태종은 일거에 북한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후진(後晉) 때 거란에 넘겨준 연운(燕雲) 16주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다음 진종(眞宗) 때, 거란이 대거 침입해 왔으나, 전연(淵)에서 맹약을 맺고 은(銀)·비단 등의 세폐(歲幣)를 주어 화목하였으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화가 계속되어 경제계는 호경기를 맞이했고, 국가 재정은 호전하였다. 진종은 전연에서의 굴욕적인 외교를 거짓 꾸미고, 한편으로는 천자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풍부한 재정을 이용하여 일찍이 시황제나 한나라 무제가 행한 산둥[山東]의 명산인 타이산[泰山]에 제례를 지내 막대한 경비를 소모하였으나 그래도 재력은 아직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인종(仁宗) 때는 서하(西夏)와 수년간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서하는 송나라의 소금 전매제의 확립으로 자국산 청백염(靑白鹽)의 수출이 금지되어 이미 태종 때부터 송나라에 반항하다가 인종 때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이 전쟁으로 서하도 큰 타격을 입었으나 송도 전쟁 뒤 경제공황에 빠져 재정은 적자에 허덕이고 실업자가 속출하여, 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동남지방에도 반란이 일어 바야흐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인종의 뒤를 이은 신종(神宗) 때는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을 실시하였다. 한편 서하와의 전쟁은 농민의 중산계급을 몰락시켜 부호와 빈민이 대립하는 근세적 사회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왕안석의 신법의 목적은 국가재정의 재건과 함께 빈농이나 영세상공업자를 구제하여 중산계급을 육성하는 데 있었다. 신법은 왕안석의 재임중 상당한 성과를 올려 최소한 국가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고 송나라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그런데 이 신법은 지주·관료·호상(豪商)·종친 등 기득권을 가진 계급의 이익을 침해하였으므로 그들 계급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여기에서 신·구 양당의 분쟁이 발생하였고, 신종이 죽자 구법당(舊法黨)의 사마 광(司馬光) 등이 등용되어 신법은 폐기되고 인종시대의 구법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구법당에게는 뚜렷한 정책방향이 없어 정치는 혼란에 빠지고, 신종의 아들 철종(哲宗)이 성장하여 친정(親政)을 행하게 되자 구법당을 물리치고 신법당 관료를 등용하였다. 다음 휘종(徽宗) 때, 중도정치를 행하고자 한때 구법당의 관리를 함께 등용한 일도 있으나 결국 북송 말기까지 신법당이 정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북송 말의 신법당 관리는 구법당 관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당쟁이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 만주에서 일어난 금나라(여진족)에 의하여 1127년 멸망하였다(靖康의 變). 남송시대에는 신법당에 의하여 폐출되었던 철종의 후비(后妃) 맹씨(孟氏)가 고종(高宗)의 즉위를 인정하였던 관계로 구법당계의 관리가 많이 등용되었다. 남송이 강남 땅으로 쫓기자 정치가·군인·학자 사이에는 주전론(主戰論)이 강하였으나 문약한 송인(宋人)은 도저히 여진족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싸울 때마다 패하고 군사비는 늘어나 백성은 중세(重稅)에 허덕이고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종 때, 재상(宰相) 진회(秦檜)는 악비(岳飛) 등 군벌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의하였으나 금나라에 정변이 일어나 화평은 영속되지 못하였다. 두 나라의 화평은 자주 깨져, 몇 번이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남송 사회는 항상 전시상태에 놓여 있어 군비를 마련하기 위한 지폐가 남발되었다. 이 때문에 물가는 앙등하고 무거운 세금과 함께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더구나 북송시대에는 서방에서 유입되던 은(銀)이 남송시대에는 거꾸로 서방으로 유출되어 자금의 결핍으로 산업은 위축·침체되고 실업자가 증대하여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원풍(元豊)의 관제개혁(官制改革:1078∼85)으로 재상의 권한이 강화되어 남송시대에는 진회·한탁주(韓5胄)·사미원(史彌遠)·가사도(賈似道) 등이 전권(專權)을 휘둘렀고, 이에 반하여 천자의 독재권은 형식화되어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관기(官紀)는 문란해졌다.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것이 붕괴하려고 할 때 몽골군이 침입하였으므로 송나라는 마침내 그 무력 앞에 멸망하였다.
【관제】 지금의 내각에 해당하는 중서(中書)에는 재상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와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 수명이 있어 이들의 권한은 거의 같았으나 다만 직함만이 약간 아래일 뿐이다. 또한 군사에는 추밀원(樞密院)이 있어 통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병권(兵權)에는 통수권과 지휘권이 있어 천자만이 이것을 통할하고 군사령관은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다. 다만 추밀원을 통하여 천자의 명령이 군사령관에게 전달되면 비로소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추밀원에는 추밀사(樞密使)·추밀부사 등이 있었고, 중서와 추밀원은 양부(兩府) 또는 2부(二府)라 불러 국정을 논하는 최고기관이었다. 정무는 이들 수명의 합의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천자는 최후의 결재를 하였다. 송대에는 재정을 가장 중요시하였으므로 삼사(三司:재무부)의 권한은 컸고, 그 장관인 삼사사(三司使)는 천자에 직속되어 있었다. 또한 송대 관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특수 감찰기관의 발달이었다. 태조 때는 무덕사(武德司)가 있어 관리나 백성을 감시하였으나 태종은 이것을 황성사(皇城司)로 고쳐 확장·정비하고 그 간부에는 외척(外戚)이나 환관(宦官) 등 심복 몇 명을 임명하고 그 밑에 수천 명의 밀정을 두어 수도(首都)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파견하여 관료의 행동을 감시시켰으므로 독재권이 신장(伸張)되었다. 지방행정구역인 각 노(路)에는 감사(監司)를 두고 후에는 따로 제거상평사(提擧常平司)를 설치하여 상호 감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주(州)에는 지주(知州:도지사)를 두는 한편 그 밑에 통판(通判)을 두어 지주의 권한을 제한시켰다. 이렇게 하여 어떤 특정인에게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모든 권한은 오로지 천자 한 사람에게로 집중시키는 조직이었다. 다만 이 같은 제도하에서는 천자가 모든 정무에 관여하여 중요한 정무와 일반 정무와의 구별이 어려웠으므로 신종의 원풍(元豊) 연간에 당(唐)의 육전(六典)을 본떠 관제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사회와 경제】 오대(五代) 각국은 군비를 확장할 필요에서 재정의 기초를 굳히고자 산업을 장려하였다. 이 때문에 각지에 특산물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그 질도 향상됨으로써 자급자족하던 장원시대(莊園時代)는 지나고 상품경제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에 따라 상인의 수도 급속히 증가하였으나 오대 각국은 서로 분열되어 관세(關稅)의 장벽을 설치하고 있어 상품 유통에는 커다란 장애 요인이 되었다. 상인들이 판로를 확대하려면 불가불 각국의 국경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천하를 통일하려는 독재군주와 상인과는 그 이해(利害)가 완전히 일치하였다. 상인은 독재군주의 보호 아래 더욱 더 발전하고 독재군주는 상인에 의하여 그 재정적 기초를 굳혔다. 송대에 상세(商稅)가 지세(地稅)와 백중하였던 사실은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 송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도래하자 모든 산업은 안정된 판로를 개척하여 급속히 발전하였다. 산업발달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외국무역의 번영이었다. 서쪽으로는 육지를 통하여 위구르인(人)이, 남해에서는 아랍인이, 또한 동쪽에서는 한국과 일본인이 비단·도자기, 기타 물자를 구하러 왔다. 그들은 금·은, 특히 다량의 은을 중국에 가져왔다. 그것이 산업자금으로 투자되어 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때문에 노동력의 수요가 갑자기 늘어 이제까지 도둑의 무리에 가담하여 비밀결사에 투신, 사회불안을 조장하던 실업자들에게 직장이 주어졌으며 호경기의 계속에 따라 국가의 세입도 크게 늘어 흑자의 건전재정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북송시대의 근세적 문화는 이러한 사회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송의 산업이 발달하여 생산력이 증대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하나는 분업(分業)의 발달이다. 지역적인 분업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에서도 분업이 이루어져, 기업이 대규모로 되는 동시에 전문화하여 능률이 오르게 되었다. 둘째 요인으로는 과학적 기술의 발달이었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서 화력혁명(火力革命)이 있다. 즉 석탄사용의 보급에 따라 동(銅)·철 등의 제련 기술이 발달하여 다량의 동·철이 생산되었다. 동의 생산 증가는 동전의 대량 주조를 가능케 하여 상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철의 생산 증대는 병기의 발달을 가져와 국방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농기구 제조는 농산물의 생산력 증대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이와 같은 화력혁명은 생산력 증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의 발달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문화】 송나라의 문화는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 문화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복고적(復古的)인 성격이 송대문화의 한 특징을 이루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문학, 특히 산문(散文)에 있어서 송나라는 하나의 뚜렷한 시대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당나라 말기부터 한나라의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자는 이른바 고문부흥운동이 고개를 들었으나 그 세력은 아직 미미하였다. 그러나 북송 중기부터 구양 수(歐陽修) 등이 고문부흥운동을 다시 제창하면서 이 운동은 사대부들의 동조를 얻게 되고 마침내 문단의 큰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송나라의 유학(儒學)은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의 사상부흥운동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까지의 유학은 훈고학(訓學)이 주류를 이루어 경전(經典)의 자구(字句) 해석에만 천착하는 학문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유교는 정작 민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불교보다 열세에 놓인 느낌마저 있었다. 그와 같이 민중과 유리되었던 유교가 송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의 자극을 받고 고대의 원시유교(原始儒敎)로 되돌아가 성현(聖賢)의 정신을 올바로 파악하려는 새로운 기운이 싹텄다. 그리고 이것이 곧, 주자학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 복고풍조는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개화되었으며 취미분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가령, 당나라 이전의 중세기에는 정원을 꾸밀 때에도 정원석(庭園石)에 채색을 하는 등 인공미(人工美)를 극도로 살린 화려한 조경(造景)이 환영을 받았으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원시적인 자연경관을 살린 정원을 매력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와 같은 풍조와 아울러 사대부의 생활 주변에도 고품(古品)을 아끼고 사랑하는 복고취미가 크게 유행하였다. 고동기(古銅器) 같은 것이 발굴되면 사대부들은 그것을 서재에 장식하고 감상하는 것을 하나의 취미로 삼았다. 송나라 때 편찬된 《고고도(考古圖)》 《박고도(博古圖)》 등은 모두 고동기 발굴품을 수록한 책들로서, 학문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당초의 편찬 동기는 취미생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취미생활뿐만 아니라 의학분야에도 복고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풍조가 파급되고 있었다. 당나라 때까지의 양생법(養生法)은 신체에 이상이 생기면 밖으로부터 약을 투입하여 치료하는 대증요법(對症療法)이 채택되고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온보(溫補)의 방법이 등장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환자의 체내에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줌으로써 질병을 자연 치유케 하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옛날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꾸밈이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이다. 송나라 이전의 문화를 그 원인이야 어디 있건 인간 본래의 개성이 몰각(沒却)됨으로써 어떤 한계점에 부닥친 문화라 특징짓는다면, 송나라 문화는 인간의 자각과 더불어 그 개성이 발굴되고 존중되는 풍토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송나라 문화의 또 하나의 특색은 서민문화의 발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가 모든 백성에게 골고루 향유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정된 계층, 곧 큰 도시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 향상에 따라 발생한 현상이었다. 송대에는 산업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상인들의 세력이 커지고 도시도 발달하였다. 도읍지인 카이펑[開封]은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와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사대부들의 귀족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 문화는 서민들의 생활이 향상되면서 자연히 서민층에도 확산되었다. 예컨대, 북송의 철종(哲宗) 연간에는 오늘날의 난징[南京]에 전당포·주점·잡화상 등으로 구성된 시사(詩社)가 있었다. 그들의 시(詩)가 사대부의 시와 견줄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이지만, 송대의 문화가 서민계층에까지 파급되고 시작(詩作)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며, 당나라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송대에는 귀족문화의 서민층에 대한 침투와 아울러, 서민문화가 귀족층에 끼친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도읍에는 구란(勾欄)·와자(瓦子)라는 오락시설이 있어서 잡극(雜劇)·재담(才談)·요술 따위 연희(演戱)가 서민들을 관객으로 하여 번창하였다. 잡극은 뒤에 더욱 발전하여 원곡(元曲)이 되고 사대부들도 그것을 창작하게 된다. 또한 속어(俗語)가 시문(詩文)에 사용되는 경향이 뚜렷해지는데, 이것 역시 서민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귀족층이나 서민층의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송대에 이르러 서적 인쇄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누구나 책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회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서(書), 당대의 시(詩), 송대의 화(畵)라 일컬어지듯이, 송대의 그림은 중국의 역대 예술을 통해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동양화 내지 중국화의 확고한 전통을 수립하고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게 되었다. 송대의 회화는 북송과 남송화로 나누어지는데 이 두 가지 유파 사이에는 각각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즉, 북송화는 궁정에 설치된 화원(畵院)을 중심으로 황실의 비호 아래 발달하였다. 당·오대(五代)에 볼 수 있었던 약동하는 묘선(描線)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정을 억제한 냉철하고도 정확한 선을 구사하여 이지적인 화풍을 이루어 놓았다. 격조 높은 이 시대의 이상을 잘 표출한 작품으로는 휘종(徽宗)이 그린 화조도(花鳥圖) 등을 들 수 있다. 처음에 휘종이 중심이 되어 그 진용을 정비한 화원이 큰 성과를 올리게 된 것은 남송 때에 이르러서였다. 화원의 화풍에만 얽매이지 않고 화가의 독창성이 자유로이 표현되는 회화작품이 활발히 제작되었다. 마원(馬遠)·하규(夏珪)로 대표되는 수묵화를 비롯하여 이적(李迪)·이안충(李安忠) 등의 화조도에는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예술적인 향취가 넘쳐 흐른다. 화원에 소속된 정통파 화가 외에도 비정통파로 불릴 수 있는 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사실은 송대 회화의 큰 특색이다. 특히 수묵화가 가운데는 목계(牧谿)·옥간(玉澗)과 같이 대담한 화법을 구사하면서 힘차고 청아한 화면을 구성한 화가들의 존재가 빛나고 있다. 또한 송대에는 화론(畵論)에도 빼어난 것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삼원(三遠:高遠·深遠·平遠)을 이론적으로 확립시킨 곽희(郭熙)와 그의 아들 곽은(郭恩)의 공저인 《임천고치(林泉高致)》는 그 대표적인 저술로서, 후대의 작화(作畵)나 화론 전개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조각〉 수(隋)·당(唐) 시대 조각의 특징은 국가의 불교정책에 힘입어 웅대한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한 대작들이 많은 데 비하여, 송대에는 불교가 일반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됨으로써 조각의 규모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지만 오히려 인간미와 서민성을 풍기는 작품들이 나타났다. 즉 수·당·오대에는 보살상(菩薩像)의 조영(造營)이 대부분이었지만, 송대에는 나한(羅漢)·관음상(觀音像)을 활발하게 제작하였으며, 당나라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심오한 예술성이나 유연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지라도 어딘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조촐한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 송대 이전에는 거대한 석굴사원(石窟寺院)의 조상(造像) 등에서 자연과 맞서는 신앙의 격렬함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으나, 이 시대에는 흙을 빚거나 나무를 다듬어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공예〉 오늘날 세계의 도자기 연구가들에게 송(宋)나라 도자기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놓은 공예품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물건의 하나라고 상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송나라의 도자기가 완성단계에 다다른 것은 대략 북송 중기 무렵이 되며, 그 이후부터는 차차 잡다한 요소가 섞이기 시작하면서 순수한 송나라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사라져 갔다. 송나라 도자기는 청자와 백자의 두 가지로 대표되는데, 간결한 가운데에도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조형미와 구슬을 연상시키는 자기 표면의 촉감은 달리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걸작이다.
〈서예〉 태종(太宗) 치세에 《순화각첩(淳化閣帖)》이 편찬되고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글씨를 비롯한 전통적인 명필들의 서법을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와는 달리 채양(蔡襄)·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米? 등 4대가에 의해 지난날의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서법이 나타나 틀에 박히지 않고 개성이 넘치는 신선한 서풍(書風)이 널리 일반의 환영을 받았다.
【고려와의 관계】 송나라가 일어난 960년 전후의 고려는 제4대 광종(光宗)의 치세(治世)로서 대외적으로는 국경을 맞댄 중국 동북지방의 요(遼:契丹)와는 긴장관계를 지속하고 중원(中原) 국가로서는 후주(後周)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오다가 후주가 송나라에 멸망하자 962년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를 송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보내 이로부터 양국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양국은 이후 사절(使節)·예물 교환, 유학생 파견, 송상(宋商)의 출입 등으로 정치적·문화적 관계가 밀접하게 되나, 송과는 남서로 대립되어 적대관계를 가지게 되고 고려와는 남북으로 국경을 맞대어 침략세력으로 도사리고 있던 요(遼)가 고려와 송의 국교에 변수(變數)로 작용하게 되었다. 979년 요를 침공하였다가 대패한 송은 고려에 우호적 손길을 뻗쳐 986년(성종 5) 다시 대규모의 정토군(征討軍)을 일으키면서 고려에도 원병(援兵)을 청하여 군사를 발하였으나 역시 패하여, 요는 이로부터 더욱 고려와 송의 연합적 동태를 주시하면서 고려의 서북면(西北面:평북)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략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맺고 994년부터 요의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이 해 6월에 성종은 요에 보복코자 사신을 송에 보내 원병을 청하였으나 출병을 거부하자 30년 만에 국교를 단절하였다. 목종(穆宗)이 즉위한 뒤 999년(목종 2)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이후 양국은 소극적이나마 교류를 하였으나 고려는 송을 거란 배후 견제세력으로 이용하려 한 것에 대해 송은 고려·요와의 문제에 개입을 회피하고 중립을 견지하였다. 거란의 제2차 침략(1010)을 거쳐 제3차 침략(1018)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요의 압력에 따라 목종 이래 재개하였던 송과의 국교를 다시 단절하였다. 그러나 국교의 단절에도 여상(麗商)과 송상(宋商)에 의한 무역거래는 활발하여, 특히 송나라 상인들의 빈번한 내왕은 고려에 세계의 이질적인 문화요소를 전달하여 주었는데, 이 당시 아랍[大食國] 상인이 수삼차 고려에 내왕할 수 있었던 것도 송상의 중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송나라에서는 신종(神宗)이 즉위(1067)하면서 연려대요책(聯麗對遼策)이 대두되어 고려에 국교재개를 요구하여 왔고 고려에서는 송나라의 문화를 깊이 흠모하였던 문종(文宗)이 즉위한 뒤 매우 친송적(親宋的)이어서 1071년 양국은 약 반세기 동안 단절하였던 국교를 다시 텄다. 양국의 국교는 서로 요나라의 자극을 꺼려야 하는 입장이어서 정치·군사적인 관계보다는 경제·문화적인 측면으로 기울었으나, 이 또한 요나라의 이목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왕래하는 항로도 동로(東路)에서 서로(西路)로 변경하여야 할 정도였다. 여하튼 양국의 무역거래는 1078년 송나라에서 새로 건조한 거선 2척에 막대한 예물을 싣고 고려에 보낸 이래 절정기를 맞았다. 당시 송은 무역장려책과 더불어 고려에 친선책을 써서 고려사신과 고려상인에 대하여는 극진한 우대를 하여 이들이 통과하는 연로(沿路)에는 고려관을 세워 숙식을 제공하였다. 고려에서는 예성강(禮成江)∼자연도(紫燕島:仁川)∼마도(馬島:海美)∼고군산(古群山)∼죽도(竹島)∼혹산도(黑山島)∼중국 명주(明州:浙江省密波府)에 이르는 항로를 송선이 오고갈 때 관리를 항구에 보내 이를 영송(迎送)케 하였다. 또한 야간에는 송선이 통과하는 항로 연변의 산정(山頂)에 순차로 봉화를 올려 예성강까지 인도하는 등 접대에 정성을 다하였다. 고려와 송나라는 이와 같이 국교의 단속(斷續)에 구애됨이 없이 공사무역(公私貿易)을 통해 막대한 수량의 물물을 교류하였는데, 특히 고려는 송나라의 서적을 수집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여, 국초 이래 구경(九經)을 비롯하여 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역서(曆書)·형법서(刑法書)·의서(醫書)·도가서(道家書)·불서(佛書) 등 광범위하게 수입해서 이를 재소화(再消化)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문화적인 부(富)를 축적하였다. 또한 송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고려에서 송악(宋樂)이 떨쳤고, 1116년(예종 11)에는 휘종(徽宗)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보내와 이로부터 우리의 음악은 종래의 향악·당악에 아악이 새로운 음악으로 첨가되어 국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요의 동태를 주시하며 국교관계를 유지한 고려와 송은 1115년(예종 15), 요군을 격파하고 쑹화강[松花江] 이동의 땅을 장악한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아구타[阿骨打]가 황제를 칭하고 금국(金國)을 세움으로써 다시 그 관계는 흔들리게 되었다. 금나라가 일어나자 송은 금과 연합해서 1125년 요를 멸망케 하였으나 2년 후에는 송나라 자신도 금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휘종·흠종이 납치되어 북송시대는 막을 내리고(靖康의 變) 임안(臨安:杭州)의 남송시대가 열린다. 이를 전후해서 송은 고려에 자국의 위급을 알리고 금을 협공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금에 사대정책(事大政策)을 결정한 고려는 이를 거절하여 양국의 관계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송나라는 1142년 금에 세공을 바치고 신(臣)을 칭하게 되었고, 이후 고려도 주로 금나라와의 외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고려와 송나라가 주로 문화적인 교류를 하면서 서로 많은 귀화인을 맞이하여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벼슬을 주어 우대하였는데, 이 중에는 문예·음률로써 이름을 떨친 사람도 많고, 남송이 멸망할 무렵에는 많은 송나라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금(金)
퉁구스족(族) 계통의 여진족이 건립한 중국의 왕조(1115∼1234). 중국의 정복왕조의 하나로, 창건자는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이다. 여진족은 본래 10세기 초 이후 거란족이 세운 요(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12세기 초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남동쪽의 안추후수이[按出虎水] 부근(지금의 松江省) 아청[阿城]에 있던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자, 그 추장인 아구다가 요를 배반하고 자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가 곧 금나라 태조(재위 1115∼23)이다. 금나라는 그들의 근거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곳은 후에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라 하였다. 금이라는 국호는 근거지인 안추후수이에서 금이 많이 산출된 점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태조는 요군(遼軍)을 격파하여 그 영토를 넓혀나갔으며, 1120년에는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태조는 산시성[山西省]의 다퉁[大同], 허베이성[河北省]의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으로 진출하였으며, 25년 제2대 태종(太宗:재위 1123∼35) 때에는 요를 멸망시키고 서하(西夏)·고려(高麗)를 복속시켰다. 금나라는 아구다가 완비한 행정·군사 조직으로 300호를 1모극(謀克)으로 하여 100명의 병사를 내고, 10모극을 1맹안(猛安)으로 하여 그 장을 세습시켜 부민을 통치하게 하는 맹안모극 제도로 군사적·행정적 제도를 실시하고, 요나라에 이은 중국의 정복왕조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금나라는 송(宋)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허난성[河南省]의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여 27년 송나라의 상황(上皇) 휘종(徽宗:재위 1101∼35)·황제 흠종(欽宗)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이로써 금은 만주 전역과 내몽골[內蒙古]·화베이[華北] 지역 등에 걸친 대영토를 영유하게 되었다. 제3대 희종(熙宗:재위 1135∼49) 때에 화이수이[淮水]·산시성[陝西省]의 대산관(大散關)을 잇는 지대를 국경으로 정하고, 남송의 황제는 앞으로 신례(臣禮)를 갖추어 금의 황제를 대하며, 또한 은(銀) 25만 냥과 견포(絹布) 25만 필을 세폐(歲幣)로 바친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금나라는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서 송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이런 경향은 제4대 해릉왕(海陵王:재위 1149∼61) 때에 더욱 두드러져, 마침내 53년에는 금의 창업근거지였던 상경회령부를 버리고 연경(燕京)으로 천도, 그와 함께 여진인을 화베이지방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다시 남송을 쳐서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려는 뜻을 고집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남벌(南伐)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만주에 남아 있던 여진인과 발해인들의 세력에 눌려 61년 제위에서 밀려나고, 제5대 세종(世宗:재위 1161∼89)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 후 해릉왕은 한 부장에게 살해되었다. 세종은 남송과의 국교를 조정하여 해릉왕의 남벌로 인한 재정난을 타개하고, 이후 29년에 걸쳐 금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소요순(小堯舜)이라 한다. 또 세종은 그때에 표면화된 여진인의 나약함과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으며, 점차 잊혀져가는 여진어·여진문자 사용을 장려하는 등 국수주의(國粹主義) 정책을 취하였다. 제6대 장종(章宗:재위 1189∼1208)은 무계획적이고 산만한 재정정책을 취한데다, 황허강[黃河] 범람 후의 치수(治水) 공사와 북방 몽골계 유목민에 대한 경략 등에 지나치게 국비(國費)를 소비하였고, 더욱이 실지회복에 나선 남송의 도전을 받아 한층 더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제7대 위소왕(衛紹王:재위 1208∼13) 때는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근거지인 만주를 잃었으며, 남송과 서하(西夏)로부터도 침입을 받았다. 제8대 선종(宣宗:재위 1213∼23)은 1214년 몽골군의 강습(强襲)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연경에서 카이펑으로 옮겼으나, 함께 옮겨온 여진인과 토착 한인 사이에 식량문제를 둘러싸고 처참한 싸움이 벌어졌다. 제9대 애종(哀宗:재위 1223∼34)은 카이펑에서 안주할 수 없게 되어 32년, 이곳을 탈출하여 허난성의 각지를 옮겨다니다가 34년 차이저우[蔡洲]에서 몽골·남송 연합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써 금은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사회】 여진인을 중핵으로 한 이 사회는, 거란인·발해인·한인 등 여진인의 10배가 넘는 타민족 인구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인의 우월을 지키면서 피지배민의 불만을 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건국 전년인 1114년에 태조 아구다가 완비한 맹안모극 제도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편제는 평시에는 농업과 수렵 등의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병사로 종군하게 되어 있었다. 금은 이 맹안모극 제도를 통한 병력을 근간으로 하여 국력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세종 때에 중원으로 이주한 맹안모극민(民)이 태만하고 나약해져 궁핍화가 두드러졌으며, 여진인의 보호를 위하여 지나치게 힘을 기울인 결과, 한인의 반감을 사 이로부터 한인과 여진인의 반목·대립은 더욱 심각해졌다.
【경제】 희종 때인 1142년에 남송과 강화가 성립된 이후 남송과의 국경선 수 개소에 각장( 場)이라는 관설(官設) 무역장을 설치하고 무역을 시작하여, 차·향료·약품·상아·서각(犀角)·견직물·목면·목재·쌀 등을 수입하였고, 송나라에서는 진주·모피·인삼·감초·견직물(산둥·허난 지방 제조품)·말 등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무역의 수지(收支)에서는 항상 수입초과였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금나라는 남송과 대항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특히 해릉왕의 남벌 때문에 재정난이 심각해져서 원상회복이 몹시 곤란한 상태였다. 이때에 세종이 단행한 것이 물력전(物力錢), 즉 재산세의 징수였다. 국민의 재산상태를 조사하여 그 다과에 따라 과세하였다. 이것은 주로 한인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한인의 세 부담은 더욱 과중하게 된데다, 징세관리는 증수(增收)를 목적으로 과중부과를 하였으므로 한인의 불평은 날이 갈수록 심하여졌고, 그들을 금왕조로부터 이반(離反)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금나라는 동전의 부족으로 해릉왕 때부터 지폐인 교초(交)를 발행하였다.
【언어·종교·문화】 지배민족인 여진족은 알타이어계(語系)의 퉁구스어에 속한 여진어를 사용하였으며, 그것을 기록하기 위하여 여진문자를 만들어 썼다. 그러나 여진인의 화베이지방 이주 후에는 점차 한화(漢化)되어 세종의 적극적인 장려에도 불구하고 여진어·여진문자는 점차 잊혀져갔다. 여진 고유의 종교는 샤머니즘이었으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발해·요나라 등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화베이지방 영유 후로는 남송의 불교를 계승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무렵에 금나라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화베이의 한인사회를 배경으로 도사(道士) 왕중양(王重陽)이 도교에 혁신적인 기풍을 불어넣어 전진교(全眞敎)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문학에서는 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여진인의 상류층도 송나라 문화, 특히 문학에 심취하였으므로 북송문화의 주류는 그대로 금나라에 인계되었다. 특히 장종(章宗)은 훌륭한 문화정책을 펴 금왕조에서 가장 융성한 문운시대(文運時代)를 출현하게 하였다.
원(元)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개관】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캐라코럼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베트남·미얀마·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차가타이·오고타이·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爭)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朱元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순제(順帝: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정치】 원나라의 최고 주권자는 쿠빌라이칸과 그 적계(嫡系) 자손에 한정되어 그 권한은 초월적인 것이었다. 정치적 권력을 대표하는 중앙의 주요한 정치기구는 당시 성(省)·원(院)·대(臺)로 약칭되었던 3대 관청인 중서성(中書省)·추밀원(樞密院) 및 어사대(御史臺)였다. 중서성은 황제의 명령인 법령을 입안(立案)·기초하는 기관으로 그 아래에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행정 6부를 두고 그 법령의 시행을 맡았다. 중서성의 장관인 중서령(中書令)은 가장 영예로운 관직으로, 황태자가 이를 겸하였으며, 그 아래에 우승상(右丞相)·좌승상·평장정사(平章政事) 등의 재상(宰相)과, 참지정사(參知政事)·우승(右丞)·좌승 등의 부재상을 두어, 중요한 정무는 모두 재상·부재상들의 합의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추밀원은 군사조직을 통할하는 기관으로, 이것 역시 황태자가 겸하는 장관인 추밀원사(樞密院事) 아래에 지원(知院)·원사(院使)·동지(同知)·부사(副使) 등의 여러 관직을 두었는데, 이 밖에 특히 중대한 군사기밀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중서성에서 평장정사 한 사람이 파견되었다. 마지막으로 어사대는 관료기구의 숙정과 쇄신을 이루기 위한 감찰기관으로, 장관인 어사대부(御史大夫), 차관인 중승(中丞) 아래에 많은 감찰어사를 두어 끊임없이 여러 행정기관들을 순찰해서 부정을 적발하고 또한 민간의 풍기 유지, 교육의 진흥을 맡았다. 이상의 3대 관청 외에 재무를 맡아보던 제국용사사(制國用使司), 뒤에 승격해서 상서성(尙書省)으로 개칭한 특수관청이 있었는데, 이는 비상시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타개하려 임시적으로 두었던 것으로 목적이 이루어지면 폐지되었다. 성·원·대의 3관청은 원래 상도(上都)·대도(大都)를 포함한 직례지(直隷地)를 직접 관할하였으며, 그 밖의 지역에는 이를 대행할 출장기관으로 행중서성(行中書省:약칭 行省)·행추밀원(行樞密院:行院)·행어사대(行御史臺:行臺)를 두었는데, 뒤에 점차 정리되어 상설관청이 되었다. 그러나 군정(軍政)은 일원화의 필요성에서 비상시가 아니면 행원(行院)을 두지 않고 모두 중앙의 추밀원이 관할하였다. 지방의 행성 및 행대는 비록 중앙의 성(省)·대(臺)에 비해서 지위는 낮았으나, 모두 황제에 직속되는 관청으로서 절대적인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들 대관청의 아래에 소속되는 지방행정 관청으로 선위사(宣慰司)가, 지방재무청으로는 전운사(轉運司), 지방감찰청으로는 숙정염방사(肅政廉訪司)가 있었다. 또한 이들 관청 아래에는 노(路)·부(府)·주(州)·현(懸)·사(司)의 지방행정관청을 두었다. 지방행정관청의 수령은 대개 그 지방의 지식인을 임명하였으나 지방행정을 점검하는 정치감찰관으로 다루가치라는 관직을 두어 반드시 몽골인이나 색목인(色目人)을 임명하였다. 이와 같은 현지 출신 관리에 대한 감시제도는 정복(征服)왕조였던 원나라의 특징이었다. 한편 몽골의 군사제도는 처음에 몽골 귀족의 자제로써 조직된 케시쿠타이라 하는 궁정조직이 있어서 황제의 신변주위에서 호위를 하던 친위군(親衛軍)의 역할을 하였으나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의장병(儀仗兵)의 존재로 변하여 그 대신 일반몽골인·한인(漢人), 또는 서방 투르크계 유목민의 정예로써 선발 조직된 시위군단(侍衛軍團)이 군의 중핵을 이루어 황제의 신변과 수도 근교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경사(京師)의 외곽을 이루는 화북일대에는 일반 몽골군으로 편제된 4개의 몽골도만호부[蒙古都萬護府]라는 병단(兵團)이 요지에 주둔하였다. 이를 둘러싸는 양쯔강[揚子江] 주변에는 강남(江南)에 22익(翼), 후광[湖廣]·쓰촨[四川]에는 6익씩 주로 한인(漢人)으로 구성된 한군만호부(漢軍萬護府)를 진수(鎭守)시켜 원나라 정권의 거점인 직례(直隷)지역을 이중삼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이들 병단의 편제에 있어서 처음부터 남송(南宋)의 유민을 배제하였던 것은 역시 정복왕조로서의 경계심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사회·경제】 원나라는 많은 이민족(異民族)문화를 수용하고 있던 다민족국가였고, 복합적 사회였으며, 거기에 지배민족인 몽골인 사회는 근각(根脚:혈통)을 존중하는 봉건적 신분제사회였다. 따라서 통치에 있어서도 신분제 의식에 좇아서 이를 규제하려 하였다. 먼저 몽골인을 국족(國族), 서방계의 투르크·이란·유럽인을 색목인(色目人), 금국(金國)의 유민 즉 화북의 백성을 한인(漢人), 강남에 사는 남송의 유민을 남인(南人)이라 불러서 구별하였다. 이 가운데 원나라의 황실을 비롯해서 유목영주층·몽골귀족층이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북방의 초원에 광대한 유목지를 소유하고 케린코라 불린 다수의 가내노예를 사역하였으며, 중국의 내지(內地)에도 여러 곳에 식읍(食邑)을 급여하여, 이른바 ‘투하(投下)’된 백성을 지배하는 권력층이었다. 다음 계층은 몽골제국 또는 원나라 정권의 성립에 훈공을 세운 색목인 및 한인(漢人)으로, 여기에는 대개 군벌(軍閥) 출신자가 많았다. 그 다음의 중간층은 하급의 이원(吏員) 출신자나 무인(武人) 출신자로, 폭넓게 원나라정권을 받쳐주었던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최하위층은 이들 특권적 신분에서 완전히 배제된 한인(漢人)·남인(南人)의 대중들이었다. 원조(元朝)에서는 호적상 이들 신분층을 계관호(係官戶:帝國의 臣民)와 투하호(投下戶:領主·귀족에게 私屬되어 있던 백성)로 크게 나누었다. 계관호는 민(民)·군(軍)·장(匠)외에 참(站:驛傳)·조(:製鹽)·차(茶:栽培·摘茶)·유(儒)·승(僧)·도(道)·회회(回回:이슬람)·야리가온(그리스도교)·음양(陰陽)·의(醫)·복(卜) 및 공과부담(公課負擔) 종교와 전문업종에 따라 세부적으로 구분하였다. 이 가운데 민호(民戶) 즉 농민 가족의 부담이 가장 무거워, 화북에서는 세량(稅糧:田租)과 과차(科差:銀 또는 紙幣 및 生系稅와 그 밖의 夫役)를, 강남에서는 하세(夏稅:華北의 科差에 해당)와 추량(秋糧:華北의 稅糧)이 부과되었다. 군호(軍戶)에는 군역(軍役)을, 장호(匠戶:수공업 기술자의 戶)에는 장역(匠役)을, 참호(站戶)에는 역전(驛傳)을 과차(科差) 대신으로 부과하였고, 세량에 있어서도 민호보다 적었다. 또한 유·승·도나 그 밖의 종교인은 특히 우대하여 과차면제의 특혜를 베풀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良民層:평민층)에 속하였으나 이 아래에 구구(驅口)라 불리던 노예층이 있었다. 이들은 오랜 전란의 결과로 생긴 계층으로, 이들 노예층의 증대는 양민층의 호구를 감소시키는 것이어서 정부당국은 공과부담자를 증가시켜야 할 필요성에서도 이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흡수하려 하였다. 이상 각종 민족사회를 호구상으로 살펴보면 몽골·색목인층 등 최상층은 40∼50만 호(200∼300만 명)에 불과하였던 데 비해 한인(漢人)은 200만 호(1,000만 명), 남인은 이보다 많은 1,200만 호(6,000만 명)에 이르러, 지배민족층은 피지배민족사회로부터 큰 압박감을 받았기 때문에 원나라 조정은 한인·남인의 사회적 진출을 억제하고자 이 네 개의 종족사회에 법제적인 차별을 두었다. 즉 임관(任官)이나 형법의 적용에 있어서는 몽골인을 제1계층으로 해서 우대하였고, 그 다음 색목인·한인·남인의 순으로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 또한 원나라에서는 한인·남인에게는 무기의 휴대·소유도 엄금하였다. 원나라의 경제정책은 중국 역대왕조들의 중농적(重農的) 시책과는 달리 현저한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경제시책을 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쿠빌라이칸은 유자(儒者)의 견해를 존중해서 권농정책(勸農政策)을 취하여 관찬(官撰)의 농업기술서를 민간에 배포해서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뒤 정부당국자들은 재정정책의 중심을 국내의 상업이나 국제무역의 진흥, 특히 소금·차(茶)·술 등의 전매익금(專賣益金)의 증대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상업이 성행하였던 간선(幹線)은 수도인 대도(大都)와 강남의 항저우[杭州]를 잇는 대운하선(大運河線)으로 그 선의 유역에는 많은 도시가 번영하였고, 수공업품의 생산이나 판매로 번창하였다. 북서쪽은 육상으로 대도에서 몽골초원을 거쳐 톈산남로[天山南路] 또는 톈산북로로 이어졌고, 남동(南東)은 항저우에서 해로(海路), 경원(慶元:寧波)·천주(泉州:福建)·광둥[廣東]으로 통하였고, 다시 남해항로로 이어졌다. 이처럼 원나라의 국내 상업로는 당시의 유라시아 대륙을 한 고리로 하는 국제무역선에 직접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역사상 유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원나라는 교초(交)라 불리던 정부 신용의 지폐를 발행하였다. 이에는 중통초(中統)와 지원초(至元)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여러 액면표시의 지폐가 다량으로 발행되어 중국전역에서 유통되었다. 그러나 해외무역에서는 모두 은전(銀錢)에 의한 거래를 하였다.
【문화·사상】 몽골인들은 원래 샤머니즘의 신봉자로서 문자를 갖지 않고, 따라서 문헌(文獻)도 갖지 않아서 그 풍부한 구비전승(口碑傳承)을 기록할 방도를 몰랐다. 그러나 그만큼 다른 고도의 문화를 지닌 민족과 접촉을 하였을 때에는 그 종교·문화·습속에 대해 극히 관대하였고, 오히려 기꺼이 이를 수용하였다. 그들의 문학에 있어서는 위구르 문자나 파스파 문자의 창제로써 그들의 구비문학(口碑文學)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어 오늘날에도 전하여지는 《원조비사(元朝秘史)》와 같은 일대 걸작품도 나왔고, 중국 고전(古典)을 몽골어로 번역하게도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유교가 쿠빌라이칸의 열성적인 장려로 번성하여 특히 주자학이 풍미하였고 이 가운데 화북의 허형(許衡)·유인(劉因), 강남의 오징(吳澄)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 도교(道敎)는, 화북에서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존경을 받던 장춘진인(長春眞人) 계통의 전진교(全眞敎)가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강남에서는 태일교(太一敎)·정대도교(正大道敎) 등이 이와 맞섰다. 불교는 원나라의 황실, 몽골인 귀족층의 열렬한 비호 아래, 티베트로부터 도래한 라마교가 번영하였고 그 밖에는 특히 선종(禪宗)이 교세를 떨쳤다. 그리스도교는 몽골궁정이나 일부 왕족 사이에서 신앙되어온 네스토리우스파(派)의 그리스도교가 한때 크게 떨쳤으나, 새로이 들어온 로마 가톨릭교의 기세에 눌려 이윽고 그 안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채로운 외래종교의 활발한 활동의 그늘에서 백련교(白蓮敎)·두타교(頭陀敎) 등으로 불린 비밀결사적 민간종교가 하층민의 구심점이 되었는데, 이는 이민족(異民族)왕조인 원나라에 대한 민족적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미술】 〈회화〉 이 시대의 회화를 대충 살펴보면 송시대 양식의 계승과 그 반동으로 볼 수 있는 문인화(文人畵)의 발흥이라 할 수 있겠다. 원나라는 광대한 판도(版圖)를 영유하여 동·서의 교통은 활발하게 되었으나, 위정자들이 회화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어서인지 화가의 대부분이 송나라를 계승한 한민족(漢民族)의 피를 이었으나, 송나라 때와 같은 화원(畵院) 제도는 설치하지 않았다. 송나라 때의 화풍을 계승한 화가에는 안휘(顔輝)·왕진붕(王振鵬)·손군택(孫君澤)·장원(張遠)·하명원(夏明遠)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안휘는 인물화가로서, 당대 제일로 꼽았으며, 생생하고 괴기(怪奇)에 찬 도석인물(道釋人物)을 잘 그렸고, 채색법(彩色法)에도 새로운 기교를 구사하였다. 손군택을 비롯한 산수화가는 남송(南宋)의 대가(大家)인 마원(馬遠)·하규(夏圭)의 화풍을 본받은 데 불과하여 새로운 맛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송화(宋畵)의 영역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화풍의 경지를 연 화가로 조자앙(趙子昻)이 있다. 그의 그림 그리기는 여기(餘技)인데, 그럼에도 전문화가에는 없는 자유스러운 경지로 화필을 전개하여 뒤에 가서 문인화(文人畵)가 일어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문인화가 회화(繪畵)의 양식으로 확립되어 그 화류(畵流)는 중국화 가운데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 모체가 된 것이 원나라의 4대가이다. 그들은 오진(吳鎭)·황공망(黃公望)·예찬(倪瓚)·왕몽(王蒙)의 4명으로, 이들은 거의 같은 시대에 화단에 등단하였고, 출신지는 장쑤[江蘇]·저장[浙江]의 두 성(省)이다. 이들이 작품제작에 몰두한 곳은 모두 둥팅호[洞庭湖] 근처여서 자연 관조(觀照)를 통해 그림을 그렸으므로, 초속고매(超俗高邁)한 정신이 작품 속에 표현되었다. 문인화, 또는 남화(南畵)의 본령(本領)은 이 4대가에 의해 형성되어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밖에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린 전선(錢選)이 있다. 그는 사생(寫生)을 중시한 송나라의 원체풍(院體風)과 같이 장식적인 화면의 구성이나 채색을 연구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그의 화풍은 명(明)나라의 화조화에 계승되었다.
〈조각〉 수(隋)·당(唐)의 뒤를 이어 오대(五代)에서 송(宋)·원(元)나라에 이르는 동안 조각은 쇠미(衰徵)의 내리막길만 걸어 특히 원나라 때는 그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떨어졌다. 다만 새로 들어왔던 라마교에서 불교와는 다른 조각작품을 남긴 것이 주목을 받을 정도이다.
〈서도〉 이 시대에 있어 서도의 제1인자는 회화에서 언급한 바 있는 조자앙(趙子昻)이다. 그는 송나라의 대가인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米? 등의 반정통파에 맞서 고서(古書)를 널리 연구해서 복고주의(復古主義)를 제창하였다. 그래서 왕희지(王羲之) 이래의 전통적인 서도의 풍격(風格)을 새로이 살려 한 시대에 획을 그었다.
〈도예〉 원나라의 도예는 작품도 적고 문헌자료도 아주 적어서 그 실정을 밝히기는 어렵다. 단지 송나라에 이어져 장시성[江西省]의 징더전요[景德鎭窯], 저장성[浙江省]의 룽취안요[龍泉窯], 허베이성의 치저우요[磁州窯]가 주로 활동을 계속한 듯 한데 적은 유품을 통해서 보더라도 송에서 명으로 옮아가는 과도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어 송의 도자기가 지닌 순수한 미는 거의 없어졌다.
〈건축〉 몽골인은 유목민이어서 스스로의 건축양식은 갖지 않고 중국건축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라마교 사원 등은 인도·티베트 등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이밖에 유교·불교신도도 많아서 도관(道觀)·불교사원이 세워졌는데, 송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이은 것이 많다. 불탑은 금(金)나라 때의 팔각, 또는 육각의 차양(遮陽)이 많은 탑이 세워졌다. 또한 동·서 교통의 성행에 수반해서 이슬람교도가 이주해서 세운 이슬람교 사원도 볼 수 있다.
【고려와의 관계】 1216년(고려 고종 3) 몽골제국에 멸망한 금(金)나라에 딸려 있던 거란(契丹)의 유민들이 고려에 침입하여 이후 3년 동안 충청·전라·경상도 등 남부지방을 제외한 북방지역을 유린하였다. 이에 칭기즈칸은 ‘거란을 토멸하고 고려를 구한다’고 성명하고 몽골과 동진국(東鎭國)의 연합군을 파군하여 함경도 지방에 걸쳐 있던 거란군의 거점을 차례로 부수고 거란의 주력이 웅거한 강동성(江東城)으로 향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도 군량미를 보내어 지원하고 고려군도 합세하여 강동성에 남아 있던 거란의 마지막 세력을 평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몽골은 19년(고종 6) 개경(開京)에 사신을 보내 칭기즈칸의 조서(詔書)를 전하고 정식으로 수호(修好)를 청하였는데 이것이 몽골과의 정식 국교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몽골은 거란의 토멸이 고려에 큰 은혜를 베푼 양 해마다 상례로 과중한 공물(貢物)을 받아갔으며, 25년에는 공물을 요구하러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골의 사신이 국경지대에서 암살된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몽골은 이를 빙자하여 고려 정벌을 단행하였다. 31년(고종 18) 제1차 고려침략을 시작한 이래, 몽골은 제2차(32), 제3차(35∼38), 제4차(51), 제5차(54), 제6차(55), 제7차(57)의 침략군을 보내 고려를 유린하였다. 제1차 몽골의 침략을 받은 이듬해인 32년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쟁태세를 갖추어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조건인 국왕의 입조(入朝)와 강화도로부터의 출륙(出陸)을 들어주는 듯이 화의를 하여 철군하게 하였으나 끝내 이를 실행하지 않고 28년간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고래로 중국 역대강대국과 외교상 부득이 사대주의를 취하여 온 것은 사실이나 국왕이 친조(親朝)한 예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7차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인명·재산·문화재 등의 피해로 국토는 초토가 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마침 1258년 무신정권의 최종 집권자인 최의(崔?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되자 정세는 강화(講和)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59년(고종 46) 고려는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k:元宗) 등 40여 명을 보내는 한편 강화도의 성들을 헐어버림으로써 고려는 28년의 항쟁 끝에 몽골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몽골에의 입조를 않고 강화도의 궁성이 헐린 6월에 죽었으며, 이듬해 인질로 갔던 태자가 귀국해서 즉위하여 원종이 되었다. 그는 즉위한 이듬해에 태자 심(諶:忠烈王)을 몽골에 인질로 보내어 이로부터 고려의 왕태자는 국내의 왕이 죽어 이를 계승하게 될 때까지 몽골에 머무는 것이 상례가 되었고, 원종 자신도 64년 몽골의 요구에 따라 연경(燕京:北京)에 가서 쿠빌라이칸에게 알현함으로써 최초로 중국황제에게 친조한 왕이 되었다. 그러함에도 원종은 개경에 새로 짓는 궁궐의 핑계를 대고 강화도에서 출륙을 않다가 70년에야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이를 전후해서 무신(武臣)들을 중심으로 한 반원(反元) 세력은 한때 원종을 폐위하고, 동조세력인 삼별초군(三別抄軍)은 대원(對元)항쟁을 74년까지 계속하는 등 오랫동안 고려의 일각에서는 원나라에 강한 적대의사를 보였다. 고려는 원종 이후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 및 공민왕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 정치적으로 유례 없는 간섭을 받아 자주성을 잃게 되었고 왕실은 부마국(駙馬國:사위 나라)이 됨으로써 왕통은 혼혈화하였으며, 중앙의 정치제도는 그들의 강압에 의하여 수시로 개변(改變)하였다. 또한 함경도의 서북면에는 그들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평양에는 동녕부(東寧府)를 두어 황해도의 자비령(慈悲嶺)을 두 나라의 국경을 삼는 등 국토도 유린하였다. 더구나 원나라는 1274년(원종 15)과 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강압하여 일본을 정벌하려다 실패함으로써 고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원나라가 쇠퇴할 시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고려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자신의 몽골 머리를 고치고, 원나라 순제 황후의 오빠로서 고려에서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을 죽이는 한편, 동북면에 군사를 보내 쌍성총관부를 몰아냄으로써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등 점차 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났다. 몽골지배하의 약 1세기 동안 문화적으로는 문물과 인물의 교류가 잦아 복식(服飾)을 비롯한 생활양식 등에 몽골풍의 유행을 일으키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여 그 유풍은 조선 초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방문화와의 교류에 힘쓴 원나라의 영향으로 천문·역법(曆法)·의학·수학 등이 전래되었다.
한족(漢族)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왕조(1368∼1644). 한족의 지배를 회복한 왕조로, 뒤에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청(淸)나라에 멸망되었다. 명대(明代)는 중국이 근대화하는 시기와 직접 접속되는 시대로서 중요한 성장·변혁기였다.
【정치】 14세기 중엽, 몽골지상주의(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약 100년에 걸쳐 압정(壓政)을 펴온 원조에 항거한 한족 중 가장 큰 집단을 이루었던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朱元璋)은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뒷받침으로 세력을 펴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군웅(群雄)을 정복하고, 1368년 금릉(金陵:南京)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명’,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그가 명의 태조(太祖:洪武帝)이며, 처음으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채택하고 시정(施政)의 기본방침을 ‘한족의 부흥’으로 삼았다. 같은 해 가을에는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北京)를 함락하여 원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71년 쓰촨[四川]을 평정하여 전국토를 정복함으로써 사상(史上)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전국토를 통일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또한 외몽골로 쫓겨 북원(北元)을 세운 몽골민족의 재기(再起)에 대비하여, 다시 둥베이[東北]의 요동(遼東)을 경략하여 몽골과 고려의 연결을 단절하고, 81년 윈난[雲南]을 평정하여 몽골과 티베트의 제휴를 막았다. 88년 남옥(藍玉)을 파견해 지금의 노몬한 부근에서 몽골군을 대파하였고, 그 뒤에도 거듭 이를 경략하여 북원을 쇠망시켰다. 이와 같은 건국사정으로 그의 행정은 몽골적 요소의 제거와 한족 사회에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권력이 일부 관료에 집중하는 것을 피하여 호유용(胡惟庸)·남옥 이하 노련한 공신(功臣)들을 대거 숙청(胡藍의 獄)하였다. 또한 중앙행정관청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부를 각각 독립시켜 이를 황제직속으로 하였고, 군사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감찰은 도찰원(都察院)을 거쳐 황제에 직결되도록 하는 등 3권을 분립시켰다. 지방에 있어서도 행정은 포정사사(布政使司), 군사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감찰은 안찰사사(按察使司)에서 관장하게 하여 3권이 동등한 권한으로 중앙에 직속되었다. 이와 함께 궁중제도도 간소하게 정비하고 특히 환관세력의 팽창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송(宋)나라 이래의 황제 독재권은 더욱 강화되고 율령(律令)·병제(兵制)도 모두 이러한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당(唐)나라 때 집대성된 율령을 형식·내용 등에서 면목을 일신하여 《명률(明律)》 《명회전(明會典)》을 공포, 근대법전의 시행기까지 존속된 법전의 기초를 만들었다. 병제는 당나라 이래의 모병제(募兵制)를 개선하여 징병할 군호(軍戶)를 정하고 위소제(衛所制)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도지휘사사 밑에 전국의 요소(要所)에 위(衛)·소(所)를 설치, 여기에 군호의 장정을 분속시켰는데, 1위의 군인은 5,600명이고, 1위는 5개의 천호소(千戶所), 천호소는 10개의 백호소(百戶所)로 구성되어 이를 지휘사·천호·백호 등이 관장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제도 가운데 특징을 이룬 것은 몽골의 남침에 대비해서 태조의 아들 등 24명을 왕으로 삼아 요지(要地)에 배치하여 이를 봉건제후(封建諸侯)와 같이 대우한 일이다. 태조는 이들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일단 혈연에 따른 정권보전은 달성하였으나, 북변(北邊)의 왕들에게는 병권(兵權)도 부여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대해져서, 특히 베이징[北京]에 있던 넷째 왕자인 연왕(燕王)은 병력을 강화하여 그의 기반을 지방정권화하였다. 태조가 죽고 그의 손자 혜제(惠帝)가 16세로 즉위하여 중앙집권 강화책으로 왕들의 세력을 감축하기 시작하자 연왕은 반란(靖難의 變)을 일으켜 4년 뒤 즉위하였는데, 그가 성조(成祖:처음에는 太宗) 영락제(永樂帝)이다. 그는 대(對)몽골 전략상, 또한 전통적 적대세력의 중심지인 난징[南京]을 피해 베이핑[北平]을 베이징[北京]이라 개칭하여 천도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강남지방과의 연결을 위해 대운하(大運河)를 개수하여 대규모 조운법(漕運法)을 확립, 재정적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정난의 변’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따라 환관을 중용하여 밀정정치(密偵政治)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뒤에 화근이 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동요된 외정(外政)을 바로잡기 위해 몽골·만주를 여러 차례 공략하여 헤이룽강[黑龍江]까지 위세를 떨쳤고, 구이저우[貴州]를 내지화(內地化)하였으며, 티베트·윈난을 정복하고 안남(安南:越南)을 병합하였으나, 큰 업적은 남해의 원정이었다. 1405∼24년 사이 정화(鄭和)·왕경홍(王景弘)에게 선박 60척, 선원 3만을 주어 전후 6회에 걸쳐 인도양안(印度洋岸)에서 아프리카 동안(東岸)까지의 여러 나라에 파견하여 국위(國威) 선양과 무역진흥에 힘써 30개국에서 입공(入貢)하고 한인(漢人)들에게 해외를 보는 눈을 뜨게 하였다. 명나라의 기반은 이 2대 사이에 확립되어 15세기 중반 이후는 내정(內政)에 힘을 기울여 왕들의 세력 감축에 성공하였으나 외정에서는 수세(守勢)에 몰렸다. 1449년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부(部)의 남침으로 친정(親征)에 나선 영종(英宗)이 포로가 되고(土木의 變), 수도도 포위되어 명신(名臣) 우겸(于謙)의 책략으로 멸망의 위기는 벗어났으나, 이후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9변진(邊鎭)을 설치하여 다수의 병력을 배치하는 등 방위에 힘을 기울였다. 16세기에 들어서 즉위한 무종(武宗:正德帝)은 환관 유근(劉瑾)에게 전권(專權)을 맡김으로써 그의 치세는 내란으로 일관하였다. 다음의 세종(世宗:嘉靖帝)은 도교(道敎)를 광신하였기 때문에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한 국고를 탕진하여 재정궁핍 속에 30년간 알탄이 이끄는 몽골족에게 수도 근교까지 침탈되었고, 남동해안 지방에는 왜구(倭寇)가 횡행하여 ‘북로남왜환(北虜南倭患)’에 시달렸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신종(神宗:萬曆帝)은 명조의 퇴세를 만회하기 위해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해 내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토지를 측량·검사하고, 이미 지방에서 시행하던 전세(田稅)와 정세(丁稅)를 일원화하여 은납세법(銀納稅法:一條鞭法)을 확립해서 재정을 건전화하고 화이허강[淮河]·황허강[黃河]의 치수공사를 진행하는 등 치적을 쌓았으나 시정 10년 만에 장거정이 죽자 환관을 중용하여 내정은 다시 문란해졌다. 이와 함께 발배(拜)·양응룡(楊應龍)의 난 및 임진왜란에 따른 조선에의 원병(援兵)으로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이를 광산개발에 의한 상세(商稅)의 증수(增收)로 보충하려 했으나 그것은 단지 주구(誅求)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당시 일어난 만주족(淸)의 정토비(征討費)로서 요향(遼餉)이라는 부가세를 두었으며 초향(剿餉)·연향(練餉) 등 갖은 명목의 부가세를 징수함으로써 민폐는 극에 달했다. 한편 정계에서는 재야의 비판세력인 동림당(東林黨)과 정신(廷臣)과의 당쟁(黨爭)이 태자 책립문제로 첨예화하여 암흑의 권력투쟁 속에 내외정치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1627년 의종(毅宗:崇禎帝)이 즉위한 후 환관 위충현(魏忠賢) 일파를 제거하여 당쟁을 수습하였으나 기근농민의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산시[陝西]의 이자성(李自成) 등은 명나라의 수도를 함락, 의종이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1644). 이자성은 급거 귀환한 명장(明將) 오삼계(吳三桂)와 청군에게 토멸되고, 명의 왕들은 청군에 항거하여 화중(華中)·화남(華南)에서 싸웠으나, 61년 영명왕(永明王)이 버마에서 잡힘으로써 잔존세력의 항쟁도 종식되어 전국토는 완전히 청나라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 44∼61년 명의 잔존세력을 남명(南明)이라고 한다.
【사회·경제】 태조는 민생안정을 위해 인구과밀한 강남에서 황폐한 강북으로 농민을 이주시키고, 부유층을 수도로 불러들여 경제부흥에 주력하였다. 이로써 사상 최초로 남에서 북으로의 인구이동현상이 일어나고, 윈난·구이저우의 호구도 늘어나서 총인구는 처음으로 6,000만을 넘어섰다. 이 호구를 군호(軍戶)·민호(民戶)·장호(匠戶)·조호(戶) 등 4종류로 구분하여 각각 군사·농상(農商)·장작(匠作)·제염(製鹽)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 호구는 그 대부분이 민호로서, 주현(州縣)의 이갑제(里甲制)라는 자치조직에 편성되었다. 이갑제는 110호를 1리로 하고, 이 가운데 부유호(富裕戶) 10호를 이장호(里長戶)로,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甲首戶)로 해서 10호씩 10갑으로 나누어 1년 교대로 이장 1명과 갑수 10명이 출역(出役)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주로 맡은 일은 부(賦)와 역(役)의 공평한 부과였다. 당시 전토(田土)에는 관전(官田)과 민전(民田)이 있었고, 국유지인 관전은 조(租:소작료)를, 민유지인 민전은 세를 바쳤다. 또한 관전에는 학전(學田)·직전(職田)·황장(皇莊), 제왕(諸王) 공신의 장전(莊田) 및 둔전(屯田)이 있었으며, 둔전은 다시 군둔(軍屯)·민둔(民屯)·상둔(商屯)의 구별이 있었다. 태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토지의 실지측량을 시행하여 ‘어린도책(魚鱗圖冊)’이라는 토지대장을 만들고, 이장으로 하여금 부역황책(賦役黃冊)이라는 조세(租稅) 겸 호적대장을 만들게 하였다. 이장 및 갑수(甲首)는 이를 바탕으로 부(賦)는 전토(田土)를, 역(役)은 16세부터 60세까지의 성정(成丁)을 대상으로 부과하였다. 또한 이(里)에서 덕망 있는 연로자를 뽑아 이를 이노인(里老人)이라 하여 이민(里民)의 교화 및 쟁송(爭訟)을 맡도록 하고, 육유(六諭)라는 교육강령을 공포하여 사학(社學) 등을 세워 교육시켰다. 태조는 권농(勸農)에도 힘써 처음에 곡물의 자급생산을 주로 한 농업도 후에는 상업적 작물의 생산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목화(木花)는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면직공업은 송강부(松江府)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전국적 시장을 형성하였고, 도시에는 고급품도 출하하였다. 또한 뽕나무 재배도 장쑤[江蘇]의 타이후호[太湖] 주변과 쓰촨 등지에서 성행하였고, 면직물공업도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 등에서 발달하였다. 이 밖에 장시[江西]의 도자기, 푸젠[福建]·저장[浙江]의 칠기(漆器), 광둥[廣東]의 철기, 후광[湖廣]의 쌀, 광둥·푸젠·장시의 설탕, 푸젠의 쪽[藍] 등 지방의 특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된 것이 특징을 이루었다. 이 특산물은 북방 및 내륙의 쌀·보리·무명 등과 교환되기도 하고 수도와 구변진 등 큰 소비지에도 유통되었다. 이들 상품의 중개자는 산시[山西]와 신안[新安]의 상인들로, 이들은 16세기 후반 이후 중국의 상권(商圈)을 양분(兩分)한 형태로서 동향(同鄕)의 동업자가 결합하여 요지(要地)에 설치한 회관·공소(公所)를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활발한 상품유통에 대해서 정부는 전국 수백 개소에 세과사국(稅課司局)을 설치하여 과세를 하고, 특히 보초(寶:紙幣)의 유통을 위해 수도의 성문이나 대운하의 연안에 초관(關)을 설치하여 보초로써 징세(徵稅)하였다. 보초는 주요 통화이고 동전은 보조통화였으나, 불환지폐인 보초는 유통이 잘 안 되고 민간에서는 은(銀)을 많이 사용하여 1436년에는 조세의 은납(銀納)도 공인되어 금화은(金花銀)이 유통되기 시작하였으며, 16세기에는 요역(役)의 은납도 시행되어 은의 화폐적 기능이 확립되었다. 대외무역은 처음에 배외(排外)·국수정책(國粹政策)에 따라 거의 단절되었으나 영락제의 외정(外征) 및 정화(鄭和)의 서정(西征) 이후 여러 나라와의 조공무역(朝貢貿易)이 열려, 북변에서는 마시(馬市)·목시(木市)가 번창하였고, 남동연해에서는 닝보[寧波:浙江]·취안저우[泉州:福建]·광저우[廣州:廣東]·운둔(雲屯:越南)에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여 일본과 류큐[琉球] 및 남해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역은 모두 정부통제하의 이민족 회유책의 색채가 짙었고, 왜구의 방해도 있었으며 이익을 정부가 독점한 것 등으로 쇠퇴하였다. 15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에 대신해서 저장·푸젠·광둥 등의 향신(鄕紳:퇴직관리) 등에 의한 밀무역이 정부의 통제무역·해금책(海禁策)에 저항하면서 번영하였고, 그 저항은 중소 상인과 고용인 등에까지 파급되어 1567년 해금령을 해제하였다. 이에 앞서 17년 이후 포르투갈인(人)이 내항하여 마카오에 무역근거지를 잡고, 이보다 조금 늦게 에스파냐도 마닐라시(市)를 건설하여 극동 무역을 시작하게 되어 명의 생사(生絲)·견직물·면포·자기·철기 등이 많이 수출되고, 대신 대량의 은이 수입되었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도시도 새로이 일어나고 경제도시라 할 수 있는 것도 주로 강남을 중심으로 속출하였는데, 대도시 가운데에는 상공업 노동자만 수만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농촌에서의 부역(賦役)이 은납제(銀納制:一條鞭法)로 바뀜에 따라 부역황책(賦役黃冊)이 무용지물이 되고 이갑제도 붕괴되어 농촌노동력이 도시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이갑제에 대신해서 10호를 단위로 연대책임을 지는, 부락의 자경조직(自警組織)인 십가패법(十家牌法)이 채택되고, 이것은 다시 부락의 상호부조·수양 등을 목적으로 하는 향약(鄕約)과 함께 보갑법(保甲法)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전토(田土)는 도시에 사는 상인·관료 등 부재지주에 많이 점유되고, 전호(佃戶:소작인)들은 생존권을 위한 항조운동(抗租運動)을 전개하고 고공(雇工)·용공(傭工) 등 고용노무자와 결합해서 노변(奴變)을 일으키는 일도 많았다. 또한 도시의 수공업 노동자들도 민변(民變)이라 불린 반세운동(反稅運動)을 일으켰는데, 노변·민변은 15세기 후반 등무칠(鄧茂七) 등이 일으킨 농민반란과 함께 하층민이 농공일체가 되어 사회적 자각을 표출한 것으로 시대의 전환을 암시하는 현상이기도 하였다.
【문화】 문화정책은 처음에는 복고국수주의(復古國粹主義)·몽골색 불식에 힘을 기울였으나 뒤에는 경제발달, 서민생활의 향상, 도시의 번영, 교육의 보급에 따라 대중적 색채가 짙어졌다. 또한 유럽의 과학사조가 들어와 그 영향도 받았다. 먼저 사상면에서는 몽골인에 압박을 받은 유학(儒學)의 전통적 지위를 회복하고자 영락제 때에는 송나라 주자학(朱子學)의 부흥에 힘써 송학(宋學)을 집대성해서 《성리대전(性理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의 주석서(注釋書)를 칙찬(勅撰)하였는데, 이것은 과거(科擧)의 참고서가 되어 사상통제적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중기에 왕수인(王守仁:陽明)이 송나라 육구연(陸九淵)의 학설을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인격주의의 이상철학(理想哲學)을 주창,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뒤 그 학설은 양명학(陽明學)으로서 크게 번져 명말에는 사상계를 주도하였다. 불교는 원대(元代)에 라마교(敎)가 성행하여 침체에 빠졌으나 명대에는 국가적 보호를 받아 대장경(大藏經)도 간행되었다. 뒤에 도교(道敎)가 보호를 받아 불교는 강력한 압력을 받았으나, 침잠(沈潛) 속에 사상적으로는 활기를 띠어 교의상(敎義上) 각 종파를 통합하려는 혼융불교(混融佛敎)가 주창되었으며 또한 유·불·도 3교의 조화설도 발달하였다. 도교도 크게 성행하여 《도장(道藏)》을 집성하였고, 가경제(嘉慶帝)의 열광적 신앙에 힘입어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미신적 형태로 민간에 보급되었다. 학문 숭상의 기풍도 짙어 성조(成祖) 때는 방대한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 등 많은 칙찬서(勅撰書)가 간행되고, 민간에서도 저장[浙江] 범씨(范氏)의 천일각(天一閣), 장쑤[江蘇] 모씨(毛氏)의 급고각(汲古閣)과 같은 대장서가(大藏書家)가 나와 역대의 정사(正史)가 합각(合刻)되어 남감본(南監本)·북감본(北監本)·급고각본(汲古閣本) 등이 간행되었다. 또한 《사기평림(史記評林)》 《한서평림(漢書評林)》 《십팔사략(十八史略)》 《당송팔대가문(唐宋八大家文)》 《당시선(唐詩選)》 등 계몽서도 유행되어 학문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고, 《천하일통지(天下一統志)》 《광여도(廣輿圖)》 《직방지도(職方地圖)》 등 지리서와 각 지방지(地方志)도 많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특히 이채를 띤 것은 경세실용학(經世實用學)과 유럽 학술의 유입이었다. 전자는 양명학이 좌·우 2파로 갈라진 뒤 우파가 제창한 실학주의(實學主義)에서 나온 것으로,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 등은 공소(空疎)한 양명학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입장에서 정치와 사회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학문을 확립하였는데, 이 학파는 후에 청대에서 성행한 고증학(考證學)의 선구가 되었다. 후자는 특히 예수회의 선교사가 포교수단으로 전한 유럽의 과학이다. 마테오리치[利瑪竇]·아담샬[湯若望] 등의 천문·역법(曆法)·수학·지리학·포술학(砲術學)은 환영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포술은 청군과의 싸움에서도 활용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고 그 학문을 배운 서광계(徐光啓)·이지조(李之藻) 등 지식인들은 재래의 학문이나 종교에 자극을 주었다. 서광계의 《농정전서(農政全書)》 《기하원본(幾何原本)》,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 송응성(宋應星)의 농공업을 도해(圖解)한 《천공개물(天空開物)》, 조사정(趙士禎)의 총포구조를 기술한 《신기보(神器譜)》 등은 모두 유럽 과학의 많은 영향을 받은 저서이다. 또한 리치가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소개하자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믿고 있던 한족에게 미지의 세계를 알려 줌으로써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문학에서는 복고조(復古調)의 시문, 서민적인 색채가 짙은 소설과 희곡이 특징을 보여 사회계층의 상·하 구별 없이 문화적 융합을 이루었는데, 특히 소설과 희곡은 대표적인 명대문학으로, 한(漢)의 문(文), 당(唐)의 시(詩), 송의 사(詞), 원(元)의 곡(曲)과 견줄 만하다. 이 중 소설은 문어체(文語體)보다는 백화체(白話體)의 장편(長篇)이 주류를 이루어 사대기서(四大奇書)라 일컫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 《금병매(金甁梅)》 등은 모두 명대에 완성된 것이고, 《금고기관(今古奇觀)》은 송·원·명 3대의 단편명작 40편을 집성한 것이다. 이 소설들은 모두 유·불·도 3교의 사상이 융합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희곡은 처음에 북곡(北曲:雜劇)이 성행하였으나 남곡(南曲:傳奇)에도 고명(高明)의 《비파기(琵琶記)》와 같은 명작이 있었다. 중기 이후에는 남곡의 노래양식과 악기를 통일한 곤곡(崑曲)이 만들어져 남곡은 만력(萬曆) 때 전성기를 맞아 탕현조(湯顯祖:臨川)는 당대 제일의 걸작 《옥명당사몽(玉茗堂四夢:還魂記·紫釵記·南柯記·邯鄲記)》을 만들었으며, 그 중 <환혼기>는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라는 별칭으로 후세에 전래되어 인기를 얻었다. 회화는 명대에 들어 급속히 복고운동이 진전되어 원대에 폐지된 화원(畵院)을 재건하여 궁중화가를 양성하고 화가를 우대하여 작품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특히 선덕제(宣德帝) 이후 많은 유명화가가 활약하여 마원(馬遠) 계통의 예단(倪端), 하규(夏珪) 계통의 주문정(周文靖), 후에 절파(浙派)의 개조(開祖)가 된 대진(戴進) 및 이재(李在) 등이 당시의 화단을 주도하였다. 절파의 화풍은 마원·하규의 송나라 원체화(院體畵)에다 원나라 초에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린 수묵체(水墨體)를 배합한 거친 필법으로 다룬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빈약하고 형식에 치우쳐 퇴색하였다. 한편 당초에는 화원의 후원자였던 명나라의 황제들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가의 자유를 속박하였기 때문에 화가의 활약도 점차 침체되었다. 이러한 화원의 어용화가(御用畵家)와는 달리 재야의 화가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 명대의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는데 그 중 손꼽히는 화가는 구영(仇英)이다. 그는 남송화원(南宋畵院)의 화가 진각(陳珏)을 개조로 하는 원파(院派)에 속하여 그 정통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이당(李唐)·마원·하규와 문인화가인 심주(沈周)의 그림양식을 배합하여 원파의 영역을 벗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재야 화가 속에서 문인화(文人畵)가 크게 발흥한 것도 이 시기이다. 화원이 쇠퇴하고 원파의 형식화가 굳어져 가자 이에 대항해서 문인화가들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선두에 나선 것은 심주와 그 제자인 문징명(文徵明)으로 이들은 원대의 4대가(黃公望·吳鎭·倪讚·王蒙)와 북화(北畵)의 필법을 조화해서 명대 남화를 부흥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들은 원대의 4대가에 비해 기술·기백에서 매우 뒤졌다. 가정제(嘉靖帝) 이후 17세기 중엽까지 문인화는 전성기를 맞아 많은 문인화가를 배출하였으나, 뛰어난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문징명 이후의 문인화가로는 문백인(文伯仁)·동기창(董其昌)·예원로(倪元) 등이 알려졌다. 조각은 남북조·수당(隋唐) 때와 같은 불교조각의 전통은 거의 소멸되고, 부처·보살의 조상(造像)보다는 관음(觀音)·나한(羅漢)의 조상이 눈에 띄게 되었다. 명초에는 원대의 흐름을 이어 천의관음상(天衣觀音像)과 같은 목상(木像)도 보였으나,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진츠전[晉祠鎭]의 봉성사(奉聖寺)에서 조상한 나한상(羅漢像)에 이르러서는 명대의 특색이 나타나 나한상 군상형성(群像形成)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베이징 시산산[西山]에 있는 와불사(臥佛寺)의 청동석가열반상(靑銅釋迦涅槃像)과 벽운사(碧雲寺)의 좌불오존상(座佛五尊像)을 들 수 있으나 모두 양감(量感)은 있어도 조각으로서는 생동감이 떨어진다. 도자기는 송대까지 성행한 양질(良質)의 청자·백자·천목(天目:찻잔의 일종) 종류는 쇠퇴하고, 화려한 무늬를 입힌 청화백자(靑華白磁)·적회(赤繪)·진사(辰砂) 종류를 만들게 되었다. 명초에 육조(六朝) 이래의 유명한 자기 생산지인 징더전[景德鎭]에 어기창(御器廠:官窯)을 설치하여 명대의 자기를 대표하는 명품은 거의 이곳에서 만들어냈는데, 청화백자·진사는 선덕제 때에, 적회는 가정시대에 각각 그 일품(逸品)이 생산되었다. 칠공(漆工)은 송·원시대의 기교를 더욱 발전시켜 도안(圖案)에도 산수·인물·화조(花烏) 등 변화를 보였다. 건축은 명초에 난징[南京]에 축조한 황성·궁성이 지금은 없어졌으나 이를 본뜬 베이징의 궁성이 남아 있어 현재도 베이징 경관(景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天壇)도 이 시대에 축조되었고, 불교건축으로는 부다가야 대탑(大塔)의 형식을 본뜬 금강보좌(金剛寶座)가 세워져 대정각사(大正覺寺:五塔寺)의 탑(1473 건립)이 그 유구(遺構)로 남아 있다.
【고려·조선과의 관계】 약 1세기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온 고려 조정은 명이 건국을 선포한 1368년(공민왕 17) 이후에도 원의 잔존세력 때문에 친원(親元)·친명(親明) 양파로 갈려 확고한 외교정책을 펴지 못하고 그 후 20년 동안 대명(對明) 관계는 혼미(昏迷)를 거듭하였다. 공민왕은 즉위 초에 원나라의 쇠퇴한 기미를 알고 자신의 몽골풍 머리(剃頭髮)를 고치고, 1356년에는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오빠인 기철(奇轍) 등 원나라에 붙어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죽이고, 북방의 실지(失地) 일부를 찾았으며,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등 진취적인 정책을 취하였으나 압력을 받아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9년 명으로부터 개국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오자 이를 환영하고 성준(成准) 등을 처음으로 명나라에 보내어 명태조의 성절(聖節:생일)을 축하하였고, 앞서 일시 정지한 원의 연호 지정(至正)을 다시 폐지하였다. 70년, 고려는 명의 홍무(洪武) 연호를 쓰기로 결정하고,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원과 절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이 북원(北元:1368년 이후 원을 북원이라 함)에서도 꾸준히 고려에 사신을 보내 회유를 계속하였고, 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禑王)이 즉위한 뒤 정권을 장악한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친원(親元)으로 급변, 이 해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은 고려의 호송관 김의(金義)에게 살해되고, 북원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는 등 고려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날로 강성해가는 명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어 고려는 명·북원에 등거리 외교로 대처하다가 85년에 이르러 명사(明使)가 와서 고려와의 통교(通交:通聘)를 통고하고, 공민왕에게 시호를 추증, 왕을 책봉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는 정착되었으며, 87년에는 원복(元服)을 폐지하고 명제(明制)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착된 양국관계도 수년 후 고려왕조의 붕괴로 끝났다. 92년 조선왕조를 세운 이태조는 즉위 직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 자격으로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고 또 국호의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국호와 국왕의 칭호는 허락하지 않았다. 93년 태조는 말 9,800필을 보내고 고려 때 명으로부터 받았던 고려국왕의 금인(金印)을 반환하였으나 명은 여진(女眞) 및 세공(歲貢)문제 등을 이유로 조선국왕의 인신(印信)을 쉽사리 보내 주지 않다가 태종이 즉위한 1400년에 조선국왕의 고명(誥命:왕위승인문서)과 인장을 보내와 대명(對明) 외교관계는 조선왕조 수립 후 8년 만에 정상화되었다. 1408년에는 이태조가 죽자 명은 고려 공민왕 이후 처음으로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를 보내와 이후 조선은 역대의 국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명에 주청(奏請)하여 ‘책봉(冊封)’이라는 승인을 받았고, 국왕의 사후에는 이를 고하여 시호를 받는 것을 정례화하였다. 또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국가의 주요 대사를 보고하여 그 의견을 듣는 등 ‘사대(事大)’ 형식을 취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내정·외교에 근본적인 제약이 없고 자주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종주·종속관계도 아니고, 명은 명목상 종주적 위치를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명에의 세공문제(歲貢問題)는 처음에 금 150냥, 은 700냥의 과중한 부담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다른 토산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다가 29년(세종 11) 이를 면제하고 우(牛)·마(馬)·포(布)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체로 이후부터 조선과 명은 경제·문화의 교류가 본궤도에 올라 그 후 200년간 별다른 변동 없이 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외교에 있어서도 명나라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수시로 사절(使節)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원단(元旦)에 보내는 정조사(正朝使), 황제부부의 탄일에 보내는 성절사(聖節使)와 천추사(千秋使), 동지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등 정례적으로 연 4차 사행(使行)을 보냈다. 이 밖에 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使)·진하사(進賀使)·진위사(陳慰使)·변무사(辨誣使) 등을 수시로 보냈는데, 사행일행은 40여 명이 공인된 인원이었다. 이 사행에 따르는 조공은 일종의 공무역(公貿易)으로 예물과 답례물 형식으로 물물 교환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사행일행이 가지고 간 물화에 의해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하였는데, 북경에서는 조선사신이 머무는 회동관(會同館)이, 서울에서는 명사가 머무는 태평관(太平館)이 사무역의 중심지였다. 명에서 제정한 명률(明律)은 조선 초에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라는 이름으로 번역[吏讀文]되어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경국대전》의 <형전(刑典)>을 운용하는 데 그 해당조문이 없을 때는 456개조로 되어 있는 《대명률》의 <형률>을 적용하도록 하는 등 법률운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국초부터 특히 해마다 명나라로부터 많은 서적을 구입하고 이를 재간행하여 그 문화를 수입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명의 견포(絹布) 등 고급물품을 들여와 사치풍조를 조장하고 국내의 생산을 위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명 관계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무엇보다도 조선의 임진왜란 때 명이 3차의 원군(援軍)을 파병하여 조선을 도왔다는 사실이다. 명은 이 무렵 말기적 증세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도처에서 반란이 일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조선원정을 단행하여 경제적 부담이 막대하였고, 이 틈에 만주의 청세력은 더욱 팽대해져 조선은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국난을 겪게 되고 명나라는 청나라에 멸망되었다.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 중국의 근대사는 이 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정치과정의 개관】 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건주(建州)·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나라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강[遼河]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皇太極:太宗]는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1627·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部)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새(璽)를 얻음으로써 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講和),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 태종의 아들 순치제(順治帝)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후베이[湖北]로 몰아내 궁사(窮死)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복왕(福王)·노왕(魯王)·당왕(唐王)·계왕(桂王) 등 구왕족 소위 남명(南明)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는데, 농민군을 적대시하여 제휴하지 않았으므로 그 명운이 짧아 대세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청조의 중국 통일에 있어서의 적은, 중국 정복에 협력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3번(三藩)이었으며, 수년에 걸친 3번의 난의 진압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최후의 유신(遺臣) 정성공(鄭成功)의 자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는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에 이르러 비로소 전중국을 통일하였다. 더구나 강희제는 1689년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써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제국이 동진(東進),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 간간이 분쟁이 일던 조선과의 경계도 정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1712). 또 계속되는 옹정(雍正)·건륭(乾隆)의 3대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중가르부(準部)를 토벌하고 이에 따라 칭하이[靑海]의 속령화(屬領化)와 티베트 보호와 평화를 촉진시키면서 1759년에는 중가르부·위구르(回紇:후의 新疆省)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이 3대에 걸쳐 청왕조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조형(祖型)이 되는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확립함과 아울러, 동아시아 거의 전역을 그 위령(威領)하에 두었고, 내정의 충실에도 힘입어 그 극성기(極盛期)를 가져왔다.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아편전쟁), 프랑스·러시아·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유학생·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행정】 뒤떨어진 소수민족이었던 만주인이 광대한 중국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민족을 개병(皆兵)으로 만들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재래 중국사회의 계급지배 위에 타고 앉아 그것과 기본적으로 유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8기의 병제와 중요한 관직에 있어서의 만한병용(滿漢倂用) 정책을 제외하고는 청나라는 명왕조의 관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우선 중앙에 최고 정무기관인 내각 대학사(內閣大學士), 그 집행기관인 6부·5시(寺) 및 감찰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을 두어 각각 황제 직속으로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중가르부 토벌 때에 용병의 신속과 군사기밀 보장을 위해 내각의 실권자를 선발, 군기처(軍機處)가 신설되자 실권은 그 곳으로 넘겨졌으며, 건륭 초기에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군사·국무의 최고 권한을 겸유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번원(理藩院)이 신설되어, 몽골·신장[新疆]·시짱[西藏] 등 소위 번부(藩部)의 일을 관장하였다. 서양 제국과의 교섭도 당초에는 그 밑에서 조공국(朝貢國)과 같은 대우로 전락했으나, 말엽에 이르자 업무의 확대와 제국의 압력에 따라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설치되었고, 곧 이어 1901년에는 외무부로 승격하였다. 말기 몇 년 동안에는 이 밖의 관제개혁도 시행되었으나, 만인(滿人) 중심의 집권주의는 한인(漢人) 관료의 이반을 초래하여, 오히려 붕괴를 재촉하기만 하였다. 지방 관제에서는, 최고 행정구획인 성(省) 밑에 부(府)가 있고, 부는 다시 주(州)·현(縣)·청(廳)으로 나누어졌으며, 별도로 성 직속의 주·청이 있었다. 성에는 포정사(布政使)·안찰사(按察使)가 있어 민정(民政)·감찰을 분담하였으며, 전대(前代)에 임시 관직으로 나타났던 총독·순무(巡撫)를 최고의 지방관으로서 두었는데, 총독을 1, 2개 성에 1명, 순무를 거의 1개 성에 1명씩 둔 것은 청왕조의 특색이었다. 성에는 또한 제독(提督)·총원(總員)·학정사(學政使)·도원(道員) 등이 있어서 각각 군사·교육·성 내의 업무를 분담 처리하였다. 부·주·현에는 지부(知府)·지주(知州)·지현(知縣)이 있었으며, 이들 밑에 백성은 주로 보갑제(保甲制)로 조직되어 있었다. 백성으로부터 수탈을 일삼던 정부는 커다란 역사적 변화로서 재래의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계보의 정은(丁銀)을 폐지하고, 토지의 단일체계, 즉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옹정(雍正) 초년을 계기로 거의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왕조가 전통적인 일군만민(一君萬民) 체제를 사실상 폐기하고, 기초과정에 있어서의 지주제(地主制)의 진전을 용인한, 그 위에 기초를 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은이 국가 세입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은 건륭 연간에는 거의 70 %에 달하였으나, 이에 버금가는 주요 세목인 염과(鹽課:제염업자와 그 상인에 대한 과세)·관세(關稅:통과세)의 2가지가 점차로 증가하였는데, 특히 청 말에는 관세가 현저히 늘어났다. ‘태평천국의 난’ 진압의 군비로 신설되어,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재원으로도 쓰던 이금(釐金)도 이 일종이다. 이와 같은 국가재정의 수탈을 가능케 하는 경제외강제(經濟外强制)의 기초를 이루고 이민족 지배를 지탱케 한 것은 청왕조 특유의 병제인 8기(八旗)였다. 즉 만주인을 모두 병사로서 홍(紅)·백(白)·황(黃)·남(藍) 및 그것에 테두리가 달린 8가지 기색(旗色)으로 나눈 세습적인 단체로 편성하였다. 뒤에는 만주인뿐만 아니라 몽골·한군(漢軍)의 8기까지 더하여 합계 24기(旗)로, 기적(旗籍) 20만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광대한 영토를 경략(經略)·수비하기에 부족하였으므로, 한인만으로 편성된 녹영(綠營:綠旗)을 설치하고 총독과 순무에 의해 통솔되었다. 팔기의 구성원, 즉 기인(旗人)에게는 기지(旗地)가 지급되어 경제적 자급이 배려되었다. 그러나 경작자로는 한인이 진출, 빈궁해진 기인(旗人)은 기지를 전당잡히거나 팔아넘기는 일이 많아짐으로써 8기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그 무력함은 백련교의 난에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때 민간의용군인 향용(鄕勇)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태평천국의 난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청왕조도 뒤늦게나마 연군(練軍:8기와 녹영에서 선발)과 서양식으로 편성한 신군(新軍)을 양성하였으나, 연군과 신군 사이에서 혁명파의 반란이 일어나 신해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사회·경제】 청대의 사회는 소수의 기인(旗人) 및 지배계급인 관료층(鄕紳 포함)과 피지배계급인 양민(良民:農工商 기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볼 때 관료층은 거의 모두 지주였으며, 양민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자작농(自作農)과 전호(佃戶:小作農)로 나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지주와 전호가 기본적 계층이었으며, 양자 사이의 봉건적 관계가 사회구성의 기축(基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국가 체제하에서는 지주층도 또한 지배당하는 존재이며, 관료체계 속에 파고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특권의 유무가 생겼고, 명왕조 말엽 이래의 상품화폐경제의 전개와 때맞추어 재지(在地) 중소 지주층의 몰락과 관료지주·상인지주의 부재지주로서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같은 지주의 존재 형태의 변화는 전호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킴과 함께, 원래 그것이 전호측에서 지주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들이 서로 협력·제휴함으로써 재생산 가능한 체제를 만들어냈다는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전호층의 계급투쟁, 즉 항조(抗租)의 발생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미 강남(江南) 일대의 농촌에는 명나라 말 이래로 목면·비단[絹]을 중심으로 하는 섬유공업과 기타 수공업이 발달하여, 중국의 기본 경제지대가 되고 있었는데 이에 따르는 쌀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청왕조 초에는 후난[湖南]·쓰촨[四川] 지방이 새로운 곡창지대로 등장하였다. 또 푸젠[福建]의 사탕수수 재배에 대하여 ‘만주’의 콩깻묵이 비료로서 강남·푸젠으로 이입되는 등, 각지의 특산적 상품생산을 통하여 일종의 지역적 분업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강남의 면직물은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난징[南京]목면’의 이름으로 널리 해외로도 수출되었다. 이같은 수공업은 대부분 전호층의 영세한 부업경영이었기 때문에 유통과정은 상인 자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산시[山西]상인과 신안[新安]상인의 2대 동향(同鄕)상인단은 전국 시장을 양분하여, 서로 동업조합으로서의 회관(길드)을 만들어 중간적 이익을 옹호하였다. 화폐경제의 침투와 상품생산의 전개는 전호층의 자립화를 지탱하는 한편, 농촌에 있어 새로운 무산자(無産者)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 희박한 변경으로 이주하거나, 만몽(滿蒙)의 봉금지(封禁地)를 잠식하고, 또는 해외로 이민하여 화교(華僑)가 되거나 혹은 비밀결사에 들어가 반사회적 행동을 하였는데, 그 일부는 백련교의 난을 비롯한 청나라 말의 여러 반란에서 일정한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청왕조는 처음에 엄하게 해금(海禁)하여 외국무역은 광저우[廣州]항 한 곳에 한하였고,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특허상인의 조합에 독점을 허가했다. 무역은 차·생사 수출을 주로 하는 편무역(片貿易)으로서 19세기 초에는 연간 4,500만 달러의 은이 유입되었다. 이 형세를 역전시킨 영국의 인도산 아편 밀수입은 중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는데, 아편 그 자체의 해악은 물론, 아편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의 패전에 따라 강제로 개국을 하게 된 중국에는 면제품을 비롯한 영국 산업자본의 제품들이 밀려들어왔으나, 계속 아편수입과 은의 유출은 중국 경제를 피폐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과 결합하여 놀랄 만한 경제성을 지닌 견고한 가내공업제품이 저항하였기 때문에, 산업자본의 근본 의도는 어긋났다. 그렇지만 흥륭기의 자본주의는 장기적 경쟁을 통하여 점차 중국 가내공업을 압도, 농민경영을 파괴하고 대량의 무산 대중을 낳게 하였다. 1880년대에 이르자 면제품의 수입은 결국 아편을 능가하였고 거꾸로 면화가 수출 초과로 바뀌어 쌀의 수입이 급증하는 등 무역구조는 명료하게 원료 식민지적인 형태를 나타내었다. 그 무렵, 양무파(洋務派)는 군사공업뿐만 아니라 상하이[上海]에 기기직포국(機器織布局) 등을 설치, 민수기업에도 진출하였으나 민간기업을 압박할 뿐이었다. 한편 청·일전쟁 후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간 구미(歐美) 열강의 대중(對中) 침입은 차관(借款), 철도 이권의 획득, 기업의 직접 진출의 형태로 강화되면서, 중국은 완전히 반(半)식민지화하였다. 의화단의 저항을 계기로 하여 청왕조도 겨우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취하여, 제국주의 침략과 혁명세력의 대두에 대비하였으나, 그 지배체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 지방 향신층(鄕紳層)이 앞장선 기업의 설립(방적·성냥제조 등)과 이권회수 운동은 신해혁명을 지향하여, 부르주아적 성격을 떠받치고 있었다.
【문화】 청왕조의 학문을 대표하는 것은 고증학(考證學)인데, 이것의 지나친 발달은 이민족 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청왕조가 취한 사상통제의 산물이었다. 처음에 강희제(康熙帝)는 반만(反滿)사상을 억압하고, 민심 수습을 위하여 명왕조에 이어 주자학(朱子學)을 정통적인 관학(官學)으로 삼았으며, 스스로도 여러 학문을 익히고 한문화(漢文化)에 친숙해졌으나, 명왕조 말 이래의 학자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 등 야(野)에 있으면서 반만적인 민족의식이나 정치관을 가득 담은 《일지록(日知錄)》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등을 저술하였다. 청왕조는 얼마 안 있어 그 지배가 확립됨과 동시에 이들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로 임하였으니(‘文字의 獄’, 禁書), 그로 인하여 반만사상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고염무에게서 시작되는 고전의 실증적·비판적 연구는, 고전이 지녔던 격렬한 경세(經世)의 염을 잃고 학술의 주류가 되었다. 대진(戴震)·단옥재(段玉裁)·전대흔(錢大昕)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고, 《사고전서(四庫全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의 편찬이 잇따라 이루어졌다. 고증학은 중국 학술사상의 한 정점이었다. 또한 근대과학정신에 대한 싹도 보호·육성되었으나, 곧 그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은, 도광제(道光帝) 이후 청왕조의 쇠퇴와 중국 전체의 위기 가운데서 공양학(公羊學)의 발흥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공자진(自珍)·위원(魏源)·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변법자강의 실제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문학파(古文學派)에서도 실천성을 강조하는 증국번(曾國藩)·장즈둥[張之洞] 등이 나타나서 송학(宋學)을 재흥시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동 사상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장즈둥의 《권학편(勸學篇)》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 이들은 모두 청왕조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었으나 이에 반하여 옌푸[嚴復] 등은 유럽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이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기반에 지탱된 쑨원[孫文]은 기성의 틀을 벗어난 독특한 시야에서 독자적인 혁명사상을 고취했는데, 그 사상이 민족·민권(民權)·민생(民生)으로 집약되는 3민주의(三民主義)였다. 그 내용은 다소 유동적인 것이지만 청왕조 말기 제계급의 동향과 위기의식을 가장 심각하고 포괄적으로 반영한 사상이 되었다. 청대의 문학은 원(元)·명(明)에 이어 희곡·소설의 발달이 뚜렷한데, 희곡에서는 《장생전(長生殿)》 《도화선(桃花扇)》이 2대 명작으로 손꼽히고, 소설에서는 《요재지이(聊齋志異)》 《부생육기(浮生六記)》 외에 《유림외사(儒林外史)》 《홍루몽(紅樓夢)》의 2대 장편이 당시의 사대부나 관료귀족의 생태를 폭로하여 쌍벽을 이루었다. 또 청나라 말에는 임서(林) 등을 통하여 유럽의 근대소설이 소개되어, 계몽사조의 일환을 짊어짐과 동시에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노잔유기(老殘遊記)》 《20년목도지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狀)》 등 관계의 부패를 폭로한 정치소설이 나타나 소설의 역할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미술】 청왕조 미술의 특징이 가장 명료하게 나타난 것은 회화이다. 그것은 명왕조 회화의 연장이지만, 명대뿐만 아니라 중국 4000년 회화사의 종장(終章)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것으로써, 오랜 전통을 보유한 정통파가 이민족의 정복하에서도 그대로 화계(畵系)를 바꾸어나가, 양상을 변화시키며 최후의 빛을 발하면서 지평선 너머로 꺼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 최후의 빛을 발한 화가로 석도(石濤)와 주탑(朱A)이 있다. 이들은 명왕조의 왕실 출신으로, 명왕조 멸망 후 출가하여 선승(禪僧)이 되었으나 마음속에 불타는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화필을 구사, 기성 화가와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독특한 중국 문인화의 예술을 쌓아올렸다. 이들과 같은 시대인 청초(淸初),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휘(王)·왕원기(王原祁)·오력(吳歷)·운수평(5壽平:南田) 등 소위 4왕오운(四王吳5) 등은 한 파를 형성하고 당시 화단을 이끌었는데, 석도·주답에 비하면 형식의 틀에 얽매여 예술적 감동은 적다. 청왕조 화원(畵院)은 궁정화가를 거느리고, 양식에 통일이 없이 송원화(宋元畵)·남화(南畵) 혹은 서양화까지 끌어들였으나 화단(畵壇)의 구석으로 밀려난 듯, 권위도 실력도 없었다. 중기에 이르자 상업도시 양저우[揚州]에 문인화를 전문으로 하는 일단이 나타나 남화의 전통을 이어 개성의 표현에 주력, 이단적인 존재로서 주목을 받았으나 너무 주관에 치우쳐서 신경지를 개척하지는 못하였는데, 화암(華,:新羅山人)·김동심(金冬心)만은 확실히 별격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청나라 초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명왕조 판화의 흐름을 받은 금릉(金陵:南京)의 출판이지만, 금릉판화가 청대에 와서 쑤저우[蘇州]로 진출, 훌륭한 판화의 성행을 보게 되자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영법(陰影法)을 받아들여 서민예술로서 뿌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청왕조 공예의 대표는 도자기인데, 강희·옹정·건륭의 3대, 백 수십 년간에 징더전요[景德鎭窯]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일품으로서 서유럽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다. 칠공예(漆工藝)로는 건륭·가경(嘉慶) 연간에 궁정 용구로서 대소 갖가지의 제품이 만들어졌으나 명왕조 작풍(作風) 답습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기교를 부리고 의장(意匠)도 부질없이 번거로운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인간의 재능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섬세한 기법으로 정성들여 만든 칠공예품은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진중히 간직되었다. 그 밖에 중국 특산의 옥(玉)이나 비취(翡翠)를 가공, 옥기와 세공물을 만들었으며, 이와 관련 있는 것으로는 유리를 재료로 한 화병·공기·향로 등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건륭유리[乾隆硝子]’라 불리는 작품은 특히 유명하다.
【한국과의 관계】 한반도 북변에 할거하면서 17세기 초 중국 본토에 진출하여 통일왕조 청(淸)을 세운 여진은 조선 개국 초부터 북방개척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정부의 가장 부심(腐心)거리로 등장하여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책을 써서 이들의 조공(朝貢)·귀화(歸化)를 권장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노략질하는 동기의 하나가 생활 필수품의 결핍에 있음을 감안하여 함경도의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바꾸어 가도록 하였으며, 여진 추장들에게는 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비롯하여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 군직(軍職)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청을 일으킨 건주여진은 1467년(세조 13)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정벌을 당해, 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가 살해되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힘이 만주에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조선 선조가 의주(義州)에 피란하였을 때 건주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그 속셈을 알 수 없어 거절하였다. 그 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태종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36년(인조 14)에는 다시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종래의 수직 또는 수평 관계는 전도(顚倒)되어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선은 약 250년간 해마다 정기·부정기적으로 사절과 조공품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하였으나, 조선은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체로 독자성을 유지하여 청나라의 종주국 행세는 극히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양국 관계도 별 어려움이 없이 무난하게 보냈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조선에 앞서 개국한 청나라는 조선이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쇄국의 둑이 무너지자, 82년(고종 19) 조선과 미국의 통상을 권유하고 조미·조독 수호통상조약을 돕는다는 구실로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이 군함을 끌고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함 3척에 4,500명 병력을 끌고 와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였고,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독일인 묄렌도르프 및 마건충 등을 조선 정부의 정치·외교·세관 등의 고문으로 앉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일 양군이 충돌해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자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주조선 총리로 임명해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간섭하는 등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청나라는 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협력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일본과 충돌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조선은 96년 250년간 사용하여 온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을 연호로 사용함으로써 최초로 자체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더욱 일어 당시의 학자는 물론 일반 민중에까지 뿌리깊이 스며들었는데, 학자로서는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그 극에 달하였다. 이는 중국 본토의 ‘중화(中華)’만이 문화·가치이고 일본·베트남·거란·몽골·흉노 및 여진[淸]은 야만의 ‘이(夷)’이니 비문화·비가치(非價値)라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의 소산이어서, 중국 변두리의 오랑캐 여진족이 형성한 청나라의 문화는 배척되고, 주자학(朱子學)만이 국가사회 유지의 규범으로 정치와 결합되어 숭상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형식적·관념적·배타적인 면만이 강화되어 학문으로서의 자유로운 비판을 거부하자, 그 반동으로 실학(實學)이 일어났고, 영조·정조 때에는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박학(樸學)이 일어나서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청나라를 경유하여 서학(西學:유럽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이 유입되어 과학기술과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전성기를 맞이한 강희∼건륭 연간(1662~1795)에 부연사(赴燕使) 일행에 끼어 청나라의 물질문명을 보고 돌아온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은 청나라의 문화를 들여와 문화를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키자는 ‘북학(北學)’운동을 벌였다. 이와 같이 청나라의 근대문화는 조선의 학자들을 자극하여 그 고증학적 방법과 과학사상을 바탕으로, 역사학·지리학·언어학·금석학(金石學) 및 천문학·지도제작 등에 많은 역작이 나왔고, 이와 같은 학문의 방법은 백과사전파에도 영향을 끼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가 편찬될 정도로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