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 #4
광한루원 연못 앞에 있는 완월정
이곳에서 춘향제와 춘향 선발전이 열린다.
삼신산의 영주(한라산),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중 방장에 위치하고 있는 “방장정”은 세련된 건축양식보다는
소박한 멋을 살린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방장은 전라감사 송강 정철이 삼신도를 조성함에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방장정이 세워진 시기는 1963년부터 시작된 광한루원 확장 정화계획에 따라
당시 남원군수의 창안으로 도편수 이한봉이 건축하였다.
보물 제281호인 광한루
조선시대의 재상 황희가 남원에 유배가서 1418년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누를 지어 광통루(廣通樓)라 했는데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증축했고, 1444년(세종 26) 전라관찰사 정인지(鄭麟趾)에 의해서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다.
비석군
광한루원 한편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는데 이 비석들은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남원 시내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것으로
관찰사,부사,어사들의 사적비와 선정비로 개발로 인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옮겨놓았다고 한다.
광한루는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 중 하나이다.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광한루란 말은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의 이름인 광한전(廣寒殿)의 '광한청허루'(廣寒淸虛樓)에서 따온 것이다.
1461년 신임부사인 장의국(張義國)이 요천강(蓼川江) 물을 끌어다 연못을 조성하고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화강암과 강돌로 축조하여 월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84년 송강 정철에 의해 수리될 때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연못 속에 축조하므로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과 같은 선경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것을 1638년(인조 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춘향전에 의해 많이 알려졌다.
인공정원 속에 건립된 대표적인 누인 광한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 팔작지붕의 이익공계(二翼工系) 다락집이다.
지금은 동쪽에 3칸의 부속건물이 붙어 있고, 북쪽에 팔작지붕을 중첩한 3칸의 계단을 두어 4면의 모습이 모두 약간씩 다르다.
아래층의 기둥은 둥근 석주이며 의장효과를 위해 모서리에는 네모난 석주를 세웠다.
이익공계의 공포이면서도 쇠서와 세부기법에서는 다포계의 양식을 보인다.
광한루 앞에 놓인 자라돌
수궁가에는 자라와 토끼가 나오는데 자라는 죽음을 무릅쓰고 토끼의 간을 구하러 육지로 나오는 충신의 상징이다.
광한루원의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다가
칠월 칠석날 단 한 번 만난다는 사랑의 다리 ‘오작교’를 연못 위에 설치하였는데,
이 돌다리에는 4개의 무지개 모양의 구멍이 있어 양쪽의 물이 서로 통하게 되어 있는, 한국 정원의 가장 대표적인 다리이다.
선조15년(1582)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 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오작교
일 년에 한 번, 음력 칠월칠석날 만난다는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