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은혜(회심 준비)론은 개혁파 정통 교리다.
노승수 (2023.01.21.03:29)
선행 은총을 종교개혁기 가톨릭 신학이거나 알미니안 신학인 줄 알지만, 그 역사는 교부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터툴리안은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의 선행 은총으로 참된 회개에 이른다 했으며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먼저 시작하신다는 의미로 선행 은총을 설명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암브로시우스, 크리소스톰과 같은 교부들 글에서도 선행 은총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교부들은 ‘신인협동설’에 가깝게 이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선행 은총이 본격적으로 설명된 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부터다. 어거스틴은 선행 은총 교리를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발전하게 했다. 그는 펠라기우스에게 보내는 두 편지에 ‘선행 은총’과 ‘후행 은총’을 주장했다. 그가 두 은총을 주장하기 위해 인용한 성경은 시편 59편 10절 “내 하나님께서 (앞서가셔서, prevenient)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와 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다. 시편 59편 10절 “앞서가셔서”라는 구절이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돼 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앞서가셔서”라는 구절로부터 ‘앞서가는 은총’의 개념을 확보했고, 23장 6절 “정녕 나를 따르리니”를 기반으로 ‘뒤따르는 은총’ 개념을 주해적으로 밝혔다. 그는 하나님의 선행 은총 주체를 성령으로 봤으며 “성령의 사역은 불가항력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선행 은총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교리는 개혁파 기원을 두고 있다. 어거스틴이 사망할 즈음,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후에도 그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 논쟁은 어거스틴 사후에도 계속되다가 529년에 이르러 오렌지 회의에서 해결을 보게 됐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사항에는 명백하게 펠라기우스와 반펠라기우스를 정죄했다. 로마교 천주교의 반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에서 말하는 선행 은총은 부분 타락한 인류가 스스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일반 은총을 의미하며 웨슬리가 말하는 선행 은총은 전적 타락한 인류를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시는 특별 은혜를 말한다.
① 로마 천주교: 10 (타락 이전) - 9 (부분 타락) = 1 ( 자력 구원 가능성: 선행은총)
② 칼뱅과 개혁파: 10 (타락 이전) - 10 (전적 타락) = 0 (완전 무능력)
③ 웨슬리: 10 (타락 이전) - 10 (전적 타락) + 1 (선행은총) = 1 (응답할 능력)
그럼 개혁파는 선행 은총을 말하지 않을까? 어거스틴의 맥락은 “자력으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펠라기우스 구원론은 ‘자연인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은혜의 선행先行 없이 스스로 자연법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 가톨릭은 ‘선행 은혜로 믿음을 주시고 이후에는 순종의 공로로’라는 구조가 된다. 그나마 믿음 역시 전적 타락이 아니기에 거기에 반응하는 것 역시 은총에 반응은 자원함이다. 알미니안에게 선행 은총은 보편 은총이다.
개혁파가 중생과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기에 ‘준비’는 타락한 사람이 은혜받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부응하기 위해 준비될 필요가 있고 이것은 어거스틴의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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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 노승수 목사님 담벼락에서 옮겨옵니다. 제목은 제가 지었습니다.
윗글에서 “알미니안에게 선행 은총은 보편 은총이다.” 뒤에 ‘그러나 개혁파에게 선행 은총(준비 은총)은 특별 은총이다.’는 문장이 있다면, 이 글은 ‘준비 은혜라는 과정이 있는 단회 순간 중생 시 회심’의 순중론이 아닌 ‘두 번 순간 중생’을 주장하는 연중론입니다. 즉, ‘한 번 순간 중생(수태: 초기 중생) 뒤 거짓의 일반 회심(열 달 임신 기간)과 임신 기간 뒤 또 한 번 중생(출산: 완전 중생) 시 참된 회심’을 주장하는 연중론의 글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회심의 성격>1)에서 한국 교회 연중론 우장 노승수 목사님은 ‘리차드 멀러 {신학사전}’에 적힌 “준비 은혜(preparing grace)를 “특별 은혜”라고 주장하셨는데, 노승수 목사님이 윗글을 ‘개혁파에게 선행 은총(준비 은총)은 특별 은총이다.’를 염두에 두고 쓰셨다면, 윗글은 <회심의 성격> 연장 선상에 있는 연중론의 글입니다. 그러나 개혁파의 준비 은혜를 보편 부르심(외소外召)에 해당하는 일반 은혜로 여겨 윗글을 쓰셨다면, 윗글은 ‘준비 은혜라는 과정이 있는 단회 순간 중생 시 회심’의 순중론을 뜻하는 글입니다. 즉, ‘믿음의 씨를 품고 예정된 나무를 향해 가시 채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중생의 바람!’2)을 말하는 순중론, ‘준비 은혜라는 과정이 있는 단회 순간 중생 시 회심’의 순중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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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GQd/113
2)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302
…(다음에 다른 제목으로 또)…